실천을 돕기 위하여
초기 신좌파의 마르크스주의 *
이 논문의 초고를 읽고 비평해 준 Kristyn Gorton, Chris Harman, John Molyneux, Mark Thomas에게 감사 드린다. 신좌파의 기원에 관한 문헌을 읽기를 원한다면, <유니버시티스 앤 뉴리즈너>와 <레프트리뷰>의 글을 모두 http://www.amielandmelburn.org.uk/archive_index.htm에서 볼 수 있다. 고맙게도 The Amiel and Melburn trust는 이 잡지에 실린 글을 누구나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1 제2차세계대전 뒤 처음으로 사회주의자들이 노동당 정치나 스탈린주의와는 다른 독자적인 운동 건설을 도모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열렸다. 더욱이, 이 공간을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신좌파 활동가들은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빚지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민주주의적 전망을 다시 주장하는 첫발을 내디뎠다. 소련이 무너졌는데도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반자본주의자들은 모두 스탈린주의의 오염으로부터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을 구출하려고 애쓴 신좌파의 노력에 빚지고 있다. 우리는 또, 현대 영국 사회의 협소한 지평에 도전한 그들의 노력, 즉 전후 장기 경제 호황으로 상대적 번영이 도래했지만 영국 사회의 소외가 여전함을 깨달은 신좌파가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한 것에도 빚을 졌다.
1956년 신좌파의 탄생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영국 역사의 중요한 전환점이었다.2 그래서 노동계급의 무관심과 편협함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56년에 동서 냉전 양 진영의 정설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정치 위기가 폭발했다. 신좌파는 스탈린 체제와 서구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모두 비판하며 ‘사회주의 휴머니즘’ 사상을 주창했다. 이 사상의 모호함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마르크스주의에 작별을 고하는 수단으로 이용했지만, 3 ‘사회주의 휴머니즘’ 사상이 한창 득세했을 때는 스탈린주의의 질곡을 뛰어넘어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적 비판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신좌파가 등장했을 때는, 경제 호황으로 영국 노동계급이 전 세대보다 덜 급진적인 시기였다. 한편으로 고도 성장 덕분에 노동자들의 교섭력이 강해졌고 개별 산업 현장의 전투성도 높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시기의 파업들은 대체로 매우 빨리 끝나서 노동계급 내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이 고양되지는 못했다. 자본가들은 비록 파업의 압박 때문에 흔히 우경화하기는 했지만, 해마다 생산성 증가분만큼 임금 인상을 허용할 수 있었다.1956년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4 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스탈린 체제는 노동자 운동의 패배를 마치 승리인 양 둔갑시키려는 모순된 시도로서 출현했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은 분리돼,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손에서 소련 관료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스탈린 체제가 출현하기 전에는, 마르크스주의가 노동자 운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발전했다. 페리 앤더슨이 썼듯이, ‘이론과 실천의 유기적 통일’5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 유럽에서도 혁명적 격변이 일어났지만 불행히도 1923년 말쯤 이 운동은 패배하고 말았다. 이 패배 후에 소련은 정치적으로 고립됐고, 이미 내전 기간에 독자적인 사회 계층으로 바뀌고 있던 소련 관료들은 점차 자의식적 집단이 됐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1924년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론을 고안해 냈다.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소련 관료들은 일국사회주의론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를 사회주의의 승리와 같은 것으로 여겼다. 6 이런 사태 전개는 정말 중요하다. 스탈린은 자신이 구상하는 러시아의 미래를 러시아인들에게 강요한 단순한 독재자가 아니었다. 스탈린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강력한 러시아를 건설하려는 관료 집단의 계획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몇 년이 채 안 돼 스탈린주의자들은 강한 러시아를 건설하려면 1917년 혁명의 주역인 노동자·농민을 희생시켜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1924년이 소련 정치에서 중요한 분수령이긴 했지만, 마이클 라이만이 강력히 주장했듯이 핵심적 전환점은 1927~29년이었다. 이때야 비로소 1920년대 내내 구조적 위기를 겪던 스탈린주의자들이 사회주의와 “정반대인” 사회·정치 체제를 건설하면서 스탈린 체제의 최종 형태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7 세계 혁명을 촉진하려는 레닌과 트로츠키의 전략과 달리 1920년대 말 이후 스탈린은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이라는 문제를 국가 주도의 산업화 과정을 통해 해결하려 한 것이다. 8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유럽에서도 비슷한 혁명들이 성공하리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래서 1918년 7월 레닌은 “우리는 한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적 민중이 아무리 영웅적이고, 아무리 잘 조직되고 단련됐다 하더라도 그들의 힘만으로 제국주의를 전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품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제국주의의 전복은 오직 전 세계 노동자들의 공동 노력으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9 소련의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의 행동 지침이 아니라, 소련 지배계급의 행동을 사후 정당화하는 도구 노릇을 했다. 10
그러나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소련 국가를 10월 혁명의 결과로 정당화하기 위해 (조잡한)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하는 동시에, 스탈린 체제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의 용어들을 가로채 버렸다. 이렇게 해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가 썼듯이, “러시아 혁명 기간에는 레닌의 전략이 노동자·농민의 진정한 계급 이익과 염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했다.” 그러나 “1923년 이후에는 [당] 지도부의 결정이 점차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이익과 분리됐다.”이런 태도 때문에 온갖 해괴한 공식들이 나왔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국가의 사멸이 사회주의의 특징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스탈린이 왜곡해서 러시아 국가의 억압 강화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한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사멸을 지지한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지금까지 존재한 가장 강력하고 굳건한 국가 권력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강화해야 한다. … 이것이 모순된다고? 그렇다, 모순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은 우리 삶의 일부이며, 마르크스의 변증법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 때문에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은 스탈린이 마르크스의 역사적이고historical 변증법적인dialectical 유물론을 ‘신경질적histerical이고 극악무도한diabolic’ 유물론으로 바꿔 버렸다고 비꼬았다. 이런 식의 변증법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무슨 정책이든 정당화할 수 있었다.
12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 심화를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맥락에서 이해한 반면, 13 스탈린은 진보를 인간 자유의 증대가 아니라 생산력의 증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소련이 산업화되면 소련인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스탈린은 축적을 위한 축적 경향이 있는 자본을 비판한 마르크스의 주장을 왜곡해 소련의 산업화 과정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했다.
더 일반적으로, 스탈린은 주의주의와 기계적 결정론을 앞뒤가 맞지 않게 결합한 사회이론을 제시했다. 역사는 점점 퇴보하는 생산관계의 족쇄에서 생산력이 해방되는 기계적 과정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은 보편적인 진화 도식으로 환원됐다. “사회의 생산력이 변화·발전하면 이러한 변화에 의존해서, 또 그 변화를 따라 인간의 생산관계, 인간의 경제적 관계도 변한다”는 것이다.14 이데올로기는 소련의 목적에 잘 들어맞았다. 당으로 구현되고, 실천에서 스탈린의 선언으로 구현된 ‘이론’은 소련을 해방으로 안내하는 “기계 속의 유령”인 듯했다.[“기계 속의 유령”이라는 말은 현대의 언어철학자 길버트 라일이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을 경멸적으로 지칭한 표현이다. 즉, 극단적 관념론과 기계론적 유물론의 결합을 비판한 용어다. — 편집자] 나이젤 해리스가 지적하듯이, 사회이론으로서 스탈린주의는 “대중에게는 결정론을, 지도부에게는 주의주의”를 제공하는 모순된 결합물이었다. 15
이런 이론은 혁명적 실천의 논거로는 쓸모가 없었지만, 스탈린은 소련에서 자신이 하는 구실을 정당화하려면 자신의 사회이론에 행위자론行爲者論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의 기계론적 역사진화론에 관료의 활동에 대한 모델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1920년대 중반에 스탈린주의자들이 만들어 낸 ‘레닌주의’16 출판 당시 스탈린이 썼다는 풍문이 돈 이 강령 문서의 출판은 공산당의 사고가 바뀌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처음으로 공산당이 혁명적 정치에서 개혁주의 정치로의 전환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니 말이다. 이런 전략 변화를 뒷받침한 주장은 처음에는 소련에서 개진됐지만, 영국 공산당 사무총장 해리 폴릿이 더 분명히 표명했다. 그는 전후 동유럽의 ‘공산주의’ 이행이 개혁주의의 실효성을 보여 준다고 주장했다. 동유럽 공산주의를 보면 “또 다른 혁명 없이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7 구체적으로 말하면, 영국 공산당은 노동당 내 우파 지도부가 사라지면 노동당도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 변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8 이렇게 영국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는 소련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국내에서는 정치적으로 개혁주의였다.
물론 자신의 이론이 분석적으로 쓸모없다는 것은 스탈린에게는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소련 국가의 행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이게도 스탈린의 국내 정책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재앙적 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초에는 혁명적 조직들의 결집체이던 기구가 192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무기력해지고 무능해졌다. 처음에는 소련의 빈틈없는 관료적 통제 때문이었고, 1920년대 후반에는 초좌파적 노선 때문이었고, 마침내 1930년대 중반에는 신종 개혁주의 때문에 그렇게 돼 버렸다. 소련의 지도를 따른 영국 공산당도, 비록 당대의 많은 최상급 투사들을 배출하기는 했지만, 1950년대 훨씬 전부터 사실상 혁명적 조직이 아니었다. 그러나 1951년 〈사회주의로 가는 영국의 길〉이라는 당 강령을 새로 발표할 때까지 약 25년 동안 영국 공산당은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인 정치 실천을 은폐하려고 겉으로는 혁명적 미사여구를 계속 사용했다.19 불행히도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주요 세력들은 이런 도전에 직면하자 교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트로츠키는 전쟁이 파국적인 경제 위기를 동반할 것이고, 그리 되면 노동자들의 혁명 운동이 고양돼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모두 제거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유럽 각국 노동운동의 스탈린주의 지도부들과 사회민주주의 지도부들이 전후에 투쟁의 분출을 억누르는 데 성공하고, 20 세계 경제가 고도 성장기로 접어들었는데도, 세계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지도부는 틀린 게 명백한 전망을 열심히 되풀이하면서 현실을 부정하기에 급급했다. 21 물론 일부 혁명가들은 그렇지 않았지만, 1950년대 초에 이들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고,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으며, 노동운동에서 거의 완전히 고립돼 있었다.
1930년대 스탈린주의에 맞선 가장 중요한 인물은 레온 트로츠키였다. 많은 탁월한 책과 논문에서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국내외 정책과 코민테른의 재앙적인 전략들을 해부했다. 불행히도, 스탈린주의는 유럽 노동자 운동이 패배한 결과이고 스탈린의 정책들 때문에 더 많은 패배를 겪었으므로, 트로츠키가 주장했듯이 스탈린주의의 해악 자체가 좌파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즉, 패배한 사회주의자들은 고립감을 느꼈고, 그래서 소련이 히틀러에 맞설 유일한 희망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 과정의 이면에서 트로츠키의 정치적 고립이 심해졌다. 혁명적 좌파에게 객관적으로 불리한 이 상황은 제2차세계대전 종전 후 트로츠키의 주요 정치 전망이 오류였음이 드러나면서 더 나빠졌다.22 존 새빌이 설명하듯이, 1931년 노동당 정부가 실업자들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승리한 결과로 “1930년대 중반에 청년들이 노동당이 아니라 공산당을 선택한 까닭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더욱이, 공산주의 운동에서 가르치던 천박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조차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경계를 넓히고 있다는 흥분을 고조시켰다.” 23 마찬가지로, 1950년대에도 소련은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 제국주의의 지배에 맞선 유일한 희망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이때,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공산주의 운동에 이끌렸던 사람들 가운데 최상의 사람들이 진정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 체제는 서구 사회주의자들에게 분명히 매력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의 마지막 희망, 정말이지 군국주의 파시스트 체제의 위협에 시달리는 문명의 마지막 희망처럼 보였다. 에릭 홉스봄이 자기 세대의 많은 최상급 투사들이 바로 이런 이유로 당시 스탈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고 쓴 것도 납득할 만하다.1956년
24 이라며 사람들의 신뢰를 저버렸다. 수에즈 침략 과정에서 이런 행동이 노동당 좌파를 약화시킨 한편, 거의 동시에 일어난 다른 사건들은 더 급진적인 좌파가 출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었다.
1950년대 냉전 기간에 영국 공산당이 소련의 노선을 비굴하게 추종하는 한편으로, 노동당 지도부와 미국의 관계도 그와 비슷했다. 사실, 노동당 지도부의 우파적 외교 정책은 그들과 보수당 정부의 공통점 중 일부였을 뿐이다. 1954년 〈이코노미스트〉 지는 각각 노동당 정부와 보수당 정부의 재무장관인 휴 게이츠컬과 랩 버틀러의 정책 간에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며 이를 “버츠컬리즘”이라고 불렀다. 노동당과 보수당의 공조에 반대하는 흐름도 있었는데, 그 핵심은 노동당 좌파였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어나이린 베번이 지도한 노동당 좌파가 당 지도부에 반기를 들었지만, 국내 쟁점이 아닌 외교·국방 정책에 국한된 것이었다. 게다가 1955년 게이츠컬이 애틀리에게서 당수 자리를 물려받자 베번은 더는 지도부에 반대하지 않겠다고 시사했다. 베번은 곧이어 1956년 야당의 섀도 캐비닛(예비 내각) 외무장관으로서, 나세르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가 도둑질이라며, “한밤중에 경찰이나 군대를 보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국유화라면, 알리바바[이야기에 나오는 도적들]도 국유화를 한 셈”25 흐루쇼프의 목표는 소련이 서구 경쟁자들을 따라잡으려면 경제 성장을 촉진해야 한다는 스탈린의 목표와 기본적으로 같았다. 26 그러나 관료 집단이 보기에 스탈린의 방법은 1930~40년대에 매우 성공적이었음이 입증됐지만 점차 경제 성장의 지속적 필요에는 부적절한 것이 돼 가고 있었다. 소련은 자본의 시초 축적 시기를 지났고, 이제는 조방적extensive 성장 방법이 아니라 집약적intensive 방법으로 전환해야 했던 것이다. 흐루쇼프는 새로운 발전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소련 체제를 자유화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먼저, 기존 방식을 유지하길 바라는 일부 관료들이 자신의 방침에 도전하지 못하게 해야 했으므로, 이 골수 스탈린주의자[흐루쇼프]가 스탈린 비판에 가장 앞장서게 됐다. 27
1956년에는 냉전의 양 진영에서 좌파의 정치적 공간을 창출한 네 가지 사건이 터졌다. 첫째, 그 해 2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니키타 흐루쇼프가 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이 1953년 죽을 때까지 저지른 범죄의 진상 일부를 밝히는 이른바 비공개 연설을 했다.28 흐루쇼프의 연설 뒤에 정확히 그런 일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폴란드에서, 다음에는 더 극적으로 헝가리에서 지배계급의 내분으로 아래로부터 노동자 운동이 성장해 스탈린 체제에 도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이것이 1956년에 일어난 두 번째 주요 사건이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일어난 양극화·급진화는 10월과 11월에 절정에 달해 헝가리에서는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이 출현했다. 실현 가능한 대안적 지배 형태로 노동자 평의회가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29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자유화라 할지라도 낡은 지배 방식의 위기를 부를 수 있다.30 실제로, 수에즈 사태 때문에 “전후 외교 문제를 둘러싼 … 최대의 정치 활동이 분출했다.” 31 처음에 이 운동의 수혜자는 미국을 따라 전쟁을 반대한 영국 노동당이었지만, 노동당의 온건한 반전 슬로건, 즉 “전쟁이 아니라 법으로 [해결하라]”는 슬로건은 반전 시위대의 분노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32 사실, 전쟁을 비판한 노동당 간부들은 대부분 반제국주의 원칙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동맹국이 위험에 빠지고 국론이 분열됐다”는 이유로 정부를 비판했다. 33 노동당의 전쟁 반대는 오래 가지도 못했을 뿐더러 아주 온건했고 당 지도부 내에서 베번이 취한 태도 때문에, 수에즈 침공에 반대하며 급진화한 사람들이 노동당 지구당으로 대거 몰려들지는 않았다. 이 급진화한 사람들은 흐루쇼프의 헝가리 침략 때문에 당연히 영국 공산당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소련 블록이 자체 개혁을 통해 점차 민주적 사회주의 국가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던 좌파들의 기대가 옳았음을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나 그 해의 세 번째 주요 사건이 터지면서 그런 환상은 산산조각 났다. 1956년 11월 소련 군대가 개입해 헝가리 혁명을 분쇄한 것이다. 이 야만적인 군사 행동이 소련 블록에서만 일어났다면, 이 ‘사회주의’ 국가의 행동에 넌더리가 난 조직원과 지지자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서구의 극좌파들은 약해지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달에 일어난 제국주의적 행동은 소련의 헝가리 개입만이 아니었다. 바로 같은 주에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겠다며 이스라엘과 손잡고 이집트를 침공했다. 이런 함포 외교는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많은 영국인들이 두 냉전 진영 지배계급의 제국주의가 서로 닮은꼴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34 신좌파에게 확고한 정치적 견해나 합의된 의제는 없었지만, 영국에서 사회주의를 생동하는 세력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는 있었다. 신좌파는 다양한 저널(옥스퍼드 대학생들이 편집한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Universities and Left Review〉와 요크셔의 공산당 활동가이자 역사가인 에드워드 톰슨과 존 새빌이 편집한 〈리즈너/뉴리즈너The Reasoner/New Reasoner〉를 포함해서)로 그런 메시지를 구현했다. 처음에는 공산당 내 이견 그룹의 잡지로 발행되다가 당 지도부가 발행 중단을 요구하자 편집진이 이를 거절한 뒤에는 독자적인 사회주의 이론·실천 저널로 발전한 〈리즈너/뉴리즈너〉는 영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사회주의 휴머니즘 저널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스탈린이 역사는 경제가 진보하는 기계적 과정이라며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한 반면, 톰슨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은 역사 발전과 사회주의 투쟁의 중심에 현실의 인간을 놓았다.
이런 사건들에 대응하면서 영국 공산당 내의 이견자 그룹들, 학생 급진파, 노동당 좌파, 극소수 혁명적 좌파 사이에서 신좌파가 등장했다.35 비공개 연설의 정확한 내용은 그해 6월에야 공개됐지만 개인 숭배 비판이 스탈린을 겨냥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흐루쇼프의 비공개 연설에 대한 영국 공산당 내의 즉각적 반응은 당 일간지 〈데일리 워커〉에 “문의 편지가 쇄도”한 것이었다. 이 편지들 가운데 일부가 출판됐지만 당 지도부는 이 격론이 되도록 빨리 가라앉기를 바랐다. 그래서 〈데일리 워커〉의 편집자 J R 캠벨은 일찍이 3월 12일에 논쟁 종결을 선언했다. 36 그러나 당내 위기가 너무 심각해서 이런 검열 행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논쟁이 끝났다고 캠벨이 선언한 지 일주일 뒤 존 새빌은 당이 스탈린 통치기에 대한 자기 비판을 미적거린다며 날카롭게 비판한 편지를 당 사무총장에게 보냈다. 37 그리고 비공개 연설의 자세한 내용이 공개되자 이제 지도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당 내부에서 점차 커지는 것을 도저히 막을 수 없게 됐다.
〈리즈너〉는 원래 흐루쇼프의 연설에 대한 공산당 내 반향을 다루고자 발행됐다. 사실, 흐루쇼프는 20차 당대회에서 연설을 두 번 했다. 첫 번째는 개막 연설이었는데 개인 숭배를 비판하면서도 스탈린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비공개 연설에서는 스탈린을 노골적으로, 낱낱이 비판했다.38 첫 호의 논설에서 새빌과 톰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지만 … ‘마르크스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실행된 많은 것들을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들은 “〈리즈너〉는 주로 공산당원이 쓰고 공산당원을 위한 잡지다” 하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새빌과 톰슨은 “이 잡지가 최근 몇 해 동안 당내 논쟁을 제약했던 조건들을 완화하는 데 실질적 도움을 주길” 바랐다. 39 이 점이 가장 중요했다. 1956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영국 공산당의 이른바 민주집중제에 민주주의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보여 주었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에 대한 논쟁을 종결한 것은, 지도부의 관점에서는 중요했겠지만, 솔직히 터무니없는 조처였다. 공산당 강령에서 소련의 성격은 신성불가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당원들은 이른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에 대해서는 토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과연 공산당 지도부는 〈리즈너〉가 이 논쟁을 다루자 이를 제지하려 했다. 이에 대응해 톰슨과 새빌은 당 규율을 어기고 1956년 11월 〈리즈너〉 3호를 발행하면서, 당 중앙의 검열에 복종하느니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당을 떠나기로 했음을 시사했다.
그 해 7월 새빌과 에드워드 톰슨은 〈리즈너〉 첫 호를 발행했다.사회주의 휴머니즘
40 그러나 이 체제 내에서 사적 소유를 금지하고 있음에도 억압이 존속하는 것을 보면, 모든 형태의 억압이 경제적 착취에서 비롯한다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견해가 오류임을 알 수 있다고 톰슨은 확신했다. 기존 역사유물론의 “경제주의적” 모형에 반대해 톰슨은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에 인간 행위자가 있음을 다시 강조하고, 행위의 기초로서 사상이 중요함을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톰슨은 1956년의 반反스탈린주의 반란은 숨막히는 권위주의의 지배에 맞선 인간 정신의 저항인 반면, 스탈린주의 자체는 마르크스주의 원리의 취약한 부분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스탈린주의가 발전한 것은 단지 특정한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존재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 조건이 잘못된 사상이 뿌리내릴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잘못된 사상이 이제는 사회적 조건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 이 잘못된 사상은, 때때로 “정치 현상에 대한 분석을 경제적 원인에서 직접, 그리고 너무 단순하게 이끌어” 41 내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스탈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공통점인데,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아직 미숙했을 때 그들도 혁명을 살아있는 인간의 행위 결과로 보기보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충돌한 기계적 결과로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탈당하자마자 톰슨과 새빌은 〈리즈너〉의 이름을 〈뉴리즈너The New Reasoner〉로 바꿨다. 〈뉴리즈너〉의 첫 호에는 톰슨이 스탈린주의에서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을 구출하려고 쓴 ‘사회주의 휴머니즘: 속물들에게 보내는 편지Socialist Humanism: An Epistle to the Philistines’가 실렸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지구 표면의 4분의 1이 새로운 경제 구조, 새로운 사회 관계, 새로운 정치 제도로 이뤄진 새로운 사회다.”42 이렇게 “인간 노동의 창조적 요소를 부정하는 태도”가 노동계급의 “반지성주의”, “도덕적 허무주의”와 결합해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적 요소를 제거하고 마르크스주의를 스탈린주의라는 도그마에 가둬 버리는 구실을 했는데, 스탈린주의 자체는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라는 엄격한 형식의 제도로 구현됐다.” 43 톰슨은 스탈린주의라는 이데올로기의 절차적 특징은, 사실이 아니라 추상적 사상에서 분석을 시작한다는 것이라고 썼다. 게다가 이 이데올로기는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서 관료 집단으로 퇴보한 혁명적 엘리트”들의 세계관이었다.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을 가로막았고, 따라서 사회주의 투쟁을 지지한 반란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반란이 됐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와 비인간성에 맞선 반란이란 점에서는 소극적이었지만, 마르크스가 이해한 사회적 의미의 “인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이것은 사회주의 휴머니즘이었다. 즉, “다시 한 번 현실의 인간을 사회주의 이론과 염원의 중심에 놓”으므로 휴머니즘이고, “공산주의라는 혁명적 전망을 다시 확인하”므로 사회주의다. 44 따라서 톰슨은 소련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상부구조는 레닌주의에서 비롯했다고 결론지었다.
[톰슨이 보기에] 이런 약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토대/상부구조 비유를 들어 주장할 때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톰슨의 주장에 따르면, 토대/상부구조 비유는 “부적절하고 위험한 모형이었다. 왜냐하면 스탈린이 이 비유를 인간이 사회 속에서 변한다는 사상으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자로부터 독립적으로, 반半자동으로 움직이는 기계적 모형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45 톰슨은 당을 떠나며 발표한 비판적 글에서 이 문제를 얼버무렸다. 톰슨은 스탈린주의 국가가 퇴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측면에서 사회주의 국가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톰슨은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총을 쏘았다”는 사실을 슬퍼하며, “스탈린주의는 휴머니즘을 잃어버린 사회주의 이론이자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46 톰슨은 이 문제를 거슬러 올라가면 스탈린과 레닌을 거쳐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상의 약점까지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톰슨의 도덕적 비판은 마르크스 역사 이론을 더 유연하게 해석하고 레닌주의 정치 조직 형태를 거부할 것을 요구한 데서 절정에 달했다.
이런 종류의 반스탈린주의에서 드러나는 분명한 문제는 스탈린주의의 다음과 같은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첫째, 레닌이 스탈린을 낳았고 둘째, 동유럽 정권은 사실상 사회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11월 소련 군대가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를 파괴한 것은 이 두 번째 가정이 가당치도 않음을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헝가리 사태 때문에 〈리즈너〉 그룹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을 탈당했음에도47 이 책을 쓸 당시의 마르크스는 스탈린주의를 통해 알려진 기계적 숙명론자와 매우 달랐다. 1844년 수고에서 마르크스는 레닌이 나중에 마르크스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요소라고 부른 독일 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를 통합해, 사회주의는 소외를 극복하려는 노동계급의 투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향후 이론적·정치적 궤적을 예고했다. 이 세 가지가 종합될 수 있었던 것은 목적의식적인 사회적 행위로 이해되는 인간 노동이 각 요소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정치경제학자들은 사실 원하지는 않았지만 소외된 인간 노동이 가치의 본질임을 밝혀냈다. 둘째,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은 분업에 맞선 집단적 저항을 보여 줬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는 헤겔이 주장한 정신의 자기 운동을 인간의 실천으로 재해석했다. 48 스탈린이 마르크스를 우스꽝스럽게 왜곡한 것과는 사뭇 다르게,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단결 경향과 분업으로 말미암은 소외 사이의 갈등을 자본주의의 모순된 본질이라고 이해했다.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스탈린주의와 결별한 신좌파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 혁명적 핵심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톰슨이 〈뉴리즈너〉에 발표한 휴머니즘적 마르크스 해석은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에 실린 마르크스에 대한 비슷한 재평가와 잘 맞아떨어졌다. 1958년 찰스 테일러가 파리에서 마르크스의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 프랑스어 판을 들고 옥스퍼드로 돌아왔다.49 스튜어트 홀은 영국이 “사회 생활 패턴의 중대한 변화”를 겪어, 과거에 사회주의 계급의식을 형성했던 요인들이 더는 유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19세기 자본주의와 비교해 보면, 1950년대 노동자는 사회의 경제 구조 변화 때문에 “자신이 생산자라기보다 소비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생활 방식이 집단적 생산자의 방식이었다면, 최근의 생활 방식은 온갖 종류의 라이프스타일로 분화했다는 것이다. 홀의 주장에 따르면, 바로 이런 다양한 생활 방식 때문에 영국은 여전히 자본주의 국가이며, 노동계급은 “새롭고 더 교묘한 노예적 삶”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50
톰슨의 정치적 낙관주의가 헝가리의 혁명적 노동자들과 관련해 형성된 반면,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 기고가들은 영국 노동계급의 무관심에서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 1980년대 〈맑시즘 투데이〉에 싣게 될 글의 논조를 예고하듯,51 새뮤얼은 홀이 과거를 오해하는 바람에 현재를 잘못 분석했다고 지적한 한편, 에드워드 톰슨은 노동자들의 현재 상황에 대한 홀의 모형이 지나치게 정태적이라고 지적했다. 톰슨은 나중에 레이먼드 윌리엄스(홀의 주장은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책에 많이 의존했다)를 비판하게 될 것을 예고하기나 하는 듯이, 문화는 정태적인 “생활 방식”이 아니라 능동적인 “투쟁의 방식”으로 이해할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52
홀의 글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 다음 호에는 홀의 글을 반박하는 설득력 있는 글 두 편이 실렸다. 라파엘 새뮤얼은 홀이 19세기 노동계급의 상태를 신화처럼 이야기하면서 허수아비를 만들어 낸 다음, 그 허수아비와 현대 노동자들의 상태를 비교했다고 주장했다. “당시의 노동계급 공동체는 오늘날 관심을 끌고 있는 것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한 압력에 맞서 투쟁하면서 형성됐다.”53
이론에서 실천으로삶을 투쟁으로 이해하는 자신의 견해대로 톰슨은 신좌파를 위해 쓴 자신의 저작들에서 적극적인 정치적 의문들을 줄기차게 제기했다. 그러나 그는 행동을 추구하긴 했지만 신좌파 조직 결성에는 반대했다. 자신의 공산당 활동 경험에 비춰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 건설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신좌파는 현재의 유력한 정파, 정당, 지도부를 대체할 대안 정파나 정당, 지도부가 아니다. … 일단 분파주의의 길로 들어서면, 사회주의 운동의 재통합이 아니라 분열이 심해질 것이고, 운동에서 소외된 전후 세대는 더욱 소외될 것이고, 관료적 방식으로는 기존 관료 집단에 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조직은 관료 집단이 통제하겠지만, 신좌파는 관료 집단과 젊은 세대 사이의 길목을 지킬 것이다. 사실, 조직에 가입하는 것이 사회주의 지적 활동을 성취하는 최상의 방법인 것은 아니다.
55 켄 알렉산더가 쓴 이 글은 신좌파가 스탈린주의와 결별한 것에 그 나름의 한계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더는 공산당 전략의 모순, 즉 기존 자본주의 국가를 철폐하려면 민주집중제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레닌의 주장과, 사회주의로의 평화로운 이행이 동유럽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영국에서도 가능하다는 소련 관료의 주장(영국 공산당 서기장 폴릿이 반복한) 사이의 모순을 지적했다. 알렉산더는 스탈린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공산당의 전투적 개혁주의는 레닌주의 정당이 더는 필요하지 않음을 함축한다고 결론지었다. 나아가, 러시아 혁명이 스탈린주의로 퇴보한 원인이 레닌주의 정당이었으므로 민주집중제 구조를 폐기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56
이런 관점은 〈리즈너〉파가 공산주의와 결별하면서 나타났다. 흐루쇼프 연설의 반향을 둘러싸고 〈데일리 워커〉에서 벌어진 논쟁이 황급히 종결된 것을 감안하면, 〈리즈너〉 첫 호의 주요 기사 중 하나가 민주집중제를 다룬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듯했다.57 정치 조직 문제는 그리 쉽게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좌파가 단지 이론적 경향만은 아니었으므로, 신좌파의 활동은 공산당이나 노동당과 충돌했다. 이런 현상이 가장 분명히 드러난 경우가 로런스 데일리[헝가리 혁명이 분쇄당하기 직전에 영국 공산당을 탈당한 신좌파 겸 광원노조 활동가]가 파이프사회주의자동맹Fife Socialist League을 만들어 선거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때였다면, 58 핵무기철폐운동CND과 신좌파의 더 광범한 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8년 이후 신좌파 활동가들은 새로 결성된 CND에 헌신했으며, 59 CND의 시위·행진에서는 불만에 찬 많은 청년들이 영국 정부뿐 아니라 노동당이나 공산당 지도부와도 충돌했다. 60 신좌파는 CND 내에서 자신들의 사상에 대한 청중을 많이 얻었지만 그와 동시에 개혁주의의 압력도 경험했는데, 결국은 이 개혁주의 압력이 운동으로서 신좌파를 붕괴시킨다. 안타깝게도, 톰슨의 사회주의 휴머니즘은 이 문제를 다루는 데 부적절했다.
알렉산더의 이 같은 주장을 보면 톰슨이 레닌주의를 거부한 이유를 알 수는 있지만,61 실제로 톰슨은 급진적 변화가 비교적 쉽게 제도화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톰슨은 자신의 글 “혁명”에서 자기 사상의 전략적 결론을 개괄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레닌주의자들’은 다가오는 혁명의 성격을 심각하게 잘못 해석했으며, 그래서 혁명을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톰슨은 19세기가 자본이 노동에게 허용한 일련의 구조 개혁의 시대였다고 주장했다. 이런 개혁들은 자본의 자비로운 본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본의 자기 보존 본능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층에서 비롯한 개혁 압력에 밀려 자본이 조금씩 후퇴했다. 개혁주의의 약점은 개혁의 가능성을 신봉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은 분명 현실적인 것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개혁의 원인을 잘못 판단한 데 있었다. 반면에, ‘레닌주의’는 변화한 상황에 맞게 방향 전환을 하지 못했다. 특히, ‘레닌주의자들’은 전쟁을 거치며 실시된 개혁의 엄청난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개혁이 도입된 것은 1942년부터 1948년까지의 시기였다. 이런 변화 때문에 공산당과 마찬가지로 톰슨도 “영국의 평화적 혁명”을 고대하게 됐다.주류 권력자들은 아주 미묘한 세력 균형에 의존하고 있어서 우리가 … 국유화 … [부유층에 대한] 과세 … 나토 탈퇴 … 등을 단호하게 압박하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각각의 쟁점에서 선제적 발의가 반향을 불러일으켜, 생산관계, 권력 형태, 무역 협정과 동맹 관계, 각종 제도의 전면 변혁, 즉 사회주의 혁명을 촉진할 수 있다.
63 이런 주장들은 1959년 총선에서 패배한 노동당 지도부가 1960년 당대회에서 당헌 4조[국유화 강령]와 일방적 핵 군축 쟁점에 관한 투표에서 좌파에게 패배했을 때 확인되는 듯했다. 신좌파 활동가이자 나중에 노동당 정치를 매우 강력히 비판하는 책을 쓰기도 하는 랠프 밀리반드도 당시에는 “노동당이 더는 정치적 무덤이 아닐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너무 늦기 전에” 노동당을 사회주의 조직으로 전환시키는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4 나아가, 1961년에 처음 출판한 책에서도 밀리반드는 “사회주의 정치에 헌신하는 노동당의 태도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지도부가 더는 노동조합에 의존해서 그 목표를 추구할 수 없게 됐다”[1960년 당대회에서 당 지도부는 당헌 4조를 폐기하고 일방적 핵 군축을 포기하는 방침을 내놓았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것을 가리킨다. — 옮긴이]고 주장했다. 65 1960년쯤에는 톰슨도 이와 비슷한 견해로 기운 듯했다. 실제로 그는 노동당을 사회주의 정당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이미 실현되고 있다면서, “노동당이 더는 기존 사회를 통치하는 대안적 방식을 제출하는 데 머물지 않고 대안 사회 자체를 모색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66 톰슨은 신좌파가 이 과정을 독려하는 구실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당을 사회주의 정당으로 전환시키려는 자신의 낙관적 전망이 좌절한다면 “그때는 새로운 조직들이 생겨날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67 결국 1950년대 말 톰슨은 노동당을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실현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기도 하다고 인정하는 쪽으로 기운 것이다.
그런 평화적 “혁명”이 가능하다면, 영국에서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도구 노릇을 해 왔던 노동당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사회주의자가 어떤 조직에라도 가입하는 것을 반대한 톰슨의 초기 입장과 달리, 다른 주요 신좌파 활동가들은 노동당이 “여전히 영국 노동계급의 대중 운동”이고 “대립하는 경향들이 자유롭게 지도권을 다툴 수 있는 전장戰場”이므로, 사회주의자는 노동당에 가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8 사회주의적 소득 정책을 실시하리라고 생각했다. 라파엘 새뮤얼은 신좌파가 “노동당의 정책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69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와 〈뉴리즈너〉가 출판한 존 휴스와 켄 알렉산더의 《사회주의 임금 정책》이라고 말했다. 이 소책자는 조세 정책으로 소득을 재분배하고, 물가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실질 임금과 급여를 인상하기 위해 “정부와 노동조합의 동맹”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0 마이크 키드런이 신좌파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자, 71 알렉산더는 노동당이 제대로 변모해서 “정치적 압력을 충분히 받으면 정부 권력을 사용해 … 평등한 소득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좌파를 옹호했다. 72 톰슨은 언론이 자꾸 경고를 보내는 것은 부르주아 사회가 노동당 내의 사태 전개를 점차 우려하고 있다는 징후이므로 신좌파는 오히려 이런 사태 전개를 환영하고 더욱 힘을 내야 할 것이라고 해석했다. 73
신좌파의 다수가 노동당을 사회주의 조직으로 변모시키는 투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예컨대 신좌파의 지도급 인물들은 노동당 정부가 “적극적 중립주의”[비동맹주의] 외교 정책과74 1961년 당대회에서 우파가 확실히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조합의 블록투표 75 덕분이었다. 76 그러자 신좌파 지도부의 다수는 엄청나게 놀랐다. 77 그들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더는 기존의 보수적 구실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관료들이 보수적 구실을 한 것, 그것도 2년 동안 노동당 내에서 좌파가 계속 승승장구하던 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1961년의 핵 군축 투표의 반전反轉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노동당 기구의 힘, 또는 당내 승리를 조직할 수 있는 우파의 정치적 수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고 말했다. 78
중요한 것은 이런 전망이 노동당 우파의 힘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파가 자신의 세력을 동원한 1961년 당대회에서는 좌파가 맥없이 패배했다. 신좌파가 노동당의 사회주의 조직 변모 가능성을 열렬히 믿지만 않았어도 노동당 좌파의 패배가 신좌파에게 그토록 치명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신좌파는 그렇게 믿었고, 그 결과 노동당 좌파의 패배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79 이런 상황에서 신좌파의 노장 활동가들은 좌파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붙잡으려 했다. 톰슨은 처음에는 수소 폭탄에 반대하는 직접 행동의 부활에 열중하다가 게이츠컬이 일찍 죽자 1963년 노동당 당대회에서 해럴드 윌슨을 지도부로 선출하는 데 열을 올렸다. 그러는 동안, 전에 신좌파로 하여금 노동당을 사회주의 변혁의 주체로 변모시키려는 전략을 추구했다가 실패하게 만든 개혁주의 환상 때문에 이제 그들은 좌파가 패배한 상황에서조차 좌파가 승리했다고 믿었다. 윌슨이 좌파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처럼 보였고, 그 후로 신좌파는 “모든 기대를 노동당에 걸었다.” 80 실제로 〈뉴레프트〉의 새 편집장 페리 앤더슨은 객관적 상황이 전례 없이 좌파에게 유리할 때 윌슨이 싸움터에 뛰어들었다고 썼다. 그래서 앤더슨은 윌슨이 “결국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자기 해방에서 일정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81
신좌파와 마찬가지로 CND도 노동당이 일방적 핵 군축을 지지하게 만드는 일에 매달려 있었고, 이 전략에 너무 큰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1961년 당대회에서 일방적 핵 군축 정책이 표결에서 패배하자 엄청나게 실망했다. 이 패배가 사실상 CND와 신좌파의 몰락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것이었다면, 1962년 10월에 터진 쿠바 미사일 위기는 그들의 운명을 끝장내 버렸다. 이 세계적 위기 앞에서 무력한 데다, 어떻게든 전쟁은 피했다는 바로 그 사실은 “핵에 의한 인류의 절멸이 임박했다는 믿음에 5년 동안 정치 생명을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결정타였다.”혁명적 대안?
82 이런 태도와 달리 일부 주요 노동계급 활동가들과 몇몇 탁월한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1956년의 사건 후 공산당을 떠나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뛰어든 사실은 기억해 둬야 한다. 83 불행히도, 신좌파 내의 트로츠키주의를 무시하는 학술적 태도의 또 다른 원인은 클럽/사회주의노동자동맹Club/SLL이라는 영국 최대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내놓은 전망이 노동당에 대한 톰슨의 기대보다 훨씬 비현실적이었다는 데 있다. 그럼에도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클럽/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좌파를 위한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려 했고, 1956년 이후 잠시나마 그들이 종파주의와 재앙적인 정치적 전망을 버렸다면 어떤 성과를 얻었을지도 보여 주었다.
영국 신좌파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신좌파 안에서 트로츠키주의가 한 구실을 무시하는 좋지 않은 경향이 있다. 그 이유 하나는 신좌파 관련 책을 쓴 저자들의 학술적 태도, 즉 도로시 톰슨이 설득력 있게 주장했듯이, 신좌파 활동의 주요 정치와 성격을 분석하지 않고 그 이론적·철학적 차원을 강조하는 태도다.84 공산당이 혁명적 조직이라고 생각해 가입했다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탈당한 사람들이 보기에 이 책의 메시지는, 던컨 핼러스의 말을 빌리면, “가뭄에 단비”였다. 85 이 때 트로츠키주의에 이끌린 사람 중 한 명이 피터 프라이어다. 프라이어는 1956년 11월 소련 탱크가 헝가리 혁명을 분쇄할 당시 〈데일리 워커〉의 헝가리 특파원이었다. 그가 보낸 기사 셋 중 둘이 신문에 실리지 않았고 세 번째 기사가 “난도질”당하자 프라이어는 〈데일리 워커〉를 그만두었고 곧이어 공산당에서 축출됐다. 86 그 후 프라이어는 클럽이라고 알려진 영국의 주요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가입했고, 1957년 5월에 “독립적 사회주의 주간지”인 〈뉴스레터The Newsletter〉를 창간했다. 그 후 2년 넘게 발행되면서 〈뉴스레터〉는 훌륭한 사회주의 신문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실제로 〈뉴스레터〉는 클럽의 이론지인 〈레이버 리뷰Labour Review〉와 함께 사회주의 선동·선전과 지적 논쟁을 결합시키면서, 스탈린주의와 결별한 공산당 출신 사람들을 트로츠키주의로 끌어당기는 만만찮은 구심점 노릇을 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이 두 간행물을 제작·배포한 사회주의자들은 이 간행물 주위로 혁명가들을 상당수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1959년 5월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 출범할 때 이 조직은 혁명적 좌파에게 잠재적으로 중요한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잠재력은 실현될 수 없었다. 1956~57년에 혁명가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공산당을 탈당한 사람들에게 소련이 사회주의가 아닌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클럽은 이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그룹이 소극적으로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전망을 제출하는 대목에서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의 한계가 훨씬 더 분명히 드러났다.
1956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사용한 비장의 카드는 트로츠키가 쓴 《배반당한 혁명》이었다. 1936년에 처음 출판된 이 책은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강력히 논파하면서, 소련 관료 집단을 타도하고 민주적 사회주의를 재건하기 위한 정치 혁명을 호소했다.87 제리 힐리가 지도한 클럽은, 트로츠키의 파국론적 정치 전망의 토대인 경제적 분석이 역사적 현실에 비추어 논박당했다는 평범한 사실을 지적한 사람을 모조리 조직에서 추방함으로써 그런 전망을 유지하려 했다. 그래서 1950년대 초에 트로츠키의 정치 전망을 비판하고 힐리 지도부에 도전한 토니 클리프와 테드 그랜트 같은 사람들이 클럽에서 쫓겨났다. 88 1956년쯤에는 이 옛 투쟁의 자세한 내용들이 태고적 이야기처럼 들렸고, 영국 최대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클럽이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트로츠키의 명백한 도덕적 권위를 이용해서, 영국 공산당을 갓 탈당한 최상급 활동가들을 많이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클럽/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비민주적 구조 때문에, 1956년 신입 회원들이 대거 들어온 뒤에도 누구든지 힐리의 파국론적 전망에 도전한 사람은 무기력하게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59년쯤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영국에서 생존 가능한 반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 정당 건설을 약속하는 듯했지만, 89 1년도 채 안 돼 힐리는 자신의 엉터리 전망에 의문을 제기할 만큼 자주적인 사람을 모두 조직에서 추방하거나 솎아내는 데 성공했다. 실제로 1959년 가을 힐리는 〈뉴스레터〉 편집장이던 프라이어의 자리까지 차지해 버렸다. 90 그래서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 건설을 거부한 톰슨 같은 사람들이 힐리의 비민주적 방식과 비현실적 전망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를 옛날의 반反교황 — 교황과 똑같지만 거느리는 신자수가 훨씬 적다는 점만 다른 — 과 비슷한 모종의 반스탈린주의라며 손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91
클럽은 제2차세계대전 중과 그 후에 트로츠키의 주요 강령적 예측 일부가 오류였음이 드러나면서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위기에 빠졌을 때 등장한 영국의 주요 트로츠키주의 분파였다.92 불행히도, 이런 식의 주장은 사회주의 활동과 관련된 어려움을 경시하게 돼서 노동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한 장기간의 험난한 활동을 급진적 구호로 대체하는 경향을 조장했다. 실제로, 〈솔리대리티〉와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형식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십중팔구 둘의 사회주의 활동 모델은 공통의 약점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한편에서 힐리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을 무시한 채 사회주의적 지도를 일방적으로 강조했다면 〈솔리대리티〉는 이런 오류를 교정하기보다는 정반대로 뒤집는 경향이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1950년대 후반 잠시 사회주의노동자동맹으로 이끌린 많은 사람들도 ‘레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서 레닌 사상의 진정한 정수를 도출해 내려는 시도를 일절 거부하는 힐리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반발했다. 사실상 이때부터 〈솔리대리티Solidarity〉 잡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소시알리슴 우 바르바리 Socialisme ou Barbarie〉(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프랑스 잡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가 생산 현장의 노동계급 투쟁에서 거의 자발적으로 등장할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였다. 정설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이런 반발에는 민주주의라는 합리적 핵심이 있다는 긍정적 측면을 부인할 수 없지만, 사회주의노동자동맹처럼 〈솔리대리티〉도 노동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장벽을 대단히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어 1961년 〈솔리대리티〉의 지도자인 크리스 팰리스는 노동자 투쟁으로 노동계급 내에서 사회주의 의식이 성장할 가능성이 열린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사회주의 의식이 성장했다면서 “투쟁 속에서 사람들이 내리는 결론은 근본적으로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했다.93 이렇게 본다면,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은 유력한 톰슨 식의 신좌파 정치나 〈솔리대리티〉의 극단적인 좌파적 대안과 겉보기보다 오히려 공통점이 더 많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솔리대리티〉는 혁명에 대해, 톰슨은 노동당의 급진 개혁, 나아가 영국 국가의 급진 개혁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했는데, 이런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전망 때문에 그들은 모두 무기력해졌다. 스튜어트 홀이 당시의 영국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거부한 데는 나름으로 합리적 핵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터무니없는 전망으로는 홀의 물음에 설득력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이런 일은 불행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을 약화시킨 것은, 힐리의 유명한 권위주의적 개성을 제외하면, 사회주의자들이 독자적 조직을 건설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라 파국론적 정치 전망들을 고집했기 때문이다.딜레마에서 벗어나기
94 이런 모형을 통해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핵심을 제거한 스탈린주의를 비판하면서도, 톰슨의 반스탈린주의에서 드러난 약점도 지적했다. 톰슨이 스탈린 체제인 소련의 특징은 사회주의 경제 위에 억압적인 정치적 상부구조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 반면, 매킨타이어는 소련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동적이라고 주장했다. 즉,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모형은 “페이비언주의나 다른 모든 종류의 ‘위로부터 사회주의’ 교의와 정반대”라고 주장했다. 95 소련이 사회주의나 노동자 국가라는 생각을 반대한 매킨타이어는 이제 노동당에 기대를 건 톰슨의 전투적 개혁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 만일 동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면, 신좌파도 받아들인 영국 공산당의 가정, 즉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전략이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다는 가정도 약화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제 매킨타이어는 레닌의 유산을 다시 살펴보면서 ‘레닌주의’ 이데올로기에서 레닌의 민주적 지도 방식을 구출하기 시작했다. 96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뉴리즈너〉에 기고한 사회주의 휴머니즘 관련 논쟁 글에서, 톰슨보다 더 분명하게 스탈린주의와 결별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정설 트로츠키주의라는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은 채 톰슨의 국내 정치 전망을 넘어서는 주장을 내놓았다. ‘도덕적 황무지에서 보낸 메모Notes from the Moral Wilderness’에서 매킨타이어는 마르크스가 토대/상부구조 비유에서 말한 것은 기계적 관계나 인과 관계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마르크스는 헤겔의 개념을 사용해서 사회의 경제적 토대라는 “틀 안에서 상부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했다. 경제적 토대는 “그것을 중심으로 인간 관계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는 일련의 관계이고, 다른 모든 인간 관계가 발전하는 핵심적 인간 관계다.” 실제로 매킨타이어는 “토대를 창출하면서 우리는 상부구조도 창출한다. 이것은 두 가지 활동이 아니라 하나의 활동이다” 하고 썼다. 따라서 정치적 상황 전개가 경제적 원인에서 자동으로 비롯한다고 이해하는 스탈린주의 역사 발전론은 마르크스의 역사관과 아무 관계도 없다. 왜냐하면 마르크스가 보기에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핵심적 특징은 경제적 토대의 변화가 아니라 토대/상부구조 관계의 혁명적 변화”이기 때문이다.97 〈국제사회주의〉 정치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연구한 마틴 쇼조차 당시 “〈국제사회주의〉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반대쪽 극이었다. 경제 전망도 현실적이었고 노동운동 관료들을 비판할 뿐 아니라 그들의 실패를 설명할 수도 있었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비종파주의적 태도를 취했고, 모든 분야의 실천에서 노동계급의 민주주의를 철저하게 옹호했다”고 말했다. 98 쇼의 지적처럼 이러한 전망은 〈국제사회주의〉의 핵심 이론가인 토니 클리프가 정설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면서 얻어졌다.
사회주의 휴머니즘을 혁명적으로 표현한 매킨타이어는 처음에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의 주변에 있다가, 이후 1960년에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국제사회주의IS〉 그룹에 가입했다. 톰슨에 따르면, 〈국제사회주의〉는 “영국에서 가장 건설적인 트로츠키주의 경향의 잡지로, 편집진은 대부분 레프트 클럽 운동의 가장 활동적이고 (매우 환영받는) 회원들”이었다.99 클리프에 따르면, 서구와 동구권 간의 군사 경쟁은 소련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전후 호황을 지탱한 세계적 “상시 무기 경제”를 창출했고, 100 결과적으로 개혁주의의 수명을 연장했다. 101 그럼에도 클리프는 생산 현장에서 일어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 활동과 개혁주의 이데올로기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가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 국가”로 규정하고,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 주장을 일반화해서 전후 동유럽과 중국에 들어선 체제들이 근본적으로 소련과 똑같은 체제라고 설명한 반면, 클리프는 노동자 국가가 노동자 혁명 없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이런 국가들이 서방과의 군사적 경쟁 과정에 속박돼 있고, 이 국가의 생산자들이 여전히 임금노동자이므로, 동유럽 국가들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구성체로 분류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는 것이다.노동계급의 투쟁은 모두, 아무리 제한적일지라도,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높이고 의식을 성장시켜 개혁주의를 약화시킨다. “모든 파업에는 혁명이라는 히드라의 머리가 숨어 있다.” 진정하고 일관된 사회주의자의 주요 임무는 일상적 투쟁에서 얻은 교훈을 결합시키고 일반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혁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다.따라서 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달리, 클리프의 사회주의 활동 방식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운동 방식을 토대로 한 것이지만, 〈솔리대리티〉와도 다르게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한계나 노동계급 의식의 성장에서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하는 중요한 구실도 인정한다.
104 실제로 클리프의 전망 덕분에 〈국제사회주의〉 그룹은 혁명적 정치를 포기하지 않고도 홀이 지적한 노동계급의 무관심을 설명할 수 있었다. 무기 경제가 전후 호황을 지탱해 줘서 자본주의를 일시적으로 안정시켰지만, 이 호황은 모순된 것이었으므로 이 모순이 심화하면 노동계급의 무관심도 바뀔 수 있었다. 이런 관점 덕분에 〈국제사회주의〉는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나 〈솔리대리티〉의 일면적인 혁명 정치 모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 노동계급을 지향하는 토대를 놓을 수 있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에 따르면, 클리프의 마르크스주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이론 덕분에 정설 트로츠키주의보다 나은 장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소련 사회구성체의 자본주의적 특징을 서구와의 군사 경쟁으로 규정함으로써 클리프는 전후 호황을 설명할 강력한 이론적 토대를 놓을 수 있었다. 둘째, 이런 전후 자본주의 모형 때문에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을 수정해야 했고, 그 덕분에 클리프 추종자들은 “제3세계주의”라는 최악의 오류들을 피할 수 있었다. “제3세계주의”는 서구 노동자들이 자본에게 매수됐고, 반자본주의 투쟁의 중심지는 생산 현장으로부터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으로 옮아갔다는 사상이다. 셋째, 클리프의 전후 호황 모형은 서구 개혁주의의 지형 변화를 보여 주었다. 즉, 노동자들이 생활 수준 개선을 투표를 통해서가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의 자주적 활동을 통해 쟁취함에 따라 좌파 의회 정당은 점차 유효성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주의”가 위로부터 개혁주의를 약화시킨 것이다.결론
105 불행하게도, 신좌파와 CND를 등장시킨 정치적 고양기가 가라앉으면서 이런 전망도 점차 약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신좌파가 자신의 세력을 재편하고 미래를 대비하려면 사회주의 활동을 가로막는 객관적 장애물을 해명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톰슨이나 신좌파의 어떤 지도급 성원도 자신들의 패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1960년 〈뉴리즈너〉와 〈유니버시티 앤 레프트리뷰〉가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로 통합됐을 때, 톰슨은 이 새 잡지가 다양한 급진적 투쟁 간의 “상호 연계”를 강화하면서 그들의 “합류점” 구실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양한 반자본주의 투쟁에서 일반적인 사회주의 의식이 성장하도록 고무하는 것을 잡지의 목표로 삼았다.106 따라서 이 새로운 〈뉴레프트리뷰〉가 〈유니버시티스 앤 레프트리뷰〉의 전통을 이어나갔다고 할 수 있고 1964년 존 새빌과 랠프 밀리반드가 만든 〈소셜리스트 레지스터Socialist Register〉는 〈뉴리즈너〉의 전통을 계승하려 했다. 107 하지만 1기 신좌파의 실패를 분명히 이해하지 못했고, 또 자신에게 자양분을 공급할 신좌파 운동 같은 것도 없었으므로 〈소셜리스트 레지스터〉도 〈뉴리즈너〉를 매우 풍부하게 만든 행동주의적 초점을 잃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신좌파는 무너졌고, 1962년 새 편집진은 〈뉴레프트리뷰〉를 행동주의적 잡지에서 딱딱한 이론지로 바꿔 버렸다.(이 이론지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1기 신좌파의 쇠퇴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초기 신좌파의 약점과 거리를 두면서 페리 앤더슨을 중심으로 한 2기 신좌파는 이론적으로 더 일관된 홀의 정치적 비관주의를 받아들였다.108 노동당 정치나 스탈린주의에서 독립적인 사회주의 경향을 건설한다는 1956년의 꿈을 실현하는 일은 〈국제사회주의〉 그룹의 몫으로 남았다. 109 1970년 새빌은 새로운 사회주의 정당이 필요하며, 만일 〈국제사회주의〉가 “꽤 개방적인 종파 정도가 아니라 소규모 정당 비슷한 것”으로 변신한다면 그런 조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10 〈국제사회주의〉가 홀이 지적한 노동계급의 무관심을 설명하고 사회주의노동자동맹과 〈솔리대리티〉가 우스꽝스럽게 왜곡한 혁명적 정치와 〈뉴리즈너〉 식 사회주의 휴머니즘 해석을 뛰어넘음으로써 앞서 말한 변신에 성공했지만, 111 그것은 독립적 좌파가 청중을 발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신좌파가 만들어 준 덕분이기도 했다. 112
영국 좌파는 정치·산업 투쟁이 분출해서 3기 신좌파를 위한 공간이 형성되는 1968년 이후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행히도 톰슨은 스스로 1968년의 급진주의와 거리를 두었으므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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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Paul Blackledge, “The New Left’s renewal of Marxism”, International Socialism 112 (Autumn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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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좌파’의 등장은 1956년 이후 국제적 현상이었다. 이 글에서는 영국의 경우만을 다룬다. ↩
- T Cliff & D Gluckstein, The Labour Party: A Marxist History (London, 1996) [국역: 《마르크스주의에서 본 영국 노동당의 역사》, 책갈피(2008)], p257.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주의를 모종의 기계적 유물론으로 왜곡한 교과서와는 상반된다. 이와 달리 엥겔스는 사회주의 계급의식이 산업투쟁의 밀물과 썰물에 따라 기계적으로 성장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즉, 계급투쟁은 이론적·정치적·경제적으로 다양한 수준에서 일어나며 각 수준은 다른 수준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롭다. F Engels, ‘Supplement to the Preface of 1870 for The Peasant War in Germany’ in K Marx & F Engels, Collected Works vol. 23 (Moscow, 1988), p631. ↩
- 신좌파를 다룬 학술 문헌 상당수의 약점은 신좌파 정치의 이런 측면을 다른 측면보다 배타적으로 강조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L Chun, The British New Left (Edinburgh, 1993), p191; M Kenny, The First New Left (London, 1995), pp200-206; G Foote, The Labour Party’s Political Thought (London, 1997), p296을 참조. 흥미롭게도 이들은 모두 신좌파가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는 경로 구실을 했다고만 주장하면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가 사회주의 휴머니즘에 관한 신좌파의 논쟁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것은 과소평가한다. Foote는 이 주제를 다룬 최근 저작에서 이런 약점을 약간 보완했지반, 매킨타이어의 초기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논평하면서 이를 간단히 기각하는 방식으로 보완했을 뿐이다(G Foote, The Republican Transformation of Modern British Politics (London, 2006), p45). ↩
- P Anderson,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 (London, 1976)[국역: 《서구 마르크스주의 연구》, 이론과 실천(1996)], p29. ↩
- D Hallas, The Comintern (London, 1985)[국역: 《우리가 알아야 할 코민테른 역사》, 책갈피(1994)], p7. ↩
- L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 (New York, 1972)[국역: 《배반당한 혁명》, 갈무리(1995)], p32. ↩
- M Reiman, The Birth of Stalinism (London, 1987), pp119; 122. ↩
- M Haynes, Nikolai Bukharin and the Transition from Capitalism to Socialism (London, 1985), p110. ↩
- H Marcuse, Soviet Marxism (London, 1958)[국역: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비판적 분석》, 동녘(2000)], p124 ↩
- 같은 책, pp17; 128; N Harris, Beliefs in Society (London, 1968), p152. ↩
- N Harris, 앞의 책, p162 에서 재인용한 스탈린의 말. ↩
- J Stalin, Dialectical and Historical Materialism (1938) 은 http://www.marxists.org/reference/archive/stalin/works/1938/09.htm에서 볼 수 있다. ↩
- P Blackledge, Reflections on the Marxist Theory of History (Manchester, 2006), ch 2. ↩
- 이 주제에 대한 내 논평은 P Blackledge, ‘What Was Done: Lenin Rediscovered’, in International Socialism 111 (Summer 2006)을 참조. ↩
- N Harris, 앞의 책, p156; H Marcuse, 앞의 책, p121. ↩
- CPGB, The British Road to Socialism (London, 1952). 코민테른이 혁명적 정치에서 이탈한 것은 D Hallas, The Comintern, pp106; 126; 141을 참조. ↩
- J Callaghan, The Far Left in British Politics (Oxford, 1987), p163에서 재인용한 Harry Pollitt의 말. ↩
- J Gollan, Which Way for Socialists? (London, 1958). ↩
- A Callinicos, Trotskyism (Buckingham, 1990)[국역: 《트로츠키주의의 역사》, 백의(1994)], pp23-29. ↩
- I Birchall, Workers Against the Monolith (London, 1974), pp37-8; I Birchall, Bailing out the System (London, 1986)[국역: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 갈무리(1995)], p35. ↩
- D Hallas, ‘Building the Leadership’, International Socialism 1: 40 (October/November 1969). ↩
- E Hobsbawm, Interesting Times (London, 2002), p127. ↩
- J Saville, Memoirs from the Left (London, 2003), pp8-9; E Hobsbawm, Interesting Times, pp127-151. ↩
- T Cliff & D Gluckstein, 앞의 책, pp261-270. The quotation is taken from p268. ↩
- N Khrushchev, ‘The Secret Speech’은 다음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www.fordham.edu/halsall/mod/1956khrushchev-secret1.html ↩
- H Marcuse, Soviet Marxism, p140. ↩
- T Cliff, Russia: A Marxist Analysis (London, 1964)[국역: 《소련 국가자본주의》, 책갈피(1993)], pp195-204. ↩
- A Callinicos, The Revenge of History (Cambridge, 1991) [국역: 《역사의 복수》, 백의(1993)], pp49-50. ↩
- G Eley,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Oxford, 2002)[국역: 《THE LEFT(1848-2000) -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뿌리와이파리(2008)], p334. 노동자 평의회에 대하여는 다음을 참조. A Anderson, Hungary ’56 (London, 1964), pp66-72, B Lomax ‘The Workers Councils of Greater Budapest’, The Socialist Register 1976, C L R James, ‘Letter 10th February 1957’ in A Grimshaw (ed), The C L R James Reader (Oxford, 1992), p265. 헝가리 혁명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 쓴 최상의 저작은 여전히 Pete Fryer의 Hungarian Tragedy (London, 1997)이다. 더 분석적인 글을 보려면 C Harman, Class Struggles in Eastern Europe 1945-83 (London, 1988)[국역: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갈무리(1994)], pp119-186을 참조. ↩
- 수에즈 사태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J Newsinger, The Blood Never Dried: A People’s History of the British Empire (London, 2006), pp164-181. ↩
- N Harris, et al, ‘Labour and the Bomb’, International Socialism 1: 10 (Autumn 1962), p24. ↩
- J Hinton, Protests and Visions (London, 1989), p155. ↩
- P Worsley, ‘Imperial Retreat’ in E P Thompson, (ed), Out of Apathy (London, 1960), p135. ↩
- Peter Sedgwick이 신좌파를 “동호인 집단milieu”이라고 묘사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P Sedgwick, ‘The Two New Lefts’ in D Widgery (ed), The Left in Britain: 1956-1968 (London, 1976), p143. 신좌파 축에 드는 사람이 신좌파를 분석한 이 고전적 논문은 원래 International Socialism 1: 17 (Summer 1964)에 실렸던 것이다. ↩
- I Birchall, Workers Against the Monolith, p84. ↩
- W Thompson, The Good Old Cause (London, 1992), p 100. ↩
- J Saville, ‘Edward Thompson, the Communist Party, and 1956’, The Socialist Register 1994 (London, 1994), p22. ↩
- 공산당 역사학자 그룹 회원들이 신좌파 형성에서 주요한 구실을 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예컨대, B Schwarz, ‘“The People” in History: The Communist Party Historians’ Group, 1946-1956’, in R Johnson et al (eds), Making Histories (Minneapolis, 1982), p84을 참조. ↩
- J Saville & E P Thompson, ‘Editorial’, The Reasoner 1 (July 1956), pp1-3. ↩
- E P Thompson, ‘Socialist Humanism’, The New Reasoner 1 (Summer 1957), pp105. ↩
- 같은 책, p108. ↩
- 같은 책, p113. ↩
- 같은 책, pp132, 121. ↩
- 같은 책, pp109. ↩
- “1956년 2월부터 1958년 2월까지 당원 수는 33,095명에서 24,670명으로 줄었다.” I Birchall, ‘The Terminal Crisis of the British Communist Party’, International Socialism 2: 30 (Winter 1985), p75 ↩
- E P Thompson, ‘Through the Smoke of Budapest’, The Reasoner 3 (November 1956), reprinted in D Widgery (ed), The Left in Britain, pp72; 69. ↩
- L Chun, The British New Left, p34; M Kenny, The First New Left, p58. 흔히 테일러가 마르크스의 1844년 수고를 영어권에 가장 먼저 소개했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매킨타이어가 자신의 책 Marxism: An Interpretation (London, 1953)에서 German Edition National Ökonomie und Philosophie를 인용한 바 있다. 이 책은 매킨타이어의 Marxism and Christianity, (Londin, 1968)의 핵심 부분을 이루게 된다. ↩
- 이 점은 크리스 아서가 자신의 책 The Dialectics of Labour (Oxford, 1986)에서 자세히 설명했다. ↩
- C Sparks, ‘Stuart Hall, Cultural Studies and Marxism’ in D Morley & K Chen (eds), Stuart Hall: Critical Dialogues in Cultural Studies (London, 1996), p78. ↩
- S Hall, ‘A Sense of Classlessness’,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5 (Autumn 1958). ↩
- R Samuel, ‘Class and Classlessness’,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6 (Spring 1959), p44. ↩
- E P Thompson, ‘Commitment in Politics’,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6 (Spring 1959), p52; 다음도 참조. E P Thompson, ‘The Long Revolution’, New Left Review 1: 9 (1961), p33. 홀의 반론을 보려면 다음을 참조. ‘The Big Swipe’,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7 (Autumn 1959). ↩
- 이 단락은 내 글 ‘Reform, Revolution and the Question of Organisation in the First New Left’, Contemporary Politics, vol 10, no 1 (March 2004)을 참조했다. ↩
- E P Thompson, ‘The New Left’, The New Reasoner 9(Summer 1959), pp15-17; ‘Socialism and the Intellectuals’,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1(Spring 1957), p34. ↩
- W Thompson, The Good Old Cause, p102. ↩
- K Alexander, ‘Democratic Centralism’, The Reasoner 1 (July 1956), p9. ↩
- 이 글이 톰슨에게 미친 영향을 보려면 톰슨이 쓴 ‘Socialist Humanism’, p136을 참조. ↩
- 나는 신좌파와 데일리의 출마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Reform, Revolution and the Question of Organisation in the First New Left’, pp26ff에서 논한 바 있다. ↩
- P Duff, Left, Left, Left (London, 1971), p128. ↩
- 노동당이나 공산당이 모두 처음에는 CND의 일방적 핵 군축 요구를 반대했다. W Thompson, The Long Death of British Labourism (London, 1992), p116, and W Thompson, The Good Old Cause, p64. ↩
- E P Thompson, ‘Revolution’ in Thompson (ed), Out of Apathy, p302. 페리 앤더슨은 옳게도 이 시기와 이후 톰슨의 정치가 공산당 시절에 배운 정치적 전망과 공통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P Anderson, 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London, 1980), pp145-146; 191. ↩
- E P Thompson, ‘At the Point of Decay’ , Thompson (ed), Out of Apathy, pp8-10. ↩
- R Hilton, ‘Socialism and the Intellectuals—Four’,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2 (Summer 1957), p20; M Jones, ‘Socialism and the Intellectuals One’,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2 (Summer 1957), p16. ↩
- R Miliband, ‘The Sickness of Labourism’, New Left Review 1: 1 (1960), p8; M Newman, Ralph Miliband and the Politics of the New Left (London, 2002), p76. ↩
- R Miliband, Parliamentary Socialism (London, 1972), p346. ↩
- E P Thompson, ‘Revolution Again’, New Left Review 1: 6 (1960), p19. ↩
- 같은 책, p29. ↩
- 나는 ‘Reform, Revolution and the Question of Organisation in the First New Left’, 29쪽에서 기묘하게 공상적인 적극적 중립주의 전략을 살펴본 바 있다. 다음도 참조하시오. P Sedgwick, ‘NATO, the Bomb and Socialism’, Universities and Left Review 7 (Autumn 1959). ↩
- R Samuel, ‘Born-Again Socialism’ in R Archer, et al (eds), Out of Apathy (London, 1989), p49. ↩
- J Hughes and K Alexander, A Socialist Wages Plan (London, 1958), p7. ↩
- 1959년 International Socialism의 전신인 Socialist Review에 처음 공개된 논쟁에서 키드런은 알렉산더와 휴스는 어디에서도 “미래의 노동당 정부가 과거의 노동당 정부와 다를 것이라고 시사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M Kidron, ‘The Limits of Reform’ in The New Reasoner 10 (Autumn 1959), p81). 키드런의 요점은 알렉산더와 휴스가 주장한 조건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그는 영국 국가와 민간 자본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음을 지적하며, 자본은 국가가 이윤지상주의를 폐기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므로, 둘의 연관 때문에 개혁주의 전망이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알렉산더와 휴스의 주장은 공상적이라는 것이 키드런의 결론이었다. 즉, 알렉산더와 휴스는 개혁의 주체인 사회 세력을, 현실과 동떨어지고 사회와 분리된 국가 개념으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이다(p86). 알렉산더가 키드런은 자본주의 하에서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다고 비판하자 (J Hughes & K Alexander, ‘Reply to Critics’ in The New Reasoner 10 (Autumn 1959), p103), 키드런은 “개혁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목적은 개혁의 실현 가능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개혁을 쟁취하는 최상의 방법이 혁명적 수단인가 개혁주의 수단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반박했다(M Kidron, ‘A Note on the Limitations of Reforming ‘Realism’’ in J Higgins (ed), A Socialist Review (London, 1965), p106). ↩
- K Alexander, ‘Socialist Wages Plan’ in Higgins (ed), A Socialist Review, p91; J Hughes & K Alexander, ‘Kidron and the Limits of Revolution’ in Higgins (ed), 앞의 책, p103. ↩
- Thompson, ‘Revolution Again’, p19. ↩
- P Anderson, 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 p136. ↩
- 대표자가 전체 노동조합원 수만큼 표를 갖는 일괄 투표. 예를 들면, 광원노조에서 찬성 600표, 반대 450표로 통과됐더라도, 광원노조 위원장은 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조합원 전체의 표(1050표 + 투표에 참가하지 않은 노동조합원)를 찬성표로 던지게 돼 있다. 카드투표제라고도 한다. — 옮긴이 ↩
- P Anderson, ‘The Left in the Fifties’, New Left Review 1:29 (1965), p16. ↩
- J Rex, ‘The Labour Bureaucracy’, The New Reasoner 6 (Autumn 1958). ↩
- R Williams, Politics and Letters (London, 1979), p365. ↩
- R Bulkeley, et al, ‘Fighting Against the Bomb in the 1950s and 1960s’ International Socialism 2: 11 (Spring 1981), p9; J Hinton, Protests and Visions (London, 1989), p178. ↩
- R Fraser, 1968: A Student Generation in Revolt (London, 1988)[국역: 《1968년의 목소리》, 박종철 출판사(2002)], p61. Dorothy Thompson은 2002년 6월 에지힐 칼리지에서 열린 The British Marxist Historians and the New Social Movements 대회에서 연설하면서 1963년 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윌슨이 승리한 날 밤에 자신과 에드워드 톰슨, 로빈 블랙번, 페리 앤더슨이 서로 기뻐하며 축하했다고 회상했다. ↩
- P Anderson, ‘Critique of Wilsonism’, New Left Review 1: 27, 1964, p22. ↩
- D Thompson, ‘On the Trail of the New Left’, New Left Review 1:215 (1996), pp94-95. ↩
- J Callaghan, British Trotskyism (Oxford, 1984), p72. Peter Fryer, Cliff Slaughter, Peter Worsley, Brian Pearce, Ken Coates, Peter Cadogan, Chris Pallis (aka Maurice Brinton), Bob Pennington, Alasdair MacIntyre가 그런 사람들이다. 특히 중요한 인물은 건설 노동자이자 전 공산당 산업조직자이며 집행부였던 Brian Behan이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나중에 그를 “지난 25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렀다. ↩
- L Trotsky, The Revolution Betrayed, p288. ↩
- D Hallas, ‘Building the Leadership’, p30. ↩
- P Fryer, Hungarian Tragedy, pp1-3. ↩
- A Callinicos, Trotskyism, pp23-38. ↩
- S Bornstein and A Richardson, War and the International (London, 1986), p231. ↩
- D Hallas, ‘Building the Leadership’, p31. ↩
- D Widgery, ‘The Double Exposure: Suez and Hungary’ in Widgery (ed), The Left in Britain, p63. ↩
- E P Thompson, ‘Socialist Humanism’, pp139. ↩
- M Brinton [C Pallis], ‘Revolutionary Organisation’ in M Brinton, For Workers’ Power (London, 2004), p46. 이 글은 Solidarity 1, 6 (May 1961)에 처음 실렸다. Socialisme ou Barbarie의 정치를 더 보려면, 다음을 참조. C Castoriadis, Political and Social Writings I & II (Minneapolis, 1988). ↩
- D Hallas, ‘Building the Leadership’, p31. ↩
- A MacIntyre, [1958-1959] ‘Notes from the Moral Wilderness’ in K Knight (ed), The MacIntyre Reader (Cambridge, 1998), p39. 이 글은 원래 New Reasoner 7 (Winter 1958-9)와 New Reasoner 8 (Spring 1959)에 나뉘어 실렸다. 매킨타이어의 초기 마르크스주의를 더 보려면 나의 글, ‘Freedom, Desire and Revolution: Alasdair MacIntyre’s Early Marxist Ethics’,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vol XXVI, no 4 (2005)를 참조. ↩
- E P Thompson, ‘Agency and Choice’, The New Reasoner 5 (Summer 1958), p93; A MacIntyre, ‘Marx’ in M Cranston (ed), Western Political Philosophers (London, 1964), p106. ↩
- A MacIntyre, ‘Freedom and Revolution’, Labour Review (February/ March 1960). ↩
- E P Thompson, ‘Revolution Again’, p22. ↩
- M Shaw, ‘The Making of a Party?’, The Socialist Register (1978), p104. 쇼의 글은 이안 버철의 글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International Socialism 1:76 & 1:77, (March/April 1975)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버철은 쇼의 비판에 ‘A Premature Burial: A Reply to Martin Shaw’, The Socialist Register (1979)로 답했다. ↩
- T Cliff, ‘The Nature of Stalinist Russia’ in T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London, 2003 [1948]). 클리프의 주장은 부하린이 Imperialism and World Economy (London, 2003)에서 펼친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부하린과 클리프의 이론 사이의 관계는 다음 글을 참조. P Binns, ‘Understanding the New Cold War’, International Socialism 2: 19 (Spring 1983), pp22-27. ↩
- T Cliff, ‘Perspectives for a Permanent War Economy’ in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이 글은 원래 Socialist Review (May 1957)에 실렸다. 다음도 참조하시오. M Kidron, ‘Reform or Revol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 7 (Winter 1961);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London, 1968); Capitalism and Theory (London, 1974). 1950년대에 이 주장을 발전시킨 클리프의 글은 Socialist Review에만 실려 있다. 다음의 글도 참조하시오. Mike Kidron and Seymour Papert (나중에 MIT 인공지능학 교수가 됐다) collected in Higgins, (ed), A Socialist Review. ↩
- T Cliff, ‘Economic Roots of Reformism’ in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이 글은 처음에 Socialist Review (June 1957)에 실렸다. ↩
- 같은 책, p185. ↩
- T Cliff, Rosa Luxemburg (London, 1959)[국역: 《로자 룩셈부르크》, 북막스(2001)]와 ‘Trotsky on Substitution’, International Socialism 1: 2 (Autumn 1960)을 보시오. 두 글 모두 T Cliff, International Struggle and the Marxist Tradition (London, 2001)에 재수록돼 있다. ↩
- A Callinicos, Trotskyism, pp79-85. ↩
- E P Thompson, ‘The Point of Production’, New Left Review 1: 1(1960), pp68-70. ↩
- P Blackledge, Perry Anderson, Marxism and the New Left (London, 2004), pp12-18. ↩
- E Meiksins Wood, ‘A Chronology of the New Left and Its Successors, Or: Who’s Old-Fashioned Now?’, The Socialist Register (1995). ↩
- E 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London, 1978), pp309ff. 비극이게도 매킨타이어는 이 때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하고, 1968년에 분출한 운동을 엘리트주의적으로 비판하는 데 주력했다. A MacIntyre, Marcuse (London, 1970), pp61; 89. ↩
- C Harman, 1968: The Fire Last Time (London, 1998)[국역: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2004)], pp257-261. ↩
- J Saville, ‘Prospects for the Seventies’, The Socialist Register (1970), pp212. ↩
- 새빌이나 밀리반드가 이렇게 변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한 내 견해를 보려면, 밀리반드에 대해서는 P Blackledge, ‘On Moving On from “Moving On”: Miliband, Marxism and Politics’ in C Barrow, P Burnham & P Wetherly (eds), Reflections on Ralph Miliband’s Contribution to State Theory (London, 2007)을 참조하고, 새빌에 대해서는 P Blackledge, ‘A Life on the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2: 105, (Winter 2005)을 참조하시오. ↩
- R Bulkeley, et al, ‘Fighting Against the Bomb in the 1950s and 1960s’, pp25-28을 참조하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