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에드워드 톰슨의 절멸주의 비판
마르크스주의와 미사일 *
《소셜리스트 리뷰》Socialist Review 1980년 9월호에 실린 이 글은 역사학자 에드워드 톰슨Edward Thompson의 ‘절멸주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오늘날 점증하는 동아시아 긴장 속에서 국내에서는 평화주의 주장이 유행하고 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적 좌파였던 단체들이 평화주의를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아가고 있는데, 그 이론적 토대가 에드워드 톰슨의 절멸주의이다. 그러므로 크리스 하먼의 날카로운 비판은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크게 유용할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옮긴이가 삽입한 것이다.
지난 9개월 동안 《소셜리스트 리뷰》가 꾸준히 다룬 주제 하나는 신냉전 드라이브였다. 우리는 그에 저항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주된 임무라고 주장했고, 그에 필요한 주장을 제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우리는 이 문제에서는 우리편이 크게 수세적이라고 가정했다. 언론은 냉전적 주장을 폭우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우리가 지지받을 수 있는 폭넓은 저항 운동은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그러나 여름을 거치며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미사일 반대 운동이 갑자기 새 생명을 얻었다. 이 나라[영국] 곳곳에서 매우 큰 대중 토론회와 작지 않은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는 10월 26일 런던에서 열릴 대규모 항의 시위로 이어질 듯하다.
이렇게 부활한 운동의 중심에는 역사가 에드워드 톰슨이 있었다. 톰슨은 〈가디언〉, 〈뉴스테이츠먼〉, 소책자 《저항과 생존》Protest and Survive, 여러 대중 토론회에서 순항미사일에 반대해 탁월한 주장을 펼쳤다. 톰슨만 그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운동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은 단연 톰슨이었다. 운동이 되살아난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다.
미사일 광기로 나아가는 동역학에 대해 새 운동이 채택한 분석을 제공한 인물도, 그에 맞서 싸울 전략을 제공한 인물도 톰슨이었다.
바로 이 전략 문제에서 우리 《소셜리스트 리뷰》(와 더 일반으로는 사회주의노동자당SWP)는 톰슨의 주장에 이견이 있다.
톰슨의 전략은 꽤나 간단하다. 순항미사일 배치 결정에 항의할 사람들을 최대한 끌어들이자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대항 논리와 반대 세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반대 세력은 국제적이어야 하고 대중의 지지를 획득해야 한다. 그 반대 세력은 세계의 통치자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저항과 생존》)
누가 그 반대 세력에 속할까? 《저항과 생존》을 읽으면, 톰슨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은 본질적으로는 20년 전 핵무기폐기운동CND에 참가한 사람들, 올해 여름 동안 대중 토론회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상당수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즉, 중간계급임이 확실한 사람들, 대학 학위를 취득했거나 취득하고자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 그러므로 옥스포드대학교와 캠브리지대학교는 이 캠페인을 시작하는 데서 유리한 곳이다.
(순항미사일이 설치될) 주요 기지는 옥스포드대학교와 캠브리지대학교 같은 오래된 대학가 근처에 들어설 것이고, 내 보기로는 이 유럽 문명의 오랜 근거지에서부터 유익한 활동을 완수해 나갈 수 있다. 연구·출판 활동과 함께 양심과 관련한 활동을 할 텐데, 이 활동들은 모두 학자들에게 딱 어울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반대 세력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도 포함된다.
기존의 모든 기관이나 심지어 개인, 대학(이나 그 안의 단체들), 노동조합원, 여성 단체, 전문직 단체 회원, 교회, 에스페란토어 학습자, 체스 동호회 회원 등등.
이런 사람들과 함께,
… 고위 관료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전화 도청 요원들이 은신처로 내달리게 하고, … 대화와 논쟁을 열어젖혀 동구권 스탈린주의자들의 냉담한 반응을 모두 산산조각 낼 것이다.
오래지 않아 우리는 경계를 넘어
이것이 톰슨 주장의 전부더라도, 이견을 몇 마디 제시하고 싶어진다. 순전히 산수 계산을 해 보더라도, 노동조합원 1200만 명의 중요성을 전문직 종사자 50만 명, 기독교인 200만 명, 대학 교수 4만 5000명의 중요성과 엇비슷하게 보는 것은 조금 이상한 일이다. [톰슨의] 강조가 온통 대학 교수에게로 향하는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런데 톰슨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항과 생존》 주장의 바탕에는 신냉전에 대한 폭넓은 분석이 있는데, 그 분석에서 톰슨은 “폭탄은 계급 문제”라는 생각을 논박하는 데 전념한다. 이것이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최근 호에서 가장 공개적으로 주장한 내용이다.
톰슨의 분석에서 문제는 동·서 양 진영이 새롭고도 무시무시한 절멸주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주장이다.
절멸주의는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몰살시키고야 말 방향으로 사회를 밀어붙이는 이 사회의 특징들을 가리킨다.
절멸주의는 “살상 수단의 축적과 개선, 사회 전체를 종말로 인도할 구조의 구축”의 결과이다.
“절멸주의”를 낳은 요인은 예전에는 제국주의적 이익이나 군산복합체의 이윤 추구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처음에는 지배계급이 자기 이익의 합리적 추구 속에서 이용한 수단들이 그 자체로 비합리적 생명력을 가지게 돼 왔고, 그래서 더는 애초의 과정으로 돌아갈 수 없다.
반작용으로 시작된 것이 목표가 된다. 한두 강대국이 합리적 자기 이익 추구라고 정당화하는 것이 두 개의 비합리적 행동의 충돌로 변한다. 우리는 축적된 과정 논리를 마주하고 있다.
지배계급들의 “합리적” 선택들이 낳은 이 결과물에 대처하려면 “비합리적” 대상에 필연적 합리성을 부과해야 한다.
절멸주의에는 다음처럼 “대항” 논리를 제시하는 방식으로 도전해야 한다.
대항 논리의 시작, 양 블록의 해체로 나아가는 과정의 추진, 절멸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신화 벗기기.
… 노동조합원, 생태주의자 …”의 동맹에 의해 완수돼야 한다. “두 블록이 충돌 궤도에서 멀어지면서 … 군대와 경찰은 권위를 잃을 것이다.”
이 과업은 “교회, 유로코뮤니스트, 노동당원, 동유럽의 반정부 인사들(뿐 아니라)폭탄을 “계급 문제”로 보는 것은 이 과제의 수행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계급 투쟁은 전 세계에서 여러 형태로 계속될 것이지만, 절멸주의 자체는 ‘계급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 문제이다.
톰슨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혁명가라며 허세 부리는 것은”,
인류적 저항을 위해 필수적인 동맹에 분열을 가져오기만 할 것이고, 사실 더 나쁘기로는 절멸주의 이데올로기를 악화시킬 수 있다.
매우 광범한 대중적 동맹, 즉 우리 문화의 긍정적 자원 일체를 동원해서만 절멸주의에 대적할 수 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톰슨의 주장 분석하기
“절멸주의”는 비합리성 면에서 그토록 완전히 새로운 일일까?
양대 경쟁 블록이 군사적 경쟁의 압박에 사로잡힌 각각의 엘리트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는 톰슨의 묘사는 옳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보나 그 상황은 마르크스주의의 오랜 계급적 분석의 틀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다.
1844년 마르크스는 자기 사상을 발전시키기 시작할 때, 철학자인 헤겔과 포이어바흐에게서 “소외” 개념을 이어받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인간들의 행위가 그들에게서 분리돼 자체의 생명력을 가지며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 노동자가 자신을 더 많이 소비하면 할수록, 그가 창조했지만 그에게 맞서는 낯선 세계가 더욱 강해진다. … 노동자는 생산물에 자신의 생명을 투입하지만, 이제 그의 생명은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생산물의 것이 된다.
노동 생산물이 낯설고 독립적인 것으로서 그 생산자와 대면한다.
그러나 청년 마크르스가 보기로 노동자들만이 자기 통제에서 벗어난 “낯선” 세계의 포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자본가는 “그 소외 속에서 행복”하지만 자본가도 소외당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후기 저작, 특히 《자본론》의 핵심은 바로 이 “소외된 노동”의 세계를 통제하는 “객관적 법칙”이 생겨나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생산 지점에서 노동자로부터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능력이 어떻게 노동자와 자본가 모두에게 지속적인 제약을 가하는지를 보여 줬다.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그가 창조했지만 자본가에게 돌아가는 부가 더 많아진다. 이 부는 자본가의 수중에 있는 생산적 힘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자본에게 돌아갈 훨씬 더 큰 부를 창조하는 데 쓰인다. 바로 노동자의 노동이 노동자를 끝없는 생산에 결박시키는 사슬 ― 비록 그 노동자가 보수를 많이 받아서 그 사슬이 “황금 사슬”일지라도 어쨌든 사슬 ― 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 역시 소외의 포로이다. 어느 자본가가 착취와 축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모든 자본가들에게 의무감으로 다가온다. 착취하지 못해 축적하지 못하고 축적하지 못해 착취하지 못하는 자본가는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주장을 더 전개했다. 자본가를 번창케 하는 소외된 노동의 세계 자체가 자본가를 파멸로 이끈다고 말이다. 그 결과는 고려하지도 않은 채로 한없이 축적해야 한다는 강박은 단기적으로는 많은 자본가를 파산시키는 경제 위기의 반복을 낳는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경제적 정체, 정치적 혼돈, 사회적 동요로 인도하고, 결국 자본가 계급은 사회주의 혁명이나 “서로 투쟁하는 계급들의 공멸”에 맞닥뜨리게 된다.
자본가가 개별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자본론》을 읽는다고 해서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자본가는 누구든 경쟁에서 패배해 도태될 것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회와 “문명”이라고 여기는 사회를 지속시키는 것에 일체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그 사회를 파괴할 뿐인 조처를 열렬히 추진할 수밖에 없다. 반란에 나선 노동계급의 폭력으로만 자본가를 물러서게 하고 합리적 토대 위에서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다.
“평화로운” 시장 경쟁이 낳는 효과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순항미사일이나 퍼싱미사일의 세계와는 관계 없는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분석은 1915년과 1916년에 지독하고 끔찍하고 명백히 무의미한 전쟁, 전투에 사로잡힌 유럽의 강대국들을 모두 빠르게 산산조각 낼 위험이 있었던 전쟁을 설명하기 위해 확장됐다.
제국주의와 “절멸주의”
그것 말고도 제1차세계대전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있었다. 바로 독일 사회주의자 카를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설명인데, 그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1차세계대전은 양편의 자본가 압도 다수의 이익과 전혀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소수의 군수업체들에게 속아서, 전쟁을 통해서만 식민지에서 자본주의적 이익을 방어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계의 여러 자본주의 강대국들이 모여 식민지를 공동으로 착취하기로 합의하는 것이 가장 쉬울 것이다. 그러니 전쟁은 단지 자본가들에게 다르게 행동하도록 압박을 가하기(또는 톰슨의 주장으로는 ‘대항 논리’를 추구하기)만 하면 끝낼 수 있다.
전쟁에 대한 이런 분석에 볼셰비키 이론가인 부하린과 레닌이 이견을 제시했다. 레닌의 제국주의 분석에서 몇몇 측면은 시간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러나 레닌의 분석에는, 그리고 부하린의 《세계경제와 제국주의》에는 제1차세계대전을 일으킨 “논리”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은 오늘날의 “절멸주의”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서도 실마리를 준다.
레닌과 부하린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평화로운 시장 경쟁을 보완하거나 심지어는 그 경쟁을 대체하는 군사적 경쟁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가 성장할수록 분명히 모순된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각국에서는 경제력이 점점 더 소수의 대기업에 집중되고, 그 대기업들은 점점 더 국가에 통합된다. 그러나 동시에, 생산 규모가 증대하면서 이제는 기존 국가의 좁은 범위 안에 머물 수 없게 된다.
이 모순이 해소되는 유일한 방법은 국민국가가 기존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기 권력을 확장하는 것이다.
국가는 육해공군과 무기를 구축해서 해외의 시장, 생산 시설, 원료 자원을 보호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타국] 영토 병합, 다른 국가들을 포괄하는 세력권 형성, 자기 이익을 보호하도록 다른 국가 지배자들을 압박하고 강요하는 일 등이 일어난다.
1916년 부하린은 다음과 같이 썼다.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사이의 투쟁은 무엇보다 그들 사이 군사력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왜냐하면 국가의 군사력은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이 기댈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듬해 레닌은 다음과 같이 썼다. “자본가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악의 때문이 아니다. 집중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이윤을 얻기 위해서는 이 수단을 채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분할에 대한 자본가들의 합의는 단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 중 일부가 다른 자본가들보다 경제적으로 더 빨리 성장하면서 강대국들 사이 군사적 세력균형이 바뀌고 더 강한 쪽이 더 큰 몫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에서 평화의 시기는 “전쟁 사이의 ‘막간극’일 수밖에 없다. 평화로운 동맹 관계는 전쟁으로 나아가는 길을 준비하고, 그 전쟁에서 새로운 동맹 관계가 자라난다”.
1921년 부하린은 그의 책 《전환기의 경제학》에서 이 주장을 다시 개진했다.
세계 자본주의의 무질서 ― 세계적 노동과 “국민”국가적 전유 사이의 대립 ― 는 국가 조직체들의 충돌과 자본가들의 전쟁에서 스스로 드러난다.
… 즉,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 간의 … 경쟁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은 특정 수준에 이른 발전 단계에서 일어나는 경쟁 방식
경제적 경쟁이 자체 논리가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군사적 경쟁도 자체 논리가 있다고 레닌과 부하린은 주장했다. 레닌은 제국주의의 특징이 국가경제에 필수적인 지역을 장악하는 것만은 아님을 관찰했다. 장악한다면 산업이 미발달한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 지역과 군사 전략의 관점에서 볼 때 중요한 지역을 차지하는 것도 제국주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부하린은 국가의 군국주의 구조가 “경제적 토대”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다른 모든 “상부구조”와 마찬가지로 토대에 반작용을 가하고 토대가 특정한 방항을 향하도록 큰 영향을 끼친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 레닌, 부하린을 언급하는 것의 요점은 톰슨이 “정통”에서 이탈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완전히 새로운 사태 전개로 보는 현상,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설명할 수 없다고 보는 현상이 사실은 고전 마르크스주의가 설명하려 애썼던 현상의 일종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제조업 상품을 둘러싼 경쟁이 전함과 기관총과 독가스 제조를 둘러싼 매우 끔찍한 경쟁을 키우고, 그 경쟁이 대륙간탄도미사일과 핵폭탄 제조를 둘러싼 가장 참혹한 경쟁을 키운다. 지금 소외의 수준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든 계급의 모든 구성원의 물리적 미래를 위험하게 만들 만큼 고조돼 있다. 그러나 이 “소외된 노동의 세계”의 바탕에는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있다.
냉전의 논리
무엇이 냉전의 주된 행위자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인지를 간단히 살펴보자.
미국이 미국 자본주의의 이익을 자국 국경 너머로까지 확장하려 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은 세계의 생산적 부富의 절반 정도를 지배한다. 포드나 제너럴 모터스나 거대 석유기업들은 여러 나라에 생산 시설을 두고 있다. 미국 해외투자의 산출량은 미국 국내든 소련이든 그 어떤 단일 국가의 산출량보다 많다. 개발도상국들이 해마다 부채 상환에 쓰는 돈 중에서 880억 달러라는 큰 부분을 미국 은행들이 차지한다. 미국의 주요 공업 기업과 은행은 계속 경영하려면 “자유 세계” 전역에 퍼져 있는 부서들의 복합체를 온전하게 유지해야 한다. 커다란 채무국이 부채 상환을 못하게 되면 거대 은행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몇 년 전에 포드는 해외 영업 탓에 파산할 뻔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통치자들은 미국의 핵심 이익의 범위를 자국 국경보다 훨씬 넓게 본다. 미국의 통치자들은 최강의 군사력을 유지해야 그 이익을 위협하는 요소에 대처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위협 요소로는 진정한 민족해방 운동, 러시아의 행보, 다른 서구 자본주의가 미국의 다국적기업과 은행의 기능에 손상을 입히는 조처(예를 들어 보호주의적 조처)를 취하는 것 등이 있다.
이 기본적인 군사력 강화 드라이브는 부차적 요소들 탓에 더 강해진다: 지난 30여 년 동안 거대한 군사기구를 유지하는 비용이 컸지만, 그 덕에 문명 경제를 안정화하고 경제 위기의 심각성을 완화하는 것으로 그 손실이 부분적으로 상쇄됐다. 주요 기업들과 군대와 국방부 내의 강력한 관료들이 무기 증대 노력 덕분에 다른 부분의 지배계급보다 더 큰 득을 봤다.
그러나 국제 무대에서 미국만이 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톰슨은 미국 제국주의만을 미사일 광기의 유일한 요인으로 보는 주장을 꽤나 옳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는 러시아도 자체의 제국주의적 동기를 발전시켜 왔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제국주의가 군비 경쟁의 원인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 사회가 발전해 온 방식을 면밀히 살펴보면, 러시아도 서구 강대국들과 꼭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적 동기를 키워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집단은 러시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나서, 잠재적인 적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군사기구를 발전시킴으로써 자신의 통제력을 방어하는 것을 자신들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러려면 러시아가 서구의 군사적 잠재력의 기초를 따라잡아야만, 즉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조건을 쥐어짜고 축적에 투입할 잉여가치를 얻는 것으로 중공업을 육성해야만 했다. 그런데 일단 이 방식이 채택되면, 서구의 다른 행태들을 따라하는 것 ― 국경을 넘어서서 자원을 얻고 축적하는 것 ― 도 논리적으로 합당한 일이 된다. 그 결과는 1939년 히틀러와 폴란드를 분할해 차지한 것, 1944~1945년 처칠·루스벨트와 유럽을 분할해 차지한 것,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것이다.
경쟁자의 군사적 잠재력에 맞춰 축적하는 것은 끝이 없는 과정이다. 산업 기반이나 군사력을 아무리 확장하더라도 경쟁자가 똑같이 해 버리면 말짱 도루묵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기존의 군비 부담이 낳은 결과 ― 식량과 소비재 부족 ― 로 신음하고 있는 위태로운 제국을 결속시키려면 군비 예산이 늘어야 한다.
이를 완화해서 군사력 증대 속도를 늦추면 이런저런 대결에서 적대국에 굴욕을 당하거나, 동맹국들이 이탈하거나, 위성국들이 독립을 추구하거나, 준식민지들이 반란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한쪽이 새로운 형태의 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다른 쪽도 똑같이 해야 한다는 강요로 작동한다. 마르크스가 살펴봤던 경제적 경쟁에서 생산수단의 축적이 (자본가들의 개인적 욕구와 무관하게) 필연인 것과 꼭 마찬가지로, 군사적 경쟁에서 무기의 축적 ―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 도 (결국에는 공멸할 것임을 서로 인식하더라도) 필연이다. 그러나 물론 개별 자본가들의 욕구는 축적으로 맞춰질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체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적절한 심리적·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을 제공한다. 무기 축적에 참여하는 국가관료와 산업은 매우 체계적으로 구조화돼 있어서 그 구조 안의 개인들은 무기 축적을 좋은 것으로 보게 된다. 미국 국방부든 ‘주식회사 소련’이든 그 안에는 자신의 출세를 군사적·산업적 구조물을 더욱더 키우는 것과 동일시하는 관료들이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순수한 경제적 경쟁”이 그러하듯이, 군사력의 지속적 증대는 각각의 행위자들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각자의 피지배계급을 더 옥죄도록, 각자의 군사적 잠재력을 국경 바깥으로까지 확장하도록, 각자의 사회가 더 한층의 군사력 팽창을 추구하도록 몰아 간다. 군사력에 쏟는 자원 때문에 사회 전체가 심각한 불안정에 빠지는 지경이 되더라도 말이다.
냉전과 위기
이제 톰슨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하는 분석의 마지막 쟁점을 다루겠다. 그의 신냉전 분석은 그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 경제 위기가 존재하느냐 아니냐 여부는 전혀 다루지 않는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1940년대 중반까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지 않고서는 지구상에서 공존할 수 없는 듯했다. 그러나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이 적대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호황이라는 조건에서 곧 잊혀졌다. 세계경제 전체가 확장하고 있었고, 여러 강대국들은 서로 짓밟지 않고서도 함께 번영할 수 있을 듯했다.
여러 서구 강대국들과 러시아 사이의 관계는 좀더 복잡했다. 유럽에 대해서는 1944~1945년에 분할이 합의됐고, 이 합의는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지만, 세계의 다른 곳들과 관련해서는 문제가 있었다. 여러 요인들 ― 식민지들에 일어나는 혁명, 중국 혁명, 소련의 경제성장률이 더 높은 것 등 ― 때문에 진정한 세력균형이 어떤지가 분명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에는 세력균형이 안정적인 듯했다. “데탕트”(긴장 완화)의 근거가 마련됐다.
옛 적대감을 다시 불러일으킨 요인의 하나는 양 “진영”이 모두 경제 위기에 빠졌다는 점이었다. 두 강대국 모두 자신의 국경 너머에 있는 자원들을 이용할 필요가 커졌는데, 동시에 그 자원이 나는 외국 나라들이 불안정해지는 상황에 놓였다.
서구의 경우, 국제 신용 시스템(유러달러와 오일달러)이 엄청나게 성장했고, 생산을 국제화 ― 예를 들어, “월드카”[전 세계 시장에서 판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자동차] ― 해야 한다는 압박이 점점 커졌다. 그런데 이는 선진 강대국들 사이의 긴장을 증가시켰다(서로의 상품에 대해 수입 통제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계속되는 것, 독일과 프랑스가 국제 문제에서 [미국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움직이려 시도하는 것 등). 그리고 세계의 다른 곳, 특히 중동, 중미, 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불안정을 낳았다
동구권의 경우, 중국이 공공연히 서구에 선을 대고 있음을 알게 되고, 이집트를 미국에 빼앗겼으며, 이라크에게 배신당한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을 단속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동유럽에서 새로 일어나고 있는 소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이와 함께 동유럽 위성국들은 그 어느 때보다 의존적으로 서구와 제3세계와 경제적 연계를 맺고 있다.)
양 진영 모두 자신의 동맹국·위성국·식민지들 사이에서 불화를 일으키는 경제적 문제를 겪고 있다. 서로 그 문제를 이용해 먹으려 할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양측은 모두 미사일 수를 늘리고, 미사일의 정확성을 높이고, 상대방이 자신의 “세력권”을 침범할 때를 대비한 “제한된” 핵전쟁 태세를 갖추려 애쓰고 있다.
이론과 실천
세계에 대한 위의 분석이 톰슨의 분석과 완전히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점에서 공감대가 있다. 그러나 각 분석에 따르는 실천적 결론은 매우 다르다.
톰슨이 보기로 미사일에 맞서는 투쟁은 다른 쟁점 ― “우리를 총칼로 위협하고 옥죄는 자들’[즉, 지배계급]과 대결해야 하는 ― 을 다루기에 앞서 결착을 지어야 하는 투쟁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로 미사일에 맞서는 투쟁은 여러 다른 쟁점들을 둘러싼 투쟁들과 교차하는 투쟁이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과거의 핵무기 폐기 운동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는 데 크게 성공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 운동은 무기를 제거하지 못했고 활동가 대다수는 다른 쟁점으로 옮겨 갔다. 예를 들어 톰슨 자신은 캠페인 조직하기를 멈추고 역사서를 쓰기 시작했다(매우 훌륭한 책이지만).
1 를 했다. 노동당 당회의는 핵폭탄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운수일반노조 조합원이든 노동당 당원과 지지자들이든 그 결의안을 실행에 옮기거나 핵무기 기지 건설을 가로막아야 한다고 보는 사람은 충분치 않았다. 나중에 우리 운동은 거리로 나와 직접행동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이내 무기력함을 느꼈다. 우리만으로는 그만한 사회적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력이 부족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핵무기 폐기 운동이 무기를 만드는 자들의 통제력을 깨뜨릴 사회 세력을 결집시키지 못해서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핵무기 폐기 운동이 대다수 사람들의 일상적 관심사와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운수일반노조의 프랭크 커즌스 같은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핵무기 폐기 운동에 동의해 블록투표핵무기 폐기 운동의 무기력은 반전 운동이 전에도 겪었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제1차세계대전의 경험을 살펴보자. 결국 제1차세계대전은 처음에는 러시아 노동자와 병사들이 그 뒤에는 독일 노동자와 병사들이 전쟁을 더는 감수하지 않기로 한 덕분에 끝이 났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반전 운동은 고립돼 있었고,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고, 사태 전개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독일 혁명의 가장 중요한 노동자 지도자인 리하르트 뮐러는 나중에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전쟁을 가장 격렬히 반대한 사람들 ― 제2인터내셔널의 지부로 조직돼 있던 사람들 ― 이 베를린 대공장 노동자들과 어떻게 단절돼 있었는지를 말한다. 그 노동자들은 전쟁을 상당히 강하게 반대했지만 자신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문제라고 봤다. 전쟁으로 자신들의 생활수준과 노동조합 권리가 직접 공격당하기 전에는 말이다.
공장 노동자들이 행동에 나서도록 운동을 조직하는 데는 뮐러와 그 동지들의 더디지만 끈질긴 4년간의 활동이 필요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장 밖의 반전 사회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시위성 행동을 촉구했다. 그런 행동에는 노동자의 소수 ‘전위 집단’만 참가했고, 군대와 경찰은 그런 시위를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정권과 전쟁에 균열을 낼 만큼 강력한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전쟁 반대 정서와 물질적 조건을 둘러싼 투쟁이 만나지 못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핵무기 폐기 운동이 겪은 문제의 하나는 그런 “경제”와 “정치”의 통일이 가능할 만한 물질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다수 노동자의 실질임금은 해마다 상승했고, 실업률은 2퍼센트 미만이었고, 복지국가는 계속 확장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사정은 다르다. 바로 핵미사일의 새로운 급증이 세계경제가 위기로 가는 추세 속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군비 지출의 증가는 교육·보건·주택에 대한 지출 삭감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사회의 군사주의화는 오랫동안 “평화로운” 노동조합 활동에 익숙해져 있던 노동자들이 국가에 맞서 일어서고 있는 상황과 함께 일어나고 있다. 새로운 핵무기 반대 운동은 생활보조금위원회의 퇴임하는 위원장이 실업자의 거리 소요 사태가 일어날 “위험”을 경고하는 상황에서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톰슨은 이런 상황을 모두 사실상 무시한다. 그가 보기로 전진하는 길은 지난번의 운동을 ― 핵심적으로는 같은 종류의 사람들을 더 많이 모아 ― 재현하는 것이다. 이는 불가피하지 않은 패배를 낳을 처방이다.
톰슨은 매우 중요한 또 다른 쟁점 ― 우리가 통치자들의 손에 있는 파괴 무기들을 장악하는 데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통치자들에게 그리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평화롭게 설득해야 하는 것인지 ― 에 대해 분명하지 않다. 때때로 그는 대결을 시사하는 목소리를 낸다. 그러나 또 다른 때에 그의 주장은 우리가 그저 “대항 논리”를 주장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인다.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운동의 구심으로 삼으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 자체가 진정한 대결을 추구하는 사상에서는 100마일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를 동맹 세력으로 제안하는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교회”, 즉 대주교와 추기경들이 집단으로서 미사일 기지에 반대하는 공격을 주도할까? “유러코뮤니스트들”은? 에드워드 톰슨도 잘 알듯이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탈리아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탈퇴를 반대하고, 스페인 공산당은 국제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스페인과 미국의 동맹관계를 끝내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의 핵 억지력 구축을 매우 열렬히 지지한다. “노동당원들”은? 이 말이 노동당 좌파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바로 2년 전에 당시 노동당 좌파의 스타 인사가 윈즈케일 [원자로] 파업에 군사력을 투입해야 한다고 위협했다는 사실을 떠올려 봐야 한다. “노동조합원”도 누구를 가리키는지가 모호하다. 기층의 현장 조합원을 뜻하는 것일까, 아니면 핵잠수함이 기항하는 해군기지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파업을 저지하려 시간을 보내는 노조 지도자들을 뜻하는 것일까?
톰슨은 때때로 미사일에 반대하는 탄원서에 이름을 올릴 만한 사람들의 목록을 작성해 왔다. 그러나 그는 결과가 무엇일지에 흔들리지 않고 핵미사일 해체를 위해 싸울 일관된 세력에 기반을 두지 못해 왔다.
핵탄두의 배치와 사용은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해 있는 일이다. 그 사회 구조의 상층부에 더 얽혀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회를 전복시킬 위험이 있는 일에 더 저항하기 마련이다. 인류의 절멸을 막기 위해 그 사회를 전복하는 것이 필수적이더라도 말이다. 그들은 《타임》에 실리는 글에 이름을 올릴 수는 있겠지만, 격렬한 투쟁에는 두려움을 느끼며 도망칠 것이다. 그들은 대중 집회에서는 겸손히 박수를 칠 수 있겠지만, 사회적 격변을 추구하는 사상에는 몸서리를 칠 것이다. 그들은 이따금 유인물 반포 행동에 참가하겠지만, 그 유인물이 진정한 충돌로 나아가는 것이라면 숨어 버릴 것이다.
반핵 집회에 “노동자만 오시오” 하는 현수막을 내걸자는 말이 아니다. 톰슨의 전망에 자랑스럽게 자리잡은 사람들과 달리, 기성의 구조에 얽매어 있지 않은 사회 부문을 겨냥한 전략을 발전시키자는 주장이다. 미사일이 모든 계급의 구성원 개개인들의 미래를 위협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그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 반대만이 아니라 적극적 투쟁을 추구하는 전략에 설득될 것이냐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미사일에 반대해 투쟁하기를 바란다면, 주식중개인은 그 운동이 자기 이익을 파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하고, 주교나 추기경은 자기 교회와 척을 져야 하고, 유러코뮤니스트는 살상무기를 용인하는 자기 정당 지도자들에 맞서야 하고, 노동당원은 야당일 때는 미사일에 반대하지만 집권하면 그 구조를 경영하고자 하는 노동당 좌파 인사들과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폭탄은 계급 문제다. 한편으로는 인류(와 그 자신)에 대한 위협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계급적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적으로는 미사일이 필요하다고 속아 넘어갈지라도 다른 문제에서는 미사일을 만드는 자들과 격렬한 투쟁을 벌여야 하는 계급적 이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정말로 성공적인 운동은 전자 집단에 속한 개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려면 그들이 전자 집단에서 이탈해 후자 집단 사이에서 운동을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 “절멸주의”처럼 마법 주문에 가까운 개념과 “광범한 운동”에 대한 장광설은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뿌옇게 만든다.
미사일 시대의 볼셰비즘
정치는 그저 이론적 분석이나 전략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다. 정치는 활동 방식과도, 이론을 실천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조직 형태와도 관계된 것이다. 미사일 광기의 시대에 정치는 어때야 할까?
톰슨 ― 과 의심할 여지 없이 새 운동 참가자의 다수 ― 은 미사일이 낳을 일에 대한 어마어마한 공포를 지목하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채택해 왔던 전통적 조직 형태, 그중에서도 잘 훈련된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라는 개념을 포기한다. 최대한 광범한 동맹의 구축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톰슨의 이 의견에 동의하기 전에 떠올려 봐야 할 사실이 있다. 바로 자본주의가 지난번의 군사적 공포(참호전과 독가스)를 낳은 방식 때문에 가장 일관된 반전 사회주의자들이 “볼셰비키당” 개념에서 나타나는 조직 형태를 채택하는 데로 나아갔다는 점이다.
그런 정당에 관한 사상은 정통에 대한 집착 탓에 채택된 것이 결코 아니다. 처음 생겨났을 때 그 정당은 가장 이단적인 혁신이었다. 사람들은 힘든 길을 거치면서 (당시로서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직한 전쟁에 맞서는 투쟁을 벌일 때 그런 조직 형식이 필요하다고 깨닫게 됐다.
안토니오 그람시, 빅 빌 헤이우드, 유진 레빈, 알프레드 로스머, 존 맥린, 존 리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는 세계 전쟁의 시대에 자본주의에 대처할 유일한 방법은 러시아에서 차르의 폭정에 맞서 투쟁하는 가운데 개척된 종류의 정당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보기에 이르렀다. 왜 그들은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까?
1914년까지 자본주의 사회의 여러 양상에 대한 반대 운동은 제각기 다른 경로로 흘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노동조합 운동은 특정 기술을 가진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주로 (심지어는 오로지 그것에만) 관심을 뒀다. “정치적” 사회주의는 선전과 득표에만 관심을 뒀다. 평화주의는 참전에 반대하는 비효과적인 항의 행동에 전념했다. 페미니즘은 여성에 대한 법률적 제약에 맞서 싸우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 운동들은 모두 혼란에 빠졌다. 국가가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노조 지도자들에게는 혜택을 주고 전쟁을 반대하는 투사들은 투옥시키자 노동조합들은 하나둘씩 배신했다. “정치적” 사회주의는 군사주의의 좌파적 버전으로서 행동하거나, 총알이 날아다니고 살이 타는 일에 맞서는 데서는 전혀 효과적이지 않은 선전만 하는 아주 어려운 처지에 계속 놓이기를 선택했다. 평화주의자들은 애국주의로 돌아서거나, 양심의 가책은 덜 수 있지만 대학살을 멈추지는 못하는 개별적 항의 행동을 했다. 페미니스트들은 분열해서, 어떤 사람들은 “평등”이 참호에서 동등하게 고통을 겪을 권리를 뜻한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군장성들에 반대해 총을 내려놓는 일에 참가하는 권리를 뜻한다고 했다.
러시아에서 레닌을 중심으로 성장한 정당이 달랐던 점은 그 정당이 여러 투쟁들을 연결시킴으로써 그런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였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다른 측면 ― 군사주의, 독재, 소수자와 여성에 대한 차별 ― 에 맞서는 투쟁에서 스스로 거리를 둔 노동조합 운동은 [노동조합원의] 생활조건에 대해 양보했던 것을 회수해 갈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하는 체제를 손상시키지 못했다. 레닌이 유명한 ‘경제주의 비판’을 한 까닭이다. 간행물 발간과 투표함만 쳐다보는 사회주의는 눈앞에서 파괴되고 있는 미래에 대한 말만 했다. 평화를 설교하지만 군사주의자들의 전쟁 수단 통제력을 빼앗을 사회 세력을 특정하지 않은 평화주의는 자본주의가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 그저 우연적인 일이라는 환상을 조장할 뿐이었다.
이와 반대로 공장에서 일어나는 일상적 투쟁에 뿌리를 내린 사회주의는 “지금 여기에서” 미래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생활수준, 노동조건, 노동조합 권리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파업에 기초를 둔 전쟁 반대 활동은 그저 유혈사태의 종식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헤이그[제1차세계대전 때 서부전선의 영국군 최고사령관]들과 힌덴부르크[제1차세계대전 때 독일군 육군참모총장]들이 전쟁을 지속하기 더 어렵게 했다.
그렇다고 해서 혁명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이 공장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가로막거나 사유재산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전쟁 반대 시위에 참가하는 것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었다. 광범한 운동들이 서로 연결되도록, 식량 부족에 항의하는 파업이 군사주의에 반대하는 파업이 되도록,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가 그 전쟁을 낳는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되도록, 각각의 운동 속에서 교육하고, 선동하고, 조직하는 정당을 건설하려 했다.
그런 정당은 “새로운 종류의” 정당이어야 했다. 선전과 득표에만 관심을 두는 정당이 아니어야 했다. 공장 안에서 선동을 하는 책임을 “노동조합원”들에게만 맡겨 두는 정당이 아니어야 했다. 그러나 실천에, 무엇보다 작업장에서의 실천에 큰 의욕을 가지고 그런 실천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도록 체계가 짜인 정당이어야 했다.
그런 정당을 건설하는 문제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의 “평화적” 시장 경쟁이 전쟁과 전쟁 준비에 길을 내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병사들이 서로 헐뜯도록 부추기는 지배계급들은 자신들을 막아서는 사회주의자들을 살해하고 투옥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었다.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 레빈, 조 힐, 코널리, 그람시, 맥린의 운명이 그것을 증명했다. 평화적 항의 행동이 내전으로 나아가고 합법성이 비합법성에 길을 내어 주는 상황에 작동할 수 있는 정당이 필요했다. 이미 200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자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여러 공장에서 [일어난 투쟁으로] 그들이 쏜 총알이 그들에게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조직돼야 했다.
한 세대의 청년을 “단지” 참호로 보내 죽게 한 자들보다 더 철저히 인류를 파괴할 태세가 된 자들에 맞서서 미덥지 못한 세력과 더 낮은 수준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완전히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