쟁점
쌍용차 대안과 공기업화 논쟁
이 글은 쌍용차 투쟁을 돌아보며 당시에 노동자들이 어떤 요구를 내놓아야 했는지를 다룬다. 즉, 사기업의 손실에 세금을 쏟아붓는 격인 데다 정리해고를 동반하는 공적자금 투입이 아니라, 정부가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는 공기업화를 요구해야 했다는 것이다. 사실, 쌍용차 투쟁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었지만 대안 문제는 그 중요성만큼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기업이 망했는데 노동자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기업 논리에 맞서 해고 위협에 처한 노동자들도 분명한 대안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진보진영의 일부는 자동차 산업 개편이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에 접근했고, 또 다른 일부는 대안은 중요하지 않고 고용 보장을 요구하며 전투적으로 싸우면 된다는 식이었다. 특히 노동자주의적 좌파들이 택한 후자의 견해는 그토록 오랫동안 영웅적으로 싸운 쌍용차 노동자들이 왜 승리를 거두지 못했는지 설명할 수 없고 따라서 앞으로 노동자 운동이 어떤 점을 보강해야 하는지 제시할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정치의 취약성은 큰 아쉬움이다. 왜냐하면 투쟁의 적절한 요구, 즉 대안 제시는 그 투쟁의 강고함과 연대를 확대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사기업을 살리는 데 자금을 투입하라는 요구보다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보장하는 데 돈을 쓰라는 요구가 전체 노동계급을 더 잘 단결시킬 수 있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부도 기업의 노동자 일자리 보장 문제가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안 문제는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쌍용차 공장 점거 파업은 기업과 정부가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려 할 때 노동자들의 분노가 솟구쳐 첨예한 격돌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 준 상징적 투쟁이었다. 실로 영웅적인 77일 파업 동안 노동자들의 드높은 기세를 지켜보며 응원하고 이런저런 연대 활동에 참가하고 승리를 염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치 전기에 감전된 듯한 전율·영감·희망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을 짓누르는 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과 노동계급의 투쟁 잠재력을 확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기업주들이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하고 이명박이 투쟁을 탄압하는 것을 보며 어느 정도 위축되기도 하고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 투쟁은 선방이었음에도 아쉬움을 많이 남겼다. 법정관리 중인 작업장이라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결연하게 점거 파업을 벌여 정리해고 인원을 줄이고 구조조정의 폐해를 고발하며 저항의 상징이 되는 등 정치적 성과가 적지 않았지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부의 악랄한 탄압을 물리치기에는 연대 투쟁이 불충분했던 것을 비롯해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있겠지만, 이 글에서는 쌍용차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려면 어떤 요구를 제기하며 투쟁해야 했는지, 즉 대안 문제를 다루려 한다. 부도 기업의 일자리 유지 방안을 물었던 쌍용차 투쟁에서 노동운동 측이 내놓은 대안은 서로 엇갈렸다. 공적자금을 투입해 한시적으로 공기업화하자거나, 영구 공기업화하자는 의견이 있었고 심지어 대안 논의는 피한 채 생존권 투쟁이면 충분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필자가 속한 다함께는 경제 위기가 심각해진 2008년부터 “부도 기업의 공기업화”를 통한 일자리 보장을 주요 요구로 채택했고, 이를 대안으로 주장하며 쌍용차 파업에 연대했다.
쌍용차 파업 지도부는 2천6백46명을 해고하려는 시도에 맞서 공적자금을 투입해서 고용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공적자금은 노동자 희생을 전제로 지원되므로, 공적자금 투입은 일자리 지키기 방안으로는 미흡했다. 게다가 지도부는 파업 전에 양보안을 한 번 내놓았고 파업 중에도 거듭 양보안을 제시했다. “살인 해고”에 맞서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싸운 노동자들이 “총고용 보장”이 가능한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적절한 대안의 부재는 쌍용차 파업을 승리로 이끄는 데서 ‘실종된 고리’였다.
물론 대안만 명확하다고 승리가 보장되거나 세력균형이 저절로 우리에게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관철할 힘이다. 그러나 적절한 요구는 투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힘을 결집하고, 정부와 사측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투쟁의 정당성을 드러내며, 나아가 광범한 연대를 구축할 수 있게 해 준다. 거꾸로, 부적절한 요구는 투쟁의 초점을 흐리면서 힘을 분산시키고 성과를 잃게 할 수 있다. 특히, 기업주들이 양보할 여지가 적은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는 대안 문제가 더더욱 중요해진다. 사소한 요구조차 첨예한 충돌로 이어지고 이를 쟁취하자면 훨씬 강력한 투쟁이 뒷받침돼야 하기 때문이다.
쌍용차 투쟁의 대안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 단순히 지난 싸움을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다. 쌍용차만 해도 재매각이 예정돼 있고, 자금난이 가중되는 GM대우도 장차 비슷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경제가 다시 곤두박질치면 여기저기서 부도 기업이 속출할 수도 있다. 따라서 앞으로 벌어질 수 있는 사태 때문에라도 부도 기업의 일자리를 유지할 제대로 된 대안이 필요하다.
쌍용차 투쟁에서 제기된 다양한 대안들
1) 공적자금 투입
2 는 일시적인 것이나마 공기업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언뜻 보면 혼동하기 쉽다. 이 때문에 좌파 활동가 상당수는 공기업화와 공적자금 투입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일부에서는 국유화 주장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데 현재 법적·경제적 상식 속에서도 산업은행이 출자전환과 추가 자본 투입을 결정하면 기존 주주들의 주식지분은 대폭 줄어들 수밖에 없으며 상하이차는 대주주 자격을 잃는다. 공적자금 투입 자체가 국유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3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공기업화”4 공적자금을 지원받은 기업주는 단기간에 실적을 내야 하므로 구조조정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이때 가장 손쉬운 재무구조 개선 수단인 정리해고를 남용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1백70조 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쏟아붓고 그 돈을 회수하려고 해당 기업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강제한 후 재매각한 일을 떠올려보면 공적자금 투입이 고용 보장 방안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특히, 공적자금 투입은 운용 과정에서 정리해고를 동반하게 된다. 현행 공적자금관리특별법은 기업의 부실 비용을 사회화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공적자금 지원 대상 금융기관의 자체 구조조정 노력을 전제로 자금이 지원되고, 경영정상화 이행약정서MOU에는 실적이 미달할 경우 총 인건비를 동결하도록 명시돼 있다.따라서 공적자금 투입 요구는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방안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공적자금 투입 요구는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상하이자동차의 손실을 보전하는 데 세금을 쏟아붓는 셈이 될 터인데, 노동조합이 이를 요구하다 보니 투쟁을 지지하는 여론을 확산시키거나 연대를 건설하는 데 장애를 초래하게 된다.
5 또한 이정희 의원실은 공적자금 지원 원칙으로 ‘고용 유지 노력 의무’를 명시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6 이런 주장은 금속노조 지도부를 비롯한 주요 개혁주의 세력과 단체들의 공적자금 투입 요구와는 구별됐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이런 견해를 일관되게 고수하지 않았다. 권영길 의원이 협상중재단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그는 사실상 노동자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태도를 보인 금속노조 지도부와 변별력 있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공적자금 투입은 상하이차의 부채를 탕감하는 효과가 있으므로 상하이차 경영 책임을 물어 대주주 지분을 무상 소각하고 그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강조는 인용자]고 주장했다.큰 틀에서 봤을 때, 금속노조 지도부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비롯한 주요 개혁주의 세력들은 공적자금 투입 요구에 머물렀다.
7 파업이 한창 진행중이던 6월 하순에 열린 민주노동당 2009 정책당대회는 2009년 2월 중앙위원회 회의가 사업 과제로 포함시킨 은행 국유화를 서민은행 설립으로 대체했고, 부도 기업 공기업화 조처는 의제에 올리지도 않았다. 8 이것은 국회에서 입법 가능한 정책을 선택하겠다는 이정희 정책위의장의 온건 노선이 반영된 것인데, 공적자금 투입의 문제점과 대주주 지분 무상 소각을 제기했던 당사자로서 후퇴가 아닐 수 없었다.
초기에 제출된 공기업화 논의를 민주노동당이 일관되게 유지하지 못한 불철저함은 개혁주의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9 진보신당은 기자회견 등에서 상하이차를 폭로하는 등 좋은 구실을 했지만 큰 틀에서는 민주노동당과 마찬가지로 개혁주의의 한계를 보였다.
진보신당은 초기에 “공적자금이 투입되더라도 과거처럼 해외 투기자본이나 국내 재벌 대기업의 배 불리기로 끝나선 안 될 것”이라며 차라리 “국유화”하라고 했지만, 이런 주장은 선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날수록 모호해졌다. 그래서 진보신당은 쌍용차를 지역기업, 국민기업으로 거듭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실장의 입을 통해 이종탁 산업노동정책연구소 부소장 등이 제기한 ‘사회화’에 공감을 표하며 지속 가능한 자동차 기업의 성장 모델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보였고, 공기업화 요구와는 선을 그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둘 다 사적 소유권에 도전해야 하는 공기업화 논의를 꺼렸다. 대신 기업 경쟁력 강화 논리에 순응하는 태도로 국회에서 입법 가능한 법안을 제시하는 등 행동을 제한하면서 정부와 정면 대결하기를 회피했다.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지도부에 연대파업을 조직하라고 촉구하지도 않았다. 이들이 촉구한 ‘노사 대타협’은 경찰력과 구사대의 폭력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공허하고 무기력했다.11 이들은 공기업화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비현실적이고,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가령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쌍용차 지부가 애초부터 쌍용차를 공기업화해서 고용을 보장하라고 요구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라는 요구에 머무른 데는 비슷한 생각이 깔려 있었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일찌감치 쌍용차 우선 회생, 공적자금 투입, 추가적인 인수·합병 반대를 주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도 양보해야 한다고 여긴 금속노조 지도부는 정부가 공적자금을 지원한다면 근무 형태를 전환하거나 무급 순환 휴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등 양보안을 내비쳤다.그러나 공적자금 투입 요구야말로 지지를 폭넓게 이끌어내고 연대를 광범하게 조직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했다. 국민 세금으로 상하이차의 손실을 메워주는 것 아니냐는 불만과 불신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공적자금 투입을 요구하다 보니 노조는 산업은행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라도 2천6백46명을 해고하고 자산을 매각하는 등 구조조정을 선행해야 한다는 사측의 강경한 태도에 계속 밀렸고, 6월 초에는 임금 양보안을, 7월 중순에는 무급 휴직안을 제시하는 등 거듭 후퇴했다. 이렇게 되자 대량해고 후에 공적자금을 지원할 것이냐, 아니면 공적자금을 지원한 후에 고통 분담할 것이냐의 차이 말고는 정리해고의 불가피함을 노사 모두 인정한 것으로 비쳤다.
결국 공적자금 투입 요구는 쌍용차 투쟁의 확대와 승리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 대안으로는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이데올로기 공격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기 어려웠고, 지지와 연대 확산을 차단하려는 정부의 파산 협박에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2) 사회화
12 그래서 그는 지역 주민, 지방정부, 노동자, 그 밖의 이해당사자가 참여하는 ‘사회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13 노동자 출자나 국민주 공모 같은 방식으로 사회화를 시도할 수 있고, 독일의 노사공동결정제도를 도입하거나 노사가 경영위원회를 구성해 생산과 투자 등 기업 운영 전반을 협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지역과 동네에서 노동자 민중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사회적 통제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14
쌍용차 지부의 정책자문을 맡은 개혁주의 성향의 이종탁 산업노동정책연구소 부소장은 “국가가 노동자들에게 더 가혹하다”며 사회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부도 기업 공기업화 방안은 국가의 구실을 과도하게 상정하는 것으로, 위기를 초래한 당사자인 국가에 기업을 맡기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공기업화가 이미 역사에서 실패한 대안이라고 본다.15 여느 사기업처럼 ‘국민’이나 노동자 같은 ‘이해당사자’의 의견이 반영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종탁의 사회화 모델은 기업 운영 원리 면에서 기존 사기업이나 국유기업과 차별성을 갖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지배적 지분을 사들일 만한 비용을 감당할 지방정부는 거의 없고, 설령 노동자나 지역 주민이 지분에 참여할 수 있더라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산업은행이 다수 지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기존 공기업이나, 정부가 지분에 참여하는 사기업과 다를 바 없다. 지방정부가 지분을 상당량 보유했다는 이유로 이종탁 등이 대안처럼 소개하는 폭스바겐 사례도 마찬가지다. 폭스바겐의 의결권은 포르셰가 50.76퍼센트, 니더작센 주 정부가 20.10퍼센트를 가지고 있어 급진적 수사修辭로 포장된 이종탁 등의 ‘사회화’ 대안은 자본주의 이윤 논리에 여전히 종속된 기업 모델을 미화하면서, 고용 보장 방안으로 공기업화 요구를 회피하는 것이다. 많은 대안세계화론자들이 공기업화를 불편하게 여기고는, 국가는 잊자며 ‘사회적 소유’나 지역적 대안을 추구하지만,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런 자율주의적 태도는 가망 없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라틴아메리카의 몇몇 국가가 외국계 다국적기업한테서 기간 산업을 회수했을 때 이를 운영할 주체는 국가 말고는 없었다.이종탁 등이 제안한 사회화 모델은 또한 산업은행이 부분적으로 지분을 소유하더라도 공적자금 투입과 마찬가지로 재매각과 추가 구조조정의 여지를 남기므로 바람직한 일자리 유지 방안이 될 수 없다.
3) 생존권 보장 투쟁이면 충분한가?
17 그러나 법정관리인과 산업은행을 통해 정부가 이미 쌍용차의 경영자 구실을 하는 상황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든 공기업화를 요구하든 그 대상이 정부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므로 이런 주장은 무의미하다.
전국노동자정치협회 같은 신디컬리즘 경향 단체들은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는 대안 논의가 자본가의 위기 전가를 돕고 정리해고 반대 투쟁을 어렵게 한다며, 공적자금 투입이나 공기업화 요구를 거부하고 생존권 투쟁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해고를 전제로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정부에 맞서, 사기업의 손실을 메워주기보다는 노동자 고용을 국가가 책임지라고, 즉 공기업화해서 고용을 보장하라고 정부에 요구하지 않고는 지금과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지키기 어렵다. 일부 활동가들은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를 쌍용차 해고 반대 투쟁과 동떨어진 기업 소유·지배 구조 논의쯤으로 취급했는데, 이는 파산·부도 작업장에서는 노동자 고용 문제가 정부 책임 문제와 긴밀히 연관돼 있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다.
쌍용차 점거 파업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했는데도 파업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양보 압력에 시달린 상황은 적절한 대안 제시가 중요함을 보여 준다. 적절한 대안이 있으면 연대 투쟁을 확산하는 연결 고리 구실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 경제 공황의 책임이 없으니 회사 처리의 대안을 노동자들이 제출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신디컬리즘적 주장은 스스로 정치적 무능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특히, 지금처럼 경제 위기가 심각한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투쟁을 회피하면 해고는 물론 각종 복지 축소 등에도 효과적으로 맞설 수 없다. 공기업화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우리가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의 낡은 실수를 되풀이해야 한다거나 기존 국가를 진보적 사회 변화의 주요 주체로 여겨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자본주의 국가는 대중의 압력에 반응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 국가는 자본의 지배를 유지하려 한다. … 이 때문에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자본에 반대하는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 국가를 파괴하고 그것을 기층의 민주주의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그래서 노동 대중이 스스로 통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 왔다.” 신디컬리즘 경향 활동가들의 정치적 약점과 대안 회피가 빚은 공백은 흔히 개혁주의 이데올로기가 메운다. 개혁주의자들은 ‘점거 파업보다는 대안 논의 사회화’가 중요하다며 주로 자동차 산업 정책에 골몰하거나 노동자 양보론을 주장했다. 신디컬리즘적 활동가들이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고 정치를 부정하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정치적 기선을 잡기는커녕 개혁주의자들에게 정치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꼴이 될 뿐이다.
20 요구를 노동자 고용 보장에 맞추고 투쟁하자는 것이다.
신디컬리즘 활동가들의 주장과 꼭 같지는 않지만 사회진보연대도 비슷한 난점을 보였다. 이현대 사회진보연대 공동운영위원장은 “소유 형태 이전에 정부의 쌍용차에 대한 구조조정 계획이 문제”라면서 “국유화만이 특별한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또는 민간자본 참여를 허용하되 정부 및 지자체 시민사회의 지분이 지배력을 행사하는 사회적 기업이 대안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현재 정세 속에서 문제 해결의 맥락을 잘못 짚은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문제는 경제 위기 시기에 부도 기업 노동자들의 고용을 어떻게 보장받을 수 있느냐다. 공기업화는 바로 이것, 부도 기업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종의 ‘진보적’ 기업 지배 구조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있지 않다. 이현대 공동운영위원장 말대로, 다급한 문제인 재매각이나 청산 위협을 제거할 현실적인 방법으로 정부가 고용을 책임지는 공기업화 말고 무엇이 있는가? 지분 소유 구조가 유사하다고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과 공적자금 투입의 차이점을 구분하지 않거나, 부도 기업의 정리해고 반대 투쟁과 공기업화 대안을 따로 떼어내어 이해하는 것은 형식주의적인 사고다.
4) 자동차 산업 재편론
21 이들은 자동차 산업 재편 방안을 대안으로 내놓아야 노동자들의 투쟁이 지지받을 수 있다고 가정했다. 노동자들도 국가 경제나 경쟁력을 고민한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일부 정치인들도 이 방안에 관심을 보였다.
이종탁, 정명기 등은 쌍용자동차가 독자 생존할 경쟁력이 없으니 GM대우와 르노삼성 등 다른 자동차 회사와 묶어서 생존 가능하도록 만들자는 이른바 ‘자동차 산업 재편’을 주장했다.그러나 기업의 지속 가능한 지배구조와 경쟁력 향상 등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 같은 견해는 시장 논리를 수용하기 때문에 노동자 고용 조정에 둔감할 뿐 아니라, 심지어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이는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 방안이 아니라 단순한 기업 재편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 고용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 자동차 산업 재편이 노동자들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5) 노동자 양보론
앞서 소개한 다양한 대안을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결국 쌍용차 파업에서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는 공식 입장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금속노조와 쌍용차지부 지도부는 정리해고 반대와 공적자금 투입을 함께 요구했는데, 공적자금 투입을 요구하다 보니 노동자도 양보해야 한다는 압력에 맞서기 어려웠고 파업이 시작되기 전부터 거듭 양보교섭안을 제시했다. 양보론을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사람은 파업 농성장에 머무르면서 교섭에 관여한 조건준 금속노조 정책국장이었다. 조건준 국장은 “어설프게 고용도 지키고 임금도 지키겠다면서 전부를 취하려 하면 거꾸로 전무라는 비참한 결과만 초래한다”며, 살아남으려면 먼저 양보하자고 주장했다. “쌍용차를 바라보는 언론과 사회를 향해 감동을 던지겠다는 각오로” 회사의 수용 여부와 관계 없이 “과감히” 양보하자는 것이었다. 외관상 급진적 용어(사회화)로 공기업화 대안을 비판하던 이종탁 부소장도 양보를 주장했다. 그는 “임금인상 투쟁에서 생산을 장악하는 투쟁으로 전환”하자며, “생산을 장악한다는 것이 매우 거창한 듯이 보이지만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면서 임금 양보가 포함된 근무시간 단축(주야 5시간 교대 근무제)을 제안했다.
그러나 양보교섭안은 정부에게 냉대받았고, 조합원들이 반발해 공식적으로 철회되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파업 지도부는 수차례 반복해서 양보안을 냈고, 그럴수록 정부의 기만 살려줬다. 반면 ‘양보론’ 주창자들의 바람과 달리 ‘한발 앞선 양보안 제시’는 노동자들을 갈수록 군색한 처지에 놓이게 했다.
정부는 노조 지도부가 드러낸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경찰 진압으로 노동자들을 옥죄는 동시에, 파산 협박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강화했다. 노동자들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파업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압력이 커졌다. 대안 부재의 약점이 두드러지는 상황이었다. 마침내 파업 노동자들은 물리적 열세로 파업을 종료하게 된다. 파업이 끝난 후 이종탁 부소장은 “구조조정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니라 철학과 비전에 근거하여 전망을 제시함은 물론 해법까지도 고민하는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 줬”고, 국무총리까지도 “노조의 합리적인 대안은 적극적으로 검토하라”는 립서비스를 했다며 자화자찬했다.
25 그것은 바로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이었다.
그러나 드높은 투쟁력에 걸맞게 연대를 광범하게 건설하려 해도 양보 교섭이 아니라 제대로 된 대안 제시가 필요했다. “(양보론을 제기한)우파적 반발에 잘 저항하고 노동자 운동 전체를 하나로 결속하기 위해 진정한 대안을 중심으로 결속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부도 기업 공기업화를 통한 일자리 보장
부도 기업이 파산하면 그 고통은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몫이다. 책임은 기업주와 투자자, 정부에 있는데 노동자들더러 고통을 전담하라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쌍용차는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된 후 투자 축소와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 경영 상태가 악화됐고,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감원과 임금·복지 축소에 시달렸다. 기업주와 투자자들에게 대가를 물리기 위해 상하이차의 지분을 전부 무상으로 몰수하고 공기업화해야 했다.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이 필요한 것은 고용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동원할 주체가 재벌과 투기자본을 제외하고는 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쌍용차처럼 자산 규모가 큰 대기업이 부도날 경우 재벌이나 외국계 자본이 인수하는 경우가 흔한데, 이 과정에서 거의 예외 없이 정리해고가 뒤따랐다. 재벌이나 해외기업에 매각하지 말고 공기업화해 정부가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해야 한다. 필요한 재원은 부유층에 세금을 더 많이 물려서 충당하면 된다. 금융기관과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하는 데 쏟아부은 천문학적 금액의 일부만 있어도, 부유층 감세와 4대강 사업 등으로 낭비되는 돈만 가지고도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킬 수 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각국 정부들은 공기업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그것은 기업주와 투자자를 살리는 공기업화로, 우리가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기존 주주들에게 보상하게 되면 결국 국가 재정이 투자자와 기업주를 살리는 데 탕진하게 되는 셈인데, 이런 식으로 이윤은 사유화하고 손실만 사회화하는 방식의 공기업화는 노동자들에게 경제 위기의 대가를 전가할 뿐이다. 그래서 각국 정부의 기업주 빚 갚아주기식 공기업화에 대중적 반감이 형성됐고, 지난 2009년 1월 세계사회포럼 사회운동총회는 “무상無償 공기업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기업주 보상 문제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몇몇 서유럽 국가가 추진한 공기업화 조처 때도 중요한 쟁점이었다. 예를 들어, 영국 중앙은행을 공기업화할 때 주식 보유자들은 이전과 동일한 수입을 보장받았고, 프랑스 르노 자동차를 공기업화할 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정부가 기업주와 투자자에게 보상을 하면 부도 기업 공기업화의 의미는 퇴색되고 만다. 따라서 보상 없는 공기업화, 보상 없는 기존 경영진 해임, 노동자 고용 완전 보장을 요구해야 한다.
상당수 개혁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공기업화가 너무 급진적이어서 현실성이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최근 금융 공황 이후 상당수 국가가 기업 부도가 초래할 투자자들의 손실과 경제 혼란을 완화하려고 공기업화를 단행했다. 그렇다면 왜 노동자 살리기 방식의 공기업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1) 오바마식 공기업화와는 구별돼야 한다
작년 세계 금융 공황 이후 각국 정부는 위기를 완화하고자 재정 지출을 대폭 확대했다. 미국과 영국 등 주요 선진국들은 AIG와 시티은행을 비롯해 굴지의 금융기관들을 줄줄이 공기업화했고, 오바마는 급기야 GM까지 공기업화했다. 그러나 각국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화는 대량해고를 전제로 투자자들과 기업주들의 손실을 보전하는 방식이었다. 오바마의 공기업화도 국가가 기업의 일부 지분을 매입했다가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재매각할 생각으로 추진한 것으로, 일시적으로 세금을 끌어다가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하는 것에 불과했다. GM 공기업화도 공장 14개를 폐쇄하고 2만여 명을 해고하고 자동차 판매영업소를 40퍼센트 축소하는 계획을 전제로 했다. 오바마는 GM을 회생시켜서 반년이나 1년 반 안에 다시 매각하겠다는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요컨대, 오바마 정부는 일자리를 지키려고 5백억 달러를 투입한 것이 아니었다. GM 파산이 초래할 경제적 충격을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 강력한 구조조정으로 기업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을 확보해 주고, 부실 기업의 재정을 국가가 메워서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호한 것이다. 물론 기업 청산으로 대량 실직 사태가 벌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노동자들의 고용을 부분적이나마 보장하는 것이 덜 나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는 대량해고를 피할 수 없고, 이를 통해 투자자들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조처가 노동자들의 대안일 수도 없다.
오바마식 공기업화, 즉 공적자금 투입을 통한 일시적 공기업화 조처는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도 무려 1백70조 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파산했거나 부도 위기에 몰린 기업에 자금을 제공했고, 부실 채권 매입과 지분 인수 등으로 상당수 기업들이 형식상 정부 소유가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주들은 손실을 보전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재산이 증가한 자들도 많았다. 반면, 공적자금 투입을 조건으로 해당 기업에서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동반됐는데, 공적자금 회수 절차에 따라 추가적으로 구조조정하거나 다시 매각되곤 했다. 쌍용자동차가 대표적 사례다. 1998년 부도 위기에 몰려 대우자동차에 매각됐다가 대우그룹의 부도로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는 몇년 후 상하이자동차에 매각됐다. 올해 초 다시 법정관리에 들어간 쌍용자동차는 앞으로 또 한 차례 매각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또 희생될 것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세금을 끌어다가 기업주와 투자자만 살리는 오바마식 공기업화는 대안이 아니다.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는 공기업화가 필요하다.
2) 사회민주당 집권 시절 서유럽 공기업화의 경험
부도 기업 공기업화 요구에 부정적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과거에 사민당 정부가 추진한 공기업화의 문제점을 들어 비판 논리를 편다. 그러나 우리가 “부도 기업의 공기업화” 요구를 주장한다고 해서 사민당 집권 시절의 공기업화에 환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요구는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을 위한 것이다.
자본주의 공기업이 사기업보다 진보적이거나 경영 방식이 우월한 것은 아니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나라들에서 사민당 정부가 공기업화를 추진했지만, 이는 자본가들을 위협하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지위에 변화를 일으키지도 않았다. 영국의 공기업화는 지배계급의 부나 권력에 도전하지 않았고, 주식 보유자들과 기업주들에게 충분히 보상했다. 영국 노동당은 국유기업에 노동자 통제를 도입하지 않았고, 고작 노조 관료 소수만이 공기업화된 기업에서 상징적 직책을 얻었을 뿐이다. 공기업화된 광산과 철도 노동자들은 옛 기업주에게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기업화된 기업을 ‘자신들의 것’이라고 느끼지도 않았다.
28 심지어 공산당의 영향력이 컸던 노조는 생산성 제일주의라는 정부의 경제 정책을 전달하고 집행하는 구실을 자임했다. 공기업화된 전기·가스·광산·보험·은행 업체들도 나머지 민간 경제가 원활하게 작동할 수 있게 도왔다. 이처럼 자본주의 내의 공기업화는 자본가 계급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았다. 주식 소유자들은 시장 가격에 근거해서 보상을 받았고, 공기업화는 일부 기업들에 국한됐다. 29
사정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였다. 1944~47년 프랑스 공산당과 사회당과 기독민주당의 연립정부는 공기업화 조처를 대거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기업 소유주가 나치 점령군에 부역했던 르노자동차 같은 기업을 다루는 방법으로 활용되는 데 그쳤다. 르노는 민간기업 부문을 조정하는 국가 경제 정책의 주요 도구가 됐다.옛 소련을 비롯한 중국과 북한 같은 국가자본주의 체제의 국유기업 역시 노동자가 통제하는 진정한 민주적 기업과는 전혀 관계 없었다. 옛 소련과 동유럽, 북한 등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국가 관료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사적자본가와 비슷한 구실을 했다. 이런 명령경제 체제의 공기업화는 형태만 다를 뿐 자본 축적과 억압적 국가권력에 복무한다. 심지어 이런 체제 하의 국유기업에서는 노동조합 결성 자유조차 억누르기 일쑤였다.
30 국가 개입은 자본주의 생산 활동을 뒷받침하는 기반 시설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독일 철도는 오래 전부터 공기업화된 상태였고, 영국에서는 보수당 정부가 나서서 전력망과 항공 산업을 공기업화했다. 31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국유기업의 구실이란 근본적으로 체제의 이익에 복무하는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각국 정부는 민간 자본을 지원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스스로 자본을 축적하려고 경제에 개입했다.이런 기업 운영 방식이 노동자들에게 진보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우리가 지금 요구하는 “부도 기업의 공기업화”는 순전히 다니던 직장의 부도로 실직 위협에 내몰린 노동자들의 고용 보장 방안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3) 지금 당장 사회주의적 공기업화를 요구해야 하는가?
32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하 사노련)의 양효식은 ‘기업 회생’ 차원의 공기업화와 국유화가 과잉생산으로 말미암은 고용불안의 대안이 못 된다며, 노동자 무장기구와 평의회 등을 기반으로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고자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각에서는 노동자 산업 통제가 동반된 공기업화만이 지금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 공격에 맞선 진정한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공기업화 요구가 온전하려면 노동자 정부 수립 투쟁과 결합돼야 한다는 것이다.그러면 지금처럼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는 투쟁이 당장 벌어질 가능성이 없을 때, 쌍용차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 방안은 무엇인가? 사노련이 사회주의적 수준의 국유화 강령을 쌍용차 투쟁에 적용하고는 노동자 무장기구와 평의회를 동반하지 않는 국유화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공허하다. 이런 식의 주장은 현실 투쟁이 승리하도록 돕는 데 아무 쓸모가 없다.
현실의 세력관계에 조응하지 못하고 현재 벌어지는 투쟁 수준에 적용할 수 없는 행동강령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다. 사노련은 겉보기에 혁명적 대안을 견지하는 듯했지만 그것을 실현할 투쟁이 뒷받침되지 않는 현실에 직면하자 결국 개혁주의자들의 공적자금 투입 요구에 머물렀다.
행동강령
33 “1934년 6월 트로츠키가 작성한 프랑스 행동강령도 당시 투쟁의 요구들에서 우러나온 매우 구체적인 것이었고 투쟁의 당면 요구에서 비롯하지만 새로운 사회 건설로 나아갈 수 있는 요구들이었다.” 34
행동강령은 이윤 논리에 도전하는 요구이지만 동시에 현 계급 세력균형과 너무 동떨어져 당장의 투쟁 요구로서 무의미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현실의 투쟁이 제기하는 노동자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대안이어야 한다. “모름지기 진지한 강령이라면 현재의 투쟁과 대중의식에서 출발해야지 추상적 원칙에서 요구를 끌어내서는 안 된다. 그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한 현실의 투쟁은 개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현재 존재하는 자본의 논리와 직접 충돌할 것이다.”이런 점에서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는 사회주의적 강령은 명백히 아니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기업이 부도날 때 국가가 공기업화로 노동자의 고용을 책임지라는 요구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한사코 경제 위기의 책임을 우리 계급에 전가하려 한다. 정부는 재원이 있고, 노동자들에게는 더 많은 일자리가 필요하다. 따라서 낭비되는 재원을 동원해 부도 기업을 정부가 인수하고 경영해서 노동자들의 고용을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경제 위기가 심각해질수록 정부와 기업은 그 대가를 노동계급에게 떠넘기려 하는 상황에서 개별 기업 차원의 양보교섭 같은 방식으로는 일자리를 지키기 힘들다. 더욱 공세적이고 일반화된 정치적 대안이 필요하다. 부도 기업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같은 행동강령은 저들의 우선순위를 뒤집으며 저항과 연대의 결집점이 될 수 있다. 이 요구 자체가 이윤 체제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요구들을 쟁취하려면 강력한 대중 투쟁이 필요하다. 이를 위한 투쟁은 이윤 논리와 충돌하고 따라서 기업주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국가와 충돌할 것이다. 그럴 때 체제의 논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거부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요구들은 현재 노동계급의 의식과 근본적 변혁 투쟁 사이를 연결하는 다리 구실을 할 수 있다. 이런 요구를 제안하고 토론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대중 행동을 건설해야 한다.
주
- 필자를 비롯한 다함께 노동조합팀원들은 5~6월 잠시 동안 공적자금 투입 요구를 지지하는 착각을 겪기도 했다. 실용주의적 압력에 휘둘린 이 혼란은 다함께의 다른 활동가들과 토론하며 교정됐고, 이후 다시 공기업화 요구를 견지했다. ↩
- 금속노조 공계진 정책연구원장은 4월 23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쌍용차 독자적으로는 완성차 생산 공장의 한 축을 형성하기 어렵고 (독자 생존에 대한)국민적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에 공적자금 투입을 전제로 ‘한시적 공기업화’”를 하자고 주장했고, 경영이 정상화되면 GM대우와 통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
- 이현대, ‘쌍용자동차 투쟁과 향후 민중운동의 과제’, 《진보평론》 41호(2009년 가을), 188쪽. ↩
- 이정희 의원실, 공적자금관리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반대 토론, ‘목숨과 같은 일자리 지켜져야 합니다’, 2009년 4월 29일 임시국회 본회의. ↩
- 이정환, ‘쌍용차 국유화, 안 될 건 뭐가 있나’, 〈미디어오늘〉(2009.6.7). ↩
- 이정희 의원은 공적자금관리특별법 개정안에서 이런 주장을 폈다. 개정안의 내용은 공적자금 관리위원회를 신설해서 고용 유지 여부를 감독하고, 관리위원회에는 노동계가 추천한 위원이 포함되며, 고용 유지 원칙을 신설하고, 총 인건비 동결 조항을 삭제하며, 주주 배당 금지 원칙을 삽입하자는 것이었다. ↩
- 최일붕, ‘상반기 정치투쟁의 연장이자 대미 장식으로서 쌍용차 투쟁’, 〈레프트21〉 13호(2009.8. 29). ↩
- 김인식, ‘민주노동당 2009 정책당대회, ‘이명박 퇴진’과 계급연합 전략을 동시에 채택하다’, 〈레프트21〉 9호(2009. 7. 4). ↩
- 장석준, 금속노조 주최 긴급 토론회 ‘위기의 쌍용자동차, 어떻게 할 것인가’(2009.1.15) 토론에서. ↩
- 정진희, ‘쌍용차 파업과 진보정당의 구실’, 〈레프트21〉 13호(2009.8.29). ↩
- 작년 말과 올해 초 정갑득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노동자 양보론을 연거푸 제시했다가 투쟁적 활동가들의 반발을 사 일부 철회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금속노조 지도부는 쌍용차 파업 때도 기자회견과 협상장에서 이 같은 양보론을 계속 내비쳤다. ↩
- 이종탁, ‘이제 ‘사회화’를 중심으로 미래를 구상해야 한다’, 〈레프트21〉 5호(2009.5.9). ↩
- 이종탁, 금속노조 주최 긴급 토론회 “위기의 쌍용자동차, 어떻게 할 것인가”(2009.1.15) 발제문. ↩
- 같은 글. ↩
- 정명기, 금속노조 주최 긴급 토론회 ‘위기의 쌍용자동차, 어떻게 할 것인가?’(2009.1.15) 토론문. ↩
- 알렉스 캘리니코스, ‘신자유주의의 대안’, 《이명박의 미친 민영화·시장화 OUT》, 다함께, 2008, 136~137쪽. ↩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쌍용차 투쟁평가2 – 문제는 국가이다!’, 〈노동자정치신문〉 54호(2009년 7,8월) ↩
- 알렉스 캘리니코스, 앞의 글, 138쪽. ↩
- 필 테일러, ‘신디컬리즘이란 무엇인가’, 《잘못된 운동 조류》, 다함께, 63쪽. ↩
- 이현대, 앞의 글, 188쪽. ↩
- 민주노총 주최 토론회, ‘쌍용자동차 회생방안은 무엇인가?’(2009.4.23) 자료집. ↩
- 조건준, 《아빠는 현금 인출기가 아니야》, 매일노동뉴스, 2009. ↩
- 이종탁, 평택안성 공투본 주최 토론회, ‘새로운 운동으로 쌍용차의 미래를 열자’(2009.3.25) 발제문. ↩
- 이종탁, ‘쌍용차 투쟁의 전개 과정과 의의’, 《진보평론》 41호(2009년 가을), 173 쪽. ↩
- 최일붕, 앞의 글. ↩
- 이언 버첼, 《서유럽 사회주의의 역사》, 갈무리, 1995, 72쪽, 78쪽. ↩
- 같은 책, 72~73쪽. ↩
- 같은 책, 77쪽. ↩
- 같은 책, 77쪽~78쪽. ↩
- 크리스 하먼, ‘신자유주의의 진정한 성격’, 《21세기 대공황과 마르크스주의》, 책갈피, 2009, 109쪽. ↩
- 같은 책, 94쪽. ↩
- 양효식, ‘사회주의자들은 왜 노동자 산업 통제하의 국유화를 요구하나’, <가자! 노동해방> 33호(2009.7.10). ↩
- 알렉스 캘리니코스, 《좌파의 재구성과 변혁 전략》, 책갈피, 2009, 250쪽. ↩
- 크리스 뱀버리, ‘트로츠키의 공동전선과 노동자 투쟁’, 〈레프트21〉 12호(2009.8.15). ↩
- 〈레프트21〉,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 http://www.left21.com/article/6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