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적 시각에서 본 국가 재정 논쟁
재정준칙(fiscal rules)은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재정 수입, 재정 지출, 재정 수지, 국가 채무 등 국가 재정 관련 총량적 지표에 대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구체적인 재정 운용 목표를 정하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단일 준칙으로는 국가채무준칙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고, 2개 이상의 준칙을 사용할 경우 재정수지준칙과 국가채무준칙을 가장 많이 사용한다.
재정 수지는 재정 수입과 재정 지출 사이의 차이인데, 보통 재정 수입이 재정 지출보다 많으면 흑자 재정, 그 반대의 경우에는 적자 재정이라고 한다. 국가 채무는 중앙정부, 지방정부, 공기업의 부채를 포함하는 것(D2)이 일반적이지만 국제적 비교를 위해 보통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부채(D1)만을 계산한다. 2019년 한국의 D1은 728조 원(GDP 대비 38퍼센트)이고 D2는 1750조 원(GDP 대비 90퍼센트)이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의 내용은 두 가지다.
2 를 -3퍼센트로 하되, 한 지표가 기준치를 초과하더라도 다른 지표가 기준치를 밑돌면 충족하도록 했다. 기획재정부는 두 지표가 상호보완적으로 설계된 점이 ‘한국형’이라고 강조했다. 한도 계산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을 60퍼센트, 통합재정수지(국가 채무 비율/60퍼센트) * (통합재정수지 비율/-3퍼센트) ≤ 1
둘째, 한국형 재정준칙을 2025년 회계 연도부터 적용하고 재정 환경의 변화를 감안해 그 한도를 5년마다 재검토할 수 있도록 했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을 두고 신자유주의자들과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들이 치열하게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재정준칙을 실행하는 것이 소위 재정 건전성에 도움이 될까? 코로나19 때문에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펴야 하는 이 때 재정준칙을 꺼내는 이유는 뭘까? 60퍼센트와 마이너스 3퍼센트는 무엇에 근거한 수치인가? 여러 가지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신자유주의 입장과 케인스주의 입장
재정 건전성과 재정준칙을 두고 신자유주의 진영과 (포스트) 케인스주의 진영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두 진영이 모든 면에서 대립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두 진영 사이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3 그래서 국가가 적자 재정을 통해 재정 수입보다 많은 자금을 재정 지출로 사용할 경우, 신자유주의자들은 더 늘어난 지출만큼 민간 부문의 자본이 위축될 것이라고 본다. 4
먼저 차이점을 살펴보자.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의 균형 재정을 옹호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정부를 시장 외부에 존재하는 요소로 보고, 또 시장의 자기 조절적 균형을 금과옥조로 신뢰하기 때문에 이런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들(예를 들어 정부의 경제 개입과 노동조합의 임금 인상 투쟁 등)을 극도로 싫어한다. 이런 개입이 경제에 긍정적 작용을 하기보다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라고 본다.5 두 사람은 국가 채무가 GDP의 90퍼센트를 넘어서면 경제 성장의 둔화가 뚜렷해진다고 주장했다. 국가가 감당할 수 있는 빚의 규모에 상한선이 존재하는 듯한 주장이었다. 당연하게도 신자유주의자들은 환호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인하트와 로고프의 연구 결과는 계산 오류와 잘못된 해석에 기반한 엉터리로 탄로 났고, 이들의 주장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재정 건전성 이데올로기는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카르멘 라인하트와 케네스 로고프가 쓴 《이번엔 다르다》(다른세상)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연구물이다.반면, 케인스주의자들은 정부의 재정 지출이 민간 자본을 위축시키는 구축 효과를 부정하지 않지만, 민간 자본을 위축시키는 것보다 더 큰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재정의 승수 효과乘數效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국가가 특정 사업을 위해 국채 20조 원을 발행해 자금을 모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민간의 자금이 국가로 흘러가면서 민간 부문의 자금은 줄어들고 금리는 올라가는 상황이 발생한다. 금리 상승 때문에 민간 자본은 투자 의욕을 상실한다. 국가가 20조 원을 조달해 공공사업을 하면 민간 부문에서는 20조 원만큼 투자가 위축된다. 그래서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가 적자 재정 지출을 하는 것은 아무런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재난지원금 같은 지출의 경우 ‘공짜 점심’을 제공함으로써 도덕적 해이를 낳는 최악의 퍼주기라고 본다.
그러나 케인스주의자들은 이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즉, 국가가 20조 원을 조달해 공공사업을 하면 민간 부문에서는 20조 원이 위축(즉, 구축)되지만 정부가 20조 원으로 민간 부문의 기계류나 시멘트 또는 노동력 등을 구매하기 때문에 이 재화를 판매한 기업들은 더 많이 생산하게 되고 그래서 선순환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의 경우에도 ‘공짜 점심’이긴 하지만 그 점심에 필요한 식재료 공급 기업이나 음식점들이 판매를 더 늘려 경제 전반에 선순환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케인스주의자들은 승수 효과가 항상 1보다 크다고 생각한다.(앞에서 지적했듯이, 신자유주의자들은 승수 효과가 없다고 본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나 (포스트) 케인스주의 둘 다 투자를 결정하는 요소가 이윤율이 아니라 이자율(금리)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핵심 지적이다. 앞에서 언급한 예를 들어 설명하면, 20조 원어치 재화를 판매한 민간 기업들이 더 많은 생산을 위해 투자할 수도 있고(승수가 1이 넘어 승수 효과가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승수는 1 이하일 수 있다). 그래서 투자를 결정하는 요소에는 금리도 있지만 결정적인 요인은 예상 투자 수익률, 즉 예상 이윤율이다.
물론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을 때에는 국가가 확장적 재정 지출을 할 수 있다. 이윤율이 매우 낮아 민간 부문에서 투자가 거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되면 국가는 비록 승수 효과는 없을지라도 경제가 추락하는 것을 유예하기 위해 확장적 재정 지출을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자나 케인스주의자 모두 재정 건전성 이데올로기를 근본에서 부정하지 않는다. 케인스주의자도 적자 재정을 계속 시행해 국가 채무가 늘어나면 미래의 어느 때에는 세금을 더 거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케인스주의자들은 재정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경제의 지속 가능성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포스트케인스주의 진영에 속해 있는 나원준 경북대 교수는 “만약 경제가 엉망이라면 재정이 국가 채무 비율이나 재정 적자 비율의 잣대에 비추어 아무리 건전해도 그런 재정을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가계 부채가 GDP의 100퍼센트에 육박할 정도로 국민들은 빚의 고통에 살고 있는데, 국가 채무가 GDP의 40퍼센트 정도로 양호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냐고 꼬집는다. 2008년 경제 위기가 채 회복되기 전에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마스트리히트조약에 따른 재정 건전화를 강조했고, 이 때문에 그리스 같은 국가들이 희생양이 됐다. 2012년 유로존이 위기에 빠졌을 때 국가 부도의 위협을 받았던 그리스에서 복지를 삭감하는 긴축 재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었다.
을 미쳐 국가 채무 비율을 오히려 높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포스트케인스주의자인 요제프 슈타인들은 국가 채무를 늘리지 않으려고 긴축을 할수록 결과적으로 채무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부채의 역설’을 강조했다. 국가 채무 비율은 분자가 국가 채무이고 분모가 GDP인데, 분자를 줄이려 노력했더니 분자보다 분모가 더 빠르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018년에 케인스주의자인 로렌스 서머스는 국가 채무 비율을 낮추려는 긴축 정책이 장기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요약하면,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 채무를 관리하기 위해 재정준칙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고 보지만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들은 적자 재정을 펼쳐서라도 경제를 위기에서 구출하는 것이 우선적이며 그래야 재정 건전성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형 재정준칙’을 발표한 기획재정부는 케인스주의보다 신자유주의에 더 가까운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 부총리 홍남기는 재난지원금 지급도 처음에는 강경하게 반대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여론을 의식한 민주당으로부터 압력을 받아 마지못해 지급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때조차 액수를 줄이고 선별 지급을 강조했지만 관철되지 못했다. 7
현대화폐이론
8 없이 얼마든지 필요한 재정 지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주류 경제학의 두 진영과는 다른 입장이다. 예를 들어 현대화폐론자들은 국가가 적자 재정과 심지어 국가 부도의 걱정 없이 그린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화석연료를 대체할 신재생 에너지 사업이나 대규모 경기부양책을 추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대화폐이론은 국가가 재원 마련의 부담 국가가 재원을 마련하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국채를 발행해 시중에 매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폐를 발행해 시장에 주입하는(양적완화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것이다. 국가가 국채를 발행하는 것은 민간의 자금을 흡수하고, 시장 금리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국가(즉 재무부)가 중앙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려서 재정 지출을 할 경우(즉, 화폐를 발행하는 경우) 국가는 중앙은행에 이자를 갚아야 하지만 민간 부문의 자금을 흡수하는 작용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재무부의 이자 부담은 중앙은행의 이자 수익으로 나타나지만 중앙은행도 국가기구의 일부이므로 재무부의 이자 부담 증가가 재정 적자를 더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현대화폐이론가들은 국가가 화폐 발행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린 뉴딜 같은 공공 지출에 필요한 재원을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현대화폐이론은 주류 경제학과는 다른 이단적 입장이라 할 수 있다.현대화폐이론의 약점 중 하나는 국가 채무의 무게를 경시한다는 점이다. 수출입이나 관광 등 대외 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국가 채무가 무한정 늘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데, 국가 채무 증대가 환율 변동이나 자본 유출 등의 부작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 이후 각국의 경제 위기 대응이 보여 줬듯이, 오늘날 코로나19로 악화된 경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이 취한 확장적 재정 정책은 국가 채무를 늘릴 것이고 그리 되면 코로나19 이후의 경기 회복을 불안정하고 미적지근하게 만들 것이다.
60퍼센트와 3퍼센트
기획재정부는 코로나19에 따른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집행한 적자 재정 때문에 2020년 국가 채무가 GDP의 40퍼센트가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재정 적자가 매년 3퍼센트씩 누적되면 2025년에는 국가 채무가 60퍼센트에 근접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경각심을 갖고 재정 적자와 국가 채무가 더 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한국형 재정준칙’을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기획재정부는 ‘한국형 재정준칙’을 2025년부터 적용한다고 하지만 사실상 지금부터 재정 적자를 일정한 기준 이하로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국가 채무 60퍼센트와 적자 재정 3퍼센트 룰을 표방했던 서방 선진국들과 유로존 국가들조차 코로나19 사태를 맞이해 재정준칙을 무시하고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에서 기획재정부는 시류를 거스르고 있는 셈이다.
10 케인스주의자들은 1992년 유럽연합(EU)을 출범시키기 위해 유럽공동체(EC) 회원국들이 각국의 경제 및 재정 상황의 차이를 좁히기 위해 합의한 마스트리히트조약이 국가 채무 60퍼센트와 재정 적자 3퍼센트 룰의 원형이라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1990년대 이후 전 세계 여러 국가들이 유럽 통합을 위해 만든 기준을 받아들이면서 이 기준이 글로벌 스탠더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 채무 60퍼센트와 재정 적자 3퍼센트 룰은 어디에서 나왔을까?그렇지만 경제 위기에 직면하면 국가 채무 60퍼센트와 재정 적자 3퍼센트 룰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IMF는 2011년 채무 지속 가능성 분석 보고서에서 국가 채무 비율 60퍼센트가 국가 채무의 지속 가능성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금리가 매우 낮은 상황에서는 국가 채무가 대규모 증가해도 큰 문제가 없다는 주장조차 나오고 있다. 금리가 낮기 때문에 대규모 국가 채무의 부담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11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가 채무 평균도 108.9퍼센트다.
오늘날 서방 선진국들의 국가 채무 상황을 보더라도 60퍼센트 룰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않다. 2020년 6월 현재 한국의 국가 채무는 GDP의 40퍼센트 정도이지만, 미국과 영국 등은 GDP의 100퍼센가 넘고 일본은 심지어 224퍼센트나 된다.한국형 재정준칙에 반대하는 나원준 교수는 고용 및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한국판 뉴딜을 추진하는 데 재정 적자를 유연하게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소득 분배가 개선되면 재정 적자가 덜 필요하게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재정을 생산적인 공공투자에 적극 활용하면 경제 회복과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강국 리츠메이칸대학 교수도 “장기적으로 재정을 위해 필요한 것도 준칙이라는 족쇄가 아니라 경제 정체를 막고 성장을 촉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재정의 역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민간 투자와 생산성 상승을 촉진하는 다양한 공공투자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래의 기대 이윤율이 낮은 상황에서 확장적 재정 정책이 경제 회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점은 앞에서 지적했다. 그렇지만 확장적 재정 정책을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 있다. 1997년 한국 경제가 국가 파산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국가는 일반 대중의 삶이 파탄 날지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제금융으로 부도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살렸다. 또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이명박 정부는 24조 원을 들여 4대강 사업을 집행하며 수익성 위기에 처한 건설사들을 지원했지만 서민들을 지원하는 데는 인색했다. 따라서 국가 채무와 재정 적자가 늘어나더라도 고용과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저소득층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서 소득 분배를 개선하는 데 국가 재정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에 지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국가를 진보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포스트) 케인스주의자들의 주장과 비슷하게 국가의 공공투자 확대를 좌파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참세상연구소의 홍석만 씨는 재정 지출과 국가의 경제 개입 목표가 “시장질서와 시장이윤율의 회복”이라고 옳게 지적하지만 변혁운동진영이 “사회적 재분배와 생산의 사회화를 위한 국가투자 확대”(홍석만, 2020b)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홍석만 씨가 열거하고 있는 “재정을 통한 국가투자” 중에는 의료와 교육의 질적 확대 또는 보육과 여성의 불평등 해소 등과 같이 충분히 지지할 만한 항목이 있다. 하지만 그는 “시장을 대체하는 생산적 부문에 대한 국가투자를 확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그는 이것을 ‘국가투자의 사회화’라고 지적했다. 그는 국가의 재정 정책이 사회안전망을 확대하고 고용을 증진하는 등 소득재분배 효과를 지니는 영역에 대한 지출을 넘어서 ‘시장을 대체하는’ 것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국가가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진정한 사회주의로 나아갈 때 분쇄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시장을 대체하고 생산의 사회화를 위해 활용 가능한 도구라고 보는 듯하다. 시장 질서를 옹호하고 지탱하는 체제(국가를 포함해서)를 분쇄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해야 하거나 변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좌파) 개혁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다.
홍석만 씨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에 내재한 스탈린주의적 편향과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전제로 한 진영 테제, 그리고 자본주의 붕괴론적 시각을 배제할 때, 국가독점자본주의론과 전반적 위기론의 분석 및 방법론은 여전히 유효하다”(홍석만, 2020a)고 주장한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점을 잠시 제쳐두고 그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에게 남아 있는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의 유용성이란 국가의 경제 개입 강화로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좀더 나은 (자본주의) 체제로 바꿀 수 있다는 좌파 케인스주의적 개혁주의와 비슷하게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기획재정부의 ‘한국형 재정준칙’ 도입에 반대해야 한다. 또한 케인스주의 진영의 확장적 재정 정책 주장 중 소득재분배 효과가 있는 것들은 지지할 수 있는데, 이런 요구의 성취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성장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할 것이다. 국가의 재정 정책이나 더 나아가 자본주의 국가를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데 진보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은 노동자 투쟁 구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다. 국가를 통한 생산의 사회화라는 (좌파) 개혁주의적 주장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는 혁명적 대안과 조화될 수 없다.
주
- 기획재정부의 ‘한국형 재정준칙’ 발표가 곧 문재인 정부가 긴축 정책으로 선회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경제가 회복될 조짐을 보일 때까지 확장적 재정 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국가 채무가 급격히 늘어나면 채무 부담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는 긴축으로 돌아설 수 있다. ↩
- 통합재정수지는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재정 수지(이것을 순純재정수지 또는 관리재정수지라고 한다)와 4대 사회보장성기금(국민연금기금, 사학연금기금, 산재보험기금, 고용보험기금)의 수지를 합한 것이다. 4대 사회보장성기금이 흑자이기 때문에 통합재정수지의 적자가 관리재정수지보다 보통 1~2퍼센트포인트 낮게 나온다. ↩
- 신자유주의자들이 정부의 경제 개입에 항상 반대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경제 위기나 최근 코로나19 사태처럼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경우 신자유주의자들도 국가가 경제에 개입해 구제하는 정책을 옹호했다. 코로나19로 악화된 경제 위기에 직면해 IMF와 세계은행WB 같은 신자유주의 국제기구들도 재정 건전성을 위한 긴축 정책보다는 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 확대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는 위기가 끝날 때까지 재정 지원이 계속돼야 한다고 주장해 ‘긴축의 종말’ 선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 이것을 구축 효과驅逐效果라고 한다. ↩
- 2020년 10월 중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의 연차 총회에서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인 카르멘 라인하트 교수는 부채 위기의 위험이 커지더라도 팬데믹의 충격 앞에 개발도상국들은 우선 빚을 내서 싸워야 한다고 말해 이전과 다른 입장을 드러냈다. ↩
- 그리스의 상황에 관해서는 《그리스 외채 위기와 시리자의 부상》(2015, 책갈피)을 보라. ↩
-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을 위해 적극적 재정 정책을 쓰겠다고 했지만 실상은 이전 우파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균형 재정 정책을 펼쳐 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강동훈(2018)을 보라. ↩
- 페이고(번 만큼 쓴다는 Pay as you go의 줄임말) 원칙이라고 한다. 정부 각 부처가 비용이 수반되는 정책을 만들 때 이를 위한 세입 증가나 법정 지출 감소 등 재원 확보 방안도 함께 마련하도록 의무화한 것을 뜻한다. 미국의 경우 재정 건전성을 위해 1990년에 페이고 원칙을 도입했다. ↩
- 현대화폐이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논평은 이정구(2019)를 보라. ↩
- 2015년 IMF의 자료에 의하면, 국가 채무 준칙 적용 국가들 중 GDP 대비 국가 채무 상환 기준을 갖고 있는 63개국 중 60퍼센트 기준을 채택하고 있는 국가는 40개국이며, 재정 수지 준칙을 채택하고 있는 73개국 중 적자 재정 3퍼센트 준칙을 받아들이는 국가는 38개국이다. ↩
- 선진국 중 GDP 대비 국가 채무가 가장 큰 일본은 국가 채무 및 재정 수지 준칙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
참고 문헌
강동훈 2018, “’소득주도성장’ 의지를 보여 주기에도 부족하다”, <노동자 연대> 257호, https://wspaper.org/article/20899.
로고프, 케네스 & 라인하트, 카르멘 2010, 《이번엔 다르다》, 다른세상.
이정구 2019, “현대화폐이론 비판”: 정부는 정말 화수분인가?” 《마르크스21》 30호.
캘리니코스, 알렉스 & 쿠벨라키스, 스타티스 외 2015, 《그리스 외채 위기와 시리자의 부상》, 책갈피.
홍석만 2020a, ‘코로나 위기 속 변혁적 정치운동의 과제’, 《변혁정치》 106호.
홍석만 2020b, ‘국가 재정의 정치경제학: 국가독점자본주의 위기 속 재정정책을 둘러싼 투쟁’, 《변혁정치》 1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