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연대의 역사
이 글은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이 2017년 8월 단체 회원 교육에서 한 발제를 글로 다듬은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2017년 박근혜 정권 퇴진 직후까지 노동자연대의 역사와 특히 특정 정세 속에서 단체의 전술 전환 배경과 맥락을 교훈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 단체의 역사를 토론하는 이유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내기 위해서다. 여러분도 자신의 인생, 특히 의식이 있던 십대 이후의 삶을 돌아보면서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라든가 ‘앞으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것이다. 개인 인생처럼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광주 항쟁, 19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 등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것은 그 당시 무엇이 가능했고 무엇이 필요했고 무엇이 중요했는지 또 무슨 일은 불가능했는데 헛되이 수행하려다가 괜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고 환멸만 일으켰는지 등 역사에서 많은 것을 돌아보고 배우기 위해서다.
‘역사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다’라는 E.H 카의 잘 알려져 있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단체의 역사를 토론하는 것도 우리의 실천을 돌아보고 내일을 위한 교훈을 얻기 위해서다.
단체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지하 조직의 시기였고 둘째는 민주노동당 입당의 시기였고 셋째는 민주노동당 탈당과 독자적 정치의 강화 시기였다. 지하 조직 시기는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이 넘는데, 사실 1980년대에 운동 단체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다 지하 조직 활동을 했고, 해야만 했다. 민주노동당 입당 시기는 2000년 1월부터 2012년 7월까지로 12년동안이었다. 단체가 민주노동당을 나온 지는 현재 5년 정도 됐다.
그 시기들을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990년대 지하 조직 활동
나는 1989년에 중국 톈안먼 항쟁의 영향을 받아서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 당시 우리 나라 좌파들은 다 중국을 사회주의로 봤기 때문에, 톈안먼 광장에 수백만 명이 모이는 엄청난 규모의 항쟁이 일어나자, 당혹스러워하며 숨 죽이고 지켜봤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당시 중국 정부의 유혈 진압을 지지했다.
나는 그때 이런 중국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하고 아무 관계가 없고 다른 무엇일 거라 생각했다. 톈안먼 항쟁은 민주주의 기본권을 요구하는 운동인데 그걸 무력 진압하는 정권이 사회주의적일 수 없다고 봤다. 그리고 중국에 관해서 탐구한 끝에 국가자본주의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에 따라서 청년, 학생, 노조 활동가를 모아서 국제노동자동맹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조직을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지식인들이 농민을 이끌고 게릴라 투쟁을 해서 1949년에 정권을 잡았다. 그래서 제국주의를 쫓아내고 봉건적인 지주 제도를 폐지했다. 그건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 없었기 때문에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을 노동계급 자신의 힘으로만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제1인터내셔널을 창립할 때도 잠정규약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없이 소련 탱크가 동유럽이나 북한에 진주해서, 혹은 중국처럼 지식인이 농민을 이끌고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사회주의와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였다. 서구가 시장자본주의라면 중국이나 한국 같은 곳들은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국가가 강력하게 경제를 통제하고 일종의 자본가 노릇을 하면서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사회였다. 오늘날 우리는 중국을 시장 지향적 국가자본주의이자 제국주의로 보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입장은 28년 전 단체의 창립 강령의 일부라고도 할 수 있다.
1990년 9월에 국제노동자동맹은 분화했다. 다수파는 아나키즘과 신디컬리즘이 버무려진 아나코-신디컬리즘 강령을 채택했다. 아나키즘은 모든 권위에 반대하는 종류의 사상이다. 운동 내에서의 권위든 ― 우리 스스로 선출해서 지도부를 세우는 것을 포함해 ― 운동 바깥의 국가의 권위든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상이다. 신디컬리즘은 노동조합이 혁명적이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다수파는 그 뒤에 각각 아나키스트와 신디컬리스트로 갈라졌고 몇 년 뒤에 다 조직이 소멸했다.
나와 다른 세 명이 소수파로서 국가자본주의론, 혁명적 사회주의 입장을 채택해서 새 출발을 했다.
1991년 8월에 소련이 몰락했다. 소련 몰락은 국가자본주의론의 타당성을 입증한 사건이었다. 우리는 소련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의 한 변형태로 봤기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빠진 소련이 붕괴하거나 노동계급의 혁명이 일어나거나 두 방향 중 하나로 갈 거라고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붕괴하는 상황으로 전개됐다.
우리 예측이 맞았고 분석이 옳아서 급성장을 했다. 6개월 사이에 8배 성장했다. 소련 붕괴 전에는 회원이 겨우 스물 예닐곱 명 정도였는데 2백 몇십 명으로 성장했다.
소련 붕괴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사회주의 정치와 관련해 온갖 쟁점들을 제기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레닌주의란 무엇인가, 러시아 혁명은 쿠데타였는가, 시장은 필요한가, 혁명적 당 건설은 무의미한가, 레닌은 독재자였는가 등등. 그 시기에 우리 나라 좌파들은 혼란에 빠져서 마비되거나 붕괴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는 그저 국유·국영 경제가 아니고 노동계급이 생산과 사회를 지배하는 것인데, 소련에서 노동계급은 지배와 착취를 당했지 스스로 생산과 사회를 관리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소련이 사회주의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 시기에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매우 포괄적인 이슈들에 대해 토론하고 사상을 정리한 사람들이 지금 우리 단체의 지도부다. 그때 토론에 힘입어 강력한 이론을 갖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 사회주의 정치의 기초를 단단히 잘 닦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기초가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수학이 발전할 수 없고 그러면 공학이나 자연과학을 할 수 없는 것처럼, 기초가 잘 돼 있지 않으면 사회주의 정치를 구사하고 주장하고 실천하는 데서 여러 가지 혼란에 빠지기가 쉽다.
이렇게 급성장을 하자 당시 군사 독재 정권인 노태우 정부의 보안 경찰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1992년 2월에 보안 경찰이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조직이 대거 파괴됐다. 당시 회원 사오십 명 정도가 강촌으로 엠티를 갔었는데 보안 경찰이 전경 버스 수십 대로 둘러싸고 포위해서 모두 잡아 갔다.
나는 수배가 됐고 8개월 뒤에 체포됐다. 1996년 4월까지 수감 생활을 했는데, 중간에 가석방으로 풀려나서 9개월가량 활동하다가 다시 수감됐다. 1996년에 석방이 된 이후에도 나는 2000년까지 수배 생활을 했다.
제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당시 회원들은 아주 젊었다. 평균 나이가 만 21세 정도였다. 매우 젊었고 아직 경험이 없는 대학생 또는 대학 중퇴생, 대학 갓 졸업생들이었다. 1990년대 내내 끊임없는 탄압으로 단체의 영향력이 극소화됐다.
1997년 말에 IMF(국제통화기금)를 불러들인 경제 공황이 터졌다. 그러자 김영삼 정부와 뒤이은 김대중 정부의 혹심한 탄압으로 1997년 말부터 1999년까지 두 해 동안에만 100명이 넘는 회원들이 구속돼 재판에 회부됐다.
당시 군사 독재가 끝나고 ‘민주화’가 됐다는 둥, ‘민주’당 정부가 최초로 들어섰다는 둥 했지만 완전히 위선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1998년 봄에 우리 회원들이 서울시립대학교에서 모임을 하고 근처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하는데 그 장소를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하고 쳐들어와서 공포탄을 쏘고 회원들을 잡아갔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민주당 정부와 자유주의자들을 절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노동운동이 강력해져서 정권이 과거처럼 그런 짓을 하기는 매우 어려워졌지만, 어려워졌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고 장차 심각한 위기 상황에 처하면 다시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주당은 노골적인 자본주의 정당이고, 지배계급의 정당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이명박·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배출했던 정당이 자신들의 뜻을 잘 읽고 자신들을 위한 정책을 잘 집행한다. 그런데 그들이 위기에 처해서 자칫 이대로 뒀다가는 자신들도 민중운동이나 노동자 운동으로부터 공격받겠다 싶으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같은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을 택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지배계급의 정당으로서 본색을 드러낼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노무현 정부 때 구속 노동자 수가 그 이전 다른 어느 정부 때보다 많았다. 2007년에는 한미FTA 반대 집회를 원천 불허했다.
노무현이 이라크에 한국군을 파병한 것도 계급 본색을 드러낸 거였다. 2002년 말 한 달 동안 젊은이들 중심으로 전국에서 30만 명이 촛불 시위를 했다. 그 시위의 직접적인 쟁점은 효순이 미선이라는 의정부의 두 여중생이 미군 탱크에 깔려 죽은 사건에 항의한 것이었는데, 따라서 여기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이고 공격적인 태도에 대한 반대가 담겨 있었다. 또, 사실상 한나라당 후보 이회창을 반대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무현은 ‘나는 미국 한 번도 안 가 봤다’ 하고 말했다. 여기에 젊은이들이 완전 열광했다. 그랬는데 취임하고 한 달 반도 안 돼 미국의 조지 부시 2세의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다. 이것 때문에 노무현의 인기가 폭락했는데, 이것도 바로 민주당이 본색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 입당
민주노동당 입당 시기로 넘어가겠다. 2000년 1월에 우리는 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입당의 목적은 주로 국가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하 조직 시절 회원들의 몸에 밴 종파적인 습성도 벗길 수 있기를 원했다. 10여 년 가까이 지하 활동을 해 왔고 그래서 영향력이 최소 상태였고, 정치적 주장 외에는 할 게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종파적인 습성이 회원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같은 대중적이고 개혁주의적인 정당에 들어가서 정치적으로 온건한 사람들과 토론하고 함께 활동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 것이다.
그러다가 2001년 8월에 단체명을 ‘다함께’로 변경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우리 동지들더러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 이름을 쓰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이름을 쓰면 민주노동당이 너무 과격하고 급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2000년 12월 프랑스 니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자본주의 시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호가 ‘Tous ensemble’이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단체명으로 채택했다. 이 시위에는 프랑스만이 아니라 유럽, 북아메리카까지 전 세계의 주요 선진 자본주의 나라의 젊은이 10만 명 정도가 모였다.
2001년 9월, ‘다함께’로 단체명을 변경한 지 한 달도 안 돼 9·11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맞이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는 반전 운동과 공동전선을 강조했다. 한국의 많은 좌파들은 ‘저런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졌네’ 하는 정도로 대했지만, 우리는 국제주의자들이어서 한국에서도 반전 운동을 건설하려고 했다. 혁명가들과 개혁주의자들이 함께 활동하는 공동전선 전술을 사용해서 그렇게 했다.
우리는 단호하게 조지 부시 2세로 대표되는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을 폭로했다. 우리는 테러리즘을 지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테러리스트들(압도적으로 알 카에다였다)은 극도로 작은 암이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중동의 일부 지역에서만 해악을 끼치지만, 미국의 제국주의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핵무기를 1만 기 가까이 가지고 있어서 지구를 몇 번 날려버리고도 남을 위험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극도로 작은 악과 엄청나게 커다란 악이 붙었을 때 우리는 커다란 악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야 한다. 이때도 한국 좌파들은 대부분 태도가 모호했다. 미국과 테러리스트들에 대해 공평무사한 양비론을 취하거나 어떤 소규모 정파들은 테러리스트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이렇게 반전 운동과 공동전선 전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선동하다가 2003년에는 반전 운동을 일으키고 주도했다. 노무현 정부가 2003년에 조지 부시의 이라크 전쟁에 파병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그 상황에서 재빠르게 반전 운동을 제안하고 주도했고 덕분에 회원 수가 1년 반 사이에 무려 네 배로 늘어나 1300명까지 됐다.
2004년 봄 국회에서 당시 대통령 노무현이 탄핵 소추 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나라 진보진영의 가장 온건한 부분인 NGO 그리고 NL 동지들은 노무현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건 옳았다. 우리도 그런 입장이었다.
그런데 좌파를 자처하는 다른 동지들은 수수방관하는 입장이었다. 현재 정의당 지도부의 일부, 노동당, 사회진보연대, 변혁당 등 주로 PD 계열이 그런 입장이었다. 우리가 노무현 탄핵을 반대했던 것은 노무현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탄핵이 성공해서 노무현보다 더 악질적이고 대중의 증오를 한 몸에 받는 우파 정당(한나라당)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 상황이 벌어지면 운동에 나쁘다는 전술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실제 노무현 탄핵은 좌절됐다.
그러나 2005년 이후에는 노무현에 대한 광범한 환멸이 있었다. 우파의 탄핵 위험에서 노무현을 구하기 위해 서울에서만 30만 명이, 부산 같은 데서도 10만 명이 시위했는데 노무현은 대중의 염원에 조금치도 부합하지 않았고 노무현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했던 진보진영도 함께 위기에 빠지게 됐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때 민주노동당 개입을 오히려 강화했다. 이건 우리의 큰 실수였다. 몇 년을 끈 실수였고 실수였는지 깨닫는 데도 한참 걸렸다.
2007년 말에 대선이 있었다. 그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했다. 거꾸로 얘기하면 진보진영이 패배한 것이었다. 좀전에 노무현에 대한 환멸이 2005년경부터 폭넓게 번지기 시작했다고 얘기했는데, 이명박 당선은 노무현에 대한 환멸의 효과로 일어난 일이었다. 진보나 중간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아예 투표를 하지 않았다. 이명박을 지지하는 우파들이 열심히 투표소에 나와서 이명박이 승리했다.
이를 계기로 민주노동당에서 분당 사태가 일어났다. NL 계열 대 PD 계열 사이에 주된 분열이 있었다. NL은 자주파 또는 자민통이라고 불렸다. 이 동지들이 당시에 당 지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반대해서 평등파라고 불린 PD파가 분당을 추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는 평등파를 반대했다. 그 당시 평등파의 지도적인 인사들은 심상정·노회찬 씨 등이었다. 심상정·노회찬 씨는 그 뒤에 정의당의 리더가 됐다. 평등파가 좌파인 척했지만, 우리는 평등파의 분당에 담긴 내재적인 논리가 상대적으로 우파적이라고 봤다.
두 가지가 핵심 쟁점이었다. 첫째, 평등파는 친북 좌파와 국민파 중심으로 이뤄진 당시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북한 핵실험을 반대하지 않고 은근히 지지했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둘째, 민주노총하고 너무 밀접한 당이라는 불만도 제기했다.
우리는 물론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보지만, 평등파의 ‘친북 색깔을 버리자’는 얘기는 우리처럼 좌파적이라거나 혁명적인 입장으로 가자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좌파적이지 말고 중도를 걷자는 함의가 있었다. ‘민주노총당’이기를 그만두자는 것은 노동계급 투쟁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자는 얘기였다.
실제로 평등파들은 오늘날 정의당, 노동당, 심지어 민주당으로까지 갔다. 정의당으로 제일 많이 갔고, 노동당에도 일부 있지만, 박용진 씨 같은 사람은 민주당으로 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평등파가 일관되게 나쁜 입장인 건 전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성소수자에 대해서 정의당 쪽이 좋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즉, 어떤 쟁점은 정의당이 더 올바른 입장이고, 어떤 쟁점들은 친북 좌파 쪽이 더 올바른 입장이고, 어떤 쟁점은 둘 다 틀린 입장이고 하는 식으로 다소 복잡하다. 그러나 당시에는 평등파가 좀더 오른쪽으로 이동하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친북 좌파 쪽을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비판적 지지란 지지했지만 비판도 했다는 뜻이다.
2008년 촛불과 금융 대공황
이제 2008년 5월과 6월의 상황을 한번 보자. 촛불 운동이 일어났다. 흔히 이 운동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일어났다고 말한다. 겉보기로는 그럴 수 있고 그것이 유일한 이슈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명박 등장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발이었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이 촛불 시위를 제안했고 주도했다.
우리 단체도 이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고등학생들이 시위를 제안했지만 아무래도 정치적 경험이 미숙했기 때문에 곧 성인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참여연대, 진보연대, 우리 단체, 이렇게 세 단체가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라는 이름의 연합체에서 같이했다.
그때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당시 인터넷 댓글 공격이 극심했다. 특히 우리 단체에 대해 그랬다. 참여연대 같은 곳은 굉장히 온건한 반면, 우리는 혁명적 좌파니까 우리를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다. 마침 당시 청년들에게 자율주의 사상이 영향을 미쳤다. 자율주의 사상은 ‘운동은 순수해야 하는 것이지 정치적 좌파나 정치 조직이 끼어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참견하면 안 된다, 그러면 운동을 망친다’고 주장하는 사상이다.
촛불에 참가한 청년들은 굉장히 젊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미숙했다. 이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좌파라고 여겼고, 이회창이나 이명박을 우파라고 봤다. 경험이 미숙한 상태에서 노무현이 환멸을 안겨 주자 ‘아 정당이란 다 저런 거야’, ‘좌파는 맨날 지들끼리 분열만 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여기에 더해 민주당 계열이 선동을 했다. 민주당 계열은 노무현이 인기를 잃은 건 좌파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급진적이고 투쟁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선동했다. 또, 우리는 국정원이 댓글을 조직적으로 운영하고 있을 거라고 강력하게 의심했는데, 그때 의심이 이번에 입증이 됐다. 9년 만에 국정원의 댓글 공작이 정국을 흔들고 있다. 당시에 우리는 오랜 경험과 이론에 기초해 국정원이 공작을 할 거라고 봤던 반면, 옛날에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서 우리와 함께 싸웠지만 이제 말랑말랑해진 개혁주의자들은 ‘에이 민주주의인데 그렇게까지 하겠어’ 하고 얘기했다.
촛불 운동은 결국 패배했다. 7월 초에 대규모 집회를 한 뒤 끝났다. 그런데 2008년 9월에 월스트리트발 금융 대공황이 일어났다. 대형 투자 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촛불 운동이 패배했다 해도 노동계급은 건재했다. 조직된 노동계급은 촛불 운동에 대해 오불관언하는 나쁜 태도를 취했는데, 촛불 운동에서 주요 역할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역설적으로 촛불 운동이 패배해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분석하면서 경제 대공황에서 노동운동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라고 보고 2009년 초 단체 대의원협의회에서 노선 전환을 결정했다. 좌경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계급 투쟁을 강조했다. 또, 그동안 반신자유주의를 강조했는데 반자본주의를 더 강조하기로 했다. 이전에는 이론적으로는 제국주의를 다뤘어도 ‘전쟁 반대, 평화 운동 지지’ 입장을 강조했는데, 이제는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반제국주의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 투쟁,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를 강조하며 좌경화한 것은 이전 7년간의 노선이 너무 온건했다는 함축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새 노선은 2012년까지 무려 3년이 넘도록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왜냐면 관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운동에서 관성이라고 하면 습성하고 같은 뜻이다. 헤겔은 인간은 습성의 동물, 즉 습관의 동물이라고 했다. 민주노동당에 스스로 발을 묶어 놔서 무책임하게 아무 때나 나오기도 어렵고, 민주노동당 내에서 벌어지는 쟁점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별것 아닌 논쟁인데도 그 당 안에 있다 보니까 크게 보이고, 집단 탈당하는 것이 언제나 참 타이밍이 맞지 않고,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자신이 실수를 하기도 하는 등 여러 이유로 계속 발이 묶였다.
독자적 정치 강화
다섯 가지 일들을 겪고서야 비로소 노선 전환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먼저, 2012년 4월에 지회를 신설했다. 그전까지는 지회가 없었다. 그냥 동서남북으로 편제해서 느슨하게 포럼만 열었다. 각 포럼에는 우리 회원에다 가까운 비회원들을 합쳐서 70~80명이 모였다. 지금 지회는 10여 명 정도 규모이고 회원들도 서로 잘 안다. 지회 신설로 조직이 꽤 타이트해졌다.
둘째, 2012년 7월 말에 마침내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2011년 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이 합당해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2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했다. 여기서 선거 부정이 저질러졌다. 특히, 당권을 잡은 측도 선거 부정을 저질러 통합진보당이 홍역을 치르게 됐다. 우리는 이미 그 전해에 민주노동당이 유시민으로 대표되는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참여계와 자민통 사이에 자리 다툼을 벌이다 심각한 부패가 저질러진 것이었다. 우리는 썩어 문드러졌다고 선언하고는 나왔다.
셋째, 2013년 초 박근혜가 당선한 직후 우리는 조직 노동자 운동이 늘 성공하지는 않을지라도 꽤나 저항할 것이고, 노동자 운동 말고는 저항을 제기할 만한 다른 사회 세력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단체 내에 조직노동자운동팀을 신설하고 김하영 팀장을 임명했는데 굉장히 효과적이었다.
넷째, 2013년 말에는 철도 파업에 성공적으로 개입했다. 우리의 개입이 성공적이었다는 얘기지, 철도 파업 자체로 말하면 노동조합 지도부가 2013년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일방으로 파업을 중단했다. 당시 파업은 말하자면 유예됐고, 2016년에 다시 철도 파업이 일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철도 파업에 아주 효과적으로 개입해서 철도 노동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파업 뒤에도 철도 노동자들과 친선 축구대회를 열기도 했다.
철도 노동조합 지도부하고는 사이가 계속 나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비판을 삼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운동 초기에 철도 파업이 있었는데 박근혜 퇴진 운동이 최고 절정에 올랐을 때 철도 파업이 돌연 취소됐다. 파업 취소에 민주당이 앞장섰고, 정의당도 민주당과 박근혜 탄핵을 공조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며 파업 취소에 앞장섰다. 여기에 철도노조 지도부가 응해 주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때 우리는 이전부터 효과적으로 개입한 덕분에 투쟁적인 철도 노동자들과 함께 개혁주의자들의 파업 중단 시도를 두 번이나 좌절시켰다. 결국 노조 지도부가 세 번째 시도에서 성공했다. 그리고는 철도노조와 공공운수노조 지도부 측이 우리에게 항의하는 공문을 보냈다. 논리인즉슨, ‘공공노조와 철도노조의 일인데 정치 단체가 왜 참견하느냐’는 거였다. 우리는 여기에 반박하는 답변을 보냈다.
다섯째, 2013년 말과 2014년 초에 우리 단체 내에서 분파가 생겨 분파 투쟁이 벌어졌다. 그 투쟁의 핵심 쟁점은 크게 봐서 정치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이었다.
윤리적인 것부터 말하면, 분파를 이끌던 자들은 엄청난 거짓말쟁이들이었고 엄청나게 기회주의적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정치적인 것보다 오히려 그 점 때문에 분파 지도자였던 전(前) 편집자가 탈퇴했는데도 기자들 중 단 한 명도 따라 나가지 않았다.
정치적인 쟁점으로는, 분파는 노동자 운동이 뭐 그렇게 대수냐고 기각했다. 특히, 정규직 노동자 운동과 비정규직을 대립시켜 비정규직은 몰라도 정규직 노동자 운동은 저항을 제기할 능력도 없고,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심지어 썩었다고 보는 듯했다. 노조 지도부와 현장 노동자들을 구별하지도 않은 채 그랬다. 분파는 그런 노동자 운동에 기대겠다는 우리 단체의 지도부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우파적 분열이라고 보는데, 회원들이 거의 따라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나가서 겨우 블로그나 운영하는 정도다.
지회 신설, 통합진보당 탈당, 조직노동자운동팀 신설과 김하영 팀장 임명, 철도 파업에 대한 성공적 개입, 분파 투쟁을 겪으며 회원들이 교육받고 단체가 독자적 정치를 강화하는 데 효과가 있었다.
그 뒤 지금까지 4년 동안 독자적 정치를 점점 강화해 오고 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운동본부에 참여해서 변혁당과 노동전선과 함께 한상균 위원장을 배출했다. 우리가 노동조합이나 한상균 위원장, 노동조합 관료에 대해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선거 운동을 한 건 아니었다. 한상균 씨가 상대적으로 약간 좌파적이고 투쟁적이며 쌍용자동차노조 77일 점거 파업을 이끈 리더이므로, 그가 당선되면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줄 것이고, 그러면 노동자들이 그 자신감에 기초해서 더 많이 행동할 것이고, 그걸 활용해서 노동자 투쟁을 더 강화할 수 있다는 전술적 목표 하에서 우리는 선거 운동에 참여했고 승리를 거뒀다. 그래서 단체의 위상이 높아지기도 했다.
박근혜 퇴진 투쟁
2016년 10월 말에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이 시작됐다. 핵심만 얘기하면,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은 우리 단체가 제안했다. 박근혜 퇴진 운동이 시작했을 때 NGO들을 대표하는 참여연대는 ‘박근혜 퇴진’을 지지하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NGO의 지도부라고 할 수 있는데, NGO들이 참여연대의 입장과 보조를 맞춘다,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이 3대 메이저 NGO인데 여기에서도 특히 참여연대가 핵심이다. 그래서 참여연대는 퇴진 운동이 벌어지고 열흘이 넘어서야 이 운동에 참가했다. 진보연대도 처음에는 회의적이었고 당시 내부적으로 상당히 예리하게 분열하고 있어서 몸이 무거웠다.
우리가 맨 먼저 제안하고 단체 회원들이 매우 능동적으로 이 투쟁에 참가했다. 최영준 연대협력국장이 굉장히 능동적이고 효과적으로 정치적 논쟁을 하면서 운동에 참여한 덕분에 우리 단체가 이때 상당히 영향력을 강화했다.
당시 논쟁 구도는, 쉽게 말하면 개혁주의 진영 대 혁명적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주의 쪽은 참여연대가 뒤늦게 참가하는 바람에 세 결집이 취약했고, 정의당도 스스로 ‘운동권 정당이기를 원하지 않고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두는 제도권 정당’이라고 자처해 오다 보니 처음에 약간 뻘쭘하고 머쓱해서 점잔을 뺐다. 즉, 개혁주의 진영이 효과적이지 못했다.
반면, 우리는 굉장히 효과적으로 움직였다. 다른 좌파 동지들이 종파적인 데가 있어서 좀 힘들긴 했지만, 이 운동은 230만 명이 전국적으로 참가하는 집회도 개최하는 등 12월 초순까지 순탄하게 흘러갔다.
그런데 민주당과 정의당,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12월 초에 철도 파업을 중단시키고 민주당이 탄핵을 추진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동력과 초점이 상층, 즉 국회와 헌법재판소, 부르주아 정당, 언론으로 이동했다. 12월 하순이 지나고 이듬해 1월이 되자 개혁주의 진영이 주도권을 잡는 상황이 됐다.
맺으며
그럼에도 이 투쟁은 새롭게 급진화하는 사람들을 배출했고,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그런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물론 그런 사람들의 의식과 사상이 박근혜 퇴진 운동 1년이 지났다 해도 완전히 발전하지는 않는다. 지금이 격동적인 계급투쟁의 시기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중 일부가 노동자연대에 가입해도 적어도 3년은 있어야지 단체의 정치와 사상을 좀 알아듣겠다고 할 것이다.
우리 단체에서의 정치 활동은 꽤 힘들다. 우리 단체는 혁명적 단체로서 토론과 논쟁을 많이 하라고 고무한다. 우리는 그게 민주주의라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노동운동이나 좌파,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토론과 논쟁이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가들은 모두 굉장히 논쟁적이었다. 그 사람들의 글을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예리하게 개념적인 구분을 한다.
‘초기 조건이 나중의 결과를 크게 좌우할 수 있다’는 물리 법칙이 있는데, 그거에 비유를 들면 처음에 뭔가를 잘못하면 아주 큰 나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처음에 와이셔츠 단추를 잘못 채우면 전체적으로 잘못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혁명가들은 처음부터 예리하게 토론과 논쟁을 해야 한다. 국제적인 노동운동도 토론과 논쟁에 아주 높은 가치를 부여했다.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이름으로 그랬다.
그런데 토론과 논쟁을 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마음이 상할 수 있다.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고 상처 입고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자존심은 사회의 경쟁 속에서 습득된 내면의 불필요한 가치니까 아예 자존심일랑 버리고 토론과 논쟁이 역사적으로 노동운동의 위대한 전통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내면 우리 단체에서의 생활이 즐거울 수 있다.
MARX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