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능력주의와 불평등》
자본주의에서 능력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까?
최근 한국 사회에서 공정과 능력주의가 화두로 부상했다. 관련 문제를 다룬 책들도 부쩍 늘면서 많은 독자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런 문제에 대중의 관심이 커진 근본 배경은 전 세계적으로 심화하고 있는 불평등 때문이다.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세계는 장기 불황에 빠져 있고 경제적 양극화는 점점 더 견디기 힘든 수준으로 치닫고 있다. 경제 위기는 정치적 위기와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의 위기로 이어졌다. 능력주의가 표방해 온 ‘기회의 평등’과 ‘능력과 노력에 따른 공정한 보상’이라는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 특히 ‘공정’을 둘러싼 논란이 크게 일었다. 박근혜 퇴진 촛불 이후 등장한 정부라 대중의 기대가 있었고 문재인 정부 자신이 공정을 크게 강조하기도 했다. 문재인은 첫 취임 연설에서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4년 동안 불평등, 불공정, 부정의는 여전했다. 정부는 ‘공정성’을 핑계로 되레 정시(수능 위주 전형) 비중을 확대하고,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을 누더기로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교육과 일자리 등 사회 전반에 ‘공정성’ 논란이 불거졌다. 특권층 자녀의 입시 비리나 취업 부정에 (특히 청년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각에서 수능과 같은 시험이 가장 공정하다느니,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은 불공정하다느니 같은 목소리가 거세게 일어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불평등과 차별이 옹호된 것이다.
1 즉,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들인 “입시 경쟁 교육, 학력·학벌주의, 위계화된 노동과 차별 등의 근간에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보고 능력주의와 불평등의 관계를 밝히고자 시도한다.
《능력주의와 불평등》(이하 불평등)은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의 저자들은 소위 ‘공정성’ 논란의 배경에는 바로 능력주의(능력에 따른 차별은 공정하다는 믿음)가 있다고 지적한다.다양한 글을 통해 능력주의를 여러 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매력이다. 열 명의 저자가 학교 교육, 시험/평가체제, 아동의 삶, 학벌주의, 차별받는 노동, 의사들의 엘리트주의 등 여러 분야에서 능력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묘사하고 능력주의가 왜 사회에 해로운지를 설득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종종 능력주의 비판이 보이는 함정 — 능력주의가 이상은 바람직하나 현실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것이 문제, 그러니 진정한 능력주의(더 엄격한 적용)가 필요하다는 식의 잘못된 결론 — 에 빠지지 않고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근본적인 비판 입장을 확고하게 견지하는 것이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여러 저자의 글들을 단순히 취합하는 방식이다 보니 일관되고 완결된 이론이나 사상을 찾아볼 수 없다. 또한 능력주의를 어떻게 극복하고 불평등을 없앨 수 있는가 즉 대안 문제에 대한 논의가 부족하다.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물론이고 공정성을 빌미로 개혁을 배신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비판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와 별개로) 불평등의 원인이고,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기반인 체제나 정부 정책(과 실행)에 주목하기보다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대중의 의식이 문제라는 태도에서 비롯하는 듯하다. 그래서 《불평등》은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을 넘어 대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능력주의, 오작동이 문제인가 작동이 문제인가?
능력주의가 가장 문제가 되는 두 영역이 교육과 직업이다. 이 두 영역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배정하는 일련의 과정에 서로 연관돼 있다. 특히, 이 책의 저자들은 교육을 “능력주의의 산실”로 규정한다.
공저자 중 한 명인 공현(이하 저자들 존칭 생략)은 능력주의를 이루고 있는 논리들이 상식과는 달리 결코 자명하지 않으며 현실과 매우 어긋나는 허구적인 명제라는 점을 설명한다. 개인의 타고난 재능이나 발달된 능력이라는 것은 성장 환경을 비롯하여 사회적·경제적·문화적 배경에 크게 좌우된다. 또한 무엇이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인지 자체가 사회적 상황과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도, 능력은 본질적으로 사회 제도와 구조의 영향을 크게 받는 개념이다. 따라서 능력은 환경적·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지 ‘온전히 개인에게 속한 능력’이라는 것은 환상일 뿐이다.(20∼21쪽, 이 글의 인용문은 별도의 표시가 없으면 모두 《능력주의와 불평등》에서 가져온 것이다.)
무엇보다 중대한 문제는 자본주의에서 애초부터 기회가 평등하지 않다는 점이다. 예컨대, 노동계급의 자녀와 자본가 계급의 자녀가 똑같은 시험을 치를지는 몰라도 그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들이 받는 교육은 천지 차이다. 그러니 공정한 경쟁이란 애당초 어불성설이다. 능력주의는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경쟁을 전제로 능력에 따른 차별 즉 불평등을 정당화하지만, 자본주의에서 기회의 평등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원칙은 실현된 적도 없고 ‘진정한 능력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조차 없다.
박권일은 능력주의에 대한 흔한 비판들의 한계를 지적하며 능력주의의 ‘오작동’이 아니라 능력주의의 ‘작동’이 문제라고 설파한다. 나아가서 “가장 이상적인 능력주의야말로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에 가장 큰 위협일 수 있다”고 경고한다. 능력주의가 본질적으로 경쟁과 차별, 불평등을 전제하기 때문에 불평등의 대안이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고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구실을 한다.
능력주의의 발흥
자본가 계급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지배계급과 달리 신분제도 같은 것들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정당화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사회적·경제적 지위가 차등 분배’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능력주의가 본질적으로는 불평등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지만, 외견상 ‘신분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누구나 능력이 있거나 노력을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은 대중에게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신분제보다 훨씬 도덕적으로 정당해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능력주의를 평등이나 공정, 민주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이유다. 특히 계급과 계층으로 나뉜 사회에서 자신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상층으로의 이동(사회적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능력주의를 정의로운 원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능력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뿐 아니라 피억압 대중이 공정과 평등을 요구할 때에도 동원되는 것은 능력주의의 양면성(모순) — 세습이나 특권을 배격하고 기회의 평등을 약속하면서도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것 — 때문이다.
2 저자는 책에서 합리적이고 공정해 보이는 능력주의 시스템이 결국은 불평등과 차별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끔찍한 세습사회로 귀결된다는 점을 경고했는데, 오늘날 세습주의로 전락해 버린 능력주의를 일찌감치 예측한 셈이다. 당시는 능력주의가 (자본주의 초기에 제기된 보편적 규범을 넘어 현실에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배분하는 원리로서 본격 부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능력주의의 기원은 ‘재능에 따른 출세’를 내세운 프랑스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 가지만, 능력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영국의 진보적 사회학자 마이클 영이 같은 제목의 책을 출판하면서부터다.제2차세계대전 이후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은 중등·고등교육을 대폭 확대했다.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팽창하면서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해졌다. 영국과 미국 등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에서 중등학교와 대학 진학률이 급격히 상승했다.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선발과 배치를 위한 평가 체제(표준화된 시험)도 발달했다.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기회의 평등과 사회적 계층 이동을 표방하는 능력주의가 부상했다. 교육은 위대한 평등기제great equalizer로 추앙됐다. 고등교육이 확대되면서 국가 관료, 기업의 중간 관리자, 전문직 등 신중간계급이 대거 등장했다. 일자리와 소득이 증가하고 계층 이동이 가능하다는 믿음과 함께 능력주의가 자라났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주의 덕분이 아니라 경제 상황이 좋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한때 활발해 보였던 계층 이동의 대부분은 1970~1980년대 한국 자본주의 성장기의 산물인데, 노동계급이나 농민의 자녀 중 학교 교육에서 성공한 이들이 신중간계급이나 화이트칼라 노동자로 진출했다. 그러나 사회적 이동이 가장 활발했을 때조차 상대적으로 소수만이 사다리에 접근할 수 있었음을 지적해 둬야겠다.
4 “능력주의는 단지 공정한 경쟁의 룰이 아니라, 통제·관리의 수단이며 평가하고 선발하는 측(국가, 기업 등)의 이익을 위한 시스템이다.”(31쪽)
자본주의 체제의 안정적 유지라는 관점에서 보면 정실주의나 세습에 따른 보상 체체보다 능력에 따라 차등 보상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더 효율적이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이른바 아이비리그 빅3 대학에는 상류층 자녀들만 입학했다. 성적이나 학습 능력보다는 어느 사립고등학교 출신이냐, 학비를 낼 재력이 되느냐가 더 중요했다. 그러나 산업이 복잡해지고 국제적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많은 유능한 인재들이 필요해졌다. 하버드대학교가 장학 프로그램과 SAT(이른바 인재 선별기) 시험을 도입한 동기다.능력주의가 진짜 문제가 되는 시점은 경제가 위기에 빠질 때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사회 불평등이 심해지고 입시 경쟁과 일자리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졌다. 사회적 이동성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대졸자는 늘었지만 일자리는 줄어드는 상황에서 대학 서열화는 더욱 강화됐다. 마이클 샌델은 최근 미국 사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불평등이 늘어나면서, 또한 학사 학위 소지자와 비소지자 사이의 소득 격차가 벌어지면서 대학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느 대학에 들어가느냐 역시 중요해졌다. 오늘날 학생들은 너도 나도 소수의 대학들만 선호한다.”
자본주의가 성장을 구가하던 때와 달리 노쇠해지면서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도, 아메리칸 드림 시대도 끝났다. 능력주의의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것이 능력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사실상 세습주의로 전락해 버린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달리 대안이 없는 사람들은 오히려 능력주의적 대안에 더 목을 맨다. 소외의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사회를 근본적으로 평등하게 바꾸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평등의 심화는 자본주의 체제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동학(착취, 이윤 경쟁, 반복되는 경제 위기 등)에서 비롯한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와 현상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자본주의와 시험
오늘날 보편화된 학교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기회의 평등을 실현한 것 같은 착시 효과”를 만든다. 학교에서 받은 성적과 입시의 결과는 개인의 능력이 되고 학력·학벌에 의한 차별은 노력과 능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된다.
표준화 시험은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 방식으로 인식된다. 특히 수능이나 고시가 그렇다. 조국 사태로 인해 수시-정시 논란이 불거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차라리 정시(수능 전형)가 공정하다고 여겼다. 2017년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논란이 크게 벌어졌을 때, 일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반대 논리를 폈다. ‘기간제 교사는 시험(임용고시)을 보지 않아 자격이 없고 불공정하게 채용된 것이다.’ 각 학교에서 서류 전형, 면접, 수업 시연 등 일련의 채용 절차를 거치는데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표준화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지필 시험(표준화 시험)을 가장 공정하다고 여기게 됐을까? 자본주의 교육의 핵심적 구실 중 하나는 생산을 통제하는 소수 엘리트, 일부의 중간 관리자층, 그리고 그들의 통제에 순응해 일하는 다수의 노동자 등으로 분류하는 일이다. 즉 학교 교육의 중요한 구실 중 하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교육이 이러한 구실을 하려면 개인의 능력을 측정하고 비교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일찍이 시험/평가제도를 도입했다. 자본주의 교육에서 표준화 시험이 도입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국가가 교육을 통제·관리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19세기 중반 표준화 시험의 도입은 국가적인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진행됐다. 일선 교사들이 해오던 교육과정이나 평가(주로 구술 평가)는 낡고 주관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표준화 시험은 객관적이자 과학적이고 공정하다는 믿음을 주입했다. 국가 수준의 표준 교육과정의 도입과 함께 표준화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행됐다. 특히나 대규모 표준화 시험을 선호한 이유는 값싼 비용과 짧은 시간에 처리가 가능하다는 효율성 때문이었다. 교육이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서 점점 더 중요해짐에 따라 표준화 시험이 확대·강화됐고 신자유주의 시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학교(교사) 책무성과 연계됐다.
둘째, 학생을 선별, 선발, 배치하기 위해서다. 노동력을 위계화한 노동시장에 적절하게 배치하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서열화가 필수다. 인간의 능력(지능이나 성취)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측정과 비교 가능한 형태의 지표가 필요한데, 대표적으로 시험 점수다. 미국에서 표준화 시험이 20세기 전반에 빠르게 확산한 데에는 중등교육의 급속한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됐다.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게 되면서 교육 체제가 더 효율적으로 관리될 필요가 있었고 다양한 직업과 직종에 학생들을 분류하고 배치할 필요가 높아졌다. IQ검사를 비롯한 심리 검사 및 표준화 시험이 과학주의, 계량심리학 등의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시행됐다. 시험은 인간의 능력을 측정하는 과학적 도구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표준화 시험이 객관적이고 공정하다는 믿음은 능력주의(특히 기회 균등) 이데올로기와 더불어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학습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에서 종종 목격하는 학력고사나 고시에 대한 신화는 표준화 시험 자체에서 비롯하는 측면도 있지만 한국 경제의 급성장기 즉 “개천에서 용이 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결합돼 있다.
1995년 교육 개혁 이후 지필 시험보다는 다양한 평가가 도입되었는데, 평가가 더욱 “일상화되고 광범위해졌고 세분화”됐다. 지필 이외의 다양한 형태의 수행평가가 시행됐고 비교과 영역인 자치·동아리·봉사활동, 독서, 행동 특성과 인성 등 학생의 학교생활 전부가 평가의 대상이 돼 버렸다. 평가의 세분화·종합화에는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있다.
산업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기존의 획일적인 지필 시험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노동자들에게 갈수록 다양하고 복잡한 능력이 요구됨에 따라 평가도 다양하고 복잡해진 것이다. 학생부 종합 전형(학종)이 나온 배경이다. 특히 상위권 대학이 학종 전형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전형에 비해 학교와 학과에 맞는 인재를 뽑을 확률이 더 높다고 보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더 정확하게는 좀더 일찍이) 취업 시험이 서류 전형, 인적성 검사, 토론면접, PT면접 등으로 복잡해진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진보진영 일각에서 수능보다 학종이 더 진보적(공교육 정상화, 교육 불평등 완화, 사교육비 감소 등의 측면에서)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다. 수능이든 학종이든 부잣집 자녀들에게 유리한 것은 매한가지이고 한 줄 세우기나 여러 줄 세우기나 서열화하기는 마찬가지다.
시험/평가체제의 중요한 효과 중 하나는 평가받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길들이는 것이다. 경쟁과 서열화의 힘으로 굴러가는 체제 속에서 개인들은 시험/평가에 적합한 자세와 태도, 가치를 체득한다.
《불평등》의 공저자 중 한 명인 이경숙은 능력주의와 시험/평가체제에 사로잡힌 학교 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으로 교육적 평가를 실시할 것을 제안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평가자가 평가 과정과 결과에 대해 신중하고 엄격해야 한다. 즉 평가를 함부로 하지 말 것. 둘째, 학생들은 학교의 평가 과정을 통해 학생들 스스로 평가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한다. 셋째, 학생들에게 평가 참여권을 줘야 한다.
이경숙은 “학생들의 평가 능력과 평가 참여권이 (평가의) 부당함에 도전하고 새로운 교육을 만드는 해방적 성질을 갖는다” 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접근법이 ‘평가 혁신’ — ‘참 평가’, ‘성장 중심 평가’, ‘자기주도적 평가’, ‘동료/참여 평가’ 등 — 담론과 근본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의문이다.
자본주의 교육의 근본적 구실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의 본질을 전환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다. 경쟁과 서열화와 같은 본질적 목적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험/평가체제는 유형과 방식을 아무리 바꿔도 노동계급에게 불공정할 수밖에 없다.
이경숙은 헌법에 명시된 ‘능력에 따라 교육받을 권리’는 온전한 권리가 아니라 사실상 능력주의에 따른 차별임을 지적하면서 “능력을 넘어 모두가 충분히 맘껏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교육을 받는 상태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능력에 따른 교육이 아니라 필요와 요구에 의한 교육이 실현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러시아에서는 시험과 성적제도가 폐지됐다. 대학 입시를 폐지해 희망하는 누구나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했다. 비록 혁명의 고립과 패배로 이런 성과가 계속 유지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시험이나 평가를 통해 학생들을 등급 매기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누릴 수 있는 교육은 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8
학력·학벌주의“신분제화된 능력주의 사회”를 비판할 때 자주 회자되는 것 중 하나가 학벌주의다. 특히 전문직, 중산층이 학벌(학력)을 통해 부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대물림한다는 비판이 많다.
공저자 중 한 명인 채효정의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학벌 없는 사회’ 운동의 오류와 한계를 지적한 부분이다. 이 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인 학벌”에 대한 대안으로 능력주의를 강조했다. “학벌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건강한 시민사회”를 바랐고, “학벌이 아니라 능력으로 대접받는 것이 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었다.(108쪽)
단체(‘학벌 없는 사회’)의 해산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자본의 독점적 지배와 노동 해체의 시대, 명문대 출신들도 취업난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이제 학벌조차 실패하고 있고, 더는 학벌이 권력으로 작동하지 못한다. 자본과 시장에 의해 학벌이 해체됐다고 진단한 것이다.
그러나 채효정은 “학벌주의는 해체되지 않고 능력주의 언어를 통해 더욱 강고해졌다”고 주장한다. 대졸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그만큼 학력과 학벌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그 결과 ‘대졸 프리미엄’은 사라지고 대신 ‘학벌 프리미엄’이 그만큼 더 높아졌다는 것이다. “노동 시장의 악화”가 “교육에서의 경쟁 심화”의 배경이라는 지적이다.
채효정이 저적한 대로 1997년 IMF 위기 이후, 최근에는 2008년 경제 위기 이후로 입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대학 서열화가 뚜렷해졌다. 학벌주의가 특정한 대학 출신들이 경제·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2018년 기준 고위 공직자(국회의원, 법관, 검사, 차관급 이상) 2명 중 1명, 100대 기업 CEO의 과반수가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 출신이다.
그러나 학벌주의가 한국 사회의 고유한 현상은 아니다. 소수의 명문 대학 출신 엘리트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리는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본주의 국가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미국 심리학 저널 《인텔리전스Intelligence》에 실린 J. 웨이의 2013년도 논문을 보면, 상위 1퍼센트의 명문대학 출신들이 미국 재계와 법조계, 정계의 지도층에 두텁게 자리하고 있다. 《포춘》이 당시 선정한 포춘 500 기업의 CEO 중에 39퍼센트, 억만장자 424명 중에는 45퍼센트, 상원의원 중 41퍼센트, 하원의원 중 20.6퍼센트, 연방판사 중 41퍼센트가 상위 1퍼센트 명문대 출신이었다. 종종 대학이 평준화돼 있는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경우, 엘리트 고등교육기관인 그랑제콜 출신들이 학계·정계·재계에 대거 포진하고 있다.
대학이 서열화돼 있고 명문대 출신들이 우대받는 현실에서 명문대 진학을 위한 경쟁은 사라질 수 없다. 그래서 학벌주의 타파를 위해 대학 평준화와 수능 자격 고사 등이 대안으로 제시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실현된다면 경쟁이 완화되고 학생들의 고통을 다소 줄여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가 이윤 경쟁의 논리에 따라 운영되고 교육이 경쟁적인 노동 시장의 영향을 직접 받는 한 학생들의 경쟁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채효정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노동이 해체되고 ‘능력자 계급’이 등장했다고 본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능력자 계급’이란 거대 자본이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사회 전체 구성원을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활용하는 새로운 전문가 계급인데, 주로 고소득 전문 직종 임금 소득자들이다. 이들이 신엘리트층을 구성해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데, 이들의 지배 정당화 논리가 바로 ‘능력주의’라는 것이다.
그는 “중산층 가족은 지위 세습과 계급 유지를 위한 가족 경영체로 변모했다”면서 《세습 중산층 사회》나 《20 vs 80 사회》 류의 ‘세습론’이 주장하는 논리를 수용한다. 학벌은 정규직 고소득 전문직종으로 진입하는 중요한 수단인데, 중상류층이 ‘기회 사재기’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학벌을 대물림함으로써 자신의 계급적 지위를 재생산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라는 관리 계급은 계급적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끊임없이 엘리트 지배 체제를 생산하는 자본의 공동정범”이다.
이러한 관점은 여러 가지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개념(생산수단의 소유·통제 여부)이 아니라 재산, 소득, 직업, 라이프스타일 등을 기준으로 계급을 규정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이런 식의 계급 개념은 노동계급이 더는 하나의 계급이 아니라거나 노동계급이 해체됐다거나 하는 주장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중상류층 즉 상위 20퍼센트의 지배(부와 권력의 세습)가 문제라는 관점은 상위 1퍼센트 또는 진정한 자본가 계급의 책임을 가리는 한편 일부 고소득 임금 노동자들에게 부당한 책임을 전가하고 노동계급 내 격차를 지나치게 과장하게 된다. 예를 들어 2020년 한국 사회에서 가구 소득의 상위 20퍼센트 (소득 5분위) 평균은 1.39억 원인데, 여기에는 일부 고소득 임금노동자들(특히 맞벌이를 하는 경우)이 포함된다. 그러나 소득 격차가 아니라 부의 격차를 보면, 한국의 1퍼센트 부자가 전체 부의 30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전 세계로 눈을 돌리면 1퍼센트의 부자가 절반이 넘는 부를 차지한다.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그 원인과 해법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들이 벌어지고 있다. 아쉽게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삼기보다는 ‘세습’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비판이 흔하다. 이런 관점에 서면 ‘세대론’(세대 간 불평등/착취가 문제다)이나 ‘세습론’이 그럴듯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진정한 계급 불평등을 가리게 된다. 채효정은 학벌(교육 불평등)을 계급 불평등의 원인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교육이 계급 재생산에 기여하지만, 계급 불평등의 원인은 생산관계(생산수단의 통제 여부)에 있다. 교육 격차는 계급 격차를 반영한 결과지 그 반대가 아니다.
차별받는 노동과 능력주의
2017년 서울교통공사의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둘러싼 논란,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논란, 2020년 ‘인국공 사태’ 등에서 거듭 ‘공정성’ 문제가 제기됐다. 공기업 시험을 준비하는 ‘취준생’을 중심으로 “역차별”, “무임승차”, “로또 취업”, “불공정”이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근혜 정부의 능력주의(성과주의) 정책 ― 성과 연봉제와 저성과제 해고 ― 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들 중 일부는 문재인 정부의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정책에 대해서 능력주의(공정한 경쟁)를 내세워 반대했다. 왜 그랬을까?
《불평등》의 공저자 중 한 명인 김혜진은 노동자들의 이런 능력주의적 가치와 태도를 신자유주의 경쟁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결과로 본다. 물론 그런 측면이 분명 있다. 그러나 정부 정책의 문제, 투쟁적 대안 부재 등을 함께 설명하지 않으면 피상적인 이해에 그친다.
첫째, 비정규직 정규직화 논란이 벌어진 핵심 원인은 문재인 정부의 미온적 개혁이다. 즉 말로만 개혁을 외치면서, 실제로는 개혁을 위한 재정 투입에는 매우 인색했다. 문재인은 대선 공약으로 학급 당 학생 수 감축(교사 증원)을 약속해 놓고는 취임 후 학령 인구 감소를 핑계로 신규 교사 채용을 줄이는 방안(교원 감축)을 내놓았다. 이처럼 정부가 일자리에 재정을 충분히 투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또 노동자와 취업 준비 청년 사이에서 한쪽의 조건 개선이 다른 쪽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을 것이다. 임용고시 준비생들은 가뜩이나 줄어든 임용 규모에다 비정규직 교사 정규직화로 인해 취업문이 더 좁아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부 청년들이 ‘인국공 사태’ 때 정규직화에 울분을 터뜨린 배경에는 문재인의 연이은 개혁 배신, 그리고 이어진 위선과 기만이 누적된 상황이 있다. 정부의 이간질도 한몫했다.
둘째, 투쟁적 대안의 부재는 가뜩이나 열악한 처지의 청년·학생들이 능력주의적 대안(공정한 경쟁)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노동조합은 내부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꺼리며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차별받는 노동과 능력주의’ 절의 인용문 중 별도의 표시가 없으면 모두 김혜진의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전교조의 경우 중앙집행위원회가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 사실상 반대하는 입장을 발표하면서 “정규직 전환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에게 용기를 주었고 이는 그들이 자신감 있게 목소리를 내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노동조합 지도부는 계급 단결을 옹호하기보다는 조직 보존주의를 선택했고, 정부의 이간질에 취약해진 노동운동은 청년학생들의 불안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대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노동운동이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는 노동조합 지도자들뿐 아니라 좌파들의 기회주의적 눈치 보기에게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 당시 전교조 집행부는 노동조합 내 상대적 좌파인 교찾사(교육노동운동의 전망을 찾는 사람들) 출신들이 이끌고 있었다. 노동자연대가 일찍이 분명한 지지 입장을 표명한 데 반해, 일부 좌파는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를 지지하지 않았고, 또 다른 일부 좌파는 뒷북치듯 뒤늦게 입장을 냈다. 이런 좌파들의 정치적 무능과 무기력은 그들이 점점 오른쪽으로 기울며 노조 관료들과 타협하는 경향을 키워 온 것과 관계가 있다.
“청년 정규직이 ‘공정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 사회가 불공정하기 때문에 자신처럼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시험을 통해서만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달리는 것이다. 이 시험마저 의미가 없어지면 평범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감, 자신이 노력하고 고생한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격렬하게 반대하도록 만드는 요인이다.”
노동에서의 능력주의는 단지 ‘시험’에 의한 차별(정규직/비정규직)에 그치지 않고 직무급제라는 형태로 이어진다. 직무급제는 직무에 따라 고용 형태를 세분화하고 위계를 만든다. 직무에 따른 차별은 직무 가치에 따른 것이므로 차별이 합리화된다. 노동은 점점 더 위계화되고 차별이 강화된다.(175쪽)
능력주의(공정한 경쟁 논리)는 사용자들의 노동자 통제를 강화하고 (노동자들을 파편화시키고 경쟁시킴으로써) 노동계급 내 단결을 해치며 노동자들이 (경쟁의 결과에 따른) 차별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 해악적이다. 능력주의는 소위 능력이 없는 노동자들에게만 위험한 것이 아니다. 공정한 경쟁을 대안으로 내세우면 점점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 내 경쟁과 차별은 사용자들의 공격(각개격파)에 취약해 모든 노동자들의 처지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다. 또한 능력주의는 진정한 불평등(계급 착취)을 가리고 모든 것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에 체제에 도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필요한 이유다.
능력주의를 극복하려면 이데올로기적 비판에 그쳐서는 안 된다. “평등한 노동이 가능하려면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이 필요하다.” “각각이 경쟁해서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싸워 모두의 권리를 찾아야 한다.” “스펙보다 데모를!”
여기서 한가지 강조할 점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대립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정규직이 양보해야 한다거나 (정규직 양보론, 사회연대전략 등) 정규직의 임금 등 조건 개선 투쟁은 노동계급 내 격차만 벌린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는 사회의 진정한 격차(차별)는 노동계급 내부가 아니라 계급 간 격차라는 점을 간과한다. 현실에서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을 약화시킴으로써 비정규직의 조건 개선을 더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비정규직 차별로 이득을 보는 것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아니라 자본가들이다. 비정규직 차별이 존재하는 곳에는 정규직 노동자들도 열악한 조건을 강요받기가 더 쉽다. 비정규직 차별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해 함께 싸우는 것이다.
불평등의 원인
《불평등》의 저자들은 대체로 ‘능력주의’를 불평등을 초래하는 원인으로 또는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로 간주하는 듯하다. 특히, 민주화 시대, 촛불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불평등한 이유는 대중이 능력주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권일은 여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능력주의에 대한 확신은 불평등을 잘 인식 못 하는 걸 넘어 적극적으로 생산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이 능력주의(능력에 따른 불평등을 옹호하는 믿음)를 신봉해서 불평등이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이다.
박권일은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불평등의) 물질적 토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을 언급하면서 경제적 현실만큼이나 이데올로기나 의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람시가 문화 같은 ‘비물질적’ 요소를 물적토대만큼, 때로 그 이상으로 강조했다”면서 말이다.
그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이미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에 계급 의식 형성이 어렵다고 보는 듯하다. “계급적 이해를 인식하는 단계에서 이미 이데올로기가 ‘인식의 틀’로 작동”한다. “착취와 불평등의 현실 그 자체를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데 어떻게 그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를 넘어서지 못하면 불평등한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불평등 문제에서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우선시하는 이유다.
그람시의 문화적 헤게모니 이론은 지배계급이 어떻게 권력을 유지하는지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박권일이 놓치고 있는 중요한 점은 노동계급의 의식이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것이다. 소수는 교육을 통해 변할 수 있지만, 노동자 대중은 의식을 깨우쳐서 투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투쟁하는 과정에서 의식을 변화시킨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가 가하는 착취와 억압 때문에 집단적 투쟁으로 떠밀리는데 그러한 투쟁 속에서 기존의 지배적 관념(상식)을 바꾸고 계급 의식(양식)을 발전시킨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투쟁을 고무·지지하면서 노동자들의 조직과 의식이 발전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고, 이 과정에서 이데올로기 투쟁은 그런 경제·정치 투쟁을 정당화하고 목표를 분명하게 하는 구실을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불평등》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심각한 불평등의 근본 원인으로서 착취가 하는 구실을 간과(또는 과소평가)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일을 한 대가로 자본가들에게 임금을 받는 과정은 공정하고 정당한 거래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결코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아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일한 것보다 훨씬 적은 보수를 주고 나머지는 자기 몫(이윤)으로 챙긴다. 이렇게 노동자들한테서 무보수 노동(잉여노동)을 체계적으로 뽑아내는 과정이 바로 착취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통제하고 있는 반면, 노동자들은 먹고살려면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은 결코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의 결과가 아니다. 마르크스는 ‘공정한 노동에 공정한 임금’ 같은 것은 없다고 단언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거대한 불평등(극소수는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고 대다수는 가난에 허덕이는)의 근본에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불평등(극소수가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있는)이 놓여 있다. 따라서 생산관계의 불평등을 놔둔 채 분배 방식을 개선한다고 평등(공정성)이 실현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와 평등
저자들의 능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비해 대안은 추상적이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무기력해 보인다. 박권일은 능력주의 비판이 능력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인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로 “능력주의를 대체할 만한 합의된 대안이 없다”면서 “‘필요에 따른 분배’라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힘을 잃었기 때문에 능력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하고 평가한다. 마찬가지로 저자들이 자본주의 체제가 문제라고 인정하면서도 체제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대안 역시 급진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공현은 학교 교육이 능력주의를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에 ‘탈능력주의’ 교육으로 전환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그도 능력주의를 타파하는 것이 능력주의가 정당화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것과 연결된다는 점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능력주의 자체를 없애지 못하더라도 능력주의 원리가 아닌 평등의 원리를 더 강화하고 우선하는 공적 제도를 만드는 일은 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지배하는 학교 교육을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 없이 탈능력주의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가능한지, 일부 공적 제도의 개선으로 능력주의를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정용주도 비슷한 관점의 대안을 내놓는다. 능력주의를 아예 없애지 못한다면 능력주의를 ‘특정한 영역’에 적용하는 원리로 제한하고 다른 영역에서는 다른 보상 원리를 적용하는 방안을 언급한다. 시장 자본주의 하에서도 공적인 영역에서는 시장의 원리를 제한하듯이 말이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 따른 보상을 넘어 사회적 연대를 기본으로 하는 제도로서, 인간의 기본권을 보장할 수 있도록 노동과 생존을 분리시키는 방법으로서 기본소득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두 저자의 대안의 공통점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더 평등주의적인 제도 도입을 통해 능력주의와 불평등을 완화(해소)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믿음만큼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분배 개선 등을 통해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 역시 공상적이다.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존 롤스의 정의론과 같은 평등주의적 자유주의가 거론된다. 자유주의적 정치 이론의 중심에는 이기적(경쟁적) 개인이라는 전제가 있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자원(사회적 부와 권력)을 차등적으로 보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합리화한다. 정의로운 분배 원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평등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는 증거다.
10 마이클 샌델은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성공한 자들의 겸손과 조건의 평등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할 것을 제안했다. 그가 무기력하고 낭만적인 대안밖에 내놓지 못하는 것은 계급으로 나누어진 불평등한 사회에서 보편적 윤리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누구나 지켜야 할 윤리’라는 개념은 계급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구실을 한다.
현대 도덕철학들은 모두 이기적 개인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어떻게 하면 공동선을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내놓으려는 시도였다.마르크스주의에서 도덕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보편적이 아니라) 계급적인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계급) 분열 때문에 보편적 선(공익)의 도모가 흔히 불가능한데도 그런 프로젝트를 추구할 수 있는 척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는 자본가 계급에게는 공정하고 노동자 계급에게는 차별적이다. 자본가들에게 이윤은 생산수단 소유(투자)에 대한 공정한 보상이지만, 노동자들에게는 빼앗긴 노동이다. 능력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윤리적 관점을 반영하고 이윤 경쟁 체제라는 특수한 사회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이다.
만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라는 현행 조건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사실상 능력주의는 유일하게 ‘공정한’ 분배 체계가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별개로 능력주의가 정의롭지 못하다고 비판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내놓은 대안적 윤리의 출발점은 착취에 저항하는 집단적 노동자 투쟁이다. 그는 이런 투쟁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의 한계를 들춰내는 동시에, 자유주의적 도덕관념의 한계를 넘는 연대의 덕을 낳는다고 주장했다. 파리 코뮌이나 러시아 혁명기에 (경쟁과 차별의 벽을 순식간에 허물어버리고) 꽃피웠던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떠올려 보라. 마르크스는 노동자들에게 연대는 정말로 필요한 것이므로 그들에게는 굳이 공동체 관념을 강요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자유주의 도덕철학자들과 달리 “공산주의자는 도덕을 설교하지 않는다.”
박권일은 “‘개천용’이 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면서 그 사회는 “능력주의 그리고 자기 소유권의 원리가 아닌 대안적 자원 배분 원칙을 활발히 고안하고 토론하며 실천하는 공동체”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사회주의적 대안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가 제시하는 미래의 사회상은 사회주의에서만 실현 가능하다. 흔한 생각으로, 필요와 욕구는 무한한데 파이가 정해져 있다면 정의와 공정이 문제가 된다. 존 롤스는 이런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적절한 부족 상태 아래서 상호 무관심한 사람들이 사회적 이익에 상충하는 요구를 제시할 경우 정의의 여건이 성립한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저마다 필요한 바가 다르기 때문에) 궁극 목표는 평등한 분배가 아니라 필요에 따른 분배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생산의 목적은 대중의 필요가 아니라 이윤 추구다. 그렇다 보니 엄청난 생산력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가장 기본적인 필요(주거, 음식, 의료 등)조차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치와 낭비가 극심하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공동으로) 소유하고 이윤이 아니라 대중의 필요에 따라, 그리고 민주적이고 계획적으로 생산함으로써 개인의 필요와 사회적 이익을 조화시키면서 개인의 필요에 훨씬 더 잘 부응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공산주의 사회는 정의(공정)가 사회 제도의 제 1덕목이 아니라 정의를 넘어서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많은 노동자, 청년학생들은 능력주의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혹은 (못마땅해도)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대로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토니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를 “실천의 철학”으로 불렀는데, 인식뿐 아니라 도덕률도 인간 활동의 변화와 함께 변한다. 피억압자들의 연대와 나눔 등 평등주의적 개념들은 능력주의나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와는 다른 새로운 도덕을 위한 토대를 놓고 있다.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 사회의 고질적인 특징이다. 부르주아 혁명 이래로 근대 자유주의 사회가 약속해 온 자유와 평등은 자본주의에서 결코 성취될 수 없다. 생산수단에 대한 평등한 접근의 필요성을 논하지 않은 채, 분배적 평등(정의)을 통해 평등을 이루고자 시도하는 것은 모순에 처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근본에서 바꾸지 않은 채 자본가들의 이윤 논리를 부분적으로만 침해해서 평등을 구현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주의 체제를 그대로 둔 채 급진적 평등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자기 모순적 귀결에 이르게 된다.(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와 평등은 양립할 수 없다. 평등주의적 정의는 오직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성취될 수 있기 때문에 “사회적 평등을 추구한다는 것은 혁명을 하자는 것”이다.
주
- 능력주의(meritocracy)가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는 대체로 개인의 능력과 노력, 성과나 업적에 따라 부와 권력(지위)을 보상(차등 분배)하는 시스템(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종종 업적주의나 실력주의로 번역되기도 한다. ↩
- 프랑스 혁명 이후 자본주의 초창기 능력주의의 역사적 형태에 관해서는 에릭 홉스봄이 쓴 《혁명의 시대》 중 10장 ‘재능에 따른 출세’를 보시오(한길사의 1998년 국역판에는 11장으로 돼 있다). ↩
- 정원석 2020. ↩
- 샌델 2020, 250∼251쪽. ↩
- 샌델 2020, 35쪽. ↩
-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이 능력주의에 기반한 시험을 도입한 것은 19세기 즈음이다. 영국의 관리선발시험(1870년), 독일의 아비투어(1788년), 프랑스의 바깔로레아(1808년)와 같은 제도들은 시험을 통해 교육의 질을 관리하고 능력주의의 원리를 실현하려는 목적과 관련이 있었다. ↩
- 이윤미 2018. ↩
- 학력주의는 초등, 중등, 고등교육 등 교육받은 기간, 쉽게 말해 가방끈이 얼마나 긴가를 따지는 것이다. 학벌주의는 어느 학교(대학)을 나왔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종종 학력주의는 합리적인 능력주의로, 학벌주의는 (한국식) 신분제도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학벌주의는 타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학벌도 결국은 학력 경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둘은 서로 연결돼 있다. 전자를 수직적 학력주의, 후자를 수평적 학력주의로 부르기도 한다. ↩
- 양효영 2020. ↩
- 최일붕 2017, 41쪽. ↩
- 최일붕 2017, 52쪽. ↩
- 최일붕 2017, 99쪽. ↩
- 최일붕 2017, 98쪽. ↩
- 최일붕 2017, 128쪽. ↩
- 캘리니코스 2006, 191∼195쪽. ↩
참고 문헌
마코비츠, 대니얼 2020, 《엘리트 세습》, 세종.
맥나미, 스티븐J. 외 2015, 《능력주의는 허구다》, 사이.
샌델, 마이클 2020,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양효영 2020, ‘왜 문제인 정부에서도 불공정성은 여전한가?’, 마르크스21 35호.
영, 마이클 2020, 《능력주의》, 이매진.
이윤미 2018. ‘미국교육에서 표준화시험의 역사적 전개와 시사점’, 비교교육연구 제28권 제4호.
정원석 2020, ‘조국 자녀 입시 문제로 본 자본주의와 교육’, 마르크스21 33호.
최일붕 편저 2017, 《그들의 윤리 우리의 윤리》, 책갈피.
캘리니코스, 알렉스 2006, 《평등》, 울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