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팔레스타인 저항과 중동의 역학 관계
5월 11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을 쏘자 세계 주류 언론들은 일제히 ‘하마스 대 이스라엘의 폭력’이라고 보도했다. 둘 사이의 폭력에 무고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사람들만 희생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하는 접근법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 이스라엘이 벌인 팔레스타인 공격의 직접적인 배경을 간단히 짚은 후, 더 근본적인 문제인 중동 지역에서의 제국주의 이해관계와 갈등에 관해 살펴보고, 팔레스타인 저항의 전망과 해방의 가능성을 살펴보겠다.
배경
하마스가 로켓을 발사한 것은, 이스라엘 경찰이 이슬람의 3대 성지 중 한 곳인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를 침탈한 후였다.
알아크사 모스크는 어떤 곳인가? 이슬람 경전 《쿠란》에 따르면, 이곳은 선지자 무함마드가 하늘로 승천한 장소로, 전 세계 무슬림들이 예배를 올리던 방향이기도 했다.(오늘날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향해 예배를 올린다.) 그래서 알아크사 모스크는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일 뿐 아니라 지난 7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 저항과 해방 운동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이스라엘이 알아크사 모스크를 침탈한 것은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유대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유대화” 정책은 예루살렘에 사는 팔레스타인인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유대인 정착민들로 채우는 정책이다.
이번에는 알아크사 모스크 인근 셰이크 자라 지역이 초점이 됐다. 셰이크 자라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었다. 이 난민들은 이스라엘 건국 당시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자행할 때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이 지역에 정착했다.
이스라엘이 셰이크 자라 지역의 팔레스타인인 스물여덟 가구에 퇴거 명령을 내리면서 시작된 항의 시위는 무슬림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한 달인 라마단 기간(올해는 4~5월이었다)에도 계속됐다. 시위를 진압하던 이스라엘 경찰이 알아크사 모스크에 운집한 예배객들을 공격하고 사원 내부까지 침탈하면서 저항이 대대적으로 분출한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모든 도시들이 수십 년 동안 셰이크 자라와 똑같은 일들을 겪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연원은 이스라엘 건국 운동인 시온주의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온주의는 팔레스타인 지방에 유대 민족으로만 이뤄진 배타적 민족 국가를 설립하겠다는 정치 이념이자 운동으로, 시온주의의 제창자들은 20세기 초부터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조직했다.(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식민 점령하고 중동에 개입하던 영국 제국주의가 이를 후원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이 이주 사업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한 방화·살인·테러를 저지르는 대량 학살, 인종 청소의 과정이었다. 여기서 살아남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셰이크 자라의 주민들처럼 난민이 되거나,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이등 시민으로 살거나, 인근 나라의 난민촌에 사는 처지가 됐다.
건국 후에도 이스라엘은 1967년 대규모 전쟁을 벌여 그나마 남아 있던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했고, 현재까지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두 국가 해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영토로 정해진 곳에도 200곳 넘는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며 팔레스타인인들을 몰아내고 있다. 이런 정착촌에 거주하는 유대인 정착민의 숫자는 2017년 기준으로 62만 명이 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런 점령과 공격 속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다. 이스라엘에 의해 15년 넘게 봉쇄당한 가자지구는 이동의 자유는 물론이고 의약품·생필품 등 모든 물자의 반입까지 통제당하고 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이하 서안지구)와 동東예루살렘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삶은 처참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를 이어 살던 집을 부수고 지어지는 정착촌 건설 현장에서, 빼앗긴 자신들의 농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간다. 그런 일자리라도 가지려면, 매일 출퇴근 길에 검문소에서 검문을 받으며 최대 4~5시간씩 이스라엘군의 모욕을 견뎌야 한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와 하마스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래 끊임없이 이스라엘 점령에 맞서 저항해 왔다. 이런 저항의 역사와 이번 저항의 특성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 저항의 대표적 조직으로 알려진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후신이다)와 하마스에 관해 살펴봐야 한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에 맞서 무장 투쟁으로 민족 해방을 쟁취하겠다며 1960년대에 만들어진 조직이다. 당시는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 운동 등 세계 곳곳에서 반제국주의 저항이 벌어지던 때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도 이에 커다란 영감을 받았다.
하지만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주요 지도자들은 아래로부터 대중 저항을 조직하기보다는 해외 동맹 세력의 지원을 받아 소수가 무장 투쟁을 벌이는 전략을 추구했다. 대체로 이들은 독립된 팔레스타인에서 자본주의 국가를 세우고 싶어했던 부르주아 및 중간계급 사람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의 억압 때문에 약화돼 망명 활동을 하게 된다. 1980년대에 이르면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제시한 ‘두 국가 해법’을 받아들였다. 즉, 이스라엘 국가를 타도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이스라엘과 공존하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그런 입장에 따라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이스라엘이 조인한 협정이 1993년 오슬로 협정이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을 인정한 대가로, 1967년 전쟁 후 그어진 국경을 기준으로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 건설을 보장받았다. 이렇게 수립된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는 오슬로 협정에 따른 이스라엘과의 ‘안보 협력’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차단하고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활동가 체포에 협력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배신에 환멸을 느낀 팔레스타인인들은 1990년대 초에 결성된 하마스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1987년 1차 ‘인티파다’를 밑거름으로 결성된 하마스는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즉 1948년 이래로 이스라엘에 점령된 영토를 포함해 팔레스타인 지역 전체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급진적 요구를 제시했다. 2006년 총선에서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주요 정파인 ‘파타’를 꺾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 직후 하마스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사주한 파타의 쿠데타로 인해 서안지구에서 쫓겨났고, 가자지구에서만 집권 세력이 됐다.
이후 하마스는 줄곧 고립과 봉쇄에 시달리면서 이스라엘과 타협을 모색해 왔다. 마침내 하마스는 2017년에 자체 규약을 개정해 ‘역사적 팔레스타인’ 수복을 공식적으로 포기하고, ‘1967년 국경’을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 현실에서 하마스의 주된 관심사는 ─ ‘팔레스타인 해방과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의례적 구호를 걷어내면 ─ 가자지구 봉쇄 해제와 재건이라 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와 하마스가 모두 ‘두 국가 해법’을 받아들인 것은 민족주의 운동의 정치적 한계 때문이다. 이번 저항 때도 이스라엘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파타) 실제로 저항에 나섰더라도(하마스), 이들의 최종 목표가 팔레스타인에 자신들의 독립된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인정하는 ‘타협’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공습 첫날부터 이스라엘에 휴전 의사를 밝힌 것도 이와 관련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지배자들은 ‘두 국가 해법’을 전혀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념 자체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유대인만으로 이뤄진 민족 국가가 모두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최장수 총리였던 전前 총리 벤야민 네타냐후는 1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 저항을 고립시키고 정착촌을 적극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영토를 실질적으로 합병시켜 왔다. 네타냐후의 후임 총리 나프탈리 베넷은 네타냐후보다 더 끔찍한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군 특수부대 출신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한 이력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자다.
제국주의의 이해관계
이스라엘의 오만함을 근본에서 뒷받침하는 힘을 이해하려면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이 맺는 관계를 봐야 한다. 미국 국무부는 이스라엘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1 [강조는 인용자의 것]
이스라엘은 미국의 훌륭한 파트너이며 이스라엘은 미국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없다. 미국인과 이스라엘인은 민주주의, 경제적 번영, 지역 안보에 대한 우리의 공동의 약속으로 하나가 된다. 양국 간의 깨지지 않는 유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
미국은 이스라엘이 중동 지역에서 갖는 ‘군사력의 질적 우위QME, Qualitative Military Edge’를 확실히 하기 위해 막대한 군사 지원을 쏟아붓는다. 미국-이스라엘 양해 각서에 규정된 군사비 지원 액수를 보면, 이 점이 잘 드러난다(아래 표 참조). 민주당·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에 대한 군사비 지원 증액에 돈을 아끼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양해각서 유효기간 | 서명 대통령 | 총액(달러) |
1999∼2008 | 빌 클린턴 | 267억 |
2009∼2018 | 조지W 부시 | 300억 |
2019∼2028 | 버락 오바마 | 380억 |
미국의 막대한 지원에는 역사적 맥락이 있다. 1950~1960년대 중동 지역의 상황은 미국의 입장에서 여러모로 골치 아팠다.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를 필두로 한 아랍 민족주의 세력이 중동 곳곳에서 집권했고, 개중 일부는 소련에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서방 제국주의의 지역 이권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이스라엘에 주목했다. 이스라엘은 1967년에 전쟁을 벌여 이집트·시리아·요르단 등 아랍 국가들을 잇달아 격파해 군사적 능력을 증명했다. 미국은 이스라엘을 이용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에 직접 개입하는 부담을 지지 않고도 자국의 이익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67년 전쟁 직전 약 2300만 달러이던 미국의 대對이스라엘 원조금은 전쟁 직후 껑충 치솟아 1억 달러가 넘었다. 이스라엘의 ‘경제 성장 신화’ 또한 미국의 지원 없이는 불가능했다. 방공망 ‘아이언돔’으로 유명한 이스라엘의 군수산업은 기술 공동 개발이라는 방식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이런 군수산업에서 이스라엘의 경제를 지탱하는 기둥 산업인 하이테크 산업이 파생됐다. 이 하이테크 산업으로 전 세계 벤처 자본 투자의 약 15퍼센트가 유입된다.
이는 이스라엘이 ─ 태생부터 영국 제국주의의 지원으로 출발했고 ─ 미국의 지원과 협력 없이는 독립된 국가 구실을 할 수 없는 정착민 국가임을 보여 준다.
중동 지배자들의 이해관계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뿐 아니라, 지역 내 아랍 지배자들에게도 도움을 받는다. 이번 이스라엘의 공습도 트럼프가 관여해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한 것과 연관이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이란에 맞서 친미 국가들의 결속을 다지고자 했고, 그 때문에 아랍에미리트·수단·모로코 등 여러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었다. 그리고 하마스-파타 간 분열을 이용해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효과적으로 단속하고 있다고 여기던 이스라엘은, 미국의 주선 덕에 아랍 지배자들과 대놓고 ‘동침’할 수 있게 되면서, 팔레스타인에 “본때”를 보여도 아랍 지역에서 반발이 크지 않으리라 판단했던 듯하다.
이집트·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 등 아랍 주요국들도 ─ 역내 경쟁 국가들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든, 자국의 반대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서든 ─ 미국의 지원이 필요하다.
이번에 이집트의 독재자 엘시시가 인권을 들먹이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재자를 자처한 것도, 바이든이 인권·민주주의를 운운하며 트럼프와 차별성을 그은 것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엘시시는 6만 명이나 되는 정치범을 투옥하고 반정부 활동가들을 일상적으로 납치·살해·구금하는 최악의 독재자로, 인권을 들먹이는 것이 가당찮다.
엘시시 정부는 이집트 내에서는 팔레스타인 연대 행동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카이로 타흐리르 광장에서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들었다는 이유로 기자 한 명을 체포할 정도였다.(이 기자는 행방불명됐다.) 이런 신경질적 대응은 비단 이집트만이 아니라 알제리·사우디아라비아 등 여러 나라 지배자들에게 공통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아랍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서방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의 상징 구실을 해 왔기 때문이다. 두 번의 인티파다는 수많은 아랍인들을 급진화시켰고, 끊임없이 이어진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아랍인들이 자국 지배자들에 맞서 저항하도록 고무하는 구실을 해 왔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아랍 지배자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그런 정권들을 지지하고 후원하는 미국 제국주의에 도전해 왔다.
그런 도전이 가장 전진했던 사례는 2011년 ‘아랍의 봄’이었다. ‘아랍의 봄’은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지배 질서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당시 이스라엘의 역내域內 최대 동맹이었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이 타도됐을 때, 미국과 이스라엘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집트뿐 아니라 오랫동안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유지해 온 중동의 부패하고 억압적인 지배자들이 모두 공포에 떨었다.
‘아랍의 봄’은 대중의 저항과 반란이 중동에서 제국주의 지배 질서를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 줬다.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경비견” 구실을 하는 이스라엘은 중동 제국주의 질서의 한복판에 있다. 중동의 반제국주의 항쟁이 이스라엘에 맞선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유다.
이스라엘의 존속을 인정하는 ‘두 국가 해법’은 그런 투쟁의 요구가 될 수 없다. 아랍 대중이 해방되려면 이스라엘과 그 동맹 지배자들을 모두 전복하는 일관된 반제국주의 투쟁이 필요하다.
팔레스타인 저항의 전망
그런 점에서 이번 팔레스타인 항쟁과 그에 대한 국제 연대 운동은 희망을 보여 줬다. 이번 항쟁 과정에서 젊은 세대의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이 새로 등장했다. 이들은 정치적 파벌이나 정당 등에 따라 분열과 반목을 거듭하던 “정치적 부족주의”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았고, 이 때문에 ‘두 국가 해법’에 따른 경계를 넘어서는 연대를 건설할 수 있었다. 가자지구·서안지구·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인들뿐 아니라 이스라엘 영토 내의 팔레스타인계 사람들까지 모두 함께 행동에 나선 것은, 2000년 제2차 ‘인티파다’ 이후 처음이었다.
3 에서 응답자 중 18~34세의 60퍼센트가, 흑인의 62퍼센트가 이번 사태의 책임이 이스라엘에 있다고 답한 것은 그런 영향을 흘낏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분위기의 영향으로 노동조합들도 이스라엘 규탄 성명을 발표하고 팔레스타인에 연대를 표했다. 이런 연대와 운동들은 팔레스타인과 아랍 세계의 반제국주의 저항에 힘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전 세계에서 벌어진 연대 행동도 뜻깊다. 한국을 포함해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은 수많은 국가들의 주요 도시에서 이스라엘 규탄 행동이 벌어졌다. 특히 미국에서는 전례 없는 규모의 팔레스타인 연대 시위가 벌어져,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수만 명의 시위대가 행진했다. 이는 지난해 분출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인데, 이 운동으로 특히 젊은 세대 사이에서 경찰과 국가의 폭력에 대한 분노가 커진 덕에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더 확대될 공간이 열린 것이다. 한 설문조사
MARX21
주
참고 문헌
Abunimah, Ali 2021, Another poll signals fall in US support for Israel, The Electrinic Intifada.
Alexander, Anne 2018, The contemporary dynamics of imperialism in the Middle East: a preliminary analysis, International Socialism 159 (Summer).
Farbmab, Jason 2021, Why Does the United States Support Israel?, Jacobin Mag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