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문제 *
인류의 경험 어디에나 흑역사가 있었지만, 흑역사가 가장 많았던 영역을 꼽으라면 아마 유대인 문제일 것이다.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사람들, 인간은 “신앙심”을 타고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물질적 조건이 바뀌어도 관념은 바뀌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유대교 박해를 그 증거로 삼아 왔다.
우리에겐 다행스럽게도, 아주 오랫동안 계속돼 온 신비화와 잘못된 정보를 반박하는 책이 있다. 아브람 레온(1918–1944)이 쓴 《유대인 문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은 20세기 최고의 마르크스주의 저작 중 하나로 꼽혀야 마땅한 책이다.
레온은 유대계 트로츠키주의자로 24살에 이 걸작을 썼다. 그 자체로도 매우 놀랍지만, 레온이 나치가 점령한 벨기에에서 트로츠키주의 지하 조직의 주도적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이 책을 썼다는 사실도 놀랍다. 위험한 삶이었고, 결국 짧게 끝났다. 레온은 1944년 아우슈비츠에서 생을 마감했다.
레온은 유대 문화의 존속이 종교, 인종적 특성, 그 밖의 다른 ‘관념적 편견’과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보여 주고자 했다. 오히려 유대인이 처음에는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그 뒤 봉건제에서도 계속 수행했던 특정한 경제적 구실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었다.
레온의 연구 작업은 마르크스의 명제를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유대인의 비밀을 종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비밀을 현실의 유대인에서 찾고자 한다.” 레온은 이 과제를 수행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 줄 뿐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방법론의 실천적 교훈을 제공한다. 각각의 단계에서 있었던 관념, 종교적 박해, 포그롬(집단 학살)을 사회의 경제 발전 국면이라는 견지에서 설명한다.
레온은 고대 시대로 거슬러 가 팔레스타인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 지역 주민들이 무역상과 상인이 돼야 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유대인이 무역상으로 명성을 날린 것은 유대 문화와 아무 상관이 없고 고대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의 물질적 조건과 전적으로 관련이 있었다.
게다가 로마 같은 고대 노예제 경제에서 모든 인구층은 무역 종사가 금지됐다. 예컨대 로마 귀족들은 무역선을 소유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의 처지는 토착민들과 확연히 달랐다. 농업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무역이라는 별개의 특이한 경제 활동을 했던 것이다. 주로 필요를 위한 생산(사용가치)에 기반한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상품 교환이라는 부차적 경제 활동에 종사했다. 대부나 고리대금업 같은 사업은 지배적 생산양식에 비해 주변적이었을지 모르지만 없어서는 안 되는 활동이었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오직 상인만이 재물을 헤프게 쓰는 부유한 귀족에게 필요한 돈을 가지고 있다. … 왕이 당장 군대를 소집해야 하는데 통상적 세수만으로 부족하면 돈을 가진 사람에게 가야 한다. 농민이 …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수 없으면 … 고리대금업자한테서 필요한 것들을 빌려야 한다. 이 때문에 고리대금업자의 금고는 자연 경제에 기반한 사회에서 필수불가결하다.
그래서 봉건제 초기에 유대인들은 기독교 농업 사회의 대중과 구별됐다. 그러나 체계적으로 박해를 당하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너무 중요했고, 그들의 파멸은 사회를 위태롭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건 사회 내부에서 새로운 생산 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던 경제적 중요성을 빼앗는 경제 방식이었다. 11세기 중세 도시들에서 교환을 위한 생산이 성장했다. 이런 발전에는 자본가 계급의 씨앗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 봉건적 생산 전반을 약화시켰다. 이전의 유대인 무역상과는 달리, 맹아적 자본가들은 상업 활동에만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도 통제하기 시작했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지역 생산이 발전하면서 강력한 지역 상인 계급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었다. 장인들에서 생겨난 상인들이 원료 배분을 장악하면서 장인들을 통제했다. 유대인의 무역이 생산과 확연히 분리된 반면, 지역 상인들의 무역은 본질적으로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상인 계급이 처음에는 베네치아와 플랑드르에서, 그 이후 유럽 전역에서 성장하면서 유대인 박해가 시작됐다. 신흥 계급이 유대인들과 투쟁을 벌이며 유대인이 이전에 했던 기능을 빼앗았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지역 상업 계급은, 과거의 역사적 발전 시기에 물려받았지만 이제는 쓸모없어진 경제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유대인들과 폭력적으로 투쟁한다.
이때부터 유대인 학살과 추방이 시작됐다. 스페인, 프랑스, 영국, 독일의 여러 지방국가들이 모두 유대인을 대대적으로 추방했다. 유대인의 경제적 중요성은 봉건제와 함께 사라졌지만, 봉건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쇠락했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 경제적 변화는 주요 도심지에서만 일어났다. 영주의 땅은 그런 변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고, 그곳에서 봉건제는 계속 작동했다. 그 때문에 유대인의 부유한 삶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달라졌다. 무역에서 퇴출당한 유대인들이 대부업으로 완전히 방향을 틀었다. 하지만 결국 이 또한 약화됐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나 아우크스부르크의 푸거 가문이 거상들을 상대하는 은행을 설립하기 시작했는데, 이 은행들은 돈을 탕진한 귀족에게 대부하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기능을 했다. 새 은행들은 도시에서 성장하던 산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수익을 거뒀다. 유대인 대부업자들은 점점 주변부로 밀려났다. “유대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주는 영세 고리대금업자가 됐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결국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경제적 기능을 한 사회 집단이다. 그들은 계급 또는 더 정확하게는 인민-계급이다.
레온이 옳게 지적했듯, 성문법에 따른 엄격한 노동 분업에 근거한 고대 세계에서 전혀 특이할 것이 없었다. 외부인 집단이 지역 주민에 금지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유대인들이 특정한 경제적 구실을 그만둘 때 유대 종교와 문화도 내려 놓는 것이 다반사였다. 유대인들이 지배적 생산양식의 주변부에 있을 때는 유대교가 구별되는 문화로 유대인들을 묶어 줬다. 유대인의 경제 활동이 사회 전반과 같은 곳에서는 유대인들이 빠르게 동화됐다.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농업 공동체나 아라비아 지역의 유목 부족이 그런 경우였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상업적 성격으로 분명하게 규정된 유대인 공동체만이 … 동화 시도에 전면적으로 저항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동화의 법칙은 다음과 같이 정식화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의 계급을 이루지 못하는 곳에서는 민족적·종교적·언어적 고유성도 다소간 빠르게 잃어 버리고 동화되기 시작한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사회의 지배적 경제 양식이 바뀌었다. 고대 노예제 사회는 봉건제에 자리를 내 줬고, 생산은 농촌의 대토지로 옮겨갔다.
대지주들은 점점 더 자기 땅의 생산물에 의지해 살게 되면서, 노예 노동을 중세 농노제와 비슷한 집단 거주 체계로 대체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봤다.
그러나 봉건 시대 초기는 로마 제국과 한 가지 중요한 유사성이 있었는데, 유대인의 구실이었다. 봉건제는 고대 노예 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교환가치보다 사용가치에 기반한 생산양식이었다. 실제로 봉건제 초기에 무역은 고대 사회보다 훨씬 더 부차적인 구실을 했다. 로마 제국에는 100만 명의 유대인이 살았고, 주로 거대한 무역항 알렉산드리아를 운영했다. 봉건제에서는 대규모 무역 중심지가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번창했다. 유대인들이 무역으로 살아가는 여러 집단 중 하나가 아니라 봉건 세계 전체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무역 집단이 됐기 때문이다. 유대인 상인들이 서양 봉건 사회로 가져온 재화들은 봉건 군주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 때문에 유대인들은 사회에서 특권적 지위를 누렸다. 오랜 세월 유대인들은 동서양을 잇는 유일한 경제적 연결 고리였다. 즉각적 소비를 위한 농업 생산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유대인들은 동양에서 사치품을 가져왔고 그렇게 번 돈을 유럽 지배자들에게 빌려 줬다.
유대인의 이런 구실이 퇴보한 것이 반유대주의의 새로운 이유가 됐다. 유대인 포그롬은 종종 절망에 빠진 농민들이 대부업자의 빚 문서를 불태우려는 시도였다. 빚 문서는 농민들이 빚을 졌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포그롬은 유대인의 구실이 퇴보한 결과 중 하나였다. 이주와 동화는 다른 결과였다. 신대륙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플랜테이션 소유주와 자영농이 됐다. 그들은 그 뒤 기독교인이 됐다. 예컨대, 19세기가 되면 라틴아메리카에 유대인이 소수만 남게 됐는데, 한 세기 전만 해도 유대인들이 이곳에 대규모로 이주했다.
서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동화되기 시작했다. 구별되는 경제적 구실이 더는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구별되는 사회 집단의 존재도 점차 약화됐다.
하지만 동유럽, 특히 폴란드에서는 매우 다른 과정이 전개됐다. 서유럽에서는 오래 전부터 산업이 발전했지만 동유럽 사회는 여전히 봉건 경제에 기반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인 경제적 구실을 계속 수행할 수 있는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레온은 이렇게 말한다.
폴란드의 사회·정치 구조가 변하지 않으면서 이런 상황이 지속됐다. 18세기에 … 폴란드의 봉건제가 치명타를 입었다. 이와 함께 동유럽 유대인의 세속적 지위가 뿌리째 흔들렸다. 서유럽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했던 유대인 문제가 동유럽에서 폭력적으로 분출했다. 서유럽에서는 사그라지다시피 했던 불꽃이 동유럽에서 대화재가 타오르며 활기를 되찾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박해를 피해 서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했다. 유대인들은 자본주의의 중심지에서 더는 구별되는 구실을 하지 않았고 따라서 동화의 압력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이주해 간 체제는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는 데서 인종차별이 유용함을 발견했다.
시온주의는 이런 긴장 속에서 나타났다. 레온은 유대 국가 방안이 언제나 유대교의 핵심에 있었다는 주장을 간단하게 반박한다. “2000년 동안 유대인들은 왜 이 나라(팔레스타인)로 돌아가려고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았는가?” 레온은 과거에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정통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고 지적한다. 레온은 사회 전체에서 유대인의 지위가 변한 것에 그 답이 있다고 말한다.
사실 유대교가 봉건 체제에 통합되는 한 … ‘시온의 꿈’은 유대교의 실질적 이해관계에 부합하지 않았다. 16세기 폴란드의 유대인들은 오늘날 미국의 유대계 백만장자만큼이나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설령 유대인 국가가 세워질 수 있다고 해도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레온은 주장했다. 레온은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유대인 국가, 다시 말해 영국과 미국 제국주의의 철저한 지배를 받는 국가가 형성될 가능성을 당연히 배제할 수 없다. … 그러나 팔레스타인에 작은 유대인 국가가 존재한다고 해서 뭐가 바뀌는 게 있을까? … 심지어 전 세계 유대인 모두가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시민이 되겠다고 했다 한들, 히틀러의 정책이 조금치라도 달라졌을까?
레온은 시온주의가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고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라고 주장했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자본주의가 봉건 사회를 해체했고, 이와 함께 유대 인민-계급의 기능도 해체됐다. 역사에서 이 인민-계급은 사라질 운명이었다.”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유대인 문제를 만들어 냈는데, 특정한 경제적 구실이 없는데도 유대인들은 박해받고 학살당했다. 자본주의는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 줬다. 정말이지, 자본주의는 반유대주의를 계급투쟁을 약화시키는 무기로 이용함으로써 무능을 미덕으로 만들었다.
자본주의가 유대인 박해의 핵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대인 해방의 토대도 놓았다.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구별되는 경제적 구실을 하지 않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운명은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다른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됐다.
레온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유대인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장과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본가들이 씌운 멍에를 마침내 벗어던지고 해방된 인류 앞에 한없는 발전의 미래가 열릴 때, 유대인 대중은 새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결코 작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세계 모든 억압받는 집단에 적용될 수 있는 결론이다. 사회주의는 자유를 뜻한다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MARX21
주
-
출처: Rogers, Ann 1986, The Jewish question, Socialist Worker Review (Februa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