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아편이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와 종교 *
약 20년 전 스케그네스[영국의 휴양지 - 역자]에서 열린 사회주의노동자당 주최 부활절 모임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와 종교’라는 주제로 강연했다. 나는 대략 다음과 같은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영국에서 종교는 다행히 주요 정치 이슈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더는 옳지 않다. 오늘날에는 종교, 특히 이슬람이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있다.
“혐오를 전파”한다는 이맘[무슬림 성직자 – 역자], “근본주의자들”이 점령한 모스크에 대해 경고하는 뉴스, 이슬람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칼럼, “온건한” 무슬림들이 “극단주의자들”과 무슬림 청년들의 “급진화”에 맞서 충분히 잘 싸우고 있는지를 따지는 라디오 토론, 무슬림 여성의 고충을 다루는 TV 프로그램, 세계 도처에서 이슬람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어리석은 짓에 대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온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지금 〈인디펜던트〉 일요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어제 마이클 나지르-알리 성공회 주교가 이슬람 극단주의 때문에 영국에서 비무슬림 “접근 금지 구역” 동네가 생기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슬람 과격파들의 이데올로기에 점령당한 곳들은 비무슬림을 적대한다고 나지르-알리 주교는 말한다.
유달리 터무니없는 주장이지만, 가치와 정확성을 떠나 이런 논평·보도들이 쏟아지면서 이슬람은 포위당한 종교가 됐다. 이슬람을 문제시하고 무슬림을 악마화하는 일이 끊이지 않으면서 오늘날 이른바 이슬람 혐오라는 현상이 생겨났다.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 역자]의 독자들은 이런 현상이 왜 생겼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이슬람 혐오는 십자군 전쟁이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한 갈등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적개심 때문이 아니다.(이런 과거지사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사용되곤 하지만 말이다.) 이는 첫째,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석유·천연가스 매장지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 우연히 무슬림이기 때문이고, 둘째, 1979년 이란 혁명 이래 반反제국주의 저항의 대부분이 이슬람주의의 형태를 띄었기 때문이다. 만약 중동·중앙아시아 사람들 대부분이 불교도였거나, 티베트에 사우디아라비아·이라크에 버금갈 유전이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 “불교 혐오”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었을 것이다. 백악관·펜타곤·CIA·다우닝가街[영국 총리 관저]에서 쏟아낸 ‘불교는 분명 위대한 종교이지만 변치 않을 근본적 결함이 있다’는 식의 관념이 〈폭스 뉴스〉, 〈CNN〉, 〈선〉, 〈데일리 메일〉 같은 하수도를 타고 흘렀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 크리스토퍼 히친스, 마틴 에이미스 같은 “지식인들”이 득달같이 나서서 이런 설명을 했을 것이다. 1960년대에 순진해 빠진 히피들이 불교를 받아들였지만, 불교는 근대성과 서구의 민주적 가치를 철저히 거부하며, 봉건주의와 신정 국가,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를 광신하는 근본에서 반동적인 종교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영국에서든 국제적으로든 (마치 18~19세기에 노골적인 인종차별주의가 그랬듯) 이슬람 혐오가 제국주의와 전쟁을 정당화하는 주된 이데올로기적 포장으로 발전해 온 현실 때문에, 여러 다양한 형태의 종교를 이론적으로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정하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정말이지, 수많은 좌파 개인·단체들이 예전의 정치적 태도를 완전히 잃어 버리고 제국주의를 왼쪽에서 포장해 주는 데에는, 종교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불완전하거나 기계적이거나 일면적으로 이해한 영향이 상당하고 할 수 있다.
1 , 안타까운 사례로는 반半시온주의적이며 이슬람 혐오적인 노동자자유동맹이 있다.
가장 악명 높은 사례는 바로 크리스토퍼 히친스다. 히친스는 《신은 위대하지 않다》[2008년에 한국어로 번역 출판됐다]라는 종교 관련 책을 썼는데(이 책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다루겠다), 그는 좌파 지식인이자 급진적인 체제 비판자에서 조지 부시에 대한 “비판적” 지지로까지 황망하고 극단적으로 나아갔다.(순전한 이론적 오류보다는 물질적 동기가 히친스의 급격한 우경화에 더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지만 말이다.) 다른 사례로는 노먼 제라스 같은 ‘유스턴 선언 그룹’ 성원들과 좌파 단체 중에는 프랑스의 ‘노동자투쟁당’이 히잡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가장 차별 받는 여성 시민들에 맞서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와 일시적 동맹이 되는 데까지 나아갔으며같은 시기에 미국과 영국에서 전투적 언사를 쓰는 반反종교/무신론 지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를 필두로 앞서 언급한 히친스와 철학자 대니얼 데닛 등이 그 운동의 일부다. 이들의 반反종교 주장을 비판적으로 살펴봄으로써 마르크스주의 입장의 주요 특징을 끌어낼 것이다. 하지만 먼저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직접 언급한 것들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본 명제들에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의 종교 분석에 토대가 되는 기본 원칙들을 제시하고자 한다.
유물론과 종교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물론이다.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철학, 특히 최근의 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사유와 존재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 존재와 사유의 지위 문제는 … 교회와 관련해서 더 분명해진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언제나 존재해 왔는가? 이 물음에 뭐라 답하느냐에 따라 철학자들은 양대 진영으로 나뉘었다. 자연보다 정신의 우위를 주장함으로써 결국에는 이런저런 형태로 세계가 창조됐다고 여긴 철학자들은 … 관념론 진영을 이뤘다. 자연이 먼저라고 여긴 철학자들은 유물론의 다양한 학파에 속했다.엥겔스는 마르크스주의가 확고하게 유물론 진영에 서 있을 뿐 아니라 “유물론적 세계관을 처음으로 아주 진지하게 채택하고 … 지식의 모든 유의미한 영역에 일관되게 관철시켰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을 핵심만 추리면 다음과 같은 명제들이 담겨 있다.
- 물질 세계는 인간의 의식(또는 어떤 다른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 총체적이거나 절대적이지는 않을지라도 세계를 실제로 인식하는 것은 가능하며, 사실 그래 왔다.
- 인간은 자연의 일부지만, 구별되는 일부다.
- 우선 인간의 사고에서 물질 세계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물질 세계에서 인간의 사고가 나온다.
명제 ⑴과 ⑵는 현대 과학의 가정과 연구 결과에 부합하며, 상식의 지위를 획득했다. 과학의 연구 결과가 대부분 그렇듯이 현실에서 매일 무수히 입증되기 때문이다. 명제 ⑶도 현대 과학의 연구 결과, 특히 찰스 다윈과 현대 고생물학·고인류학의 연구 결과에 부합한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다윈 이전에 마르크스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정리한 적이 있다.
모든 인류 역사의 첫째 전제는 물론 살아 있는 개별 인간의 존재다. 따라서 가장 먼저 확립돼야 할 사실은 개별 인간들의 신체 조직과 이를 이용해 인간이 나머지 자연과 맺는 관계다. … 역사 서술은 언제나 반드시 이러한 자연적 기초와,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인간이 행동으로 그 자연적 기초를 변형시킨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은 의식이나 종교나 다른 어떤 기준으로도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 인간은 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동물과 구별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인간의 신체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의 단계다.
명제 ⑷는 마르크스주의를 다른 모든 사상 조류와 구별하는 특징적인 명제이며, 따라서 공감대가 넓지 않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서 유물론적 관점을 취하는 많은 이들이, 사상과 물질적 조건 사이의 관계와 사회·역사·정치에서 사상이 하는 구실에 관해서는 관념론적 입장을 취한다. 그런 사람들은 “냉전이 근본에서 이념들의 충돌이었다”거나 “자본주의는 경제 성장 방안에 근거한다”는 관념을 거의 아무런 숙고 없이 받아들이는 듯하다. 이런 이유로 명제 ⑷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주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명제다.
인간은 자신의 개념·사상 등의 생산자이지만, 현실에서 활동하는 인간은 생산력 발전의 한계에 따라 규정된다. … 의식은 의식적 존재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독일 철학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지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 우리는 현실에서 활동하는 인간에서 출발하며, 인간의 현실 생활 과정에 근거해 생활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반응·반향의 발전 과정을 보여 줄 것이다. 인간의 사상·견해·신념, 즉 인간 의식이 인간 자신의 생활 조건, 사회적 관계, 사회적 존재가 변할 때마다 변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에 깊은 통찰력이 필요한가? 인간이 살면서 하는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은 반드시 필요한 일정한 관계 속에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들어가는데, 그 관계는 바로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 발전 단계에 상응하는 생산관계다. 이 생산관계의 총합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진정한 토대를 이룬다. 이 토대는 사회적 의식의 특정 형태들에 상응하며, 이 토대에서 법적·정치적 상부구조가 나온다. 물질적 삶의 생산양식이 사회적·정치적·지적 생활 과정 일반을 좌우한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다윈이 유기적 자연의 발전 법칙을 밝혀낸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 법칙을 밝혀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의 비대한 과잉 성장에 가려졌던 단순한 사실로, 바로 인류는 일단 먹고 마시며 잠자리와 입을 옷을 갖춘 이후에야 정치·과학·예술·종교 등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먼저 물질적 생활 수단을 생산해야 하며, 그 결과 특정한 민족·시대가 획득한 경제 발전이 얼마나 되느냐가 토대가 돼 그 위에서 그들이 관계 맺는 국가 기구, 법적 개념, 예술, 심지어 종교에 대한 관념이 발전한다. 전자에 비춰 후자를 설명해야지,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그 반대로 해서는 안 된다.따라서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근저에 종교에 대한 명확한 태도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분명 존재한다. 한편으로, 철저하고 일관된 마르크스주의자는 철저하고 일관된 유물론자로서 모든 형태의 종교적 믿음을 배제한다. 종교 사상은 다른 모든 사상들처럼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다. 인간이 종교 사상을 만들어 낸다.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종교적 믿음이 불가능해지는데, 종교적 사상은 믿음이 자연·인류·역사를 초월하고 그것들에 우선한다고 표방하기 때문이다. 또, 철학적 관념론과 종교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만약 정신이 물질보다 우선한다면, 신의 정신 말고 다른 어떤 정신이 그럴 수 있겠는가? 사상이 역사의 궁극적 원동력이라면, 그 사상은 신의 정신이 아니라면 어디서 오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게오르크 헤겔의 “절대정신” 개념은 신이라는 뜻 아닌가? 성경의 표현처럼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이 말씀은 곧 신이니라.” 이는 레온 트로츠키가 말년에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 변증법적 유물론자, 따라서 화해할 수 없는 무신론자”로 죽을 것이라고 쓴 까닭이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분명 종교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종교 전체나 특정 종교를 그저 수 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우연히 사로잡은 미망이나 우둔한 생각 정도로 보는 것은 충분치 않다. 사려 깊지 못한 종교 신자들(특히 제국주의 국가의 종교 신자들)이 보이는 흔한 습관은 다른 이들(특히 “원주민들”)의 종교적 믿음을 조롱하거나 미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그 믿음이 명백히 비이성적이거나 잘 알려진 자연 법칙에 반한다는 이유에서 그런 것이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의 믿음(처녀수태, 부활, 오병이어의 기적 등)에도 정확히 똑같이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는 화물 신앙[죽은 조상들이 배나 비행기에 특별한 화물을 실어 올 것이라 믿으며 기다리는 멜라네시아 원주민 신앙 - 역자]과 기독교가, 래스터패리어니즘[성경을 흑인의 편에서 해석해 예수가 흑인이었다고 주장하며, 1975년에 죽은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예수의 재림으로 여기는 신앙 - 역자]과 성공회가 똑같이 어리석다고 지적하는 식으로 이런 실수를 보편화하지 않는다. 종교 일반과 특정한 종교적 믿음의 사회적 근원을 분석해야 한다. 이는 믿음과 교리에 상응하는 실제 인간의 필요와 사회적·심리적·역사적 조건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마르크스주의자는 하일레 셀라시에의 신성神性과 불멸성을 믿는 신앙이 왜 1960년대 자메이카의 트렌치타운에서 활동한 거장 뮤지션 밥 말리에게 영감을 줬는지, 또는 예수의 신성과 불멸성을 믿는 신앙이 왜 15세기 피렌체의 화가(이자 수학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 영감을 줬는지 알아야 한다.
10 첫 두어 쪽을 살펴보면, 앞서 말한 모든 요소들이 응축돼 있음을 알게 된다. 다음과 같은 주장으로 시작한다. “독일에서 종교 비판은 본질적으로 종결됐으며, 종교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다.”
지금부터 마르크스가 종교에 관한 입장을 직접 밝힌 가장 중요한 저술인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마르크스가 말하고자 한 바는 다음과 같다. 과학 혁명, 계몽주의(특히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독일의 세속주의적 헤겔 좌파의 성경 비판 등으로 기독교와 성경이 자연이나 역사에 대해 사실에 근거한 참된 설명을 내놓는다는 주장, 심지어 내적 일관성이 있는 체계를 제시한다는 주장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더구나 종교 비판은 필수적이고 진보적인 작업이었는데, 인간 사고가 종교적 교의의 족쇄에서 해방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비판적인 세계 분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이 측면에서 논쟁을 한 것은 이 한 문장이 전부다. 마르크스는 사실에 근거한 종교 반박을 기정 사실로 하면서 자신의 요점, 즉 종교의 사회적 기반에 대한 분석으로 빠르게 넘어간다. “종교 비판의 기초는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출발점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단은 (마르크스 특유의) 비범하게 치밀한 서술로, 박사 학위급 통찰이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돼 있다.
실로 종교는 인간이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획득하고도 잃어 버린 자의식이자 자긍심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계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계, 즉 국가이고 사회다. 국가와 사회가 종교를 만들어 낸다. 국가와 사회는 세계를 거꾸로 세운 것이므로, 종교는 세계의 거꾸로 선 의식이다. 종교는 세계의 일반 이론이고, 백과사전과 같은 요약이며, 대중적 형태의 논리학이며, 유심론의 진수이며, 열정이며, 도덕상의 제재이며, 숭고한 보완물이며, 세계에 대한 위안과 정당화의 보편적 근거다. 종교는 인간 본질의 상상 속 구현인데, 인간 본질은 아무런 참된 실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에 반대하는 투쟁은 간접적으로, 종교를 영혼의 향기로 삼는 세계에 반대하는 투쟁이 된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 소외(“자신을 잃어 버린” 인간)의 반응이다. 하지만 인간 소외는 추상적이거나 초역사적인 조건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조건의 산물이다. 이 사회가 종교를, 즉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상상 속의 신에게 복종하는 거꾸로 선 세계관을 만들어 낸다. 왜냐하면 이 사회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노동 생산물에 지배받는 거꾸로 선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단지 미신이나 그릇된 믿음을 마구잡이로 모아 놓은 것이 아니다. 종교는 소외된 세계에 대한 “일반 이론”, 즉 소외된 인간들이 자신의 소외된 삶과 사회를 이해하려 애쓰는 방식이다. 따라서 종교는 마르크스가 나열한 다양한 기능(“백과사전과 같은 요약”, “대중적 형태의 논리학” 등)을 수행한다. 따라서 종교에 맞선 투쟁은 “종교를 영혼의 향기로 삼는” 세계, 즉 인간이 종교를 필요로 하는 소외의 세계에 맞선 투쟁인 것이다.
11 이 결론을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 마르크스의 종교관을 요약하거나 설명하는 거의 모든 논평가들은 이 구절을 무시한다. 아마 이 구절을 읽지 않았거나(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해하지 못했거나(좀 더 가능성이 있다), (가장 높은 가능성으로는) “마르크스는 종교가 지배계급의 도구라고 주장한다”거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종교는 노동 대중을 달래는 기능을 한다”는 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종교관을 단순히 일차원적인 분석으로 환원하려는 시도와 이 구절이 근본적으로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해 그런 식의 말을 하긴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 외에도 많은 것을 말했다. 마르크스 이론의 복잡한 전체를 그 요소들 중 단지 하나로 환원하는 것은 사실상 마르크스 이론을 왜곡하는 것이다. 둘째, 마르크스는 결론에 열중한 나머지 수많은 은유와 경구들을 폭풍처럼 쏟아내며하지만 마르크스는 종교에 대한 주장을 마무리하기 전에 대단히 중요한 구절 하나를 더 끼워 넣는다.
종교적 고통은 현실의 고통의 표현이자 그 고통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자,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세계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이 구절은 앞의 구절보다 훨씬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자주 인용되는 마지막 문장 (대체로 마르크스 분석의 본질이나 총체라고 제시된다)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실 종교의 정치적 구실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문장은 첫 번째 문장이다. 마르크스가 종교는 고통의 표현이자 그에 대한 항의 둘 다라고 주장한다는 것이 핵심이고, 따라서 종교의 마약성·최면성 효과에만 초점을 맞추는 분석은 마르크스의 주장을 왜곡한 것이다. 이 문장은 (후술할) 중요한 역사적 사실의 함의를 짚는 것이기도 한데, 수많은 진보적·급진적 운동들 심지어 혁명적인 운동들이 종교적 형태나 색채를 띠었거나,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었던 것이다.
13 엥겔스는 기독교의 역사적 발전과 구실에 관한 흥미로운 연구를 많이 했는데, 특히 《독일 농민전쟁》, 《반뒤링론》, 《공상에서 과학으로》 영문판 서문, 《브루노 바우어와 초기 기독교》, 《초기 기독교의 역사》가 있다. 14 이 모든 논평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종교의 교리·교파·교회·운동·갈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성직자들이 벌이는 우매한 행동이나 속임수로만 취급해서는 안 되고, 언제나 진정한 사회적 필요와 이해관계가 표현된 것이자 왜곡돼 반영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몇 가지 발췌문을 보면 이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저작들에서 종교에 대해 수많은 언급과 분석을 했다. 특히 젊은 시절 마르크스는 유대인 해방을 지지하는 논쟁적 저작 《유대인 문제에 관하여》를 썼다.《독일 농민전쟁》에서는,
16세기의 이른바 종교 전쟁들에서는 매우 분명한 물질적인 계급적 이해관계가 작용하고 있었다. 그 전쟁들은 영국과 프랑스에서 이후 벌어진 충돌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전쟁이었다. 당시의 계급투쟁이 종교적 특징을 띠는 듯했지만, 종교라는 가림막 뒤에는 다양한 계급들의 이해관계·필요·요구가 있었다. 그럼에도 실제 상황은 거의 바뀌지 않았는데, 이는 독일의 당시 조건으로 설명될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혁명적 반대는 중세 전반에 걸쳐 살아 있었다. 그런 반대는 해당 시점의 조건에 따라 신비주의, 공공연한 이단 사상, 혹은 무장 봉기의 형태로 나타났다.
《공상에서 과학으로》 서문에서는,
칼뱅의 교리는 당대의 가장 대담한 부르주아지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칼뱅의 예정론 [인간의 구원은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으며 인간의 의지와는 관계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 교리 – 역자] 교리는 경쟁적 이윤 추구의 세계에서는 성공이나 실패가 인간의 행동이나 영리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종교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기독교는 원래 피억압자의 운동이었다. 기독교는 노예와 해방노예의 종교,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빈민의 종교, 로마가 예속시키거나 이산시킨 민족들의 종교로 처음 나타났다. …
[중세의 농노·평민 봉기는 — 몰리뉴] 중세의 모든 대중 운동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탈을 쓰기 마련이었고, 만연한 타락에 대항해 초기 기독교를 복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하지만 언제나 종교적 고취 이면에는 명백히 세속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는 이슬람에 관한 각주가 하나 있다.
이슬람은 오리엔트 사람들, 특히 아랍인들에게 맞춰진 종교다. 즉, 한편으로는 상공업에 종사하는 도시민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족에게 맞춰진 종교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거듭 벌어지는 충돌의 씨앗이 있다. “율법”을 준수하는 도시민은 부유해지고 사치스러워지며 나태해진다. 가난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엄격한 베두인족은 그런 부귀영화를 시기하면서 갈망한다. 이후 그들은 선지자, 즉 마흐디 하에 단결해 배교자들을 벌하고, 종교적 의례와 참된 신앙을 바로 세우며, 그 보상으로 배교자들의 재산을 착복한다. 100년이 지난 후 그들은 당연히도 이전의 배교자들과 같은 위치에 있게 된다. 또다시 신앙을 정화할 필요가 생기며, 새로운 마흐디가 생겨나 승부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된다. 이는 아프리카 무라비트 왕조와 스페인의 무와히드 왕조의 정복 전쟁에서도, 하르툼에서 영국을 그토록 성공적으로 좌절시킨 최근 마흐디에 의해서도 일어났던 일이다. … 이 모든 운동은 종교의 옷을 입고 있지만, 그 바탕에는 경제적 이유가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이러한 구체적 논평들의 일부 또는 전체가 역사적으로 참이냐 거짓이냐가 아니라, 이러한 논평들의 근저에 있는 일관된 방법론이다.
도킨스, 히친스, 이글턴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생물학자로, 《이기적 유전자》로 처음 유명해졌고, 이후 대중적 과학 저술가로서 상당한 명성과 경력을 쌓았다. 도킨스는 2006년에 《만들어진 신》을 출판했다. 종교를 전면 공격하고 무신론을 옹호하는 이 책은 국제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특히 미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언 매큐언, 마이클 프레인, 《스펙테이터》, 〈데일리 메일〉, 스티븐 핑커 등 다양한 인물과 매체의 찬사를 받았다.
도킨스의 문체와 지적 능력에 대한 칭찬이 자자한 듯한데, 미리 밝히자면 나는 여기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마르크스를 읽고 도킨스를 읽으면 마치 레프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를 읽다가 킹즐리 에이미스나 애거사 크리스티를 읽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책 한 권 분량의 내용을 한 문단에 담는 반면, 도킨스는 에세이 한 편짜리 내용을 두꺼운 책 한 권으로 부풀린다. 실제로 《만들어진 신》 460쪽을 다 읽어도 마르크스가 1843년 분석에서 첫 문장에 집약한 바, 즉 종교 비판은 본질적으로 종결됐다는 것 이상의 지적인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도킨스가 내놓는 것은 모종의 “계몽주의”로, 종교를 경험주의·합리주의로 논박하는 것이다. 도킨스 자신이 “신神 가설”이라고 부른 것을 뒷받침할 사실적 증거는 전혀 없지만, 신의 부존재를 (완전하게는 아닐지라도) 거의 확실히 입증하는 증거는 존재한다고 “과학적”, 즉 실증주의적으로 입증하려 한다. 이에 더해 도킨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유서 깊은 “논증”, “파스칼의 내기”, 스티븐 언윈이라는 사람이 최근 내놓은 기이한 추론 등 다양한 신 존재 증명 논리에 대한 반박과,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수많은 우행과 죄악의 사례를 덧붙인다. 이 책에서 새로운 것을 얻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고, 미신을 곧이곧대로 믿는 무지한 대중에 비해 자신이 똑똑하다고 느낄 수 있어서 이 책을 즐겁게 읽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새로운 내용은 전혀 없으며, 사실 못해도 200년은 된 내용들이다.
왜 종교가 인간 사회에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지 설명하려는 부분 정도가 새롭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시도는 꽤 형편없이 실패한다. 열성적인 진화생물학자로서 도킨스는 유전자에 초점을 맞춰 자연 선택 과정을 설명할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적대감 때문에 종교가 개인이나 사회의 생존에 이로울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도킨스는 이 모순을 피하려고 종교를 자신이 생존 경쟁에 이롭다고 주장한 특성의 부작용이라고 시사한다. 예컨대 도킨스는 아이들이 연장자가 말해 준 것을 믿으려 하는 성향에서 종교가 비롯했다고 본다. 분명 이런 주장은 비판을 견뎌내지 못한다. 첫째, 젊은이들, 특히 청소년기에 피암시성이 회의적인 태도에 비해 얼마나 더 큰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둘째, 모든 것을 감안할 때 피암시성이 이로운 것인가 하는 점도 마찬가지로 논쟁 거리다. 셋째, 피암시성의 정도와 이점은 압도적으로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사회에 따라 매우 다를 가능성이 클 듯하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행동이나 믿음을 부모의 행동이나 믿음으로 설명하는 이론들이 다 그렇듯, 무한 소급에 빠지지 않으려면 최초의 부모 성향을 설명해야 하는 문제가 남는다.
15 다시 말해, 도킨스의 설명은 전혀 설명이 아닌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도킨스가 《만들어진 신》에서 마르크스주의 종교론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다는 것도 그의 접근법 전반을 평가할 만한 하나의 사례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교육자 자신도 반드시 교육받아야만 한다.”하지만 이 책이 지적으로 독창적이지도 않고 수준도 그저 그렇다는 것이 주된 반대 이유가 될 수는 결코 없다.(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견실한 저작을 두고 그런 식으로 트집 잡는 것은 무례한 짓일 것이다.) 이 책을 반대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빈약한 방법론으로 인한 반동적인 정치적 결론이다. 마르크스가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에 관해 주장했듯 기계적 유물론은 예외 없이 관념론에 문을 열어 주는데, 도킨스가 그 분명한 사례다. 도킨스는 천박한 유물론인 유전자 결정론으로 인간 본성·행동을 추상적으로 설명하다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종교가 한 구실에 대해서는 널리 퍼져 있는 관념론으로 설명하는 등 스스로 의식도 못한 채 오락가락한다. 도킨스는 사람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행동할 때 그들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정말로 종교라고 가정하는 실수를 반복한다. 도킨스의 에세이 ‘신의 불가능성’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그의 접근법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대부분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아일랜드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상대에게 폭탄을 터트린다. 아랍인들은 신의 이름으로 자폭 테러를 한다. [수니파 성직자] 이맘과 [시아파 성직자] 아야톨라는 신의 이름으로 여성을 차별한다. 순결을 지키는 교황과 사제들은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성생활을 엉망으로 만든다. 유대인 쇼헷[유대교에서는 ‘셰히타’라는 종교적 방식으로 도살한 고기만 먹을 수 있으며, ‘셰히타’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쇼헷’이라고 부른다 – 역자]은 신의 이름으로 살아 있는 동물의 목을 벤다. 과거 역사에서 종교가 이룬 업적을 보면, 피비린내 나는 십자군 전쟁을 벌이고 종교 재판과 고문을 했으며,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대량 학살했고, 선교사들은 문화를 파괴했으며, 법적 강제를 통해 새로운 과학적 진리를 되도록 오랫동안 가로막았다. 이보다 훨씬 더 인상적인 것들도 많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나는 ‘전혀 아무것도 없었다’는 답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슨 종류든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신들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다고 믿을 만한 꽤 그럴듯한 이유는 있다. 모조리 엄청난 시간 낭비였고 삶의 낭비였다. 우주적 수준에서는 농담으로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토록 비극적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사실 이것은 종교가 수많은 전쟁의 원인이라는 흔해 빠진 엉터리 처방에 조미료를 친 것일 뿐이다. 단 한순간도 엄격한 검증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일랜드의 사례를 들어 보자. 아일랜드의 갈등이 본질적으로 또는 주로 종교 때문이라는 관점은 명백히 거짓이고 노골적인 반동이다. 주요 지도자들이 드러낸 말과 인식만 보더라도 거짓이다.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공화파의 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어도, 누구도 자기들이 가톨릭을 위해서 싸운다고 말하지 (또는 믿지) 않았다. 그들은 아일랜드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웠다. 종교적 편견이 훨씬 컸던 연합주의자 쪽에서는 덜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주요 지도자들이 밝힌 목표는 “민족적”, 즉 [북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해 통일 아일랜드 공화국을 수립하지 않고 - 역자] “영국”에 남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런 상반된 민족적 염원의 배경에는 명백히 착취·빈곤·차별·억압이라는 실질적인 경제적·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이 있다. 성변화 교리와 교황무류성 교리에 관한 종교적 차이가 아닌 것이다.[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성찬식에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는 각각 예수의 몸과 피로 현실화하며(성변화 교리), 교황이 사도좌에서 내린 결정은 성령의 은혜로 보증되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 수 없다(교황무류성 교리). 개신교는 이 두 교리를 믿지 않는다. – 역자] 이 갈등의 근본 원인을 종교로 보는 관점은 반동적이었는데, 아일랜드인들이 원시적이고 우둔하다는 인종차별적 편견에 들어맞고(어쨌든 “우리[영국인들 - 역자]”는 이미 수 세기 전에 종교를 놓고 다투지 않게 됐다), 영국의 지배를 전쟁 중인 종파들 사이에서 중립적인 중재로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도킨스가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고 정치적으로 조지 부시와 전혀 가깝지 않다는 것은 칭찬할 만하지만, 도킨스의 종교관은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본의가 아니더라도 훨씬 더 반동적이 된다. “서구”에 대한 무슬림의 적대감은 정당한 이유나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 네오콘·부시·체니·블레어·브라운의 핵심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의 적대감이 서구 제국주의와 착취·지배에 대한 반응·대응이 아니라, 비무슬림 세계를 파괴·정복하고 어쩌면 개종시키려는 공격적인 종교에 기반한 운동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17 , 그게 아니라 부시·블레어 도당처럼 이슬람을 “사악하게” 잘못 해석하거나 왜곡한 탓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둘 모두 종교가 동기라고 보는 것은 공통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주둔 미군의 철수 같은 분명적 정치적 요구를 제시한 알카에다의 공개 성명서나 이라크에서 벌어지는 일이 동기가 됐다는 [2005년] 7월 7일 런던 폭탄 테러리스트들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이치에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다. 미국·영국이나 서구 강대국이 지하철에 설치된 폭탄이나 비행기의 빌딩 충돌로 파괴·정복되거나 심지어 개종될 수 있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어서 일관된 운동의 진정한 동기가 절대 될 수 없다. 테러를 저질러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를 중단시키거나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래도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시·블레어 도당에게 “종교적” 해석은 필수적인데,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와 그들 자신이 수행한 정책의 책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킨스의 접근법은 그런 해석에 잘 들어맞고 강화해 준다.
주류 이슬람의 본질에 이런 목표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특별한 이유 없음”은 공중전화 부스를 파손하는 이유로는 적합한 단어일지 모르지만, 9월 11일 뉴욕을 강타한 사건을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 9·11은 종교 때문에 벌어졌다. 물론 종교는 애초에 이 치명적인 무기를 사용하도록 동기를 부여한, 중동 지역 불화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야기이고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아니다. 여기서 나의 관심사는 무기 그 자체다. 세계를 종교 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들[아브라함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이 인물에 기원을 둔 종교를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라고 부른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 – 역자]로 채우는 것은 장전된 무기들로 거리를 어지럽히는 것과 같다.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도킨스와 비슷하지만 더 형편없다. 그가 쓴 《신은 위대하지 않다》는 《만들어진 신》보다 지적 수준이 훨씬 더 낮은데,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적인 일화와 산만한 저널리스트적 논법이 제멋대로 섞여 있다. 히친스는 무신론을 이슬람 혐오에 맞춰 각색했는데, 책 제목(무슬림이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것을 조롱한)과 본문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히친스의 급진적인 과거를 존중해 밝히건대, 히친스는 마르크스가 종교에 관해 쓴 주요 문장 몇 개를 지지하며 인용하긴 한다. 그러고는 그 문장들의 의미를 계속 철저히 무시한다.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종교는 생명을 죽인다’라는 장章에서 히친스는 분쟁으로 파괴된 여섯 개 도시(벨파스트·베이루트·봄베이·베오그라드·베들레헴·바그다드)를 주마간산으로 보여 주는데, 역사·제국주의·억압·계급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오직 종교적 증오의 잣대로만 각각의 사례를 간편하게 요약한다. 이는 사회적·정치적 분석을 희화화하는 것이다. 히친스의 팔레스타인 “분석”은 특히 충격적이다.
나는 언젠가 이스라엘에서 가장 세련되고 사려 깊은 외교관이자 정치인 중 한 명인 고故 아바 에반이 뉴욕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해 가장 먼저 눈길을 끈 연설 내용은 그 해결책이 쉽다는 것이었다. … 대략 비슷한 규모의 두 민족이 같은 땅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다. 해결책은 당연히 두 국가를 나란히 만드는 것이었다. 확실히 인간의 지혜 속에 그렇게 자명한 것이 포함돼 있었겠지? 고로 수십 년 전에 그렇게 해결됐어야 했다. 메시아 신앙을 가진 랍비·물라·사제들이 그 문제에서 손을 뗐다면 말이다. 하지만 양측의 신경질적인 성직자들은 신이 주신 권한이라고 배척적으로 주장했고, 이를 (모든 유대인들이 죽거나 개종한 뒤에 찾아올) 아포칼립스[성서에 나오는 세상의 종말]의 도래를 바라는 종말론적 기독교인들이 더 부추겼다. 결국 참을 수 없는 상황이 됐고 이제는 핵전쟁의 위협으로 상징되는 싸움에 전 인류가 인질이 됐다. 종교는 모든 것을 오염시킨다.
19 그것은 자본주의, 제국주의, 불평등, 착취, 계급 갈등 같은 물질적 실제가 아니라 그저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 있는 잘못된 생각을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히친스가 “나는 세계에서 증오의 주된 원인은 종교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한다”(유튜브 영상에서 히친스가 한 말이다)고 했을 때그러나 도킨스와 히친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 고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 비판을 희석시키거나 종교 사상에 대한 이론적 타협에 문을 열어 줘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쯤에서 혐오스러운 히친스를 떠나 훨씬 더 호감이 가는 테리 이글턴으로 넘어가야겠다. 이글턴의 사례는 타산지석이 된다. 이글턴은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인 저명한 문화·문학 이론가로, 전에 필립 라킨의 인종차별과 편견들을 비판했다. 최근에 이글턴은 학계 동료인 마틴 에이미스의 이슬람 혐오를 맹비난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2006년에 이글턴은 《런던 리뷰 오브 북스》에 《만들어진 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평론을 썼다. 이글턴의 평론은 내 글과 같은 주장을 일부 전개하기도 하지만, 예컨대 아일랜드와 관련해 이글턴의 비평 용어는 전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다. 도킨스가 근본주의적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이 마치 모든 종교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판하면서도 자신이 잘 모르는 더 정교하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대해서는 무시한다는 게 이글턴의 주된 논지다.
누군가는 이런 궁금증이 생길지 모른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 사이의 인식론적 차이에 관한 도킨스의 견해는 무엇일까? 도킨스는 주관성에 관해 에리우게나를, 은총에 관해 라너를, 소망에 관해 몰트만을 읽어본 적이 있을까? 들어보기나 했을까? 아니면 그는 콧대 높은 젊은 변호사처럼 까다로운 논증에 완전히 무지하면서도 상대를 논파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일까?
도킨스의 책에 대한 비판으로는 어느 정도 타당하지만, 이 논지에도 심각한 문제들이 있다. 첫째, 기독교(또는 불교나 조로아스터교) 신학의 모든 내막에 통달해야만 그런 신학에 맞서 지적으로 건강한 무신론을 옹호할 수 있다는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둘째, 자유주의적 신학자들의 비물질적·비인격적인 ‘사랑과 관용의 신’ 개념(구약성서에 나오는 복수의 신과 대비되는)과 그것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내놓으면서, 이글턴은 그런 신이 실제로 존재하고 숭배할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분명하게 열어 둔다. 이글턴은 예수를 최초의 반제국주의 혁명가로 묘사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가 정신이 나갔거나 자기 학대를 즐겨서 죽은 것이 아니다. 로마 국가와 각지의 하수인·추종자들이 사랑·자비·정의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예수의 인기가 빈민 사이에서 엄청났던 데에 겁을 먹고, 극도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서 대규모 봉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그를 죽인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에게는 디트리히 본회퍼[나치에 반대하다 히틀러에 의해 사형당한 독일 신학자 - 역자]의 다정하고 자상하며 비인격적인 신과 테리 이글턴의 급진적 예수는 이언 페이즐리[영국을 지지하는 북아일랜드의 연합주의자 목사 – 역자]나 오사마 빈 라덴의 불쾌하고 편견 가득한 신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창조물이자 환상의 투영일 뿐이다.
종교와 사회주의 정치
앞선 분석에서 도출되고 역사적으로도 도출돼 온 주요 정치적 결론들을 간략하게 다소 개념적으로 요약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첫째, (널리 퍼진 오해로 촉진된) 흔한 견해와는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종교를 금지하자는 발상에 단연코 반대한다. 이것은 새로운 입장이 아니라 이미 1874년에 엥겔스가 프랑스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키의 추종자들이 내놓은 제안에 반대하며 밝힌 것이다. 엥겔스가 제시한 이유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장 급진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1793년에 그랬듯 포고령으로 신을 폐지한다.
“코뮌이 과거 고통의 유령[신 — 엥겔스], 현재 고통의 원인[존재하지도 않는 신이 원인이라니! — 엥겔스]에서 인류를 영원히 해방시키도록 하라. 코뮌에는 성직자를 위한 자리가 없다. 모든 종교 표현, 모든 종교 단체는 금지돼야 한다.” 인간을 무신론자로 바꿔야 한다는 ‘무프티의 명령’[par ordre du mufti; 당사자와는 아무 관계없이 윗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비꼬는 표현 – 역자] 식 요구에 코뮌 구성원 두 명이 서명했다. 이들은 다음 두 가지를 통렬히 깨달을 수 있었다. 첫째, 많은 경우 서류상으로 내린 명령이 꼭 실행되지는 않을 수 있다. 둘째, 박해야말로 바람직하지 않은 신념을 조장할 최고의 방법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를 금지하기는커녕 종교는 국가와 관련 없는 개인의 문제이고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에서 보장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닌은 1905년에 쓴 글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국가는 종교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말아야 하며, 종교 집단들은 공권력과 어떠한 연계도 맺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종교에 소속되거나 종교를 갖지 않는 것, 즉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그렇듯이 원칙적으로 무신론자가 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 차별이 벌어지는 일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 공문서에 시민의 종교를 언급하는 일조차 없어져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종교가 없어질 수 있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생각하는 경우는 종교의 근저에 있는 사회적 원인(소외·착취·차별 등)이 사라진 결과 종교가 점차 사멸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국가가 종교에 특권을 부여하는 데에 일절 반대하며, 모든 국교(예컨대 영국 국교회)의 폐지를 요구한다.
24 의 마지막 장은 종교에 대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대처를 폭넓게 개관한다. 또, 이 잡지의 이전 호에 실린 데이브 크라우치의 글 25 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무슬림 소수민족과 맺은 관계에 대한 대단히 유용한 사례 연구를 볼 수 있다. 크라우치는 혁명 초기 볼셰비키가 위에서 설명한 레닌주의 원칙을 엄격히 고수해 무슬림들을 끌어들이는 데 상당한 성공을 거둔 반면, 스탈린의 부상 이후에는 베일에 대한 공격 등 상명하달 식 권위주의적 정책들이 점점 더 많이 채택돼 재앙을 낳았음을 보여 준다.
러시아·동유럽·중국·쿠바·북한 등 스탈린주의 정권들의 경험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종교관에 대한 일반적 인식에 불가피하게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이 짧은 글에서 그 경험들을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는 없지만, 이 잡지의 독자들은 그런 정권들의 정책이 결코 진정한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를 대변하지 않음을 잘 알 것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는 논평할 만한 가치가 있다. 스탈린주의의 종교 탄압에 대해서는 과장과 오해가 있다. 과장의 측면은 대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주요 종교·교파를 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순종한다면 (대체로 그랬다) 용인하고 동맹까지 맺었다는 점이다. 오해의 측면은 종교 단체·개인이 박해를 받은 경우 그 박해는 이른바 신앙 때문이 아니라 주로 그런 단체·개인들이 정치적으로 골칫거리였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당시 이 사회들에서는 모든 정치적 반대가 억압됐다. 폴 시걸의 《온순한 사람들과 투쟁적인 사람들》종교적 색채를 띠는 대중 운동은 그 수와 종류가 다양한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런 운동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때, 그 운동의 지도자·지지자들의 종교적 신념이나 관련 종교의 교리·신학이 아니라, 그 운동이 대변하는 사회 세력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근거해 운동의 정치적 구실을 분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적용해 가톨릭과 개신교가 각각 역사적으로 수행한 구실을 검토해 보자. 중세와 근대 초기의 가톨릭은 본질적으로 봉건 귀족의 종교였고 따라서 거의 어디에서나 반동적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급진적인 개신교는 신흥 부르주아지나 평민층을 대변하며 가톨릭보다 좌파적인 경향이 있었다. 당대의 위대한 저항 투사이자 혁명가인 토마스 뮌처, 존 릴번, 제라드 윈스탠리가 이끈 사람들은 열렬한 개신교도였다(오늘날 말로는 극단주의자·근본주의자). 하지만 이들 부르주아 반란자들은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권력을 잡자마자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시초 축적”에 뛰어들었다. 요컨대 악랄한 식민지 개척자이자 노예상이 된 것이다. 영국에서 국왕을 시해한 혁명가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압제자(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그의 이름이 악명 높다), 특히 가톨릭 농민의 압제자가 됐다. 네덜란드의 개신교도 시민들은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수행한 유럽의 영웅이었을지 몰라도, 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실시한 악당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유럽, 특히 남유럽에서 계속 반동의 보루 구실을 했는데, 가톨릭 교회가 스페인에서 프랑코를 적극 지지하며 프랑코와 무솔리니·히틀러 사이의 거래를 성사시킨 것으로도 드러났다. 오늘날에도 이런 점은 이탈리아, 스페인, 남부 독일의 주요 보수 정당들에서 완화된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 가톨릭과 종교 일반이 가장 강력하게 남아 있는 국가는 아일랜드와 폴란드인데, 이들 나라에서 가톨릭 교회는 민족 억압에 대한 반대자를 – 온건하지만 확고하게 – 자처할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라면 17세기를 돌아볼 때 즉각 자신을 개신교 반란자들과 동일시하고 가톨릭 군주와 황제에 반대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1916년의 아일랜드나 1970년대의 벨파스트를 살펴볼 때 자신을 “개신교” 연합주의자가 아니라 “가톨릭” 민족주의자들과 동일시할 것이다. 폴란드 연대노조의 부상을 그단스크의 “후진적” 가톨릭 신자들 대 소비에트 국가의 “진보적인” 무신론자·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본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결국에는 제국주의 압제자의 편에 서게 됐다. 오늘날 티베트와 중국의 갈등, 무엇보다 중동에서 벌어지는 “테러와의 전쟁”과 그에 맞선 투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들은 훨씬 많다. 사회주의자들이 맬컴 엑스를 ‘네이션오브이슬람’의 일원으로서 지녔던 반동적인 종교적 믿음에 근거해, 밥 말리를 노회한 폭군 하일레 셀라시에의 신성에 대한 믿음에 근거해, 심지어 우고 차베스를 자칭 가톨릭 신앙과 교황에 대한 존경에 근거해 재단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태도를 결정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타깝게도, 몇몇 사회주의자연하는 사람들은 차베스나 말리에 관해서는 이를 어려움 없이 이해하는 반면, 문제의 종교가 이슬람일 때는 부르주아적 프로파간다의 맹렬한 압력 때문에 같은 접근법을 택하지 못한다. 이 문제를 최대한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이렇다. 마르크스주의·국제사회주의 관점에서 보면, 하마스를 지지하는 문맹에 보수적이고 미신을 믿는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농민이 시온주의를 (심지어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교육받은 자유주의적 무신론자 이스라엘인보다 더 진보적이다.
다음과 같은 결론도 나온다.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주요 종교들 중 그 어느 종교도 본질적으로나 그 교리에서나 다른 종교들보다 더/덜 진보적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종교가 “주요”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즉 서로 다른 사회 질서 하에서 수 세기를 넘나들며 곳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교리를 선택·해석·각색할 가능성이 거의 무한해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교리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적 상황에서의 사회적 기반이다. 그래서 미국에는 우파적이고 인종차별적이며 제국주의적인 기독교로 ‘도덕적 다수파’나 모르몬교가 있고, 좌파적이고 인종차별과 전쟁에 반대하는 기독교 전통으로는 마틴 루터 킹이 있는 것이다. 남아공에는 아파르트헤이트에 찬성하는 기독교가 있는 한편 반대하는 기독교도 있었고, 라틴아메리카에는 우익적이고 과두 정치와 독재자를 지지하는 가톨릭이 있고 좌파적인 “해방신학” 가톨릭이 있는 것이다. 물론 이슬람 안에도 서로 다르며 첨예하게 대립하곤 하는 수많은 이슬람들이 있다.
이슬람이 특히 후진적인 종교라는 관념을 정당화하는 주된 논거로는, 무슬림 국가들에서 만연한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있다.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아주 최근까지도 서구 사회에 거의 마찬가지 태도가 널리 퍼져 있었으며, 지금도 많은 기독교 교회들의 가르침 속에 그런 태도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의 근본적인 결함을 보려면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이라는 기초로 돌아가야 한다. 무슬림 신성 가족의 비밀은 지상의 무슬림 가족에 있다. 무슬림의 종교적 관념이 무슬림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 여성의 실질적 지위가 무슬림 신앙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슬람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탄생해서,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에서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곳곳으로 전파됐다. 이 광활한 지역은 수 세기 동안 대개 가난하고 낙후한 시골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상당 부분 그렇다. 아일랜드에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발전 수준이 비슷하고 사회 구조도 비슷하지만 종교는 다른 여러 사회들도 여성과 동성애자들을 마찬가지로 차별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정당이 종교를 믿는 노동자들과 맺는 관계 문제가 있다. 종교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영향이 강한 나라는 여전히 세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런 나라들에서 활동하는 혁명적 정당은 혁명을 일으킬 노동자들의 다수가 혁명기에도 여전히 종교를 믿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압도 다수의 노동자들은 논쟁·소책자·책이 아니라 혁명적 투쟁에 참가함으로써,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주의를 건설함으로써 종교적 환상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혁명적 정당의 의무는 종교들 간 그리고 종교인-비종교인 간의 차이가 노동계급 투쟁의 단결을 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더구나 혁명적 정당이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계급을 이끄는 진정한 대중 정당이 되려 한다면, 종교적이거나 반쯤 종교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당원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종교적 환상이 있다는 이유로 그런 노동자들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종파적이고 비유물론적인 행동일 것이다. 그것은 종교를 의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고, 의식을 실천보다 더 중요한 요소로 보는 종교적·관념론적 오류를 공유하는 꼴이다. 동시에 혁명적 정당은 종교 정당이 돼서도, 정책·전략·전술을 종교적 판단으로 결정하는 정당이 돼서도 안 된다. 혁명이 승리하려면 혁명적 정당은 노동계급의 집단적 이익과 투쟁을 표현하는 이론, 즉 마르크스주의를 따를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혁명적 정당은 종교를 믿는 당원들을 교육하고 영향을 미치려고 해야 하지, 그 반대가 돼서는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 활동한 혁명적 정당으로 볼셰비키가 있다. 볼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 레닌은 1909년에 쓴 ‘종교에 대한 노동자 정당의 태도’라는 글에서 이 문제를 통찰력 있고 명료하게 다뤘다. 다음은 일부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물론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18세기 백과전서파의 유물론이나 포이어바흐의 유물론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가차 없이 적대적이다. …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보다 더 나아가는데 … 역사의 영역에 유물론적 철학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종교와 어떻게 투쟁할지 알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들 사이에서 유물론적 방식으로 신앙과 종교의 근원을 설명해야 한다. 종교와의 투쟁은 추상적 이데올로기를 설교하는 것에 국한될 수 없으며, 그런 설교로 환원돼서도 안 된다. 종교와의 투쟁은 종교의 사회적 뿌리를 없애고자 하는 계급 운동의 구체적 실천과 연결돼야 한다.
종교는 왜 계속해서 영향력을 유지하는가? … 부르주아 진보주의자·급진주의자·유물론자는 ‘대중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종교 타도, 무신론 만세, 무신론적 관점 설파가 주요 임무”라고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며, 피상적인 관점이라고 말한다. … 그런 관점은 종교의 근원을 충분히 깊이 있게 설명하지 않는다. 유물론이 아니라 관념론적 방식으로 설명할 뿐이다. … 오늘날 종교의 가장 깊은 근원은 노동 대중이 사회적으로 억눌려 자본주의의 맹목적인 힘 앞에서 처절하게 느끼는 완전한 무력감이다.
이 말이 곧 종교에 반대하는 교육용 서적이 해롭거나 불필요하다는 뜻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사회민주주의는 러시아 사회주의 단체들이 사용하던 명칭이다 — 몰리뉴] 무신론 선전은 그 기본 과업인 착취자에 맞선 피착취 대중의 계급투쟁을 발전시키는 데에 종속돼야 한다는 뜻이다.
특정 지역의 프롤레타리아가 … 상당히 계급의식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이며 당연히 무신론자인 선진 부위와 … 신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심지어 지역 사제들의 영향을 직접 받는 다소 후진적인 노동자들로 나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 더 나아가 이 지역에서의 경제 투쟁이 파업으로 벌어졌다고도 가정해 보자. 파업 운동의 성공을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것, 이 투쟁에서 무신론자 대 기독교도로 노동자들이 분열하는 데에 강력 대응하는 것, 노동자들의 분열이라면 무엇이든 강경하게 반대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의무다. 그런 상황에서 무신론 선전은 불필요하고 해로울 수 있다. 후진 부위가 겁먹고 이탈하는 것, 선거에서 표를 잃는 것 등등을 속물적으로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조건 하에서 기독교 노동자들을 사회민주주의와 무신론으로 개종시키는 데에는 계급투쟁의 실질적 전진이 단도직입적인 무신론 선전보다 백 배는 더 낫다는 고려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이 신에 대한 믿음을 그대로 가진 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용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입시키는 일에 계획적으로 착수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종교적 신념에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주는 것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가입시키는 것은 우리 강령의 정신으로 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지, 우리 강령에 맞선 이들의 적극적 투쟁을 용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발췌문은 이 글 전체에서 주장한 것을 확인시켜 준다. 즉, 종교 문제를 올바르게 다루는 것은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정말이지 사활적으로 중요한데, 이는 즉흥적 판단이나 전술의 문제가 아니고, 선거적 기회주의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며,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적 토대인 변증법적 유물론을 이해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주
- Boulangé, 2004. ↩
- Engels, 1989, pp366-367. ↩
- Engels, 1989, p382. ↩
- Marx and Engels, 1991, p42. ↩
- Marx and Engels, 1991, p47. ↩
- Marx and Engels, 1848. ↩
- Marx, 1977. ↩
- Engels, 1883. ↩
- Trotsky, 1964, p361. 강조는 몰리뉴. ↩
- Marx, 1970. ↩
- “인간의 환상 속 행복인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요구하는 것이다.”, “종교 비판은 … 종교가 그 후광인 눈물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다.”, “[종교] 비판은 쇠사슬에 붙어 있는 상상 속 꽃들을 꺾어 버렸는데, 이는 인간이 환상이나 위안 없이 그 쇠사슬을 계속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으로써 인간이 쇠사슬을 떨쳐 버리고 살아 있는 꽃을 꺾을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천상에 대한 비판은 지상에 대한 비판으로 바뀐다.” 등. ↩
- 강조는 마르크스의 것이다. ↩
- 이 글은 다소 난해한데다 특히 논란이 있는데, 마르크스가 유대인을 혐오했다는 증거로 인용돼 왔기 때문이다. 존 로즈는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119호에 쓴 글(Rose, 2008)에서 이 문제를 자세히 다룬다. Draper, 1977과 Bhattacharyya, 2006도 참고하시오. ↩
- 모두 Marx and Engels, 1957에 실려 있다. ↩
- Marx, 1845. ↩
- Dawkins, 1998. ↩
- 도킨스도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듯하다. Dawkins, 2007, pp346-347을 보시오. ↩
- Richard Dawkins, “Religion’s Misguided Missiles”, Guardian, 15 September 2001. ↩
- 히친스가 어디까지 가 버렸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히친스가 알 샤프턴 목사와 논쟁 중에 한 말을 유튜브 영상에서 다시 인용하겠다. “당신도 알듯, 나는 우리의 적들을 사랑하지 않으며, 적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의 적들을 증오하고 그들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나는 우리 재정에 위협이 되는 다른 나라가 절대 없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이 문제에 감정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여기서 “우리의 적들”과 “우리의 재정”은 미국 제국주의의 적들과 재정을 뜻한다. ↩
- Eagleton, 2006. ↩
- Eagleton, 2006. ↩
- Marx and Engels, 1957. ↩
- Lenin, 1965. ↩
- Siegel, 1986. ↩
- Crouch, 2006. ↩
- Lenin, 1973.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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