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인구론을 넘어서기: 인구와 환경에 관한 사회주의적 주장 *
1 환경주의는 여러 정치적 형태가 있지만, 모두 자본주의 사회의 무자비하고 야만적인 환경 파괴에 대한 혐오감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환경주의자들은 살아 있는 지구가 유일무이하고 유한하며, 자연과 인간 문명을 위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는 핵심 철학을 공유한다. 그러나, 동시에, 환경주의는 매우 광범한 정치를 포괄한다. 환경주의를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본다면, 그 운동의 정치적 응집력은 자본주의의 생태계 교란이 낳는 증상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이렇게 증상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기후 변화, 생물다양성 손실, 오염 등의 중요한 환경 “쟁점들”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정치적 합의를 용이하게 한다.
환경주의는 자본주의가 낳는 환경 파괴에 대한 전(全)사회적 차원의 중요한 반응이다.그러나 문제의 원인과 해결 방안에 대한 입장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환경주의는 “주류적”(친자본주의) 사회 이론 대 “비판적”(반자본주의) 사회 이론의 오랜 대립에 따라 갈라진다. 주류적 접근법은 자연의 금융화와 탄소 배출권 거래제 등 자본주의적이고 기술관료적인 해결책을 옹호한다. 이는 이윤 동기와 자본 권력에 부합한다. 비판적 접근법은 자본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대안적이고 재분배를 추구하는 가치 체계나 기업과 지배계급 행위자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지지한다.
2 그러나 환경주의의 정치 스펙트럼을 관통하는, 그리고 환경 정치를 어지럽혀서 사회주의자들의 개입을 어렵게 하는 쟁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인구 증가와 “과잉인구” 문제다.
환경주의를 이처럼 정치적 좌우로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환경 정치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 생태사회주의 전략은 이 근본적인 정치적 분열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야 주류의 포섭에 맞서서 전(全)사회적 전환에 기여하고 지속성 있는, 의미 있고 효과적인 환경적 성과를 낼 수 있다. 많은 전선에서 이러한 급진적인 개입은 어렵지 않다. 빌 게이츠, 제프 베이조스, 일론 머스크 등의 갑부들은 “자선 활동”을 통해 자신들이 기후변화 완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이 소유한 천문학적 규모의 재산과 조화를 이루는 제한적인 “해결책”을 내세우고 있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특히 냉전 시기에 과잉인구론은 피해자를 탓하는 서사로서 중요한 구실을 해 왔다. 바로 세계의 “저개발” 국가들이 인구 정책 실패로 고통을 자초했다고 묘사한 것이다. 이런 묘사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편리하게 무시한다. 그런데 급속한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와 과잉인구론은 1960년대 초 현대 환경주의가 처음 등장한 이래 그 안에서 더욱 미묘한 구실을 했다. 환경적 관점에서, 유한한 지구가 급속한 인구 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는 주장은 자명해 보인다. 실제로 데이비드 애튼버러 같은 영향력 있는 자연사학자들과 환경주의자들은 생태적 파괴와 생물다양성 손실을 목격하고는 인구 통제를 옹호하는 주장에 힘을 쏟는다.인구 증가에 대한 환경주의 내 일부 우려는 생태학과 생물학에서 비롯한 학문적 편견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조야한 생태학적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의 “자연적 한계”를 초과하고 “수용 용량”을 넘어선 생태 교란종이다. 이런 주장에 깔린 가정은 인류에게 어떤 최적의(언제나 지금보다 적은 규모다) 인구 규모가 있어서, 인구가 딱 그만큼만 있으면 인간과 자연이 균형 잡힌 관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잘못된 관점을 바탕으로 어떤 사람들은 인간 혐오적인 관점으로 인구 증가 우려를 제기한다. 이런 관점은 심지어 전쟁·기근·질병을 인구 수를 조절하는 자연 현상으로 보는 비뚤어진 우생학적·맬서스주의적 주장을 부추길 수도 있다. 사회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런 생태학적 일반화와, 우생학적이거나 인간 혐오적인 주장들의 문제점은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이런 주장들은 조야하고 반동적인 입장이며, 충분한 분석이나 신중한 해석도 없이 환경 문제와 인구의 거시적·통계적 연관성을 보여 주겠다고 자처한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인구 수와 환경 위기의 대략적인 상관성을 자본주의의 자연 파괴에서 비롯한 공통의 증상이 아니라 인과 관계인 것처럼 제시한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운동에는 과잉 인구에 관한 조야한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반박한 풍부한 전통이 있다. 특히,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토마스 맬서스와 그 추종자들을 반박한 바 있다. 18세기에 맬서스는 인구 증가가 식량 생산을 앞지를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그 우려는 산업 혁명 이후 빠르게 농업이 확장·개선되면서 금세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근래 환경주의자들의 인구 증가 우려는 맬서스의 주장을 현대적으로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반동적 논자들은 과잉 인구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에 시의성을 부여할 새로운 근거를 모색했다.
4 최근에 제시된 다른 주류적 접근 방식은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를 자연의 금융화가 필요하다는 경제학적 접근법과 결합시켜서 그런 방법으로 부자와 빈자 모두에게서 자연을 보호하자고 주장한다. 5
그들이 자본주의의 체계적 실패가 아니라 인구 수를 문제 삼기 위해 펴는 논리의 기괴함은 놀라울 정도다.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룰 폴 얼릭 등의 악명 높은 저자들은 출생률과 인구 증가 전망치가 떨어지자 거기에 맞게 자기 주장을 각색했다. 이들은 인구 증가가 여전히 환경 문제에서 초점이 돼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제는 “슈퍼 소비자”의 수가 문제라고 주장한다.6 멜리아가 이렇게 지나가듯 언급한 것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환경 운동과 좌파 내에서 더욱 분명하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다. 자연사가인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2013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겪는 모든 환경 문제는 인구가 줄면 해결하기 쉬워지지만, 인구가 계속 늘어나면 해결하기 어려워지고 결국에는 불가능해진다.” 7
인구 증가와 과잉인구에 대한 우려가 이처럼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고 있는데도 이런 주장이 ‘멸종반란’ 등의 운동 조직과 좌파 내에서 다시 대두되고 있다. 멸종반란 활동가이자 교통 전문가인 스티브 멜리아는 영국의 환경 운동을 다룬 최근 저서에서, 로마클럽이 “성장의 한계” 보고서를 발표한 지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는 쉴 새 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썼다.혁명적 좌파도 이런 주장에 면역돼 있지 않다. 예컨대 영국의 사회주의자 앨런 소넷은 다음과 같이 쓴다.
아프리카는 가장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일례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종족적으로 가장 다양한 나라인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2050년에 2억 7800만 명에 달하고 2060년에는 미국을 능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때 나이지리아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가 될 것이다.
소넷은 이어서 이렇게 쓴다.
인구 증가가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은 아니다 … 생태 위기의 원인은 자본주의 생산 체제와 전 지구적 상품화다 …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인구 증가가 주요한 기여 요인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인구 증가에 대한 조야한 주장이 진보적 환경 정치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글은 이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또, 과잉인구론이 인종주의자, 극우,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당사자에 의해 활용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보여 주고자 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맬서스 비판
10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맬서스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1789년에 영국 서리 주의 워튼 교구에서 부목사를 지냈다. 성직자로 일하면서 정치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됐고 많은 책을 읽었다. 맬서스는 《인구론》의 저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책은 1798년에 처음 출판됐고 여섯 차례 개정돼 1826년에 최종판이 나왔다. 《인구론》은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켰다. 진화론의 두 선구자 찰스 다윈과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도 중요한 저작으로 꼽을 정도였다. 맬서스는 그 후 동인도회사대학의 정치경제학 교수가 됐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에 대한 영국 정부의 대응에 책임이 있는 찰스 트레블리언 등 여러 식민지 관리들이 있었다. 맬서스 사후에도 그의 사상은 여러해 동안 국가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이크 데이비스가 언급했듯이 “맬서스의 이론은 사회진화론으로 갱신돼 인도 기근에 대한 영국 본국의 정책을 정당화하는 데에 자주 이용됐다.” 11
“과잉인구론” 하면 가장 먼저 연상되는 사람은 토마스 로버트 맬서스다.12 1798년 초판의 1장에서 맬서스는 “인구와 대지의 생산이라는 두 힘의 자연적 불균형” 때문에 “이 법칙의 힘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에 이 법칙이 스며있다”고 썼다.
오늘날 대체로 맬서스의 《인구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1, 2, 4, 8, 16 …) 인구가 산술적으로 증가하는(1, 2, 3, 4 …) 식량 생산을 앞지를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인구론》은 프랑스 혁명의 여파 속에서 등장한 급진적 사상들을 반박하려고 쓴 것임을 알아야 한다.어떠한 공상적인 평등이나 농업 규제도 그 법칙의 힘을 한 세기 동안이라도 저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 법칙은 모든 구성원이 안락하고 행복하고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 속에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가 존재할 가능성에 결정타를 날리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판의 뒤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풍족하게 살 수 없다. 모두가 자연의 은혜를 똑같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 만약 재산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기구가 없다면 모두가 완력으로 자신의 작은 창고를 지켜야 할 것이다. 이기심이 만연할 것이다.
급진적 사상에 대한 맬서스의 공격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공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구 증가 때문에 경제적 평등이 불가능하다고 본 맬서스는 자선 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결론짓는다.
사생아에 관해 말하자면 … 교구의 지원을 청구할 권리가 그들에게 일절 허용돼서는 안 된다. 그들은 전적으로 민간 자선 단체의 지원에 맡겨져야 한다. 부모가 자식을 버린다면 그 죄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유아는 다른 유아로 즉시 대체될 것이기에 상대적으로 말하면 사회에 별 가치가 없다.
맬서스는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면 인구만 더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가난한 자들을 구제해도 결국 자연의 이치 때문에 그들은 그들보다 훨씬 많은 아이들을 성인으로 성장시키게 될 뿐이다.
17 처음에 고드윈은 맬서스의 주요 논지에 동의하면서도 가족 계획에 대한 개인들의 결정으로 인구 증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18 그러나 나중에는 더 강경하게 맬서스를 비판했다. 1820년 11월, 고드윈은 자신의 《인구론》을 출간해서 맬서스를 이렇게 비판했다. “불평등은 맬서스의 이론이 면죄부를 주려 한 정치적·도덕적 오류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고드윈은 맬서스주의를 비판하려고 세계 곳곳의 인구 조사 자료를 인용했다. 19 그러나 맬서스 비판을 사회와 역사적 변화라는 더 큰 맥락 속에 확고히 자리매김한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였다. 맬서스가 《인구론》을 처음 출간한 지 거의 50년 후에 엥겔스는 《영국 노동계급의 상황》에서 이렇게 썼다. “오늘날 맬서스의 이론은 모든 진성 영국 부르주아지의 지론이 됐다.” 20
《인구론》 초판이 출간되자 즉각 비판이 일었다.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받아 급진적인 저작을 쓴 윌리엄 고드윈은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겨냥한 주요 비판 대상의 하나였다. 고드윈은 이렇게 썼다. “낡은 기득권과 학대를 옹호하는 자들에게 이 이론만큼이나 마음에 쏙 들고 개혁과 개선을 영원히 차단하는 데 효과적인 이론은 없을 것이다.”고드윈과 마찬가지로 엥겔스는 맬서스의 이론이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한다고 지적했다. 엥겔스는 맬서스가 늘 과잉인구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더 광범한 경제적 논의에 연결시켰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맬서스는 “생존권은 헛소리라고 쉽고 분명한 말로 선언한다.”그 이론의 최종 결론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지구는 언제까지나 과잉인구 상태이므로 빈곤과 비참, 곤궁, 부도덕이 반드시 만연하게 된다. 수효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인류의 영원한 운명이며, 따라서 인류는 부유하고 유식하고 도덕적인 계급들과 다소 빈궁하고 무식하고 부도덕한 계급들로, 이렇게 상이한 계급들로 나뉘어 살 수밖에 없다 … 자선과 구빈세는 사실 어리석은 것이다. 이런 조처들은 잉여 인구를 부양하고 그 수가 늘어나도록 부추길 뿐이고, 그들의 경쟁은 피고용인들의 임금을 끌어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구빈 위원이 빈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도 똑같이 불합리한 조치다. 노동생산물은 일정한 양만이 소비될 수 있고, 따라서 누군가 일자리를 제공받을 때마다 그때까지 일해 온 다른 누군가는 실업자 신세로 내몰릴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구빈법 사업의 대가로 민간 사업체들이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정한 문제는 과잉 인구를 어떻게 부양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들의 수를 최대한 억제하느냐는 것이다.
22 다만 맬서스의 인구론이 그의 경제 이론과 어떻게 부합했는지 살펴보자. 예컨대 맬서스는 경제 위기의 주요 원인이 과소소비이기 때문에 “비생산적인 소비자” 계층을 확대해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821년 정치경제학자 데이비드 리카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맬서스는 이렇게 썼다. “비생산적인 소비가 일정 부분 절대적이고 독립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한 나라의 자원을 끌어낼 수 있어서다.” 23 맬서스가 말한 “비생산적 소비자”는 지주 같은 비생산자 집단만이 아니라, “생산을 적절히 자극하는 데 필요한 소비를 보장하는” 국가 관료도 포함된다. 24 마르크스는 맬서스의 주장이 “노동계급의 빈곤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입증”할뿐더러 “자본가들에게 그들의 상품에 대한 충분한 수요를 창출해 주려면 교회와 국가에서 일하며 잘 얻어먹는 배부른 집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구실을 한다고 지적했다. 25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맬서스의 경제·인구 이론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면 관계상 맬서스의 경제 이론에 대한 비판을 여기에서 상세히 다룰 수는 없다.26 물론, 그 때문에 마르크스가 맬서스의 이론에 대한 분노를 삭인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맬서스를 “원숭이 같은 작자”라고 불렀다.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다른 부르주아 역사학자들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특히 계급 간 적대감을 “증폭”시키고 “그 적대를 선명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맬서스는 인류가 늘어나는 것이 순전히 자연적인 과정이고,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않도록 구속과 통제가 필요하다고 썼다. 이 기하급수적인 재생산이 인류의 자연스러운 재생산 과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맬서스도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인구가 상이한 관계 속에서 변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과잉인구도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관계다. 과잉인구는 추상적인 숫자나 생필품 생산의 절대적 한계치로 정해지는 게 아니라, 특정한 생산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
28 또, 다윈의 《종의 기원》이 맬서스의 핵심 주장을 무너뜨린다고도 지적했다. 다윈은 맬서스의 주장과 달리 인간만이 아니라 식물과 동물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29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여러 측면에서 맬서스를 비판했다.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핵심 주장도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맬서스의 이 핵심 주장이 “순전히 허공에서 끄집어 낸 것”이라고 비판했다.결정적으로 마르크스는 맬서스가 인간을 역사적 맥락에서 떼어 놓았다고 지적한다. 과잉인구의 의미는 인류 역사의 상이한 시기마다 달랐다고 지적하며 마르크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고대 “아테네인들에게 과잉인구를 뜻했던 수치가 우리에게는 매우 작은 수치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어떤 사회의 특정한 사회 관계는 과잉인구에 특정한 의미를 부여한다. “고대 아테네에서 과잉인구가 된 자유민은 식민지 확대에 나서는 반면, [자본주의에서] 과잉인구가 된 노동자는 구빈원 신세가 된다.”
마르크스는 실제 역사적 증거를 토대로 삼지 않고 현실을 이론에 끼워 맞추는 몰역사적인 관점으로 인구 문제를 보는 것이 맬서스 이론의 핵심 문제라고 지적했다.
맬서스가 실제 역사를 보는 방식을 보면, 그가 생각하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류의 재생산은 역사에서 나타나는 실제 재생산 과정에서 추상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실제 재생산은 자기 이론이 적용되는 과정일 뿐이다. 따라서 역사의 매 단계에서 과잉인구, 더 나아가 인구의 내적 조건들이, 맬서스에게는 자신이 주장한 형태로 인구가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련의 외부적 제약으로 나타난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쓴다.
맬서스는 인간 재생산 과정의 내재적이고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한계를 외부적 제약으로 둔갑시킨다. 그리고 자연 재생산의 외적인 제한들을 내재적 한계들, 또는 재생산의 자연 법칙들로 둔갑시킨다.
이런 몰역사적인 주장에 맞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인구의 일반 법칙을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인구 증가를 이해하려면 역사적 맥락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 인구는 자본 축적을 낳고 노동 인구 자체를 상대적으로 불필요해지게 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며, 이는 항상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뤄진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독특한 인구 법칙이다. 사실 모든 역사적 생산양식에는 그 특정 영역 안에서 역사적으로 유효한 독특한 인구 법칙이 있다. 추상적인 인구 법칙은 식물과 동물에 대해서만, 그것도 인간에 의한 역사적 개입이 없는 경우에만 존재할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실업과 불완전 고용이 발생하는 이유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니라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강조했다. 실업은 이윤만을 위해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 때문에 생겨난다. 각 개인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고, 특히 현대 과학으로 생산성을 향상할 여지가 있다는 점에 비춰 보면 인구가 증가해도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엥겔스가 1844년에 쓴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에서 설명하듯이
고용 수단이 곧 생존 수단은 아니다. 고용 수단은 자본과 기계력이 증가한 최종 결과로서만 늘어나는 것인 반면, 생존 수단은 생산력이 증가하면 바로 늘어나는 것이다.
엥겔스는 험프리 데이비와 폰 리비히 같은 과학자들의 연구 덕분에 농업 수확량이 극적으로 증가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이런 기술 개선 덕분에 이전에 가능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아직 개간되지 않았거나 비옥도가 떨어져 경작이 불가능했던 광대한 토지를 활용하면 늘어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미시시피의 계곡에만 유럽 전체 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릴 미개척지”가 있고 “지구의 3분의 1만이 경작된 상태라고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인구 과잉을 거론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때 엥겔스가 미시시피 계곡 등지에 이미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을 간과한 것은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본주의 생산의 비합리성을 감안하더라도 과학과 생산의 발전 덕분에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지적은 옳다.
33 물론 엥겔스와 마르크스가 인구가 무한정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저 맬서스의 핵심 사상이 부정확하고 과학적 증거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1950년대 녹색 혁명을 비롯한 이후의 발전도 자본주의가 새로운 기술을 이용해 이른바 ‘맬서스적 한계’를 훨씬 뛰어 넘는 수준으로 가용 식량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그렇다면, 빈곤은 왜 존재하는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무 적게 생산되는 것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다. 그런데 왜 적게 생산되는가? 생산—심지어 오늘날의 생산, 오늘날의 생산 수단으로 이뤄지는 생산—이 한계에 도달해서가 아니다. 생산의 한계는 굶주리는 위장의 수가 아니라 구매력과 지불 능력이 있는 지갑의 수로 결정된다. 부르주아 사회는 그 한계보다 더 많은 생산을 바라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지불 능력이 없는 위장, 즉 이윤 추구에 이용될 수 없고 따라서 구매력이 없는 노동은 사망률을 높이는 데 일조하도록 내버려 둔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기에 기아는 물론 자원, 주택, 교육, 고용 등의 부족은 인구가 늘어서 생기는 일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사회 구조와 관련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열악한 집에 살고 식량이 부족하고, 필수 서비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것은 지불 능력이 없거나, 자본주의가 성장할 때 제공되던 공공 서비스가 삭감됐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이론이 지배계급에게 요긴한 이유는 그들이 지배하는 체제를 이런 식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정당화하기 때문이라고 폴 버켓은 지적한다. 이윤 극대화에 골몰하는 자본가들에게 맬서스는 “자본이 이윤과 축적의 매개 구실을 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의 자연스러운 조건을 불필요하거나 쓰다 버리면 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 줬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생산이 이뤄지도록 생산양식이 바뀐 사회에서 인구 문제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엥겔스는 말년에 인구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논쟁에 관여했다. 1881년, 과잉인구에 대한 논쟁이 다시 떠올랐을 때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카우츠키와의 토론에서 엥겔스는 어떤 사회의 인구 수에 “한계를 정해야 할” “추상적인 가능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렇게 지적한다.
설사 공산주의 사회의 어느 단계에서 마치 재화의 생산을 통제하던 것처럼 인간의 생산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오직 이런 종류의 사회만이 이를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미 프랑스와 니더외스터라이히에서 계획도 없이 자연 발생적으로 벌어진 일을 그런 사회에서 계획적으로 해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공산주의 사회에서 그런 일을 벌일지의 여부와 그 시점, 방법, 수단 등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할 일이다. 내가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를 모르겠다. 어찌됐건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모자라지는 않을 것이다.
엥겔스는 앞서 인용한 1844년 《정치경제학 비판 개요》에서도 자신이 비슷한 지적을 했다고 상기시켜 준다. 그 글에서 엥겔스는 설사 맬서스가 옳다 해도 가장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인구학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사회는 오로지 사회주의 사회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혁명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한다면 사회와 자연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집단적 생산자들이 자연과 합리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버켓은 이렇게 지적했다.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경쟁적인 자본주의처럼 계급으로 나뉜 사회와 달리 공산주의 사회의 집단적·민주적인 관계는 인간의 생산과 재생산을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더 효과적으로 “제어”할 것이다.
이런 논의를 맬서스주의와 타협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논의는 사회주의 사회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인구학적 문제 같은 사회의 중대 사안에 관한 의사 결정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고 그 결정에 대한 민주적 참여를 보장해서 기아와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이런 이해는 맬서스가 제시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런 이해는 보편적 교육을 누리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정치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을 벌일 수 있는 사회를 꿈꾼 고드윈의 이상에 훨씬 가깝다.
오늘날 맬서스의 사상은 환경 운동 일각에서 차용된다. 그러나 존 벨라미 포스터가 지적했듯이 맬서스는 더 넓은 생태 문제들에 관해 아무런 통찰도 주지 못한다. 신맬서스주의자들과 달리 맬서스는 인구와 식량에 대한 그의 견해를 자원 부족 같은 더 넓은 문제로 일반화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로 주장했다. 포스터가 지적하듯이 《인구론》 초판에서 맬서스는 “원자재는 필요한 만큼 많은 양”을 구할 수 있다고 썼다. 포스터는 또한 이렇게 지적한다.
신맬서스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 결국 애초 맬서스주의 이데올로기의 핵심 아이디어, 즉 부르주아 사회, 심지어 온 세상의 중대한 문제들은 모두 가난한 자들의 과도한 생식에서 비롯하며, 그들을 도우려는 시도는 사태를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상을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인구 증가, 인구학, 자본주의
지난 50년간의 인구학적 추세와 그에 따른 인구 추계를 살펴보면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가 되살아난 것이 기이해 보인다. 고출산 문제만 보면(물론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고출산은 인구 증가에서 부분적인 구실을 할 뿐이다), 인구 통제론자들은 현 상황에 가장 만족한 환경주의자여야 할 것이다. 1970~1980년대에는 재앙이 닥쳐 온다는 비관 속에서 인구 논쟁이 벌어졌지만, 지난 40년 동안 전 세계의 합계출산율(TFR, 여성 1명이 평생 동안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급격히 떨어졌다(그림 1). 실로 전 세계적으로 현재 합계출산율은 약 2.5명으로 “인구 대체 수준”이다. 즉,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가 일반적인 기대수명하에서 부모들의 수를 겨우 대체할 수 있을 정도로 감소했다.
39 이 예측은 사망률이 감소해 세계적 수준에서 출생과 사망이 균형을 이뤄서 인구 대체 수준의 합계출산율이 계속 유지된다고 가정한다. 사망률이 서구의 기대수명하에서와 같은 수준인 경우 이는 여성 1명당 대략 2.1명의 아이를 낳는 것을 뜻한다. 지난 40년 동안 출산율은 전 세계적으로 감소했다. 실제로 한국이나 중국 등 몇몇 나라에서는 출산율이 인구 대체 수준을 훨씬 밑돌아서 인구 감소와 고령 인구 문제가 대두하고 출산 장려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40
현재 유엔은 세계 인구 규모가 이번 세기 말에 110억 명으로 정점을 찍을 것으로 예측한다.세계적으로 합계출산율이 인구 대체 수준에 있다면, 인구 증가를 환경 문제의 초점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를 면밀히 따져 봐야 한다. 개발도상국과 빈국들(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출산율이 여전히 가장 높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환경 운동 일각에서 인구 증가에 지속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과학적인 입장으로 보기 어렵다. 인구 증가와 산아 제한에 초점을 맞추는 환경주의자들은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인종차별과 문화적 우월주의라는 비난을 받기 쉽다.
41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환경 NGO의 웹사이트에 간간이 실린 깔끔한 그래프에서 선별적으로 제시되는 것처럼 이러한 인구 증가는 빈곤,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삼림 벌채, 생물 멸종 등 산업 자본주의가 낳은 다른 결과와 상관성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는 다른 것이다. 이런 변화들에 동반된 인구 증가는 자본주의의 무질서한 계급적 동학에서 비롯한 증상일 뿐이다.
역사적 현상으로서 급격한 인구 증가는 오로지 자본주의와 결부돼 왔다. 그러나 그 상관성은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세계 인구가 산업혁명 이후 급격히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1750년에 약 5억 명이던 세계 인구는 오늘날 77억 명으로 증가했다. 21세기 말까지 30억~50억 명이 더 늘 것으로 전망된다.자본주의와 인구 증가의 상호작용은 오해되는 경우가 흔하다. 인구에 관한 신화는 인간의 재생산 활동을 문화, 젠더, 계급, 물질적 조건들이 복잡하게 결합된 현상이 아니라 인류라는 종의 공통된 특성으로 보는 서구의 문화적 편견과 부르주아적 편견에서 비롯한다. 몇몇 조야한 인구학적 오류는 이데올로기적 오독에서 기인한다. 예를 들어 “높은 출산율”을 그저 산술적·추상적으로 이해하면 초기의 인구 증가를 추동하는 것이 공공 위생, 질병 통제, 의료 서비스의 개선에 따른 사망률 감소라는 점을 간과하게 된다. 전후 베이비붐을 예외로 친다면, 높은 출산율이 인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정에서 아이가 더 많이 태어나서가 아니라 사망률이 감소해 더 많은 아이가 성인까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망률 감소와 출산율 감소의 시간차가 인구 증가를 낳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간차도 경제 성장이 낳는 문화적, 물질적 영향에 달려 있다.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인구 증가를 추동하는 공중 보건 개선과 사망률 감소는 분명 사회 진보의 긍정적 징후다. 이는 대체로 계급투쟁으로 쟁취되는 성과이므로 특히 더 좋은 일이다. 그러나 증가하는 인구를 전지구적 전염병이나 바이러스처럼 취급하며 전쟁, 기근, 질병, 환경 재난을 통해 억제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인간 혐오적 “딥 그린”[극단적 환경주의] 주장이 있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은 적어도 대중의 사망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출생률을 낮추는 데에 노력을 쏟는다는 점에서 그나마 인간적이다. 그러나 이들이 산아제한을 통한 인구 감소를 옹호하는 것은 설령 선의에서 출발한 것이라 해도 문제적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이 출산을 통제하는 수단에 자유롭고 보편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럼에도 산아 제한 정책에만 특별히 정치적 초점을 맞추는 것은 피해자를 비난하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수법의 대표적인 예다. 이런 입장은 인종차별을 배양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도 한다.
인구 통제의 정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의 만남을 이해하려면 인구학적 논쟁이 전개된 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인구 증가에 관한 많은 신화와 오해들은 현존 자본주의 질서를 정당화하려고 인구학을 정치적으로 이용·남용하면서 생겨났다.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개혁이나 혁명적 변화에 맞서 인구 증가 문제를 이용해 왔다. 역사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다른 경쟁 계급 —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 과 가난한 사람들의 더 높은 출산율에 분노의 초점을 맞췄다.
19세기에는 사람들이 아이를 너무 많이 낳아서 가난을 자초했다는 관념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 유럽, 미국의 도덕주의적인 분위기를 뒷받침했다. 20세기에 서구의 출산율이 감소하자 신맬서스주의자들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신생 국민 국가들의 인구 증가로 초점을 돌렸다. 인구 증가에 대한 서구의 우려는 그 나라들의 빈곤과 가톨릭 같은 신앙에 대한 문화적 편견에서 “경제 성장” 문제와 식민지 해방 이후 자주성을 얻기 위한 투쟁을 겨냥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50년 전부터는 환경 파괴에 대한 책임 전가가 여기에 추가됐고, 전후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계속해서 인구 증가에 대한 우려의 초점을 개발도상국과 빈국들에 맞췄다.
42 이런 노력들은 중국의 인구 추세에 대한 오독을 근거로 한다. 중국은 악명 높은 ‘한 자녀 정책’이 도입되기 전인 1980년 이전에 이미 출산율이 인구 대체 수준에 근접해 있었다. 43 이런 노력을 추동한 또 다른 요인은 1971년 인도의 인구 조사에서 나타난 가파른 인구 증가가 자아낸 도덕적 공황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도 총리 인디라 간디는 1970년대 중반 정치적 반대자들을 단속하려고 비상사태를 선포한 시기에 강제 불임수술 정책을 시행했다. 스탠퍼드대학교 교수 폴 얼릭 등 우파적 신맬서스주의 사상가들은 국가가 가족 계획 사업으로 산아 제한을 강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을 부추겼다. 현대판 맬서스라고 할 수 있는 얼릭은 세계적으로 투쟁이 정점에 올랐던 1968년에 《인구 폭탄》을 발표해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인류 문명의 실존적 위협으로 그렸다. 이런 반동적인 주장에 맞서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활동가들과 급진적인 정부들은 1974년 부쿠레슈티 세계 인구 회의에서 “경제 성장은 최고의 피임법”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베트남 독립과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당한 패배로 자신감이 높아진 분위기 속에서 이 국가들은 서방이 경제 성장만으로도 “인구학적 전환”(출산율과 사망률이 모두 높은 사회에서 낮은 사회로 전환하는 것)을 이룰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 사이에 UN과, 세계은행 등의 국제 “원조” 기구들은 개발도상국과 빈국 전반에서 산아 제한 목표·정책·사업 등을 통한 의식적인 인구 조절책을 개발하려는 다양한 시도를 후원했다.44 가난한 농촌 여성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하려는 노력은 박수 받아 마땅하며, 여성의 교육 수준이 오르면 출산율이 낮아진다는 통계적 상관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그러나 그 상관관계의 배후에 있는 인과관계와 동기는 불확실한 게 많다. 여성의 교육 수준 증가도 사실 경제 성장과 계급에 기반한 교육 기회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교육 수준과 출산 결정은 빈곤이 감소하고 물질적으로 안정적인 가구가 늘어나는 등 다른 더 근본적인 사회적·경제적 추세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실제로 출산율과 경제 지표의 일반적인 상관관계는 출산율과 여성 교육 수준의 상관관계와 거의 동일하다. 이는 문화 규범과 관습에 관계없이 빈곤, 보건, 고용, 노후 보장 등의 물질적 요인이 가족 규모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을 보여 준다. 45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출산율이 감소하면서, 인구 조절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자들은 주장을 누그러뜨려야 했다. 물론 그들은 여전히 개발도상국과 빈국의 가난한 대중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새 세대 신맬서스주의자들은 인구 통제를 옹호하는 것에 더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지에서 여성들의 교육과 고용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에 깔린 가정은 이곳 여성들의 권리를 신장하고 경제적 지위를 개선해서 그 여성들이 기존의 가부장적 문화 관습에 도전할 수 있게 되면 아이를 덜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급진적으로든 반동적으로든 전후 인구 논쟁을 제기했던 다양한 진영들은 결국 21세기 초에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하자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이 감소의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신자유주의가 인구학적 전환을 꾀할 인간적이고 진보적인 조건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혼돈을 몰고 온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은 퇴행적인 경제적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거나, 개발도상국과 빈국에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침투시켜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출산율을 떨어뜨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환경 파괴, 극심한 불평등, 인간 잠재력의 낭비 등 값비싼 대가를 초래했다는 점을 볼 때 이를 인구학적 성공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 인구 증가세는 둔화되고 있지만, 세계 인류 사회의 장기적인 지속 가능성은 전혀 담보되지 않고 있다. 출산율이 감소하고 인구가 머지않아 줄어든다는 것이 “과잉인구론”을 설파하는 자들에게는 성공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기대한 환경적·사회적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헛된 성공임이 드러날 것이다.
인구학적으로 보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와 중동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나라에서, 그리고 세계적 수준에서도 출산율은 인구 대체 수준에 접근하거나 그 밑으로 떨어졌다. 이는 앞으로의 세계 인구 증가가 “인구 모멘텀”의 산물임을 시사한다. 인구 모멘텀이란 출산율이 높았던 과거에 태어난 젊은 사람들이 가임기에 접어들어 아이를 적게 낳더라도 이전의 고출산이 인구학적 잔상을 남기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이 낮은 출산율을 상쇄하는 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선진국”에서 향후 인구 감소와 인구 구조 고령화에 대한 우려가 표출되고 있다.
46 최근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한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사회주의에서 정의로운 인구학적 전환에 수반될 사회적·보건적 조치들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안다.
세계 인구 증가가 사실상 정체하고 있음에도 과잉인구론이 계속 제기되는 것을 보면, 과잉인구론자들이 자본주의에서 엉뚱한 곳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다. 선의를 가진 활동가들을 이런 신맬서스주의자들에게서 떼어놓으려면 최근의 출산율 감소가 헛된 성공이라고 지적해야 한다. 인구 수 통제를 주장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의 설계자들이 개발도상국과 빈국들을 경제적 포식자들에게 먹잇감으로 던져 버릴 때 그랬던 것처럼 빈곤 해소를 중심에 둔 인간적인 해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짓된 주장에 계속 힘을 싣고 있다.현대의 인종차별과 인구 논쟁
세계 인구 규모에 대한 논의가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대의 인구 증가는 대부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인구 규모를 자원 사용, 기아, 환경 파괴와 연결시키려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인종차별적 색채를 띤다. 이런 주장을 반박하려면 이런 문제들을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는 분명한 사회주의적 주장이 필요하다.
인구를 둘러싼 현대의 논쟁은 이민과 이주를 둘러싼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구 정치를 논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인종차별적인 것은 아니지만, 우파와 극우가 인종차별적 서사를 강화하려고 인구 문제를 들먹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래서 종종 과잉인구 서사는 전적으로 또는 대부분 개발도상국과 빈국에 대한 우려와 연결된다. 게다가 우파들은 이민과 인구 수준을 더 넓은 정치적 문제와 연결시킨다. 이런 주장들은 1인당 소비 관련 수치의 오용과 밀접하게 결합되는 경우가 흔한데, 그 문제는 더 뒤에서 다룰 것이다.
47 1971년에 급진적인 생태주의 저서 《완전한 순환: 자연과 인간과 기술》을 쓴 배리 커머너는 ‘인구 폭발을 막기 위한 캠페인’이 낸 미국의 신문 광고를 인용한다.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는 환경 운동이 이민자 배척적인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에 “에코파시스트” 정치는 흔히 새로운 현상으로 묘사되는데, 이런 극우적·파시즘적인 사상들은 사실 뿌리가 깊다.굶주리고 인구가 과잉인 세계는 공포, 혼돈, 가난, 폭동, 범죄, 전쟁이 만연할 것입니다. 그 어떤 나라도, 심지어 우리 미국도 안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국내외 인구 증가를 통제할 비상 계획이 필요합니다.
“장기적 인구-이민-자원 계획을 위한 미국의 리더십 팀”이라고 자칭하는 기관이 2008년 〈뉴욕 타임스〉에 실은 광고도 비슷한 정서를 드러낸다. 이 광고는 미국 인구가 3억 명에서 4억 명으로 급증하고 있다면서 이것이 환경에 어떤 영향을 줄지 묻는다. 그리고 대기 질, 물 소비, 교통 혼잡 같은 환경 문제들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이 모든 문제들이 발생한 것은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아이를 거의 갖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또 다른 현실은 향후 미국 인구 증가의 82퍼센트가 이민과 이민자들의 출생에서 비롯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짧은 몇 단락에 걸쳐 1인당 소비량을 근거로 환경 파괴를 과잉인구와 연관짓고는 미국으로의 이주를 제한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는, 드물지 않게 제기되는 조잡한 근거는 1인당 탄소 배출량이 3.9톤인 멕시코에 살던 사람들이 1인당 탄소 배출량이 15.5톤인 미국으로 이주하면 탄소 배출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이민하는 실제 사람들은 가난한 경우가 많고, 그래서 환경에 끼치는 영향도 가장 적다. 이민자들이 아이를 더 많이 낳는다는 가정(이는 개발도상국과 빈국 사람들에 대한 흔한 인종차별적 편견이다)도 이민자 2세들은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이다.
50 극우와 파시스트들에게 이런 사상들은 백인 인구가 “대체”되고 있다는 인종차별적 공포와 딱 맞아떨어진다.
대규모 환경 운동과 기후 파업이 벌어진 2019년 영국에서는 한 극우 단체가 멸종반란을 사칭하며 “제3세계의 과잉 번식이 지구를 파괴한다”, “백인만 환경을 걱정한다”, “[난민] 보트를 가라앉히고 지구를 구하자” 따위의 슬로건이 적힌 스티커를 붙였다. 이 단체의 규모는 매우 작지만, 이 슬로건들은 환경 파괴에 책임이 가장 적은 사람들에게 과잉인구론을 근거로 책임을 전가하는 더 널리 퍼진 인종차별적 수사를 반영한다. 존 헐트그렌은 미국 환경운동 내 반이민 사상의 역사에서 이런 수사의 발전 과정을 두 국면으로 구분했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후반 사이에는 자연에 대한 낭만적이고 진화론적인 이해가 “자연과 국가의 순수성을 달성한다는 공통의 헌신”을 통해 “인종적 민족주의”와 연결됐다. 1940년대에서 2000년대에는 신맬서스주의 덕분에 “이민제한주의자들”이 “이민자 배제를 통해 미국의 주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51 많은 유럽 나라들은 이민자가 없다면 총 인구가 감소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민자가 없다면 인구가 2050년까지 6100만 명에서 4500만 명으로 극적으로 감소할 것이다. 52
사실, 인구 고령화와 출산율 저하에 직면한 선진국들은 미래의 노동력을 제공할 이민자들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 이미 이민자들은 선진국 인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컨대 2005~2010년에 “선진국”에서 태어난 신생아는 7000만 명이었고, 이민자는 1700만 명이었다. 이민자들이 “새로 늘어난 사람”의 거의 20퍼센트에 달했던 것이다. 정부의 이민 제한 시도가 늘어났음에도 이민 인구는 “부유한 나라들의 경제·사회 시스템에서 매우 중요한, 실로 구조적인 요소”가 됐다.53 1998년 시에라 클럽 회원들이 그 문제에서 “중립” 입장을 유지하기로 가까스로 합의하면서 이 쟁투는 막을 내렸다. 2000년대 초반에 다시 이민자를 배척하라는 로비에 직면했을 때에는 시에라 클럽이 이미 “이민자 권리를 옹호하는 이민자 공동체, 단체들에 연대한다”는 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54
미국에서는 “이민제한주의”를 추구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이 인구과잉과 관련해서 이민자 배척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주류 환경 단체들을 장악하려 했다. 헐트그렌은 미국의 가장 크고 오래된 환경 단체의 하나인 시에라 클럽 내에서 벌어진 격렬한 논쟁을 다룬다. 이 논쟁은 우파들이 이 단체에 이민자 배척적인 입장을 강요하려 하면서 벌어졌다. 남부빈곤법센터는 “이민자 배척 운동가 존 탠튼이나 다양한 우익 극단주의자들과 연합한 세력이 시에라 클럽의 적대적 인수를 시도하고 있다”고 경고했다.55 2018년에 시에라 클럽의 조직 혁신 책임자인 홉 홉킨스는 클럽 회원들 사이에서 이민자 배척 사상이 받은 지지의 뿌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초기에 시에라 클럽이 이민자를 배척하는 정치에 장악될 뻔한 것은 이민과 인종차별에 관해 좋지 않은 입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에 시에라 클럽의 인구위원회는 “미국으로의 이민은 인구 안정화를 달성할 수 있는 수준으로만 허용돼야 한다”고 권고했다.이는 배제를 일삼던 우리의 역사를 반영하며, 인구 통제, 우생학, 보수 운동의 이데올로기·활동가층과 환경 운동의 바람직하지 않은 만남을 보여 주는 징표다. 이 배제적 역사의 한 사례로 1950년대에 캘리포니아 남부의 로스앤젤레스 지부에는 흑인의 가입을 금지하는 정책이 있었다.
시에라 클럽만이 이런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다. 이민과 인구 문제에서 몇몇 미국의 환경 단체들이 보이는 취약성은 환경과 더 넓은 사회·정치·경제 문제의 연관성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기인한다고 헐트그렌은 지적한다.
그 운동은 지배적인 구분법으로는 적절히 표현하기 어려운 자연, 정치 공동체, 정치경제학, 인종, 계급, 젠더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이런 어려움은 생태적 조처의 근거가 되는 국가 권력 모델과 유의미하고 윤리적인 사회·생태학적 저항이 대결해야 하는 현실의 권력 구조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현대의 운동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보면 이런 논쟁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멸종반란 내부에서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춘 ‘네 번째 요구’의 채택을 둘러싸고 벌어진 토론이 그런 사례다. 이는 생태적 파괴의 구조적 원인과 결과에 대한 폭넓은 이해의 일환으로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적 유산은 물론 현대의 인종차별, 성차별, 사회적 불평등을 인식하려는 멸종반란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시도다.
과잉인구론은 인종차별적 사상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고, 극우 세력은 인구 문제를 악용한다. 그러나 과잉인구론이 더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파적인 정책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는 점도 봐야 한다. 예컨대 1970년데 폴 얼릭은 이렇게 주장했다.
미국은 인구가 늘어나는 국가에 아무런 지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나라들이 미국의 지원을 받으려면 인구를 제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하고 있다고 우리를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의 해결을 방해한다면 해당 국가나 국제 기구에 극단적인 정치적·경제적 압박을 가해야 한다. 이런 조치가 억압적으로 느껴진다면 다른 대안이 있는지 심사숙고해 보라.실제로 과잉인구론은 전후 미국 외교정책의 중심이 됐다. 미국 지배계급은 인구 증가가 식량 부족을 낳아 혁명 운동을 부추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지배자들이 “녹색 혁명”을 시작한 것은 식량 생산 체계를 혁신해 농작물 등의 수확량과 생산량을 늘려서 “적색 혁명”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녹색 혁명은 식량 생산 체계를 미국 중심의 산업 모델로 전환하는 것이기도 했다. 존 벨라미 포스터는 이것이 “미국의 농업 기업 모델을 이용한 개발도상국과 빈국 토지의 상업화이자, 맬서스식의 인구 추세론을 근거로 정당화된 가차없는 ‘토지 개혁’(토지 강탈)이었다”고 설명한다.
인구 증가, 자본주의, 환경
61 일단의 자본가들이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하자 나머지 모든 자본가들도 이를 따랐고, 화석연료는 체제의 작동에 필수적인 요소로 자리잡았다. 2019년 미국은 에너지의 63퍼센트를 화석연료를 태워서 얻는다.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고 운반하는 데에서 온실가스의 4분의 3 가량이 발생한다.
자본주의는 화석연료 체제다. 안드레아스 말름이 보여 줬듯이 화석연료는 자본가 계급이 선택한 에너지원이었다. 왜냐하면 화석연료는 이전에 수력에 의존할 때와 달리 지리적 제약에서 벗어나게 해줬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그 덕분에 자본가 계급은 도시 노동자들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62 환경 파괴는 자본주의에 내재된 것으로, 이는 자연이 자본주의 생산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환경 파괴는 화석연료 문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봐야 한다. 재생에너지에 기반한 자본주의가 도래한다 하더라도 그 자본주의는 자연과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따라서 여전히 환경을 파괴할 것이다. 존 벨라미 포스터가 보여 줬듯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인간 사회와 자연의 신진대사에 회복할 수 없는 균열을 냈다고 봤다. 이런 “신진대사 균열”이 생긴 이유는 자본주의가 이윤 극대화에만 관심을 갖는 체제이기 때문이고, 이 균열은 사회와 자연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될 때만 치유될 수 있다.이 점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구 과잉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인구과잉을 환경 문제와 연결짓는 사람들이 흔히 1인당 배출량(한 나라의 총 배출량을 총 인구 수로 나눈 수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보면 이 점이 왜 핵심적인지 더 잘 알 수 있다. 1인당 배출량에 초점을 맞추면 명확해지는 것보다 흐려지는 게 더 많다. 이 수치는 배출량의 지역적 차이뿐 아니라 산업 간 차이, 도시와 농촌 간 차이도 숨긴다. 가장 중요하게는 계급의 구실을 감춘다.
63 시리아(1.7톤), 우간다(0.1톤), 인도(1.8톤) 같은 나라들과 비교해 보자. 영국이나 미국(15.5톤), 호주(15.5톤), 독일(8.8톤) 같은 선진국에서 인구가 늘어나는 게 개발도상국이나 빈국에서 인구가 늘어나는 것보다 환경에 더 해로울 거라는 주장이 논리적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영국의 2016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약 5.8톤이었다.64 물론 〈가디언〉이 지적한 대로 지역적 차이도 두드러진다. “2018년에 북미 사람들이 비행한 거리는 아프리카인들보다 50배, 아시아·태평양 사람들보다 10배, 라틴아메리카인들보다 7.5배 더 길었다. 유럽과 중동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25배, 아시아인들보다 5배 더 많이 날았다.” 그런데 영국, 유럽, 미국 내의 배출량 상당 부분은 “자주 날아다니는 사람들”에서 비롯한다. 이 집단은 “연간 장거리 3회, 매월 단거리 1회, 또는 이 두 경우를 어느 정도 조합한 수준”으로 항공기를 이용한다. 미국인과 영국인의 약 50퍼센트는 비행기를 전혀 타지 않았다. 여객기에서 배출되는 탄소는 대부분 부유한 소수에 의해 배출된다.
하지만 이런 관점이 은폐하는 것은 선진국 내에서도 개인 간 배출량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예컨대, 최근의 한 연구를 보면 2018년에는 겨우 1퍼센트의 사람들이 전 세계 항공 온실가스의 50퍼센트를 배출했다.1인당 항공 온실가스 배출량에 근거한 조잡한 “인구론적” 주장은, 예컨대 영국의 인구 증가가 항공 온실가스 배출량을 비례적으로 증가시킨다는 결론에 이를 것이다. 이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의 비행 횟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1인당 배출량에 근거한 접근을 통해 과잉인구론자들은 이를 전체 인구와 수많은 사람들의 문제로 뭉뚱그릴 수 있다.
이런 접근은 악명높은 IPAT 공식으로 마치 과학적인 듯한 허울을 뒤집어쓴다. 이 공식은 환경에 미치는 영향(impact의 I)이 인구(population의 P)와 풍요(affluence의 A)와 기술(technology의 T)의 곱과 같다는 것이다. 인구를 환경 파괴의 세 결정적 요인의 하나로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부유하고, 기술 수준이 높고, 인구가 많은 사회일수록 더 환경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IPAT 공식의 가장 초기 형태는 얼릭과 존 P 홀드렌이 커머너 등 급진주의자들의 연구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제시됐다. 1971년 논문에서 얼릭과 홀드렌은 그들이 말하는 “미심쩍은 주장”을 반박하며 이렇게 썼다.
이 중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이 지역적·국제적으로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데서 미국 인구의 규모와 증가율이 부차적인 요소일 뿐이라고 치부하는 것이다.
여기에 맞서 얼릭과 홀드렌은 다섯 “정리”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인구 증가는 환경에 그 증가의 규모를 능가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인구 규모가 1인당 환경 영향에 미치는 영향은 수확 체감에 그치지 않는다. 지나치게 단순화한, 그러나 교훈적인 사례를 들어 보겠다. 인구집단 내에서 각 개인이 다른 모든 개인과 연결돼 있다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여기에는 도로나 전화선 등이 쓰일 것이고, 이런 것들을 짓고 이용하는 데에는 에너지와 자재가 필요하다. 이런 연결의 수는 사람 수보다 빠르게 늘어나기 때문에 그 연결과 관련한 1인당 소비량도 빠르게 늘어날 것이다.
얼릭 등은 이후의 논문 등에서 이런 계속 주장을 발전시켜 왔지만, 이들이 IPAT 공식에 씌운 과학적 외피는 면밀히 살펴보면 허구적임이 드러난다. 이언 앵거스와 사이먼 버틀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실 IPAT는 방정식이 아니라, 회계 등식처럼 정의상 항상 참인 식이다. 얼릭과 홀드렌은 환경 영향이 인구 × 풍요 × 기술임을 증명하지 않는다. 그저 환경 영향을 그렇게 정의했을 뿐이다.이어서 앵거스와 버틀러는 IPAT 공식이 인구 논쟁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법을 규정해 왔지만 동시에 강력한 반론에도 부딪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일례로 1993년에 “공식에서 인구를 들어내기: IPAT의 재구성”이라는 글을 쓴 패트리샤 하인스를 인용하는데, 그 글은 이 공식이 “인간을 자연 환경에 기생하는 존재 내지 포식자로 보는 이상한 관점”에 서 있다고 결론짓는다.
IPAT 접근법의 또 다른 문제점을 살펴보기 위해, 얼릭이 1971년에 저서 《인구 폭탄》에서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라는 현대 환경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자. 그는 도시 인구가 늘어서 자동차와 배기가스가 늘었다고 주장한다.
로스앤젤레스나 그와 비슷한 도시들에서 인구 규모는 적어도 대기 오염 자정 능력 차원에서는 환경의 수용 용량을 넘어섰다. 불행히도 로스앤젤레스의 스모그법은 자동차 대수의 증가(스모그 발생의 주요 원인이다)를 거의 따라잡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 경제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기 오염의 이러한 측면이 크게 나아지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 스모그 배출을 억제하는 장치를 개선하고 생산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자동차 대수의 증가로 인해 로스앤젤레스와 다른 비슷한 도시들은 인간이 거주하기에 계속 부적합할 것이다.
70 하지만 그는 문제의 근원을 잘못 짚는다. 자동차 사용이 늘어난 것은 인구 증가가 아니라 더 복잡한 문제 때문이다. 앵거스와 버틀러는 환경사회학자인 앨런 슈나이버그의 연구를 소개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얼릭은 오염을 줄일 다른 대책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예컨대 그는 “공장과 자동차에 오염 물질 배출 기준을 강제할 수 있다”고 쓴다.1960~1970년 사이에 미국 인구는 2380만 명 늘었고, 민간 차량은 2180만 대 늘었다. 인구에 초점을 맞추는 모델로 본다면 인구가 늘어나서 차도 늘어났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추론에는 커다란 논리적 결함이 있다. 1960~1970년 사이에 늘어난 인구는 대부분 그 시기에 태어난 아이들이므로, 아무도 차를 살 수 있는 나이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앵거스와 버틀러는 슈나이버그의 결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따라서 자동차가 늘어난 것은 사람이나 가구가 늘어나서가 아니라 일부 가구들이 차를 여러 대 구입했기 때문이다 … 자동차가 없는 가구는 늙고, 가난하고, 도심에 사는 경향이 있는 반면, 차를 두 대 이상 보유한 가구는 중년이고, 더 부유한, 교외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인 경향이 있다.
71 앵거스와 버틀러가 슈나이버그의 연구를 요약하면서 보여 주듯이, 자동차 사용이 늘어난 것은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변화의 부수적 결과였다. 로스앤젤레스의 사례도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슈나이버그는 자동차가 늘어난 것이 여성의 노동시장 진출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1950년대까지 로스앤젤레스는 대규모 전차 교통망이 운영되던 도시였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도시기획자들은 교외 거주지를 확장하려 했지만 전차 교통망은 확장하려 하지 않았다. 방대한 도로망이 건설됐고 대중교통 회사들은 전차에서 버스로 사업을 전환했다. 따라서 도시가 성장하면서 스모그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인구 증가 때문이 아니라, 공해가 적은 다른 교통수단이 있었음에도 자동차와 버스에 중점을 두기로 했기 때문이다.
72 그러나 미군의 규모는 미국의 인구에 좌우되지 않으며, 세계 경제에 대한 전후 미국의 지배력과 제국주의적 야욕에서 비롯한 결과다.
로스앤젤레스 교통의 사례는 환경 오염의 변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인구와 오염량 사이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IPAT 공식 따위로 환경 파괴를 이해하려 하면 자본주의 자체의 성격을 간과하게 된다. 예컨대 미군의 탄소 배출량은 140개국의 탄소 배출량에 맞먹는다. 한 언론인이 지적했듯이 “미국 국방부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세계 55위 이산화탄소 배출국이 될 것”이다.인구는 정치적 논쟁의 “한 갈래”가 아니다. 진정한 논쟁에서 주의를 돌리는 수사적 장치다. 개개인이 소비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 체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자본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수요와 시장을 창출해 왔다. 무계획적인 시장 시스템이 상품을 과잉 생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구 증가로 구매와 소비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비효율·낭비·화석연료를 핵심으로 하는 체제다.
결론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전부 우파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구를 둘러싼 지배적 주장들은 사회를 보는 우파적 관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생태계 파괴와 실업, 빈곤, 기아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들의 선택의 총합일 뿐이다. 반면,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인구 규모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인류와 인구 수가 환경에 주는 영향이 사회 형태에 의해 결정되며, 무찔러야 할 대상은 인간과 지구보다 자본 축적을 우선시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맬서스의 정치를 그토록 맹렬히 공격한 것이다. 그들은 맬서스의 주장이 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결국 분노를 자본주의에서 엉뚱한 데로 돌린다고 봤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구가 무한정 늘어도 아무런 부정적인 결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 인구가 무한정 늘어나는 일은 분명 없을 것이다. 혁명적인 변혁을 통해 인간의 필요에 기초해 조직되는 사회를 성취한다면 그에 따라 인구 증감의 동학도 달라질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생태계 파괴를 낳는 이유는 자본가들의 수중에 더 많은 부를 축적하려는 끝없는 노력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조직되는 생산은 극소수에게 부를 집중시키는 동시에 노동자들을 도시와 공장, 그 밖의 대규모 작업장에 집중시켰다. 이런 생산의 비합리적인 조직은 농촌 인구를 줄이고 도시 인구를 늘린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 관계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재생산한다.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서는 이런 관계를 변혁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류와 환경의 관계가 더 합리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분명하게 주장했다. 그들은 《공산당 선언》에서 10대 요구의 하나로 “전국적으로 더 고르게 인구를 분포시켜서 도시와 농촌의 구분을 점진적으로 없애라”고 요구했다.
73 부패한 이윤 추구가 사라진 세계에서 그런 측정이 이뤄진다면 뜻밖의 낙관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명확한 측정이 가능하려면 자본주의를 없애야 한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체제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이 사회의 병폐들을 대중 탓으로 돌리며 현 자본주의 질서의 유지를 옹호하는 주장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의 지속 불가능성은 인구와 환경이 맺는 실제 관계를 은폐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자연과의 관계를 변혁하고 생산을 조직하는 새롭고 지속가능한 방식을 만들어 낼 것이다. 앵거스와 버틀러가 지적했듯이 이는 “지구의 환경 수용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할 것이다.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세계를 재앙으로 끌고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라나는 저항의 불씨들을 키우면서도,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의 재생산권, 출산 계획을 문제 삼는 사상과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대안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합리적으로 조직되는 것에 기반을 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생산은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자들의 연합”이 민주적으로 세운 계획에 따라 이뤄질 것이다. 그런 사회를 쟁취하려면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고 진정한 적을 가리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진정한 적은 자본주의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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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mpson, Martin and Ian Rappel, 2021, Beyond our numbers: a socialist argument about population and the environment, International Socialism 172 (Posted on 23rd October)
↩
- Barry, 2007. 이 글의 초안을 읽고 유익한 논평을 해 준 이언 앵거스, 조셉 추나라, 실라 맥그리거, 로라 마일스, 커밀라 로일, 네일 토마스에게 감사를 표한다. ↩
- Gates, 2021; Holmes, 2012. ↩
- Attenborough, 2020. ↩
- Webb, 2020 ↩
- 최근의 사례는 Dasgupta, 2021을 보라 ↩
- Melia, 2021, p208. ↩
- Carrington, 2019. ↩
- Thornett, 2019, p133. 소넷의 추정치는 유엔의 추정치보다 적다. 유엔이 2015년에 낸 보고서에서 예상한 2050년 인구는 3억 9900만 명이다. 2014년에 낸 보고서에서는 4억 100만 명으로 예측했다. United Nations, 2015, p31를 보라 ↩
- Thornett, 2019, p161. ↩
- 맬서스의 삶과 사상에 대한 소개는 Reisman, 2018, pp1-25를 참고. ↩
- Davis, 2002, p32. ↩
- 맬서스가 이전의, 그러나 오늘날에는 대체로 잊혀져 있는, 로버트 월리스의 주장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월리스는 1761년에 저서 《인류의 다양한 전망》에서 인구가 가용 자원을 능가하는 수준으로 증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Reisman, 2018, p41과 Foster, 2002, pp138-139를 보라 ↩
- Malthus, 1970, p72. ↩
- Malthus, 1970, p134. ↩
- Malthus, 1826, p340. ↩
- Malthus, 1826, p424. ↩
- Thomas, 2019, p80에서 재인용. 윌리엄 고드윈을 다룬 리처드 고프 토머스의 책은 맬서스와 고드윈이 글을 썼던 당시의 이념적·정치적 분위기를 탁월하게 소개한다. 고드윈이 인구 논쟁에 처음 뛰어든 것은 월리스를 반박하기 위해서였고, 맬서스의 《인구론》은 고드윈의 비판에 대한 응답이었다. Foster, 2002, p139를 보라 ↩
- Thomas, 2019, pp80-81. ↩
- Thomas, 2019, p128. ↩
- Engels, 1982, p309. ↩
- Engels, 1982, p309. ↩
- 맬서스의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잘 요약한 것과,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대응은 Meek, 1971, pp16-26를 참고하라. ↩
- Reisman, 2018, p204에서 재인용 ↩
- Reisman, 2018, p227에서 재인용 ↩
- Meek, Theories of Surplus Value, volume 3. 1971, p33에서 재인용 ↩
- Meek, 1971, pp16-17 ↩
- Marx, 1977, p606. ↩
- Marx, 1977, p606. ↩
- Foster, 2002, pp146-147. ↩
- Marx, 1977, pp606-607. ↩
- Marx, 1990, pp783-784. ↩
- Meek, 1971, p60에서 재인용. ↩
- 녹색혁명은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늘렸지만, 농기계와 화학비료 사용에 주안점을 두면서 사회적·생태적으로 큰 악영향을 끼쳤다. 산업적 농업이 미국에서 개발도상국과 빈국으로 확대된 것은 녹색혁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녹색혁명은 남반구의 기존 농업 방식을 잠식하고, 농민과 소규모 생산자들을 다국적 식품 기업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맞춰진 세계 식량 경제에 묶어버렸다. 이에 관해서는 Leather, 2021, pp30-32를 참고하라. ↩
- Meek, 1970, p87. ↩
- Burkett, 1998, p140. ↩
- Meek, 1971, p120. ↩
- Burkett, 1998, p136. ↩
- Foster, 2002, pp150-151. ↩
- United Nations, 2019b. ↩
- McCurry, 2021; Yu, 2021. ↩
- United Nations, 2019b. ↩
- Rappel and Thomas, 1998. ↩
- Thomas, 1995. ↩
- Kim, 2016. ↩
- Kim, 2016; Roser, 2017; Thomas, 1991. ↩
- 인도적인 인구 관리를 위해서는 쿠바와 인도 남부 케랄라 주에서 출산율을 급격히 떨어트린 사회 변화에서 이끌어낸 교훈을 적용해야 할 수도 있다. 이 분야에 대한 윌리엄 머독의 주요 저작인 William Murdoch, 1980을 보라 ↩
- 현대의 “에코파시즘”과 그것의 오랜 역사는 Sparrow, 2020와 Hultgren, 2015를 참고하라. ↩
- Commoner, 1971, p233. ↩
- 언급한 광고는 Hultgren, 2015, p15에 있다 ↩
- Hultgren, 2015, p25. ↩
- Bacci, 2017, p46. ↩
- Bacci, 2017, p49. ↩
- Hultgren, 2015, p50에서 재인용 ↩
- Hopkins, 2018. ↩
- Hultgren, 2015, p46. ↩
- Hopkins, 2018. ↩
- Hultgren, 2015, p144. ↩
- 멸종반란 미국이 채택한 네 번째 요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정의로운 전환을 요구한다. 즉 가장 취약한 사람들과 원주민들의 자주권을 우선시하고, 오랜 환경적 부정의에 대해 흑인·원주민·유색인종·빈민 공동체가 주도하고 그들에게 이로운 배상과 교정책을 수립하고, 영속적으로 번영하고 재생할 생태계의 법적 권리를 확립하고, 계속되는 생태 살해의 피해를 바로잡아 인간과 다른 모든 종의 멸종을 막고 모두가 살기 좋고 정의로운 지구를 만들어야 한다.” —https://extinctionrebellion.us/demands ↩
- Commoner, 1972, p241에서 재인용 ↩
- Foster, 2002, p149. 녹색혁명의 생태적, 사회적 악영향에 대한 분석은 Shiva, 2016을 보라 ↩
- Malm, 2016. ↩
- 이 논쟁에 대한 최신 주장은 Foster and Clark, 2020에 있다 ↩
- 모든 1인당 배출량 수치는 세계은행 데이터뱅크에서 가져왔다. —https://data.worldbank.org/indicator/EN.ATM.CO2E.PC ↩
- Carrington, 2020. ↩
- Ehrlich and Holdren, 1971, p1212. ↩
- Ehrlich and Holdren, 1971, p1213. ↩
- Angus and Butler, 2011, pp47-48. ↩
- Angus and Butler, 2011, p49에서 재인용. 인간이 생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 그릇되고 조야한 관점은 본지에서 다룬 바 있다. Rappel, 2021을 보라 ↩
- Ehrlich, 1971, p66. ↩
- Ehrlich, 1971, pp66-67. ↩
- Angus and Butler, 2011, pp38-39. ↩
- McCarthy, 2019. ↩
- Angus and Butler, 2011, p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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