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 전쟁,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 *
2 미국 대통령 바이든은 우크라이나에 수백억 달러어치의 군사적 지원을 보냈다. 비교를 위해 언급하자면 미국은 매년 이스라엘에 30억 달러를 지원한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말했듯,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모든 제국주의 전쟁의 특징을 고스란히 띠고 있다. 러시아는 전쟁 범죄를 자행하고, 포격으로 도시를 폐허로 만들고,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현재 1200만 명 이상이 난민이 되거나 국내 이재민이 됐다. 미국과 나토 동맹은 재앙을 몰고온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침공에서 손을 뗀 지 얼마 안 돼, 우크라이나를 비롯해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동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무기를 보내고 있다. 동유럽에 주둔한 나토 병력의 규모가 10배 늘었다. 유럽의 경제를 주도하는 독일은 군비를 1000억 유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오늘날 동유럽은 냉전의 절정 이래 가장 무장이 강화됐다. 또다시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이르는 광활한 영역에서 핵무장한 초강대국들이 대결하고 있다.
4 핀란드를 방문한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핵 미사일을 영국 본토에 다시 들여놓겠다고 경고했다.
핀란드와 스웨덴은 유서 깊은 “비동맹” 노선을 포기하고 나토 가입 의사를 표명했는데, 이들이 나토에 가입하면 러시아와 나토의 접경선이 두 배로 길어진다.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는 핀란드와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하면 “발트 지역을 비핵지대로 두자는 논의는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했다. 대결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5월에 미국·일본·호주·인도의 “쿼드 정상회의”에서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전쟁을, 그 회의에 참여한 네 강대국들이 함께해 온 역사의 “암흑기”로 일컬었다. 그리고 중국 견제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13개국 협의체인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구상을 그 회의에서 공개했다. 나아가 바이든은 대만에 대한 수십 년 간의 “전략적 모호성”을 깨고 중국에 맞서 대만을 군사적으로 방어하겠다고 약속했다. 동시에 미국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시나리오”에서 교훈을 이끌어내라고 대만에 촉구했다.6 전형적인 사례로 〈이코노미스트〉의 한 표제 기사는 이렇게 단언한다. “중국은 러시아를 자유주의 세계 질서를 해체하는 데서 함께할 동반자로 여긴다.” 그 기사는 “서방이 단호하게 푸틴에게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야말로 중국의 야심을 꺾을 가장 좋을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7
미국 전략가들과 서방 군사·외교 전문가들이 쓴 우크라이나 관련 연구 보고서나 논문들은 어김없이 아시아 문제로 나아간다.8 이런 입장들은 어떤 식으로든 어느 한 제국주의 진영에 투항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좌파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서방 좌파의] 주변적인 소수는 러시아가 미국·나토의 팽창 정책에 대응하고 있을 뿐이라며, 부당한 비난에 맞서 러시아를 옹호해야 한다는 환상에 매달린다. 반면 [서방] 좌파의 대다수는 나토가 한 구실에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고, 나토의 무기 지원을 지지한다. 그것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 수단이라는 것이다.9 본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과 본지가 뿌리를 둔 더 넓은 국제사회주의경향도 그런 입장을 공유한다. 10
영국 전쟁저지연합STWC은 이와는 다른 입장을 취했다. 이 전쟁이 갈수록 제국주의 간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전쟁저지연합은 러시아의 침공에 반대하고 러시아군 철수를 요구하며 러시아 반전 운동가들에 대한 지지를 촉구한다. 동시에 전쟁저지연합은 반전 운동이 나토의 확장·확전에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나토를 비판하는 좌파들은 지독한 공격에 시달려 왔다. 영국 노동당 대표 키어 스타머와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노동당 좌파 의원들은 전쟁저지연합에 대한 지지 입장을 철회했고, 노동당 지구당들은 여기에 침묵했다. 영국에서는 노동조합 네 곳만이 나토 비판 입장을 최초 입장으로 채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반전 운동은 일부 좌파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사회 전반을 보면, 전쟁과 확전을 우려하고 미국·유럽 강대국들의 위선을 믿지 않고 전쟁 반대 주장에 귀를 기울일 청중이 분명히 있다.
이 글의 목적은 냉전 종식 이후 서방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이 재등장한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른바 ‘철의 장막’이 붕괴하자 새로운 충돌 지대가 형성됐다. 그 지대는 서쪽으로는 발칸 반도, 동쪽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이르는 거대한 호弧를 이루고 있다. 이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를 따라 핵무기로 무장한 세계의 세 진영인 나토, 러시아, 중국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또, 부상하는 두 아류 제국주의 국가인 튀르키예와 이란, 그리고 그 외의 역내 강자들이 경제적·전략적·지정학적 중요성이 큰 이 지역에서 자신들의 경제적·지정학적 이익을 도모하고 있다.
제국주의, 러시아와 그 경쟁자들
11 이 분석과 클리프가 창립한 정치 전통의 핵심에는 반反제국주의가 아로새겨져 있다. 1950년 한국전쟁에 관한 초기 저술에서 클리프는 훗날 IS와 SWP의 대표적 슬로건으로 알려지는 중요한 슬로건을 내놓았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국제사회주의자들IS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토니 클리프가 쓴 《소련 국가자본주의》 초판은 1947년에 나왔다. 클리프의 이론은 제국주의 간 관계, 스탈린의 반혁명, 소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이윤과 부를 향한 미친 질주 속에서, 양대 제국주의 강국은 세계 문명의 존립을 위협하고, 핵전쟁의 끔찍한 고통으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노동계급과 인류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떤 제국주의도 지지해서는 안 되고, 두 제국주의 강대국 모두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오늘날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구호는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사회주의”여야 한다.
13 첫째,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충돌로 이끄는 세계적 체제다. 둘째, 제국주의는 생산 과정이 한 나라의 국경을 넘어섬에 따라 국가와 자본이 갈수록 상호 의존하게 되는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나타낸다. 기업은 국가가 정치적·경제적·군사적 힘을 행사하고 경쟁국에게서 자국 자본을 보호하는 것에 의존하게 되고, 국가는 자신의 힘을 행사하기 위해 자본의 경제적·기술적 발전 수준에 의존하게 된다.
클리프는 러시아 마크르스주의자인 레닌과 니콜라이 부하린이 제1차세계대전 동안 발전시킨 제국주의 분석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본지의 이전 호에서 조셉 추나라는 이 제국주의라는 현상을 이해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의 기본적 특징을 요약한 바 있다. [서방] 좌파 내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오직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맥락 속에서만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들이 꼽는 러시아의 침공 동기는 다양하다. 블라디미르 푸틴의 대러시아 국수주의, 러시아의 전제정 전통, 러시아 사회의 굴종적 사고 방식, 스탈린과 차르로 거슬러 올라가는 제국주의적 야심의 역사 등이 침공 동기로 제시된다. 놀랍게도 이런 설명은 냉전 시기의 역사 인식이 짙게 남아 있는 표준적 리버럴들의 서사와 거의 다르지 않다. 러시아의 침공에만 초점을 두는 이들 중 일부는 러시아 대 서방의 제국주의 경쟁이 일반적으로는 중요하다고 인정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위한 전쟁과는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더 큰 맥락에서 설명하고 나토와 미국 제국주의의 구실을 지적하면, 흔히 “쟁점 돌리기 하지 마라”는 비난이나 더 험한 말이 돌아온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맥락에서 떼어 놓고 이해할 수 없다. 구체적인 분석을 하려면 전쟁의 근원, 즉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 전반에 걸쳐 심화된 더 광범한 제국주의 경쟁과 제국주의 세계 질서에서 러시아가 차지한 위치를 밝혀야 한다. 이러한 분석에 앞서 몇 가지 살펴볼 논점이 있다.
첫째, 러시아 대 서방의 제국주의적 갈등이 갖는 특수성과 관련된 제국주의 경쟁의 특징들을 명심해야 한다. 정의상 제국주의는 국가들의 역동적인 경쟁 체제다. 그 안에서 경제적·군사적·지정학적 강대국들은 부상하기도 하고 쇠락하기도 한다. 충돌은 힘의 균형이 변화할 때 격화될 때가 많다. 이것이 극단에 이르면 충돌이 군사적 대결로 분출한다.
둘째, 그 경쟁은 대등하지 않은 국가들 사이에서 이뤄진다. 다시 말해 국가들의 경제적·군사적 자원이 대등한 경우는 거의 없다. 그리고 한 국가가 힘을 행사하는 능력은 경제력과 관련 있지만 경제력으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15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에 주둔한 미국의 남태평양 함대를 공격한 것은, 동남아시아 지역을 점령하려는 계획에 미국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1950년, 소련과 중국이 북한의 남한 침공을 부추긴 것은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남한과 북한이 수행한 대리전으로 시작된 그 전쟁은 미국과 중국의 개입을 불렀고, 유혈낭자한 교착 상태로 끝났다. 모든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자신이 “먼저 총을 쐈”느냐의 여부와 상관 없이 자신의 군대·동맹·전쟁이 “방어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은 침략자고 자원과 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에서 종속국과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한다.
셋째, 경제력·군사력이 전반적으로 열세인 제국주의 국가라고 해서 더 강한 경쟁자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 열세에 있는 제국주의 국가가 특정한 지정학적·군사적 우위를 활용해 더 강력한 제국주의 국가에 맞서는 경우도 있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러시아 제국을 기습해서 승리한 것이 그런 사례다. 제1차세계대전 이전에 독일은 영국의 해군력을 앞질러서 세계 무역에 대한 영국 식민 제국의 패권에 도전하려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독일은 유럽 대륙에서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넷째, 제국주의 간 전쟁이 두 경쟁국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세계 체제의 한 부분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다른 곳에도 영향을 미친다. 동맹들이 형성되고, 각 진영은 상대 진영 내의 긴장을 이용해 그들을 분열시키려 한다.
마지막으로, 세계 체제는 국가들로 하여금 우위를 끊임없이 노리고 자신의 “세력권”에서 패권을 획득하고 확인시키려 애쓰고 경쟁자들의 세력권을 잠식하도록 강제한다. 이 경쟁은 궁극적으로 “제로섬” 게임이다. 자본 축적을 위한 대대적인 노력이 이뤄지는 가운데 세계 체제의 어느 부분도 경쟁하는 국가들의 영향권 바깥에 남아 있을 수 없다.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하듯이
장기적으로 보면 그들 모두가 성공할 수는 없다. 가장 약한 자가 무릎 꿇고 위기에 빠져 지역 수준에서 가치 파괴가 일어나거나, 지역들 간 지정학적 투쟁이 일어난다. … 군사적 충돌(20세기에 자본주의 강대국들 사이에서 일어난 세계대전 같은 사건들)의 위험이 항시 도사리고 있다.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제국주의 충돌은 단순히 “경제적” 요인이나 “지정학적” 요인 — 이데올로기적 요인은 말할 것도 없다 — 으로 환원할 수 없다.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강조했듯이, 지정학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이 제국주의적 충돌의 복합적 형태들로 서로 얽히며, 이런 제국주의 충돌은 둘 중 어느 하나로 환원할 수 없다. 그리고 제국주의 간 충돌을 살펴볼 때에는 어느 한 제국주의 간 충돌만을 본보기로 삼아서도 안 된다. 제국주의 전쟁들이 고스란히 똑같이 되풀이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각 충돌을 당장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세계 체제라는 맥락 속에서 분석하는 방법론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러시아의 위기와 경제, 국가: 1991-1999
1991년 10월, 보리스 옐친은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시장 가격으로 일시 전환하는 것은 어렵고 무리하지만 불가피한 조처입니다. 대략 6개월 동안 모든 사람들의 상황이 나빠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가격이 떨어지고 소비자 시장이 상품들로 가득찰 것입니다. 1992년 가을 즈음에는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의 삶이 점차 개선될 것입니다.
당시 갓 대통령에 취임한 옐친의 연설은 경제적 “충격 요법”의 시기를 알렸다. 전례 없는 국가적·사회적 위기의 10년이 시작됐다. 이 “어렵고 무리한 조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로 이뤄져 있었다. 가격 자유화, 복지 삭감, 국가 자산 민영화가 그것이다. IMF, 세계은행, 러시아 자유주의 “개혁가들,” 서방 정부들은 러시아가 비교적 짧은 기간 경제적 고통을 겪은 후, 세계경제와 통합돼 혜택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19 노동자들은 여러 달 동안 임금이 체불됐고, 사회 복지가 붕괴했으며, 노후 대비 저축과 연금이 증발했다. 1992년 물가 상승률이 1354퍼센트까지 치솟았고, 러시아인들의 실질 근로소득이 46퍼센트 줄었다. 약 32퍼센트의 아이들이 결식 아동으로 분류됐고 수많은 가구가 텃밭에서 기른 채소와 과일로 연명했다. 20 1991~1994년 남성의 기대 수명은 57.4세로 떨어졌다. 3년 만에 6년이 준 것이다. 1990년대 초 러시아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였다. 알콜 소비량도 치솟았다. 21
그러나 실제 결과는 전례 없는 경제적 붕괴였다. 정치 분석가 아나톨 리벤은 이러한 붕괴를 낳은 상황을 “폴터가이스트 경제학”이라고 일컬었다. 러시아 산업의 붕괴 규모는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수준을 넘어섰고, 산업 생산 능력의 손실이 제2차세계대전 기간보다 더 컸다. 국내총생산GDP이 43.3퍼센트 감소하고 산업 생산이 56퍼센트 감소했다. 1991~1995년 사이에 자본 투자가 78퍼센트 감소했고, 첨단 기술에 대한 투자가 가장 급격하게 줄었다.23 기존 명령 체계가 무너져 내리자 산업 관리자, 당, 보안기구 관료들은 자신의 행정 권력을 이용해 민영화된 기업들을 장악하고 수익을 극대화하려 했다. 그러다 공급망과 생산에 차질을 일으키는 것에는 개의치 않았다. 24 한편, 지방 정부 운영자들은 중앙 정부에 맞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졌다. 민간 기업의 활동이 조직 범죄 활동과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은 세수를 확보하려는 국가의 시도를 우회했고, 수많은 돈이 국외의 조세 도피처로 빠져나가서 세탁됐다. 러시아학 연구자 스티븐 코언은 이렇게 묘사했다. “소련 국가가 통제하던 막대한 자산, 공장·은행·토지·상점·방송·출판·교통은 물론 군사적 자산을 둘러싸고도 수도와 지방 모두에서 치열한 쟁투가 벌어졌다.” 25
“충격 요법”의 영향은 경제에 그치지 않았다. 소련은 60년 간의 국가자본주의적 발전 과정 때문에 국가와 산업 기구들의 결합이 세계의 다른 곳들보다 훨씬 강했다.옛 관료층과 새로운 기업가층이 엄청난 득을 봤지만, 붕괴와 경제적 혼란은 러시아 국가와 러시아 자본 전체에 이롭지 않았다. 러시아 지배계급은 위기를 해결할 방법을 찾는 데서 어려움을 겪었다. 옛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경제 재건의 길도 막혀 있었다.
26 알렉스 캘리니코스가 설명했듯이,
국가자본주의적 자본 축적 방식은 소련 노동자들과 러시아 농민들에게 끔찍한 대가를 치르게 했지만, 특별한 역동성을 보였다. 하지만 경쟁자들의 생산 규모가 갈수록 세계적이 되자, 소련은 첨단 기술과 무기 생산을 비롯한 경제의 모든 영역에서 뒤처졌다.소련은 … 폐쇄 경제로서 지령 경제 체제가 시장의 압력을 차단해 줬다. 그런 소련은 국제적 노동 분업에 참여하면서 얻는 생산성 향상을 이룰 수 없었다. 관료가 자원을 동원해 소련을 군수산업 초강대국으로 성장시킨 조직 방식이 다국적 자본주의 시대에는 도리어 그 이상의 성장에 장애물이 됐다.
28 이 기본 전제는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지배계급을 괴롭혔다. “충격 요법”을 강행한 것은 단지 경제적·기술적 발전 그 자체를 목표로 한 게 아니라 러시아의 경제력과 국력을 다른 나라들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것이었다. 오늘날까지도 1990년대의 재앙은 러시아 지배자·자본가들의 뇌리에 악몽처럼 남아 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이 선포한 목표는 서방을 “따라잡고 추월하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산업 관리자들에게 한 연설에서 “뒤처진 자들은 패배한다”고 강조했다.옐친의 시대는 1998년 러시아의 경제 추락과 함께 끝났다. 혼란의 와중이던 1999년에 무명의 KGB 관료 출신 푸틴이 옐친에 의해 총리로 임명됐고, 같은 해 말 대통령이 됐다. 푸틴은 러시아 경제를 되살리고 국가의 힘과 권위를 회복하려고 방향 전환을 시도했다.
러시아와 국력 행사, 서방: 1991~1999년
29 후쿠야마는 경쟁하는 체제들의 거대한 이념 대결의 시대가 이제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슬람 근본주의 같은 장애물과 도전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런 유물들이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적 전진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금 보면 후쿠야마의 명제가 터무니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베를린 장벽 붕괴 직후에는 각국 정부들이 기회를 잡을 혜안과 용기만 있다면 국가들이 협력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새 시대가 가능하리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희망은 아마 유럽에서 가장 컸을 것이다. 그랬던 세계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이 몰락하자 “역사의 종말”이라고 환호한 것으로 유명하다.냉전이 이념 대결로 추동됐다는 가정은 사실이었던 적이 없다. 냉전 시기 초강대국들의 세계 분할은 두 경쟁 제국주의의 충돌이었다. 한쪽은 국가자본주의를 토대로 하는 제국주의였고, 다른 한쪽은 세계화된 생산과 세계 시장을 토대로 한 제국주의였다. 냉전은 1991년에 끝났지만, 제국주의 경쟁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경쟁을 위한 노력은 상시적인 것이고, 세계 체제의 내재적 특성이다. 제국주의 갈등의 한 시기가 끝나면 또 다른 제국주의 갈등의 시기가 시작돼, 더 격렬할 수도 있는 새로운 제국주의 경쟁으로 가차없이 이어진다. 제1차세계대전, 제2차세계대전, 냉전은 모두 나름의 파괴적 “해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각각의 “해결”은 다음 시기의 제국주의 갈등이 펼쳐지는 지반을 형성했다.
오늘날의 러시아는 소련 제국이 붕괴하고 경제적·국가적·군사적 인프라가 크게 약화된 조건에서 형성됐다. 그러나 러시아는 약소국이 전혀 아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핵무기를 물려받았고, 그 일대에서 가장 큰 재래식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다. 옛 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신생 독립 국가들은 대부분 러시아산 에너지와, 옛 소련의 영향권 하에서 수십 년 동안 형성된 산업적·경제적 인프라에 크게 의존했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에 비하면 러시아의 힘은 제한적이었지만 바로 그 제한적 힘을 지키는 것이 러시아에 사활적이었다.
러시아가 새로운 위기 국면에 접어들자, 미국 제국주의와 그 유럽 파트너들은 냉전기 동안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들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철의 장막이 걷히자 서유럽과 러시아 국경 사이의 광대한 영역이 열렸다. 러시아와 서방의 지도자들이 함께 연설하고, 우호적인 말을 주고받고, 정상회의를 갖는 동안에도 두 가지 물음이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첫째, 대담해진 나토가 얼마나 빠르고 멀리 전진할 것인가? 둘째, 러시아는 자신의 패권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까지 확인시키려 할 것인가?
30 사실, 옐친을 지지한 급진적 민주파도 이미 1992년에 옛 소련 영토 전체에 대한 러시아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라는 러시아판 “먼로 독트린”을 주장했다. 31
러시아는 위기를 겪고 있었음에도 숨 돌릴 틈도 없이 유라시아 쪽 주변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확인시키려 했다. 서쪽으로는 유럽 강대국들, 남쪽으로는 중국·튀르키예·이란과의 완충 지대를 복원하기를 원했다. 1993년 3월 옐친은 이렇게 선언했다. “각 국제 기구들이 옛 소련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할 권한을 러시아에 부여해야 할 때가 왔다.” 6개월 후 러시아 외무장관 안드레이 코지레프가 유엔에서 그 요구를 되풀이했다.32 2021년에 러시아는 세계 최대 천연 가스 수출국이자 세계 2위의 원유 및 콘덴세이트 수출국, 세계 3위의 석탄 수출국이었다. 러시아 가스 수출의 74퍼센트, 석유 수출의 49퍼센트, 석탄 수출의 32퍼센트가 유럽 시장으로 갔다. 33 2022년 2월에 러시아 연방 예산의 절반이 석유·가스 수출 수익에서 나왔다. 34 따라서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를 가로지르는 파이프라인과 수송로는 러시아 국가의 사활적 관심사였다.
세계 경제에 통합되려는 러시아의 시도, 러시아의 에너지 전략, 러시아의 패권을 확인시키려는 노력은 서로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1993년이 되면 천연자원 수출은 러시아 경제의 구명줄이 됐다. 천연자원, 무엇보다 석유·가스 수출은 전체 수출의 65퍼센트를 차지했다. 1995년에는 불과 10가지 천연자원 상품이 러시아 수출의 70퍼센트를 차지했다.러시아는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 지닌 힘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여, 민족·종족 간 분열을 자신에게 득이 되게 이용해 공공연한 충돌과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러시아는 “평화 유지”를 빌미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충돌에 개입해 인접국들을 러시아 영향권에 묶어 두고, 그 국가들이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이탈할 때를 대비해, “일시 중지시킨 분쟁”을 그곳에 남겨 놓았다. 러시아는 일련의 침공, 내전, 분리 독립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일정 구실을 했다. 1991~1993년 조지아 내전, 1991~1992년 남南오세티야가 조지아와 벌인 분리 독립 전쟁, 1992년 오세티야인과 인구시인의 종족 분쟁, 1992년 몰도바에서 일어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분리 독립 전쟁, 1992~1993년 압하지야가 조지아와 벌인 분리 독립 전쟁, 1992~1997년 타지기스탄 내전, 1993~1994년 체첸 내전, 1988~1994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제1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94~1996년 러시아의 체첸 침공이 그런 사례들이다. 데이브 크라우치는 러시아의 전술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러시아군이 평화유지군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언제나 주요 전투가 끝난 후 배치됐고, 유혈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완화하지 못했다. 평화유지군은 충돌하는 양쪽 중 하나를 분명하게 편들었다(또는 양쪽 모두에 무기를 지원해 그들이 경제력을 소진하여 러시아에 의존하게 만들었다). 평화유지군은 현지의 비공식 무장 조직에 의존했고, 어디서든 충돌의 근본 원인을 그대로 방치해 뒀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전쟁으로 2만 명이 죽고 150만 명이 난민이 됐다. 조지아·오세티야·압하지야가 벌인 전쟁은 최대 5만 명의 사망자와 50만 명의 난민을 낳았다. 타지키스탄 내전에서는 최대 10만 명이 죽고 120만 명이 살던 곳을 떠났다. 제1차 체첸 전쟁으로 8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사망했고, 50만 명이 이재민이 됐다.
러시아가 “근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시키는 동안, 미국 제국주의도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1991년 1월, 미국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제1차 걸프전을 일으켜 사담 후세인에게 유혈낭자한 참패를 안겼고, 이후 10년 동안 이라크를 제재했다. 1995년에 미국은 유엔을 이끌고 소말리아 내전에 개입했다. 그러나 이후 벌어질 일을 예고하라도 하듯 미군과 유엔군은 이른바 모가디슈 전투에서 굴욕적으로 대패해 크나큰 손실을 입고 결국 1995년에 철수했다.
36 뒤이어 1999년에 나토는 코소보를 두고 다시 세르비아와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은 훗날 서방과 러시아의 대결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드러났다.
1991~1992년에 재통일된 독일은 미국의 의사를 거스르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를 부추겼다. 그러면서 종족 간 분열과 상호 간의 인종 청소를 부추겼다. 1995년에 미국은 보스니아 전쟁 개입을 주도했다. 대략 2주 동안 8개 나토 회원국에서 전투기 300여 대가 3500회 이상 출격했다.그러나 1990년대 전반 동안, 러시아의 개입과 서방의 개입은 양측의 직접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나란히 이뤄질 수 있었다. 1994년 말에 이르면 러시아는 주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어느 정도 확립했다. 여기에는 두 예외가 있었는데 하나는 북캅카스의 조그마한 체첸 공화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크라이나였다.
캅카스(“산악 지대”를 뜻한다) 지역은 1990년대 러시아가 개입의 초점으로 삼은 곳이었다. 캅카스 지역 국가들은 차르 시대의 러시아 제국주의라는 모루 위에서 형성됐다. 그 서쪽에는 흑해가 있다. 흑해는 지중해로 가는 통로이자 러시아 흑해 함대의 거점이다. 캅카스 지역의 동쪽에는 막대한 에너지 자원을 보유한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가 있다. 남쪽은 튀르키예·이란과 접하고 있다. 캅카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잃는 것은 러시아 제국주의에 즉각적인 전략적 위협이 된다.
체첸 영국의 웨일스보다 작은[한국으로 치면 경상북도보다도 작은] 체첸은 석유 자원이 풍부한 캅카스 지역의 공화국으로, 이곳은 1990년대에 러시아의 힘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됐다. 체첸이 자리한 캅카스 북부에서 차르는 야만적인 전쟁과 학살, 초토화 정책을 펴고, 자신의 지배에 맞선 반란을 진압하려고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 이후 스탈린 치하인 1944년에는 체첸인을 포함해 캅카스인 모두가 이곳에서 추방됐다. 1991년 10월 “모범적 소련 장교” 출신이자 옛 소련 공군 장성인 조하르 두다예프가 선거에서 85퍼센트를 득표해 체첸 공화국 대통령이 됐다. 바로 다음 달 두다예프는 체첸 독립을 선포했다.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는 이 지역의 중요한 석유 중심지였지만, 체첸의 전략적 중요성은 에너지 문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른 신생 독립국들과 달리 체첸은 “연방”을 이루던 공화국이 아니었고,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에 흡수됐다. 체첸의 독립 선언은 러시아 국가의 온전한 통치권을 위협하고, 러시아의 유라시아 지배 전략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두다예프가 독립을 선언한 지 몇 주만에, 러시아는 악명 높은 내무부 경찰 파견대를 장갑차에 태워 그로즈니에 투입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의 항의 시위에 밀려 러시아는 병력을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 소강에 불과했다. 1994년 말 즈음 옐친은 체첸 지도부가 부패와 내분으로 약화됐다고 판단했다. 1994년 12월 수주 동안 집중 포격한 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징집병들을 가득 실은 장갑차들과 탱크 부대가 폐허가 된 그로즈니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러시아에 재앙적이었다. 기갑 부대가 매복 습격을 당하고 불탔다. 수주 동안의 처절한 시가전에서 체첸군은 러시아군의 허를 찔렀다. 3개월간의 전투 끝에 러시아군은 전사자 2000명을 내고서야 그로즈니를 장악했다. 러시아군은 체첸군을 맹공격해 체첸 남부 산악지대로 내몰았다. 그러나 그러면서 수많은 사망자를 냈고, 탈영병이 속출한 러시아의 징집병 부대들은 결코 전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1996년 여름에 체첸군은 수도를 탈환하여 러시아군을 몰아냈다. 러시아군은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보수도 못 받고 장비도 빈약한 상태였다. 한때 제2 초강대국의 자랑거리였던 그 군대의 패배는 러시아에 크나큰 치욕을 안겨 줬다. 러시아군의 한계가 처참하게 드러난 것이다.
우크라이나
1990년대에 러시아의 캅카스 개입은 엄청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장차 러시아의 패권과 대對유럽·미국 관계에 가장 큰 잠재적 위협이 된 것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긴장이었다.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옛 소련 해군 기지는 흑해 함대의 주둔지였고, 우크라이나 남부 해안 지대와 항구는 경제적·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했다. 옛 소련 핵무기의 3분의 1이 우크라이나에 배치돼 있었는데, 이를 물려받은 우크라이나는 세계 3위의 핵무기 보유국이 됐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러시아에 이어 두 번째로 국토가 넓다. 독립 당시 인구는 5200만 명으로, 동부·중부 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우크라이나의 산업 기반은 옛 소련 군산복합체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고, “흑토” 지역은 옛 소련의 곡창 구실을 했다. 1990년대에 러시아 가스 수출의 90퍼센트가 우크라이나를 경유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공업 단지와 탄광은 차르 제국과 스탈린 치하 시절에 산업화의 중심였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기업주들과 올리가르히는 대부분 대對러시아 무역 인프라, 러시아와 연결된 공급망 인프라, 러시아 시장에 통합돼 있었다. 폴란드 접경 지역의 비옥한 “흑토” 지역은 유럽과 세계 시장으로 수익성 좋은 수출을 할 잠재력이 있는 곳이었다. 우크라이나 동남부 지역은 러시아계와 러시아어 사용자가 많았고 주민 다수가 러시아와 유대가 있었다. 우크라이나계가 더 많은 서부 지역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고 유럽 친화적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대부분의 지역에서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됐고, 우크라이나인들은 모어와 관계 없이 서로 결혼하고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동네에 살았다. 1991년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독립 지지표는 크림반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84퍼센트를 넘었고, 크림반도에서도 과반이었다.
1990년대 위기의 타격은 옛 소련 국가들 중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심각했다. 1993~1994년에 우크라이나 물가는 거의 월 100퍼센트씩 올랐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1990~1994년에 GDP는 거의 반토막 났고, 그후 1990년대 내내 하락했다.
40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유럽으로 경제적으로 진출하고, 러시아의 군사적 방어 전력을 배치하는 중심축 구실을 했다. 우크라이나를 영향권 아래에 둔 러시아는 유럽·흑해·아시아를 포괄하는 강대국이 된다. 반면 우크라이나라는 이맛돌을 잃으면 러시아는 포위되고 고립된다.
“변방”을 뜻하는 우크라이나는 오랜 기간 제국주의 군대들의 전쟁과 세력권 분할에 시달려 온 곳이다. 흑해는 발칸 반도와 캅카스 지역, 우크라이나, 러시아, 튀르키예가 만나는 곳이다. 우크라이나의 면적, 지리, 러시아와 동유럽 사이에 자리한 전략적 위치, 흑해 제해권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근외 지역”을 아우르는 “아치 구조물의 가운데 이맛돌”과도 같았다.우크라이나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쟁투는 처음부터 치열했다. 1994년에 분석가 피오나 힐과 파멜라 주잇은 이렇게 지적했다.
1991년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핵무장 국가이자 유럽 정치의 잠재적인 주요 행위자로 등장한 이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관계는 옛 소련 지역에서 가장 불안정한 것이 됐다 … 두 국가의 책략과 맞대응은 양국을 충돌 직전으로 몰고 갔다.크림반도 문제, 흑해 함대의 지휘권,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이양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옐친하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영향권에 남아 있을 때에만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인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는 1991년 12월 러시아-벨라루스-우크라이나가 체결한 협정(이 협정으로 독립국가연합CIS이 탄생했다)의 문구에도 암시돼 있다. 소련 해체에 앞서 1991년 8월에 우크라이나가 처음으로 독립 선언을 하자, 옐친의 대변인은 우크라이나가 소련을 떠나더라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국경을 검토할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1990년대 내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벼랑 끝 전술과 책략이 이어졌다. 핵무기, 흑해 함대 분할, 크림반도의 지위, 에너지 공급에 관한 협정이 맺어지고 깨지기를 거듭했다. 1993년 옐친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가 흑해 함대를 분할하는 협정을 맺자, 러시아 해군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요구는 흑해 함대가 오직 러시아의 관할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러시아 최고소비에트회의는 세바스토폴이 러시아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크라우추크는 핵확산금지조약 승인을 뒤집고 우크라이나 영토에 있는 1800기의 핵 미사일 중 일부를 그대로 보유하는 방안을 지지했다. 1993년 8월, 러시아는 추수 기간에 우크라이나에 에너지 공급을 끊어 곡물이 들판에서 썩게 하고 우크라이나의 농산물 수출을 위협했다. 우크라이나 동부의 탄광과 공업 지역에서는 경제 위기가 깊어지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경제 전쟁이 생산에 차질을 주자, 독립에 대한 노동자들의 열망이 약해졌다. 올리가르히와 정치인들은 우크라이나 동부와 서부 모두에서 반동적인 종족적·민족적 분열을 조장하기 시작했다. 1993년 7월, 돈바스 지역 탄광 경영인 122명이 “사용자 파업”을 선언해 돈바스 전역의 광부들을 주도州都 도네츠크의 광장으로 불러 모았다. 군수 공장 노동자들도 파업에 합류해 파업이 하르키우 북부 지역까지 번졌다. 우크라이나 의회인 라다는 첨예하게 분열했다. 1993년 9월에 경제적 압박과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에 대한 위협에 못 이겨 크라우추크는 옐친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두 대통령은 크림반도에서 일련의 협정을 체결했다. 우크라이나는 흑해 함대의 우크라이나 몫을 러시아에 팔고,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을 조차하고, 우크라이나는 핵무기 해체에 동의하기로 합의했다. 크라우추크는 자신이 흑해 함대에 대한 권리를 계속 고집했다면 “흑해 함대와 크림반도 모두를 잃었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46 이는 최종 해결이 아니라 잠정적 타협이었고, 협정의 운명은 우크라이나 정부의 지향에 달려 있었다. 47 2010년에 친러 성향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크림반도 임대 기한을 [기존의 2017년에서] 2042년으로 연장하는 하르코프(하르키우) 조약을 체결했다. 라다는 여기에 반발했고, 야권은 비준 표결이 위헌이라고 봤다. 48 [한편, 우크라이나 정부가 친서방 노선을 걷던] 2021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는 조약 비준에 찬성 투표한 의원들에 대한 사전 수사를 개시했다.
그러나 라다는 이 협정의 비준을 거부했다. 흑해 함대 분할은 1997년에야 합의됐다. 흑해 함대의 함정 82퍼센트를 러시아에 넘기고 크림반도를 20년 동안 조차지로 내주기로 했다. 크림반도와 흑해에 대한 지배권은 옐친 임기가 시작될 때부터 러시아의 ‘레드 라인’이었고, 우크라이나는 일방적 행동을 감행하겠다는 러시아의 상시적 위협에 시달렸다. 2014년 위기와 크림반도 병합은 단지 푸틴의 호전적 정책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흑해 함대와 세바스토폴 해군기지를 통제하고 흑해 연안의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어야 그 일대와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 전반에 국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계적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데서 크림반도와 흑해가 그만큼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것이다.러시아와 서방: 1991~1999년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바르샤바조약기구가 해체되면서, 유럽연합과 나토는 동쪽으로 전략적으로 세를 넓히는 문제와 러시아와 맺을 관계에 관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기본 방향은 일찌감치 정해졌다.
50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나토를 “단 1인치도” 동진시키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고, 이후 러시아 지도자들은 줄곧 그 약속을 끄집어냈다. 51 그러나 베이커의 약속은 결코 문서화되지 않았으며 사실상 독일 재통일을 확정하고 소련군을 철수시키려는 술책에 불과했다. 나토의 확장을 자제할 것이냐는 물음에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H W 부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약속은 집어치워 버려!” 52
1990년에 독일 재통일이 가까워지자, 제2차세계대전 종전 때 연합국들의 합의에 따라 동독에 주둔해 온 소련군의 철수를 놓고 치열한 협상이 시작됐다. 역사가 매리 엘리스 서로티는, 재통일을 하루빨리 확정하려던 독일 지도자들과 나토 확장에 관한 어떠한 보장도 소련에 해 주지 않으려 했던 미국 정부 내 강경파 사이의 긴장을 서술한다.53 이에 옐친은 유럽이 “냉랭한 평화”로 빠져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54
1993년에 대통령 임기를 시작한 빌 클린턴도 나토의 전략적 중요성이 확장에 달려 있다고 봤다. 미국의 정책은 러시아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위치에 서지 못하게 하는 고전적 “봉쇄” 정책이었다.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윌리엄 레이크는 노골적이었다. “봉쇄 정책을 계승하는 것은 확장 전략이어야 한다.” 나토의 중요성은 더는 유럽에 국한되지 않았고 나토는 “역외 작전”으로 임무를 확장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1991년 제2차 걸프전쟁 참전을 보며 나토 사무총장 만프레드 뵈르너는 “새로운 시대에 증폭되는 위협과 불안정에 서방이 집단적으로 대처할 능력의 중추” 구실을 나토가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군사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의 보고서는 나토의 미래가 “역외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해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결론 내렸다.나토는 미국이 유럽 강대국들에 지도력을 유지하는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유럽연합은 강력한 세계적 경제 블록으로 부상했고, 미국은 유럽이 독자적으로 러시아와의 전략적 관계를 발전시키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런 관계가 미국의 이익을 거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56 이미 1994년에 러시아 외무장관 안드레이 코지레프는 평화파트너십이 그저 나토 확장을 은폐하는 기만책일 뿐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57
1994년에 나토 확장이 진전되면서, 나토의 최고 의결 기구인 북대서양이사회NAC는 러시아를 포함해 나토 회원국이 아닌 유럽 국가들을 이른바 평화파트너십PfP에 초청했다. 1995년이 되자 모든 동유럽 국가와 옛 소련 독립국이 초청에 응했다. 평화파트너십은 모두를 포괄한다는 미명하에 나토 확장을 위한 유연한 구조물로 기능했다. 러시아와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선별된 국가들이 나토에 정식 가입하는 통로가 됐다.58 마침내 1994년에 미국·러시아·벨라루스·카자흐스탄·우크라이나가 부다페스트 각서에 서명했다. 핵확산금지조약을 지키는 대가로, 구속력은 없는 안전 보장을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1996년 말에 마지막 핵미사일이 우크라이나 영토를 떠났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과 러시아 둘 다 중대한 제약에 걸려 대립을 어느 수준 이상으로 급속도로 키우지 못했다. 첫째 제약은 핵 확산 가능성이었다. 미국은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에 핵무장 독립국이 세 개나 출현하는 것을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은 러시아와 합심하여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을 압박해 핵미사일을 러시아에 넘기거나 러시아의 감독하에 해체하도록 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흑해 함대와 크림반도 문제에서 핵미사일 이양 연기나 거부를 협상 카드로 쓰는 것에 반대했다. 미국은 국가 안보 브리핑에서, 우크라이나가 핵무장 국가로 남는다면 “그 지역의 안정과 지난 25년 동안 합의된 핵 군축 체제 전반에 타격을 줘 재앙을 낳을 위험이 있다”고 강조했다.둘째, 미국과 유럽연합은 1990년대 초중반에 신생 독립국들에서 불거진 불안정에 크게 불안해했다. 특히 체첸과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주의가 부상한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개입에 대한 “무간섭” 정책에 힘이 실렸다. 셋째,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옐친 정부 자체가 불안정해지는 것을 우려했다. 1990년대 초의 재앙적 붕괴로 국수주의 세력들이 옐친에게 도전했다. 겐나디 주가노프의 공산당과,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의 파시스트 정당인 자유민주당(기만적 이름이다)의 “적갈동맹”도 그중 하나다. 클린턴은 옐친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고, “국내에 적이 너무 많아서 국외의 친구들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60 그 결과 전세가 눈에 띄게 호전돼, 옐친은 결선 투표에서 54퍼센트를 득표하고 공산당의 주가노프를 물리쳤다. 61
1993년 내내 옐친과 새 러시아 의회인 두마는 헌법적 교착 상태에 있었다. 옐친 반대파가 장악한 두마는 핵심 각료 임명, 입법, 새 헌법 비준을 거부했다. 마침내 12월에 옐친은 두마를 포격하라고 명령해 정권의 안정성에 대한 서방 자본들의 불안감을 키웠다. 옐친이 자기 정책을 그럭저럭 관철했음에도 옐친의 인기는 바닥을 쳤다. 1996년 대선 6개월 전, 유권자의 겨우 6퍼센트만이 옐친을 찍으려 했다. 클린턴과 부통령 앨 고어는 대선 전에는 나토를 확장하지 않겠다고 옐친을 안심시켰다. 1996년 3월 클린턴은 국제통화기금IMF을 설득해 러시아에 100억 달러 규모의 차관을 제공해 수많은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몇 개월치 체불 임금을 지급하고 사회 복지 자금을 댈 수 있게 했다.넷째, 미국과 그 동맹국들 자신들도 다른 곳에 개입하고 있었다. 1990년에 미국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빌미로 35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1차 걸프전쟁을 일으켰다. 1992년 종전 한 달 후, 독일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촉발하는 데 일조했고, 이 전쟁은 1995년 나토의 첫 “역외” 폭격으로 이어졌다.
다섯째, 나토 확장은 지도만 펼쳐 놓고 하는 가상 연습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수많은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추산됐다. 서로티가 설명했듯이,
나토는 회원국들이 장비를 표준화하고 군대를 훈련시키고 상호 방위에 기여해야 하는 군사 동맹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신규 가입국들에 너무 빨리 나토의 상호 방위를 제공하는 것은 나토를 약화시킬 터였다. 당연히 미국 국방부는 이런 결과를 피하고 싶어했다.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한계에 직면했다.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발전의 장애물을 넘어서려면 러시아는 세계은행과 IMF 등 서방이 주도하는 기구들은 물론, 서방 정부, 다국적 기업과도 관계를 맺어야 했다. 1994~1996년 체첸 침공 대실패로 러시아 군사력의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또, 옐친은 경제 정책을 추진하고 국제 기구들과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친서방 자유주의자들을 필요로 했는데, 그 자유주의자들은 서방과의 대결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서방 모두에게 이런 실질적 한계가 있었음에도, 근저에 있는 갈등은 격화되고 있었다. 그 갈등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1996년 말에 이르러 마지막 핵미사일이 우크라이나·벨라루스·카자흐스탄에서 제거됐다. 옐친이 당장 축출될 가능성도 사라졌다. 옐친은 체첸과 휴전을 맺었고 러시아 주변의 갈등들도 완화됐다. 바로 이러한 시점에 나토는 유럽 전역으로 패권을 확장하기 위한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었다.
63 미국이 이끈 코소보 전쟁은 헝가리·폴란드·체코의 나토 가입 비준과 시점이 겹쳤다. 냉전 동안 확립된 미국의 유럽 지배력이 이제 발칸반도와 러시아-폴란드 국경까지 동쪽으로 확장됐다. 64 코소보 전쟁은 세력을 확장하는 나토의 “역외” 작전을 정당화했다. 나토의 개입은 유엔 승인도 받지 않았고 미국과 나토 동맹국들이 직접적 위협을 받지 않았는데도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됐다. 러시아 정부는 거기에 담긴 메시지와 교훈을 놓치지 않았다. 군사 분석가이자 러시아 안보 정책 분야의 지도적 인물인 알렉세이 아르바토프는 이렇게 단언했다. “나토의 군사 행동은 러시아에 결정적 치욕과 망신을 안겨 주는 행위다. 그리고 서방 열강의 오만함과 러시아의 이익을 무시하겠다는 의지를 어느 때보다 분명히 드러낸다.” 아르바토프는 코소보 전쟁이 국제 정치의 “탈脫냉전 국면”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주장했다. 65
1999년 코소보 전쟁은 정치학자 리처드 사쿼가 “차가운 평화”라고 부른 시기에 종지부를 찍었다.러시아는 오랫동안 “다극 세계”의 의의를 역설해 왔었다. “다극 세계”라는 표현은 러시아 제국주의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전략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주요 제국주의 강대국들이 “안보 파트너십”과 군사적 협력으로 표현되는 각자의 지역적 패권과 세계적 이해관계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러시아가 보기에 코소보 전쟁은 미국이 유일 초강대국으로 행동하며 “다극 세계”를 거스르고 자신의 이익을 관철하겠다는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러시아의 그런 확신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그후 중동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서 더 강해졌다.
체코·헝가리·폴란드의 나토 가입 후 나토 확장은 한 차례 더 진전됐다. 냉전 이후 2020년까지 14개국이 나토에 가입해 러시아의 옛 소련 시대 국경을 압박했다. 코소보 전쟁과 나토의 확장은 미국의 “확장을 통한 억제” 전략이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됐다는 것을 러시아에 보여 줬다.
대결과 전쟁으로 가는 길 2000~2022년
1990년대 초 푸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이자 개혁파 지도자 아나톨리 솝차크의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후 푸틴은 모스크바로 가서 코소보 전쟁 동안에 옐친 행정부에서 연방보안국FSB 국장, 국가안보회의 의장을 지냈다. 옐친은 1999년 8월 제2차 체첸 전쟁을 시작하면서 푸틴을 총리로 임명했다. 1999년 12월 옐친이 사임하자 푸틴은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2000년 3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푸틴은 러시아 국가가 중대한 갈림길에 선 시점에 집권했다. 1998년 아시아발 경제 위기가 엄습하자 러시아의 금융 붕괴로 러시아 경제 ‘회복’의 실상이 드러났다. 1998년 8월 러시아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 총액은 125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윤이 재투자되지 않고 러시아 밖으로 유출됐다. 월 이자 상환액이 세금 수입보다 40퍼센트 많았다. 러시아 국가의 분열은 더 깊어졌고 권력이 중앙에서 89개 지방으로 분산됐다. 지방 정부들은 광업과 금속 가공 산업뿐 아니라 천연자원과 광물 자원에도 상당한 통제력을 행사했다. 민영화와 국가 자산 공매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막강한 올리가르히 세력은 종종 국가와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1990년대의 위기는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89~1999년 러시아 국방 예산은 거의 7분의 1로 줄었다. 연구 개발 종사자는 1990년 190만 명에서 1999년 87만 2000명으로 감소했다. 1990~1997년 군수 공장과 장비에 대한 투자는 75퍼센트 이상 삭감됐다.
69 그런 가운데, 체첸 정세의 교착 상태는 1996년 러시아가 당한 굴욕을 계속해서 떠올리게 했다.
나토의 세르비아 전쟁은 재래식 전력의 엄청난 격차를 드러냈다. 정밀 유도 무기, 벙커버스터, 장거리 순항 미사일, “스텔스” 폭격기, 통신 시스템, 우주 정찰 등 나토의 무기 진용은 러시아군의 무기 체계 전체를 완전히 압도했다. 러시아 군사 분석가들은 이 차이를 좁히는 데 15~20년이 걸릴 것이라고 추산했다.70 푸틴은 체첸이 다게스탄자치공화국을 급습한지 이틀 뒤에 총리로 임명됐다. 그의 전임자 세르게이 스테파신은 다시 전쟁에 나서기를 주저했었다. 그러나 제1차 체첸 전쟁에서 치욕을 당한 후, 러시아 군부와 보안 기구 지도부는 나토가 코소보 전쟁에서 거둔 압승에 대응해 러시아의 군사력을 각인시키기 위해 체첸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로 결심했다. 푸틴이 총리로 지명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러시아는 대규모 공습을 개시했다. 1999년 10월 1일 푸틴은 지상전을 선포하고 대규모 무차별 공습과 맹렬한 포격을 퍼부어 체첸군을 산악 지역으로 쫓아냈다. 71
푸틴의 빠른 출세는 정보기관 연줄과 옐친 가문에 대한 충성 덕분이라는 설명이 흔하다. 이런 것들이 푸틴에게 도움이 된 것은 명백하지만, 설득력 있는 설명은 아니다. 푸틴은 FSB 국장과 국가안보보좌관으로서 코소보 전쟁 동안 미국 국무부 차관 스트로브 탤벗과 미국 국가안보회의를 상대로 협상을 했고, 나토의 성공을 가로막기 위해 추진했지만 무산된 코소보 분할 시도에 관여했다. 국내에서 푸틴은 “권력 위계 확립”이라며 국가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시작했다. 푸틴은 러시아 전체를 7개의 연방 행정구역으로 분할하고 그곳에 대통령 특사를 보내 지방 정부 운영자들의 권력을 통제했다. 2004년에는 주지사 직선제를 폐지하고 중앙 정부가 주지사를 임명하는 것으로 바꿨는데, 이와 함께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기업들]의 영향력은 줄고 산업 중심지와 자원이 풍부한 지방의 영향력이 커졌다. 석유·가스·광물 채굴 산업에 우선 순위가 부여됐다. 이 산업들은 러시아 수출 수익의 70퍼센트를 차지했고 러시아의 산업 “모노시티”(단일 부문이나 기업이 지배적인 도심지)의 안정에 매우 중요했다. 푸틴에게 이들 산업은 국가의 운명이 달린 산업이었다. 푸틴은 1996년에 쓴 천연자원 산업에 관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천연자원 산업 단지가 “군사력의 토대를 이루고 … 군산복합체 현대화의 필수 조건이며 … 필요한 전략적 비축과 역량을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고 결론내렸다.74 “규칙”을 지킨 자들은 재산을 지켰다. 그러지 않은 자들은 가차없이 재산을 빼앗겼다. 몇몇은 러시아에서 추방당했고, 러시아 최대 부호였던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는 탈세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2000년 7월, 푸틴은 러시아의 가장 부유한 올리가르히들을 만나, 기업주들이 국가 정책을 좌우하려는 시도를 멈춘다면 국가도 기업들과 “동등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라고 알렸다. 여기서도 세력 균형은 전략적 산업을 지배하는 자들에게로 기울었다. 1997년 10대 올리가르히 명단은 금융·은행·미디어 부문의 영향력이 컸다는 것을 보여 준다. 2000년대 초 10대 올리가르히는 거의 모두 금속 부문이나 채굴 부문에서 부를 얻었다. 2007년에 이르면 40대 올리가르히 중 모스크바 출신은 7명에 불과했다. 푸틴의 초점 이동은 세계적 유가 상승 속에서 이뤄졌다. 1998년 우랄산 원유는 배럴당 9달러에 팔렸다. 그런데 2002년에 그 가격은 두 배 이상 올랐다. 2008년 즈음 유가는 배럴당 138달러로 치솟았다. 국내총생산은 연평균 7퍼센트씩 성장했고 세수가 국고를 가득 채웠다. 실질 소득이 해마다 10퍼센트 이상 증가했고, 2000년에 30퍼센트였던 빈곤율이 2004년에 18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푸틴의 정책은 민간 자본의 이익을 공격하는 것이 전혀 아니었고, 신자유주의 정책에서 후퇴하는 것도 아니었다. 기업은 여전히 압도 다수가 민간 수중에 있었다. 국가는 가스프롬·로스네프트 같은 거대 석유·가스 기업의 대주주였지만, 그 기업들은 여전히 민간 기업처럼 활동했다. 2017년에 러시아의 10대 비금융 부문 다국적 기업 중에서 100퍼센트 국가 통제인 곳은 러시아 국영철도회사, 거대 해운사 소브콤플로트, 핵발전 기업 로사톰 3곳뿐이었다.78 러시아의 해외직접투자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에 있는] “과도적” 경제치고는 높아 보이지만 이는 “라운드 트리핑”에서 기인한 것이다. “라운드 트리핑”이란 조세 회피처로 돈을 빼돌린 다음 다시 국내에 투자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러시아의 해외직접투자가 가장 많이 이뤄지는 곳은 [조세 회피처인] 키프로스다. 79
그러나 1990년대의 위기에서 회복한 후에도 국제적 경쟁 체제 내에서 러시아가 가진 근본적 취약성은 그대로였다. 러시아 경제는 압도적으로 석유·가스·천연자원 수출에 의존했고, 러시아의 산업은 세계적 기술 수준을 따라잡고 경쟁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었다. 국제적 경쟁자들과 대등한 수준으로 경제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은 경제 정책이나 국가 개입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낡은 산업 인프라 때문에 수익성 있는 투자 기회가 많지 않았다. 1인당 해외직접투자FDI와 1인당 국내 투자는 보잘것없었고 압도적으로 채굴 산업에 집중돼 있었다. 식품과 통신 기술 부문에 어느 정도 유의미한 규모의 투자가 있었지만, 이는 모스크바에 집중돼 있었다.중국의 경제 성장과 비교해 보면 러시아의 딜레마를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중국은 산업화하고 자국 경제를 세계 시장에 개방했을 때 중요한 이점들이 있었다. 산업 기반이 고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중국은 산업 인프라의 노후화에 짓눌리지 않았다. 러시아 경제가 지지부진했던 반면, 중국은 연안에 새로운 자본 축적의 중심을 구축할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중국의 연안 지방은 제조업 상품 생산의 국제 허브가 됐다. 또, 중국에게는 막대한 예비 노동력이 있었지만 러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1978년 러시아와 중국의 농촌 인구 비율은 각각 31퍼센트, 82퍼센트였다. 2020년에 이 수치는 각각 25퍼센트, 38.5퍼센트가 됐다. 게다가 러시아 인구는 정체했지만 중국 인구는 50퍼센트 증가했다.
1993년 러시아와 중국의 GDP는 각각 4350억 달러, 4440억 달러로 비슷했다(당시 미국은 6조 8000억 달러였다). 2020년에 러시아의 GDP는 1조 5000억 달러에 조금 못 미쳤지만, 중국은 14조 7000억 달러로 그 열 배나 됐다. 2020년 중국의 해외직접투자는 1100억 달러에 이르렀지만, 러시아는 고작 60억 달러였다.
러시아 경제가 에너지 수출 호황의 도움으로 호전되면서 생활 수준이 향상되고, 체불 임금이 지급되고, 국가 재정이 확충되고, 군 개혁과 현대화가 가능해졌다. 푸틴의 “권력 계통화”는 국가 기구들의 통제력과 응집력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다. 그러는 동안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는 억압됐다. 푸틴 개인의 권위는 러시아 지배계급의 광범한 일부에 의해 강화됐다. 특히 사활적으로 중요한 에너지와 천연자원 부문에 기반을 둔 지배계급과 그 부문에 의존해 권세를 누리는 산업 경영자들과 지방·중앙 정부 고위 관료들의 거대한 네트워크가 푸틴의 권위를 뒷받침했다. 중앙아시아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패권, 국가, 자본 사이의 연관성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2008년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출발해 러시아를 우회하는 “남부 회랑” 가스관 건설을 제안했다. 그 목적은 카자흐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서 카스피해를 건너 유럽으로 이어지는 공급로를 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은 카스피해 건너편에 있었고, 그래서 카스피해를 끼고 있는 러시아와 이란이 합심하여 파이프라인 건설에 제동을 걸고 남부 회랑이 아제르바이잔 가스를 공급하는 데 그치게 할 수 있었다. 2019년에 남부 회랑을 거쳐 유럽으로 공급되는 천연가스는 100억 입방미터에 불과했다. 반면 러시아의 가스관으로는 약 1630억 입방미터가 공급됐다.
81 “억제를 위한 확전” 개념이 러시아의 군사 전략에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 개념의 논리는 상대의 우세한 재래식 군사력을 억지하기 위해 “전술” 핵무기를 동원하는 수준으로 전쟁을 키운다는 것이다.
푸틴은 러시아 군부의 지지도 확보했다. 처음에 푸틴은 코소보 전쟁 기간에 했던 구실을 통해 지지를 얻었고 가차없이 제2차 체첸 전쟁을 일으키는 데서도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군부의 지지를 받는 데서 더 중요했던 것은 나토의 코소보 전쟁이 일으킨 파장과 제1차 나토 확장 물결에 대한 푸틴의 대응이었다. 푸틴은 새 군사 교리를 도입하는 데 긴밀하게 관여했다. 코소보 전쟁 후인 2000년 초에 승인된 그 군사 교리는 러시아 군부 최고 지도자들의 전략적 사고를 반영했다. 서방을 핵심적 외부 위협으로 규정했고, 재래식 전력에 더해 핵 “억지력”과 핵무기 “선제 사용”을 러시아 안보의 핵심 축으로 강조했다.그러나 러시아의 에너지·천연자원 기반으로도 나토와의(그리고 중국과의) 엄청난 경제적·군사적 열세를 극복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러시아의 국민총생산은 미국의 약 3퍼센트였다. 러시아의 군비 지출은 미국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고 중국에도 한참 뒤처졌다. 이 때문에 러시아 국가는 지역적 헤게모니의 경계를 명확하게 그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크게 느꼈다. 그 결과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에 있는 국가들이 러시아의 최우선 관심사가 됐다. 러시아는 옛 소련 소속 국가들을 러시아 영향권에서 떼어내 서방·나토 쪽으로 당길 수 있는 일체의 “정권 교체” 시도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러시아, 나토, 유럽연합
나토 확장과 “봉쇄” 전략은 지정학적 결과뿐 아니라 경제적 결과도 낳았다. 러시아가 옛 소련 소속 국가들에 대한 패권을 재확인시키려 한 것은 단지 그 자체가 목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러시아는 제국주의 강대국으로서의 발전을 가로막는 경제적·군사적 제약에서 벗어나려 했던 것이다.
82 그러나 이런 야심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그런 동맹의 형성은 유럽이 나토에서 멀어지거나 결별하는 것을 뜻하지만, 미국과 유럽 모두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고, 러시아는 그런 사정을 바꿀 힘이 없었다는 것이다. 83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 러시아는 유럽과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고, 심지어 군사 동맹으로도 발전할 수도 있는 새로운 동맹 관계를 발전시키려 했다. 이것이 유럽을 미국에서 떼어내는 것을 목표로 한 ‘유라시아 프로젝트’다.1994년 노르망디 상륙 기념일에 미국 전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유럽·나토의 일부가 되는 것과, 유라시아 고유의 운명을 개척하고 세계 무대에서 미국과 어깨를 견주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것은 해결책을 선택할 여지가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정적 사실은, 러시아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의 일개 회원국으로 흡수되기에는 덩치가 너무 크고, 현재 너무 후진적이고, 잠재적으로는 너무 강력하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 공동체의 서구적 특성과 동맹 내 미국의 우위를 희석시킬 것이다.
따라서 나토의 확장은 러시아 접경지와 그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헤게모니를 잠재적으로 위협할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유럽과 진정한 경제적 제휴를 맺을 가능성을 차단하고 러시아를 천연자원 수출국의 처지에 머물게 한다. 이렇듯 러시아 봉쇄 전략에는 지정학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이 모두 있었다. 2004년 나토 확장 물결의 일부로서 러시아 서쪽의 발트해 연안국들이 나토에 가입하자 갈등은 확실히 고조됐다.
결정적 전환점은 2008년 조지 W 부시가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토가 캅카스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의 유라시아 충돌 지대로 세를 확장하게 될 터였다. 이미 2007년에 부시는 루마니아에 ‘이지스 어쇼어’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를 배치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최첨단 체계가 배치되면 미국은 위협적인 핵 선제 공격 능력을 갖게 된다. 나토는 이것이 이란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이란은 핵무기나 장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부시와 나토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담해진 조지아는 분리 독립을 선언한 남오세티야에 군대를 투입했다. 이에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군대에 대규모 지원을 제공하고 조지아에 군대를 투입해 조지아 정부에 치욕적인 패배를 안겼다.
85 동방파트너십은 개별 국가들과의 양자 협력 관계, 제휴 협정과 “심화·포괄적 자유무역지대”의 설립으로 강화됐다. 86
경쟁이 치열해졌다. 조지아 전쟁 1년 후, 유럽연합은 옛 소련 소속 국가 6곳(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벨라루스·조지아·몰도바·우크라이나)과 동방파트너십EaP을 수립했다. 유출된 통신 내용에 따르면 이 파트너십은 “동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맞서고”, “나토의 동쪽 경계 너머로 서방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기” 위한 것었다.사쿼가 지적하듯
동방파트너십은 뒷문으로 군사 동맹을 들여 왔다. 2009년에 발효된 리스본 조약[유럽연합의 헌법적 조약]은 유럽연합과 제휴 협정을 맺은 나라들이 안보 정책을 유럽연합과 공조해야 했다. 그런 점에서 동방파트너십과 제휴 협정들은 러시아와 나토 간 대립의 질적 전환에 해당했다. 이 협정들은 러시아 주변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지정학적 지배력과 러시아의 경제 발전 가능성을 제약하고 약화시켰다. 사쿼가 지적했듯, 유럽연합의 전진은 “미국·중국을 상대로 한 세계적인 지정학적 투쟁에서 유라시아 내에 확고한 러시아의 영향권을 구축한다는 … 푸틴의 야심”에 어깃장을 놓았다.동방파트너십은 더한층의 질적 변화로, 지정학적 경쟁의 명시적 요소를 관계에 포함시켰다. 게다가 높은 수준의 상호 교류로 동방파트너십 조인국들이 … 유라시아 통합 프로젝트에 참여할 가능성을 사실상 차단했다.
1990 ~2000년대에 걸쳐 러시아는 일련의 범유럽적·범유라시아적 상호 협정을 제안했다. 미국은 이 모든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나토 동맹의 사이를 틀어지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러시아는 그러한 의도를 거의 숨기지 않았다. 나토와 미국의 “단극” 지배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88 그러나 이 저술가들의 결론은 다른 외교적· 정치적 선택을 했다면 유럽에서 강대국들 간 충돌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사쿼, 서로티뿐 아니라 존 미어샤이머, 아나톨 리벤, 드미트리 트레닌 같은 “현실주의” 학파의 저술가들 다수는 옳게도, 나토의 끊임없는 확장과 그것이 러시아에 미칠 파장에 대한 간과, ‘레드 라인’이 그어질 필연성에 주목했다. 미국의 냉전기 “봉쇄” 정책을 설계한 외교관 조지 케넌은 나토의 확장을 두고 “치명적 오류”라고 비판하여 현실주의 학파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줬다.문제는 그런 대안이 모종의 “합리적 선택”을 하는 제국주의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경쟁 강대국들이 상대방의 이해관계 인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충돌을 타협으로 무사히 해소하거나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택을 달리할 운신의 폭이 있다고 해도 제국주의 간 경쟁은 구조적이고, 그런 경쟁은 경쟁하는 이해관계를 “현실주의적”으로 인식한다고 해서 간단히 제쳐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옛 소련 붕괴 직후부터 러시아가 신생 독립국들에 패권을 확인시키려 하고, 유럽연합과 나토가 세를 키운 것은 계속되는 제국주의 경쟁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89 러시아의 군비는 2010년 290억 달러에서 2015년 910억 달러로 늘어 그해 국내총생산의 5.4퍼센트를 기록했다. 2014년 이후 제재의 타격으로 군비 지출이 30퍼센트 줄었는데도 그 정도였다. 그러나 2016년 미국의 국방 예산은 5730억 달러, 중국은 1350억 달러였다. 오늘날 나토의 28개 회원국들의 군비 지출은 전 세계 연간 군비 지출 1조 7000억 달러의 약 7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2000년 이후 9년에 걸쳐 러시아의 국방 예산은 20퍼센트 늘었다. 러시아는 군비 지출을 늘리고 군 개혁과 현대화를 더한층 진척시키는 사업을 추진했고, 2008년 조지아 전쟁 이후 여기에 더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가 총 군비 지출에서 보인 한계는 시사적이다. 2019년에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산하 국가전략연구소는 러시아군의 취약성을 지금 시점에서 보면 꽤 정확하게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일련의 개혁으로 최초로 전선에 투입되는 부대들의 실전 능력과 효율성을 개선했지만, 예비군의 감축으로 종심이 얕고 병참 능력과 기술적 능력이 부족하며, 지역적 충돌이 벌어지는 경우에도 이런 약점을 고스란히 갖는다.다른 한편, 냉전 후 미국의 도취감과 오만을 보여 주는 “새로운 미국의 세기”라는 네오콘의 꿈은 이라크 전쟁 패배와 아프가니스탄 철수라는 악몽으로 귀결됐다. 그동안 중국은 세계적 경제 강국으로 부상해 세계 무역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장기적으로 쇠퇴했음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이 때문에 이제 미국은 자신의 세계적 군사력과, 나토 및 인도-태평양 지역에 구축한 동맹의 군사력을 각인시킬 의지를 더한층 굳혔다.
이것이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에서 전쟁이 분출한 맥락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참상을 낳는 가운데 지금 미국과 나토는 자신의 지역적·세계적 지배력을 확인시키는 데 우크라이나 전쟁을 노골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항전은 제국주의 간 전쟁에 종속되어 그 일부가 돼 버렸다. 우리는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잠재적으로 가장 위험한 새로운 제국주의 충돌의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
결론
2014년 마이단 시위는 당시 우크라이나의 야누코비치 정부, 러시아, 서방 모두에 뜻밖의 사건이었다. 정부의 잔혹한 대응과 부패한 우크라이나 엘리트들에 대한 대중의 경멸이 폭발적 항쟁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새 통치자들이 유럽연합과 나토에 의지하는 쪽으로 돌아서면서 우크라이나는 제국주의 경쟁에 의해 갈가리 찢겼다.
91 취약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지위는 불확실한 상태로 남았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의 영향권에 더 가까이 다가갔고, 남아 있던 러시아와의 끈은 더 느슨해졌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가망은 없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경제적·군사적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나토와 합동 훈련을 했고, 병력과 장비를 나토의 기준에 맞추고 군사 체계를 나토와 호환되게 했다. 92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해 우크라이나가 서방 쪽으로 더 기울지 못하게 견제구를 날렸다. 2014년 이후 체결된 민스크 협정으로 갈등은 일시 중지됐다. 러시아의 목표는 우크라이나 동부의 분리·독립 지역에 있는 자신의 하수인들을 우크라이나 헌정 질서에 다시 통합시켜 그 안에서 친러시아적 거부권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그러한 재통합이 이뤄지기 전에 동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지배력을 단호하게 확립하려 했다. 진정한 쟁점은 우크라이나가 나토·유럽연합 쪽으로 기우느냐 아니면 러시아 쪽으로 기우느냐는 것이었다. 민스크 협정에 담긴 모순은 결국 [분리 독립 지역의 지위에 관한] 헌법 개정을 합의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2021년 12월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윌리엄 번즈는 모스크바에서 푸틴을 만났다.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번스는 푸틴과 만난 후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의 답변은 시사적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푸틴은 우크라이나에 영향을 미칠 여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보는 듯했다. 푸틴이 생각하기에 우크라이나를 고분고분하게 만들지 않으면 러시아가 주요 강대국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는 패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푸틴의 지독한 대러시아 국수주의, 무자비한 반대파 탄압, 러시아의 애국주의 분위기, 이 모든 것이 전쟁열과 침공의 잔혹함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한 개인이 추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차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러시아인들의 권위주의적 특성 탓도 아니다. 러시아와 나토 모두 서로와 직접 충돌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직접 충돌했다가는 그들도 피하고 싶어하는 엄청난 파괴의 위험을 무릅써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전은 제국주의 간 전쟁을 본질로 하는 더 큰 전쟁의 종속적 일부가 됐다. 나토의 무기 지원에 대한 정치적 대가는, 분쟁이 종료되면서 이뤄질 영토 협상을 우크라이나가 아닌 미국·러시아·독일·프랑스가 결정할 것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나토의 이해관계는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 전략적이고 장기적인 패배를 안기는 데에 있다. 미국은 이를 통해 다른 나라들, 특히 중국에 경고를 보내려 한다. 크림반도는 물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미국이 넘을 공산이 크지 않은 ‘레드 라인’을 넘어 더 큰 충돌의 위험을 무릅쓰는 일일 것이다. 러시아는 전략적 참패를 면하려고 충돌을 키울 공산이 크고 그러면서 전술 핵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른다. 유럽 강대국들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는 충돌의 규모와 전쟁의 경제적 파장을 제한하기 위한 합의점을 모색하고 있다. 한편, 영국의 지지를 받는 폴란드와 발트3국은 러시아를 완전히 패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두 가지는 명백하다. 첫째, 어떤 해결책이든 우크라이나가 아니라 서로 경쟁하는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둘째, 어떠한 일시적 해결책이든 말 그대로 일시적일 것이다. 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제국주의 간 전쟁이고 그래서 양 진영 모두 철수하거나 패배를 감수할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우리는 세계적 제국주의 강대국들 간 갈등이 격화하고 예측 불가능해지고 위험해지는 새로운 제국주의 경쟁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런 위기의 해결책은 제국주의 전쟁과 자국 지배자들에 맞선 반전운동과 계급적 운동에 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우크라이나를 쟁취하는 데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 힘도 오로지 거기에 있다. 장애물과 난관이 많다. 그럼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국제 좌파가 그 과제에 전력 투신하는 것이 사활적이고 시급하다.
1980년대 말 이래 러시아와 신생 독립국들에서 대중 운동들이 분출했다. 위기와 지배계급의 부패에 대한 분노가 그 저항을 더 격화시켰다. 그런데 현지 지배계급 내 집단들이 그 운동을 이용해 인민의 이름으로 경쟁자들을 제거하려 드는 가운데 제국주의 진영들의 경쟁이 그 운동들을 자기 진영으로 이끈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지난 2년 동안 벨라루스·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에서 항쟁이 벌어졌다. 제국주의와 지배계급이 궁극적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운동들이다. 이 운동들이 제국주의 경쟁과 현지 지배자들에게서 독립적으로 발전한다면, 자신의 이익에 따라 정권을 무너뜨릴 힘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런 항쟁은 전쟁의 참상에 맞서는 새로운 세력의 부상으로 고무받을 수 있고, 이런 일은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중심부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국제 좌파의 임무는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우리 지배자들에 맞선 저항을 건설하고, 그 중심에서 러시아의 침공과 나토, 그리고 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가는 체제에 맞서는 국제주의적 반전 운동을 건설해서 그런 저항의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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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롭 퍼거슨은 전쟁 반대 활동가이자 인종차별 반대 활동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 전쟁저지연합 운영위원이다. 퍼거슨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를 비롯한 여러 간행물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관한 글을 써 왔다. 퍼거슨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캠페인에 참가하고 있으며 《유대인 적대: 극우, 시오니즘, 좌파》(Bookmarks, 2018)를 저술했다.
출처: ‘Imperialism, war and the Eurasian faultline’, International Socialism Issue 175.
↩
- 전쟁의 서로 다른 국면들에 대한 분석은 주간지 Socialist Worker 아카이브를 보라 -https://socialistworker.co.uk/tag/ukraine. 우크라이나에 대한 본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이전 글들은 Choonara, 2022와 Ferguson, 2014를 보라. 또한 Tengely-Evans, 2022도 보라. ↩
- Gramer, Detsch and Mackinnon, 2022; Foy, 2022; Bugos, 2022; Roberts, 2022. ↩
- Foy, 2022. ↩
- Henley and Borger, 2022. ↩
- Seligman, 2033; Sevastopulo, Inagaki and Hille, 2022; White House Briefing Room, 2022; Kissinger, 2022; McTague, 2022. ↩
- Congressional Research Service, 2022; Kotkin, 2022; Schuman, 2022; Brands, 2022; Kissinger, 2022; McTague, 2022. ↩
- Economist, 2022. ↩
- Choonara, 2022; Callinicos, 2022; Achcar, 2022a; Achcar and Callinicos, 2022; Kouvelakis, 2022를 보라. 스타시스 쿠벨라키스에 대한 아슈카르의 응답, Achcar 2022b도 보라. 나토를 지지하는 논문은 Mason, 2022를 보라. 나토의 팽창을 러시아 침공의 주요 요인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두 시각은 Artiukh, 2022와 Bilous, 2022를 보라. ↩
- Stop the War Coaliation, 2022; German, 2022. ↩
- International Socialist Tendency, 2022. ↩
- Cliff, 1996. ↩
- Cliff, 1950. ↩
- Choonara, 2022. 더 풍부하고 자세한 설명은 Callinicos, 2009와 Harman, 2003을 보라. ↩
- 이런 식의 주장에 대해서는 Yurchenko, 2022; Achcar and Callinicos에서 Achcar가 제시한 의견, 2022; Achcar, 2022b; Budraitskis, 2022; Artiukh, 2022; Bilous, 2022를 보라. ↩
- 레닌은 독일과 영국 사이의 경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 상황의 특징은 이 전쟁에서 식민지의 운명이 유럽 대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 Lenin, 1915. ↩
- Harvey, 2003, p123; Ashman and Callinicos, 2006. ↩
- Callinicos, 2002 and 2009 ↩
- Reddaway and Glinski, 2001, p231에서 인용. 당시 옐친은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수반이었는데, 이 공화국은 1993년 새 헌법을 통해 러시아 연방으로 재편성된다. ↩
- Lieven, 2001. ↩
- Lunze, Yurasova and others, 2015. ↩
- Brainerd, 2021. ↩
- Reddaway and Glinski, 2001, p2; Cohen, 2000, pp28-30. 상이한 학파에서 나온 두 연구 모두 “충격 요법” 처방과 그 파괴적 효과를 냉철하게 파헤친다. ↩
- Harman and Zebrowski, 1988을 보라. 국가자본주의 경제의 위기에 대해서는 Harman, 1990 and 2003을 보라. ↩
- Barnes, 2006을 보라. ↩
- Cohen, 2000, pp72-73. ↩
- Harman, 1991. ↩
- Callinicos, 1991. ↩
- Stalin, 1931. ↩
- Fukuyama, 1992. ↩
- Hill and Jewett, 1994. ↩
- Cohen, 2000, p100. 먼로 독트린은 아메리카 대륙의 정치에 대한 외국의 모든 간섭을 미국에 대한 잠재적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
- Curtis, 1996. ↩
- United States Energy Information Administration, 2022. ↩
- https://tradingeconomics.com/russia/exports의 수치를 보라. ↩
- Crouch, 1995. ↩
- Sarotte, 2021, p233. ↩
- Ferguson, 2000. ↩
- Ferguson, 2000. ↩
- 2014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충돌에 뿌리를 둔 우크라이나 사회의 분열에 대한 설명은 Ferguson, 2014를 보라. ↩
- Garnett, 1997. ↩
- Hill and Jewett, 1994, p66. ↩
- Hill and Jewett, 1994, p71. ↩
- Hill and Jewett, 1994, pp77-78. ↩
- Perlez, 1993. ↩
- Hill and Jewett, 1994, p79. ↩
- Erlanger, 1995. ↩
- Sherr, 2010. ↩
- Balmforth, 2010 ↩
- Hill and Jewett, 1994, p66. ↩
- Sarotte, 2021, pp43-75. ↩
- Sarotte, 2021, p1. ↩
- Sarotte, 2021, pp43-75. ↩
- Sarotte, 2021, p165. ↩
- Sakwa, 2017, p17; Cohen, 2000, p104; Sherr, 2003, p112. ↩
- Tuohy, 1993. ↩
- Sherr, 2003, pp113-117. ↩
- Sarotte, 2021, p187. ↩
- Sarotte, 2021. ↩
- Sarotte, 2021, p152. ↩
- Sarotte, 2021, pp206-207; Sakwa, 2017, p79. ↩
- Treisman, 1996. 체첸에서의 휴전과 러시아군 철군도 옐친의 득표에 도움이 됐다. ↩
- Sarotte, 2021, p75를 보라. 나토의 창립 근거가 되는 북대서양조약 5조는 나토가 어떤 회원국에 대한 공격도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
- Sakwa, 2017, pp161-185. ↩
- Callinicos, 2002. ↩
- Arbatov, 2000. ↩
- Haynes, 1999. ↩
- Haynes, 2005; Wood, 2018, pp21-23; Diesen, 2018, pp592-593. ↩
- Schwartz, 2019, p189. ↩
- Blank, 2019를 보라. 러시아의 첫 “스텔스” 항공기 수호이 SU-57은 2020년 12월에야 취역했다. ↩
- Norris, 2014; Seelye, 1999. ↩
- BBC News, 2000. ↩
- Wood, 2018, p23. ↩
- Balzer, 2006의 푸틴의 박사 학위 논문 번역을 보라. ↩
- Wood, 2018, p22. ↩
- Wood, 2018, p23; Diesen, 2018, pp592-593. ↩
- Wood, 2018, p14. ↩
-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2019. ↩
-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2003. ↩
- United Nations Conference on Trade and Development, 2020. ↩
- European Commission, 2020. ↩
- Sinovets and Renz, 2015. ↩
- Karaganov, 2018. ↩
- Trenin, 2016, pp1-20. ↩
- Brzezinski, 1994. ↩
- Sakwa, 2017, p140. ↩
- 제휴 협정은 유럽연합과 제3국 간의 양자 협정이다. ↩
- Sakwa, 2017, p140. ↩
- Kennan, 1997. ↩
- Blank, 2019, p267. ↩
- Gouré, 2019. ↩
- Allan, 2020. ↩
- Wezeman and Kuimova, 2018, p5. ↩
- Burns, 2022. ↩
- 이 같은 합의는 2022년 6월 1일 《포린 어페어스》와의 생방송 대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앤터니 블링컨이 한 답변에도 암시돼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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