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진보사상 조류
《더 레프트 1848~2000》의 중도 걷기 *
이 글은 Geoff Eley, Forging Democracy: The History of the Left in Europe, 1850-2000 (Oxford University Press), 2002[국역: 제프 일리,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 뿌리와 이파리, 2008]에 대한 서평이다. 콜린 바커는 1960년대 초 국제사회주의자들IS(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에 가입해 중앙집행위원과 전국위원으로 활동했고,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편집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1967~2002년에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에서 사회학을 가르쳤고, Festival of the Oppressed: solidarity, reform and revolution in Poland, 1980-81과 Leadership and social movements 등 많은 책을 쓰거나 편집했는데, 그가 쓴 많은 글을 웹사이트(http://sites.google.com/site/colinbarkersite)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 을 마르크스주의적으로 이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 뒤 일리는 꾸준히 독일사, 노동계급, 대중문화, 크리스토퍼 힐이나 에드워드 톰슨 같은 저명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글 등을 다룬 논문과 책을 썼다. 그래서 나는 꽤 큰 기대를 품고 지난 1백50여 년의 민주주의 발전과 유럽 좌파라는 서로 밀접한 주제를 다룬, 6백98쪽이나 되는 일리의 책을 펼쳤다.
제프 일리는 데이비드 블랙번과 함께 1985년 《독일 역사의 특수성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을 썼다. 이 책은 19세기 독일 역사뿐 아니라 ‘부르주아 혁명들’일리의 말로는 이 책을 쓰는 데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일리는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좌파가 큰 변화를 맞이했고 사회주의자들이 버텨내기 유난히 힘든 때이던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책을 썼다. 그 시절의 커다란 사건들(이탈리아의 피아트사 노동자들과 영국의 광산 노동자들 같은 핵심 노동자 부문이 겪은 심각한 패배, 1980년대 평화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의회 안팎 좌파 운동의 등장과 쇠퇴, ‘신사회운동’의 부각, 동유럽과 옛 소련 ‘사회주의’의 몰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과 특히 블레어가 이끄는 신노동당의 신자유주의로의 투항 등)은 사회주의자들을 낙담하게 만들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십상이었다. 이 시절을 사회주의자들이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분명 자신들의 운동 역사에 대한 이해에도 투영됐다. 일리도 인정하듯, 일리가 연구하고 글을 쓴 그 시절은 일리 자신에게 영향을 주었다. 당시 형성된 일리의 관점이 그의 역사 서술을 빚어냈다.
따라서 이 야심만만한 책에 대한 진지한 서평이라면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더 레프트 1848~2000》를 내가 비판한다면 그것은 대부분 일리가 서술한 ‘사실’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일리가 이끌어 내는 패턴과 교훈, 그리고 일리가 강조한 쟁점뿐 아니라 무시한 쟁점도 겨냥하는 것이다.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둘러싸고 일리의 관점과 이 저널[《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표방하는 관점은 크게 다르다.
주제들
일리의 책에는 몇 가지 주제들이 거듭 등장한다. 그 중 첫 주제와 관련해서는 일리의 주장에 공감할 부분이 많다. 1860~2000년을 두고 일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또는 적어도 내가 유럽 근대사의 위대한 헌법 제정 국면들이라고 부르는 몇몇 집중적인 변화의 시기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다.
한 가지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자. 민주주의는 ‘누가 주거나 저절로 생겨난’ 것도, ‘허락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갈등, 즉 권위에 용감하게 도전하는 일과 위험을 무릅쓰는 무모한 본보기적 행동, 윤리적 증언, 폭력적 대결, 특정 사회·정치 질서가 무너져 내리는 전반적 위기가 필요하다. 유럽에서 민주주의는 자연적 진화나 경제적 번영의 산물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분명 개인주의나 시장의 필연적 부산물로 등장하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발달한 것은 인민 대중이 집단으로 조직해서 민주주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덧붙여 말하면, 유럽의 민주주의는 비교적 근래에 발전한 제도로서 그동안 여러 차례 도전받았으며 그만큼 견고하지 못한 미완의 제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주요 정치 위기를 계기로 민주주의가 전진하기도 했지만 때때로 유럽의 민주주의 투쟁은 심각한 패배를 겪기도 했다. 양차 대전 사이에 벌어진 무솔리니·히틀러·프랑코의 승리, 1945년 이후 동유럽에서 일어난 스탈린 체제의 확장, 그리스의 군사 쿠데타가 단적인 사례다.
일리는 “초국가적인 헌법 제정”이라고 할 만한 계기가 유럽 역사에 다섯 번 있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계기는 그 다음 수십 년의 가능성과 한계를 결정지었다. 첫 번째 계기는 1789~1815년인데, 일리의 책에서는 다루지 않는다. 나머지 네 번의 계기는 각각 1869~71년, 1914~23년, 1943~49년, 1989~92년이다. 그러나 일리는 이 리스트를 너무 고집하지는 않는다. 가령 “1968년의 정치적 분출”을 논하고자 따로 지면을 할애하기도 한다. 어쨌든 역사에서 두 종류의 시기가 번갈아 나타난다는 그의 기본 논지는 확실히 올바르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시기에는 근본적 변화의 조짐이 전혀 없고 정치는 “[현상] 유지와 관례의 기관”이 된 듯한 반면, 다른 시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세상사가 산산조각난다. 특정 방식은 이제 더는 설득력이 없다. 현재는 지배력을 상실한다. 지평선이 이동하고 역사의 흐름이 빨라진다. 다른 방식의 단편과 윤곽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의심과 주저를 떨쳐내고 두려움을 털어버린다. 간혹 있는 일이기는 하나 보통 광범한 사회적 위기가 한창인 가운데 외견상 요지부동인 정상적인 정치 생활의 구조들이 흔들리게 된다. 느릿느릿 전개되는 습관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가 무너진다. 더욱 드문 일이기는 하나 집단적인 힘이 물질화되고, 때로는 폭발적으로 진행되어 폭력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면, 한 나라나 도시 정치의 공식적인 제도적 세계와 사적이고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수많은 세속적 세계가 다같이 움직인다. 이 세계들은 같은 시간을 점유한다. 현재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례적인 가능성과 희망의 시간이 펼쳐진다. 새로운 지평선이 희미하게 빛난다. 역사라는 연속체가 산산조각난다.
속도와 가능성에서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와 방식을 여기서 더 논의할 필요는 없겠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비약적인 사태 전개, 정치·사회적 위기, 예상치 못한 변화는 역사에서 으레 나타나며, 이런 상황은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과거·현재·미래에 대응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5 이 때문에 이론적·전략적으로 취약해졌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몇 가지 문제를 낳는다. 일리의 주장대로라면, 유럽 좌파는 초기 세대가 “여성 문제”라고 이름 붙인 쟁점에서 한결같이 오류를 범했고 그 결과 ‘계급’이라는 용어 자체가 “남성적” 범주로 이해됐다. 이 때문에 현실에서 민주적 진보에 대한 좌파의 인식과 이를 위한 투쟁은 대개 취약해졌다고 한다. 일리는 더 나아가 “노동계급 중심성”은 현대의 사회·경제 사상에서 “해체됐다”고 주장하면서, 과거에 여러 번 사회주의 정치에서 특권적 우위를 차지한 노동계급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면 어떨지 묻기까지 한다. 이 대목에서 일리는 “‘계급 중심’ 정치에 대한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서 영감을 얻는다. 6
이밖에 《더 레프트 1848~2000》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주제들에 관해서는 일리의 주장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먼저 젠더와 계급이라는 주제를 살펴보자. 일리는 좌파 정치가 주로 “남성 산업 노동자의 전통적 이미지”에 집중됐고,논쟁적 주제 가운데 두 번째는 ‘좌파’나 ‘사회주의’ 같은 중요한 용어의 의미와, 그것이 포함하고 배제하는 대상에 관한 것이다. 사실, 《더 레프트 1848~2000》가 다루는 기간에 유럽에서 이 주제는 상당한 논쟁거리였는데, 그러한 논쟁에서 저자 자신이 취하는 태도가 그의 역사 서술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분명히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으로 또 하나 논쟁적인 주제가 있다. 좌파가 분열하고 격렬하게 논쟁한 여러 번의 위기를 논할 때 일리는 대립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본능적으로 중도를 택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연히 레닌주의 전통에 대한 일리의 설명은 대체로 우호적이지 않고, 마르크스주의 정치 일반을 설명한 것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이 서평의 구성은 책 전체를 네 부분으로 나눈 일리의 구성을 따를 것이다.
1860년~1914년
1860년대는 유럽의 좌파와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유용한 출발점 구실을 한다. 그 10년 동안 세계 곳곳의 국가들이 재편됐고, 그 영향은 다음 세기까지 갔다. 러시아의 차르 체제가 ‘위로부터’ 농노제를 폐지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이 위로부터 통일됐다. 캐나다는 연방헌법이 제정됐고, 미국은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해 노예제가 폐지됐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시작했다. 영국 의회가 제2차 선거법 개정안과 교육 법안을 통과시켜 일부 남성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허용하고 공교육 제도를 도입했다. 20세기 제국주의 간의 갈등에서 열강 구실을 할 주요 국가들은 모두 1860년대와 1870년대에 중요한 정치 변화를 겪었다.
일리가 언급하듯이, 통일되고 비교적 덜 권위주의적인 국민국가의 형성이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필수적 예비 단계였다. 근대 사회주의 운동이 등장한 것도 바로 19세기 말, 거대 국민국가들로 이루어진 새로운 유럽에서였다. 산업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국가 체제가 발전하자 대중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의 내용도 발전했다.
민주주의는 점차 그리고 불균등하게 두 가지 새로운 요구, 즉 자본주의에 대한 경제적 분석과 사회의 전반적인 재편을 위한 정치 강령과 결합되게 됐다. 이런 새로운 사상은 사회경제적 변화의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상의 변화는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분명 이런 물질적인 원천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이런 변화는 익숙한 세계가 붕괴하는 사태를 이해하고자 정치사상가들과 셀 수 없이 많은 보통 사람들이 진지하게 노력한 결과였다. 사람들이 집단적 소유와 협동적 생산의 가능성을 탐구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정치적 재고의 결합 속에서 갖가지 사회주의 사상이 생겨났다.
8 이런 맥락에서 사유재산 자체가 각종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겨지게 됐다.
이 과정에서 ‘사회’라는 접두어와 ‘민주주의’가 결합돼, 다른 정치와 뚜렷이 구별되는 노동계급 정치의 명칭이 됐다. ‘사회민주주의’는 신흥 자본주의와 명백히 대비되는 새로운 사회 형태를 의미했다. 즉, “사회민주주의는 ‘개인들의 경쟁’에 바탕을 두는 사회가 아니라 ‘상호 협력하는 사회라는 사상’을 뜻했다.”두 가지 서로 밀접한 질문이 자연스레 제기됐다. 첫째, 사회민주주의의 비전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둘째, 사회민주주의의 비전은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첫 질문의 답으로 유럽 각국에서 널리 채택된 방안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창립이었다. 일리는 이 정당들이 구래의 조직들을 대체했다고 한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한편으로 특히 지역사회 노동단체와 클럽들을, 다른 한편으로 “블랑키주의”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 정당이 성공한 곳에서는 새로운 비전을 중심으로 기존 노동자 단체들을 흡수했다. 그 비전은 노동자들이 투표권을 얻기만 한다면 사회민주당이 의회 내 다수파가 돼서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신생 사회주의 정당들은 이처럼 노동계급의 정치적 에너지를 의회 정치에 집중시킨 광범한 민주적 비전의 구현체였다.
21세기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런 프로젝트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열정을 고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의회 정치로 한정해서 생각하지만, 의회를 통해 자본주의를 전복할 수 있다고 아직까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진정한 ‘의회 사회주의자’는 극소수다. 이 점에서 토니 벤 같은 사람은 유별난 편이다. 그러나 1914년 이전에는 그런 사상이 실제로 널리 지지를 얻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세기에는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남성 노동자들도 아직 선거권이 없었다. 지배계급이 선거권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선거권을 얻어 내는 것이야말로 지배계급에 도전하면서 사회를 변혁하는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일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성장을 대체로 “노동자들의 전진”으로 해석한다. 그가 “전국 수준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고 의회에 대표자를 보내기 위한 운동을 공공연하게 펼치고, 집회나 결의, 합의된 의사 진행 절차, 선출된 위원회 등 내부 민주주의에 따라 당의 문제들을 처리하는 사회주의 대중정당 모델”을 긍정적으로 소개한 것은 분명 옳다. 사회주의 대중정당 모델은 “19세기의 마지막 40년 동안 이룬 결정적인 민주주의 성과”이고 “중대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일리의 서술에는 묘한 공백이 있는데, 사회민주당의 발전이 노동조합 운동이나 작업장 투쟁과 어떠한 관계였는지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1914년 이전에는 유럽 전체에서 노동조합 가입률과 활동 수준이 괄목할 만하게 증가했다(이는 부분적으로 옛 ‘노동단체’들이 노동조합에 흡수된 덕분이기도 했다). 전국적인 노동조합 기구와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함께 성장하면서 서로 발전을 촉진했다(그러나 발전의 양상은 나라마다 달라서, 가령 영국에서는 노동조합이 노동당을 창설하다시피 했지만 독일에서는 그 반대였다). 그런데도 일리는 좌파와 민주주의의 관계를 집중 조명한다는 책에서 노동조합 운동에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본주의 작업장 내의 권위에 맞서는 투쟁, 달리 말하면 작업장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둘러싼 복잡한 이론적·실천적 쟁점들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는 사용자들, 인종 차별적이고 여성 차별적이며 모멸감을 주는 관리자들, 노동자들에게서 잉여가치를 더 많이 쥐어짜려고 도입된 ‘과학적’ 경영 기법 등은 임금 문제만큼이나 노동조합의 매력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요인들이었다. 작업장 안팎에서 자본가들의 힘에 맞서는 투쟁은 특히 좌파에게 선거권 문제만큼이나 중요한 민주주의 쟁점들을 제기했다. 분명 노동조합 관료가 성장하고 관료들이 의제를 점차 독점하면서 이런 문제들은 흔히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는 했다. 그러나 작업장 민주주의 문제는 그 뒤에도 빈번하게 거듭거듭 등장했는데, 특히 현장조합원들과 노조 관료들 사이의 주기적인 갈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리가 이 문제들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말은 아니다. 일리는 노동조합이 대중적 기반 덕분에 전국적으로 중요한 세력이 됐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1914년 직전까지 파업 건수가 늘었다는 통계를 제시하기도 한다. 일리는 비록 전체적 서술에서 중요하게 다루지는 않지만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이 노동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그리고 임금과 시민권을 떼려야 뗄 수 없게 연결했다고 말한다. 또, 노동운동에서 비대한 상층 관료 기구의 중앙집중제가 초래한 폐해뿐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기층의 전투성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다는 점도 지적한다. 또한 일리는 “내부 민주주의의 요구와 기층의 전투성을 중앙집중제 찬성론과 조화시켜야 한다는 딜레마는 … 장차 엄청난 내부 갈등의 원인이 된다”고 말한다. 그의 지적대로 그러한 움직임들은 장차 “사회주의에 대한 경쟁적인 비전들”을 뒷받침하게 된다.
일리가 주장하려는 바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노조가 공고해지는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유실됐다는 것이다. 특히, 19세기 초에 생시몽·푸리에·오언·카베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남긴 가치 있는 유산들이 상실됐다는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실천에서는 비정치적이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공동체 만들기 실험으로 후퇴했다. 이들은 사회 변혁을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낼 것이냐 하는 문제에는 침묵하기 일쑤였고, 계급 불평등의 구조적 기원이나 정치경제학에 무관심한 경향이 있었다. 1860년대 이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러한 경향을 명백히 거부했다. 그러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유산에는 다른 측면도 있었다. 그 하나는 자치에 대한 비전을 바탕으로 생산자 협동조합과 “사회적 직장[작업장]”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에 공상적 사회주의의 이러한 유산은 “유실된” 것이 아니라 훗날 훨씬 더 크고 달라진 모습으로 역사의 무대에 복귀했다. 실험적 공동체가 아니라 노동자 평의회나 소비에트의 형태로, 즉 20세기 혁명적 노동자 운동의 레퍼토리로 부활한 것이다.
11 이때 이상적인 가족 모델은 노동자인 남편이 아침마다 가족을 부양할 임금을 벌기 위해 출근하고 집에 남은 아내가 가사와 양육을 담당한다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고숙련 고임금 노동자를 제외하면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이것은 꿈일 뿐이었다. 노동계급 여성들은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생계를 위해 밖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계급의 삶에 가해지는 압력에 대한 이 같은 적응 패턴은 여성의 ‘전통적인’ 남성 의존을 리메이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일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러나 일리가 특히 아쉬워하는 것은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급진적 젠더 정치”가 실종한 것이다. 결혼, 가족, 가부장적 남녀관계, 양성 간 상호 이해와 평등 부재를 비판한 젠더 정치 말이다. 19세기 후반에는 두 가지 상황이 전개됐다. 노동계급 조직들은 임금노동 관계라는 틀을 받아들이고 그 틀 안에서 단체협상 등의 조직적 활동을 벌이는(홉스봄의 표현을 빌리면 시장이라는 게임의 법칙을 터득하는) 한편, 이러한 현실에 부합하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 생활을 구축하려 했다.그 과정에서 양성 평등에 대한 헌신은 사라져버렸다. 가부장적 가족이 아닌 대안과 성적 자유의 비전은 노동운동의 비주류 주변부로 밀려났다. 여성은 이제 더는 독자적인 페미니즘 강령으로 표현되지 않고 어머니나 잠재적 노동자로 취급됐다. 양성 평등에 대한 초기의 믿음(독일 사회민주당의 클라라 체트킨의 표현을 빌리면 “현재 여성들의 사소한 관심사”)은 계급투쟁으로 흡수됐다. 엘리너 마르크스도 1892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여성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로서 조직할 것입니다. … 우리에게는 노동계급 운동 말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이 과정에서 그들은 남성 육체 노동자 중심의 노동계급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곧,
일리는 “노동계급 급진주의자들은 공동체를 방어하는 여러 전략 가운데 특정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가정에 헌신하기라는 지속적인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을 미쳤고, 실질적 시민권을 남성에게만 국한시켰다”고 설명한다.산업화하고 있던 유럽 곳곳에서 노동하지 않는 아내가 관리하는 가정이라는 이상은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여성의 소득 능력이 노동자 가족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을 테지만, 여성의 이러한 생활력은 사실상 또 공공연하게 평가절하됐다. 그리하여 노동계급의 집단적 이상을 구축하는 과정 — 산업화라는 혼란스러운 사실들을 정치의 기초로 구축하는 과정 — 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삶의 일부 측면만을 받아들이고 다른 것들은 무시해 버렸다. 계급 정체성의 중심에서 일부 노동계급의 경험은 소중하게 다뤄진 반면 다른 경험들은 무시되거나 삭제됐다. … 노동운동은 진정으로 포용적이고 성별을 따지지 않는 노동계급 정치 세력화를 이루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바로 그 차별의 체계들을 제도화했다. 노동운동은 한편으로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와 권위, 집단적 힘에 호소하면서도 실제로는 훨씬 더 협소하고 배타적이었다.
1914년 이전의 유럽에서는 숙련 직종의 노동조합원들이든 비숙련 미조직 노동자들이든 ‘진정한’ 노동계급을 대표하지 않았다. 좌파에게 필요한 것은 둘[조직된 숙련 노동자들과 조직되지 않은 비숙련 노동자들] 다를 위한 정치를 고안하는 것, 그리고
사회적 강탈이 벌어지는 [이] 두 전선에서 조직하는 것이다. 한쪽 전선에는 남성 노동자들의 길고 피곤한 출근길, 진을 빼는 노동, 산업재해와 질병, 실업 기간의 암울한 경험이 있고 다른 쪽 전선에는 노동자들의 아내들이 자기 직장에서, 동네 시장에서, 집주인과 자선단체와 국가 기관을 상대하면서 겪는 삶이 있다. ‘노동운동’은 대개 넌지시 전자만을 자신의 영역으로 여겼다.
결국 일리는 젠더와 관련한 공상적 사회주의의 유산은 새로운 페미니즘 운동이 탄생한 1960년대가 돼서야 온전히 복원됐다고 한다. 일리의 서술에 일말의 진실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고하게 남성적인 ‘계급 정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성 문제’가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고 무시당했다는 그의 이야기는 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다. 일리는 사회주의 자체가(그 목적과 수단 모두) 마치 남성의 전유물로 전락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일리의 서술에는 두 가지가 빠져 있다. 첫째, 일리는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이 짧은 책은 좌파들 사이에서 비교적 꾸준히 읽혔고, 근대 노동계급 가정이 ‘부르주아적’ 남편과 ‘프롤레타리아적’ 아내로 분열돼 있다는 신랄한 표현을 담고 있었으며, 물질적 의존이 아니라 오로지 상대방에 대한 애정만을 바탕으로 하는 양성 관계의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그래도 일리는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가 사회주의 운동 진영에서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을 살짝 언급하기는 한다. 둘째, 클라라 체트킨과 엘리너 마르크스에 대한 일리의 간접적 비판은 ‘좌파’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여러 목소리들이 경쟁하는 장이었음을 은폐하는 효과를 낸다. ‘부르주아적 페미니즘’과 ‘사회주의적 페미니즘’ 사이에는 항상 실천적·이론적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젠더 문제에 관한 일리의 서술은 이처럼 일면적이지만, 일리 자신이 그와 상반되는 일부 사례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책 서두에서 일리는 1895년에 제임스 설리번과 “자유연애” 결합의 형식으로 살겠다고 선언한 사회민주주의연맹SDF 배터시 지부 회원 이디스 랜체스터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디스와 제임스는 결혼이 여성의 독립성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에 원칙적으로 반대했다. 이디스의 아버지와 오라비들이 나서서 조지 필딩 블랜드퍼드 박사가 서명한 정신착란 확인서를 가지고 이디스를 강제로 사설 정신병원에 감금했다. 그러자 이디스 랜체스터를 옹호하는 운동이 조직됐고, 이 덕분에 그녀에게 인신보호영장이 발부됐다. 정신이상 판정 감독관 두 명은 랜체스터가 “잘못된 길에 빠졌을 뿐 정신이상은 아니다”라며 결국 그녀를 퇴원시키라고 명령했다.
16 어쩌면 블래치퍼드의 관점은 일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게 좌파들 사이에서 공유됐을지 모른다.
당시 좌파는 ‘랜체스터 사건’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랜체스터가 소속돼 있던 SDF는 그녀의 권리를 옹호하고 납치를 비난하고 결혼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따르자고 실용주의적으로 주장하면서 개인의 “아나키즘적 행동이나 개인적인 반란”을 부정했다. SDF뿐 아니라 독립노동당ILP도 “자유연애”주의와 거리를 두려 했다. ILP 지도자 케어 하디는 사회주의의 평판이 나빠지는 사태를 우려했다. 하디는 “사회주의의 적들은 랜체스터 양이 계획했던 것과 같은 탈선 행위가 모든 계급들 사이에서 사회주의의 평판을 해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목소리도 있었다. SDF 회원들 중에도 이디스 랜체스터의 용감한 행동이 “위선과 무지의 암흑 시대”에 일격을 가했다고 본 사람들이 있었고, 로버트 블래치퍼드의 독립 사회주의 주간지 〈클라리온〉은 “사회주의자들은 … 여성이 사제, 법률, 관습, 위선적인 말 따위를 무시한 채 … 자기 몸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완전한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위의 일화에서 또 어떤 것을 알아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좌파가 다른 문제를 둘러싸고 늘 그랬듯이 이 사건에서도 분열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가 ‘좌파’를 어떤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라 논쟁이 벌어지는 장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이 논쟁의 장에서는 각양각색의 의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어떤 것은 반쯤 잊혀진 과거의 목소리들을 재현하기도 하고(즉, 젠더에 관한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의 사상도 완전히 유실되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어떤 것은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도 다시 터져나올 수 있는 사상과 용어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가령 블래치퍼드의 〈클라리온〉에 실린 선언문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현대적으로 들린다. 이 모든 것은 ‘좌파’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이론적·실천적 쟁점임을 말해 준다. 좌파의 경계는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이는 사회주의자에게 중요한 전략적 물음들을 제기한다. 이 점에서 일리의 설명은 때때로 불만족스럽다. 젠더 정치 문제에서 일리는 “심지어 더 일관된 사회주의일수록 페미니즘의 요구들을 먼 미래의 사회주의로 더 쉽게 늦추는 경향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엄격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이런 문제들 가운데 어느 것도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고 말한다.
이 주장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일관된 사회주의”를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유물론적 관점”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일리가 책 후반부에 썼듯이, 10월 혁명 직후의 볼셰비키야말로 당대 페미니즘의 요구들을 가장 완전하게 구현한 법률(다른 어떤 나라의 법률보다도 훨씬 앞서간)을 통과시킨 장본인들이었다. 그러나 볼셰비키의 유물론은 일리가 생각하는 좌파의 ‘유물론’과 매우 달랐다. 볼셰비키의 정치사상은 칼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재발견한 것인데, 일리는 이 마르크스 사상의 기초인 유물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다. 이러한 쟁점들은 민주주의, 사회주의 변혁, 좌파의 성격 등 이 책의 핵심 주제들과 관련돼 있어서 무척 중요하다.
18 민주주의를 확대시키는 것은 선의나 상호 이해가 아니라 지배자들의 저항에 맞서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진실의 절반, 그것도 중요한 절반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래도 절반일 뿐이다. 1845~46년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 비슷한 지적을 했지만, 거기에 더 깊은 통찰을 하나 덧붙였다.
민주주의는, 그리고 더 일반적으로 사회 변혁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일리는 “사실, 민주주의의 목표는 지배적인 사회집단들의 저항에 맞서서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쓴다.이러한 공산주의 의식을 대규모로 양산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공산주의의 대의 자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도 사람들이 엄청나게 바뀌어야 한다. 그러한 변화는 오직 실천적 운동을 통해서만, 즉 혁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지배계급을 다른 방식으로는 제거할 수 없기 때문만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타도하려는 계급은 오직 혁명을 통해서만 자신에게 묻어 있는 옛 사회의 오물을 모두 씻어내고 새 사회를 건설하는 데 적합한 인성으로 거듭날 수 있기 때문이다.즉, 사회주의는 지배계급의 저항을 극복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사람들은 그 투쟁 과정에서 자신도 변해야 한다. 이 같은 주장은 마르크스가 1845년 봄에 쓴 짧지만 중요한 일련의 메모에서 밝힌 유물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당시까지의 유물론은 현실을 관조의 대상으로 볼 뿐, “인간의 감각 활동, 즉 실천으로, 주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추상적으로나마 현실의 ‘능동적 측면’에 주목한 것은 오히려 관념론 철학이었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환경의 (수동적인) 산물로 여긴 ‘낡은 유물론’에 맞서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통해 자신을 규정한다고 보는 ‘새로운 유물론’을 내세웠다. “환경의 변화가 인간의 활동이나 인간의 자기 변화와 동시에 일어나는 일은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엄격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이다. 하지만 일리가 좌파에게 덮어씌우는 유물론, 즉 여성은 사회주의가 도래할 때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이름이 명시되지 않은) 사회주의 사상가들의 유물론과는 그 결론이 매우 다르다. 마르크스는 여성이든 노동자든 스스로 행동하는 주체들만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변하는 주체들만이 자기 환경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바로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마르크스는 1864년 〈제1인터내셔널 임시 규약〉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썼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이뤄야 한다.”
22 본질적으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는 높은 곳에서 온 어떤 ‘구세주’(똑똑한 지식인들, 정당, 국회의원 등)가 민중을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사상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 세 번째 테제에서 지적하길,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환경을 변화시킨다는 점과 교육자 자신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점을 잊은 채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만 여기는 갖가지 ‘유물론’의 기초라고 했다. 만일 인간이 환경에 의해 결정되기만 하고 스스로 환경을 바꾸지는 못한다면 결국 사회를 바꾸는 일은 일반인들과 달리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사회를 초월해 있는 어떤 집단의 몫일 수밖에 없다. 그런 탓에 ‘위로부터의 사회주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엘리트주의이며 사실은 계급사회의 근본적 가설들을 재생산한다. 이 교리는 역사에서 대중이 하는 창조적 구실을 부인하며, 따라서 아주 엄격한 의미에서는 ‘반혁명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사회 변혁이 필연적으로 다수가 해내는 일이고 다수의 자발적 행동과 자기 조직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 원칙은 그 본질상 혁명적이며 민주적이다. 사회주의의 역사 전체를 이 두 가지 전통 사이의 끊임없는 경쟁으로 이해해도 무리는 아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독자들에게는 친숙할 이 ‘노동계급 자기 해방’ 사상은 지난 1백50년 동안 스스로 ‘좌파’라고 여긴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별해 주는 준거점이다. 작고한 핼 드레이퍼의 표현을 빌리면, 사회주의 전통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정신”으로 나뉜다.23 이렇게 보면 개혁주의자들과 혁명가들 사이의 논쟁은 사적 이익을 어느 정도까지 제한해야 하느냐(그리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논쟁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틈에 대중의 자기조직화라는 문제는 논의에서 실종되고, 논쟁의 양 진영 사이에는 원칙 자체의 차이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 경쟁은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둘러싸고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벌어진 논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일리는 그 논쟁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일리가 보기에 민주주의적 요구들은 오직 지배 집단에 맞서 싸워서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지만 막상 결정적인 정치적·철학적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일리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새로운 집산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동안 무력을 사용하거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민주주의 원칙 안에서 사적 이익을 제한할 수 있는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문제를 둘러싼 분열이 “개혁주의 진영과 혁명적 진영을 가르는 중요한 구분선의 하나”였다고 일리는 주장한다.일리는 마르크스를 마치 우스꽝스러운 만화 캐릭터처럼 묘사한다. 일리가 상상한 1848년의 마르크스는 기존 혁명 조직들의 음모적 전통과는 결별했지만 “블랑키주의의 실천 논리에 사로잡혀 있었다.” 곧,
여전히 [마르크스는] 민중의 의식보다 앞서 나가면서 대중을 봉기라는 최후의 결전으로 조종해 나가려고 했다. … 마르크스와 그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불가피한 진보를 이해한 덕분에 미래를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서 대중의 이해관계의 참된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5 이런 식으로 일리는 자신이 앞서 주장했던 바, 즉 블랑키주의의 유산이 전위주의의 형태로 살아남았다는 주장에 살을 덧붙인다. 일리가 말하는 전위주의는 “정교한 이론과 우월한 도덕성을 갖춘 규율 있는 소수 혁명가들이 대중의 기대를 예측하고, 대중의 이름으로 단호하게 행동하고, 그 과정에서 대중을 급진화시킬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일리는 마르크스에게 바로 이 ‘전위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운다.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일리는 같은 페이지의 각주에서 이런 생각을 좀더 일반화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미래를 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대중이 이해하든 못 하든 간에 대중을 올바른 목적지로 인도하기 위해 대중을 조종하려 들기 쉽다.”마르크스는 1848년 혁명과 그 후에 실제로 무엇을 주장했는가?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세력이 노동계급의 혁명적 행동에 직면하면 혁명 의욕을 급속히 잃고 반동적 구실을 하게 된다는 점을 1848년 혁명이 실제로 보여 줬다고 지적했다. 이 주장의 함의는 무엇인가? 혁명적 위기의 와중에 누구를 믿을 수 있고 누구를 믿어서는 안 되는지를 경험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마르크스의 주장은 노동자들도 유사시에 가짜 동맹에게 속지 않으려면 이러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이 어째서 “대중을 조종하는” 태도인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대중을 급진화시킨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대중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과 조금이라도 공통점이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는 단지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그들의 계승자들도 그랬지만) 자신의 견해를 감추는 것을 혐오했다. 두 사람의 사상의 성공 여부는 그들의 명쾌한 표현력에도 달려 있었고 사상을 전파하는 수단에도 부분적으로 달려 있었지만, 무엇보다 실제 노동자 운동의 경험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주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 주는 사상으로서 그 유용성을 실제 노동자들에게 인정받는 정도에 달려 있었다. 여기에는 블랑키주의적이거나 배후조종하는 요소가 전혀 없다. 만일 누군가가 노동자는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마르크스와는 다르게)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26 이처럼 모순된 해설을 따라가다 보면 마르크스는 마치 “블랑키주의적으로 대중을 조종하려는” 욕구와 “직접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사이에서 정신분열증을 겪은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블랑키주의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를 거부했고 언제나 ‘아래로부터의’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옹호했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일관성 있으며 역사적 사실에도 훨씬 더 부합한다.
마르크스에 대한 일리의 설명은 심지어 일관되지도 않다. 일리는 마르크스 사후에 노동운동이 ‘정치’ 부문과 ‘산업’ 부문으로 양분돼 각자 나름으로 개혁주의적 목표를 추구하게 되면서 마르크스가 꿈꿨던 단결된 해방 투쟁은 요원해졌고, 그 과정에서 한동안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 거의 전적으로 의회주의 형태에 매몰됨에 따라 마르크스가 옹호한 “직접 참여 민주주의”의 정신(1871년 파리코뮌에 대한 마르크스의 논평에서 드러나는)도 희미해졌다고 지나가면서 언급한다.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무대를 떠난 뒤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이끌었던 사회주의 지식인들이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크게 변질시킨 것은 사실이다. 카우츠키와 힐퍼딩 같은 사상가들의 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모종의 ‘과학주의’로, 즉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생각과 행동과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의 도래를 보장해 주는 ‘역사 법칙’으로 왜곡됐다.
의회주의에 충실하고 전국적 노동조합들과 연계돼 있고 나름의 관료층을 갖춘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 등장한 것은 좌파에게 새로운 이론적·전략적·전술적 문제를 제기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1914년 이전 20여 년 동안 유럽에서는 ‘수정주의’와 ‘경제주의’를 둘러싼 논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이는 ‘좌·우’ 분열의 윤곽이 조금이나마 뚜렷하게 드러난 최초의 논쟁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진 것은, 유럽 노동운동의 공식 기구들과 관행들이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인 동시에 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했다는 것이다(그러한 기구와 관행이 등장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조차 그랬다). 이에 대한 고민은 예컨대 로자 룩셈부르크의 저작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1899년 《사회 개혁과 혁명》에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수정주의’의 영향력은 사회민주당 내에서 ‘쁘띠부르주아지’가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말했다. 로자는 7년 후 《대중파업론》에서는 강조점을 완전히 바꿔서, 의회 부문과 노동조합 부문으로 나뉜 독일 사회민주당의 구조 자체가 문제의 근원이라고 진단했다. 이제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대상에는 자본과 국가뿐 아니라 노동계급 스스로 만들어 낸 조직도 포함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제 좌파는 당 관료와 노동조합 관료의 보수성에도 맞서 싸워야 했다. 이들이 노동계급의 반란을 기꺼이 저지할 태세가 돼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27 첫째, 이러한 ‘수정주의’ 경향의 출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상대적 특권을 누리는 소수 당 관료(또는 노조 관료)층이나 ‘노동귀족’ 때문인가, 아니면 더 근본적으로 노동계급이 근대 자본주의의 일상으로 포섭되는 모순된 과정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인가? 둘째, 당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보수적 습성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지배 질서와 타협할 것인가? 그들은 단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적대 관계를 흐리는 구실을 하는 데 그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자본가 편으로 넘어갈 것인가? 셋째, 노동계급 자기 해방 사상을 고수해 온 사람들은 이 새로운 현실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동해야 하는가? 좌파는 개혁주의와 얼마나, 그리고 어떤 형태로 조직적 분리를 해야 하는가? 기존 조직의 틀 안에서 근본적 문제를 논쟁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사회주의자들은 당 관료와 노동조합 관료에 대한 기층의 자생적인 반발이 나타나는 것에 기대해야 하는가? 사회주의자들은 분명하게 혁명을 추구하는 정당을 결성하든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따로 결성하든 어쨌든 개혁주의 조직들과 일체의 연계를 끊고 완전히 따로 조직해야 하는가? 혁명가들은 공인된 노동운동 내에서 보수적 관료들의 영향을 받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에게 어떻게 다가갈 것인가? 이처럼 복잡한 물음들에 대답하려면 새로운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재발견하고 재구성해야 했고, 그로부터 도출된 여러 가지 해결책들을 실천에 적용해 봐야 했다.
이 같은 발견(그 구체적 내용은 선진 자본주의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지만)은 사회주의 이론·전략·전술에 엄청난 함의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이런 문제들이 고립 분산적으로 등장한 것도 아니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 열강들은 세계를 각자의 제국과 영향권으로 분할해 놓은 상태였다. 강대국 간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었고, 군비 지출이 늘었으며, 민족주의 정서가 팽배하고 있었고(이와 함께 반反외국인 정서와 식민지인들에 대한 인종차별도 심해졌다), 절대 왕정들에 예속돼 있던 여러 민족의 권리 문제가 점차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유럽 곳곳에는 정치 성향이 불분명한 소농민들이 여전히 많았다. 노동계급 정당은 이러한 소농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카우츠키가 충고한 대로 노동계급 정당은 소농들을 무시하고 오직 대토지의 농업 노동자들에게만 집중하면 되는가?
이 같은 딜레마들을 해결할 방책이 당장 나온 것은 아니었다. 다소나마 분명한 해답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위기를 거치면서였다.
제프 일리는 풍부하고 흥미진진한 사례를 들며 여러 가지 쟁점과 논의들을 충실히 기록한다는 면에서 좋은 역사가라 할 수 있다. 일리는 노동조합 내부에서 관료층이 점점 커지자 “작업장의 원초적인 민주주의”와 갈등을 빚게 된 사실을 기록한다. 그는 또한 독일 사민당을 비롯한 여타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부르주아적 명망에 집착했다는 점도, 그들이 의회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도,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염원을 무시(카우츠키는 아예 노골적으로 반대)했다는 것도, 식민지 문제와 페미니즘 쟁점 등에 무관심했다는 것도 기록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일리는 한계를 드러낸다. 어떤 경우에도 ‘편들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그의 한계다. 달리 말해, 일리는 특정 세력의 주장에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분명히 느낄 때조차 그러한 주장의 논리적 결론을 파고들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일리는 ‘좌파란 무엇인가’와 같은 까다롭지만 아주 중요한 질문과도 굳이 씨름하지 않는다. ‘좌파’는 잠재적으로 단결된 집단인가, 아니면 어떤 근본적인 분열 탓에 내부의 주요 세력 간에 첨예한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집단인가? 일리의 책 나머지 부분에서도 이런 의문들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
1914년~1923년
1914~23년까지의 10년은 유럽 좌파의 발전에서, 나아가 전 세계 좌파의 발전에서 극히 중요한 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이 낳은 전례 없는 대량살상과 궁핍 때문에 대중적 급진화 물결이 거대하게 일었다. 노동자 조직들 내부에서 이미 발전하던 모순이 절정에 달했다. 노동계급 조직과 사회주의자 조직들은 쓰라린 갈등과 분열을 겪고 있었다. 당 관료나 노동조합 관료들이 평당원이나 현장조합원들과 분열했고, 의회주의와 온건 노선의 수호자들이 혁명 정치에 새롭게 눈뜬 사람들과 분열했고,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을 둘러싸고도 분열이 일어났다.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동맹도 맺어졌다. 예를 들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아나키즘적-신디칼리스트들이 서로 손을 잡았다.
이 시절에는 그 뒤로 80년 동안 사회주의 논쟁에서 핵심 쟁점으로 남게 될 근본적 문제들이 제기됐다. 이 문제들이 적절하게, 즉 실천적으로 해결되지 않아 제1차세계대전의 끔찍한 학살 이후 20년도 채 안 돼 더 끔찍한 죽음과 파괴가 뒤따른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이를 두고 20세기의 30년 전쟁이라고 불렀다. 잘 알려진 대로 1914년 이전에 제2인터내셔널은 임박한 전쟁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결의안을 외견상 한목소리로 채택했다. 그러나 막상 1914년 8월이 되자 러시아와 불가리아의 사회민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자국 정부 편에 붙어서 광기 어린 전쟁 선동을 거들었다.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은 나라마다 극소수로 고립됐다. 일리가 기술하듯이 사회주의 정당의 우파 지도자들이나 노조 관료들에게 전쟁은 모종의 ‘사회주의’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은 계급적 저항을 포기하는 대가로 정부에 입각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반대로 노동계급에게 돌아온 것은 대규모 징병, 늘어나는 전사자 수, 노동강도 강화, 작업장 안전 기준 완화, 기본적인 노동조합 결성권 박탈, 생활수준 하락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입각하는 것과 나란히 현장 노동자들이 경험하는 소외는 더욱 심해졌다.”
29 프랑스에서 등장한 범좌파 조직들이나 이탈리아의 ‘최대요구파’Maximalists나 30 영국의 리즈 반전위원회도 더 나을 것이 없었다. 경제적 전선에서든 정치적 전선에서든 가장 높은 수준의 전투성은 기층에서 나왔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혼란을 초래했는데도 대중의 불만은 놀라운 속도와 강도로 조직화했다. 처음에는 ‘경제적’ 계기로 촉발됐다가 곧 ‘정치적’ 쟁점들로 옮겨간 파업은 전쟁이 계속되면서 더욱 빈번해졌다. 전투적인 노동자들은 이탈리아의 내부위원회, 영국의 클라이드 노동자위원회나 직장위원 운동 같은 새로운 조직 형태들을 만들어 냈다. 기존 좌파 단체들의 대대적인 분열과 재편을 위한 무대가 마련됐다. 국제적으로 좌파는 스위스에서 소규모 반전 회의를 두 차례 성사시켰다. 독일 사민당은 1917년에 당내 좌파를 축출했고 쫓겨난 이들은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다. 그러나 일리도 지적하듯이 이 새 당에는 “일관된 전망이나 견고한 대중 조직이 없었다.”전쟁 말기와 종전 직후에 유럽의 구질서는 대중 투쟁으로 뿌리째 흔들렸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다음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대중의 폭발적 에너지를 누가 다스릴 것이며, 유럽(과 세계)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에 대한 진지한 실천적 해답을 얻으려면 ‘좌파’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를 동시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1914~18년의 전쟁으로 이미 첨예하게 제기됐던 이 문제는 1917년에 시작된 혁명의 물결 때문에 훨씬 더 시급해졌다.
31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전쟁을 끝내라는 대중의 요구를, 토지를 원하는 농민의 요구를, 임금 인상과 물가 안정과 산업 통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의 해결책을 끝끝내 거부했다.
일리도 지적하듯이, 조만간 유럽 전체를 격랑에 빠뜨린 바로 그 요인들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에서도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빵 가게 앞에 길게 줄서서 기다리는 데 지친 여성들과 섬유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전투적 시위, 거대한 파업 물결과 병사들의 반란이 혁명을 이끌었다. 반란의 와중에 노동자들과 사병들은 이미 1905년에 자신들이 만들어 낸 바 있는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와 사병 평의회)를 다시 건설했다. 그 결과 러시아에는 한편에서 임시정부가, 다른 한편에서 소비에트가 실질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원 권력’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처음에 소비에트를 이끈 정당들은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다를 바 없는 ‘온건 좌파’였다. 이들은 대중의 개혁 요구를 거부했고, 임시정부의 정책을 옹호했고, 계속해서 전쟁을 지지했다. 독일 사회주의자 칼 카우츠키가 ‘탁월한 자기 제한’이라고 표현한 멘셰비키의 관점을 일리는 “러시아에 현존하는 발전 자원에 대한 평가로는 원칙적이고 현실주의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계속해서 일리가 지적하듯 “멘셰비키의 전략은 교조적이었고, 1917년의 대중운동 분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멘셰비키는 대중의 염원이 부르주아 혁명의 규범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고 … [자신의 정책 ― 콜린 바커] 때문에 체제 편입이라는 무기력한 논리에 사로잡혀 헤매고 있었다. … 그러면서 그들의 관점에서는 응당 혁명의 주역이어야 했던 사회 세력, 즉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대리하려 애썼다.” 새롭게 들어선 정부와 급진적 대중운동 사이의 이러한 내부 갈등, 이른바 ‘온건한’ 정책의 대변자들이 자신을 권좌에 올려 준 바로 그 세력을 잠재우려 하는 이러한 유형의 갈등은 이후의 모든 혁명에서 나타났으며, 번번이 혁명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원인이 됐다.33 일리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잘 요약한다. “볼셰비즘은 이러한 대중의 급진화를 조직해서 권력을 차지했다.” 34 일리가 또한 보여 주듯, 실제의 볼셰비즘은 흔히 생각하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전위 정당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욱이, 오직 레닌이 이끈 볼셰비키만이 실질적인 친농민 정책을 갖고 있었다. “비볼셰비키 좌파(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최악의 실수”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바라는 농민의 요구와 행동을 거부한 것이었다. 1917년에는 오직 “볼셰비키만이 농민들을 중요한 세력으로 대했다.” 35
러시아 혁명이 여느 혁명과 달랐던 것은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 1917년에는 “이원 권력을 해소하고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압력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만이 이런 해결책을 일관되게 주장했다.36 막대한 인명 손실이 따르는 전쟁도 계속 이어졌을 것이다.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상대로 잔혹한 유혈 탄압이 자행됐을 것이다. ‘이원 권력’ 상태는 지속될 수 없었다. 소비에트를 해체하는 방식으로 이원 권력을 해소했다면 대중 혁명이 이룬 성과는 무無로 돌아갔을 것이다. 둘째, 일리는 레닌의 “신념과 행동의 강력한 일치”를 좋게 보는 반면, “분열을 추구하는 성향, 즉 논쟁을 통해 옳고 그름을 명확히 하고 경쟁자들과 무자비하게 거리를 두려는 레닌의 성향은 덜 매력적인” 것으로 여긴다. 37 그러나 레닌이 더 ‘온순’했다면 멘셰비키와 타협했을 것이고, 제2인터내셔널의 배신에 저항하지 않았을 것이고, 혁명이 목 졸리도록 방치했을 것이다. 레닌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각을 세운 덕분이었다. 올바른 관점이라면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필요하다면 분열까지 감수한 덕분이었다. 일리는 “경쟁자”라는 표현을 쓰면서 레닌과 멘셰비키의 논쟁이 마치 잠재적 파트너들 사이의 사소한 마찰인 양 얘기한다. 그러나 레닌이 “거리를 둔” 대상은 개인이든 정당이든 엄연히 정적들이었으며, 이들의 영향력이 도전받지 않았다면 혁명은 패배했을 것이다.
1917년 러시아를 두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한 반동적 헛소리에 비하면 일리의 서술은 월등히 낫다. 그들과는 다르게 일리는 ‘연속혁명’ 이론의 바탕인 국제주의적 시각을 충분히 비중 있게 다룬다. 나는 단지 두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일리는 만일 멘셰비키의 노선이 성공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말하지 않는다. 소비에트로 권력이 넘어가지 않았다면 노동자·병사·농민의 혁명적 에너지가 사그라졌을 것이다. 멘셰비키의 성공은 자유주의 온건파들의 승리가 아니라 군 최고사령부(코르닐로프식 쿠데타를 다시 한 번 시도했을)와 러시아 기업주들로 대표되는 극우파의 승리에 길을 터 줬을 것이다.일리가 올바르게 질문하듯이, 러시아 혁명 이후 제기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혁명적 사회주의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는가? 이 문제에 일리는 회의적이다.
러시아의 극단적 상황 때문에 좌파는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기회를 얻었다. 어떤 전시 조건은 보편적이었다. 특히 애국주의를 통해 노동운동이 체제에 편입된 것이 그랬다. 이것은 노동운동 지도부에게는 성과를 안겨주었지만 기층 노동자들에게는 곤경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자면 러시아 상황은 완전히 달랐는데, 시민사회의 허약함 때문에 러시아는 유별나게 전반적 위기에 취약했다. 반면에 서유럽은 더 발전된 제도적 자원 덕분에 위기의 확산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39 그러나 이러한 분석에는 허점이 많다. 서유럽과 비교했을 때 러시아의 ‘시민사회’가 구체적으로 어떤 점에서 허약했는가? 그것이 전략에 의미 있는 영향을 끼칠 정도였는가? 서유럽의 “더 발전된 제도적 자원”이란 핵심적으로는 조직된 개혁주의를 말한다. 특히,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들을 일컫는다. 이들의 보수주의를 극복하는 것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전략 문제라는 데는 의문이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사회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정치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유러코뮤니즘 색채가 가미된 ‘그람시적’ 테마다.일리의 설명은 혼란스럽다. 일리는 러시아 혁명이 유럽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으며, 카우츠키와 힐퍼딩이 역사적 필연성의 이론으로 전락시킨 진부한 마르크스주의를 산산조각냈다고 지적한다. 이제 창조적 주체로서의 인간[기계적 유물론의 수동적 객체인 인간이 아니라]이 다시 한 번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리는 새 세대의 혁명적 정치에 두 가지 결함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혁명 이후의 정치 체제를 여전히 의회제로 이해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혁명가들이 유럽 각국의 사회적·종교적·인종적 이질성을 감안할 때 혁명 정권의 현실적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했던 일, 즉 동맹을 구축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리의 첫 번째 비판은 사회주의 운동이 ‘혁명 이후의 정치 체제’를 의회 중심으로 건설할지 여부를 놓고 첨예하게 분열했고 이 때문에 새로운 전략·전술 문제들이 제기됐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의 두 번째 비판으로 말하자면, 동맹 건설은 분명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동맹 문제는 단지 혁명 체제의 생존뿐 아니라 애초에 혁명이 일어나느냐 마느냐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더욱이 ‘동맹’ 문제는 그저 유럽 내부의 사회적 이질성에 대처하는 방법 문제가 아니라 무엇보다 노동계급 내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치적 경향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40 이러한 진단은 독일 외의 나라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새롭게 떠오르는 혁명적 좌파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노동자 평의회(나라마다 그 조직 형태와 이름은 다양했다)를 바탕으로 한 사회를 염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전을 실현하려면 대다수 혁명적 좌파에게 없었던 전략적 역량이 반드시 필요했다. 왜냐하면 일리가 말하는 “평의회 공산주의”는 운동을 노동조합 관료나 사회민주당 지도부와의 정면충돌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려면 다양한 이론적·실천적 쟁점들과 대결해야 했다. 일리는 이상한 순서로 나열하기는 하지만 다음과 같이 그런 쟁점들을 몇 가지 언급한다.
1918~23년 기간의 두드러진 한 가지 특징은 대중의 혁명적 열기가 거대하고 강력하게 분출했지만 새로 탄생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들과 단체들은 명확한 전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리는 다음과 같은 말에서 이 점을 얼핏 보여 준다. “[독일에서] 1919~21년 사이에 기층의 반란에 참가한 사람들의 염원과 희망은 이들을 대표해야 할 기존 좌파 단체들의 능력을 번번이 넘어섰다.”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여러 분야를 무시했다. 여성, 가족, 성별 분업의 문제가 그 중 일부였다. 다른 하나는 동맹 구축 문제인데, 평의회 운동은 농민과 쁘띠부르주아지, 그 밖의 비프롤레타리아 사회집단을 신경 쓰지 않았다. 평의회 투사들은 생산 현장을 중심으로 혁명 정부를 조직했을 때 빚어질 행정적 결과들에 개의치 않았다. 평의회가 지역이 아니라 공장을 기반으로 하고 사회 전체가 아니라 생산을 운영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훈련시킨다면 정부의 비非경제 기능들은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평의회는 사회 복지와 교육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노동자가 아닌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대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약점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대중운동 내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조합 관료의 영향력이 여전히 우세한 마당에 혁명가들은 어떻게 실질적인 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것인가? 평의회 공산주의의 적은 자본가 계급과 국가 기구만이 아니었다. 유럽 노동운동 내부의 ‘온건’ 세력도 그들의 적이었다. ‘좌파’는 이제 분열한 정도가 아니라 서로 정면 대립하고 있었다.
42 ‘온건파’라는 말조차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쫓겨난 카이저의 군 최고사령부와 손을 잡았고, 노동계급 운동을 분쇄할 목적으로 결성된 우익 군사 조직인 자유군단을 창설하는 데 협조했다. 사민당은 단호하고 결연했던 반면, 독립사민당은 새로운 세력들을 대규모로 끌어당겼음에도 이렇다 할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새로 결성된 스파르타쿠스단과 나머지 극좌파들은 파편화해 있거나 경험이 없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창당한 지 몇 주 만인 1919년 1월 소수파의 힘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려 했다가 광포하게 진압당했다. 그 와중에 당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했다. 사민당 지도자들의 부추김을 받은 자유군단은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살해하는 등 노동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날뛰었다.
독일의 사례가 이 점을 가장 분명히 보여 줬다. 1918년 11월 독일에서는 러시아의 2월 혁명과 같은 사태가 더 큰 규모로 재현되면서 카이저[독일 황제의 칭호]의 제국이 붕괴했다. 또한 러시아에서처럼 ‘온건파’와 ‘강경파’가 즉시 분열했다. 전쟁을 끝까지 지지한 사민당은 갑자기 떠밀리듯 집권했다. 일부 좌파도 함께 집권하게 됐는데, 이들에게는 러시아의 볼셰비키 같은 이데올로기적 명확성이 전혀 없었다. 일리는 사민당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독일 혁명에서 가장 주목할 것은 사민당 온건파의 꿈쩍도 않는 비타협성이었다. 그 당의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재촉하기는커녕 억누르는 데 최선을 다했다.”43 일리가 통탄하는 점은 이 ‘제3의 길’에 독일 사민당이 전혀 힘을 보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리는 에베르트를 비롯한 사민당 지도자들이 “유감스럽게도 상상력이 부족해 대중의 분출을 활용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독일 사민당]의 입헌주의 노선은 두 가지 대가를 치렀다. 하나는 국가와 경제에서 권위주의의 기반이 가장 취약한 시기에 그 기반을 되살렸고 심지어 갱신하기도 했으며, 둘째로 대중 민주주의의 최고의 표현을 거부하고 잔인하게 억압하기까지 했다.” 44 일리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리는 독일 사민당식의 합법주의와 볼셰비키식의 혁명 정치 사이에 ‘제3의 길’이 가능하다는 것을 독일 노동자 평의회가 보여 줬다고 설명한다.1918~19년의 진정한 비극은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가 아니다. 이 과정의[사회주의 혁명의] 추상적 장점에 대해서 끝없이 논의할 수도 있지만 혁명은 길고도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어야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이 지나친 대가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비극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바라보는 독일 사민당의 관점이 지나치게 법리적이고 지독하게 상상력이 부족하며 완전히 보수적이었다는 점이다. 1918년에 사민당은 민주주의의 경계를 확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불신받는 구체제의 권위주의적 기반을 일소하고 평의회 운동이 불러일으킨 새로운 대중적 에너지를 결집해서 이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개혁의 기회는 유실됐다. 사민당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 자신의 관점에 비춰 봐도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내가 보기에 일리의 판단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듯하다. 1918년이나 1919년 초에 독일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즉각적인 의제에 오를 수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려면 혁명적 좌파가 독일 노동자들 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내전’은 피할 수 없었다. 1919~23년에 독일 각지를 훑고 지나간 사태가 내전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더욱이, 일리가 사민당 지도자들의 정책과 상상력 빈곤을 질책하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그리고 이 점이 일리의 설명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다. 일리는 사민당 지도자들이 여전히 어떤 면에서는 좌파였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사실, 제1차세계대전 중에 치머발트에 모인 좌파들이 이룬 한 가지 성과는 독일 사민당을 포함한 제2인터내셔널의 여러 정당들이 사회 변혁의 주체로서 파산했으며 동맹이 아니라 넘어야 할 장애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었다. 독일 사민당이 여전히 독일 노동계급 내에서 가장 많은 표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이 갖는 전략적 의미는 예컨대 여전히 많은 영국 노동자들이 보수당이나 자유당에 투표한다는 사실이 갖는 전략적 의미와 별 차이가 없었다. 독일의 진정한 비극은 좌파들이 독일 노동자들에 대한 사민당의 정치적 영향력을 극복할 뾰족한 묘수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리도 지적하듯이 이러한 영향력은 가변적인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독자적인 공산당 조직은 [1918년 — M21] 11월 혁명 후에야 비로소 등장했다. 스파르타쿠스단과 그 후신인 독일공산당은 대중운동의 폭발에 대응하는 법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초좌파주의와 우파적 타협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다가 값비싼 대가를 치렀고, 그 때문에 독일 노동계급이, 나아가 전 인류가 훨씬 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런 명확성을 얻으려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했다. 이론적·조직적 유산 전체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재구성해야 했다. 그것도 흔히 새롭고 험난한 사태의 열기 속에서 그래야 했다. 이 문제는 독일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서도 혼란의 원천은 이탈리아 사회당이었다. 이 당의 지도자 세라티는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역사를 해석할 뿐, 역사를 만들지는 않는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대요구파의 실패는 어떻게 하면 혁명을 이끌지 못하는지를 실제로 보여 준 본보기였다. 그들은 기대를 부풀리기만 했을 뿐 그 기대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또, 혁명적 흥분을 부채질했지만 그 분위기를 혁명적 도전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거부했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부르주아 세계에 맞서는 장벽으로 만들고는 이데올로기 방책 뒤에 몸을 감춘 채 수사적 도발을 퍼부었다. 그러나 대중이 그들의 말을 믿고 행동에 나서자 최대요구파는 규율과 인내를 설교했다.
독일 상황에 대한 일리의 설명을 방금 읽은 사람은 다소 혼란스럽겠지만 일리는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대요구파의 실패가 남긴 교훈 가운데 하나는 조직 문제였다. 혁명 지도부, 즉 볼셰비키 정당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보르디가의 주장이 바로 이런 것이었고 1920년에는 그람시도 보르디가의 편에 섰다. … 이탈리아 사회주의는 전후의 혁명적 정세 속에서 좌파가 맞닥뜨린 딜레마를 압축적으로 보여 주었다. 사회주의 혁명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독일만큼이나 이탈리아에서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 장애물 가운데에는 “결정적 순간에 자취를 감춘” 혁명 지도부의 실책도 있었다.
일리는 독일에서도 혁명 지도부의 실책이 문제였다는 데 동의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독일과 이탈리아 공산주의자들의 구체적 실책에 대한 논의나 ‘볼셰비키 지도부’라면 이런 나라들을 뒤흔든 위기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49 일리는 이탈리아 사회당이 1919년 11월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에도, 또 1920년 9월 공장 점거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그 당이 기대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민주대연합”에 참여하고 그것의 형성을 돕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50
전혀 그렇지 않다. 일리의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 일리는 어떻게 해야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할 수 있었는지 따지는 데 관심이 있을 뿐이다. 비록 이 이행이 “자본주의의 재안정화”로 가는 서막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51 이런 주장에는 20세기 내내 혁명으로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마다 거듭거듭 반복된 과정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 “의회라는 과정을 통해 전달”하는 것 자체가 의회 밖 대중의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수단이다. 일리는 “의회 밖의 급진적 에너지”가 가장 확실하게 발전한 실제 형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지는 않는다.
일리는 독일에서든 이탈리아에서든 신기루 같은 것을 좇고 있다. “비非볼셰비키 좌파가 성공하려면 두 나라 모두에서 최상의 것이 필요했다. 즉, 의회 밖의 급진적이면서도 민주적인 에너지가 의회라는 과정을 통해 결집되고 전달돼야 했다.”52 그러나 기묘하게도 일리는 이 사태를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막을 수 없는 것이었는지, 이와 같은 좌파의 패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는다. 일리의 서술에서 이런 공백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일리는 다음 장에서 훨씬 더 심각한 공백을 다시 남긴다.
1920년 공장 점거 후 놀라우리만큼 순식간에 무솔리니의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것은 좌파의 충격적 패배였고 어느 모로 보나 민주주의의 패배였다.53 이것은 1917년 이전 레닌의 정치 활동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말이다. 즉, 레닌이 공장이나 노동조합에서 하는 선동을 옹호하고 개입한 것, 볼셰비키가 두마에서 활동하고 ‘의료기금’에서 활동한 것 등등을 무시한다. 54 일리는 《좌익공산주의 — 유치한 혼란》에서 레닌이 유럽의 ‘좌익’ 공산주의를 비판한 것도 무시한다. 일리는 신생 코민테른에서 벌어진 공동전선 논쟁도 죄다 무시한다. 일리는 각국의 신생 공산당이 개혁주의 좌파부터 초좌파까지 온갖 종류의 ‘좌파들’과 대면하게 된 것이 공산당의 “가장 곤란한 딜레마”였다며 “공산당들이 이러한 전투성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구체화하느냐가 장차 공산당이 어떤 종류의 정당이 될지를 좌우할 것”이었다고 한다. 55 그러나 일리는 그런 논쟁의 한계가 무엇이었는지, 더 좋은 대응과 더 나쁜 대응은 어떤 것이었는지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리는 이 시기에 다양한 혁명적 운동이 실패한 이유를 대체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운동들은 단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좌파적 모험주의였을 뿐인가? 이 운동들은 서유럽에서 시민사회 기구들의 ‘굳건함’ 때문에 좌절됐는가 아니면 공산당의 심각한 전략·전술적 실책이 중요한 구실을 했는가? 일리는 대체로 혁명적 좌파에 그다지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특히 그들의 실제 정치에는 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일리의 책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직접적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 일리는 1919년 헝가리 소비에트 혁명의 실패를 간단히 언급할 때처럼 때때로 이러한 일들은 그냥 예사로 일어나는 일인 것처럼 말한다. 마치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가 승리한 것을 다룰 때와 비슷하게 말이다.
이 시기 전체에 대한 일리의 설명에서 드러나는 문제는 사람들이 때로 ‘레닌주의’라고 부르는 개념을 그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 듯하다. 일리는 러시아 혁명 자체는 대체로 훌륭하게 설명하지만 레닌의 정치에 대한 이해는 부족하다. 일리는 유럽에서 더는 봉기가 의제에 오르지 않게 되자 “레닌은 좋든 싫든 의회와 노동조합을 비롯한 ‘합법적’ 활동 영역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인정이 아무리 전술적이고 부차적이고 이기적인 것이었더라도 말이다” 하고 썼다.56 다른 한편으로, 일리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가 민주주의와 좌파에게 실제로 성과를 남겼다고 본다. 1918년에 좌파는 처음으로 집권할 뻔했고, 보통선거권과 사회권의 등장, 개혁의 증대로 혜택을 입었다. 이러한 성과가 유지된 것은 엄청나게 성장한 노동조합부터 다양한 종류의 여성운동까지, 그리고 수많은 단일 쟁점 운동(대부분 지역 운동이긴 하지만) 같은 의회 바깥의 사회운동들 덕분이었다. “사실 1917~18년의 혁명기에 중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돌파구를 열지 못한 것보다는 입헌적 틀이 개선된 덕분에 생겨난 새로운 민주적 역량과 법적 자원이 훨씬 더 중요했다.” 57
일리가 이 문제들을 비교적 덜 중요하게 여기는 탓이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정치적 결과에 대한 일리의 판단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 일리는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공산당 사이의, 따라서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사이의 첨예한 분열에서 가장 잘 드러난 국제 사회주의 진영의 분열이 “1956~68년 분출과 그 이후까지 좌파 정치를 손상”시켰다고 생각한다.당시 좌파의 분열은 손상인가, 필연적인 것이었는가? 심각한 차이를 억누르는 것에 의존하는 ‘단결’로 무엇을 이룰 수 있었겠는가? 살해당한 로자 룩셈부르크를 따르던 사람들이 살인을 사주한 자들과 같은 조직에서 공존할 수 있었겠는가? 실제로 좌파 정치를 ‘손상’한 것은 분열이 아니라 분열 이후 양편의 궤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적·정치적 성과로 말하자면 이러한 성과가 얼마나 확고한 것이었는지를 묻는 것이 타당한 일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재앙들은 머지않아 민주주의와 좌파를 똑같이 위협할 위기들의 전조나 다름없었다. 여기에는 근본적 쟁점들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루려면 일리의 텍스트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일리가 반대하고 오해한 ‘레닌주의’의 합리적 핵심을 탐구하고, 루카치가 말한 대로 “볼셰비즘의 조직과 전술이 마르크스주의의 유일하고도 가능한 결론”임을 논증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프로젝트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이며 이 해방은 인류 해방으로 가는 열쇠이기도 하다. 계급 해방은 노동계급이 임금 노예라는 자신의 조건을 폐지하기 위해 집단적 주체로 형성되는 것을 전제한다. 이것은 정치적 프로젝트이지 상상 속의 역사 법칙에 따른 모종의 필연적 결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야겠다. 선진 자본주의에서도 파시즘, 핵전쟁, 생태 파괴 같은 ‘야만주의’가 발흥할 수 있듯이, ‘야만주의’는 항상 잠재적 가능성으로 남아 있다. 역사란 언제나 선택을 열어 두는 법이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프로젝트에서 핵심은 노동계급이라는 주체, 노동계급의 의식, 노동계급의 조직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된 적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인데, 이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언론 따위의 명백한 효과에서 비롯하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와 정치의 일상적 작동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한다. 노동 대중은 경쟁 때문에 서로 낱낱이 분열된 채 자본주의 사회관계 안에서 자신들이 소외된 것을 ‘정상’으로 여긴다. 심지어 이러한 소외가 낳은 결과에 도전할 때도 그렇다. 그람시의 표현을 빌리면, 대중의 의식은 근본적으로 ‘모순’돼 있다. 그들의 의식 속에는 가장 선진적인 생각과 행동의 요소가 후진적인 요소와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모순된 자기 발전 경향이 있는 노동계급을 인간 해방의 주체로 여긴다.
자본주의 사회의 삶의 현실이 착취와 억압의 사회관계 안에 있으므로 현재 상태에 반대하는 이런저런 저항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이런 저항의 실천적 형태는 무수히 다양하며, 각종 ‘사회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한 운동은 어느 한 계급의 성원들만으로 이뤄지지도 않고 어느 계급의 성원 전체로 이뤄지지도 않는다. 특히 대중운동은 더욱 그렇다. 다양한 사회적 네트워크 속에서 건설된 이런 운동에는 으레 온갖 견해와 염원과 편견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정치적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관점이 단일하지 않듯이 노동계급이 (다양한 경로로) 참가하는 운동도 단일할 수 없다.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의식’은 서로 다른 속도와 정도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운동 자체가 내부 다툼과 실천적 논쟁이라는 특징을 띠기 마련인, 사회적 관계와 행동의 네트워크다. 통일되고 일관된 이데올로기는 운동의 특징이 아니다. 게다가 운동은 운동의 적인 지배계급 사상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운동 내부의 논쟁은 일반적 사상이나 운동의 목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운동 자체의 의미와 성격, 운동에서 이용될 적절한 실천적 수단들, 운동을 조직하는 방식, 특정한 전략과 전술 등을 다루기도 한다. 운동의 적, 특히 기업주들과 국가는 이 다양한 논쟁의 결과에 분명한 이해관계가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처럼 기업주들과 국가가 운동에 기반을 둔 반대 세력을 허용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에서는 기업주들과 국가는 운동의 형태를 둘러싸고 분명히 이해관계가 있다.
59 노조가 임금 인상 요구를 넘어서 ‘경영자의 특권’에 도전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제한적 운동을 선호하는 지배계급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요인들이 있다. 즉, 임금 제도와 기업주의 권위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자본주의 작동 자체의 일상적인 효과뿐 아니라 사법제도, 미디어의 영향력, 심지어 포섭할 수 있고 ‘정치인 같은’ 지도자들에게 제공되는 물질적·상징적 보상도 대중이 자기제한적 운동을 하게 만든다.
그들이 선호하는 운동은 “책임성 있는” 사람들이 이끄는, 종이호랑이 같은 운동이다. 그 사람들은 자신의 지도적 위치를 이용해 지지자들이 합법성과 헌정 질서 존중이라는 ‘정상적 체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억제하고, 더 급진적인 조류들을 반대하거나 그 결집을 방해하려 한다. 그들은 19세기에는 심지어 공제조합에게조차 품위와 미풍양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듯이,60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운동의 상태와 잠재력과 과제, 그리고 필요한 주장을 둘러싼 논쟁에 관련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지배만을 보는 여러 이데올로기 이론들의 설명과 달리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 착취·억압 경험은 상쇄 압력을 만들어낸다. 저항을 봉쇄하면서도 재생시키는 양면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운동 내부에서는 상시적으로 사상 충돌이 벌어진다. 이데올로기 투쟁은 특히 계급투쟁의 주체들이 투쟁 경험을 해석하는 관점을 둘러싸고 상시적으로 벌어진다. 운동의 기구들과 실천 자체가 노동계급이 경험한 승리와 패배와 타협의 역사 속에서 생겨나고, 이 역사를 통해 지배계급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경험은 부분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61 그러한 투쟁은 ‘분배’나 ‘권리’ 문제뿐 아니라 운동의 구성, 조직, 자기 규정을 둘러싸고도 벌어진다.
이 투쟁들을 이론적으로 이해하려면 추상적·일반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항상 변하는 구체적이고 특수한 상황들과도 관련지어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구체적인 당면 문제를 다루지 않는 마르크스주의는 실천과 무관한 아카데미즘일 뿐이다. 다른 한편으로, 추상과 구체, 특수한 계기와 전체성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관계를 찾아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 저항 사상은 ‘경제주의’로 빠지거나 부분적 비판에 머물기 십상이다. 이런 류의 저항 사상은 예를 들어 구체적인 상황 전체를 이루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과 억압에 맞선 저항)을 무시할 수 있다. 각각의 구체적 상황은 모든 세력에게 전략과 전술상의 문제들을 제기하며, 이를 통해 여러 세력들은 배우고 대응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계책을 고안한다. 운동의 적들은 운동을 제약하고 방해하는 새로운 수단을 선보일 수 있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의도를 우리가 항상 쉽게 간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운동은 언제나 샨드로가 말한 적들의 ‘전략적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운동 내부에서는 적들의 말과 행동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사건의 해석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 투쟁이 불가피해진다.따라서 각각의 상황은 중요한 사건이 되고, 사건의 결과는 미래의 투쟁에 영향을 준다. 개별 사건들은 모두 언제나 결말이 어느 정도는 열려 있고, 사건의 결과는 누가 무엇을 행하고 말할 것인지에 달려 있다. 계급투쟁의 크고 작은 사건에는 모두 ‘전환점’이 있다. 그런 순간에 여러 세력들이 채택한 실천적·이데올로기적 태도와 그에 따른 행동이 그 다음 단계에 무엇이 가능한지를 결정한다. 이 점은 혁명적 상황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나지만, 이 원리가 단지 혁명적 상황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에는 투쟁 이야기도 포함되고, 경험에 비춰 사상을 다시 정식화하는 일이나 의식과 조직도 포함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각각의 특수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상황 전개에 창조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62 노동계급은 성별이나 인종이나 민족에 따른 천대이든 다른 무엇에 따른 천대이든 일체의 천대에 저항하는 모든 운동 안에서 헤게모니 세력이 돼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노동계급 자체가 분열하고, 노동계급의 시야와 염원이 협소해지고, 따라서 자본주의의 한계 안에 노동계급이 갇히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은 여전히 《공산당 선언》에 요약돼 있는 다음의 견해다. 즉, 자본주의 핵심에는 근본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해관계가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운동을 최대한 단결시키는 주장을 내놓고, 노동계급 권력이라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항상 고수하는 태도 말이다. 일리가 좌파에게 덮어씌우는 모종의 협소한 “계급주의”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 “계급주의”는 항상 노동계급의 즉각적 이익처럼 보이는 것에만 주목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많은 비방에 시달리는 레닌의 초기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나오는 중요한 주장을 명심해야 한다.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천대받는 사람들 전체의 이익을 옹호해 언제나 “민중의 호민관”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 권력이라는 목표를 실현하려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계급사회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천대받는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해야 하고, 그런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계급 운동 안에서도 싸워야 한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변하려 하는 노동계급 운동 자체에 비판적 태도를 취해야 한다.63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자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주장하고 가르칠 뿐 아니라 남의 말을 귀담아듣고 배울 수 있는 능력, 다른 사람들의 창조적 대응에 비춰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키는 능력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앞서 개진한 주장, 즉 노동자들 자신이 이론적으로든 실천적으로든 능동적인 역사의 주체라는 점을 전제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되거나 완결된 이론이 아니라 발전하는 이론이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운동의 실천과 사상을 놓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마르크스주의 조직과 그 조직이 참여하고 관여하는 운동 사이의 상시적 대화 속에서 발전시켜야 하는 이론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늘 열린 자세로 배워야 하므로 그저 ‘교육자’일 수만은 없다. 마르크스주의의 창조적 발전을 이끈 자극은 흔히 마르크스주의 정당이나 단체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운동 자체의 창조적 실천이라는 ‘외부에서’ 온다.64 이것의 의미는 명백하다. 운동의 일부가 좌파에게 골치 아픈 문제가 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략과 전술상의 문제들은 운동의 내부와도 관련이 있다. ‘좌파’ 안에서도 좌와 우를 구별해야 한다. 그 우파는 노동계급 혁명을 체계적으로 반대하는, 엄밀히 말해 반혁명적 세력이라고 봐야 한다. 이들은 기껏해야 운동 안에서 언제나 믿을 수 없는 동맹이고, 심지어 자본과 국가의 관점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와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에는 일리가 레닌의 단점으로 드는 듯한 가차없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만일 지배계급이 운동 내부의 조직 방식이나 사상과 행동에 이해관계가 있다면, 운동 안에는 언제라도 지배계급의 사상을 운동 내부로 전달하는 구실을 할 수 있는 세력이 포함되기 마련이다.이것이 마르크스가 1848년 혁명의 경험에서 얻은 핵심 교훈이다. 이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교훈의 실천적 함의를 더욱 발전시키게 된다. 운동 내 좌파는 운동 내 ‘온건파’와는 독립적으로, 그들에 맞서서 조직적·이데올로기적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결정적 순간에 운동이 직면한 중요한 과제를 분명히 제기하고, 자신의 전략과 전술이 채택되도록 운동 안에서 주장할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우파가 운동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갈 것이다. 좌파는 언제든지 운동 내부의 분쟁과 논쟁에서 어느 한 쪽을 편들 태세가 돼 있어야 하고, 상황의 특수한 한계와 가능성에 비추어 순간순간의 상황을 끊임없이 재평가해야 한다.
65 상황을 심사숙고해 평가하고 능동적·효과적으로 개입하는 능력이야말로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신생 코민테른의 뛰어난 지도자들이 전후 서유럽의 동지들에게 가르치려 한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르크스주의 정치는 모종의 비타협적 혁명 지상주의 같은 게 아니다. 특정 시점의 운동 내부 세력 관계와, 운동과 적대 계급 사이의 세력 관계를 주의 깊게 파악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정치에는 모종의 현실적 판단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의 ‘7월 사태’ 때 무장한 수병·병사·노동자의 대규모 시위대가 당장 봉기할 것을 요구하자 ‘아직은 아니다’ 하고 말할 수 있었다. 다른 사회집단은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다수조차 또 한 차례의 혁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직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근거로 말이다. 이렇게 상황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능력이 비극이게도 1919년의 독일 스파르타쿠스단과 헝가리 공산당에게는 없었다. 실천적 마르크스주의라면 결코 구체적 투쟁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루카치가 멘셰비키에 친화적인 자기 정적의 주장을 비판하며 말했듯이, 헝가리의 패배는 “역사 과정”이 승리를 허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생 헝가리 공산당이 미숙해서 “혁명을 날려 버렸기” 때문이다.결국 서유럽의 동지들은 실패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상황은 아슬아슬했다. 실패의 결과는 나머지 20세기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기게 된다. 중요한 혁명적 개입이 가능한 정치적 위기가 잇따랐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볼셰비즘의 원칙을 고수한 사람들은 주변으로 밀려난다. 그 뒤로 그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운동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 그들은 사건들을 분석하면서 다른 좌파 경향들의 위험성과 파산을 논증하고 사건의 대안적 발전 경로의 윤곽을 제시하는 뛰어난 논평을 남길 수 있었고 실제로 남기는 경우도 흔했다. 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정치적 견해로 다수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사회민주주의는 중대한 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음을 거듭거듭 입증했고, 심지어 보수적 구실을 하기도 했다. 이미 제1차세계대전 전후前後에 그랬듯이 말이다. 새로운 점이 있다면 공식 공산주의 운동의 변화였다. 러시아 혁명이 고립되고 1917~18년 이후 몇 년 간 유럽 전역에서 패배와 실책이 잇따르자 러시아 정권이 보수적으로 ‘퇴보’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됐다. 그리고 이와 함께 러시아 정권이 다른 나라 공산당에게 제공하는 지도도 ‘퇴보’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자 1917년의 국제주의는 사라지고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독트린이 득세했고,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점차 러시아 국가의 국익에 종속됐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공산당의 공식 노선은 오락가락하고 갈팡질팡하면서 결코 노동계급의 실제 힘을 바탕으로 일관된 혁명적 노선을 따르지는 않았다.
제프 일리가 제공하는 수많은 자료를 모아 보면 1923년 이후의 유럽에 대해 이러한 주장을 논증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사회주의자의 탐구 자료로서 유용하다. 그러나 일리 자신은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가 서술하는 나머지 역사에서도 혁명적 좌파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미래를 전망하는 대목에서도 보기 힘들다.
1924년~1967년
양차 대전 사이 시기는 유럽의 좌파와 민주주의에 재앙이었다. 사회민주주의는 경제 위기에 직면해 붕괴했고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가 승리했다. 독일에 이어 오스트리아가 나치의 수중에 넘어갔고, 스페인에서 공화국이 패배했고, 급기야 세계는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더욱 야만적인 학살극에 빠져들었다. 일리의 책은 이 끔찍한 사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일리는 사회민주주의의 약점을 분석할 때 가장 진가를 발휘한다. 혁명적 격변기가 지나가자 조직된 개혁주의 세력은 전보다 더 강력해진 듯했다. 이 점은 ‘붉은 빈’에서 가장 명백했다. 그러나 일리가 주목하듯,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룬 성과의 바탕에는 “개혁주의의 난제”가 있었다. 즉, “이 성과들은 결국 자본주의의 번영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략은 결코 없었다.
노동운동은 ‘붉은 빈’이 공언한 모든 방식으로 노동계급의 지역사회 연대와 일상 생활을 조직하는 하위문화의 집합체로서 대단한 사회적 힘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서발턴 집단주의에서 진정으로 사회를 이끄는 정치적 리더십(그람시가 말한 헤게모니)에 이르는 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봉기가 아닌 혁명적 전략을 통해 노동운동의 하위문화적 영향력을 국가 속의 권력으로 전환하는 것이 문제였다.
67 독일 사민당은 자본주의의 죽음을 재촉하는 것보다 자본주의의 이윤율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사회 지출과 임금을 크게 삭감하는 데 동의했다. 사민당은 주로 나치를 두려워해 독일 보수 세력을 지지했고, “그러는 동안 기층 사회주의자들은 서서히 사기가 떨어졌다.” 68 일리는 사회민주당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정확히 요약했다.
주요 개혁주의 이론가들의 전망은 완전히 빗나갔다. 힐퍼딩은 자본주의가 이제 “조직”됐으므로 국민이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기가 더 쉬워졌다고 주장했다. 납탈리 등은 레닌주의와는 다른 전략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인즉 개혁주의도 혁명적 결과를 가져다줄 수 있다거나, (카우츠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가 저절로 사회화를 달성하므로 사회주의자들은 그저 자본주의가 성숙하도록 장려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리의 지적처럼, “이렇게 자본주의의 미래에 의존하는 전략은 1929년의 공황으로 좌초됐다.”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라는 볼셰비키의 전위주의 모델이 권위주의적이고 역효과만을 내는 파괴적 폭력과 자기 고립적인 독재로 가는 방안이라며 거부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절차 지상주의 심리에 사로잡힌 채 영원히 투쟁을 회피하면서 의회의 규칙을 엄격하게 고수했다. 이렇게 사회민주주의의 상상력이 의회의 합법성이라는 집적회로에 연결된 것이야말로 1918년 이후 시기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나치즘의 위협 앞에서도 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백치처럼 끝까지 의회주의에 집착했다. 싸울 태세가 돼 있던 많은 기층 사민당원들은 지도자 없이 방치되고 의기소침해졌다. 그 전의 사민당 역사 전체를 돌이켜보면 이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의 문제는 사민당보다 왼쪽에 있는 세력 중 사민당의 당원 대다수를 반나치 공동 행동으로 이끌 수 있는 정책을 지닌 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독일 공산당과 스탈린주의의 결정적 문제였다.
70 일리는 이러한 재앙을 막지 못한 독일 사민당과 공산당의 책임을 전혀 따져보지 않는다. 이 사건만큼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고, 그 결과에 대한 여러 좌파 세력의 책임을 따져봐야 할 사건이 또 없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독일사 분야의 저명한 학자인 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일리가 무솔리니의 승리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고 쳐도, 좌파와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히틀러의 승리에 침묵한 것은 믿기 힘든 오류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일리는 이 문제를 놓고 거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잘 알려져 있듯이 독일 공산당은 스탈린의 지도를 따라서, 독일 사회민주당을 나치에 맞서 싸울 잠재적 동맹 세력이 아니라 히틀러 세력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적인 “사회[주의적 — M21] 파시스트”라고 선언했다. 독일 공산당은 정신나간 ‘초좌파’ 노선을 따랐다. 독일 노동자 운동을 단결시키기는커녕 분열시킨 것이다. 그런데도 일리는 스탈린주의의 ‘제3기’ 이론과 실천이 남긴 정치적 결과를 두고도, 나치가 1933년에 권력을 잡는 과정을 두고도 일언반구 하지 않는다. 일리는 나치의 “집권”이 좌파에게 재앙이었고 “민주주의의 대참사”였다고 지적할 뿐이다.71 (강조는 콜린 바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업화 드라이브는 노동자 임금을 대폭 삭감하고, 1917년 혁명 때 농민에게 분배한 토지를 다시 빼앗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완전히 폐기하는 것을 전제로 했음을 감안하면 “반혁명 주체의 역량”이라는 문구가 더 적합할 것이다. 또한 혁명적 볼셰비키와 스탈린의 공산당 기관원들 사이에 의미 있는 정치적 연속성이 있다는 생각도 매우 의심스럽다. 일리는 옛 소련의 현실, 옛 소련 지도자들의 정책과 그들이 자행한 숙청을 유럽 각국 공산당이 무비판적으로 추종한 일, 인민전선 정책과 스탈린-히틀러 협약의 폐해 등에 관한 일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언급하기는 하지만 옛 소련에서 그런 일이 왜,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그리고 어째서 그 때문에 20세기 좌파의 역사가 그토록 비극적이었는지를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리가 다루는 주제의 성격상 그러한 설명이 필요하다. 옛 소련의 지배자들은 항상 모종의 좌파였는가, 아니면 좌파가 극복해야 할 문제의 일부로 변모했는가? 이 잡지가 대변하는 국제사회주의경향이 주장해 왔듯이, 옛 소련 지배자들이 세계 자본주의의 지배계급에 편입된 것은 아니었는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좌파의 역사에 대한 서술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리는 이러한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기 때문에 양쪽 주장에 한 다리씩 걸치면서 스스로 그 모순을 인식하지도 못하는 듯한, 앞뒤가 안 맞는 역사 서술로 일관한다.
일리가 스탈린주의를 다루는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 일리와 이 잡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가 표방하는 전통 사이의 거리는 어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볼셰비키가 위로부터 사회를 변혁하면서, 1929년 이후 소련의 공업화 드라이브에서 혁명 주체의 역량이 어마어마하게 동원됐다.”국제사회주의경향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탄생한 사회가 퇴보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1928~29년에 — M21] 자본주의 계급사회로 질적 전환을 일으켰다고 반세기도 넘게 주장해 왔다. 이 주장의 함의는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 그리고 그들의 정책이 단지 두 가지 측면에서만 좌파와 관련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들은 세계 자본주의의 중요한 일부로 발전했고, 따라서 좌파는 그들에 맞서 싸웠어야 했다. 둘째, 그러나 좌파는 대부분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엄청난 혼란과 사기 저하에 거듭거듭 시달렸다. 원칙적으로 이는 독일 사민당이 구질서에 집착한 것이나, 상당수 영국 노동자들이 보수당에 투표하는 현상 등과 마찬가지로 다양하게 해석할 여지가 있다. 스탈린주의가 두 세대 동안 세계 노동계급과 ‘진보’ 정치에 끼친 영향은 착취받고 천대받는 사람들의 의식에 지배계급의 사상이 일상적으로 끼치는 영향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이 경우에는 문제의 ‘지배계급’이 외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공산주의’는 아마도 1924년의 ‘일국사회주의’ 노선 채택을 기점으로 자본주의에 위협이 못 되는 무기력한 정치가 됐고, 이후 영국 총파업과 중국 혁명의 대실패를 거치고 ‘제3기’ 정책을 거치면서, 결정적으로는 인민전선 정책에 이르러 ‘현실주의’의 이름으로 자본주의를 포용하는 정치로 변질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러코뮤니즘과 그 계승자들의 행태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공산당들은 사회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실상의) 반혁명적 세력이 됐다. 그래서 1936년 이후의 스페인, 1944년 이후의 동유럽과 서유럽, 1956년 헝가리,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매번 민중 혁명에 반대했다. 일리는 성실한 역사가답게 이러한 변질 과정의 사실들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들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설명이 있었다면 훨씬 더 흥미롭고 유익한 서술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72 ‘프랑스에서 어떻게 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일리는 다음과 같이 짤막한 해답만 제시한다.
프랑스와 스페인에 적용된 인민전선 정치에 관한 일리의 서술은 그나마 낫다. 일리는 인민전선 하에서 계급 정치가 민족주의 정치에 종속됐다고 지적한다. 또, 프랑스에서는 1917~21년의 직접행동 정신이 부활하면서 열정이 고무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블룸 정부는 1920년대의 오스트리아 사민당처럼 자신의 정책에 필요한 예산을 충당하려고 자본주의의 번영에 의존했고, 막상 자본가들이 ‘파업’을 벌이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스스로 했던 약속들을 저버렸고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축소했다. 여기서도 일리는 ‘사건사적’ 서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각 시기마다 각 세력들이 보인 대응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러한 정세에서 좌파가 어떻게 개입해야 했는지를 살펴보는 서술 말이다. 특히 가장 왼쪽에 있는 세력이던 프랑스 공산당의 구실을 날카롭게 분석해야 한다. 그러나 일리는 프랑스 공산당이 “투쟁성을 고무하려 한 만큼이나 그것을 단속하려 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이러한 상황에서는 정치적 의지를 끌어모을 수 있는 비전을 갖춘 지도자들이 필요했다. 1936년 6월에 찾아온 호기를 활용하고, 역사적 기회가 왔다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우리 편의 이점을 활용해 지배계급의 급소를 타격하고, 프랑스 공산당이 말한 가장 광범한 단결을 이룰 수 있는 지도자들 말이다.
74 좌파는 자본 파업과 같은 위기에 어떻게 대항했으며 어떻게 대항해야 했는가? “우리 편의 이점을 활용해 지배계급의 급소를 타격”한다는 것은 실천에서 어떤 의미인가? 그러한 실천의 한 가지 측면은 사회화를 향한 추가 조처였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확실히 공장이나 광산 등지의 노동자들을 더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실제로 그런 요구가 있었다). 만일 그랬다면 ‘1917년’에 작동한 논리와 유사한 논리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의 바람과 다르게 인민전선의 논리적 한계를 넘어섰을 것이다. 1936년의 프랑스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대중 동원은 보통 두 가지 방향 중 하나로 발전한다. 즉, 수많은 대중의 조직력에 의존해 정치와 사회를 제도적으로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전진하거나 아니면 해산과 사기 저하를 겪고 때로는 피의 대가를 치르고서 지배계급의 입지가 회복되는 상황으로 후퇴한다. 무릇 운동은 발전하는 도중 결정적 고비마다 그러한 선택에 직면한다. 그 때 운동과 운동의 적 사이의 세력관계뿐 아니라 운동 내부의 세력관계도 시험대에 오른다. 구체적 계기와 사건들이 중요하다. 2백 년의 대중운동 경험에서 알 수 있는 바는 각각의 운동에는 고유한 역사적 특수성이 있지만 예외 없이 양자택일의 순간이 등장하고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좌파는 스스로 무능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이런 지도자들이었다면, 예컨대 프랑스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했는가? 그러한 지도력이 프랑스 사회당이나 급진당에서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면 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비전을 갖춘 그런 지도력은 항상 대중 운동 안에서 비전이 없는 다른 지도력에 맞서 건설돼야 한다. 이것은 운동 내부의 경쟁적인 경향 사이의 투쟁을 의미한다. 이 투쟁은 분명히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레닌주의’와 비슷한 노선을 추구하든가, 아니면 운동을 온건화하고 무력화하는 자들에게 양보해서 추상적 ‘단결’을 추구하며 회피하든가 둘 중 하나다.75 일리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가 말한 대로 인민전선 전략은 파산했다. 그렇다면 그는 모종의 대안을 거론할 만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일리는 스페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스페인 내전은 좌파와 민주주의에 또 다른 끔찍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일리는 스페인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인민전선이 얼마나 큰 재앙이었는지 보여 주는 수많은 자료들을 제시하지만 대안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는다. “중앙 사령부의 지휘에 따라 전쟁을 벌이는 것과 혁명의 성과를 지켜내는 것은 서로 배타적인 게 아니었다”는코민테른은 노동계급 정당들의 공동전선과 더 광범한 인민전선을 둘 다 겸비하기를 원했다. … 그러나 이런 노력은 수많은 분열 때문에 손상됐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분열은 사회주의적 요구들을 포기한 채 자기제한적으로 공화국 수호를 옹호한 코민테른의 태도와 민중 투사들 — 그들에게는 혁명이 모든 것이었다 — 의 요구 사이의 대립이었다.
77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등을 테러한 것도 포함됐다. 이런 것에서 누가 무엇을 배워야 했는가? 특히 좌파라면 무엇을 배워야 했는가? 헨리 포드에게는 역사가 “허튼 소리”였을 수 있지만 사회주의자에게 역사는 적어도 충격적인 교훈이나마 배울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일리는 아무 교훈도 끌어내지 않는다.
일리가 썼듯이, 그러한 “분열”에는 코민테른이나 게페우GPU가 “수치스럽게도 소련의 숙청을 따라하면서”요약하자면 1930년대는 좌파에게 끔찍한 시대였고 결국 제2차세계대전이라는 야만이 뒤따랐다. 아마도 “[20]세기의 한밤중”[이 표현은 빅토르 세르주의 것이다 — M21]은 스탈린의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와 불가침조약(곧 파기될)을 맺어 폴란드를 함께 분할했을 뿐 아니라 ‘일국 사회주의’의 끔찍한 종결부로서 독일 공산당원 명단을 실제로 게슈타포에 넘기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제2차세계대전의 인적·물적 피해는 처참하기 그지없었지만 개혁주의 좌파는 용케도 이득을 누렸다. 자신들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연합국이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권력과 일본 제국을 결국 힘으로 누른 덕분이었다. 연합국은 세계 정치 질서를 다시 짜고, 옛 제국의 자리에 새 제국을 세우고, 새 경계를 따라 세계를 분할했다. 이 새 질서는 뜻밖에도 사반세기 동안 전례 없는 성장과 번영을 구가했다.
일리는 전쟁 막바지의 짧은 순간에 다른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었다고 주장한다.
1945년에 좌파가 처한 상황은 1935년에 인민전선 전략이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파시즘에 대항하는 국제적 동맹이 성공을 거두었다. 무솔리니가 물러났고 히틀러가 패배했고, 우익 독재자들 가운데 이제 스페인의 프랑코와 … 포르투갈의 살라자르만이 남았다. ‘노동자 국가’인 소련은 위신을 한껏 드높이면서 전쟁에서 벗어났다. 민주주의와 개혁을 위한 광범한 연합, 이른바 국민전선이 많은 나라에서 건설됐다. 사회당과 공산당의 공동전선도 흔했고 특히 유럽 전역에서 등장했다. 급진적 변화가 진행중인 듯했다.
80 난점은 제1차세계대전 종전 후와 비교할 때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첫째, 반파시즘 위원회의 조직 역량 수준, 즉 전투적 대중에 뿌리내린 정도와 작업장 투쟁이나 병영 반란과의 연계 정도가 훨씬 미약했다는 점이다. 둘째, 운동을 잠재우려는 공산당과 사민당의 정책에 맞서, 진정한 사회 변혁을 위해 전후의 명백한 급진적 분위기를 활용할 능력이 있는 중요한 정치 세력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리는 영국의 국유화가 “이윤의 사회화가 아니라 손실의 사회화”였고 실질적인 사회주의적 내용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81 일리는 다음과 같이 판단했다. “전후 서유럽에서 민주주의 안정의 단층선은 참여였다. … 서글프게도 민주주의적 상상력이 위축됐다. 정치는 의회주의적 틀에 도로 갇혔고, 다른 형식들은 망각됐다.” 82
그러나 일리가 말한 대로 “그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있었다.” 그 기회는 잘해야 1943년에서 1947년까지였다. 일리는 당시를 “파시즘에 반대해서 단결할 순간”으로 부르면서 “급진적 가능성”의 시대로 여긴다. 내가 보기에 일리는 그 순간의 가능성을 약간 과장하는 듯하다. 일리의 주장인즉슨,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더 민주적이고 참여적인 대안의 맹아였고, 이 조직들이 특히 공산당의 압력 때문에 해산되고 무장해제된 것이 결정적 패배였다는 것이다. 곧, “레지스탕스 조직들은 대안적 역사 발전의 맹아적 형태였고 1917~21년에 유럽 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노동자 평의회와 비슷한 기관들이었다. 두 운동은 모두 종전이라는 비상 상황에서 식료품 공급을 조달하고 사회를 운영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한편 평범한 사람들의 활력과 기술을 끌어모으면서 정의롭고 평등주의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재편하기를 염원했다.” 여기서 일리는 말버릇처럼 “창의적인 중도적 해결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유실됐다고 말한다. “전국적 영역과 지방의 일상 사이의 간극을 메우면서 새로운 참여 형태를 막 등장하던 입헌적 타협으로 확립해, 민중의 활력과 이상주의와 헌신을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강조는 콜린 바커).전후에 미국이 서유럽을 보수적으로 공고히 하는 데서 핵심 구실을 했다면 동유럽에서는 소련이 보수적인 영향력을 냉혹하게 강요했다. 유럽 전체로 보면 다른 수단 때문이든 대중의 생활수준을 높이는 방식 덕분이든 노동자들은 새로 재개된 자본 축적에 굳건히 종속됐다.
1968년과 그 이후
83 1945년 이후 20년이 넘도록 혁명적 사상은(심지어 급진적 사상조차) 오로지 극소수 고립된 종파들 ― 샤를 드골이 1968년에 금지하면서도 비웃어 댄 서클들 ― 의 전유물이었다. 급진적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보수적 사상이 득세하자 지도적인 좌파 사상가들조차 영향을 받았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는 기껏해야 급진좌파가 어느 정도 재편되는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특히, 1956년 헝가리 혁명의 분쇄로 좌파 진영에서 공산당의 헤게모니가 무너졌고, 무소속인 신좌파가 예컨대 프랑스의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나 영국의 핵무장해제운동CND의 성장에서 상당한 구실을 했다. 20여 년 간의 완전고용 덕분에 현장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높아졌고, 이는 비공인 파업 같은 행동의 증대로 나타났다. 또, 일리가 언급하지는 않지만, 몇몇 중요한 충격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전달됐다. 미국의 [흑인] 공민권 운동은 유럽 급진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중요한 상황 전개의 토양이 됐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공공연한 반대를 빠르게 확산시킨 학생운동, 막 시작된 새로운 여성운동, 자본주의의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의 시작, (약간 뒤에) 등장한 동성애자 해방 운동, 이 모든 것이 미국에서 동쪽으로 퍼져나가 유럽 전역에서 독자적인 색깔과 형태로 발전했다.
1960년 당시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 시대 지식인들은 마지막 왕이 마지막 사제의 창자로 목 졸려 죽는 날을 열렬히 바라는 것 같지 않다”고 썼다.이러한 충격들이 한데 모여 1968년 프랑스에서 극적으로 폭발했다. 그해에는 또한 테트[베트남의 설 — M21] 공세, 아일랜드 공민권 운동의 탄생 등 무척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68년 5월과 6월에 좌파 역사에서 새 시대가 시작됐다. 일리는 5월의 사건들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노동자들이 그르넬 협정을 거부한 뒤 나타난 위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대중운동과 기존 좌파 지도부 사이의 간극이 정말 중요해졌다. 대중운동에는 전국적 구조가 전혀 없었다. 중앙집권제 반대는 일부 목적을 위해서는 이상적이었지만 국가의 전면적 위기 상황에서는 무능력했다.
85 한편에는 프랑스 공산당이 전형이라 할 보수적인 ‘구좌파’가 있었고 맞은편에는 권위주의를 반대하고 자치라는 이상을 추구하는 ‘신좌파’가 있었다. 일리가 구분선을 정확히 그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일리는 ‘구좌파’가 “국가 권력의 장악”을 말한 반면, 신좌파는 일상 생활의 변화에서 시작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상들이 1968년 이전 시대와 이후 시대를 구분해 준다는 것이다.
일리는 더 나아가, 정부가 중앙집권적 무력을 사용해 파업 노동자들을 공격했고, 중앙집권적인 프랑스 공산당이 학생들을 향해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는 것도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20세기의 마지막 30여 년 간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서술에 실마리가 될 만한 일반적 교훈을 끌어내지는 않는다. 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다. “두 좌파가 드골의 5월 30일 연설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맞섰다. 한쪽은 정상적인 정치가 재개되기를 노심초사하며 기다렸고, 다른 한쪽은 그러한 가능성을 믿지 않았다.”직접 민주주의와 참여 형태에 매료되기 시작해서 ‘성적性的 관용’을 거쳐 성애와 대항문화의 무절제한 쾌락주의에 이르기까지, 자치 실험에서 소외에 대한 강박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면에서 ‘1968’년은 ‘1945’년의 헤게모니에 도전했다. 그 결과로 일어난 갈등이 해결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런 갈등의 장기적 효과는 엄청났다. 그 때문에 정치의 토대가 재정립됐다. 좌파 개념도 복잡해졌다. 급진 민주주의의 주체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존의 생각도 변했다.
87 구좌파의 보수주의와 신좌파의 급진주의 사이의 대립을 위로부터의 정치와 아래로부터의 정치의 대립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신좌파 사이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둘러싼 논란이 분분했다. ‘신좌파’의 일부는 (공산당이나 사회민주주의 정당 형태의) ‘구좌파’ 진영으로 얼마든지 후퇴할 수 있음도 완전히 입증됐다. 예를 들어, 새로운 페미니즘이나 성적 관용이 저절로 반권위주의나 자주관리라는 이상과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일리의 용어들은 모호하다. 구좌파의 관심사인 “국가 권력 장악”은 혁명으로 권력을 잡는 것일 수도 있고 국가 공직을 약간이라도 차지하고자 선거에 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는, 프랑스 공산당(과 본질적으로 개혁주의적인 여러 정당들)은 노동절에 써먹을 미사여구로 ‘혁명’이라는 단어는 간직하고 있었다. 비록 일리는 기이하게도 뒤에 가서(그때쯤이면 이미 유러코뮤니즘으로 전향한)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의 공산당들이 이미 1920년대 이후로 더는 혁명적 사회주의 견해를 진지하게 고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이 당들이 “서유럽에서 혁명적 사회주의를 마지막까지 옹호한 조직들”이라고 말하지만 말이다!88 오히려 이 정당들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 사실, 이 당들은 이민자 통제를 더 강화하고 이민자의 ‘적정 수’ 논의를 수용해서 인종차별을 부추겼다. ‘신노동당’이 ‘구노동당’보다 훨씬 더 심하다는 사실은 제쳐두자. 구노동당도 수치스럽게도 1965년부터 인종차별적 태도를 취했고, 89 공산당은 이민 규제의 ‘필요성’을 수용하면서도 이민 규제가 ‘인종차별적이지 않아야’ 한다고 촉구했을 뿐이다. 도대체 인종차별적이지 않은 이민 규제라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
중요한 측면들에서 “정치의 토대”가 변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리가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쟁점인 젠더·성 정치의 (재)발견이 그런 변화 중 하나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사상 자체가 엄청나게 풍부해졌다. 비록 일리가 크게 다루지는 않지만, 점차 긴급해지는 자본주의의 환경 파괴에 대한 비판도 사회주의 사상을 쇄신했다. 일리는 페미니즘이 제기한 문제들에 집중하다 보니 유럽의 이민, 인종차별, 파시즘의 부활 같은 쟁점들의 중요성을 약간 무시한다. 일리는 인종차별과 그 밖의 분열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좌파 정당들은 대체로 대중의 분열이라는 이 문제를 회피했다”면서90 여성운동이 에드워드 톰슨의 말을 빌리면 사회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토끼굴을 파는 데 성공했다(비록 19세기 노동운동처럼 여러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91 여성운동은 유럽 좌파 사이에서 토끼굴을 파는 데 특별히 성공을 거뒀고, ‘계급’·‘민주주의’ 기타 등등에 대한 유럽 좌파의 근본적 개념들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압력 하에 재구성됐다.
일리는 ‘2세대 페미니즘’에 주목하지만, 실제로는 그 영향을 과소평가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는 “2세대 페미니즘은 자신을 전국적 세력으로 제도화하지 못했다”고 쓰면서,92 근본적으로 그는 “노동운동의 전진이 멈췄다”는 홉스봄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한다. 일리는 과거에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노동계급 중심성이라는 사상과 연결돼 있고 ‘포디즘’(그 핵심은 대공장과 케인스주의다)에 바탕을 뒀지만 이제는 바로 그 정체성 기반 자체가 사라지면서 정치적 구성체인 노동계급 자체도 함께 사라졌다고 주장한다. 일리는 “계급이 분석적 범주로서 그리고 사회적 삶을 조직하는 조건으로서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나는 ‘ … 할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든다!), 실제로 “계급의 구조와 외형이 크게 변했다”고 올바르게 말한다. 93 “새로운 고용 패턴으로 말미암아 노동계급성의 지형도와 성별 관계가 변했고 주택, 가족, 성애, 친교, 학교교육, 여가와 유흥, 취향, 스타일 등 일상 생활의 구조도 바뀌었다. 정체성 문화도 변했다. 대표적 노동조합원이 광원이나 항운 노동자, 철강 노동자, 기계공, 기타 고된 육체 작업에 근육과 지성을 사용하는 남성이냐 아니면 컴퓨터나 매점 앞에 앉아 있는 남녀나 공공기관의 세탁 노동자, 대도시 병원의 간호조무사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정치의 기초로서 계급의 성질이 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94 그래서 어떻다는 것인가? 오늘날 노동계급의 정체성 문화는 1930년대에 당시 새로 등장한 (대개 남성이 일하는) 자동차와 비행기 공장이나 (대개 여성이 일하는) 경공업 공장들의 “정체성 문화”와 어떻게 다른가? 이 부문들은 처음에 근본적으로 노동조합 운동이 불가능한 공간으로 여겨졌지만 나중에는 노동자 전투성의 핵심 아성(그리고 사실상 노동당의 확고한 표밭)으로 인식된다. 결국 핵심 논점은 다음과 같다. 자본주의 내의 지속적인 사회학적·문화적 변화, 말하자면 노동계급의 직업 구성 변화 같은 ‘구조’ 변화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에서 계급투쟁의 위상이 달라지는가? 아니면 계급투쟁의 정치가 훨씬 더 중요한가? 일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사회주의 정치의 기초로서 ‘계급’이 끝났다면 도대체 오늘날 ‘사회주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계급에 바탕을 둔 급진 정치가 ‘신사회운동’의 정치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리는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널리 받아들여진 개념을 좇아 그렇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관점은 옛 공산당 출신 지식인들도 공유하는 것인데 이들은 영국에서 《마르크시즘 투데이》를 창간했고(그 뒤 폐간했다), 유럽 좌파 대부분이 ‘초좌파주의’에서 벗어나 처음에는 사회민주주의에 타협하고 점차 ‘시장 사회주의’에 타협하고 급기야는 ‘시장주의’에 타협한 흐름의 지적인 반영이었다.
일리가 국제사회주의경향과 가장 대립적인 주장을 할 때는 “계급과 노동정치”를 논할 때다.95 일리도 그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일리의 관점의 뿌리는 일종의 사회학적 결정론인데,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신사회운동’을 무비판적으로 찬양하는 흐름을 뒷받침한 것도 이러한 결정론이었다.1970년대에 이르러 좌파는 핵심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전통적으로 산업 노동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므로 사회당과 공산당의 청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다. 게다가 나머지 노동자들도 예전처럼 자신들을 집단적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유효한 정체성으로서 ― 집단행동을 고무하고 서로 다른 범주의 노동자들을 하나의 연대 안에서 단결시킬 수 있고 정치적 효능을 유지하는 사회주의 전통의 조직 신화로서 ― 자신의 동력을 잃고 있었다.
사회구조와 사회적 인식에서 산업 경제의 임금 소득자 지위를 공유하는 사회적 집합체라는 의미와 조직화된 정치적 실체라는 의미, 이 이중의 의미에서 노동계급은 쇠퇴했다.
물론 일리는 한 종류의 노동자가 다른 종류의 노동자로 대체돼 왔다고 바로 덧붙인다. 일리는 널리 퍼진 ‘탈프롤레타리아화’ 테제에 속아 넘어갈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일리는 전에는 노동계급이 ‘형성’(다시 톰슨의 표현을 빌리면)되고 있었다면, 이제는 노동계급이 ‘해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해체의 원인을 반쯤은 구조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97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 유럽에서 절정에 이른 거대한 대중 투쟁 물결은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공식 공산당의 정치가 계속 지배한 결과로 생겨난 근본적으로 정치적인 장벽에 부딪혔다. 그 물결은 가라앉았고 물결의 퇴조는 특히 산업 투쟁에서 두드러졌다.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즉시 억누르고 후퇴시킨 것은 자본과 국가의 직접적 공세가 아니라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그들과 연계된 정당들의 계급 협력 정치였다. 이 점에서 1970년대에 대한 국제사회주의경향의 해석은 일리의 해석과 현격하게 다르다. 일리가 보기에 노동조합과 노동당 정부 사이의 사회협약에는 운수일반노조TGWU의 잭 존스가 말한 “시급히 필요한 사회적 이상주의와 윤리적 동기”가 깔려 있었다. 98 일리는 존스와 당시 주요 ‘좌파’ 노조 지도자인 휴 스캔런이 파업 파괴를 부추긴 것이나 영국의 좌파들이(국제사회주의자들IS과 특히 영국 공산당조차) 사회협약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가입이 줄어든 것에 대한 일리의 설명에도 단서를 달아야 한다. 일리는 영국노총TUC이 약해진 이유를 “맹렬한 반反노동조합 공세” 때문으로 설명한다. 99 마치 그러한 공세가 존스와 스캔런이 길을 닦아 놓은 파산한 ‘신현실주의’보다 노총 약화의 더 큰 원인이었다는 듯이 말이다. 1980년대 노동계급 조직의 중대한 패배들은 결코 사회적 과정의 자동적 결과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러한 패배 중 가장 큰 패배라고 할 수 있는 영국 광원들의 패배는 양차 대전 사이 파시즘의 승리처럼 ‘물리칠 수 있는’ 패배였다. 파업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었고 다른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연대 행동을 확산시키지 않아서 대처가 광원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100
내가 보기에 지난 30년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설명이 있다.101 1970년대 중반부터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침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02 그러나 그런 후퇴의 시기와 패배의 시기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가능한 것과 필연적인 것,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정치적 개념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일리는 다소 결정론적인 자신의 견해 때문에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계급의 힘을 대체할 만한 것을 찾는다. 그래서 노동계급의 조직과 전투성이 회복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리는 1995년 프랑스에서 벌어진 엄청난 공공부문 파업을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 또, 일리의 설명으로는 지난 1~2년 동안 반전 운동에 고무돼 이탈리아·스페인·그리스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리는 다소 장밋빛의 과거와 우울한 현재를 대비시킬 뿐이다.
패배의 시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자신감이 회복돼야 하고 때로는 과거 투쟁의 상처를 덜 간직한 새 세대의 등장도 필요하다. 그러나 이 과정을 노동계급의 직업 구성 변화로 말미암은 모종의 말기적 쇠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이러한 변화를 통해 노동조합운동은 진보세력으로서의 신임을 상실했다. 과거에 노동조합은 언제나 사회주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었다. 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외에도 노동조합 운동이 약자의 무기로서 착취와 사회적 불평등, 자본의 권력에 맞서는 유일한 방어 수단으로서 집단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결집시킨다는 폭넓은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 운동은 계급의 역량이었고 대중은 이를 통해 단결해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임금과 노동조건을 즉시 개선하는 데는 산업 노동자의 힘이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운동은 또한 더 원대한 미래상, 공익이라는 집단주의적 이상, 사회 개선을 향한 희망, 사회적 연대라는 일반적 윤리이기도 했다. … 그러나 복지국가 아래서 노동조합 운동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 노동조합 운동은 대체로 부문주의로 협소해졌다.
이러한 설명을 들으면, 부문주의가 과거에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노동조합의 역사는 부문주의와 집단주의의 변증법적 역사라는 것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역사를 보면 금속노조는 1940년에야 여성의 조합원 자격을 인정했고 그것도 특별 ‘부문’으로서 그랬다. 부문의 힘이 항상 계급 정체성의 인식을 가로막는 후진적 특징인 것만도 아니었다. 예컨대, 제1차세계대전 때의 직장위원 운동에서 직업별 노동조합이 힘을 발휘한 사례를 보라.
104 1990년에 이르면 일리가 말한 “변화의 옹호자들”이 자본주의에 굴복해 변화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좌파, 즉 “신념의 수호자들”이 1990년에 매우 약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을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애처로운 보수파로 취급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21세기 초에 전 세계에서 등장한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은 “변화의 옹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신념의 수호자”들이 이 운동을 기꺼이 끌어안았다.
일리는 1990년대에 이르면 “좌파는 변화의 옹호자들과 신념의 수호자들로 나뉘었다. 승리를 거둔 쪽은 변화의 옹호자들이었다”고 설명한다.105 영국의 존스나 스캔런처럼 이탈리아 공산당도 노동자들이 희생하면 경제가 회복되고 사회개혁과 민주주의가 강화되고 더 공정한 기반 위에서 경제를 재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이론을 바탕으로 모종의 ‘사회협약’을 옹호했다. 그 이론이 실천에서 의미하는 바는 개혁을 얻으려면 아군을 해산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리가 말하듯이 “1979년에 이르면 이제 이런 타협을 위해 보여 줄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인플레이션은 12.4퍼센트로 떨어졌고, 노동조합들은 임금물가연동제, 정리해고, 생산성 등에서 크게 양보했다. 그러나 실업률은 계속 상승했고 노동자들의 불만은 쌓여갔다.” 106 스페인에서도 공산당이 ‘협약’의 정치를 추구하다가, 부활한 사회민주주의 정당PSOE에 밀려났다. 프랑스에서도 더 나을 것이 없었다. 일리는 유러코뮤니즘의 성과로 몇 가지 시민적 개혁을 열거하고 나서, 정말 애매하기 짝이 없는 공로 하나를 거론한다. “유러코뮤니즘은 남부 유럽을 사회민주주의의 둥지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107 유러코뮤니즘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일리는 유러코뮤니즘에 관대하다. “새로운 전문직과 화이트칼라 계층에서부터 대졸자와 여성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적으로 다양한 지지층에 광범하게 호소”하면서 공산당은 “전과 다른 종류의 정당이 됐다.” 이어서 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일리는 1968년 이후에 대한 괜찮은 자료들을 계속 제공하기도 한다. 흔히 그랬듯이 일리는 개혁주의 정당의 실패를 그리는 데 가장 뛰어나다. 일리는 이탈리아 공산당PCI이 “법과 질서의 정당, 민주적 합법성의 보루, 헌법의 방패”가 되면서, 다시 말해 기독교민주당DC의 기득권으로 오염돼 있고, 정경 유착과 개인 축재의 효율적 도구인 부패한 국가를 수호하는 보루와 방패로 전락하면서, 이탈리아에서 유러코뮤니즘 전략이 죽을 쑤게 됐다고 지적한다. 공산당은 테러 반대를 이유로 시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경찰의 권한을 확대해, 시민적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자신의 이름을 크게 더럽혔다. 또, 기독교민주당과의 강력한 제휴를 위해 공산당과 더 광범한 좌파 진영 사이의 유대를 훼손시켰다. “이 ‘역사적 타협’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바이마르공화국과 ‘붉은 빈’의 경험에서 익히 보았던 사회주의의 오래된 딜레마를 되풀이했다. 이탈리아 공산당은 체제의 전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 기독교민주당, 가톨릭, 자본주의를 수용해서, 이미 승패가 정해진 노름판에 뛰어든 셈이었다.”투사들의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배타적 충성을 요구하는 레닌주의 정당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회적 기반을 바탕으로 느슨한 동맹 구조와 덜 엄격한 정체성을 가진 광범한 캠페인을 벌이는 선거 정당을 향해 나아갔다. 당을 민주화하자는 유러코뮤니즘의 호소는 중앙집권제를 해체하는 것뿐 아니라 다양한 흐름과 쟁점에 당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도 의미했다. 좌파 정당들의 계급 정치적 사고방식을 감안할 때 이러한 쟁점들은 이 정당들에게 독특한 도전 과제였다. 이 의제는 계속해서 문제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유러코뮤니즘은 좌파에게 급진민주주의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주면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동유럽 공식 공산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제시했다.
끊임없이 ‘제3의 길’을 추구하던 일리는 이 대목에서 길을 잃고 만다. 유러코뮤니즘은 서유럽 공산당들이 ‘급진민주주의’라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의 우경화를 살짝 가린 것이었다. 게다가, 우경화하는 사회민주주의와 몰락하는 스탈린주의 사이에서 바람직한 경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어떤 좌파가 매력을 느끼겠는가!
109 사실, 그때까지도 서유럽의 많은 좌파들은 옛 소련과 그 위성국들에 온갖 환상을 품고 그 국가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일리는 이러한 환상들이 끼친 영향력을 심도 깊게 해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일리는 동유럽에서 [1989년 — M21] 분출이 일어나자 이를 설명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일리는 폴란드 연대노조의 사상이 사회주의 언어로 잘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연대노조가 “분명히 사회주의 전통에 속했다”고 올바르게 말하고, “연대노조 운동은 확실히 1917~23년 이후 가장 인상적인 노동계급 반란이었다”고 제대로 지적한다. 그러나 일리가 보기에는 야루젤스키의 게엄령 선포라는 결과도 “불가피했다.” 110 바람직하지 않게도, 일리는 연대노조의 패배를 보며 이탈리아 공산당이 이끌어 낸 교훈에 동의한다.
앞서 말했듯이, 일리가 끝내 스탈린주의를 해명하지 못한다는 점이 그러한 어려움의 한 원인이다. 1980년대에 스탈린주의의 위기를 보며 일리는 약간 방황했다. 일리는 ‘사회주의적’이라는 용어를 계속 옛 소련·동유럽과 연관지어 사용한다.우리는 제2인터내셔널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운동이 탄생하고 발전했던 단계가 활력을 잃었듯이 사회주의 발전의 현 단계(10월 혁명과 함께 시작된)도 추진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리는 스탈린주의 사회의 성격을 철저하게 다루지 않는 바람에 여전히 답변해야 할 문제를 남겨 놓았다. 이 사회들이 모종의 사회주의라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책 전체의 논지에 결함이 있는 것 아닌가? 또한 1989년 동유럽 혁명에 관해서도 두 가지 문제를 해명해야 한다. 첫째, 가령 1980~81년의 연대노조 시기와 비교해 1989년의 ‘사회운동’ 참여 수준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가? 둘째, 새로 집권한 정부들은 왜 그렇게 열렬히 시장을 포용했는가?
112 여기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일리는 정확히 파고들지 못한다. 1989년에는 무언가 “빠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중적 기관을 만드는 주도력이었는데, 그 자체가 대중의 민주적 반란의 필수적 요소라 할 수 있다. 포럼은 이것을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는 ‘거리’를 협상에서 배제하는 것은 원칙 문제라고 선언하면서 이 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동유럽 혁명은 스페인·아르헨티나·브라질 등지에서 일어난 ‘협상을 통한 체제 전환’과 공통점이 상당히 있다. 즉, 대중 시위에 참가하라고 호소할 때를 제외하면 대중은 대체로 배제된다. 실제로 동독에서 대중은 시민포럼의 정치와 그 계급적 가정들을 명확히 거부했던 듯하다. 113
첫 번째 문제에서 일리는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각국 혁명에서 공통된 조직적 매개체는 ‘포럼’이었다고 어느 정도 정확히 지적한다. 일리는 포럼이 “광범한 비공식적 전선이었고, 급조됐고, 주로 지식인들로 이루어졌고, 모호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고, 절차적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대표성이 없었고, … 대표를 자임하는 위원회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일리는 어쨌든 포럼이 “민주주의가 다시 기반을 둘 수 있는 부활한 시민사회, 즉 ‘또 하나의 국가’가 건설될 공간”의 구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서 혁명이라는 격렬한 순간은 창발적인 대중 민주주의가 꽃을 피우는 이례적인 실험실이었다 ―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대중 반란이 대표적인 경우였지만 협상을 통해 이행을 이룬 다른 나라들의 대중 소요도 그 무대가 됐고, 동유럽 전역에서 나타난 사소하고 일상적인 반란과 존엄의 표명도 마찬가지였다.”114 물론 그 준비가 “공통의 지반”이 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시장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췄다”니? 설마 명확히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득세하지 않은 혁명들은 결코 없었다는 말은 아니겠지? 당시 동유럽 지식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든 사회주의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였고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주의’는 여하튼 대체로 공허하거나 도덕적 열정이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자유’와 시장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서유럽에 비판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적었다면 동유럽에는 훨씬 더 적었다. 그나마 있던 극소수(특히 폴란드의 쿠론과 모젤레프스키)는 혁명적 사상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유고슬라비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프락시스》[사회주의적 휴머니즘을 표방한 철학 학파의 잡지])도 침묵을 지키거나 민족주의로 전향한 지 오래였다. 일리는 동유럽 전체에 가해진 ‘충격요법’[전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들 — M21]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충격요법은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기보다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동유럽이 야만적으로 종속되는 것에 가까웠다.” 115 ‘이라기보다는 … 에 가까웠다’가 아니라 ‘인 동시에 … 이었다’로 바꾸었다면 의미가 더 정확했을 것이다. 그래야 동유럽 상황의 역설을 부각하고, 그러한 시장화와 민주주의의 결합이 한동안 존속할 수 있게 한 조건과 더 장기적으로는 동유럽 사람들을 [2000년과 2001년 — M21] 프라하·제노바 등지의 반자본주의 시위로 끌어들이게 될 조건을 따져봤을 테니까 말이다.
두 번째 문제에서, 일리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의 정부들이 사유화와 시장화에 관한 신자유주의적 신념을 공유한 것이 “좌파에게 곤혹스러운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일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적 소유, 시장, 자본주의, 이것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전복하고자 했던 것들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모종의 케인스주의적 혼합경제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의 시장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춘 것은 심대한 변화였다. 이러한 준비는 동유럽 개혁의 공통된 지반이 됐다.”116 이러한 설명 전체가 몽상에 가깝다. 첫째, 영화 제작자의 상상에서나 있을 법한 “물밀듯한 동궁 습격”은 없었다. 실제로는 궁전 뒷문으로 살며시 들어간 소수 그룹이 궁전을 장악했던 것이다. 일리 자신이 앞서 설명했듯이, 1968년 프랑스에서도 ‘봉기’는 없었다. 진지한 사회주의 혁명 사상은 일리의 환상과 무관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혁명의 ‘상징적 사건들’은 흔히 살육과는 무관한, 노동자들의 자주적 조직 건설과 훨씬 더 가까울 것이고, 결코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천대에 저항하는 온갖 투쟁들을 결집시키는 경제적·정치적 요구들이 결합된 운동의 확산·심화에 가까울 것이다.
일리는 1990년대를 설명하기 시작하면서 봉기의 시대, 즉 “민중 항쟁, 체제가 갑자기 붕괴하면서 국가를 장악하기 위한 총력전이 벌어지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한다. 그 직전까지 일리가 동유럽 혁명을 길게 서술한 것을 떠올리면 다소 기묘하다. 일리가 봉기를 잘 모른다는 점은 러시아 10월 혁명의 상징적 사건이 “물밀듯한 동궁 습격”이라고 말한 데서 드러난다. 일리는 1917년 이후에는 봉기가 드물게 됐다고 생각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중 봉기는 한 차례 있었다. 즉, 1968년 프랑스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중단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9년 혁명은 초국적 규모의 체제 변화를 낳았다. 그러나 그런 예외를 빼면 봉기에 대한 환상 ― 대중이 들고일어나서 정부를 마비시키고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에 대한 환상은 ― 은 대부분 사라졌다.”117 일시적 상황 변화가 있을 때마다 최종적 위기가 닥쳤다고 선언하기 일쑤였던 SLL/WRP를 논외로 하면 IS/SWP는 결코 영국이 혁명 전야라고 선언한 적이 없다. 당명 변경은 훨씬 덜 거창한[혁명 전야 운운에 비한다면 — M21]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혁명적 좌파에게 도통 관심이 없는 일리는 여기서 사실관계도 정확히 확인하지 않는다.
일리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고 말한다. 어차피 환상이라는 것이다. 또, 일리는 1968년에 실망한 일부 학생 급진파들이 그런 환상에 끌렸다고 설명한다. 그들은 “당이라는 만병통치약을 위해 참여라는 이상을 거부한 채 고도로 규율 있는 소규모 종파 형태로” 레닌주의 당 모델을 부활시켰다고 한다. 일리가 [1968년 당시] 누구와 어울렸는지 알 수 없지만 일리의 묘사가 보편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좌파가 종파주의에 빠져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좌파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마 일리가 말했듯이 “종파적 전투성은 시끄러운 촌극 정도”였겠지만, 일리는 적어도 사실관계는 틀리지 말아야 한다. 일리는 각주에서 “사회주의노동자동맹SLL과 국제사회주의자들IS은 영국이 혁명 전야 상황이라고 희망 섞인 선언을 하면서 각각 노동자혁명당WRP(1973년)과 사회주의노동자당SWP(1976년)을 출범시켰다. 두 당은 각각 당원 수가 수천 명을 헤아렸다”고 썼다.일리는 레이브파티[큰 건물이나 야외에서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면서 벌이는 대규모 파티로, 일리는 이것을 일종의 문화 정치로 본다]나 도로 확장 반대 시위, 거리 되찾기 운동 같은 ‘손수 하기DIY’ 정치가 앞으로 나아갈 길의 일부를 보여 준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일리는 약간 온건한 ‘지역주의’ 경제 정책을 추구하면 사회주의 사상이 신자유주의에 빼앗겼던 기반을 되찾고 부분적으로 집단주의도 부활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넌지시 암시한다.
수정된 케인스주의는 실행 가능했다. 공기업의 분권화, 지역의 창의적 시도에 대한 조세 감면과 공적 자금 지원, 소규모 프로젝트를 위한 토지 등의 공공 자원 활용과 계획 인가, 지역사회에 기초를 둔 계획 등의 정책은 사유화를 역전시키거나 국유화 자체를 다시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119 이것은 엄청난 오판이다. 영국의 사례를 보면 더더욱 그렇다. 블레어와 ‘신노동당’은 분명한 경제적 구상이 있었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대처의 이념에서 취하고 발전시킨 구상이었다. 그들은 심지어 사회주의라는 말조차 사용하기를 꺼렸다. 독일 사민당의 어느 공인된 지식인은 “좌파라면 소비자 권리, 자유로운 투자 결정, 자유로운 자산 처분, 분권적 의사결정 과정 등을 옹호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20 그들은 “기존의 사회주의 전통”을 팽개쳤고, 자본주의의 최신 형태들을 받아들이고, 시장의 지배를 인정했다. 일리는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국가라는 아르키메데스의 작용점[지렛대에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점 — M21]이 사라지자 반자본주의적 대안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상상력도 소멸됐다(강조는 콜린 바커).” 121 이러한 한탄은 일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좌파’의 문제를 드러낸다. 사실, 항상 국가 통제라는 해결책을 모색해 온 개혁주의적 사회주의 ― 19세기에 나타난 초기 버전들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을 받았고 20세기에는 번번이 실패했다고 일리가 설명한 ― 는 이제 대단히 취약해진 듯하고, 그 경쟁 상대인 스탈린주의의 국가 ‘사회주의’도 끝났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 ― 예컨대 1980년대의 런던광역시의회GLC ― 은 “지독하게 불리한 중앙정부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그 결과는 일리가 자신의 이야기 말미에 묘사한 1990년대 말의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일리는 “거의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이 “사회주의 정당들은 경제적 구상 없이 다시 집권하게 됐다”고 덧붙인다.일리는 이러한 국가 통제 방식이 과거지사가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래서는 안 된다. 일리가 지난 30여 년 동안 사회주의적 좌파의 지속적인 약화로 묘사한 것은, 상호 연관돼 있지만 부분적으로 모순된 몇 가지 사태 발전의 결과다. 오늘날의 노동계급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망의 내부 조직적 특징이, 부인할 수 없는 직업 구성 변화 때문에 바뀌었지만 노동계급 조직의 잠재력은 결코 약해지지 않았다. 20세기 거의 내내 사회주의 정치의 거대한 장애물이었던 스탈린주의는 치명타를 맞았다. 사회민주주의로 말하자면 (일리가 말하듯) 여전히 재생 능력이 상당하지만, 사회민주주의의 전제가 되는 자본주의의 성공 자체가 더 의심스러워졌고, 사회민주주의가 주창하는 국민국가 수준의 개혁주의도 현재 세계경제의 상태로 볼 때 그다지 가망이 없다.
내다보기와 돌아보기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가? 나는 일리가 책 말미에서 20세기에 작별을 고하며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울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20세기가 끝나기 바로 직전에, 자본주의 세계화와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새로운 운동을 위한 공간이 유럽과 전 세계에서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1999년 11월 말의 시애틀 시위는 다가올 미래를 알리는 눈부신 신호탄이었지만 시위를 만들어 낸 요소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준비됐다. 정말이지 “낙관해야 할 이유들”은 많다.
123 수많은 활동가들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해 2003년 2월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제 시위를 조직했다. 2002년의 유명한 배너에서 따온 말을 빌리면, 자본주의를 ‘더 나은 체제’로 바꿀 방법과 경로를 놓고는 우리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이 논의 자체는, 참여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광범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주 생생하다. 또, 다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거의 이견이 없는 것은,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에서 많은 젊은 여성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 세대 여성들은 오로지 꿈만 꿨을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의 분출 이후 노동계급이 억눌리고 패배한 오랜 ‘침체기’는 이제 1980년대나 1990년대와 달리 더는 신세대의 염원과 상상력을 제약하지 못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확산시킬 수 있는 공간이 대단히 넓어졌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고어古語 사전에나 나오는 단어쯤으로 여겨지던 ‘자본주의’나 ‘제국주의’ 같은 용어가 오늘날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급진적 어휘의 일부가 됐다. 그리고 과거 중요한 논쟁에서 등장하던 쟁점들이 모두 이제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공상적 사상들이 다시 등장할 뿐 아니라 그러한 사상들이 실천적 전략과 조화될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지를 둘러싼 논쟁도 벌어지고 있다. 사회주의 경제의 실현 가능성을 심도 깊게 다룬 책들이 잘 팔리고 있다.결국 이 책의 맹점은 일리의 역사 서술이 운동의 침체기에 유력했던 정치적 정서의 산물이다 보니 지금 우리 주위에서 분출하는 가능성에 대비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일리가 몇 년 안에 제2판을 준비한다면 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주
-
출처: Colin Barker, In the middle way, International Socialism 101 (Winter 2003).
↩
- “나는 중도를 걸어서 여기 이렇게 있다. 20년을 보내고서 / 양차 대전 사이의 20년을 거의 허비한 채” — T S 엘리어트의 시 <네 개의 4중주Four Quartets>에서. ↩
- G Eley, Forging Democracy (Oxford, 2003). 또한 A Callinicos, ‘Bourgeois Revolutions and Historical Mater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43 (Summer, 1989), pp 113~171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x. ↩
- 같은 책 p 4. ↩
- 같은 책 pp viii-ix. T Shanin이 ‘역사의 변동성’이 낮은 시기와 나머지 시기, 즉 ‘기축 시대axial stages’를 비교하는 것도 비슷하다. 전자의 시기는 지배적인 이미지들이 반복되며 변하지 않는 시기이고, 후자는 “상투적인 행동, 경직된 사고, 흔해빠진 고정관념 따위의 족쇄가 부서지고, 하늘 아래 불가능한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거나 아니면 세상이 온통 난장판·아수라장 같은” 시기다. T Shanin, Revolution As a Moment of Truth (London, 1985) p 312. ↩
- 같은 책 p viii. ↩
- 같은 책 p 8. ↩
- 같은 책 p 20. ↩
- 같은 책 p 21. ↩
- 같은 책 p 27. ↩
- 같은 책 p 78. ↩
- E J Hobsbawm, ‘Custom, Wages and Work-Load in the Nineteenth Century’, in Labouring Men (London, 1964). ↩
- Forging Democracy p 30. ↩
- 같은 책 p 55. ↩
- 같은 책 p 56. ↩
- 예를 들어 H Draper and A G Lipow, ‘Marxist Women and Bourgeois Feminism’, The Socialist Register 1976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14. ↩
- 같은 책 p 23. ↩
- 같은 책 p 22. ↩
- K Marx and F Engels, The German Ideology, (London, 1964), p 86. ↩
- K Marx, ‘Theses on Feuerbach’, in The German Ideology, pp 645-647. ↩
- 1879년에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전과 똑같은 생각을 표명했다. “인터내셔널이 창립됐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과제여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노동자들은 무지몽매해서 스스로 해방될 수 없으므로 대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 박애주의자들이 위로부터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사람들과는 동맹을 맺을 수 없습니다.” K Marx and F Engels, ‘Circular letter to Bebel, Liebknecht, Bracke, et al’ (1879) in K Marx, The First International and After (Harmondsworth, 1993), p 375. ↩
- H Draper ‘The Two Souls of Socialism’, International Socialism, first series, 11(1962), pp 12-20.[국역: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 다함께, 2003] 이 글은 여러 매체에 거듭거듭 재수록됐다. 인터넷 웹사이트 www.anu.edu.au/polsci/marx/contemp/pamsetc/twosouls/twosouls.htm에서 읽을 수 있다. ↩
- Forging Democracy p 22. ↩
- 같은 책 p 37. ↩
- 같은 책 p 508. ↩
- 같은 책 p 45. ↩
- 우파 중에도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었다. 로베르트 미헬스는 1908년에 첫 출간한 《정당론》에서 수정주의의 보수적 측면을 완전한 엘리트주의적 비관주의로 발전시켰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조직은 반드시 ‘과두제’를 낳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는 것이다. 미헬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글은 C Barker, ‘Robert Michels and the Cruel Game, in C Barker, A Johnson and M Lavalette (eds) Leadership in Social Movements (Manchester,2001), pp 24-43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133. ↩
- 이탈리아 사회당 안에서 말로는 최대한의 요구를 내걸고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천에서는 실용주의적 행동을 일삼았던 중간주의자들 — M21 ↩
- 같은 책 p 135. ↩
- 같은 책 pp 144-145. ↩
-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명적 사건 5건에서 나타난 이러한 동학은 C Barker (ed), Revolutionary Rehearsals (London, 1987)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141. ↩
- 같은 책 p 146. ↩
- 같은 책 pp 147-148. ↩
- 일리는 1917년 8월 3일 모스크바의 금융업자이자 산업자본가인 파벨 랴부신스키가 한 섬뜩한 말을 인용했다. “굶주림과 국가적 궁핍 때문에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이 이 가짜 민중의 벗들, 온갖 위원회와 소비에트의 위원들의 목을 졸라야만 그들은 제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같은 책 p 142. ↩
- 같은 책 p 148. ↩
- 같은 책 p 152. ↩
- C Harman, ‘Gramsci or Eurocommunism’, International Socialism 98, first series (May 1977), pp 23-26. ↩
- Forging Democracy p 120. ↩
- 같은 책 p 162. ↩
- 같은 책 p 165. ↩
- 같은 책 p 168. ↩
- 같은 책 p 169. ↩
- 같은 책 p 169. ↩
- C Harman, The Lost Revolution: Germany 1918-1923 (London, 1982)[국역: 《패배한 혁명》, 풀무질, 2007] ↩
- Forging Democracy p 172. ↩
- 같은 책 p 172. ↩
- 같은 책 p 173. ↩
- 같은 책 p 174. ↩
- 같은 책 p 174. ↩
- 최근의 상세한 설명은 T Behan, The Resistible Rise of Benito Mussolini (Lonodn, 2003)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183. ↩
- 예컨대, T Cliff, Lenin, volume 1: Building the Party (London, 1975)[국역: 《당 건설을 향하여》, 북막스, 2004]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184. ↩
- 같은 책 p 179. ↩
- 같은 책 p 222. ↩
- G Lukács, A Defense of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London, 2000), p 47. ↩
- 명백히 위협적이지 않은 공제조합조차 억제한 것에 대해서는 S Yeo, ‘State and Anti-State: Reflections on Social Forms and Struggles from 1850’, in P Corrigan (ed), Capitalism, State Formation and Marxist Theory (London, 1980), pp 111-142. ↩
- A Shandro, ‘“Consciousness from Without”: Marxism, Lenin and the Proletariat’, Science and Society 59.3 (1995), pp 268-297. ↩
- 같은 책. ↩
- 이런 점에서, 대개 ‘신사회운동들’을 무비판적으로 다룬 오늘날의 문헌들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
- 마르크스주의는 영국·프랑스·슐레지엔 등지의 [자본주의] 경제 발전과 노동운동 경험을 반성적으로 평가하면서 등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바탕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설명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자들의 조직적 성과에서 소비에트의 중요성을 배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완전한 멍청이가 아니었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여성운동과 동성애자 운동에서도 배웠다. 이런 사례는 아주 많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은 자발적 운동의 ‘외부에서’ 그 운동으로 도입돼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발전 단계들도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외부’에서 자극을 받은 결과였다. ↩
- 거듭거듭 되풀이된 사건들 속에서 그런 ‘전달 세력’의 조직적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이를 이론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그러한 이론화는 처음에는 다소 조야하거나 불충분할 수도 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수정주의의 근원 논쟁에서는 ‘쁘띠부르주아 근성’론과 ‘노동귀족’론이 등장했다. 전자의 경우는 C Johnson, The Problem of Reformism and Marx’s Theory of Fetishism’, New Left Review 119 (Jan-Feb 1980), pp 70-96을 보시오. 개혁주의의 ‘노동귀족’론은 T Cliff, ‘Economic Roots of Reformism’, Socialist Review (June 1957)을 보시오. 이 글은 T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Selected Writings, vol 3 (London, 2003), pp 177-186에 재수록돼 있다. ↩
- G Lukács, 같은 책. ↩
- Forging Democracy, p 237. ↩
- 같은 책 p 238. ↩
- 같은 책 pp 238-239. ↩
- 같은 책 pp 238-239. 한 가지 단서를 달면, 그 ‘연결’은 이미 1914년 훨씬 전부터 이뤄져 있었다. 예를 들어 R Miliband는 오래 전에 뛰어난 저작인 Parliamentary Socialism (London, 1961)에서 이를 보여 줬는데, 이 책은 일리의 참고 문헌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빠져 있다. ↩
- Forging Democracy p 262. ↩
- 같은 책 p 236. ↩
- 같은 책 p 270. ↩
- 같은 책 p 271. ↩
-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좌파가 독설을 퍼부을 필요는 없다. 레닌에게 배워야 할 핵심이 독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독설은 의미를 분명히 전달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
- Forging Democracy p274. ↩
- 같은 책 p 275. ↩
- 같은 책 p 274. ↩
- 국제사회주의경향은 전후 장기 호황이 군비 지출을 바탕으로 지속됐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예컨대, T Cliff, ‘Perspective for the Permanent War Economy’, Socialist Review (March 1957)을 보시오. 이 글은 T Cliff, Marxist Theory After Trotsky: Selected Writings, vol 3 (London, 2003), pp 169-176에 재수록돼 있다. 또,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London, 1968)도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288. ↩
- 같은 책 p 297. ↩
- 같은 책 p 296. ↩
- 같은 책 p 296. ↩
- A MacIntyre, ‘Breaking the Chains of Reason’, in E P Thompson et al (eds), Out of Apathy (London, 1960), p 195. ↩
- Forging Democracy p 348. ↩
- 같은 책 p 350. ↩
- 같은 책 pp 352-353. ↩
- 같은 책 p 414. ↩
- 같은 책 p 399. ↩
- P Foot, Immigrations and Race in British Politics (Harmondsworth, 1965)를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378. ↩
- E P Thompson, ‘The Peculiarities of the English’, The Socialist Register 1965 (London, 1965), reprinted in E P Thompson, The Poverty of Theory (London, 1978). ↩
- Forging Democracy 23장. ↩
- 같은 책 p 394. ↩
- 같은 책 p 394. ↩
- ‘신사회운동’에 대한 비판은 C Barker and G Dale, “Protest Waves in Western Europe: A Critique of ‘New Social Movement’ Theory”, Critical Sociology 24.1/2 (1968), pp 65-104를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397. ↩
- 그런 설명은 C Barker and G Dale, “Protest Waves in Western Europe: A Critique of ‘New Social Movement’ Theory”, Critical Sociology 24.1/2 (1968)에서 훨씬 더 구체화했다. 또, 탁월한 역사책으로는 C Harman, The Fire Last Time: 1968 and After (London, 1988)[국역: 《세계를 뒤흔든 1968》, 책갈피, 2004]이 있다. ↩
- Forging Democracy p 389. ↩
- 같은 책 p 391. ↩
- A Callinicos and M Simons, “The Great Strikes: The Miners’ Strike of 1984-5 and its Lessons”, International Socialism 27 (Spring, 1985)를 보시오. ↩
- 이런 동역학의 일부를 잘 설명한 글은 R Fantasia and J Stepan-Norris, “Labor Movement in Motion”, in D A Snow, S A Soule and H Kriesi (eds), The Blackwell Companion to Social Movements (Oxford, 2004) pp 555-575를 보시오. ↩
- 당시 상황을 분석·평가한 뛰어난 글로는 T Cliff, “The Balance of Class Forces in Recent Years”, International Socialism 6 (Autumn 1979)가 있다. 이 글은 T Cliff, In the Thick of Workers’ Struggle: Selected Writings, vol 2 (London, 2002) pp 373-422에 재수록돼 있다. ↩
- Forging Democracy pp 401-402. ↩
- 같은 책 p 403. ↩
- 같은 책 p 412. ↩
- 같은 책 p 412. 일리는 당시 영국 상황도 비슷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
- 같은 책 p 415. ↩
- 같은 책 p 416. ↩
- 같은 책 pp 431-455. ↩
- 같은 책 pp 433-436. ↩
- 같은 책 p 437. ↩
- 같은 책 pp 448-449. ↩
- C Barker and C Moores, “Theories of Revolution in the Light of 1989 in Eastern Europe”, Cultural Dynamics 9.1 (1997), pp 17-43를 보시오. 또한 L Fuller, Where Was the Working Class? Revolutions in Eastern Germany (Illinois, 1999)와 G Dale, Popular Protest in East Germany: The Revolution of 1989 (London, 2004)를 보시오. ↩
- Forging Democracy p 450. ↩
- 같은 책 p 451. ↩
- 같은 책 p 457. ↩
- 같은 책 p 583. ↩
- 같은 책 p 481. ↩
- 같은 책 p 482. ↩
- 같은 책 p 482. ↩
- 같은 책 p 483. ↩
- M Steel, Reasons to be Cheerful (London, 2001)는 아주 재미 있는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