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화, 마르크스주의 *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역사에 관해 토론하고 앉아 있을 게 아니라 거리로 나와 선동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거리로 나와서 선동도 한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지극히 중요한 문제다. 어째서 중요한가? 조지 오웰의 《1984》에는 전체주의 국가의 사고를 묘사하는 문구가 있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 사회가 어디서 왔는지 대중이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지배계급은 대중이 사회 변화를 이해하는 것을 막고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를 보면 대중이 과거를 알지 못하게 하려고 지배계급이 애쓴 사례가 숱하다. 내가 즐겨 인용하는 사례는 기원전 221년 진 제국이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을 때다. 진 시황제는 옛 전통을 언급하는 모든 책을 불태우라는 포고령을 내렸다. “지금 유생들은 지금의 것을 배우지 않고 옛것만을 배워 당세를 비난하며 백성을 미혹시키고 있다. ⋯ 이런 것은 금지하는 것이 적절하다.” “[금지된 책을 논하는 자는 ― 하먼] 저잣거리에서 처형해 백성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옛것으로 지금을 비판하는 자는 멸족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일이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되풀이됐고 오늘날에도 세계 여러 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15세기에 아즈텍인들은 지금의 멕시코와 과테말라에 제국을 세우면서 그들의 모든 과거 기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새로운 전통을 발명해 아즈텍 황제의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100년 후 그곳에 온 스페인 정복자들도 같은 논리에 따라 비슷한 일을 자행했다. 그들은 아즈텍 사원과 기념물을 모조리 파괴하고 아즈텍 문헌을 힘닿는 데까지 파괴해 아즈텍 문명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더 근래로 오면 나치도 책을 불태웠다. 스탈린도 역사를 왜곡하고, 사진을 조작하고, 뉴스 릴을 조작하고, 토론을 일절 금지하고, 온갖 역사적 문건을 루뱐카의 국가정치보안부 본부 지하실에 처박고는 문을 잠가 놓았다. 불과 10년 전까지도[이 글은 1998년에 발표됐다 — 역자] 헝가리에서는 1956년 혁명에 대한 논의가 일절 금지됐다. 그 얘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생계를 잃거나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힐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불과 20년 전까지 스페인에서는,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금지됐다는 사실이 지면이나, 학생인 경우 리포트에서, 또는 대화에서도 꺼낼 수 없는 주제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공중 폭격인 1937년 게르니카 폭격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당시 게르니카시市가 폐허가 된 것은 바스크인들의 방화 탓’이라는 거짓 신화가 유포돼야 했다.
이처럼 지배계급에게 역사란 대중의 정신을 지배하는 데서 중요한 수단이다. 최초의 역사 기록은 고대 이집트와 고대 수메르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왕들의 명단이다. 왕들은 필경사로 하여금 자기 선조들의 이름을 적도록 했는데, 대개 그 계보는 신화 속의 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통해 자신이 그 사회의 화신이라는 사상을 길이길이 남기려 한 것이다. 이런 접근법은 오늘날까지도 주류 역사계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요즘 학교는 좀 다르다는 얘기도 있지만, 내가 학창 시절에 처음 배운 것은 알프레드 대왕과 후대 왕들의 이름과 재위 기간이었다. 오늘날에도 엄청나게 많은 역사책이 그런 식으로 서술돼 있다. 이러저러한 통치자가 권좌에 올라 이러저러한 것을 했고 그 후 이러저러한 통치자가 그 뒤를 이었다는 식이다.
왕들을 열거하는 역사관과 사뭇 다른 역사관이 부상하기 시작하는 시기가 있다. 사회가 깊은 위기에 빠지고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그 위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시기다. 가장 오래된 두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레폰네소스 전쟁사도 그리스 사회가 거대한 변화를 겪을 때 쓰였다. 예컨대, 투키디데스는 거대한 위기의 시기에 그 책을 썼다. 당시 아테네는 군사적 패배로 인해 패권을 잃고 사회가 붕괴됐다. 투키디데스는 그런 현실을 설명해야 했고 그러려면 왕들의 명단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과거에 대한 모종의 과학적 이해에 도달해야 했던 것이다.
근대 역사학의 등장은 계몽주의 운동의 일부였다. 그 과정은 18세기 유럽 전역, 특히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에서 활약한 일련의 사상가들이 사회 변화에 직면해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쓴 과정이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와 데이비드 흄의 《영국사》가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그 외에도 장 자크 루소와 애덤 퍼거슨, 애덤 스미스의 저서들이 있다. 계몽주의의 모든 도전이 그렇듯이 역사의 과학적 이해를 시도한 사상가들 또한 생산을 조직하는 새로운 방식과 결부된 새로운 계급, 즉 부르주아지에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사회를 부르주아지에게 이롭게 재조직할 수 있는지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역사를 왕들의 명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뜻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사실들을 모종의 전반적 패턴으로 묶어야 했다.
요즘은 계몽주의를 공격하는 것이 유행처럼 돼 있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람은 계몽주의의 과학적 접근법을 옹호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려고 애써야 한다. 보수 사상가들은 언제나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계몽주의의 접근법에 세 가지 방식으로 대응한다. 어떤 자들은 ‘역사란 없다’고 주장한다. 성경이 ‘세상에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고 가르쳤다면, 오늘날 그들은 유전자가 세상만사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성의 부정은 생물학적 충동에 대한 논의로 전환된다. 그러나 결국 하려는 말은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사회는 어떠한 근본적 변화도 겪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대응은 역사에는 어떠한 패턴도 없다는 낡은 주장이다. 이것은 오늘날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에 따르면 모든 것은 우연적이고 예측 불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예측 불가능한 인과의 사슬들이 과거의 사건들에서 오늘날로 이어진 결과에 불과하며, 우리는 그 과정을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려 해서도 안 된다.
셋째 대응은 모든 역사의 패턴이 모두 순전히 우리의 정신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역사는 일련의 신화로 이해된다. 이는 역사가들이 저마다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정당화한다. 19세기에는 영광스러운 민족에 관한 신화가 흔히 창조됐다. 천년 넘는 크로아티아 민족사나 독일 민족사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역사에서는 모든 것이 민족의 성장을 중심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역사는 민족이라는 이상이 스스로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우리는 이런 배경 속에서 마르크스를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킨 시기는 1840년대였는데, 당시는 계몽주의가 당대 사람들의 기억에 아직 대체로 생생하게 남아 있고 계몽주의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던 시기였다. 동시에 마르크스는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합리주의적 거부가 시작되는 것을 목도했다. 이에 마르크스는 계몽주의 전통의 한계를 이해하면서도, 그 전통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과학적인 역사 이해가 무엇인지를 정립하려 했다.
마르크스가 계몽주의적 접근에서 더 나아간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 마르크스는 계몽주의가 언제나 역사를 현재에서 멈추는 것으로 가정한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지에게 역사란 있었지만 더는 없는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권력을 잡자 변화를 이해할 어떠한 이해관계도 없게 됐다. 오히려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했다.
둘째, 과거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사상과 정치 제도, 국가, 문명의 흥망으로 이해하려 한 적은 있어도, 평범한 사람들의 활동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정말로 인류의 역사를 이해하고 싶다면 한 가지 간단한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서로 협업하지 않으면 생존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생존 수단을 얻기 위해 서로 특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리고 생존 수단을 만드는 데서 얼마나 성공적이냐가 그들의 다른 모든 활동을 결정한다.
모든 사회 발전과 사회 변화의 근원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있다. 즉, 그들이 생존 수단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서로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 앞 부분에서 썼듯이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을 전제는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이 아니다. ⋯ 우리의 출발점은 현실의 개인들과 그들의 활동, 그들이 사는 물질적 조건이다. 여기서 그들이 사는 물질적 조건은 그 개인들에게 기정의 것으로 주어지는 것이자 그들의 활동으로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접근 방법의 전제는 ⋯ 현실의, 즉 경험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일정한 조건하에서 이뤄지는 변화 과정 속의 인간들이다. 이 능동적인 생존 과정이 제시되자마자 역사는 경험론자의 역사와 달리 죽은 사실들의 묶음에 그치지 않게 된다. ⋯ 또, 관념론자의 역사와 달리 상상 속 주체들의 상상 속 행위들이 아니게 된다.
과학적 역사 이해는
⋯ 생존을 위한 물질적 생산 자체를 설명하는 것에서 출발해, 생산양식과 연결돼 있고 생산양식이 낳는 교류 형태[사람들 사이의 관계 — 하먼]를 모든 역사의 기반으로서 이해하고, 그 교류 형태가 국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보일 뿐 아니라, 의식과 종교, 철학, 도덕 등의 온갖 다양한 이론적 산물들과 형태들을 설명하고, 그것들의 기원과 발전을 그 기반으로부터 추적하여 모든 것을 총체 속에서 묘사할 수 있게(따라서 이 다양한 측면의 상호작용을 묘사할 수 있게) 한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생존 수단을 만들기 위해 벌이는 물질적 상호작용에서 출발해야 한다. 거기서 출발하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탁월하게 요약한 설명이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적들과 마르크스주의의 친구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일부는 흔히 마르크스가 거기서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용어를 쓴 것을 비판한다.
그것이 마르크스의 실수였다거나, 마르크스의 진의를 제대로 담지 못하는 다소 거친 표현이라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그러나 토대와 상부구조 개념, 그리고 그와 관련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관계는 마르크스의 접근법 전반을 이해하는 데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좋든 싫든 보수적인 역사관에 빠지게 된다.
마르크스의 핵심 주장은 무엇인가? 첫째, 노동으로 생존 수단을 만드는 인간의 능력이 역사에 걸쳐 갈수록 증대했다는 것이다. 그 능력이 마르크스가 말한 “생산력”이다. 이것은 외부 세계를 통제하는 능력이다. 둘째, 이러한 생산력 발전은 인간들이 서로와 맺는 관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생존 수단을 만드는 새로운 방법이 발전하면 새로운 개인 간 관계가 발전한다. 그리고 이 관계들은 사회 전반의 나머지 온갖 관계를 결정한다. 이것은 그 유명한 토대와 상부구조 구분으로 이어진다. 역사의 특정 시점이 되면 생산력 발전은 사회 구성원들을 겨우 먹여 살리는 데 필요한 생산물 외에 남는 잉여를 사회의 소수가 독차지하는 것에 달려 있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주장했다. 물질적 생산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잉여를 모두가 똑같이 나눠 가지면, 구성원 전체의 생계가 극히 미미하게 개선될 뿐이다. 그러나 특권적 집단이 잉여를 독차지하면 그것은 그들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특권을 부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생산력을 더한층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 예컨대 그들은 댐이나 운하의 건설을 가능케 하고, 멀리 떨어진 사회에서 생산되는 귀한 생산물을 구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자원을 할당할 수 있다. 그리고 기근이나 역병에 대비해 식량을 저장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사회의 다수를 착취하는 이 특권적 집단은 역사의 특정 단계에서 진보적 구실을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결코 계급이 우연히 출현했다고 설명한 적이 없다. 역사의 특정 시점에 이르면, 계급이 발전해야 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설명했다. 그리고 계급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문명과 도시, 예술, 문자, 식자층도 발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강조했다.
또, 잉여를 통제하는 집단이 등장하면 그 집단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도를 구축한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했다. 이 제도들이 상부구조다. 그중에는 무엇보다도 국가가 있다. 국가는 잉여를 통제하는 자들의 부름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무장한 자들의 기구다. 그리고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하는 제도들이 있다. 현존하는 지배계급과 일반 대중을 뭉치게 할 신비적 사상들을 퍼뜨리는 사제들의 위계질서가 그중 하나다. 마르크스는 사회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든 세 가지 요인이 상호작용한다고 지적한다. 먼저, 토대에서 일어나는 생산력 발전이 있다. 인간들이 집단적으로 생활하며 자연을 통제하는 새로운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으로부터 인간들 사이의 새로운 사회 관계가 끊임없이 생겨난다. 마지막으로, 지배계급이 구축하는 상부구조가 있다. 상부구조를 통해 지배계급은 더 이상의 사회 변화가 자신의 지배를 약화시키는 일을 차단하려 한다. 그런데 이는 새로운 사회 관계가 낡은 사회 관계를 약화시키지 못하도록 더 나은 생산 방법을 제약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사회 관계의 변화를 막으려는 상부구조의 하방 압력과, 그러한 변화를 만들어 내는 생산 과정의 상방 압력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진다.
역사에는 이 모순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들이 있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기원전 4000년경 지금의 이라크 일대에서 생산력의 어마어마한 진보가 이뤄졌다. 최초로 철이 사용되고, 운하와 댐이 건설되고, 문자가 발명됐다. 어마어마한 발전이었지만, 그 발전의 일부로서 기원전 3000년경에는 사원에 기반을 둔 지배계급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제련 기술이나 댐, 운하도 없었을 것이고, 들판의 노역에서 벗어나 문자를 배우는 사회 집단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확고하게 입지를 다진 그 지배계급은 일반 대중에 대한 지배를 강화했다. 그들은 자신의 지배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는 사상과 사회 집단이 출현하는 것을 억제했다. 그들은 국가와 종교 기구를 세우고 그곳을 가능한 한 획일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다 기원전 3000년경 이후부터는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다. 마치 역사의 시계가 느려진 듯했다. 생산력은 훨씬 느리게 발전했고, 발명도 더 드물어졌고, 토지 생산성과 식량 생산량의 증대도 더 더뎌졌다. 그러다가 기원전 2300년 또는 2200년경에 이르면 사회가 거대한 위기에 빠졌다.
이처럼 지배계급이 등장하려면 생산이 일정 수준 발전해야 한다. 지배계급은 상부구조, 즉 관료와 군대, 경찰, 사제들의 위계질서로 자신들의 지위를 강화했다. 지배계급은 사회의 모든 측면을 지배하려 했다. 이는 생산력이 더한층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여기서 상부구조와 사회적 생산 진보 사이의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제시한 모델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접하고,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곡해에서 유래하는 왜곡된 ‘마르크스주의’와 사뭇 다르다. 그러한 왜곡에 따르면 생산력 발전은 자동적으로 생산관계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이것은 자동적으로 상부구조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스탈린의 시대에 이런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간단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정당화는 사실상 이런 것이었다. ‘삶이란 원래 고달픈 것이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를 없애고 산업을 발전시키다 보면 언젠가는 민주주의적인 사회주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죽이거나 강제 수용소에 처넣도록 하겠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나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서문에서 제시한 설명과 전혀 다르다. 마르크스의 설명을 기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더 역동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생산력의 변화는 생산관계의 낮은 수준에서 끊임없이 변화를 일으킨다. 상부구조는 생산관계를 동결시키려 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충돌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 충돌은 계급투쟁이 벌어지고, 상부구조를 분쇄하고 생산력을 더 발전시킬 새로운 계급이 등장할 때에만 해결될 수 있다. 기계적인 데가 전혀 없는 설명이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돌파구를 여는 것이 필연적이라고 보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승리할 수도 있고, 싸우는 계급들이 공멸할 수도 있다고 봤다. 여기서 “공멸”은 다소 지나친 표현일 수도 있다. 고대 수메르 제국이나 고대 이집트 제국에서는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지 않은 가운데 거대한 위기가 벌어졌지만 그 결과는 완전한 붕괴가 아니라 정체였다. 그러나 문명이 완전히 붕괴한 사례도 있다. 고대 인도의 인더스 문명과, 청동기 시대 그리스의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 문명과 마야 문명이 그런 사례다.
마르크스의 설명은 결코 기계적이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13~15세기 유럽에서 새로운 형태의 생산이 등장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 생산 형태는 수공업자들과 최초의 선대제도, 자유 노동의 착취, 상업 자본의 성장을 기반으로 했다. 그에 따라 나타난 생산관계는 낡은 생산관계와 충돌하고 낡은 상부구조와 충돌했다. 그 결과 16~17세기에 종교 개혁, 30년 전쟁, 영국 혁명, 네덜란드 혁명이 일어났다. 반면, 새로운 계급이 사회를 이끌 능력을 갖추지 못한 독일에서는 사회가 자동적으로 진보하기는커녕 150~200년 동안 후퇴했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잘 알았다. 마르크스를 포함해 그러한 역사적 유산을 물려받은 동시대 독일인 어느 누구도 그 역사를 달리 이해할 수 없었다. 마르크스의 접근법이 기계적이었다는 이해는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거나 엉뚱한 용도로 이용하려는 자들이 마르크스주의로 들여 온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짚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마르크스의 모델을 거부하는 것은 인간 역사를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일절 거부하는 것이다. 오직 마르크스의 모델만이 인간 사회가 어떻게 발전하고, 왜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한 사회가 발전하는지 설명할 수 있다. 인간은 생존 수단을 만들어야 하고, 이를 위해 자연과, 그리고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고, 그것의 상이함에 따라 상이한 형태의 사회가 출현한다. 오직 마르크스의 모델만이 전체 역사를 통합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뇌가 발달한 털 없는 동물들이 생존 수단을 만들기 위해 협업한다는 단일한 출발점에서 시작해, 저마다 온갖 상이한 패턴을 거쳐서 세계 시장과 자본주의의 형성이라는 단일한 종착지에 이르는 것으로 인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모델을 폐기하면 결국 역사를 완전히 자의적으로 설명하게 된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은 역사 서술이 모두 무익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역사 서술이 역사적 사실들에 부여하는 패턴은 상식에서 유래하기 마련이다. 때때로 상식은 건전한 의식을 반영하기도 한다. 휴 토머스의 스페인 내전사가 그런 사례다. 그것은 스페인 내전에 대한 그럭저럭 괜찮은 역사서다. 그러나 그 책은 1960년대에 〈타임스〉나 〈가디언〉을 구독하던 사람이 1930년대의 스페인에 적용했을 법한 부류의 자유주의적 관점에 서 있다. 한편, 때때로 상식은 사회의 가장 해악적인 편견을 반영하기도 한다. 똑같은 휴 토머스가 최근에 낸, 노예제의 역사를 다룬 책이 그런 사례다. 그저 상식에 의존하지 않고 역사를 설명하는 한 가지 대안은, 일부 지역에서 끄집어 낸 패턴을 역사에 적용하는 것이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은 몇몇 매우 유익한 저서를 남겼다. 그러나 브로델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역사의 장기 순환이라는 패턴을 역사에 적용한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언제나 다른 역사가들에 비해 이점이 있었다. 사실과 유리되지 않은 역사적 패턴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경험적 현실이란, 생존 수단을 만들려는 사람들의 노력과 그것이 배양하는 사회 관계, 거기서 비롯하는 상이한 계급들의 충돌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은 현실에 억지로 들이밀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다른 역사가들에게 영향을 줄 때가 많았고, 1960년대에 세계 곳곳에서 격변이 일어났을 때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이 커진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나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역사가들이 굉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최근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이 일어 왔고,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에 지극히 고전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다. 그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 처음에 그들은 대개 좌파를 자처하며 그들이 말하는 ‘피지배자 역사’, 즉 천대받는 집단의 관점에서 본 역사(왕들을 나열하는 식의 역사 서술에서는 보기 어려운)에 관심이 있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공격한다. 첫째, 그들은 마르크스주의가 모든 것을 경제와 계급으로 ‘환원’하려 든다고 주장한다! 《소셜 히스토리》에 실린 패트릭 조이스의 글이 전형적 사례다. 조이스는 젠더를 물질적 조건에서 도출할 수 없다면서, 젠더를 물질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계급 또한 물질적 조건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계급은 외부의 사회적 ‘참조 대상’을 토대나 원인으로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계급은 자신이 어느 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더 조야한 조이스의 표현을 빌면, “사회 관계의 구조, 즉 ‘사회적’ 변수들(직업, 소득 등)의 구조는 행위자나 관찰자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소득은 행위자나 관찰자 바깥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함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프리카의 굶주리는 아이들은 소득이 없는 게 아니라 그저 우리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개념, 즉 언어를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조이스의 표현을 빌면 언어란 “차이들의 관계들로 이뤄진 관례적이고 자의적인 구조이고, 그것의 최종 형태는 문화적 관계와 권력 관계에 의해 생산된다”고 주장한다. 결국 조이스가 하려는 말은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없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만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성서 시대에 정말로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만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는 말이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고고학자들이 무더기로 쌓인 시신을 발굴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듯하다. 사실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도 그들은, 역사가가 증거를 종합하는 것이 자의적인 패턴을 부과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는 순전히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역사가 신화이기에 어떤 서사든 다른 서사에 비해 그다지 나을 게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논리적 귀결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인류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서 창세기보다 나을 게 없다는 것이다. 모든 신화는 다른 신화보다 딱히 나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가 외부 세계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역사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조이스의 표현을 빌면 “권력의 가동,” 즉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권력을 행사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따라서 총체적 역사, 즉 역사를 인류 발전의 총체적 과정으로 서술하려는 모든 시도는 나머지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파워 게임일 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라는 것이다.
역사가 신화라는 주장을 받아들이면 당연하게도 탁월한 신화 작가가 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허구적인 이야기를 역사로 제시하는 것이다. 마이크 헤인스가 보여 줬듯이, 유명세를 탄 올랜도 파이지스의 러시아 혁명사 책이 바로 그런 사례다.
물론,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최근 리처드 에번스는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몇몇 주장을 철저하게 논파한 책을 발표했다. 에번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홀로코스트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모든 것이 신화라면, 홀로코스트에 대한 역사수정주의자들이 옳다는 말인가?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고, 우리가 하는 말과 주장에 어떠한 사실적 근거도 없다면,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역사 서술이 다른 역사 서술보다 못할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나치가 유대인을 말살하려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경험적 자료를 신중하게 검토한 방대한 문헌이 있다. 그 문헌들을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그 문헌들이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작업보다 역사적 현실에 더 부합한다고 보지 않는 것은 명백히 잘못됐다. 이 사안에서 증거는 실제로 중요하고 핵심적 사실을 밝혀내는 데 이용될 수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담론이 아니다. 그것을 텍스트로 보는 것은 학살의 의미를 축소하는 것이다. ⋯ 홀로코스트 문제에 관해서 그것이 참이라면, 다른 과거의 사건과 제도, 인물에 관해서도 그것이 최소한 어느 정도는 참이어야 한다.
이런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홀로코스트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접근법 전반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역사적 방법은 거부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에번스는 거기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에번스는 정문에서 쫓아낸 포스트모더니즘이 뒷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한다. 이것은 에번스가 마르크스주의의 통합적인 역사 개념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는 최근 유행을 탄 두 책 — 프랑스 혁명사를 다룬 사이먼 샤마의 책과 러시아 혁명을 다룬 파이지스의 책 — 의 서평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에번스는 두 책을 “탁월하게 써낸 서사”라고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에번스는 두 책 모두 “저자들이 시인한대로 기호에 따라 자의적으로 선별한 사건들과 인물들”에 기반해 있고, 프랑스 혁명 당시의 대량 기아 사태 같은 매우 핵심적인 사건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탁월한 신화를 쓸 수 있는 역사가라면 사실을 무시해도 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탁월한’ 신화가 되려면 당연히 그것이 쓰인 시대에 통용되는 편견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역사는 변호론이 된다. 정말로,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파워 게임’이 되는 것이다. 에번스 같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번스는 마르크스주의의 접근법, 즉 생산력과 생산관계에서 출발해 토대와 상부구조를 구분하고 둘 사이의 상호작용과 역동적인 충돌, 거기서 계급이 하는 구실을 설명하며 역사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접근법을 거부한다. 그래서 에번스는 다시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으로 미끄러지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짚을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디서 비롯하느냐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에도 물질적 근원이 있다. 필자는 10년이나 15년 전에 방영된 〈히스토리 맨〉이라는 연속극을 기억한다. 그 연속극은 한 급진적인 대학 강사가 온갖 비열한 짓을 하며 경력을 쌓다가 우익적인 교수가 된다는 내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꼭 들어맞는다. 젊은 시절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와 급진적 사상을 만지작거렸지만, 일정한 자리를 잡은 지금은 전적으로 무난하고 무해한 사상들을 퍼뜨리고 때로는 그럼으로써 두둑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세계를 통합적으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는 그들은 역사의 이변들을 꽤나 무해한 방식으로, 그것도 남들이 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마치 설화처럼 취급할 수 있고, 그러면서 대학과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어떠한 도전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는 지성사와 관련된 또 다른 기원이 있다. 그것의 일부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영국과 프랑스, 독일의 대학에서 ‘마르크스주의’로 통하던 것에 있다. 당시 스탈린주의는 여전히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었고, 많은 좌파 지식인은 거기에 반쯤은 매료되고 반쯤은 반감을 가졌다. E P 톰슨이 뚜렷한 사례다. 톰슨의 지적 성장은 공산당의 스탈린주의라는 토양에서 이뤄졌다. 그러다 톰슨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지지하는 등 실천 수준에서 스탈린주의와 단절했다. 그러나 톰슨은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주의의 일종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와도 반쯤 결별했다. 톰슨은 [“역사적historical”과 “변증법적dialectical” 이라는 말을 비틀어서] ‘히스테리적이고 악마적인histerical and diabolical’ 유물론이라는 말장난을 종종 했다. 톰슨은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 동조자Marxisant’라고 일컬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로 일컫지는 않았다. 톰슨은 특히 토대와 상부구조 구분을 ‘조야한 은유’라고 비난했다. 톰슨은 그 구분을 제대로 이해한 적이 없다. 그것을 조야하다고 비난하다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톰슨은 마르크스주의와 반쯤 결별한 탓에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여지를 줬다. 물론, 톰슨은 그들을 비판하는 데 적극 앞장섰을 인물이지만 말이다.
더 뚜렷한 사례는 알튀세르다. 그의 첫 저서인 《마르크스를 위하여》(나는 프랑스어 제목 “Pour Marx”을 영어식으로 읽어서 [“Poor Marx,” 즉 “불쌍한 마르크스”라고] 비꼬는 편을 더 선호한다)는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거나 “스탈린이 그 문제에서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었다”는 둥 마치 스탈린을 20세기 후반의 지식인이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하는 중요한 사상가처럼 취급한다. 사실 알튀세르는 스탈린주의의 온갖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는 그 위에서 이론을 개발하려 했다. 그 결과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구분을 사실상 받아들이지 못하고,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단호하게 반박하는 사상을 발전시키기에 이른다. 알튀세르는 토대와 상부구조의 구분이 자본주의 사회에는 잘 들어맞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경제가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가 결정적 요인이고, 어떤 사회에서는 종교가, 어떤 사회에서는 그 외 다른 측면이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정확히 그런 주장을 논박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양식이 결정적 요인이지만 중세에는 종교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고, 고대 로마와 아테네에서는 정치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중세가 가톨릭으로 먹고살 수 없고 고대 세계가 정치로 먹고살 수 없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 시대 사람들이 생존 수단을 획득한 방식이야말로 중세에는 가톨릭이, 고대에는 정치가 지배적인 구실을 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알튀세르가 제시하는 전체 구조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단절에 기초해 있으며, 갈수록 한없이 번잡하고 스콜라적이 됐다. 처음에 알튀세르는 경제가 최종 심급에서 결정력을 행사한다고 주장했다가, 그 다음에는 “최종 심급의 시간은 오지 않는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경제가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알튀세르는 인류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의 통합적인 설명에서 갈수록 멀어졌고, 그러한 접근법을 옹호하는 것을 “역사주의”나 “인간주의”라고 공격했다. 더 나아가 생산력과 생산관계라는 근본적인 문제에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설명을 물구나무 세웠다. 마르크스는 생산력이 끊임없이 새로운 생산관계를 낳고 그것이 사회 세력들의 충돌을 낳는다고 강조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은유는 새로운 사회의 맹아가 성장하다가 낡은 사회의 외피와 충돌하고 그것을 허물어 버린다는 것이다. 반면 알튀세르는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관계를 결정적 요인으로 봤다. 이런 견해를 제시한 동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탈린이 보기에는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완전히 기계적으로 결정해야 했다. 그래야 국가자본주의 산업화의 참상을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알튀세르는 중국의 마오쩌둥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리고 중국 경제의 후진성에 직면한 마오주의자들은 ‘문화혁명’ 시기에 주의주의와 생산관계의 대대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생산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상 그들의 메시지는 ‘끼니 걱정은 잊고 마오쩌둥 어록을 흔들며 열광하라’는 것이었다. 알튀세르의 이론은 이런 분위기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알튀세르주의는 마오주의와 마찬가지로 이제 한물간 사상이 됐다. 그러나 비슷한 사상은 여전히 여기저기에 만연해 있다. 심지어 표면적으로는 알튀세르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다.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로버트 브레너와 엘렌 메익신스 우드가 그런 사례다. 그들의 저서에는 사람들이 자연에서 어떻게 생존 수단을 만드는지에 관한 내용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중세에 관한 브레너의 글이나 그리스에 관한 우드의 책은 물질적 생산력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10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는 특정한 학자들의 삶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한테는 사상이 저절로 생겨나서 발전하는 것이고, 중요한 것은 오로지 사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지상에 있는 생산력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변화가 중요하다는 사상만큼 구미에 맞는 것도 없을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해 짚어야 할 또 다른 논점이 있다. 그 ‘마르크스주의’는 원시 공산제, 계급 사회의 등장, 여성 차별의 등장에 관한 엥겔스의 설명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은 여성이 언제나 차별받았으며 이 세상에는 언제나 위계질서가 있었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일인데, 몇몇 주류 고고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사회의 진화에 관한 이론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배울 것이 있는 만만찮은 인물들로 조명하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엥겔스를 내다 버린 자들은 여성 차별을 계급과는 완전히 다른 근원에서 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논리적으로 그 다음 단계는 마르크스주의를, 인류 역사의 어떤 패턴을 제시했다는 이유로 ‘환원론적’이고 ‘본질주의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에 관대했던 알튀세르주의자들은 결국 마르크스주의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됐다.
1970년대 후반에 톰슨과 알튀세르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은 강단 마르크스주의를 지배했다. 그러나 논쟁의 양편 모두 스탈린주의적 왜곡을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한 버전으로 인정했다. 이는 한때 양측의 신봉자였던 사람들이 오늘날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봉에 서 있을 수 있는지를 설명해 준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최종 결과는 19세기에 보수주의자들이 계몽주의에 반발하며 내놓은 주장들을 되풀이하는 것에 불과한 역사관이다. 그러나 19세기 보수주의자들의 입장을 되풀이하려면 방대한 경험적 증거를 무시하고 왜곡해야만 한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진실을 찾으려는 시도를 그토록 맹렬히 비난하는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지배적이지 않은 연구 분야에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설명에 부합하는 증거가 수두룩하게 쌓이고 있다. 고대 아메리카나 고대 이집트, 고대 수메르 사회에 대한 연구들을 보면 생산력의 발전과,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이 협업을 낳는 과정, 국가 구조의 충돌, 사회가 위기에 빠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한때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은 오직 생산관계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중세사의 경험적 사료를 연구하는 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11~13세기에 생산력이 빠르게 발전했고, 16세기에도 다시 한 번 생산력이 빠르게 발전했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등장을 이해하는 데서 불가결한 측면이다. 또, 지난 20~30년간의 연구는 고대와 중세의 중국에서 생산력 발전이 기존 생산관계와 거듭 충돌하고 거대한 사회 위기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오직 마르크스의 고전적 정식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경험적 증거가 방대하게 쌓여 있다.
이 모든 것은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현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보여 주고, 현재가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역사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과거에 나타난 역사의 역학이 지금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이해한다면 계급이 사라졌다거나 21세기에는 계급투쟁이 유의미한 요인이 아니라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인류가 단일한 역사를 갖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 역사는 남자의 역사나 여자의 역사도 아니고, 부자의 역사나 빈자의 역사도 아니고, 백인의 역사나 흑인의 역사도 아니고, 이성애자의 역사나 동성애자의 역사도 아니다. 그 모든 것은 같은 근원에서 나온다. 사회 변화와 계급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물질적 과정이 바로 그 근원이다. 이를 이해하는 것은 모든 형태의 차별과 착취에서 세계를 해방시키는 데서 지극히 중요하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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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hris Harman, ‘History, myth and Marxism’ in John Rees eds., 1998, Essays on Historical Materialism, Bookma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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