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여성의 저항
대봉기부터 1차 인티파다까지(1936~1993년) *
1 팔레스타인 내 여성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에 속하는 여성들은 처음에는 영국, 그 뒤에는 이스라엘 국가의 식민지 압제자들에 맞서 저항했다. 이 압제자들은 식민지 프로젝트의 일환이자 팔레스타인의 점령과 억압을 강화하는 핵심 방책으로 시온주의적 역사관을 강제하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역사는 왜곡하고 말살하려 했다. 2 민족 항쟁 속 여성의 구실은 역사 서술에서 더욱 철저히 삭제됐다. 이 여성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거나 파괴돼 찾아볼 수 없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라 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3 현재 제국주의 국가들의 일부 ‘페미니즘’ 운동에는 오리엔탈리즘적 조류가 있는데, 그 묘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여성은 주체적이지 못하고 “종교적·가부장적·문화적 억압의 조용한 희생자이며 자신의 정신과 몸을 통제하지 못”해 외부의 구원이 필요하다. 4 그러나 팔레스타인 여성을 수동적 방관자로 그리고 그들이 저항에서 한 구실이 없거나 미미하다고 보는 서사와는 달리, 팔레스타인 투쟁의 역사에서 여성들은 꾸준히 활동했으며 흔히 최전선에 서 있었다.
중동 전역에는 여성이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과 능동적 행동에 참여해 온 강력한 전통이 있다.이 글은 팔레스타인 여성이 민족해방운동에서 했던 활약이 그들이 겪은 여성 차별에 맞선 투쟁과 어떻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는지 살펴본다. 이를 위해 1920년대 혹은 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투쟁과 반란의 역사를 살필 것이다.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저항이 고조된 세 시기, 즉 1936~1939년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 점령에 맞서 봉기한 ‘대봉기’ 시기, 1960년대 후반 무장 저항과 페미니즘으로의 전환기, 그리고 1987~1993년 1차 인티파다 때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선 투쟁에서 기층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았던 시기가 초점이 될 것이다. 추후 본지에 실을 예정인 다음 글에서는 1993년 이후 시기를 다룰 것이다.
여성 저항의 탄생: 1920~1936년
5 맺었다. 이 협정에 따라 현재의 레바논, 시리아, 쿠르디스탄, 터키 일부는 프랑스가, 현재의 이라크, 요르단,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차지하게 됐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약속했던 독립과 자결권이 배신당하자 그에 대한 분노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6 모든 나라에서 여성운동이 생겨났는데, 신생 민족주의 운동의 일부였을 뿐 아니라 여성 억압에 저항하는 요구들을 내세웠다. 7 예컨대 이집트에서는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1919년 영국에 맞선 혁명의 일부로서 문화·사회·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거리 시위에 나서고 모스크와 교회에서 연설을 했다. 8 지도적 여성 활동가 호다 샤아라위는 1923년 일찍이 이집트여성연합을 설립했다. 9 이집트 혁명은 팔레스타인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고 식민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선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여성의 운동이 등장한 더 넓은 맥락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중동 지역 분할이 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예상한 프랑스와 영국은 석유를 확보하고 경제적 이익을 확대하려는 열망으로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정을10 이어 1920년 영국은 국제연맹으로부터 팔레스타인과 트랜스요르단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받았다. 팔레스타인 민족운동이 등장했고 그 일부로 팔레스타인 여성운동이 등장했다. 1920년대에 여성운동 지도부는 민족운동에서와 마찬가지로 도시 상인과 농촌 지주 계급 출신이었다. 유력한 가문 출신인 주로 중간계급과 상층계급 여성들이 주도해 1929년에 아랍여성협회AWA를 만들었다. 그들은, 시온주의적 식민지화를 촉진하고 팔레스타인인 민족자결권 요구를 억누르는 영국의 정책에 맞서는 여성 강령의 기틀을 닦았다. 11
20세기 초부터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활동은 민족 저항 운동과 연관돼 있었다. 여성들은 1917년 밸푸어 선언에 항의해 터져 나온 시위에 참가했다. 밸푸어 선언에서 영국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울 것을 공개적으로 약속했고, 그 결과로 1948년 ‘나크바(대재앙)’ 즉,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의 기반이 마련됐다.12 이에 대응해 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가 벌어졌고, 일주일간 폭력이 이어지며 유대인 113명과 팔레스타인인 116명이 사망했다. 충돌의 상당수는 영국인 경찰과 팔레스타인인 사이에서 벌어졌지만, 시온주의 테러 집단들도 영국 군대를 공격했다. 그러나 체포된 1330명 가운데 다수가 팔레스타인인이었고, 3명에게는 사형이 집행됐다. 13
아랍여성협회는 ‘통곡의 벽 봉기’라고 널리 알려진 ‘부라크 봉기’의 영향으로 심화된 위기 속에서 등장했다. ‘부라크 봉기’는 영국의 위임통치 당국이 수 세기 동안 이슬람 영향력하에 있던 성지인 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 서쪽 벽, 즉 부라크에 유대인 예배자가 더 많이 접근할 수 있도록 허가한 것을 계기로 촉발됐다. 1929년 8월 15일 우익 청년 단체 ‘베타르’(‘요새’라는 뜻)에 속한 한 무리의 시온주의자들이 통곡의 벽으로 행진했다. 그들은 유대인 깃발을 들고 시온주의 찬가를 부르며 “이 벽은 우리 것이다!” 하고 소리쳤다.14 1930년대부터 아랍여성협회는 시위 참가, 수감자와 그 가족을 지원하는 모금, 언론에 팔레스타인 민족 대의를 알리는 공세 퍼붓기, 의료 및 교육 서비스 제공, 지역·범아랍·국제 여성 회의 참여 등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1931년 6월 아랍여성협회는 부라크 봉기 때 반란죄로 처형된 팔레스타인인들을 기리며 여성들에게 파업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 심지어 남성들이 주도하는 민족운동 측이 그 계획을 철회한 뒤에도 아랍여성협회는 호소를 이어 갔다. 15 1930년대 초 여성들의 시위 참가가 늘어나면서 ‘대봉기’ 시기 여성들이 더 전투적인 행동에 나설 기반이 마련됐다.
1929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랍여성협회의 첫 대회는 밸푸어 선언과 유대인 이주, 경찰의 아랍인 수감자 학대, 연좌제 적용에 항의했다.대봉기(1936~1939년)
16 노동자와 농민들은 “소극적인 엘리트 지도층이 더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밀어붙였다. 17 영국 당국은 연좌제, 수용소 수감, 강제 추방, 대규모 체포, 가옥 파괴, 마을 급습과 공습, 이동 제한, 계엄령 등으로 봉기를 잔인하게 탄압했고, 그 과정에서 흔히 시온주의 민병대가 도움을 줬다. 18 운동 내에는 엘리트층과 기층 활동가들 사이의 차이점을 축소하며 “민중의 주도권을 최소화하고 아랍고등위원회의 이름으로 단결할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19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반란 동안 보여 준 적극적인 활동과 전투성 및 급진화 경향은 주변화됐다. 도시 엘리트 여성은 시위에 참여하고, 큰돈을 모금해 반란을 지원했으며, 여러 마을에서 여성위원회를 조직했다. 비밀 회의를 열어 투사들을 지원하고 정부에 항의 서한 공세를 벌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조직적 활동이 거의 없던 지역에서도 여성위원회가 생겨났다. 반란이 총파업과 함께 시작했다. 아랍여성협회 회원들은 도시와 농촌 마을을 순회하며 상점들에 파업 참여(철시)를 호소하고 따르지 않는 곳은 창문을 깨뜨렸다. 20
1936년 영국 점령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광범해지고 마침내 반란으로 터져 나왔다. 아랍여성협회 회원들은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 가문의 교육받은 도시 여성들이었지만, 공식 조직 바깥에서는 남녀 빈농(남성은 팔라힌, 여성은 펠라하)이 반란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 빈농 여성들은 영국의 가장 끔찍한 탄압을 견뎌야 했는데 물리적으로 공격받은 곳이 바로 농촌 지역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옷과 들판에 총을 숨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다니면서 게릴라군에게 영국군의 위치나 보급로 등의 정보를 전달했고, 그러다가 흔히 교전에 휘말렸다. 영국은 빈농 여성들이 “싸우기 좋아하는” 선동꾼이며 젊은 남성들을 전투원이 되라고 부추기는 존재라고 여겼다.22 빈농 여성들이 무기 밀매 또는 소지 혐의로 체포된 빈도를 보면 여성이 군사적 측면에서 그간 추정되거나 기록된 것 이상으로 중요한 구실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반적으로 여성은 엄청난 위험을 무릅썼고, 무기 관련 혐의로 기소될 경우 7~1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반란 초기부터 빈농 여성들은 수색과 습격으로부터 마을과 남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태세가 돼 있었다. 예컨대 여성들은 경찰이 누군가를 체포하러 오면 옥상에서 돌을 던졌다. 도시 여성들과 달리 일부 빈농 여성들은 군사 병력의 일부로 반란에 참여했다. 예컨대 파트마 가잘은 1936년 와두 아준 전투에서 전사했다.23 갈릴리 지역 여학생들은 등교 거부를 하고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는 것을 막았으며 1936년 4월부터 5월 말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 큰 어려움을 겪자 영국 당국은 학교를 폐교하겠다고 위협했고, 학생의 아버지에게 딸이 위법행위를 저지르면 아버지에게 벌금을 매기겠다고 통보했다.
대반란 동안 나타난 새로운 현상은 여학생들의 조직화와 동원이었다.24 이 여성단체들은 서로의 투쟁을 잘 이해했고, 특히 대봉기 시기 영국의 팔레스타인 탄압을 규탄하는 데에서 서로 연대를 표했다. 1930년대 초 아랍(과 동양) 여성들은 더 광범한 지역 차원에서 더 공식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930~1932년에 다마스쿠스, 베이루트, 바그다드에서 회의가 열렸다. 그 흐름의 절정은 호다 샤아라위가 1938년 10월 카이로에 모일 것을 호소한 것이었다.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팔레스타인의 대표단은 영국 위임통치 폐지, 밸푸어 선언 폐기, 유대인 이주와 유대인에 대한 토지 판매 금지를 요구했다. 25 범아랍 세계의 이런 지원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운동에 아드레날린을 주입했다.” 26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사기를 올리고 고립감은 줄였으며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운동에 국제적 위상을 부여했다.
중동 전역에서 분출한 범아랍 여성운동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데서 필수적이었다. 이집트, 튀니지 등의 나라에서는 초기 여성단체들이 일부다처제 폐지와 [남성에게만 허용된 일방적] 약식 이혼제 폐지, 투표권 같은 정치적 요구를 제기한 반면,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민족주의적 요구에 집중했다. 범아랍 지역에서 벌어진 여성운동은 팔레스타인인 자매들의 편에 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를 지역적·국제적 무대의 중심으로 끌어내려 했다.27 결국 나사르는 체포돼 베들레헴 여성 교도소에 약 1년간 구금됐다. 28 대봉기 이후 영국이 여성들의 전투성을 잠재우고 그들의 거리 시위를 해산하려고 팔레스타인 사회의 보수적 인자들과 공모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여성들이 서양식 옷을 입거나 남성의 동행 없이 집 밖에서 정치적 활동에 참가하는 것이 갈수록 책망받을 일이 됐는데 특히 도시 지역에서 그랬다.
대봉기 동안 한 여성이 주목을 받았다. 사디즈 낫사르는 1908년 하이파에서 창간돼 1920년대 초부터는 여성 문제를 꾸준히 다룬 〈엘카르멜〉 신문의 공동 편집자이자 저술가였다. 나사르는 성평등부터 식민주의에 맞선 혁명적 투쟁의 필요성까지 다양한 주제로 기사를 썼다. 영국의 기록 보관소에서는 시위 조직자나 파업 주동자로 나사르의 이름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녀는 영국 당국에 눈엣가시였다. 나사르가 쓴 신문 기사는 “선동적”이라고, 그녀가 조직한 시위는 “위험한 악성” 집회로 묘사됐다.29 그러나 더 전통적인 복장을 입으라는 요구는 남성들에게까지 확대됐고, 이런 훈계는 복장을 통해 민족주의적 대의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내라는 권고와 뒤섞여 나타났다. 엘렌 플라이슈만은, 대봉기를 기억하는 팔레스타인인 기독교 여성이 자신들이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고 “아랍인임을 보여 주”기 위해, “여느 아랍인과 다르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베일을 썼다고 말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30 아랍여성협회조차 여성의 복장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을 두고 의견이 갈렸다. 일부는 현대적 복장으로 해방을 나타내길 원했고, 다른 쪽은 그런 복장을 하면 대중에게서 소외될 거라고 여겼다.
이런 보수적인 변화는 민족주의 운동 내 다른 인자들에게도 확대돼 여성들의 행실과 복장에 대한 규범을 강제하려는 시도가 벌어졌다. 1939년 대봉기가 끝날 무렵,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살해되거나 투옥되고 망명을 떠났다. 운동의 지도부가 사실상 붕괴했다. 반란 진압을 위해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함께 싸운 유대인 정착민들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무장을 강화하고 군사 전술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의 운동은 여전히 활발하고 발전 가능성이 있었다. 1948년의 사건들로 팔레스타인 사회와 그 사회·정치 기구들이 폭력적으로 망가지기 전까지는 그랬다.나크바
1948년 나크바는 팔레스타인 사회를 산산조각 냈다. 이스라엘 국가는 영국이 위임통치 중이던 팔레스타인 영토의 80퍼센트를 차지했고, 팔레스타인인의 80~90퍼센트는 추방돼 가자지구(이집트에 병합됐다), 서안지구(요르단에 병합됐다), 레바논, 시리아의 난민촌으로 흩어졌다. 그 결과는 여성운동이 수십 년간 쌓아 온 저항과 사회 및 제도 인프라에 치명적이었다.
32 여성들이 혼성 조직들에 전보다 널리 가입하자 그들의 활동도 변했다. 이런 정당들에서 활동한 경험으로 여성들은 1967년 이후 이스라엘 점령에 맞선 투쟁에서 중대한 구실을 했다.
중간계급 여성은 사회 서비스 붕괴로 생겨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무료 급식소와 보육원을 설립하는 등 자선사업의 전통을 이어 갔다. 그러나 엘리트 여성과 농촌의 빈곤한 여성 사이의 격차는 여전했다. 후자는 흔히 주변화됐고 엘리트층이 베푸는 자선사업의 수동적 수혜자로 여겨졌다. 서안지구에서는 정치 조직이 금지되고 팔레스타인인 정체성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억압당했다. 그 결과로 여성 조직의 정치적 활동력은 억제됐지만, 범아랍 민족주의의 등장으로 일부 여성들은 시리아에서 세워진 아랍 사회주의 정당인 바트(부흥)당, 요르단 공산당, 아랍 민족주의 운동 같은 지하 정치 조직에 이끌렸고 그곳에서 두각을 드러냈다.점령에 맞선 투쟁: 1967~1982년
1960년대 말 점령에 맞선 팔레스타인인의 투쟁은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게릴라 전쟁과 무장 투쟁을 지향하는 쪽으로 변했다. 하나는 아랍 국가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을 선사할 능력이나 의지가 있다는 환상이 깨진 것이었다. 그 배경에는 1967년 이스라엘이 아랍 국가들의 군대를 신속하고 굴욕적으로 쳐부수며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남은 영토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침공해 점령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요인은 팔레스타인인 저항 운동이 세계적인 정치·사회 격변의 시기에 성숙한 것이다. 남반구, 예컨대 베트남과 알제리 같은 곳에서 혁명적 해방운동이 반제국주의적 저항에 나섰고 시민권 운동, 학생운동, 페미니즘 운동이 전 세계에서 분출했다.
33 그러나 동시에 기층 수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스스로 각종 조직을 결성했고 이스라엘에 맞선 무장 투쟁을 호소했다. 1968년이 되자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주축은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파타)이었으나, 분파와 게릴라 집단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34
이런 요인들이 작용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아랍 정권들의 부속물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정치적 동원 조직으로 변모했다.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지도하에 있던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인 민족주의의 대의를 옹호하는 척하면서 그 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1964년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세웠다.35 이런 맥락에서 1965년 여러 여성 조직이 한데 모여 팔레스타인여성총연합GUPW이 결성됐고 이들은 팔레스타인 여성운동을 부활시켰다. 제한 헬루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여성총연합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에 속해 있었지만 그 내부에서 독립성을 확보하려 분투해야 했다. 36
많은 팔레스타인인은 새로운 저항 문화에 영향을 받았고, 젊은 세대의 여성들도 더 전투적인 전술로 기울었다. 이 새 세대 여성들은 여성을 단지 민족의 돌봄 제공자로 여기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지배적 관념(민족주의 운동 곳곳에도 이런 관념이 퍼져 있었다)을 거부하고, 해방을 실현할 사회 변화를 목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1967년 이스라엘의 서안지구와 가자지구, 골란고원 침공과 점령으로 난민이 25만~30만 명 더 생겨났다. [이스라엘의 직접 군사 통치로] 팔레스타인인들은 새로운 형태의 사회·경제·정치적 억압에 시달리게 됐다. 팔레스타인여성총연합은 팔레스타인 여성과 아이들에게 보건소, 보육원, 식비 보조금 등 시급히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성들은 자신들의 구실을 “사회 사업”으로만 제한할 생각이 없었고, 무장 저항에 나서기도 했다. 저항의 주요 분파들은 처음에는 요르단, 이후 레바논에 여성 혁명가를 위한 군사·정치 훈련소를 세웠다.
37 마찬가지로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일원인 샤디아 아부 가잘라는 팔레스타인에서 떠나길 거부하다가 1968년 11월 고향인 나블루스에서 19세의 나이로 목숨을 잃었는데, 가잘라가 준비하던 폭탄이 예기치 않게 폭발했기 때문이다. 이 여성들은 아랍 정권, 야세르 아라파트(팔레스타인해방전선의 지도자), 팔레스타인 부르주아 계급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흐름의 일부였다. 칼리드는 어린 나이에 난민촌의 “비참함, 굶주림, 수모”를 목격했다. 38 그녀는 자서전에서 난민촌의 끔찍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의 삶과, 도시에서 높은 생활수준을 누리며 어디든 갈 수 있고 교육받을 수 있으며 폭력에서 안전한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의 삶을 대비시켰다. 이런 경험을 통해 칼리드는 민족해방의 주체와 투쟁의 목표에 대한 예리한 계급적 분석을 발전시켰다. 칼리드는 변화의 유일한 힘이 혁명적 정치조직에 속한 노동자와 빈농이라고 믿었다. 39 칼리드에게 팔레스타인인 투쟁의 궁극적 목표는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이었다. 40
레일라 칼리드 같은 여성 투사들이 세계적 상징으로 계속 인정받는 것은 이 시기의 변화를 보여 준다. 칼리드는 좌파단체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PFLP의 일원으로, 도슨 기지 작전을 지휘해 최초로 비행기를 납치한 여성이 됐다.41 저항의 참가자이자 목격자인 제한 헬루는 난민들의 생활을 전부 감시하고 통제했던, 레바논 국가의 악명 높은 정보기관 ‘두지엠 뷰로(제2국)’를 몰아내려고 1969년 팔레스타인인 난민촌들에서 봉기가 일어났던 일을 회상한다. 빈농 가정 출신의 여성들은 레바논 군대가 공격하자 두려움 없이 몸을 던져 난민촌 입구를 막았다.
레일라 칼리드 같은 상징적인 여성들은 무장 투쟁에 참여한 여성의 실제 규모에 견줘 큰 관심을 받지만, 1969~1982년 레바논 난민촌에서 벌어진 대규모 저항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주도적이고 중심적 구실을 한 것은 역사에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여성 문제에 관한 중앙 차원의 전망이나 계획이 없었고 저항 운동은 성평등에 관한 견해를 온전히 발전시키지 못했다. 일부 경향은 여성의 전통적 구실을 계속 옹호했다.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해방민주인민전선DFLP, 공산당 등의 좌파 정당은 성평등에 관해 더 긍정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러나 서구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여성 차별이 단지 식민지 억압과 계급 차별의 부산물일 뿐이고 그것에 종속된 것으로 치부했다.43 칼리드는 1968년 여름 무장 투쟁에 참여하겠다는 자신의 요구에 대한 반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여성의 무장 저항 참여는 전통적 성 역할관에 도전하는 데 일조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 운동의 일부에는 여성 해방을 둘러싼 긴장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고, 많은 여성이 운동 내에서 성차별을 겪었다고 말했다.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고 제안받았다. 하나는 난민촌에서 너무 많은 일을 떠안고 있는 어머니들을 돕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순교자들의 가족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나는 비웃으며 말했다. “사회복지가 사회 혁명은 아닙니다. 나는 혁명에 전적으로 뛰어들고 싶습니다.”
45 이것은 민족주의 서사 속에서 찬양받는 지위에 오른 남녀 영웅(각각 ‘피다이’와 ‘피다이야’로 불렸다)에 대한 태도가 다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전통적 어머니가 가정을 지켜 냈다는 모순적 이미지가 더 강력했고, 여성 투사의 이미지보다 사회적으로 더 용인됐다. 반면 여성 투사는 남성 투사와 대등한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때로는 자신의 공동체에 재통합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46 칼리드는 이 점을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서구의 자매들은 계급과 여성 억압을 말하지만 ⋯ 나는 네 가지 억압, 즉 민족 억압, 사회적 억압(전통과 관습이 가하는 압력), 계급 억압, 여성 억압을 겪어야 했다.” 47
많은 젊은 여성들이 활동가가 되고자 했지만, 부모와의 갈등과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저항 운동 내부에서의 고투를 겪어야 했다. 예컨대 저항 운동 내 입지가 탄탄한 여성 활동가들도 자신의 딸들이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려면 가족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일이 흔했다. 줄리 퍼티트에 따르면 대다수 여성이 자신들이 투쟁에 기여해야 한다는 점은 동의했지만 정치 활동과 가사 사이의 관계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예컨대 활동가가 된다고 해서 여성이 주부이자 돌봄 제공자로서 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따라서 여성이 투쟁에 참여하려면 “여성의 행동을 지배하는 문화적 규칙의 총공세를 견뎌”야 했다.48 여기에는 여성들이 이동의 제약을 거부하고 여행에 나설 기회를 부여잡는 것, 예컨대 소련에서 제공하는 유학 기회를 잡는 것, 자신의 배우자를 스스로 선택하거나 아예 결혼을 하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됐다. 줄리 퍼티트는 난민촌의 젊은 여성과 활동가들이 자기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완전히 새로운 단어로 표현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
이런 장애물이 있었음에도, 투쟁 참여는 여성의 자신감을 높였다. 제한 헬루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선봉에 선 여성들은 억압적 전통을 부수고 철창을 벗어나 자신들만의 관례와 규범을 세웠고, 이로써 자기 삶의 통제권을 쥐었다.”‘활동가’, ‘정치화한’, ‘전사’, ‘노동자’, ‘투사’, ‘순교자’ 등 대단히 능동적이고 정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용어와 범주를 사용하며 ⋯ 이 새로운 자아 개념은 민족적 자부심과 투쟁 참여,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들 자신의 역량이 강화됐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한편 여성 해방 투쟁은 민족 해방과 불가분의 관계였다. 퍼티트는, 널리 퍼진 이런 정서를 파타 활동가 사미레가 묘사한 부분에서 인용한다.
여성들이 남편이나 남자 형제, 또는 그들의 동지들과 함께 싸웠기 때문에 민족 해방 이후에 여성 해방이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 생각한다. 여성들은 이렇게 말할 권리가 있다.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싸웠으니 나도 내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남성은 우리의 적이다. 남성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하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말은 틀렸다. 남성 또한 해방되지 않았다. 남성들은 권리를 빼앗기고 뿌리를 잃었다. 그들에게는 국가도 권리도 없다. 어떻게 가진 게 없는 사람에게서 우리의 권리를 얻어 낼 수 있겠는가?
51 팔레스타인민족전선은 1972년 주로 청년들이 주도해 세워졌고 시민사회 조직과 봉사 활동 단체들을 지원하며 서안지구 전역으로 확장했다. 1976년 수만 명에 달하는 서안지구 여성들이 처음으로 지방선거에서 투표할 자격이 생겼을 때, 젊고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서안지구 곳곳의 마을에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여성과 청년 덕분이었다. 이것은 정치가 위에서 조직되는 전통적인 역학에서 벗어나 더 유기적이고 다양한 활동을 포괄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했고, 1978년 새로운 여성운동이 등장하는 데 일조했다. 52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비롯한 저항의 구심이 레바논으로 이동하면서 팔레스타인민족전선PNF이 결성돼 점령지 서안지구에서 대중에 기반한 투쟁을 조직하고 강화했다.새로운 여성운동의 탄생: 1978년
53 무장 투쟁에 참여한 여성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었던 반면, 이 조직은 새로운 대중조직을 지향해 만들어졌고 농촌 마을과 난민촌에서 여성들을 동원하는 데 주력했다. 이 새로운 여성운동이 탄생한 요인에는 페미니즘 사상의 전 세계적 성장과 전파, 여성의 노동 인구 참여, 1970년대 중반 이후 서안지구에서의 대학 교육 확대가 있었다.
1978년 세계 여성의 날에 여성노동위원회WWC 설립이 발표됐다.라말라와 알비레 출신의 이 새로운 여성 활동가들(그중 일부는 비르제이트대학교 학생들이었다)은 주로 상업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프티부르주아지 가정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선 활동을 주로 했던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 가문의 전통에서 벗어나 노동계급 여성과 농업에 비공식적으로 고용된 농촌 여성의 문제를 다뤘다. 여성노동위원회는 전국적으로 여성들을 교육하고 활동으로 끌어들였으며, 투쟁하고 일하고 교육받고 의사 결정 과정에 공평하게 참여할 권리를 요구했다. 이들은 농촌 여성들의 문맹, 과로, 빈곤, 경제적 의존이 정치 활동 참여의 걸림돌임을 인식하고, 의료·보육 시설을 세우는 등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물질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에 착수했다. 서안지구의 경제가 이스라엘에 통합되면서 더 많은 여성이 노동 인구로 유입됐다. 여성노동위원회는 여성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도록 독려했고, 노동조합과 협력해 여성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과 권리 향상을 위해 힘썼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이 시기에 여성이 섬유노동조합에 대거 가입했고 특히 라말라에서 두드러졌다. 1983년 라말라섬유노동조합은 라말라에 있는 다나지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지원했다. 노동자들은 평균 임금 50퍼센트 인상과 그 이상의 초봉 인상을 얻어 냈다.
55 그들은 실천적 프로젝트와 정치 활동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예컨대 그들은 정치수들의 단식 투쟁을 지지하고자 적십자 사무소 앞 연좌 시위를 공동으로 조직했다.
여성노동위원회의 창립 멤버 대다수는 좌파인 팔레스타인해방민주인민전선의 정치 강령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1980년대 초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점령지 기반 운동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간의 갈등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이 분열했다. 그렇지만 그런 분열로 생겨난 네 개의 여성위원회(저마다 다른 정치 분파와 느슨하게 연계돼 있었다)는 다른 민족주의 단체들만큼 심각한 파벌주의를 겪지는 않았다.56 그들이 성공적으로 활동하자 이스라엘 당국은 감시와 탄압에 나섰다. 전통 문화와 공예품 전시회를 폐쇄하려 하고, 자료를 압수하고 사무실을 폐쇄했다. 많은 위원회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군부대로 불려 가 조사를 받았고, 지도적 회원들은 이동 제한을 당하거나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심지어 일부 활동가들은 끄나풀이 되기를 거부하면 고용을 위협받았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리타 자카만이 지적하듯, 운동이 거대하고 무정형성을 띠었기 때문에 탄압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종류의 운동은 두 명, 심지어 열 명까지 늘려도 그런 소수 인원에 의존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렇다고 6만~7만 명의 빈농 여성을 감옥에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57
1987년이 되자 여성위원회들은 서안지구에서 회원이 수천 명에 달했고, 좌파적 위원회 세 곳의 경우 가자지구에서도 비슷한 수의 회원을 거느렸다.여성위원회들은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활동에서 전환점이 됐다. 그들의 뛰어난 성취로 활동가들의 계급 기반이 확대돼 농촌 여성과 여성 노동자도 단체의 회원과 지도부에 참여하게 됐다. 여성들의 이런 투쟁 참여는 1차 인티파다에 여성들이 참여하는 기반이 됐다.
1차 인티파다 시기의 여성: 1987~1993년
58 최소한 봉기의 초기 단계에 이런 행동은 조직되지 않은 채 일어난 것이었다. 활동가 자히라 카말은 이 시기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처음으로 우리는 해외 지도부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59 여성들은 농촌 마을, 난민촌, 빈곤 지역에서 집 밖으로 나섰다. 여성들은 집단적으로 군인들에 맞섰는데, 공동체가 습격을 받으면 서로를 도와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했다. 여성은 시위의 중심이었다. 1988년 3월이 되자 여성들이 조직한 시위가 한 주에 115건에 이르렀다. 60 이스라엘군IDF은 모진 탄압으로 응수했다. 대규모 추방과 구금이 벌어졌고, 여성들은 총이나 최루가스를 맞고 구타를 당했다.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가 체포돼 투옥된 여성도 많았다. 행진 중에 여성 16명이 숨지기도 했다. 61
1987년 12월 이스라엘 [군용] 차량이 가자지구로 돌아가던 팔레스타인인 노동자들의 차량으로 돌진해 팔레스타인인 네 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점령에 맞선 대중 봉기, 즉 1차 인티파다를 촉발했다. 시위가 터져 나오자 여성들도 참가했다. 그들은 행진하고, 군인에게 돌을 던지고, 돌을 운반하고,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군인들이 사람들을 체포하지 못하도록 몸싸움을 벌였다.여성들은 인티파다를 지속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각종 대중적 위원회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다. 통행금지령과 이동 제한이 있었음에도 여성들은 파업을 유지하고 체포에 물리적으로 저항했다. 이들 대중적 위원회는 식품 저장·분배, 의료, 지하 교육 보급 등 일상의 모든 면에 관여했다. 여성들이 가정 밖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육 시설의 운영 시간을 연장했다. 농업 협동조합과 자립 프로젝트를 장려해 이스라엘 경제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여성들의 자신감을 높였으며 여성들이 물질적 독립도 일정 수준 이룰 수 있었다.
62 〈나일라와 봉기〉라는 다큐멘터리는 여성들이 중심적 구실을 했음을 보여 준다. 여성들은 투쟁의 최전선을 지켰는데, 시위를 조직하고 농촌 마을과 지역 공동체를 기층 수준에서 방어하는 구실을 했다. 또한 투옥과 구금을 겪으며 여성들이 치른 개인적 대가도 확인할 수 있다.
나이마 알셰이크 알리라는 한 활동가는 사회복지 활동이 그 자체로 인티파다를 지속하기 위해 필수적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 활동과 저항 건설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이런 활동은 이스라엘 상품 보이콧을 조직하고 활성화하는 데 특히 중요했다.63 문화적 장벽이 무너졌거나 최소한 흔들렸다. 여성은 이동에 제약을 덜 받고 더 쉽게 거리에 나서게 됐으며, 결혼 상대를 고를 권리를 주장했고 신부 지참금 관습을 폐기했다.
그렇지만 여성의 활동 참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에 관한 관념에 도전했다. 페넬로피 스트럼은 여성의 인티파다 참여로 “여성은 의존적이고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명예로운 것이라는 낡은 관념을 뒤흔들었다”고 설명했다.64 남성은 “형제 의사분들”이나 “형제 노동자들”로 불리는 반면, 여성은 다른 사람들과 관련해서만 언급되고 아동이나 노인과 한데 묶여 “인내심(수무드)”에 대해 칭찬받았다. 인티파다 3년째에 접어들자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 구체적 성과로 이어지지 못했다. 그 뒤로 몇 년간 강제 조혼이 다시 늘어났고 낡은 개념인 ‘이스캇(불명예 또는 수치)’이 더 강력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더 많은 성인과 어린 여성들이 학교와 대학 교육에서 멀어져 갔다.
자생적이었던 봉기의 초기 단계가 지나고 저항은 점차 제도화돼 대중 위원회들은 점령지에서 새로 결성된 통합봉기사령부UNLU의 휘하로 들어갔다. 이런 전환은 대중적 지지를 받은 것이지만, 그간 인티파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지역위원회들에서 주도적 구실을 했던 여성들이 민족운동 지도부 내에서 핵심 구실을 맡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스트럼은 통합봉기사령부의 성명서들이 “심각하게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대중을 얕잡아 보는” 내용이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군이 젊은 팔레스타인인 여성들의 활동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이를 위협하면서 팔레스타인인 여성에게는 더 큰 압력이 가해졌다. 이스라엘 당국은 팔레스타인인 사회에서 가문의 명예가 여전히 중시된다는 점을 파고들었고, 동시에 여성에게 성폭력, 성적 괴롭힘, 협박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명예와 순결이라는 개념이 사람들에게 더 각인됐다. 인티파다 시기에 ‘이스캇’에 대해 가장 두려움을 느낀 집단은 젊은 여성과 10대 소녀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66 여성 저항 운동의 좌파인 팔레스타인여성노동자위원회는 산아 제한 같은 더 급진적인 문제를 제기하며 조혼, 이혼, 가사 분담 등에 관한 강연을 열기 시작했다. 67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부 여성들은 점령에 저항하는 당면 투쟁을 넘어 인티파다 시기에 자신이 겪는 사회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1990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열린 ‘인티파다와 사회적 문제들’이라는 회의에 각종 단체와 정치적 경향에서 활동하는 여성 500명이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는 의사 결정 과정에 여성 참여율이 낮은 문제, 교육의 중요성, 조혼이 미치는 영향, 베일 강제 착용 반대, 여성 수감자 문제, 교육과 직장에서의 차별에 관한 논의가 이뤄졌다.68 투쟁의 절정기가 지나간 다른 많은 경우에서 여성들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인티파다의 경험은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젖혔지만, 여성이 정치 활동을 확대하고 사회적 한계를 넘어서며 이룬 성과는 너무도 쉽게 후퇴했다. 저항이 점차 제도화된 것, 이스라엘의 탄압 강화, 보수적 운동의 영향력 확대는 여성의 정치 활동 참여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여성 자신의 활동이 고무되기보다는 여성은 “순교자의 어머니”, “새 세대의 창조자”, “국가를 위한 희생” 등으로 찬양받는 존재가 됐다. 야라 하와리는 여성들이 투옥 중에는 칭송받지만 막상 석방된 뒤에는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결혼이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이스라엘의 끊임없는 탄압은 여성들의 전투성을 더욱 저하시키는 데에 일조했다. 탄압으로 여성 위원회와 지역위원회가 약화하자 서로 기대고 돕는 네트워크가 사라지고 조직화 역량이 상실됐기 때문이다. 불안정이 심화되자 여성은 보호와 안정을 주로 가족에서 찾아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고 가정 내에서 여성의 전통적 구실이 강화됐다.
하마스의 형성과 성장
69 둘째로, 자드가 지적하듯, 이슬람은 일련의 고정불변한 명령이 아니고 이슬람이 형성되는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상황을 봐야 한다. 70
1차 인티파다의 초기인 1987년 하마스가 결성된 것은 여성이 지도력을 발휘하고 투쟁에 참여하는 데에 새로운 요소로 작용했다. 하마스의 뿌리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로, 이전까지는 복지와 자선 활동을 하는 기구였다. 그러나 인티파다의 분출로 그들의 전술이 급격하게 변했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강력하게 비판하고 두 국가 방안과 이스라엘과의 타협을 완전히 거부했다. 많은 동시대 이슬람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하마스도 여성의 사회적 구실에 관해서는 보수적 견해를 내놓았다. 1988년부터 가자지구에서 하마스가 히잡 착용 의무화 운동을 벌인 것도 이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운동을 단지 반현대적이고 반여성적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첫째로 히잡은 종교적 의미 외에도 곧 민족주의적 의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과거 1936~1939년 반란 때에도 그랬다. 하마스는 히잡 착용을 곧 점령에 저항하고, 민족 유산을 계승하고, 이스라엘 군인에게서 [여성을] 보호하는 것과 관련지었다. 그러나 이런 연결을 정당화한 논리의 기저에 놓인 관점은 여성이 ‘순결’을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복장과 행실이 ‘부적절’하면 순교자를 모욕하고 민족을 타락시키려는 적의 계획을 의도치 않게 돕게 된다고 여겼다.71 자드가 말하듯 이슬람의 이론적 측면들을 강조하기보다는 여성의 실제 경험과 이슬람이 여성의 일상 생활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야 한다. 72 하마스는 여성을 모집할 필요가 있었고 여성 자신들은 정치 참여를 바랐기에 이 둘이 결합한 결과 여성들이 하마스 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됐다고 자드는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 73 이런 주장들에 관해서는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일부 이슬람주의자는 여성의 사회적 구실에 관해 상당히 반동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주요 이슬람주의 조직, 특히 하마스에서 여성이 맡은 구실을 보면 더 넓은 사회의 변화가 작용했고, 여성 스스로 자신이 조직화할 공간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 것이 반영됐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이 현대적 히잡을 착용하는 현상은 무슬림이 다수인 사회에서 나타났는데, 여기에는 여성 차별적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그에 저항하려는 모순된 욕구를 담고 있다.결론
74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오슬로 협정을 체결하자 이스라엘과의 협력을 비판한 하마스의 견해가 옳았음이 입증됐고, 하마스는 점령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유일한 세력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앞에서도 간단히 다뤘듯 팔레스타인 이슬람주의의 부상은 여성의 활동 참여에 모순적이고 복합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차 인티파다 시기 이스라엘 국가의 잔인하고 끊임없는 억압은 팔레스타인인에게 심각한 타격을 줬고, 6년간의 투쟁 끝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완전히 지쳐 버렸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내에서 야세르 아라파트로 대표되는 파타 경향 지도자들은 1987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기층 운동을 통제하길 원했다. 아라파트는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알려진 ‘평화 회담’에 참여했고, 그 회담으로 대중운동은 종말을 맞았다. 1994년 팔레스타인 당국PA를 수립한 오슬로 협정은 여성들의 활동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오슬로 협정은 점령지 바깥에서 논의되며 체결됐고 투쟁 전선에 섰던 여성들과는 어떤 협의도 없었다. 협정의 양 당사자는 전혀 평등하지 않았고, 그 결정에 따라 점령지의 땅과 경제가 이스라엘에 이롭게 재편되면서 팔레스타인 영토는 조각조각 쪼개졌다. 이렇듯 1차 인티파다 이후로 점령에 맞선 투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팔레스타인 당국을 지원하기 위해 여러 나라와 단체가 보낸 원조가 쏟아지자 기층 여성운동은 약화됐다. 이런 원조는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을 개인화시키고, 선별적인 프로젝트 후원을 통해 전투적이고 집단적인 대응을 삼가도록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일부였다.75 두 번의 투쟁에서 계급적 요소도 중요했다. 각종 문헌에는 중간 계급 여성들이 저항에 참여한 것이 주되게 기록됐지만, 농촌과 난민촌의 여성들이야말로 가장 심하게 탄압받으며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에게 몸소 맞서 싸웠던 이들이다. 부르주아지와 전문직 중간 계급 여성들은 주거지를 더 자유롭게 고를 수 있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탄압에서 자신을 어느 정도 보호할 수 있었다.
오슬로 협정을 시작으로 1994년부터 어려움이 닥쳤다 해도, 그간 여성들이 팔레스타인 점령에 대항해 싸워 왔고 앞으로도 싸울 것이라는 점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테드 스위든버그가 지적하듯 1930년대 대봉기와 1980년대 후반의 1차 인티파다 사이에 유사성이 있다. 여성들이 “집을 박차고 나와 가격통제·보이콧·파업을 유지시키고, 시위를 조직하고, 보급품을 밀반입하고, 군인에 맞섰다”는 것이다.일부 여성이 여성 차별 문제를 제기했고 민족주의 운동의 초기에도 이를 발견할 수 있지만, 이런 제기는 주로 민족주의 의제에 흡수됐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반제국주의 운동의 형태로 급진주의가 분출하고 또 페미니즘이 성장한 것이 팔레스타인인의 투쟁에 영향을 주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부 여성들은 자신감을 얻어 결혼·행실·직업에 대한 사회적 태도,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여성이 맡는 구실에 대해 문제 제기하며 여성 해방의 문제를 더 강하게 내세웠다.
76 서안지구의 도시에서 여성들은 가정 폭력에 항의하며 거리에 나섰고 하마스와 이슬람 민족주의 운동 내에서 여성이 계속 수행하고 있는 구실에 관해서도 할 이야기가 많다.
20세기 초부터 1차 인티파다가 끝날 때까지 여성들은 정치적 능동성을 발휘해 기존의 성 역할을 뒤흔들고 공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공간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투쟁의 정점에서 이뤄낸 성과는 영원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싸워서 지켜야 했다. 여성들의 투쟁 참여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보수적 관념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습격과 폭격에서 마을을 지키기 위해 하루가 멀게 물리적으로 저항하고 가자지구에서 거리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이처럼 투쟁이 고조됐던 시기에 주목하며 배우는 것은 여성이 팔레스타인인 저항의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거나 주변적 구실에 머물렀다는 인식을 바꾸고 현재와 미래의 세대에 영감을 줄 수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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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Jane Hardy and Katie Coles, ‘Palestinian women’s resistance: from the Great Revolt to the First Intifada (1936 to 1993)’, International Socialism 184(Autumn 2024)
↩
- 인터뷰에 응해 주고 이 글에 대한 의견을 준 바얀 핫다드와 제한 헬루에게 깊은 감사를 표한다. 또한 주디 콕스, 필 마플릿, 마날 슈카이르에게도 의견을 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한다. 앤 알렉산더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초고를 보고 의견을 줬다. ↩
- Karmi, 2021. ↩
- Fleischmann, 1999. ↩
- 이 부분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술에서 따온 것으로, 중동 사람들을 열등하고 후진적이며 구원이 필요한 존재로 보며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Abdo, 2014, p57, and Said, 1978 참조. ↩
- 전리품을 나눠 간 공무원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
- 예컨대 영국은 팔레스타인 내 오스만제국 군대를 물리치는 데 협력하는 대가로 독립을 약속했다. ↩
- 이집트, 이란, 레바논, 시리아, 튀르키예의 여성들은 일찍이 19세기 후반에 신문, 학술지, 잡지를 창간했다. Fleishmann, 2003, Arenfeldt and Al-Hassan Golley, 2012 참조. ↩
- Fahmy, 2001. ↩
- 호다 샤아라위는 1947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이집트여성연합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이집트여성연합은 와프트당과 연계를 맺고 있었고 그 전신은 와프트여성중앙위원회였다. ↩
- 영국은 위임 통치를 시작하며 유럽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촉진했다. 1922년과 1935년 사이에 유대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9퍼센트에서 약 27퍼센트로 증가했다. ↩
- 이후 단체명을 아랍여성연합AWU으로 바꿨다. 여기 참여한 가문은 후세이니, 나샤시비, 압달 하디스, 부데이리, 칼디, 알라미가 있었다. 아크레, 람라, 하이파, 야파, 나블루스, 나사렛, 가자 등지에 지역 지부를 둔 전국 조직을 세운 것은 여성 조직화 전략에서 중대한 변화였다. Hiltermann, 1991 참조. ↩
- Pappé, 2003, p15. ↩
- Fleischmann, 2002, pp115-116. ↩
- Kuttab, 1993. ↩
- 3명의 반란 가담자들이 1930년 6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
- 반란의 계기는 1935년 널리 알려진 투사인 이즈 알딘 알카삼이 영국과 총격전을 벌이던 도중 사망한 일이었다. ↩
- Swedenburg, 2003, p20. ↩
- 탄압의 더 자세한 역사에 대해서는 Hughes, 2019 참조. ↩
- Swedenburg, 2003, p20. 반란에서 아랍고등위원회의 전반적 지도력은 정치 면에서나 조직 면에서나 처참한 수준이었다. 이 위원회를 장악한 우익 민족주의 지주와 전통적인 도시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인 빈농, 노동자, 중간계급 참가자들의 절망감을 통제하고자 반유대주의 수사를 내세웠고 동시에 영국 당국과 타협을 모색하다가 1936년 10월 항복했다. Cliff, 2000, 1장을 보라. ↩
- 파업은 1936년 4월부터 10월까지 이어졌으나 외국의 아랍 지도자들의 중재로 종료됐다. Swedenburg, 2003. ↩
- Fleischmann, 2003, p126. ↩
- Fleischmann, 2003. ↩
- 알카삼은 1930년대 지하 활동 중에 젊은 여성들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그는 여학생들에게 교육과 종교적 지도를 제공하고 ‘리파카트 알카삼(알카삼의 동지들)’이라는 여성 조직을 설립했다. ↩
- 관련 논의는 Fleischmann, 2003 참조. ↩
- 이란에서도 대표단이 한 명 있었다. ↩
- Fleischmann, 2003, p185. ↩
- Swedenburg, 2003, p177. ↩
- Hughes, 2019. ↩
- Swedenburg, 2003, p181. ↩
- Fleischmann, 2003, p133. ↩
- 1937~1938년에 아랍여성협회는 두 조직으로 쪼개졌는데, 이것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 내의 파벌 싸움을 보여 준다. ↩
- Kuttab, 1993. ↩
- 더 자세한 내용은 Kilani, 2024 참조. ↩
- 파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해방민주인민전선 사이에는 사회적 문제와 아랍 국가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념적 차이가 있었다. ↩
- Kawar, 1996. 그녀의 책은 해방운동 내 모든 분파의 여성 지도자 34명과 인터뷰한 것을 바탕으로 쓰였다. ↩
- Helou, 2022. ↩
- 1970년 9월 뉴욕행 비행기 4대와 런던행 비행기 1대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회원들에게 납치됐다. 이 중 3대는 강요에 의해 요르단 자르카 근처의 외딴 사막에 위치한 도슨 기지에 착륙했다. ↩
- Khaled, 1973, p15. ↩
- 팔레스타인 좌파의 전략에 관한 비평은 Kilani, 2024 참조. ↩
- Khaled, 1973, p91. ↩
- 고향에서 추방된 팔레스타인인 80만 명 중 10만 명은 레바논으로 갔는데, 이들은 대부분 북부 팔레스타인 마을 사람들이었다. ↩
- 이런 접근법은 1960년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서구를 비롯한 전 세계 좌파의 일반적인 특징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이 분출하며 여성 차별 쟁점을 부차화하는 태도에 도전했다. ↩
- Hawari, 2019; Kawar, 1996. ↩
- Khaled, 1973, p46. ↩
- Peteet, 1991, p95. ↩
- Kawar, 1996. ↩
- Khaled, 1973, p25. ↩
- Helou, 2022, p6. ↩
- Peteet, 1991, p99. ↩
- Peteet, 1991, p97. ↩
- 처음에는 요르단공산당과 무소속 인사들에 의해 설립됐다. 파타, 팔레스타인해방민주인민전선,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다음 해에 합류했다. ↩
- Jad, 2018; Kayali, 2021; Richter-Devrou, 2018. ↩
- 더 자세한 논의는 Jad, 2018, and Kuttab, 1993 참조. ↩
- Joost, 1991, p159. ↩
- 네 개의 정치 분파는 다음과 같다. 여성노동위원회WWC는 팔레스타인해방민주인민전선을 지원했고, 공산당 계열 여성들이 세운 여성노동위원회(1981)가 있었고,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의 여성 지지자들이 세운 팔레스타인여성위원회연합(1981), 파타 계열의 여성들이 세운 여성사회사업위원회(1982)가 있었다. 한편 WWC는 여성노동위원회연합으로 이름을 바꿨다. ↩
- 좌파적 조직 세 곳은 다음과 같다. 팔레스타인여성위원회연합UPWC, 팔레스타인여성행동위원회연합FPWAC, 팔레스타인진보여성노동위원회연합UPWWC. 이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따른다고 주장했지만 지도부 수준에 한정된 이야기였고, 기층 수준의 대다수 여성은 정치 전략보다는 활동 위주로 참가했다. ↩
- Rita Giacaman quoted in Hiltermann, 1991, p139. ↩
- Giacaman and Johnson, 1990. ↩
- 〈나일라와 봉기〉 (Bacha, 2017). ↩
- Swedenburg, 2003. ↩
- 1987년 12월에서 1991년 12월 사이에 여성 99명(전체 사망자의 11퍼센트)이 사망했고, 1991년 7월까지 여성 3000명이 체포됐다. Kuttab, 1993 참조. ↩
- 〈나일라와 봉기〉 (Bacha, 2017). ↩
- Strum, 1998. ↩
- Strum, 1998, p201 ↩
- Shalhoub-Kevorkian quoted in Kayali, 2023. ↩
- 1990년 12월 14일 예루살렘에서 열린 ‘인티파다와 여성이 처한 사회적 문제들’의 최종 결의문은 온라인에서 읽을 수 있다. 번역 제공은 News From Within. ↩
- 팔레스타인공산당을 비롯한 진보적 연합의 여성 조직이었다. Hiltermann, 1991 참조. ↩
- Hawari, 2019. ↩
- Jad, 2018, pp103-104. ↩
- Jad, 2018. ↩
- MacLeod, 1992. ↩
- Jad, 2018. ↩
- Jad, 2018. ↩
- Prugl, 2016. ↩
- Swedenburg, 2003, p194. ↩
- Gadzo and Jnena, 2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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