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해방의 전략
팔레스타인 좌파 내의 낡은 주장과 새로운 주장 *
1 오늘날 이 저항을 주도하는 것은 이슬람주의 조직들이다. 가자지구의 군사적·정치적 지도 세력은 이슬람주의 운동인 하마스다. 2 하마스의 군사 조직인 이즈 앗딘 알카삼 여단은 그 다음으로 큰 무장 조직인 ‘팔레스타인 이슬람지하드운동’PIJ과 자주 공동 군사 작전을 편다. 3 2018년 가자지구의 무장 저항을 조율하기 위해 구성된 ‘팔레스타인 저항 정파 공동 작전실’에는 ‘팔레스타인해방민중전선’PFLP 등의 좌파 조직도 포함돼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좌파 조류의 군사적·정치적 영향력은 현재 주변적이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인종 학살 전쟁을 8개월 넘게 벌이고 있는 지금,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여전히 굴복하지 않고 있다.4 PFLP는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병원과 학교, 보육원 등의 서비스를 운영했다. 필자의 아버지를 비롯해 가자지구와 그 밖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정파들의 우산 조직 구실을 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내의 비종교적 좌파 조직들을 지지했다. 그 좌파 조직들은 세계 각지의 재외 팔레스타인인과 공산당들, 투쟁 조직들과 긴밀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한 정당들 중에서 가장 컸던 PFLP는 무장 저항으로 세계적으로 명성과 악명 모두 높았다. PFLP는 아랍어 주간지인 〈알하다프〉(“표적”이라는 뜻)와 영자 월간지인 《PFLP 회보》를 발행했다. 두 간행물에는 정치 분석과 이론뿐 아니라 국제 문제와 사회 문제, 문화를 다룬 글도 실렸다. PFLP의 당원 수는 요르단에서만 5000명으로 추산됐고 그중 거의 절반은 무장 저항 투사였다.이 글에서 필자는 팔레스타인의 역사적 좌파 조직들이 쇠락한 주된 이유가 무장 투쟁 전략을 우선시해 PLO에 의존하게 된 데 있다는 점을 논증하려 한다. PLO 내 정파들은 중동 정권들이 제공한 자금과 지원을 놓고 관료적 경쟁을 벌였고, 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창조적 에너지를 이끌어낼 여지를 줄였다. 좌파 내에서는 민족 해방 투쟁을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사회적 투쟁보다 언제나 우위에 놓는 스탈린주의적 “단계” 혁명 전략이 우세했고, 그 전략은 팔레스타인 투쟁의 혁명적 역학을 억제했다.
전략 문제는 오늘날 다시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다. 2011년 아랍 혁명과 반혁명, 2023년 10월 7일 하마스 주도의 이스라엘 공격 이래 극적으로 고조된 중동에서의 군사적 충돌,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대응, 이 모든 것의 여파 속에서 성장한 서방 국가 내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때문이다. 새로운 팔레스타인 좌파가 성장하고 있다. 이는 특히 재외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지는데, ‘팔레스타인 청년 운동’과 같은 신생 조직들은 연대 운동 내 급진적 조류를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5 팔레스타인 좌파의 역사와 팔레스타인 좌파 내 논쟁을 되짚어 보는 것은 매우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이해하고 오늘날 시온주의 식민주의에 맞선 해방의 전략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할 권리를 지지했고, 앞으로도 계속 지지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제국주의의 후원하에 자신들의 땅을 점령하고 자신들을 억압하는 시온주의 정착자 식민지에 맞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항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해방을 위해 싸울 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그들을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과 연대한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조직들의 전술·전략을 비판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팔레스타인 좌파의 기원 1950년대 중동·북아프리카 전역에서는 아랍 민족주의의 일종이 갈수록 큰 인기를 누렸다. 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단일 민족이지만 식민 지배 시대에 인위적인 국경으로 나뉘도록 강요받았다. 이집트와 이라크에서 각각 1952년과 1958년에 하급 장교들이 자국의 친영 왕정을 타도하고, 이집트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아랍 민족주의의 기수가 됐다. 나세르는 1956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해 옛 식민 열강인 영국과 프랑스에 정치적·경제적으로 도전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 국가 운영권을 쥐고 행동하면 ‘아랍의 단결’을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을 강화했다.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주요 아랍 국가 간 합병에 최초로 합의해 아랍 연합 공화국UAR을 수립했다. 팔레스타인 해방은 아랍 민족주의의 핵심 대의의 하나로 내세워졌고,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나세르가 이스라엘과 대결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팔레스타인 좌파는 이러한 아랍 민족주의가 이중의 위기에 직면한 것을 배경으로 등장했다. 첫 번째 위기는 아랍 연합 공화국 수립 3년 후인 1961년 시리아가 탈퇴한 것이다. 더 심각한 두 번째 위기는 1967년 ‘6일 전쟁’에서 아랍 군대가 이스라엘에 참패한 것을 계기로 불거진 위기다.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의 군사적 실패는 아랍의 단결이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믿음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때부터,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는 좌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아랍민족주의운동’ANM 내에서 나세르주의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ANM은 나크바(“대재앙”) — 1948년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 75만 명이 강제로 쫓겨난 사건 — 직후 레바논의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교에 다니는 팔레스타인인 학생들이 조직한 범아랍 민족주의 조직이다.
7 당시 그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이 우러러본 알제리와 베트남의 민족 해방 투쟁에서 우세한 이데올로기였다. 마오쩌둥, 체게바라, 호치민 등 반식민 투쟁 지도자들이 쓴 글이 널리 읽히고 토론됐다. 그런 맥락 속에서 스탈린주의적 단계 혁명론이 팔레스타인 좌파 내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민족 해방 투쟁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은 자본가 계급의 국민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자본주의에 맞서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자제시키며 자본가들과의 동맹을 깰 우려가 있는 일을 신중하게 피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민족 해방이 먼저 성취돼야 사회주의가 일정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첫 단계인 부르주아 혁명이 먼저 완수돼야 두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 사회학자 자밀 힐랄에 따르면, 당시 나세르주의를 비판하는 좌파들은 사상의 “시장에 나온 모든 것”을 놓고 대안을 모색하려 했다. 이러한 민족 해방 이론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 중에는 ANM의 두 설립자도 있었다. 나크바 때 인종청소를 피해 리다에서 도망쳐 나온 팔레스타인인 주르지 하바시와 1948년 사파드에서 쫓겨난 와디으 핫다드가 바로 그들이다. 두 사람은 범아랍 민족주의를 지지하던 젊은 의사였고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함께 병원을 운영했다. 두 사람은 ANM 산하 팔레스타인인 조직을 ‘팔레스타인해방전선’과 그 밖의 “페다인” 조직들과 통합하여 PFLP를 출범시켰다.9 가 1968년 요르단 카라메 전투에서 게릴라전으로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과를 올린 것을 계기로 PLO의 성격은 변화했다. PLO를 장악한 파타는 PLO를 대중 운동으로 전환하고 이집트 정부로부터의 독립성을 강화했다. 그 전까지 PLO를 거부했던 신생 좌파 조직 지도자들은 PLO의 성격이 변화하자 PLO에 가입했다.
반면 PLO는 원래 1964년 나세르가 중동 내에서 벌인 세력 경쟁의 산물이자 수단으로 설립됐다. 그런데 나세르가 1967년 ‘6일 전쟁’에서 군사적으로 패배하고,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인 파타10 파타의 민족주의는 사회 계급을 불문한 모든 팔레스타인인을 대표하고자 했다. 팔레스타인 자본가 계급은 이런 파타를 지지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국민국가를 세우는 자신들의 투쟁을 수행해 줄 대중 운동을 필요로 했지만, 그러면서도 기존 아랍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동맹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파타는 팔레스타인 부르주아지의 당이 됐다. 파타 지도자들과, 재편된 PLO 내 경쟁 좌파 세력의 지도자들은 아랍 국가에서 망명 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 중간계급과 지식인 출신이었다.
그 결과 PLO에는 비종교적 이데올로기를 가진 다양한 무장 저항 정파가 결집했다. PLO 내 최대 조직인 파타는 1950년대부터 있었던 조직이지만 그들은 1965년이 돼서야 무장 저항을 시작했다. 파타의 정치는 “와따니” 민족주의의 일종에 기초하고 있었다. 와따니 민족주의는 팔레스타인 공통의 민족 정체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로, 범아랍 민족주의 운동인 “까우미” 민족주의와 구분되는 것이었다.11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슬로건을 제시하는 것은 사뭇 다른 맥락에서다. 바로 팔레스타인 혁명이 승리하려면 팔레스타인 주변국의 노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혁명적 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이다.
파타는 아랍 국가의 내정에 개입하지 않는 정책을 고수하겠다고 약속했고, 다른 아랍 나라들에서 일어나는 정치 투쟁에 얽히기를 거부했다. 반면 PFLP는 그런 개입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PFLP는 범아랍 민족주의적 배경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다. 그래서 PFLP의 개입 개념은 노동자 혁명을 일으키고 자본주의 국가 기구를 분쇄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PFLP의 이데올로기적·조직적 개념은 제3세계 민족 해방 운동을 모범으로 한 것인데, 그 운동을 이끈 급진적 지식인들은 중국식·소련식 국가자본주의 모델을 통해 경제 성장과 자주를 성취하려 했다. PFLP는 민족 해방이라는 과제를 이루려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대한 아랍 정부들의 지원이 여전히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PFLP의 초대 총장인 하바시가 “팔레스타인으로 가는 길은 암만과 베이루트, 카이로, 리야드로 통한다”는 슬로건을 채택한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인데, 그 슬로건은 원래 PLO 초대 의장인 아흐마드 슈케이리가 제시한 범아랍 민족주의적 슬로건이다.의존의 대가
PLO는 강력한 적인 이스라엘을 상대하기 위해 비대칭전 전술을 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인(많은 경우 불가피하게 비밀리에 활동한) 지하 저항 지도자들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들의 적은 군사적으로 훨씬 우위에 있었다. 이스라엘 식민 정착자 국가는 ‘6일 전쟁’에서 아랍 민족주의를 패배시키면서 미국 제국주의의 중동 경비견이 됐다. 팔레스타인 정치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안팎에서 암살당하거나 체포당할 위험에 시달렸고, 이스라엘과 서방은 그들의 조직들을 금지하고 탄압했다.
이집트 나세르와 결별한 PLO는 새로운 국가 행위자들의 지원을 받아들였다. 걸프 연안국 왕정들과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알제리, 베트남, 쿠바 등 다양한 국가 행위자의 지원을 받았다. 또, PLO는 냉전 시기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아랍 정권들 사이의 역내 경쟁을 이용해 재정과 군사 자원, 외교적 위상을 확보하려 했다.
PLO 내 좌파들 또한 외부 국가 행위자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오마르 모스타파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PFLP는 옳게도 아랍 정권들이 사회주의적이라는 견해를 거부했지만, 한편에는 제국주의에 순응하는 반동적 정권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제국주의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진보적 민족주의 정권들이 있다는 잘못된 구분을 받아들였다. 이런 구분에 기초해 PFLP는 이라크의 바트당 정권과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등 아랍 세계의 여러 억압적 정권과 동맹을 맺었다.
13 그러나 DFLP는 그들이 이론적으로 거부한 아랍 정권들로부터 재정적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다. DFLP 재정 담당자를 지냈던 맘두흐 노팔은 알자지라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1978~1980년 동안 매달 DFLP는 리비아로부터 100만 달러를 받았다. PFLP는 100만 달러 이상, ‘PFLP 총사령부’는 150만 달러를 받았다.” 14
PFLP는 파타보다 좌파적인 PLO 내 정파 중에서 가장 컸다. 그러나 유일한 좌파는 아니었다.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이하 “DFLP”)의 전신인 ‘팔레스타인해방민중민주전선’은 PFLP에서 왼쪽으로 분열해 나와 결성된 조직이다. ‘민중민주전선’을 결성한 ANM·PFLP 출신들은 원래 PFLP 내에서 간행물 《알후리야》(“자유”라는 뜻)를 중심으로 한 ‘진보파’로 조직돼 있었다. 이들은 반동적 아랍 정권과 진보적 아랍 정권을 구분하는 이론을 거부하며 1969년 PFLP에서 탈퇴했고, 1975년에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이라는 이름을 채택했다. DFLP는 PFLP의 무장 투쟁 방식도 비판했는데, 처음에 DFLP는 대중 속에서 “근본적 정치 의식”을 고취하여 전면적인 “인민 전쟁”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처음에 DFLP는 “진보적 아랍 정권”을 구분하는 이론을 거부하고(비록 단계혁명론과 같은 약점은 고스란히 갖고 있었지만) PFLP에서 왼쪽으로 갈라져 나와 결성됐지만, 이후 급격하게 우선회했다. 그 계기는 1970년 요르단에서 PLO가 처한 위기였다. 당시 요르단 왕정은 PLO를 상대로 무자비한 내전을 벌였다. 1973년 DFLP는 “단계 정책”이라고 불리는 강령을 선구적으로 제시했다. 그 강령은 “독립적이고 전투적인 민족 정부”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즉,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미니 팔레스타인 국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정책은 ‘두 국가’ 방안의 효시가 됐고 이듬해 팔레스타인 민족 회의에서 파타와 PLO의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에 의해 PLO의 정책으로 채택됐다.
15 요르단 정권이 불안정의 징후를 보이고, 요르단 내 팔레스타인 좌파 정당들은 반동적인 국왕 후세인을 타도하자고 말들을 했지만, 그중 어느 조직도 1969~1970년에 왕정에 맞서 혁명적 봉기를 실제로 일으키기 위해 만만찮게 준비하고 있지는 않았다. 수많은 팔레스타인인과 요르단인들을 왕정에 맞서는 대중 운동으로 동원했다면 팔레스타인 게릴라 전사들이 직면한 추방 위협을 물리치고 팔레스타인 해방으로 나아갈 길을 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PFLP는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의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리기보다는 비행기 나포 작전에 몰두했다. 1970년 9월에 PFLP는 서방의 여객기 여러 대를 나포하여 요르단에 착륙시켰다.
이 문제에서 DFLP와 파타가 정치적으로 후퇴하게 된 것은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이 1970년 요르단에서 겪은 처참한 패배에 애석하고 그릇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에 대한 중동 국가들의 입장은 여전히 자가당착적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PLO 지지를 표방했다. 그러나 요르단 왕정이 팔레스타인 조직들을 더 강하게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는 요르단 왕정에 재정을 지원했다.16 비교적 ‘급진적’이라는 아랍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도우러 오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에 대한 요르단의 포격을 보도하면서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논평했다. “한편, 오래도록 ‘아랍 혁명의 지도자’를 자처해 온 나세르는 요르단 국왕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이를 관망했다.” 17 시리아의 독재자 하페즈 알아사드도 수수방관하며 똑같은 태도를 취했다.
요르단 정권이 여객기 나포를 빌미로 PLO를 강력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자, 이에 맞설 준비가 된 팔레스타인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파타 지도부는 여전히 자신의 아랍 지배계급 형제들을 욕보이는 일을 한사코 피하려 했고, 그래서 포성 속에서 일시적 휴전에 동의했다. 이는 국왕 후세인에게 흔들리던 요르단군의 규율을 다잡을 기회만 줬을 뿐이다. 요르단군 수뇌부는 지지받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에 맞서자고 사병들을 만만찮게 설득하려고 했던 저항 세력은 없었다. 몇 달간의 엎치락뒤치락 끝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는 결국 패배했고 요르단에서 쫓겨났다. 이 사건은 훗날 “검은 9월”로 알려진다.스탈린이 이스라엘 건국에 외교적·군사적 지원을 제공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PLO의 중요한 기준점이 됐다. 1970년에 소련은 PLO에 돈과 정보뿐 아니라 군사 훈련, 로켓 추진 유탄 발사기, 지뢰, 미사일 등을 제공했다. 그 무기는 특히 PFLP 전사들에게로 흘러들어갔다. PFLP의 소련 지향은 단지 물질적 지원을 누리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PFLP는 소련에서 온 조직 개념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스탈린주의식 ‘민주집중제’에 기초한 중앙위원회가 그런 사례다. 실천에서 이러한 스탈린주의적 조직 모델은 관료적 중앙집중제를 뜻했고 조직 내 민주주의를 약화시켰다.
18 소련에 대한 의존은 소련의 지시나 이데올로기에 어느 정도로든 따라야 하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실제로 소련은 자신에게 선을 대는 조직들을 소련 외교 정책에 충성하는 도구로 변화시키려 했다. 소련 정보기관이 작성한 한 보고서는 소련이 PFLP 게릴라를 지원한 이유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핫다드와 맺은 관계의 성격 덕분에 PFLP 해외 작전부의 활동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소련에 이로운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은밀하게 PFLP의 활동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목적도 일부 달성할 수 있었다.”무장 투쟁 민족 해방 전략의 한계
19 여기에는 개인의 혁명적 의지로 반혁명적 국면을 혁명적 국면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사상이 담겨 있다. 그에 따르면 무장 저항은 혁명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칼레드는 다른 식민지의 무장 투쟁 사례를 모범 삼아 팔레스타인 해방 전략을 구상했다. “우리는 알제리 형제들의 모범을 따르는 법을 배워야 한다.” PFLP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게릴라 인민 전쟁이라는 “공식을 통해서만 ⋯ 기술적·경제적·군사적 우위에 있는 제국주의와 대결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고 주장했다. 20
게바라주의에서 영감을 얻은 PLO 내 좌파 세력들은 무장 투쟁과 혁명적 주의주의를 가장 강조했다. PFLP 간부이자 1970년 9월 비행기 나포 작전에 참여한 레일라 칼레드는 혁명가들의 과제에 관해 게바라의 유명한 말을 따라 자서전에 다음과 같이 썼다. “혁명가로서 우리는 대중을 고무하고 반혁명의 시기에 혁명적 봉기를 촉발하는 구실을 한다.”21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중요한 혁명적 사회주의자인 자브라 니콜라가 옳게 지적했듯이 파타의 좌파 측 비판가들은 거의 오로지 군사 전략에만 골몰한 나머지, 기층 팔레스타인 조직들이 벌이는 아래로부터의 투쟁에 관여해야 한다는 절실한 과제에는 힘을 쏟지 않았다. 22 민족 해방 투쟁에서 무장 저항은 대중의 참여를 대체하는 구실을 했다. 자브라는 “A 사이드”라는 가명으로 발표한 “동아랍의 혁명에 관한 테제”라는 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이 패배한 이유”에 관한 그의 견해를 이렇게 요약했다.
여러 팔레스타인 좌파 세력은 파타의 헛된 외교 노선과 정치적 후퇴, 식민 지배자 이스라엘과 벌인 일련의 무익한 협상을 옳게도 거부했다. 소설가이자 PFLP의 지도적 당원인 갓산 카나파니는 대등하지 않은 위치에서 하는 그런 협상을 “칼과 목의 대화”라는 유명한 말로 꼬집었다.1.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이론에서나 실천에서나 혁명의 광역적 성격(모든 동아랍 지역을 아우르는)을 인식하지 못했다. 모든 아랍 정권에 맞선 동아랍 전역의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만이 제국주의와 시온주의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있는데도,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팔레스타인 해방” 투쟁을 그런 혁명과 분리했다.
2.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단계혁명론”과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론을 받아들여 계급 투쟁을 “특정 시기” 동안 “민족적 단결”에 종속시켰고, 그 결과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에 맞선 투쟁에서 아랍 정권들과 아랍 지배계급을 싸워서 타도해야 할 계급의 적이 아니라 동맹으로 보았다. 3. 투쟁의 군사적 측면을 사실상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집중” 이론을 받아들인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아랍 전역에서 혁명적 전위 조직을 건설할 필요성과, 군사 작전을 정치 전략과 정치적 지도에 종속시킬 필요성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여러 아랍 나라에서 대중의 정치 의식을 높이고 그들을 혁명적 투쟁에 동원하는 데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여기서 “혁명적 투쟁”이란 단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지배와 그 지배를 행사하는 수단이 되는 아랍 지배자들과 아랍 정권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을 뜻한다.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노선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아랍 나라들 현지의 투쟁을 분리하는 것이었고, 그 탓에 아랍 대중에 대한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정책은 자신과 관계 맺고 있고 자신의 지지 기반을 이루기도 하는 요르단 대중과 레바논 대중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들의 적대감을 사기도 했다.
게릴라전을 강조하는 노선 때문에 PLO 내 좌파 세력들은 갈수록 화려한 군사 작전을 벌이는 방식으로 파타와 경쟁했다. 그러나 혁명적 민족주의 운동 내 군사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부분조차도 대중을 그저 국민국가 건설에 기여하는 존재로만 여겼지, 대중 자신의 행동 즉 평범한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장악해 자기 해방을 성취한다는 전망은 갖지 않았다. 실제로 이런 태도는 1967년 PFLP의 창립 문서에서도 감지된다. 그 문서는 대중에게 무장 저항의 조력자 구실을 촉구한다.
대중(오, 우리 영웅적인 민중의 아들!)은 투사들의 영혼이며, 장기적으로는 대중이 전투에 관여하느냐가 승리를 결정짓는다. 모든 곳의 모든 계층으로부터 투사들이 누리는 대중적 지지는, 참되고 동요하지 않고 갈수록 고조되는 투쟁과 불굴의 정신을 길러 내어 우리가 적을 분쇄할 때까지 일어서는 기반이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대중의 활동은 소규모 전투원 집단이 활동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 주는 구실을 한다. 노동자들은 혁명적 자치 능력을 스스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게릴라 조직의 군사 작전을 지원하는 역할을 주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소총에서 올리브 나뭇가지로
25 PLO를 통해 자금을 받은 PFLP도 영향을 받았다. 정치 활동의 “전문화”가 나타났고 관료 기구가 성장했으며, 그 기구들은 갈수록 PLO의 자금과 후원국에 물적으로 의존하게 됐다. 이런 관료화는 “명시적으로 시인되는 바 없이 PFLP의 주체성에 영향을 줬고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다.” 어떠한 변화든 그것은 “PLO 내에서 확보한 입지를 흔들” 터였기 때문이다.
1970년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 조직들이 요르단 국왕 후세인의 군대에 패배한 뒤 PLO는 요르단을 떠나 레바논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난 내전에 휘말렸다. 레바논 내전은 팔레스타인 좌파의 변화 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 레바논에 있는 동안 PLO는 준국가 기구가 됐다. 그 결과 PLO 내 조직들이 관료화되고 준국가기구의 일부분으로 제도화됐다. 좌파도 예외가 아니었다.게다가 관료 기구는 지도부가 기층 회원들을 더 엄격하게 훈육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PLO 내에서 응집력을 유지할 필요성과 조직의 관료화는 ⋯ PFLP 지도부의 보수적 태도를 배양했다.
PLO에 만연한 부패는 PLO 내 좌파에도 영향을 끼쳤다. PLO 내 정파들에게 재원을 할당하는 시스템이 그 통로가 됐는데, 그 시스템은 후원국들이 준 자금을 둘러싼 경쟁을 제도화했다. 결국에는 PLO 집행위원회가 PLO의 예산을 통제했고, 의사 결정권과 예산 관련 권한이 파타 지도자인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집중됐다. PFLP는 PLO가 ‘두 국가’ 방안을 수용하는 첫걸음을 뗀 것에 반발하여 PLO 집행위원회에서 탈퇴했지만, 7년 후 다시 복귀했다. PLO 내 민주주의의 약화는 팔레스타인 노동조합총연맹에도 반영됐다. 1981년 이후부터는 지도부가 선거로 선출되지 않고 정당들의 지명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파타는 그중 6명을 지명했고, PFLP는 3명을 지명했으며, 나머지 좌파 정당들이 나머지 3명을 지명했다. PLO 내 좌파의 독립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매체였던 독립 신문들 또한 1980년대 동안 영향력을 잃었다. 영어로 발행되던 《PFLP 회보》는 1984년에 발행이 중단됐다. 뒤이어 발행된 격월간지 《민주 팔레스타인》은 10년을 버티지 못했다. 1986년 시리아로 사무실을 옮긴 PFLP의 주간지 〈알하다프〉는 아사드 정권의 검열을 받았다.
28 PLO 내 좌파 분파들은 1970년대 중반이 돼서야 점령지 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전까지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활동한 유일한 PLO 내 분파는 매우 규모가 작은 팔레스타인 공산당이었다. 29
PLO 지도부는 여전히 팔레스타인 바깥에서 활동했고 팔레스타인 점령지 내의 활동에 유의미하게 관여하지 않았다. PFLP는 1982년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본부를 이전했고 아사드 정권은 “PFLP의 주요 역내 파트너”가 됐다.30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서 대중 행동과 총파업, 아래로부터의 조직화로 저항했고, 이는 전 세계 평범한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자발적으로 조직된 위원회들이 시위와 파업, 점령군에 맞선 전투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지하에서 보건 시스템과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현지 팔레스타인 운동 지도부의 일부는 이 대중적 위원회들의 구실을 찬양했다. 1988년 5월 28일 ‘통합 민족 항쟁 지도부’는 “대중적 위원회를 통해 민중의 자치 기구를 건설하라”고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촉구했다. 31 팔레스타인의 “유일한 대표”를 자처하는 PLO를 대체할 잠재력이 있는 대안이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좌파는 항쟁에 뿌리를 잘 내리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1987년에 분출한 제1차 인티파다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있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를 초점으로 만들었다.파타가 이끄는 PLO는 당연히 그러한 변화를 거부했다.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아래로부터 등장한 대안적 지도부에게 밀려날 위험에 처하자 아라파트는 이스라엘·미국과의 협상에 더 매달렸다. 이는 혁명적 좌파의 대안을 제시할 결정적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PFLP는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지하 조직을 통해 기층에 조직을 건설해 냈지만 관료화된 망명 지도부는 계속해서 PLO에 매여 있었다. 그 결과 PFLP는 아라파트의 정책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기층을 이반시켰다.
32 파업과 기층의 대중 행동은 이스라엘 지배계급에게 커다란 어려움을 안겼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위기와 정치 위기를 낳았다. 그러나 그 투쟁들만으로는 이스라엘 국가를 마비시키고 와해시킬 수 없었다. 이스라엘 국가는 계속 기능할 수 있었는데 유대계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 노동을 대체하는 데 열렬히 동참하고 미국이 군사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을 계속 제공한 덕분이다.
제1차 인티파다의 혁명적 에너지가 가능성을 꽃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것은 타협과 후퇴를 추구한 파타의 관료적 충동 탓만은 아니다. 항쟁의 주요 패인 하나는 이스라엘의 정착자 식민 지배와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피란으로 인해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이 해체를 겪었다는 것이다.1990년대 중반부터 오슬로 협정에 따라 팔레스타인당국PA이 수립돼 점령군의 하청 관리자 구실을 하면서 PLO와 이스라엘의 관계 정상화는 더 공고해지고 체계적이 됐다. PFLP와 DFLP는 처음부터 오슬로 협정 반대를 선언했고, PFLP는 오슬로 협정에 맞서 ‘거부 전선’이라는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DFLP 또한 거기에 동참했다. 그러나 PFLP는 PLO에 의존한 탓에 오슬로 협정 거부 입장을 실행에 옮길 능력이 —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재정적으로 — 없었다.
33 PLO가 이스라엘과 또 다른 일련의 협상을 시작해 ‘오슬로 2탄’으로 불린 타바 협정을 체결한 1995년에 PFLP의 지지율은 3퍼센트로 떨어졌다. 34 ‘팔레스타인 정책·여론 연구 센터’에 따르면 2006년 하마스의 지지율은 38.6퍼센트에 달했다. 파타의 지지율은 42.1퍼센트였고, PFLP는 4.4퍼센트, DFLP는 1.2퍼센트였다. 35 같은 기관에서 가장 근래에(2023년 12월) 완료한 여론 조사에서는 하마스가 43퍼센트, 파타는 17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PFLP는 고작 1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36
하마스는 PLO의 틀 바깥에서 지도권을 다투는 새로운 경쟁 세력으로 부상했다. 1988~1989년에도 PFLP는 가입자가 크게 늘었지만, 1991년이 되면 성장이 크게 둔화됐고 이듬해에는 성장이 완전히 멈췄다. 많은 PFLP 회원들이 하마스를 새롭고 전도유망한 조직으로 보고는 하마스로 넘어갔다.광범한 팔레스타인 대중에게는 PLO 내 어느 좌파도 파타에 맞선 일관성 있고 독립적인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공백을 이슬람주의 정당들이 대신 메운 것이다.
오슬로 협정 이후 팔레스타인 좌파는 수십 년 동안 몰락에서 회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부상과 몰락이 제기한 전략적·정치적 물음들은 오늘날에도 팔레스타인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오늘날 주도적인 민족 저항 세력은 대체로 정치적 이슬람을 지지하지만,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1960년대와 1990년대 초 PLO 내 비종교적 민족주의·좌파 정파들이 직면한 것과 비슷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군사적 노선과 중동의 후원국들에 의존하는 문제도 그중 하나다.
37 비이슬람주의 정파들을 겨냥한 이 수사적 물음의 요점은 이란이 저항 세력에 제공하는 모든 무기에 팔레스타인인들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몇 십 년 사이 이란은 팔레스타인 저항 전사들의 주요 후원국이 됐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가자지구의 PFLP와 DFLP는 ‘팔레스타인 저항 정파 공동 작전실’의 일원이다. 이들은 이란이 주도하는 ‘저항의 축’의 일부이기도 하다. ‘저항의 축’은 중동 내 이란의 동맹·대리 세력들로 이뤄 진 느슨한 정치적·군사적 연합을 이르는 말이다. 저명한 좌파 지식인 니자르 바낫은 팔레스타인 당국에 의해 살해되기 전 한 영상에서 이렇게 수사적 물음을 던졌다. “가자지구를 지키는 로켓이 어디서 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이란의 지원에는 조건이 딸려 있었다. 시리아 혁명 때 하마스가 이란과 친한 아사드 독재 정권을 무조건 지지하지 않자, 이란은 하마스에 지원하는 자금을 1억 5000만 달러에서 7500만 달러로 반토막 냈다. 또, ‘팔레스타인 이슬람지하드운동’이 이란이 지원하는 예멘의 후티 운동에 연대를 표하기를 거부하자, 이란은 자금 지원을 끊고 그 자금을 가자지구의 시아파 조직인 ‘사비린운동’(지금은 활동이 없는 조직이다)으로 돌렸다. 결국 ‘팔레스타인 이슬람지하드운동’은 이란의 압력에 순응했다.39 게다가 하마스 지도자들은 2024년 4월에 “일시적인” ‘두 국가 방안’을 합의해 주겠다는 의사를 거듭 드러냈다. 40
지난 몇 년 동안, 카타르의 하마스 망명 지도부는 파타와 PLO의 전철을 따라갈 조짐을 보였다. 서방 강대국들과 타협하고 국제 질서에 적응하려는 조짐을 보인 것이다. 중요한 사례로서 2017년에 하마스는 자신의 헌장(창립 문서)에서 ‘두 국가 방안’을 배제하는 문구를 삭제했다. 2017년 개정 헌장은 또한 1967년 전쟁 이전의 국경에 따라 팔레스타인 점령지에 국가를 세우는 것을 받아들였다.하마스는 여러 정치적 모순과 계급 모순으로 내부가 여전히 첨예하게 갈려 있다. 그럼에도 가자지구의 당 기층과 군사 조직은 계속 저항에 전념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퍼붓는 어마어마한 맹공격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의 정치적 지지 기반과 군사 조직이 보인 회복력은 하마스의 적들만이 아니라 하마스의 지지자들도 놀라게 했다.
재외 공동체에서의 메아리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과 인종 학살을 계기로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전례 없는 규모로 커지자, 해방 전략에 관한 낡은 주장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1948년 이래 거듭된 팔레스타인인 인종청소의 결과로 전 세계에는 수많은 재외 팔레스타인인 공동체가 있다. 각 공동체는 사회적 구성, 출신지, 탈출한 나라가 저마다 다르다. 그에 따라 그들의 구체적 경험도 가자지구, 서안지구, “1948년 팔레스타인”(즉, 나크바 이래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차지한 지역),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걸프 연안국, 그 외 중동 지역 중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리고 재외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나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내에서도 하마스와 PLO, 아랍 혁명과 이후의 반혁명들에 대한 태도와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전략을 둘러싼 논쟁이 자주 불거진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망명자 공동체는 낡은 정치적 유산이 온존하기 좋은 곳인 동시에 내부 이견도 많은 곳이다. 서방에서는 PLO의 옛 기구들이 존속했다. 많은 경우 재외 팔레스타인인 공동체들에서 리더 구실을 하는 것은 망명한 자본가 계급의 일원이나 고참 당 활동가들이다. 그들의 일부는 자신의 당과 제휴하는 아랍 국가와의 외교적·재정적 관계를 증진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재외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 형성된 정치 조직들은 어떤 면에서 PLO의 축소판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 조직들은 활동 기간이 수십 년에 이르는 만큼, 하마스의 등장과 팔레스타인 당국 수립 이전에 중요한 구실을 한 조직들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다. 몇몇은 여전히 PLO를 유엔과 아랍연맹의 표현처럼 “팔레스타인 민족의 유일한 대표”로 여기고, 자신들을 자신이 속한 재외 팔레스타인인 공동체의 유일한 대표로 여긴다. 그러나 많은 재외 팔레스타인인 정치 조직들은 조직을 재생산하는 데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낡은 조직들에 대한 다음 세대의 지지를 추상적 수준 이상으로 이끌어내지 못해 직계 세대조차 지지하지 않게 된 경우도 있다.
41 대중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팔레스타인청년운동’은 어느 팔레스타인 정당에도 가맹해 있지 않고 독립적인 단체임을 강조한다. 또, 다른 천대받는 집단과 함께 투쟁하면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을 재건하려 한다는 점도 강조한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청년운동’의 웹사이트에는 미국의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건설 반대 운동과 연대하는 활동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북아메리카 토착민이 겪은 인종 학살, 차별과 연관 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사이 유망한 신생 재외 팔레스타인인 조직들이 성장했다. 특히 2020년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이 그 계기였다. 또 다른 중요한 계기는 예루살렘 셰이크 자라 지구에서 강제 퇴거와 인종청소에 맞서 싸운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는 운동이 분출한 것이었다. 미국, 캐나다, 영국에서 등장한 ‘팔레스타인청년운동’과 독일의 ‘팔레스타인이 말한다’가 그러한 유망한 신생 조직의 사례들이다. 대개 재외 팔레스타인인 2세나 3세의 주도로 결성됐다. 막연한 팔레스타인인 정체성을 기초로 결성된 단체들인 만큼 그 활동가들이 취하는 정치적 입장은 당연히 매우 다양하다. 예컨대 ‘팔레스타인청년운동’은 이렇게 표방한다.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배경이 상이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대의를 향한 다원적인 노력의 전통을 부활시키고자 한다.”여느 청년 활동가 단체와 마찬가지로 이 신생 팔레스타인인 단체들은 대개 학생의 비중이 높다. 활동가의 많은 수는, 팔레스타인인으로서 정치적으로 조직화되기 전에 서방 나라에 거주하는 이주민으로서 성장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야 서방으로 이주한 활동가들도 있다. 시리아 내전과 그로 인한 야르무크 난민촌[시리아 내 최대 팔레스타인인 난민촌이었던 곳 — 역자]의 파괴로 인해 피란해 온 사람들이 그런 사례다. ‘PFLP 총사령부’가 아사드 정권을 지키려고 야르무크 난민촌에서 진압 작전을 자행하는 것을 목도한 활동가들에게 팔레스타인 저항이 어느 국가와 제휴하냐는 문제는 실로 구체적인 의미를 갖는다.
다른 문제들에 관해서도 재외 팔레스타인인 정치 단체들 내에서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해방된 팔레스타인의 상像을 둘러싼 상충하는 주장들과, 모호한 팔레스타인인 정체성 개념에 기초한 분리주의 압력이 그런 사례다. 또, 가장 혜안이 있는 활동가들은 자신이 사는 제국주의 나라에서 모든 팔레스타인인 공동체 구성원들을 조직화하는 데 만일 성공하더라도, 그 제국주의 국가가 이스라엘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만만찮은 제동을 걸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고 이미 내다보고 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공동전선 전술을 둘러싼 논의가 흔히 제기된다. 앞에서 설명한 배신의 역사를 고려하면 매우 이해할 만한 일로서, 팔레스타인 활동가들 사이에는 이른바 ‘정상화’(시온주의자들이나 점령과 보통의 관계를 맺는 것)에 대한 우려가 널리 퍼져 있다. 연대 운동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마다, 노동계급 조직 기층을 만나기 위한 공동전선 전술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의에 대한 배신을 정상적인 일로 여겨지게 만드는 행동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토론이 벌어진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인종 학살 전쟁에 맞선 대중 행동이 벌어지는 가운데 사회주의자들이 뛰어들어야 하는 가장 절실한 논쟁 하나는 다른 운동들과 투쟁들, 특히 노동자 운동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는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이스라엘로 무기가 수송되는 것을 저지하려는 노동자들의 고무적인 행동이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린 메이데이 집회에서는 팔레스타인 연대가 주요 슬로건으로 채택됐다. 팔레스타인 연대 행진이 노동자 시위에 가세한 곳도 있다.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요구를 스스로 제기하기도 했다. 노동조합 관료가 팔레스타인 깃발을 금지하자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이 이를 거스른 사례도 세계 곳곳에 있다. 새 세대 젊은 팔레스타인인 활동가들은 이러한 투쟁들과 정치적 경험에 갈수록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노동계급에 뿌리를 내린 연대 운동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국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 대한 국가와 경찰의 탄압이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에서 캠퍼스를 점거한 학생들의 경험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국가의 무자비한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기에 맞설 적절한 전술이 무엇이냐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탄압이 극심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은밀하게 조직되는 행동과 투쟁성을 중심에 놓는 자율주의적 방법에 매력을 느낀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게릴라 저항에서 영감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게다가 정부와 언론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이 벌이는 모든 형태의 저항을 악마화하는 탓에 활동가들은 무장 저항에 관해 입장을 취할 것을 강요받는다. 이스라엘과 이란이 주고받은 미사일·드론 공격, 후티의 홍해 항로 봉쇄는 이른바 ‘저항의 축’을 둘러싼 논쟁을 자극했다.
팔레스타인 해방 전략과 관련된 선택을 현명하게 내리기 위해 역사적 사건과 근래의 사건을 분석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인들과 해외의 연대 운동에 꼭 필요한 일이다. 무장 저항과 대중 행동 사이의 관계를 둘러싼 과거의 논쟁을 이해하면 미래를 위한 전략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앞에서 개괄했듯이, 팔레스타인 좌파의 역사적 경험은 전문적인 소수의 비밀스런 행동이 대중 행동과 대중적 연대의 힘을 대체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42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인종 학살을 분석하는 글을 최근에 발표한 말름은 그 글에서 10월 7일 하마스가 주도한 게릴라 공격이 제1차 인티파다를 능가하는, 팔레스타인 운동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시사한다. 43 이에 팔레스타인 문학과 이스라엘 문학을 가르치는 바시르 아부만네가 말름을 비판하는 글을 《자코뱅》에 기고했다. 아부만네는 “제1차 인티파다가 팔레스타인 역사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최대 반식민 대중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말름이 “무시한다”고 옳게 비판한다. 44 말름이 옹호하는, 비무장 행동을 통한 선전은 게릴라 전사들의 무장 행동을 통한 선전과 맞닿는 데가 있다. 둘 다 조직된 노동계급의 잠재력과 힘을 깊이 불신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게릴라 전술을 둘러싼 논쟁은 활동가층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스웨덴의 마르크스주의 생태학자이자 저술가인 안드레아스 말름은 기후 운동에서 직접 행동 전략을 옹호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45 이스라엘은 그저 10월 7일 공격을 보복하는 게 아니라 가자지구를 지워버리려는 야심을 정당화하는 데 그 공격을 이용하고 있다. 그 야심은 이스라엘 정치에서 매우 유서 깊은 것이다. 이츠하크 라빈[1974~1977년, 1992~1995년 이스라엘 총리 재임]은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나 보니 가자지구가 바다에 가라앉아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 바 있다. 46 게다가 현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간인에게 자행하는 극심한 폭력은 결코 유일무이한 사례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1982년 런던 주재 이스라엘 대사 암살 미수에 ‘보복’한다는 구실로 그해 6~8월 동안 레바논에서 1만 7000명 이상을 살해했다. 47
그러나 아부만네는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학살 때문에 절망에 빠진 나머지 아부만네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이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국제법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국제법은 억압자와 피억압자,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또, 아부만네는 하마스의 무장 저항이 오로지 파괴와 패배만을 가져왔다고 본다. 국제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런 주장은 틀렸다. 가자지구의 상황은 끔찍하지만 이스라엘의 인종 학살 행위는 2023년 10월 전부터 계속돼 왔다. 이미 2018년에 유엔은 가자지구가 이스라엘의 봉쇄 때문에 “살 수 없는 곳”이 됐다고 선언했다.48 그러나 10월 7일 공격에 따른 이스라엘의 공격은 전례 없는 국제 연대 운동을 촉발했다. 요르단, 이집트, 모로코에서는 시위대가 자국 정권과 충돌하기도 했다. 중동·북아프리카 외에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방 제국주의 동맹의 중심부에서도 팔레스타인인들을 지지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팔레스타인계 저술가인 타우픽 핫다드는 10월 7일 공격 이전의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은 내부 분열에 시달리고 오슬로 협정이라는 속박에 매여 점차 대의를 잃고 있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게다가 “아랍 정권들은 이스라엘과 수교를 정상화하고 있었고 아무도 이스라엘에 책임을 실질적으로 묻지 않았다.”49 그리고 이집트 혁명은 제국주의의 지배와 이스라엘 국가를 떠받치는 아랍 정권들 중 가장 강력한 기둥의 하나를 뒤흔들었다.
제2차 인티파다 때도 비슷한 역학이 출현했다. 2000년 9월에 분출한 제2차 인티파다는 기층 대중의 조직화가 중심적이었던 제1차 인티파다와 달리 엘리트들의 군사 작전으로 주로 수행됐다. 그럼에도 제2차 인티파다는 이집트에서 학생들의 연대 행동을 촉발했다. 이 행동은 2011년 이집트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층 조직화의 첫 징후였다. 현 상황에서 핵심적인 요소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 저항이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 분석가들과 갈수록 더 많은 이스라엘인들도 이제 이를 직시하고 있다. 화력과 군사 기술의 압도적 우위와 세계 최강 미국의 아낌없는 지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은 하마스를 “궤멸”시키는 데 실패했다. 팔레스타인 운동을 패배시키지도 못했다. 몇 달 전 이스라엘군이 정복했다는 가자지구 내 지역에서 하마스는 오히려 정치적 지배력을 재건했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 관료들은 “질질 끄는 전투”를 예상하며, 2026~2027년이 되기 전에는 이스라엘군이 군사적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한다.51 이 글을 쓰는 현재 압델 파타 엘시시의 독재 정권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집트의 거리와 일터에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 그러나 엘시시는 여전히 2011년 이집트 혁명의 경험이 되풀이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혁명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과 그들과 연대하는 이집트 대중 사이의 유기적인 유대가 중요한 구실을 했다.
무장 저항을 중심에 두는 전략에 반대하더라도 우리는 무장 저항이 서방 제국주의의 중심부에 있는 나라들에 충격파를 일으켰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은 무장 저항이 노동계급 국제주의와 노동계급의 힘을 대체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노동자들은 세계 자본주의·제국주의 시스템에 맞설 힘이 있다. 현재 중동에서 그 힘은 억눌려 있지만, 팔레스타인 주변 국가 노동자들의 행동이야말로 이스라엘 국가에 맞서는 혁명이 승리하는 데서 결정적 구실을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런 변화는 시온주의 전쟁 기구를 영구히 해체할 가능성을 열 것이다. 이 저널[《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다른 필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주장했듯이, 특히 이집트 노동계급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이 이스라엘 국가와 미국 등 서방의 동맹국들에 가져 온 위기를 크게 심화할 잠재력이 있다. 이집트 노동자들은 중동·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영향력의 핵심 통로 구실을 하는 이집트 군사 정권을 뒤흔들 힘이 있다.역사적 팔레스타인 안에서든, 중동에서든, 재외 팔레스타인인 공동체에서든 팔레스타인 좌파는 노동계급의 자기 조직화와 노동계급의 힘을 키우기 위한 일관된 전략을 제대로 시도한 적이 없다. 과거 팔레스타인 좌파 조직들은 수많은 대중의 자력 행동 대신에 무장한 소수의 영웅적 행동으로 팔레스타인 민족을 정착자 식민주의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사상과 단절하지 못했다.
앞에서 팔레스타인 좌파의 흥망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입증했듯이, 제1차 인티파다 당시 팔레스타인인들이 직면한 위기는 리더십의 위기였다. 팔레스타인 좌파 조직의 지도부들은 특별한 소수의 무장 행동과 아랍 국가들의 지원에 의존했다. 인티파다 당시 PLO의 항복에 대해 뚜렷한 대안을 제시할 능력을 갖추고 노동계급에 뿌리내린 혁명적 당은 없었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모든 저항을 무조건 지지하는 동시에,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저항하고 궁극적으로 해방을 성취할 수 있느냐를 둘러싼 논쟁에 뛰어들어야 한다. 과거에 범한 실책에 관해 토론하고 어떤 전략이 성공할 수 있는지에 관해 대화해야 한다. 시온주의 식민 지배를 타도하는 과업을 성취할 능력이 있는 혁명적 당을 전략적으로 건설 —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든 그 바깥에서든 — 하는 과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 인종 학살이 하루하루 계속될수록 더 절실해지고 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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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Ramsis Kilani, “Strategies for liberation: old and new arguments in the Palestinian left”, International Socialism 183(Summer 2024).
↩
- 이 글을 편집해 주고 중요한 참고 문헌을 알려 준 앤 알렉산더에게 감사를 표한다. ↩
- “하마스”는 “열심”을 뜻하는 아랍어이자, 운동의 공식 명칭인 “이슬람 저항 운동”의 줄임말이기도 하다. ↩
- 하마스 군사 조직의 이름은 시리아의 이슬람 설교자이자 초기 반시온주의 무장 저항의 지도자 이즈 앗딘 알카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알카삼은 1930년에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에 맞서는 게릴라 조직인 ‘흑수단’을 결성했고, 1935년 영국 식민 당국에 의해 살해됐다. 알카삼의 무장 저항 운동은 영국의 식민 지배와 시온주의자들의 식민지화에 맞선 1936~1939년 팔레스타인 대중 항쟁의 효시가 됐다. ↩
- Chaliand, 1971, p83. ↩
- 토니 클리프가 1967년 전쟁 직후에 쓴 글에서 강조했듯이 “제국주의에 맞선 식민지 인민의 반란을 서슴없이 지지하는 자만이 반란 지도자의 정책과 전술을 혹독하게 비판할 자격이 있다.” — Cliff, 1967. ↩
- Marshall, 1989, pp106-113을 보라. ↩
- https://player.vimeo.com/video/25917251?h=d811a692fa을 보라. Marshall, 1989, pp112-113; Sayigh, 1991, p609도 보라. ↩
- 페다인(“스스로를 희생하는자”)은 초기 팔레스타인 게릴라 전사들을 말한다. ↩
- 파타는 “정복”을 뜻하지만, 그 조직의 공식 명칭인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의 역두문자어이기도 하다. ↩
- “와딴”은 아랍어에서 “민족” 또는 “고국”을 뜻하는 말이다. “와따니야”(“민족주의”나 “애국주의”로 번역된다)는 중동·북아프리카의 기존 국민국가들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결부되는 말로 자리잡았다. 이것은 “까우미야”, 즉 범아랍 민족주의와 대비되는 말로 쓰였다. 때때로 와따니 민족주의 운동은 까우미야를 분명하게 거부했다. 일부 와따니 민족주의자들은 범아랍 민족주의가 추구하는 아랍 정체성에 기초한 단결이 비아랍 집단을 해방 운동에서 배제한다고 비판했다. 까우미 민족주의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이라크에서 특히 영향력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쿠르드인 운동이 해방 운동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
- Buck, 2013, p4. ↩
- Omar, 2002. ↩
- Interactive Encyclopaedia of the Palestine Question에 실린 Maher Charif의 글 “The Democratic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1969 to Present”를 보라. ↩
- 이 인터뷰는 2008년에 방영된 알자지라의 아랍어 다큐멘터리 시리즈 〈혁명 이야기〉에 나온다. 그 시리즈 중 “백향목의 고장에서”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를 온라인에서 볼 수 있다. ‘PFLP 총사령부’는 1968년 PFLP에서 갈라져 나온 조직이다. 대체로 시리아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
- Salibi, 1988, p233. ↩
- Harman, 2006. ↩
- Harman, 1970. ↩
- Bergman, 2016. ↩
- Kaled, 1973, p64. ↩
-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1969, p31; Khaled 1973, p27.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은 1968년 구정 공세로 결정적인 일격을 가했다. ↩
- https://youtu.be/oHgZdCJOUAk?si=EWAyc_GaaiJrcGfN을 보라. ↩
- Cliff, 2000과 Greenstein 2011을 보라. 니콜라는 하이파 출신의 팔레스타인 트로츠키주의 활동가였다. 팔레스타인 공산당의 지도적 당원이었으나, 팔레스타인 공산당이 유대인 조직과 팔레스타인인 조직으로 분열할 때 당을 떠났다. 그런 뒤 1940년대에 이가엘 글룩스타인(훗날 “토니 클리프”로 알려진다)이 이끄는 작은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가담했다. 글룩스타인이 런던으로 떠나고(이후 그는 런던에서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전신인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을 창설한다) 나크바가 일어난 뒤 니콜라는 지도적인 사회주의 팔레스타인 지식인으로 부상했다. 니콜라는 1963년 마츠펜(“나침반”이라는 뜻)이라는 이스라엘 사회주의 조직에 합류해 그 조직의 정치적 발전에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니콜라는 ‘6일 전쟁’ 이후 가택 연금을 당했고 1970년 런던으로 떠났다. ↩
- Nicola, 1972. ↩
-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1967, p17. ↩
- 1970년대 동안 PLO는 난민촌 팔레스타인인에게 필수 서비스를 제공하고 PLO의 정치 프로젝트를 유지시키는 꽤 거대한 인프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아랍 국가들은 PLO에 자금을 댔고 “영토 없는 국가”의 발전을 가능케 했다. Marshall, 1989, p130을 보라. ↩
- Leopardi, 2017, pp192-193. ↩
- Eleftheriadou, 2021. ↩
- Leopardi, 2017, p50. ↩
- Hiltermann, 1993, pp46-52. ↩
- 인티파다는 “항쟁”을 뜻하는 아랍어 단어다. 1987년 제1차 인티파다의 방아쇠가 된 사건은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이스라엘 장갑차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탄 차를 깔아뭉개 탑승자 4명이 사망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사망자들의 장례식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맞선 대중 집회가 됐고, 이는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거대한 대중 행동과 충돌을 낳았다. Marshall, 1989, p11을 보라. ↩
- Mishal and Aharoni, 1994, p98. ↩
- Marshall, 1989, p154-155 ↩
- https://player.vimeo.com/video/25917251?h=d811a692fa를 보라. ↩
-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1995. ↩
-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2006. ↩
-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2023. ↩
- 그 영상은 여기서 볼 수 있다. ↩
- Skare, 2023. ↩
- Al Jazeera, 2017. ↩
- Associated Press, 2024. ↩
- https://palestinianyouthmovement.com/about를 보라 ↩
- Malm, 2021 ↩
- Malm, 2024 ↩
- Abu-Manneh, 2024 ↩
- United Nations, 2018 ↩
- Munayyer, 2023 ↩
- Ross, 1982 ↩
- Haddad, 2024 ↩
- 제2차 인티파다는 2005년에 끝났고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인 정착촌의 해체와 이스라엘군의 철수를 가져왔다. 그 항쟁의 많은 부분은 무장 저항 단체들이 조직한 총격과 폭탄 공격이었다. ↩
- Zitun, 2024 ↩
- Alexander, 2024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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