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호 (37호 2021년 1~2월호)

지난 호

마르크스주의와 인류세

커밀라 로일 177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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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세에 관한 탈정치적 설명과 관련된 것으로 인류세가 “좋은 것”, “위대한 것”이라거나 기꺼이 환영해야 할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도 있다. 얼 엘리스는 자신의 외부 환경을 변화시킨 첫 생물종이 호모 사피엔스[현생인류]는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진화 상 녹색 식물이 처음 등장했을 때 녹색 식물은 산소를 만들어 냄으로써 지구 대기를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과 달리 지구 전체에 끼친 영향을 의식하고 우리의 행동을 바꿀 능력이 있다. 이는 합당한 지적이지만 엘리스는 인류가 마침내 자신이 끼친 부정적 영향을 “각성”했고 우리가 인류세에 살고 있다는 지식을 그저 선용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인류세 토론의 부흥 자체는 사회가 지구 시스템 전체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현실에 눈을 떴음을 뜻한다. … 우리는 이 새로운 “자연의 위대한 힘”이 인류와 비인류 자연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낳도록 이끌 수 있다. 우리를 인류로 만든 힘인 초사회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이용해 인류세의 거대한 도전 - 의식적으로 더 나은 사회와 자연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 - 으로 나아가야 한다. 53

인류세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덕분에 “낙관적 전망” 즉, 기술 사용 증대에 기초를 둔 미래 사회를 제시할 커다란 기회를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심지어 주류 환경주의자들이 자연 재해나 자원 고갈에 관한 우려를 제기하는 것이 지나치게 비관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경우에도 제안된 모든 기술 혁신을 구현할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54

그러나 인류세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표준적 설명의 이원론적 사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일부 논평가들의 경우 인간이 자연에 가한 충격을 부각하는 것보다는, 인간 활동이 자연의 나머지와 얼마나 밀접히 연결돼 있는지를 인식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인류세가 매우 유용하다고 여긴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결과적으로 인간이 없을 때보다 온실가스 농도가 더 높은 환경에서 살고 있다. 따라서 인류세라는 생각은 “자연”을 인간 사회와 분리된 어떤 것으로 여기는 개념을 이전부터 비판해 온 사회과학 내의 한 분야에도 기여할 수 있다. 그런 접근법의 한 사례가 –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쓰인 것은 아닐지라도 – 제이미 로리머의 책 《인류세의 야생동물》[국내 미번역]이다. 이 책에서는 도시처럼 인간이 만든 환경에서 사는 야생동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려고 인류세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럼으로써 자연을 “야생의 것”으로 간주하는 생각을 비판한다. 55

인류세는 허상?

인류세라는 생각을 좌파적으로 비판하는 인물 중 두드러진 이는 안드레아스 말름이다. 말름은 학자이자 활동가로, 2015년 파리 회담 결과에는 진지한 행동이 결여돼 있다고 옳게도 강력히 비판해 왔다. 그는 기후 변화에 맞서는 “전투적 거리 시위”를 호소했다. 56 분명히 그는 오늘날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관해 전혀 안이하지 않다. 그런 그가 왜 “인류세는 허상”이라고 말할까?

말름은 인류세를 비판하면서 증기 기관의 발명, 산업혁명 그리고 이와 연관된 화석연료 사용의 증가와 함께 인류세가 시작됐다는 크뤼천의 주장으로 돌아간다. 그는 화석연료 사용을 초기 인류의 불 사용의 직접적 결과로 보는 주장에 중요한 반론을 제기한다. 또 크뤼천과 다른 사람들이 1830년대 영국에서 증기 동력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들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는 상세한 역사적 분석에 기초를 두고 증기 기관이 어떻게 당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각광받고 특정한 목적에 이바지했는지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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