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사회주의
붉은 로자가 사라졌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말해서,
그래서 부자가 그녀를 죽였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비문(碑文, 1929년)
로자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그람시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전통에 있는 위대한 혁명가다.
1 이들은 자기 선조의 역사를 모르는 게 틀림없다. 1931년에 스탈린은 사후적으로 룩셈부르크를 트로츠키주의라고 비난했다.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연속혁명 개념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2
그런데 자발성을 강조하고 조직을 평가절하했다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의 찬양을 받는 불행을 당하기도 한다. 가령, 소종파 스탈린주의 그룹은 한국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위대한 혁명가’ 룩셈부르크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다고 비난한다.3 1918년 말 독일공산당에서 벌어진 제헌의회 선거 참여 여부 논쟁 때 룩셈부르크가 선거 참여를 지지했다는 것이 그 근거다. 그것은 룩셈부르크가 독일공산당 내 초좌파들과 벌인 선거 전술 논쟁이었는데, 룩셈부르크가 선거주의적 사회 변혁 전략을 주장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왜곡이다. 룩셈부르크는 의회주의 전략에 분명히 반대하고 소비에트와 노동자 권력을 지지했다.
반면, 룩셈부르크 덕분에 스탈린주의적 오류를 겪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석준은 룩셈부르크가 선거 참여를 통한 사회 변혁을 주장했다고 시사한다.다시 말해,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사회주의, 국제주의,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전통에 서 있다.
룩셈부르크는 1871년 독일과 러시아의 지배로 분할된 폴란드의 소도시 자모시치에서 태어났다.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오래 거주하며 폴란드와 독일의 노동운동에서 활동했다. 이 독특한 이력 덕에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행동의 정신(‘러시아’ 정신)과 노동자 자립·민주주의·자력 해방의 정신(‘서구’ 정신)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는 10대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비판적 사회과학과 인본주의적 이상주의를 결합시켜 활동했다. 룩셈부르크는 기사·에세이·소책자·책 등을 쓰고, 대중 집회에서 유창하게 연설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사민당)의 교육연수원과 독일·폴란드의 여러 도시들에서 열린 노동자 모임에서 강연했다. 룩셈부르크는 비非숙명론적 태도로 기계적 유물론을 거부했다. 룩셈부르크는 “경제 발전은 역사의 선로 위에 있는 자율적 기관차처럼 거세게 돌진하고, 정치와 이데올로기 등은 버려진 수동 화물 마차처럼 그 뒤를 아장아장 걸어가는 데에 만족한다”는 생각을 비판했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했다. 코로나19 대유행, 기후 위기, 전쟁과 군국주의 위험의 증대, 파시즘의 부상, 경제 위기를 보면 ‘야만’은 현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다양한 투쟁들이 그 야만에 도전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의 승리는 불가피하지 않다. 따라서 사회주의자의 임무는 이 운동의 일부가 되고 이 운동이 승리하도록 지도를 제공하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승리에 필요한 효율적인 조직·전략·전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동지들과 함께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활동하며 – 가능할 때는 공공연하고 합법적으로, 필요할 때는 혁명적 지하 활동으로 – 자본주의에 도전하고자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한 차례 구속됐다.
따라서 룩셈부르크의 사상을 ‘자발성주의’(노동자들의 자발적 투쟁의 꽁무니를 좇기)라고 규정하는 것은 엄청난 왜곡이다.
5 룩셈부르크 자신도 1919년 1월 15일 자유군단(우익 민병대)에 체포돼 소총 개머리판에 맞아 살해됐다.
룩셈부르크는 항상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룩셈부르크가 독일 사민당에서 탈당하기를 꺼린 까닭이기도 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늘 폴란드와 독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당원이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의 당 개념에는 숙명론적·선전주의적 결점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독자적인 혁명적 정당 건설을 꺼렸고, 독일에서 혁명적 정당 건설이 지체됐다. 이것은 독일 혁명의 향방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오늘날 한국 사회주의자들은 국가와 사용자의 공격에 맞서 아래로부터 노동자 투쟁을 구축하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한다. 이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노동자 투쟁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혁주의와 스탈린주의의 오류를 피해야 한다. 그러려면 명확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룩셈부르크가 꼭 필요하다. 룩셈부르크가 언제나 옳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저작과 삶에는 우리가 배울 수 있는 풍부한 사상과 경험이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도 룩셈부르크의 개혁주의 논쟁, 국제주의, 반제국주의를 중심으로 다루겠다.
개혁만으로 충분치 못하고 혁명이 필요하다
룩셈부르크의 소책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이정표다. 책 제목부터 혁명적 정치와 대비되는 특정 정치 운동으로서의 개혁주의가 있음을 인식하게 한다.
룩셈부르크의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개혁주의를 상대로 한 투쟁이었다. 러시아 혁명가들인 레닌과 트로츠키도 개혁주의에 맞서 혁명적 투쟁을 했지만, 러시아에서는 개혁주의라는 잡초의 뿌리가 아주 약하고 가늘었다. 시베리아 유형이나 교수대가 모든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를 노리는 곳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의회적 길’을 꿈꾸기는 어려웠다. 노동조합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노동조합을 노동운동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할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중서부 유럽에는 보수적 개혁주의가 훨씬 더 깊게 뿌리 내리고 있었고, 노동자들의 사상과 분위기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룩셈부르크가 레닌이나 트로츠키보다 더 빨리 노동조합 관료에 관해 더욱 명확한 견해를 가진 것은 당연했다.
룩셈부르크는 독일에 막 정착한 1898~1899년 사이에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썼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중심이었고, 제2인터내셔널에는 전 세계 주요 노동자 정당들이 지부로 속해 있었다. 그러나 독일 사민당은 비스마르크의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된 1890년 이후 정치적으로 타락하고 있었다. 한때 사회주의는 “힘의 문제며, 의회에서는 달성될 수 없다”고 선언했던 사민당 지도자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1891년에 정반대의 주장을 했다. “의회 제도는 대중의 대표체일 뿐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제국의회에서 성과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의회 제도의 결점 때문이 아니다. … 목표에 도달하는 다른 길이 있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보여 달라!”
이런 주장이 사민당 내에서 다수를 차지했지만 심각하게 토론되지는 않았다. 사민당 사무총장 이그나츠 아우어는 “사람들은 말하지 않고 행할 뿐이다” 하고 당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묘사했다. 사회주의적 강령보다 실천이 훨씬 더 사민당의 성격을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행동 규범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노골적으로 개혁주의적인 주장을 출판하면서 깨졌다. 사민당이 기회주의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95년에 죽자, 베른슈타인은 공개적으로 수정주의를 제기했다. 독일 사민당은 공식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채택하고 있었는데도 사민당 일간지 〈포어베르츠〉는 베르슈타인의 글들을 환영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파르부스(러시아 출신의 독일 사회주의자)가 베르슈타인의 주장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했고, 그 뒤 룩셈부르크가 결정적으로 논박했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은 이랬다. ‘자본주의는 길들여지고 합리적 제도가 됐다. 20년 넘게 번영하면서 마르크스의 10년 위기론도 틀렸다. 1870년 이후 발칸을 제외하곤 유럽 땅에서 전쟁이 없었다. 노동운동은 이제 불법이 아니다. 사민당은 선거에서 점점 승리하고 있다. 노동조합도 강화되고 임금은 상승하고 있다.’
따라서 혁명이 아니라 개혁 확대가 필요하고, 사회주의자들은 자유주의적 자본가들과 협력해 사회주의로 점진적 이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베른슈타인이 수정주의를 제기한 배경에는 당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회복이 있었다.
1880년대부터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식민지 쟁탈전에 들어갔다. 독일은 단기간에 후진 농업국에서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했다. 두 가지 자본 축적 형태(카르텔의 형성, 금융 제도의 발달)가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에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독일 자본주의에는 세계 무대가 필요했다. 독일은 세계 무대에 벌어지는 경제적 경쟁을 군사력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군비를 급격히 확충됐다.
한편, 국제 사회주의 운동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파리 코뮌의 패배와 뒤이은 혼란의 시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미숙련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신新노동조합 운동이 떠올랐다. 1889년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이 창립됐다.
독일 사민당에는 모순이 있었다. 국가 탄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 급진적 야당의 성격을 유지해야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독일 사민당은 정치적 행동에서 급진적 면모를 보였다. 그러나 원칙에서는 근본적으로 개혁주의적이었다. 그래서 노동조합 운동의 기회주의적 변종들과 선거 득표에 대한 집착이 당 기구들에 만연했다. 베른슈타인이 발전시킨 접근법에는 이런 관료적 보수주의가 반영돼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적 국제주의를 배격하고 독일 민족의 영예로운 임무를 옹호했고, “문명화된 민족이 미개한 민족의 후견인으로 행동할 필요성”을 인정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이 “구닥다리”라고 비판했다. 요컨대, 베른슈타인은 이질적인 계급의 정치를 노동계급의 정치 무대에 주입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정책들이 노동계급에 이로운 중대한 개혁들을 제공하기는커녕 그 개혁들을 얻을 수 있는 노동계급의 힘을 무장 해제시킨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노동자 대중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혁을 위한 투쟁을 해야 하고 이런 투쟁에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고 자본주의에 맞서는 법을 배운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는 이런 접근법을 발전시켰다.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서 개혁과 혁명 사이에 불가분의 관계가 존재한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수단이고, 사회 혁명은 그 목적이다.”
룩셈부르크가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한 내용은 네 가지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 — 개혁주의의 방법, 경제 이론, 국가론, 노동자 운동의 이론과 실천.
(1) 개혁주의의 방법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절충주의적 접근법을 혹평하며, 개혁주의에는 이론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개혁주의 정치인들은 이론을 ‘교조’라고 부르며 경멸한다. 예컨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혁명가들이 몽상적이고 자신들이 현실주의적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기 활동을 체제의 틀 안에 한정하고, 체제 내에서 부분적 성과들을 차곡차곡 쌓아 더 나은 사회로 진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정부가 자본주의의 기본적 토대를 전혀 훼손시키지 못하고 거듭 실패했다고 반박했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 변증법을 거부한 것도 비판했다. 사실, 변화의 동력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 변화를 지도할 수 없는 사람들이 변증법을 비난한다. 그러나 변증법을 부정하는 것은 투쟁과 모순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노동계급이 약화됐다거나 심지어 사라졌다는 주장이 그런 경우다. 변증법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노동계급을 제조업에 종사하는 육체 노동자와 동일시하고,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생산수단을 혁신시킨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2) 경제 이론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경제가 적응력을 키워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주장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저에 있는 모순을 밝힘으로써 위기가 재발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룩셈부르크는 위기가 자본주의의 주기 과정에 필수적인 일부라고 설명했다. 위기는 많은 양의 자본을 평가절하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위기는 노동에 비해 자본이 더 증가한 결과인 이윤율 저하 경향의 속도를 느리게 만든다. 또, 위기는 더 취약한 부문을 제거해 혁신된 생산이 발전할 가능성을 창출한다. 그러므로 위기는 자본주의 발전의 불길을 다시 지피는 수단으로 등장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규정은 오늘날에도 적절하다. 일부 좌파들은 자본주의를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로, 사회주의를 국유화로 이해한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 “자본주의 개념을 생산관계에서 소유 관계로 뒤바꾸고” 자본가를 “생산 범주”가 아니라 “소유권 범주”로 이해했다고 비판했다. 룩셈부르크는 법률적 형태가 아니라 생산관계가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열쇠임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북한 등 국유 경제의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베른슈타인은 주식 소유 확대 같은 사적 소유 확대가 새로운 ‘대중적 자본주의’의 등장의 증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노동계급 대 자본가 계급이라는 옛 범주는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이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뿐 아니라 지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경제적으로 분리된 개인들의 집합”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3) 국가론
베른슈타인은 민주화 추세를 주목했다. 민주주의 확대 덕에 의회에서 노동자 의원이 다수가 돼 사회주의로 평화적 이행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과는 정반대로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더욱 더 직접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봤다.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 국가가 민주적 형태를 취할지 여부는 특정 시기 지배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룩셈부르크는 고대 노예제 국가부터 1789년과 제2제국 사이에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다양한 정치 형태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전례를 살폈다. 실제로, 자본주의는 미국·영국 등에서처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조건에서 번성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지배계급의 지배를 강화한다.
또, 필요하다면 자본주의는 형식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파괴할 것이다. 1930년대 나치 독일이나 1973년 칠레 쿠데타 등이 그런 경우다.
그렇다고 룩셈부르크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가치 없다는 식의 초좌파적 주장을 한 것은 결코 아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길에 장애물을 놓지만, 민주주의는 노동계급에게 필수적이라고 봤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 사회를 변혁시키는 출발점이면서 원칙으로 사용하게 될 정치 형태들(자치, 선거권 등)을 민주주의가 창출해 내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가 국가의 구실 확대를 지적한 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국가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그 활동 영역을 확대시켰고, 국가에 새로운 기능(특히 경제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을 항상 부과했으며, 사회에 대한 개입과 통제를 더욱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복지의 발전도 그 한 측면이다. “프롤레타리아의 이해와 사회 발전이 일반적으로는 지배계급의 이해와 대체로 충돌하기 때문에 국가는 사회 발전에 필요한 기능들을 떠맡는다.” 복지국가라는 것을 거의 상상조차 하지 못할 때 쓰인 이 글은, 개혁주의자들이 복지국가의 탄생을 사회주의의 도래로 환영한 것이 얼마나 잘못인지를 보여 준다.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을 일면적으로(사회주의라는 작은 섬) 이해하지만, 룩셈부르크는 초좌파주의라는 반대편의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룩셈부르크의 방법은 철저하게 변증법적이었다.
사회 개혁을 허용함으로써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은 미래에 국가와 사회의 융합을 조금씩 준비해 간다.” 기본적 필요를 조직하고 제공함으로써, 그리고 생활의 많은 측면들을 사회화함으로써 “국가는, 말하자면, 자신의 기능이 사회로 되돌아오는 것을 준비한다.” 그러므로 개혁을 지키고 확대하는 것은 노동자 투쟁의 중요한 부분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국가는 경제 생활로 침투한다. 여기서 개혁주의자들이 맞닥뜨리는 모순이 있다. 즉, 국민적 자본주의의 수호자로서의 국가와 경제 체제의 국제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다.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지적했다. “자본주의 조직들은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국제적 성격과 국가의 민족적 성격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격화시킨다.”
그 무렵 자본의 집중은 카르텔과 트러스트 형태를 취했다. 이 형태는 “자본주의 모순들을 줄일 수 없고 오히려 더 커다란 혼돈의 도구로 나타나고 있다.” 신용의 발전도 마찬가지였는데, 베른슈타인의 믿음과는 달리 신용의 발전은 위기를 약화시키기보다 위험을 키웠다. 오늘날 우리는 룩셈부르크의 진단을 확증해 줄 수많은 신용 위기 사례들을 제시할 수 있다.
국가와 자본의 상호 침투의 한 측면은 군국주의이다. 룩셈부르크는 군국주의가 경쟁에서 국민적 이해를 방어하기 위한 투쟁 수단이자 금융·산업 자본과 내부의 안보를 위한 자극제로서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자본주의 발전의 동력”은 동시에 “자본주의적 병폐”다. 군국주의 경쟁은 다른 형태의 경쟁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전체적으로 부정적 중요성”을 지니며, 더욱 나쁘게는 “임박한 폭발이라는 치명적 성격”으로 표현된다. 제1차세계대전을 예상케 한 외교적 긴장이 일어나기 몇 해 전에 벌써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쓰고 있었다. 또, 룩셈부르크는 특정 시기에 경제를 자극하면서도 궁극으로는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군비 지출의 잠재적 구실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4) 노동자 운동의 이론과 실천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을 비판한 네 번째이자 결정적인 쟁점은 노동자 운동의 이론과 실천이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자체가 변화의 수단을 제공했고 노동자 운동이 이 수단을 이용해야 한다고 봤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했다. “나에게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노동조합원들이 계속 증가하고 사민당에 투표하는 것이 필요한 전부라는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이 “필수불가결하지만” 자본가들의 모든 이윤을 점진적으로 장악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자본주의의 생존 과정 ― 구조조정·침체 등 ― 에 의해 노동조합이 계속 공격받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운동을 “시시포스의 노동”이라고 묘사했다.
엥겔스의 표현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투쟁의 학교”이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에 가하는 자본가들의 압력을 완화시켜 주는 수단이다. 이 말은 두 집단의 대표자들이 벌이는 협상을 통해 영구적인 평화가 이뤄질 수 있다는 개혁주의 사상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고, 노동조합이 자본주의를 전복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신디컬리즘을 반박하는 것이기도 하다.
룩셈부르크는 정치 운동의 방향에 대해서도 예지적인 주장을 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 정당의 정확한 진로를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미래를 옳게 전망했다. “만약 우리가 수정주의의 정치적 개념들을 따르면 우리는 수정주의의 경제 이론들을 추적했을 때 이르렀던 것과 똑같은 결론에 이른다.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의 실현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혁이 될 것이다.”
독일 사민당 안에서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룩셈부르크의 운동은 외관상 성공한 듯했지만 종국에는 패배했다. 1898년과 1899년, 특히 1901년에 베른슈타인의 이론들은 독일 사민당 당대회에서 철저하게 반박당했다.
카를 카우츠키도 처음에는 룩셈부르크를 편들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반대했다. 그러나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층이 가한 압력에 밀려 카우츠키는 점점 융통성 없고 희석된 “정설” 마르크스주의로 후퇴했다. 1910년에 카우츠키는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지향성이 독일 사민당 내에서 주변화되도록 작업했다. 이 시기에 카우츠키와 룩셈부르크의 분열이 심화됐다. 마침내 1910년 룩셈부르크와 카우츠키는 노동자가 권력에 이르는 길을 놓고 정치적으로 완전히 결별했다. 그 결과, 독일 사민당은 점차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받아들인 개혁주의자, 말로는 급진주의를 유지했지만 의회적 투쟁 방식에 한정한 카우츠키(“늪의 지도자”)가 이끄는 중간주의자, 룩셈부르크의 혁명적 진영 등 세 경향이 존재하게 됐다.
기회주의의 뿌리는 룩셈부르크가 생각한 것보다 독일 사민당 안에 더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룩셈부르크는 베른슈타인의 기회주의 이론이 “우리 당에 들어온 프티부르주아적 요소가 우세하도록 하는 무의식적인 시도일 뿐”이라고 했다. 외부로부터의 감염과는 쉽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이 개혁주의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베른슈타인은 개혁주의를 출판물로 표현한 잘못만 저질렀을 뿐이다. 이그나츠 아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를 마지막이자 최후의 진리의 배타적인 담지자로 여기며 우리 당에서 숙고하는 로자, 메링, 파르부스 때문에 조용해진 모든 사람들 중 누가 그들이 설파한 엄격한 전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겠는가? 단 한 명도 없다.”
개혁주의의 뿌리는 두 가지 원천에서 나온다. 첫째, 베른슈타인은 프티부르주아 지식인이었지만, 그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들은 4000명에 이르는 독일 사민당과 노동조합의 관료들이었다. 이는 개혁주의적 오염의 주된 원천이 사민당 조직 밖이 아니라 그 조직의 핵심부에 있었다는 뜻이다. 둘째, 개혁주의 문제가 프티부르주아지나 노동조합 관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 자체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관료가 노동계급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위에 있게 된다.
그래서 독일 사민당의 타락 과정은 계속됐고, 사민당이 제국주의 전쟁에서 독일 황제를 편들었던 1914년 8월 4일에 완전히 곪아 터졌다. 룩셈부르크도 이 문제를 인식했지만, 수정주의의 원천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 주장에 이론적으로 도전하는 것과는 별도로 그 주장에 맞서는 효과적인 수단을 제시할 수 없었다.
룩셈부르크는 개혁주의의 깊은 뿌리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론적 공격과 대중 투쟁의 급진화 효과가 결합되면 개혁주의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룩셈부르크는 사민당이 아닌 다른 당을 건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잘못됐다. 무엇보다, 노동조합 관료 집단은 특수한 이해관계와 지위 때문에 사민당이 혁명적 길로 가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 점은 1918∼1923년 독일 혁명 동안 입증됐다. 둘째,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대중에 대한 개혁주의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해, 노동자 대중이 투쟁의 경험을 통해 과거의 모든 장애물들을 뛰어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의식은 훨씬 불균등하다. 따라서 혁명적 대안은 혁명적 소수로부터 조직돼야 한다. 레닌주의 노선에 따른 전위 정당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런 약점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 1890년대 독일에서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문제는 이론적인 문제였다. 그러나 개혁과 혁명 사이의 관계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분석은,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의 내용과 성격에 결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해 준 실제적인 결론을 이끌어냈다. 룩셈부르크는 노동운동의 주류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는 것에 반대했다. 종파주의에 맞선 룩셈부르크의 투쟁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안착돼 가는 한국의 노동운동에서 특히 중요하다. 개혁주의로부터 도피하지 않으면서도 개혁주의에 맞서 원칙 있게 투쟁한 룩셈부르크에게서 영감을 얻을 수 있다.
국제주의와 혁명적 반제국주의
룩셈부르크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 강령에 헌신한 혁명가였다. 룩셈부르크는 유대인이고 폴란드인이고 독일인이었지만, 그의 하나밖에 없는 “조국”은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이었다. 그러나 이런 급진적 국제주의 때문에 룩셈부르크가 민족 문제에 관해 부적절한 입장을 취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룩셈부르크는 피우수트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사회당의 “사회애국자들”이 제기한 폴란드 민족 독립 요구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볼셰비키의 폴란드 민족자결권(러시아로부터의 분리를 포함한) 지지도 거부했다.
그러나 우리는 룩셈부르크의 국제주의에 있는 긍정적 측면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개념에 투철하고, 민족주의·국수주의 이데올로기에 투항하지 않고 완강하게 거부한 것은 룩셈부르크의 뛰어난 기여였다.
룩셈부르크가 독일 사민당에 입당한 것도 자본주의 체제, 제국주의,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선 만국 노동자의 단결에 충실하기 위해서였다. 룩셈부르크는 군국주의, 군사 공채, 해외 군사 원정 등에 대한 타협을 일절 거부했다. 볼프강 하이네 같은 사민당 우파들은 이런 문제들에서 카이저 정부와 기꺼이 협상하고자 했다. 룩셈부르크는 “일자리 창출 필요성”이라는 미명으로 정당화된 그런 투항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룩셈부르크의 국제주의는 유럽 나라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룩셈부르크는 일찌감치 유럽의 식민주의를 적극 반대했다. 1904년 독일령 서남부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헤레로족 봉기에 대한 야만적 탄압 등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 전쟁을 반대했다. 헤레로족을 전멸시킨 독일의 전쟁은 20세기 최초의 집단 학살로 일컬어진다. 또, 룩셈부르크는 식민 원정을 비난할 뿐 아니라 식민지 사람들의 저항과 투쟁을 옹호한 사회주의자였다.
7 에서 제국주의의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죄르지 루카치는 《역사와 계급의식》(1923년)에서 《자본의 축적》이 변증법적 접근의 핵심 범주인 전체성을 아주 잘 보여 주는 빼어난 사례라고 말했다.
룩셈부르크는 자신의 중요한 경제 저작인 《자본의 축적》변증법적 전체성은 추상적 개념이나 공허한 보편성이나 구별되지 않은 존재들의 복합체가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국제 프롤레타리아가 각자의 문화·언어·역사를 지닌 인간들의 집단들로 이뤄져 있음을 잘 이해했다. 그런 인간들의 생활·노동 조건은 매우 상이했다. 《자본의 축적》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광산과 플렌테이션에서 일어나는 강요된 노동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이런 곳들은 독일 공장들과 같지 않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공동 행동의 장애물로 이해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룩셈부르크에게 국제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처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뜻했다 — 공동의 적인 자본주의 체제, 제국주의, 제국주의 전쟁들에 맞선 만국 노동자의 단결.
또, 룩셈부르크는 세계적 규모로 이뤄지는 자본주의적 축적이 단지 초기 국면의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폭력적 착취의 항구적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적 과정으로서 자본 축적은 항구적 무기로서 군대를 사용한다. 단지 초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의 팽창이 아주 다양한 세계 인구와 문화에 충격을 줬다고 룩셈부르크는 지적했다. 영국 농민과 장인들의 말살, 아메리카 원주민의 말살, 유럽 열강들에 의한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 미국 중서부와 서부 지역 소농들의 파멸, 프랑스 식민주의의 알제리 공격, 영국 식민주의의 인도 공격, 아편 전쟁이라고 불린 영국의 중국 급습, 영국 식민주의의 남아프리카공화국 공격 등.
룩셈부르크는 유럽 전쟁의 위험이 증대하고 있음을 아주 분명하게 이해했고, 독일 제국 정부의 전쟁 준비를 끊임없이 규탄했다. 1913년 9월 13일 룩셈부르크는 프랑프푸르트암마임 근처 도시인 보켄하임에서 한 강연에서 엄숙한 국제주의적 주장으로 말을 맺었다. “저들이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의 우리 형제들에 맞서 우리가 살인 무기를 들기 바란다면, ‘아니, 우리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말해 줍시다.” 검사가 “법에 불복종하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했다”며 룩셈부르크를 즉각 기소했다. 1914년 2월에 재판이 열렸고, 룩셈부르크는 군국주의와 전쟁 정책을 비판하는 용감한 법정 진술을 했고, 1868년 제1인터내셔널 브뤼셀 대회의 결정문을 인용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선언해야 한다.’ 룩셈부르크는 1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전쟁이 시작된 뒤인 1915년이 돼서야 제국 당국은 룩셈부르크를 체포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유럽의 다른 많은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조국 방위”를 내세우며 자국 정부를 지지할 때, 룩셈부르크는 즉각 제국주의 전쟁 반대를 조직하고자 했다. 중요했던 초기 몇 달 동안 룩셈부르크의 글들은 공격적인 공식적 “애국” 이데올로기에 전혀 타협하지 않았고,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에 대한 사민당 지도부의 끔찍한 배신을 비판하는 주장들을 발전시켰다.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반대하는 선전 활동 때문에 구속돼 있는 동안, 룩셈부르크는 원칙적 입장을 정리했다. 룩셈부르크는 반전 투쟁이 사회주의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반전 소책자인 《사회민주당의 위기》(룩셈부르크가 유니우스라는 가명으로 글을 써 《유니우스 팸플릿》으로도 알려져 있다)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 사회는 사회주의로의 변혁이냐 야만 시대로의 복귀냐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 주사위는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가 던질 것이다.”
1916년에 쓴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는 이렇게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자 무엇보다 우선해 지켜야 할 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인터내셔널이다.” 제2인터내셔널은 룩셈부르크가 “사회배외주의”이라고 부른 것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만국의 노동자여, 죽기살기로 서로 싸워라”로 대체한 — 의 충격으로 몰락했다.
그 대응으로 룩셈부르크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제기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기본 원칙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강조했다. “프롤레타리아의 국제 연대 밖에서는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고 계급투쟁 없는 사회주의도 가능하지 않다. 전시든 평화시든 자살하지 않고서야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가 국제 연대와 계급투쟁을 포기할 수 없다.” 이것은 인터내셔널이 평시의 도구이지 전쟁 상황에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카우츠키의 위선적 주장을 비판한 것이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는 룩셈부르크가 가장 소중히 여긴 윤리적·정치적 가치에 대한 감동적인 고백이 있다. “나에게 노동자들의 국제적 우애는 지구상에서 최고이자 가장 성스러운 것이며, 나의 안내별이고, 나의 이상이고, 나의 조국이다. 이 이상을 저버리게 되느니 차라리 내 삶을 포기하겠다!”
제국주의·민족주의·군국주의의 병폐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경고는 예언적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계속 존재하는 한 늘 새로운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상적이거나 기본적으로 반동적인 계획, 예컨대 자본가 외교관들로 이뤄진 국제중재재판소, ‘군축’ 관련 외교 협정 … ‘유럽연맹’, ‘중부유럽구매연합’, ‘완충국’ 등을 통해 세계 평화가 보장될 수 없다. 자본가 계급의 지배가 반대를 받지 않고 유지되는 한 제국주의·군국주의·전쟁은 폐지되거나 지옥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필연적 결과물이 아니라 자본가 계급 일반이 점점 더 제거해 버리고 싶어할 종기 같은 것이라고 봤다. 제국주의는 소수의 강력한 자본가 집단(은행과 군수 산업체 소유자)이 지지하는 팽창 방식이고, 이 방식은 군비 지출이 국내외 투자에 쓸 가용자본을 축소시키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 일반의 요구와 상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 계급 대다수가 이런 팽창 정책에 점점 반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군비 경쟁은 군축 협정, 국제사법재판소, 평화 동맹, 유럽합중국 구성 등에 의해 극복될 비정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책 결정자인 고위 공직자들이 지구상에 평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베른슈타인도 1911년에 평화를 향한 갈망이 보편적이 됐으며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의 예언은 끔찍한 양차 대전을 통해 현실에서 올바름이 입증됐다.
또, 룩셈부르크의 민족주의 경고도 예언적이다. 20세기 최악의 범죄들 — 제1차세계대전에서 제2차세계대전(아우슈비츠·히로시마)까지, 그리고 그 이후 — 이 민족주의, 민족 헤게모니, 국가 방위, 민족의 생존 공간 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 스탈린주의 자체도 “일국사회주의”라는 슬로건에서 보듯, 소비에트 국가가 민족주의적으로 반동적 퇴보를 한 것이었다. 민족 문제에 관련해 룩셈부르크의 일부 입장을 비판할 수 있지만, 룩셈부르크는 국민 국가 정치(영토 분쟁, “민족 청소”, 소수자 억압)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인지했다.
오늘날 룩셈부르크의 국제주의는 어떤 함의를 가질까? 21세기 초 역사적 조건들은 룩셈부르크가 활동했던 20세기 초와 매우 다르다. 그러나 몇몇 결정적 측면에서 룩셈부르크의 국제주의 메시지는 그 시대만큼 오늘날에도 적절하거나 심지어 더 유효하다.
21세기에 자본주의 세계화는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수준으로 영향력을 강요해, 터무니없이 심한 불평등을 촉진하고 재앙적인 환경적 결과를 낳고 있다. 룩셈부르크의 유산은 여러 모로 이런 문제들에 맞선 운동에서 중요하다. 룩셈부르크는 적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글로벌 자본주의 헤게모니의 대안은 세계화에 맞서 “국민 주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저항을 세계화·국제화하는 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 우리는 룩셈부르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도전을 다뤄야 한다. 기후 위기와 생태 재앙이 대표적이다. 이것들은 자본가들의 무제한적 팽창과 성장 욕구라는 파괴적 동역학에서 비롯한 것이고, 지구적 규모에서 대응해야 한다. 달리 말해, 생태 위기는 룩셈부르크의 국제주의적 정신의 적절성을 증명하는 새로운 논거다.
또, 룩셈부르크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인종차별과 외국인 혐오라는 반동적 폭풍 한복판에서 귀중한 도덕적·정치적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주
-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9. ↩
- 룩셈부르크는 1905년 러시아 혁명 이후 연속혁명 개념을 발전시켰다. 즉, 러시아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를 넘어서 발전할 것이고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거나 완전히 패배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룩셈부르크가 제시한 구호는 ‘농민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였다. 1931년 스탈린이 사후적으로 룩셈부르크를 트로츠키주의자라고 비난한 것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다. 토니 클리프 2014, 35쪽. ↩
- 장석준 2013. ↩
- The Letters Of Rosa Luxemburg. Paul Le Blanc, ROSA LUXEMBURG’S REVOLUTIONARY SOCIALISM, SocialistWorker.org, January 15, 2019에서 재인용. ↩
- 룩셈부르크의 이런 당 개념의 배경, 강점과 약점은 존 몰리뉴가 《마르크스주의와 정당》(책갈피, 2013) 중 4장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안’에서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 ↩
- 베른슈타인과 룩셈부르크 사이에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의 핵심을 간편하게 요약적으로 설명한 것으로는, 최일붕이 쓴 《사회민주주의 전통과 사회주의》(노동자연대, 2016)를 추천한다. ↩
-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에서 제국주의가 비자본주의 지역들로 확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축적에 필수적인 과정이지만 비자본주의 지역들을 파괴하고 자본주의로 흡수하는 과정이기도 하므로, 비자본주의 지역들을 모두 흡수하고 나면 자본주의는 최종 위기를 맞이해서 붕괴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의 가치론과 위기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약점이 있다. 마르크스 경제 위기 이론의 핵심은 과소소비가 아니라 축적이 증대할수록 이윤율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축적》에 대한 상세한 서평으로는 주디 콕스(2003)를 참조하시오. ↩
참고 문헌
곤살레스, 마이크 등 2015, 《처음 만나는 혁명가들》, 책갈피.
몰리뉴, 존 2013,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책갈피.
룩셈부르크, 로자 2008,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책세상.
장석준 2013, ‘19세 나를 뒤흔든 그녀, 부활하라!’, 〈프레시안〉(3.15).
전국노동자정치협회 2019, ‘로자 룩셈부르크 사상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배우지 않을 것인가?’
최일붕 2016, 《사회민주주의 전통과 사회주의》, 노동자연대.
클리프, 토니 2014,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 책갈피.
프뢸리히, 파울 2000, 《로자 룩셈부르크 생애와 사상》, 책갈피.
Blanc, Paul Le 2019, ROSA LUXEMBURG’S REVOLUTIONARY SOCIALISM, SocialistWorker.org, January 15.
Cox, Judy 2003, Can capitalism go on forever, ISJ, (Autumn).
Löwy Michael 2020, Why Socialism Must Be Internationalist … and what Rosa Luxemburg can teach us about it (January), https://www.rosalux.de/en/publication/id/41529/why-socialism-must-be-internationalist.
Luxemburg, Rosa 1916, Either Or(April),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16/04/eitheror.htm.
Luxemburg, Rosa 1915, The Junius Pamphlet: The Crisis of German Social Democracy, https://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15/junius/index.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