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다윈 평전》공저자 제임스 무어 인터뷰
진화론의 혁명 *
이 글은 다윈의 삶을 당대의 사회적 환경에 비춰 신선하게 조명한 《다윈 평전》의 공저자 제임스 무어를 인터뷰 한 것이다. 이 인터뷰는 이 책이 영어로 처음 발간된 1992년에 린지 저먼과 크리스 하먼이 제임스 무어를 직접 만나서 한 것이고, 《소셜리스트 리뷰》 150호에 실렸다. 당시 《소셜리스트 리뷰》의 편집자 린지 저먼은 현재 영국 전쟁저지연합 지도자이고, 당시 《소셜리스트 워커》의 편집자 크리스 하먼은 안타깝게도 지난 달 작고했다. 각주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편집자가 넣은 것이다.
Q 에이드리언 데스먼드와 함께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A 에이드리언과 나는 오랜 세월 서로 알고 지냈고, 정치적으로나 직업적으로나 서로 존경하는 사이다.
나는 약 20년 동안 틈틈이 다윈을 연구했다. 처음에는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자란 미국 중부에서 다윈은 내 주변 사람들이 반대하는 근대적인 것(좌파, 공산주의, 자유주의 정치 질서) 일체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포르노, 성도착증에서부터 우주적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하여간 모든 것을 다윈과 연관시켰다. 아, 글쎄, 다윈은 인간이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의 단초를 제공한 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지적으로 성숙해진 뒤로 나는 다윈을 바라보는 그런 시각이 과연 온당한지 되짚어보고 싶어졌다.
1 이 만들었다는 ‘위대한 사회’에서 아웃사이더가 되고 말았다. 내가 영국에 온 것은 히스[보수당 소속 총리] 정부 시절인 1972년이었는데, 내 가족 중 한 명은 나에게 “전체주의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살아보니 어떠냐”고 편지로 물어보기도 했다. 영국의 NHS(국민의료서비스)나 국영 철도 등등 때문에 그런 걱정을 한 것 같다. 나도 그런 것 때문에 영국에 처음 발 디뎠을 때는 눈이 초롱초롱 빛났는데 지금은 환상이 많이 깨졌다. 물론 그래도 영국이 미국보다는 여러 모로 더 인간적인 곳이긴 하다.
내가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된 주된 계기는 베트남 전쟁이었다. 전쟁 탓에 나는 징집당할 처지에 놓였고, 린든 존슨덧붙이자면, 나의 정치적 각성은 협소한 복음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미국 중부에서 자라면서 복음주의자가 되지 않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전쟁과 평화, 빈곤과 인종차별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일부 급진적 함의를 끝까지 밀고가다 보니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됐다. 그런데 내가 다닌 신학대학원의 교수들은 그러한 급진주의를 전혀 공유하지 않았다. 영국에서 역사를 전공하기 전에 나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이처럼 기독교의 권위자들조차 중요한 사회 문제에 답을 제시해 주지 못하자 나는 점점 더 마르크스주의적 세계관으로 기울었다. 결국 내가 내린 결론은 사회주의가 복음주의와도 잘 맞는다는 것이다. 도덕적 열정이라는 미덕(때로는 독이 되는)이 어느 한 교리의 전유물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한편 에이드리언의 동기는 내가 대변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기로 에이드리언은 영국 사회에 만연한 다윈 숭배 때문에 오히려 다윈에 무관심했다. 그는 다윈을 이해하려면 먼저 다윈을 증오해야 하지 않느냐는 둥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무관심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그래서 다윈을 주제로 책을 써 보자고 먼저 제안한 쪽도 나였다.
Q 당신은 다윈이 자신의 연구 성과를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출판하지 않고 묵혀둔 것은 자신의 연구 결과가 당대의 급진파들에게 힘을 실어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다윈 평전》에 썼다. 이는 이 책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이기도 하고, 특히 우파들에게 당혹스러운 부분일 듯하다.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됐는가?
A 그동안 다윈에 관해서는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많았다. 그가 겪었다는 건강 문제가 유명한 예다. 또 하나는 그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 이론의 발표를 20년이나 미뤘다는 점이다. 이 둘에 관한 공통된 설명이 존재하는가? 나는 분명 있을 것이라고 항상 생각해 왔다. 다윈의 생애를 분석한 10년 전 소논문에서 나는 다윈이 켄트 지방의 낡은 목사관에서 은둔 생활을 한 것이 1830년대와 1840년대 영국 사회의 격변과 관련 있지 않을까 추측해 봤다. 여기에 에이드리언이 자신의 명저, 《진화론의 정치The Politics of Evolution》에서 펼친 논지를 더해 우리는 다윈이 위신과 명망을 잃을까 봐 벌벌 떠는 순도 1백 퍼센트 부르주아였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윈의 늑장 출판과 건강 문제가 모두 자신의 이론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두려워한 데서 비롯했다는 우리의 견해는 우파보다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더 당혹감을 안겨줄 것이다. 다윈이 출판을 미룬 데는 순전히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고, 그의 건강 문제에는 순전히 의학적인 이유가 있었을 거라 믿어온 사람들 말이다.
혹자는 다윈이 앓은 지독한 구토 증세나 두통을 설명하는 일은 의사들에게 맡기라고 말할지 모른다. 또, 다윈이 시간을 끌었던 것은 진화론을 뒷받침할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음을 과학철학자들이 증명해 줄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다윈은 초지일관 증거 수집에 몰두한 냉철하고 객관적인 연구자의 모범이다. 애석하게도 이 위대한 인물이 병치레로 큰 고통을 겪은 것이다. 유전적 질병 때문인지, 비글호로 항해하던 중에 얻은 병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다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
Q 과학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에 《다윈 평전》 서평이 실렸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호의적으로 평했지만, 당신의 설명 방식은 틀렸다고 썼다. 마치 다윈의 생애를 걸프 전쟁이나 뉴캐슬에서 일어난 소요 사태와 연관지어 설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도 사회와 정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 완벽히 차단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A 1850년 당시 다윈 부부는 오늘날의 가치로 2백만 파운드가 넘는 자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투자 수익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계급에 속한 사람이 1848년에 그랬듯이 아래로부터의 혁명적 격변에 직면한 사회에 살고 있었다면 어땠겠는가? 당연히 걱정됐을 것이다. 다윈이 호주로 이민 갈 생각을 왜 했겠는가? 호주가 유럽 대륙에서 일어난 경제적 불안과 소요 사태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회·정치적 각도에서 조망해 보면 이야기가 착착 들어맞는다.
Q 《다윈 평전》 앞부분에는 그 전까지 상당히 급진적인 계몽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던 상층 중간계급 성원들이 영국 국교회 교리로 대거 후퇴한 과정이 묘사돼 있다. 그렇게 보면 큰 그림이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된다. 당신이 서술한 대로 다윈이 신의 오묘한 섭리를 보여 줄 수단으로 생물학을 택했다는 점이나, 그렇게 해서 생물학을 연구했지만 신 관념과 모순되는 증거들을 발견하게 되는 정황 등이 말이다. 설령 다윈이 차티스트 운동을 단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다는 《뉴 사이언티스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해도 분명 다윈은 시대적 분위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은 듯하다.
A 물론이다. 사실 다윈이 언급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그는 화장실에 간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그도 당연히 볼 일은 봤을 것이다. 그는 또, 1851년에 열린 만국박람회도 언급한 바가 없다. 그러나 만국박람회는 차티즘과 더불어 빅토리아 시대 영국 대중의 의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다. 눈과 귀가 멀지 않은 이상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다. 게다가 다윈만한 부자가 차티즘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다면 바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아니었다.
역사가의 임무는 이 같은 침묵 뒤의 행간을 읽어내는 것이다. 사실, 역사가들은 늘 행간을 읽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에서 어떤 내러티브[서사]도 불가능할 것이다.
2 을 지지한 매우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가족들은 노예제에 반대하고 개혁 법안에 찬성하는 등 급진적 성향이 강했지만 노동계급의 전투성이 성장하면서 급진주의와 멀어지게 된다. 계급적 본능이 민주적 권리 신장 염원을 압도하게 되면서 다윈 일가는 점점 더 보수화하지 않았는가?
Q 다윈은 휘그당3 교회의 옛 급진주의자들 중 다수가 영국 국교회 쪽으로 기울었다. 경제 여건 악화도 반동에 일조했다. 사회에 대한 종교적 규율을 대폭 강화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찰스 다윈의 조부인 에라스무스 다윈 같은 잉글랜드 중부 급진주의자들의 성향도 복음주의를 살짝 덧칠한 중도적 국교회주의로 급속히 퇴화했다. 오늘날로 치면 수백만 파운드의 자산을 보유한 자유사상가 로버트 다윈은 방황하는 둘째 아들인 찰스 다윈을 영국 국교회 목사[성공회 신부]로 교육시킬 작정을 했는데, 이는 당시에 덕망 있는 행위였다. 목사가 되는 데 대단한 종교적 신념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다윈은 언젠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게 될 터였다.
A 다윈 일가의 물주인 웨지우드 도자기 공장(다윈의 모친이 웨지우드 가의 딸이었다)은 나폴레옹 전쟁 시대에 큰 위기를 겪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반동이 몰아치는 가운데 유니테리언케임브리지대학교 신학부에 진학한 다윈은 거기서 1790년대의 영향에 맞선 반동의 분위기를 호흡하다시피 하며 살게 된다. 중간계급을 위해 민주주의가 약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휘그당 지지자들이 케임브리지에도 있었고, 다윈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그곳은 실로 안락하기 짝이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나 생물 종이 변화하며 인간과 원숭이가 친척이라고 믿는 사람에게까지 안락한 환경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신성모독에 해당했다.
1837년 비글호로 세계 일주를 마치고 런던에 돌아온 다윈은 그런 신성모독적 사고思考가 얼마나 위험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열에 불타는 민주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다시 한 번 붉은 깃발을 흔들며 사회의 진화를 요구한 것이다. 다윈은 마음을 굳게 먹고 자기 노트를 남들이 못 보게 숨겨놓는 등 일거수일투족을 조심해야 했다. 다윈처럼 탄탄대로가 보장된 청년으로서는 진화론 따위의 불순한 사상을 고백해서 인생을 망치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었다.
4 같은 사람은 수정궁 5 으로 대표되는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자리를 찾아야 했을까? 1859년 다윈이 마침내 《종의 기원》을 출판한 뒤로 다윈의 명성, 그의 이론의 일부 측면, 그리고 그가 축적한 어마어마한 양의 증거는 이 청년들이 전문직 중간계급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는 데서 지렛대가 됐다.
지금껏 살펴봤듯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까지는 모종의 전환기였다. 뒤이어 1840년대에는 철도 주식에 투기하는 광풍이 일었다가 결국 거품이 붕괴했다. 투자 수익으로 편안히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했을까? 과학을 생업으로 삼고 싶어한 꿈 많은 젊은이들이 설 자리는 또 어디에 있었을까? 돈이 많았던 다윈은 논외였지만, 가령 토머스 헉슬리다윈 자신이 진정 과학적 진실이라고 여겼던 것의 극히 일부만을 헉슬리가 채택했다는 점은 놀랄 만하다. 다윈은 이 다혈질 청년이 자신을 오해할까 봐 항상 걱정했는데, 결국 대서양 양쪽에서 다윈의 가장 유명한 옹호자였던 헉슬리는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한 번도 진정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 때까지도 자연선택 이론에 관한 최종 평결이 내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이 이미 50년 전부터 주장해 왔던 진화 현상 자체는 진실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사회 진보(즉, 과학자들과 그 조수들을 위한 사회 진보)를 정당화하는 데 진화라는 개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과학 혁명’이 아니라 궁정 쿠데타에 불과했다.
Q 대다수 사람들은 진화 현상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 다윈이라고 배우고 에라스무스 다윈과 라마르크 같은 선지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차적으로만 배운다. 그리고 1850년대 말 이전에는 사람들이 모두 창조론을 믿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급진적 진화론자들에 관한 당신의 묘사는 대단히 흥미롭다. 이들은 비록 잘못된 가정에 근거해서나마 교회에 맞서 과학적 접근법이 필요함을 옹호한 듯하다.
A 사실, 여러 생물 종이 신의 개입 없이 저절로 등장했을 것이라는 믿음은 수천 년 동안 존재했다. 다윈 이전에 종의 기원에 관한 가장 유력한 이론을 내놓은 사람은 프랑스 계몽철학자인 장-바티스트 라마르크였다. 그는 유물론자이면서 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신의 존재를 믿었다고 하는데, 어쩌면 무신론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는 영국 국교회의 중간계급과 상층계급 신자들이 반대하는 것 일체의 표상이었다. 라마르크는 생명이 밑에서부터, 즉 원자 단위에서부터 자연 발생해서 급기야 인간 같은 고등 생물로까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관점에서 자연은 위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와도 같았다. 그는 동물이 한 세대에 획득한 우수한 형질(운동으로 더 강해진 근육, 더 커진 두뇌 등)을 다음 세대에 물려줌으로써 발전한다고 봤다. 이는 자동적인 과정으로 여겨졌고, 또 그래야만 했다. 사회 변화가 필연이라고 믿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식의 진화론이 큰 희망을 안겨줬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자들도 지식을 쌓다 보면 어느 세대부터는 더는 노동자가 아닌 더 높은 어떤 존재가 될 수 있을 터였다. 이와 같은 자가발전적 진화론은 사회의 변화는 모두 위로부터 온다는, 달리 말해 목사들과 성직자들을 매개로 궁극적으로는 신에서부터 온다는 영국 국교회의 입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라마르크는 아래로부터의 변화, 공화주의, 신에게서 통치권을 받은 왕정의 타도, 그리고 신성 자체의 타도를 표상하는 인물로 비쳤던 것이다.
1830년대에는 그런 류의 진화론이 길거리와 황색 언론에서도 회자되고 있었다. 다윈이 처음으로 진화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 쓴 초기의 노트 한 권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신에 대한 사랑은 유기 조직[생물체]의 산물이다.” 즉, 다름 아닌 우리 몸이 신 관념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즉시 자기비판을 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이런 유물론자 같으니라고!”
머지않아 다윈은 자신의 생각을 노트에 적을 때 그 생각의 논리적 결론을 은폐하는 전략을 개발했고, 몇 달 뒤에는 독자적인 진화 이론에 관한 발상을 처음으로 얻었다. 그가 생각한 진화 메커니즘은 밑에서부터 자가발전적이고 필연적으로 진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구빈원 제도의 존립 근거이자 휘그당 정치철학의 주된 버팀목이었던 맬서스 인구론이 다윈 진화론의 기초였다. 맬서스는 언제나 인구는 너무 많고 식량은 부족하므로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 요구를 자제하고 성생활을 절제해 자녀를 덜 낳지 않는 이상 생존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설파했다. 이런 사상은 산업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입맛에 딱 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다윈주의자가 되기 전에 이미 맬서스주의자들이었다. 다윈이 한 일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성생활을 절제할 수 없는 동식물 세계에도 인구 법칙에 따른 생존 투쟁 원리가 적용되며 이런 투쟁을 통해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진보는 필연적이지 않았다. 퇴보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러므로 다윈은 선대 급진주의자들처럼 많은 것을 약속하지는 않은 셈이다. 그의 진화론은 신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믿음과도 양립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비록 이렇게 점잖고 중간계급적인 버전의 진화론일지라도 1840년대에 그것을 공개했다가는 자신도 극단주의자들과 도매금으로 매도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윈은 숨죽인 채 런던을 떠나 농촌의 목사관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애처로울 만큼 심각한 병을 앓게 됐다.
이 모든 이야기는 좌파에게도 당혹스러운 이야기일 수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윈을 숭배해 왔다. 다윈이야말로 우리를 종교에서 해방시켜 과학적 근대성의 시대로 인도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다윈의 이론에 사실은 계급적 뿌리가 있음을 밝혀낸다면 그의 이론도 라마르크의 낭설(한 생물 개체가 생전에 획득한 우수한 형질은 2세로 유전된다는)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Q 우리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선, 미국 중부를 비롯한 세계 몇몇 지역에서는 다윈의 이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무려 한 세기가 걸렸다. 더 중요한 점으로, 다윈의 이론이 세상에 알려지자마자 그것에 온갖 압력이 가해졌다. 사회다윈주의 등의 형태로 잘못 해석되기도 하지 않았는가.
A 에이드리언과 나는 《다윈 평전》에서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이 사실은 인간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다윈은 생명 현상 일반에 관한 설명을 찾아 헤매다가 오늘날 우리가 인구학 또는 사회학이라 부르는 영역으로 눈을 돌렸다. 즉, 다윈은 생명의 진화 법칙을 먼저 규명한 뒤에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사회에 관한 맬서스의 이론이 다윈 진화론의 단초를 제공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 출판 이후 12년 동안 인간의 진화를 별도로 다룬 문헌을 출판하지 않았다. 《종의 기원》에서도 인간에 관한 이야기는 약간의 힌트를 빼고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는 의도적인 회피로서, 우리가 다윈에게 품고 있는 혐의를 더욱 굳혀 주는 물증의 하나다. 《종의 기원》이 출판되고 7년 뒤인 1866년에도 다윈은 인간 진화를 다룬 자신의 책, 《인간의 유래》를 출판하면 그 시기가 “언제가 됐든” 간에 자신은 “처형당하거나 전 사회적인 지탄을 받을 것”이라고 썼다. 여전히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사회다윈주의 등과 관련한] 논쟁의 요지는 이런 것이었다. 인간은 단지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 법칙에 종속된 존재인가, 아니면 집단적 노력으로 자연 법칙을 초월해 스스로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인가? 다윈은 전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식민지의 ‘미개인’들이 박멸당하고, 대영제국이 계속 확장하고, 여성이 남성에게 순종하는 당대 현실을 바라보며 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하기만 하면 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여겼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사회가 아니라 자연의 산물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관점을 극복해야 한다.
Q 다윈과 프로이트 모두 특정 사회의 산물이다. 둘 다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지식과 통찰을 보여 준 사람들이지만, 부르주아 사회의 일부 측면들을 당연시한 탓에 더 멀리 나아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이들의 사상을 기각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모자라는 부분은 보완하고 발전시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려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 필요할 듯하다.
A 마르크스가 다윈의 이론에서 “역사 속의 계급투쟁을 위한 자연과학적 기초”를 발견한 것과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1859년에, 그러니까 《종의 기원》과 같은 해에 출판됐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부를 생산하는 방식이 역사적 조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 줘서, 말하자면 정치경제학을 이용해서 정치경제학을 타파했다. 마찬가지로, 다윈도 맬서스식 자연 경제론을 이용해서 창조론자들의 자연 경제론을 타파했다.
마르크스와 다윈은 둘 다 일체의 고정되고 신성한 질서를 부정했다. 둘 다 자연적인 조화를 투쟁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다윈을 마르크스화하거나 마르크스를 다윈화하는 데는 상당한 위험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연과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역사를 우위에 놓은 반면 다윈은 자연을 우위에 놓았다. 다윈은 사회 발전을 자연의 힘으로 설명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작용, 즉 우리의 선택과 투쟁을 이야기해야 한다. 인류의 미래는 자연과학자에게 내맡기기에는 너무도 중요한 사안이다. 그 자연과학자가 어느 시대 사람이건 말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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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Lindsey German & Chris HarmanSocialist Review Issue 150 (February 1992).
↩
- 36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뒤를 이어 1963~69년에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시절 ‘위대한 사회’라는 이름으로 복지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1964년에 일어난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베트남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
- 영국 자유당의 선조.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에 참여했고, 19세기 초에는 지주 지배계급에 반대해 산업체 소유자들의 편에 섰다. ↩
- 그리스도교의 정통 교리인 삼위일체론에 반대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고 하느님의 신성만을 인정하는 교파. ↩
- 영국의 동물학자. 다윈의 《종의 기원》 출간 직후 벌어진 인간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에서 다윈을 열렬히 옹호해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인간을 닮은 네안데르탈 인의 화석을 연구해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진화론은 다윈의 진화론과 차이가 있었는데, 다윈이 자연 선택에 의한 점진적 진화를 지지한 반면 그는 자연선택 이론을 입증할 수 없다며 수용하지 않았고 다윈의 점진적 진화관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
- 1851년 영국 런던 만국박람회가 열린 건물. 벽돌 등 기존 소재를 쓰지 않고 유리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영국 산업혁명의 성과를 과시하는 효과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