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주의의 기다란 그림자 *
1 이렇게 스탈린 체제는 막을 내렸지만 스탈린주의는 여전히 좌파 진영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30여 년 전, 더 정확히는 1991년 12월 25일 소련의 크렘린궁에 게양된 붉은 깃발이 마침내 하기되면서 소련이 붕괴했다.여기서 “스탈린주의”는 스탈린이 무소불위의 독재자가 돼 소련을 통치한 1928~1953년의 시기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스탈린주의는 1928년부터 1991년까지 지속되다 붕괴한 소련의 지배 체제를 뜻하기도 하고, 세계 각국의 공산당이 추구한 정치를 뜻하기도 한다. 이 시기의 러시아는 반혁명을 통해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단절됐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 잠깐 동안 사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이 저널이 지지하는 국제사회주의 정치 전통에서 1928년 이후의 소련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규정된다. 노동자들은 그 사회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은 탱크를 동원해 동유럽에 소련과 똑같은 사회 형태를 강요했다. 중국 등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도 국가자본주의 형태를 받아들였다.
2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의 새로운 회원들은 “수정주의에 매우 적대적이고 친스탈린적 성향”을 보인다. 3 온라인 상에도 “탱키”들이 소셜미디어에 올린 영상과 스탈린주의적 시각을 드러내는 “밈”을 모아 놓은 웹페이지가 넘쳐 난다. 4
오늘날 영국에서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자처한다. 실제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과 분명하게 단절하면서 생겨난 정치인데도 말이다. 일부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외관상으로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듯한 스탈린주의에서 매력을 느낀다. 영국에서는 지난 몇 년간 청년공산주의자동맹(YCL)이 성장했다. 2021년 10월 맨체스터에서 열린 보수당 당대회를 겨냥해 ‘긴축 반대 민중 회의’가 주최한 항의 행진에서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은 상당한 대열을 이뤘다. 한 달 후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 기후변화정상회의(COP26)에 대항하는 시위에서도 대열이 상당했다.)[뒤에 나오는 1920년에 창당한 영국 공산당(CPGB)과는 다른 조직이다 - 번역자]의 지도부조차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 소셜미디어 사용 지침을 내려야 했다. CPB 지도부는 당원들에게 “스탈린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그가 지도하던 시절 자행된 상당한 국가 권력 남용에 대한 지지”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했다. 5
이들 중 많은 수가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과를 피바다 속에 처넣은 독재자 스탈린을 사회주의를 발전시킨 영웅으로 추앙한다. 그 존경심이 어찌나 드높은지, 1988년에 강성 소련 지지자들이 결성한 영국 공산당(CPB 스탈린주의 조직의 평회원들만이 아니라 많은 좌파들도 과거에 “사회주의”를 표방했거나 현재도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들에 환상이 있다. 그들은 소련과 소련의 위성국들이 사회주의의 모범까지는 아니더라도 서방 자본주의보다는 진보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사회들의 공공 의료나 교육 정책을 근거로 들기도 하고, 심지어는 성 해방이 이뤄졌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크리스텐 고드시의 저서 《왜 여성은 사회주의 사회에서 더 나은 섹스를 하는가 — 그리고 경제적 독립에 관한 논의들》이 그런 사례다. 동구권의 “국가 사회주의”하에서 여성의 삶이 더 나았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고, 이런 주장을 하는 저작들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일부 좌파들은 세계 최악의 약탈자이자 세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인 미국 제국주의가 낳은 참상을 가리키며 과거에는 소련이 미국의 “균형추” 구실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소련을 빈국의 민족 해방 투쟁, 식민지 해방 투쟁을 지원했던 강대국으로 조명한다. 그러나 소련의 대외 정책 기조는 전혀 반제국주의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소련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다. 그리고 1950년대 말 프랑스 공산당은 알제리의 식민지 해방 투쟁을 결국 지지하지 않았다.스탈린주의가 부활한 배경
스탈린주의가 부활하는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어떤 것은 영국의 특수한 상황을 반영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더 일반적이다. 첫째, 스탈린주의의 부활은 좌파 개혁주의 프로젝트의 실패를 배경으로 한다. 영국의 경우, 특히 2019년 제러미 코빈의 패배가 그 배경에 있다. 지난 10년간 반자본주의적 사상이 성장했지만,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혁명적 좌파는 여기서 주도권을 잡을 만큼 규모를 갖추지 못했다.
젊은 코빈 지지자들 중 일부가 노동당에서 스탈린주의 정치로 바꿔 청년공산주의자동맹에 가입하거나 스탈린 체제를 찬양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매우 급격한 변화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자 핼 드레이퍼는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정신》에서 스탈린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모두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라고 지적했다.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두 정치는 매우 상이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공통점이 훨씬 많다. 사회민주주의는 흔히 자본주의를 위로부터 “사회화”하기를 꿈꾼다. 그리고 사회와 경제에 대한 국가 개입을 늘리는 것이 곧 사회주의라는 원칙을 언제나 견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라는 것을 위로부터 강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국유화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는 스탈린주의적 개념과 꼭 닮았다. 그래서 그 둘은 마치 벗어날 수 없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처럼 보인다.
8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 정치는 이런 자력 해방의 중요성을 무시한다.
이처럼 스탈린주의의 부활은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던 사람들이 그것의 다른 유형으로 갈아탄 것에 불과하다. 영국 노동당이 체제에 도전하지 못하고 좌파 지도부가 당내 우파와 대결하지 못하는 모습에 환멸을 느낀 일부에게 스탈린주의는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의 더 전투적인 형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가 지향하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국가와 대결하고 자신들의 통치 기관을 세우면서 실현되는 것이다. 드레이퍼가 설명했듯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의 핵심은 ⋯ 대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투쟁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때에만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둘째, 스탈린 체제의 참상은 이제 역사적으로 더 먼 과거가 됐다. 그래서 스탈린주의를 억압적인 지배 체제가 아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를 극복할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동경하기 더 쉬워졌다.
셋째, 미국은 1991년 냉전 종식 이래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오늘날 30세 이하의 청년들에게 제국주의란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이라크·리비아·시리아를 전쟁터로 만들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잔인하게 짓밟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으로 요약되는 현상이다.
9 서방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미국과 서방의 제국주의 동맹이 저지른 죄악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나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강한 반감이 미국과 경쟁하거나 대결하는 중국 같은 국가들을 “반제국주의” 세력이라고 착각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분석은 제국주의를 자본들과 국가들의 세계적 경쟁 체제로 보지 않고, 서방 제국주의 열강 대 나머지 국가들의 관계로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이 국가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어서 이들을 비판하면 “제국주의의 벗”이라고 매도하기도 한다.
이 저널이 지지하는 정치 전통은 미국 제국주의에 언제나 반대했다. 그리고 1960~1970년대의 베트남, 2000년대의 이라크,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등 어느 곳에서든 미국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피억압 인민의 권리를 지지했다. 더 나아가 미국과 중국 등 경쟁하는 제국주의 열강이 충돌하면 우리의 과제는 자국 지배자들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한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말했듯이 “주적은 국내에 있다.”스탈린이 만든 피의 강물
많은 자칭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묘사를 보면, 스탈린의 비밀경찰은 마치 재산을 몰수당한 귀족이나 자본가, 응징해야 마땅한 제국주의의 첩자만을 잡으러 다닌 것 같다. 그러나 스탈린이 실제로 벌인 일은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기 위한 무지막지한 반혁명이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사회를 실현할 희망의 불씨를 지키려 한 수많은 볼셰비키 혁명가들을 살해했다. 이들은 숙청되고, 조작된 재판을 받고, 음습한 비밀경찰 감옥에서 고문당하다 살해되고, 강제 노동 수용소에 무더기로 수용돼 추위에 떨다 죽어 갔다.
10 1917년 러시아 혁명과 1918~1920년 내전 당시 볼셰비키 지도부와 소비에트 국가 지도부의 90퍼센트가 “파시스트”와 “반역자”로 몰려 숙청당했다. 11 소련 공식 통계에 크게 의존해서 《소련 국가자본주의》를 쓴 토니 클리프는 이렇게 설명한다. “혁명 때 활약한 ‘고참’ 당원들이 대거 사라진 것은 자연사로 설명되지 않는다. 1917년과 1920년에 당원들의 다수는 젊은층이었기 때문이다.” 12 “‘숙청’의 어마어마한 규모는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혐의에 근거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 스탈린이 제거한 모든 자가 ‘파시스트’나 ‘반역자’였다면 지도부의 십중팔구가 배신자인 볼셰비키가 어떻게 ⋯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게 됐다는 말인가.” 13
1939년 3월 1일에 공산당원은 158만 8852명에 달했다. 이 중 1917년 러시아 혁명 때에도 볼셰비키였던 사람은 1.3퍼센트에 불과했고, 1920년 내전이 끝났을 때에도 당원이었던 사람은 8.3퍼센트에 불과했다. 1917년에 볼셰비키였던 사람들 중 1939년에도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은 14명 중 1명 꼴이었고, 1920년에 볼셰비키였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6명 중 1명 꼴이었다.14 스탈린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지도자였던 트로츠키는 1929년 소련에서 추방당하고 1940년 멕시코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이 휘두른 얼음송곳에 머리를 맞고 사망했다.
1937년에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숙청으로 인해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단지 피로 그은 선이 아니라 피의 강물이 흐르게 됐다” 하고 썼다.15 그때까지 수감자 약 200만 명이 사망했다. 굴라크 수감자뿐 아니라 소련의 감옥-산업 복합체에 수용된 총 인원은 2600만 명을 헤아린다. 여기에는 강제 노동 교도소나 강제 이주 계획 등 온갖 형태의 수감이 모두 포함된다. 1953년 스탈린 사망 이후 대대적인 투옥은 줄어들었지만, 1986년까지도 2500명이 노역 형을 선고받았다. 부농인 “쿨라크”를 청산한다는 명분으로 스탈린이 벌인 농민 억압은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 북캅카스, 카자흐스탄, 볼가 지역에서 기근을 초래했다. 이로 인해 최대 700만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6
정권의 심기를 거스른 수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이 반혁명적인 공포 정치에 짓밟혔다. 정치수 500만 명을 포함해 최대 2000만 명이 “굴라크”로 불리는 강제 노동 수용소 470곳을 거쳐 갔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했을 때 굴라크 수감자는 246만 8524명에 달했고, 그 3년 전에는 256만 1351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스탈린의 공포 정치는 이러저러한 “국가 권력 남용”에 그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공포 정치는 서방과의 경쟁을 위한 급속한 공업화 계획의 필수 요소였다. 예컨대 굴라크는 소련의 새 5개년계획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31~1933년에는 굴라크 수감자 약 12만 6000명이 러시아 북부의 백해와 발트해를 잇는 운하 건설에 동원됐다. 공식 기록을 보면, 이들 중 최대 2만 50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굴라크가 단지 경제 발전을 위한 노예 노동의 공급처로서만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굴라크는 더 광범한 억압 기구의 일부였다. 국가는 “화해 불가능한 계급 적대의 산물이자 그것의 표현”이라고 레닌은 지적했다. 모든 국가는 “계급 지배 기관”이다. 즉,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고 “그 억압에 합법성을 부여하며 그 억압을 지속시키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기관”이다.19 억압은 관료 내에서도 일정한 구실을 했다. 기업 간 시장 경쟁이 부과하는 규율이 없는 상황에서 “효율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수단은 ⋯ 개별 관료를 겨냥한 공포 정치였다.” 20
스탈린주의 관료는 공업화를 강행하면서 거대한 노동계급을 만들어 냈다. 공업화는 모두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이룬 성과이고, 노동자들은 자신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정치적·경제적 결정에 아무런 발언권도 행사할 수 없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의 계급적 이해관계와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클리프는 《소련 국가자본주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소련 국가가 강화되고 그 국가의 전체주의가 심해진 것은 사회주의가 승리한 결과일 수 없으며, 심대한 계급 적대에서 비롯한 것일 수밖에 없다.”21 1934년에 중공업 인민위원회의 관료였던 미하일 카가노비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스탈린 체제의 노동법에서 핵심은 노동계급을 복종시키는 것이었다. 1929년 9월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채택한 한 결의안은 관리자의 명령이 “그 관리자에 부속된 행정 직원들과 모든 노동자들에게 무조건적 강제력을 갖는다” 하고 선언했다.무엇보다도 “1인 경영” 체제를 강화해야 한다. 관리자가 공장의 최고 책임자라는 기본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공장의 근무원은 모두 관리자에게 종속돼야 한다.
1930년 이후에 도입된 통행증과 근무 기록부 체계는 노동 규율을 더한층 강화시켰다. 1919년 러시아를 방문했다가 공산당에 가입한 아나키스트 빅토르 세르주는 통행증 체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직장이 바뀔 때마다 그 사유가 통행증에 기록된다. 내가 아는 어떤 노동자들은 휴일에 “자발적”인(그래서 당연히 무보수로 하는) 노동을 바치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됐다. 그들의 통행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생산 계획을 사보타주하다 해고됨.”
23 1934년에 한 관리자 회의에서 중공업 인민위원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이렇게 연설했다. “임금은 여러분의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24 그의 발언은 여느 자본주의 국가의 사용자 단체 회의에서도 나올 법한 것이었다. 작업한 생산물 개수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개수 임금제 덕분에 소련 국가는 생산 기준을 높여서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압박할 수 있었다.
노동계급의 가장 기본적인 자기 방어 조직인 노동조합은 국가의 부속 기관이 됐고 임금 협상이 허용되지 않았다. 반혁명적 공포 정치에 탄력이 붙자 스탈린은 1917년 혁명으로 쟁취된 여성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스탈린 체제에서 가족은 노동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핵심 제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스탈린 체제는 1934년에 동성애를 다시 범죄화하고 1936년에는 낙태를 금지해서 전통적 가족 구조를 강화했다. 여성에게는 “모성의 즐거움”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는, 당시 소련의 한 재판관의 발언은 당국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26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동구권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27 노동자 혁명 없이 세워진 이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가족과, 여성이 가족에서 하는 구실에 계속 기대어서 노동계급을 재생산했다.” 그래서 “동구권 여성들은 서구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일과 가사의 ‘이중 부담’에 시달렸다.” 28
소련에서 가족은 “노동계급 재생산에서 핵심적 구실을 했고” “이에 따라 여성은 노동자이자 양육자로서 종속적 구실을 맡게 됐다.”1917~1928년의 러시아: 혁명에서 반혁명으로
29 1917년 러시아 혁명은 노동계급이 사용자와 은행가, 지주 없이도 사회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것을 힐끗 보여 줬다.
사회주의 혁명은 베레모를 쓴 소수의 무장 집단이 노동계급을 대행해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자 국가를 선포하는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트로츠키의 표현을 빌면, 사회주의 혁명은 “대중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역으로 강제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30 지주가 소유한 대토지는 농민들에게 분배됐다. 혁명이 일어나 사회가 전복되자 인류의 가능성이 꽃피기 시작했다. 예술, 건축, 문학, 과학, 심리학,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창조력이 꽃피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을 직접 목격한 미국의 사회주의 언론인 존 리드는 이렇게 썼다. “온 러시아가 글자를 배우고 정치와 경제, 역사에 관한 글을 읽었다. 인민들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리드는 《세계를 뒤흔든 열흘》에서 볼셰비키 당원들과 전선을 방문한 경험을 묘사한다. 그곳에서는 머지않아 혁명으로 끝나게 될, 독일군과의 헛된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기반은 러시아어로 “소비에트”라고 하는 노동자 평의회였다. 노동자들은 노동자 평의회를 통해 일터를 민주적으로 통제했고, 이는 자본주의하에서 허용되는 것보다 훨씬 더 철저한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다.우리는 리가 뒤편의 제12군이 있는 전선으로 내려갔다. 절망 가득한 참호의 진흙탕 속에 야위고 전투화도 신지 않은 남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얼굴은 야위었고 찢어진 옷 사이로 창백한 살결이 드러났다. 그들은 다그치듯 물었다. “뭐 읽을 거라도 가져왔소?”
32 러시아 사회에 유대인 혐오가 오랫동안 뿌리내려 왔는데도, 유대인인 트로츠키는 혁명의 심장부였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으로 선출됐고 혁명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또, 소비에트 국가는 차르 체제가 부추긴 “대러시아 민족주의”와 단절하고, 러시아 제국에 갇혀 있던 피억압 민족들의 자결권을 인정했다.
여성해방과 성 해방에도 큰 전진이 있었다. 영국 등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이 미미한 개혁을 도입하기 수십 년도 더 전에 동성애가 비범죄화되고 여성에게 이혼할 권리와 언제든 낙태할 권리가 보장됐다. 이것은 단지 위에서 내려온 포고령이 아니었다. 혁명이 진행되면서 평범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세계 최초의 여성 장관이 됐다. 이것이 얼마 전만 해도 남편이 아내를 채찍질하는 게 일부 지역에서 허용되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다.1917년 10월 혁명의 실제 모습은 자유주의자들이 상상하거나 스탈린주의자들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민주적이었다. 이와 비교되는 사례로,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은 러시아 혁명 104주년을 맞아 다음과 같이 혁명을 묘사하는 글을 발표했다.
볼셰비키 적위대가 동궁을 장악하고 반공적인 백위대의 저항을 분쇄했다. 2월 혁명이 차르 지배를 끝장냈다면, 10월 혁명은 러시아를 하나의 이데올로기,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통일시키려 했다. 이날 소비에트 대회가 구성돼 전 세계가 일찍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 틀이 놓였다.
여기에는 기이한 사실 관계 오류가 있다. 첫째, 소비에트 대회는 혁명 첫날에 생겨난 게 아니다. 봉기가 성공해서 소비에트 체제가 생겨난 게 아니라, 소비에트 체제에서 혁명의 정통성과 힘이 나온 것이다. 둘째,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용어는 10월 혁명 때는 쓰이지 않았고 나중에 스탈린주의가 지어 낸 용어다. 훨씬 더 핵심적인 문제점은 노동계급이 자기 해방을 성취한 이 놀라운 순간을, 위로부터 이뤄 낸 따분하기 짝이 없는 역사적 사건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에서 벌어진 살육은 차르 독재에 대한 대중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수많은 농민 징집병들이 전선의 아수라장 속에서 떼죽음당하고 국내에서는 기근이 심해졌다. 그러다 1917년 2월 차르 체제는 최후의 심판을 맞이한다. 국제 여성의 날에 식량 가격 문제로 파업을 벌인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 그 불씨가 됐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2월 혁명은 아래로부터, 자신의 혁명 조직들의 만류를 물리치고 시작됐다. 주도력은 노동계급의 가장 차별받고 천대받는 부위에서 자생적으로 나왔다. 바로 여성 섬유 노동자들이었다. ⋯ 식량 배급을 기다리는 줄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길어지자 결국 분노가 폭발했다. 약 9만 명에 이르는 남녀 노동자들이 그날 파업에 나섰다. 그들의 투지는 시위와 회합, 경찰과의 대치에서 선연하게 드러났다.
34 차르는 퇴위할 수밖에 없었고 임시 정부가 정권을 잡았다. 자유주의자들과 “온건”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임시 정부는 러시아를 의회 민주주의로 전환해서 근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2월 혁명을 거치면서 자신들의 민주적 조직을 만들어 냈다.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지역에 기반이 있었고 작업장의 노동자 대표나 주둔지의 병사 대표들로 구성됐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더 작은 소비에트들이 파견한 대표 1200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2월 혁명 이후에는 아예 그 도시를 통제했다. 레닌은 이런 상황을 “이원 권력”으로 묘사했다. 이것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는 “두 정부가 공존”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페트로그라드의 산업 노동자 절반”이 파업에 나서면서 “운동은 ⋯ 두 배로 불어났다.”. 35
하나는 ⋯ 부르주아지의 정부인 “임시 정부”다. 이 정부는 모든 권력 기구를 장악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그 정부와 나란히 공존하면서 “통제력을 행사하는” 정부인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다. 이 정부는 어떠한 국가 권력 기관도 장악하고 있지 않지만, 인민 절대 다수의 지지와 무장한 노동자들과 병사들에 직접 의존하고 있다
이런 이원 권력 상황은 극도로 불안정했고 무한정 지속될 수 없었다. 문제는 어느 권력이 승리하느냐였다. 처음에는 임시 정부와 노동자들의 열망이 일치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 지도자들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손을 떼지 않았고 사회 질서가 지나치게 뒤흔들리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제1차세계대전이라는 제국주의적 학살극에 계속 참여하는 한 노동자들의 “빵과 평화” 요구는 성취될 수 없었다.
36 볼셰비키 당은 노동계급이 농민과 동맹을 맺어 권력을 장악하고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를 닦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당은 새로운 구호 “빵, 평화, 토지”를 대중화시키고 이 요구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가져올 때에만 성취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2월 혁명 이후 노동자들은 급진화하기 시작했고 임시 정부와 전쟁은 금세 지지를 잃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소비에트가 “혁명적 통치 기관”이 될 가능성을 봤다.볼셰비키 당의 구실은 핵심적이었다. 볼셰비키 당은 노동계급 내에서 혁명적 정치를 주장하고 중요한 순간에 지도를 제공했다. 그러나 11월 7일의 봉기는 레닌이나 볼셰비키가 선포한 것이 아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사혁명위원회가 선포한 것이다. 최종 봉기가 일어나기 몇 주 전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이 기구를 구성했다. 당시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1917년 8월 볼셰비키 당에 입당한 트로츠키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의장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볼셰비키 소속 대표들과 좌파 농민 정당인 좌파 사회혁명당 당원들로 구성돼 있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일원인 파벨 라지미르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이 됐다. 군사혁명위원회가 당 조직이 아니라 소비에트의 기관임을 부각하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가 노동자들 사이에서 광범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봉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레닌이 스탈린을 낳지 않았다
흔히 자유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의 참상이 레닌주의 정치의 논리적 귀결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크게 두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됐다. 첫째, 경제가 더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로 노동자 혁명이 확산되지 못했다. 둘째, 혁명 직후에 일어난 내전으로 노동계급이 대거 사라졌다.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러시아에서 혁명이 살아남으려면 더 발전한 유럽 나라들로 혁명이 확산돼야 한다고 레닌과 트로츠키는 언제나 역설했다. 그래야만 러시아의 혁명도 자본주의적 경쟁에 짓눌리지 않고 사회주의 발전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제1차세계대전을 끝낸 반란의 물결을 촉발했고, 이 물결은 유럽의 또 다른 두 왕정,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노동자 혁명은 돌파구를 내지 못했다. 특히 노동자 운동이 가장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던 독일에서 노동자 혁명이 승리하지 못했다. 동시에, 영국을 포함한 14개 제국주의 열강이 러시아를 침공해 “갓 태어난 볼셰비즘을 목 졸라 죽이려” 했고, 옛 차르 체제를 복원하려 한 백군 편에서 같이 싸웠다. 트로츠키가 이끈 적군은 1922년 침략자들을 격퇴하고 백군을 분쇄했지만, 러시아 내전은 막대한 피해를 낳았다. 첫째, 내전으로 인해 혁명을 일궈 낸 노동계급이 섬멸되다시피 했다. 수많은 노동자가 전선에서 사망해 소비에트는 껍데기만 남았고 노동자 권력의 기반이 무너졌다. 둘째, 생산이 전쟁 전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러시아는 전반적인 사회 붕괴에 직면했다. 셋째, 혁명과 내전에서 승리하는 데서 핵심적인 요소였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38 그해 레닌은 러시아를 가리켜 “노동계급이 아니라 농민이 우세한” 나라에 있는 “관료적으로 일그러진 노동자 국가”라고 했다. 39 레닌과 트로츠키는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악조건을 버티며, 혁명이 세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런 바람이 무색하게도 신경제정책의 시기는 노동계급의 사회적 입지를 약화시키고 당의 관료화를 더 심화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볼셰비키는 점점 비대해지는 국가 관료 기구의 운영을 떠맡게 됐다. 1921년 혁명 물결이 사그라들자 볼셰비키는 공업 발전을 촉진하고 정부와 농민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해야 했다. 이 정책에 따라 “자유 시장”과 사적 생산을 허용하고 국유 기업을 “영리적으로” 운영하며 “상업적 노선에 따라 재편”했다.1920년대에 소비에트 관료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상이한 사회 계급들을 중재해야 했다. 특히, 노동자와 농민을 중재하는 게 중요했다. 그러려면 사회주의 혁명의 집산주의적 목표를 견지하는 동시에 농민의 개인주의적 열망도 충족시켜 줘야 했다. 1920년대에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에 헌신하려 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정작 소비에트 국가의 구조는 자주 적대하는 계급 세력들을 중재하고 반영했다.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쪽으로 압력을 가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제 노동계급은 가장 약하고 조직돼 있지 않은 세력이 됐기 때문이다.
이런 긴장은 볼셰비키 내 세 분파로 표현됐다. 그 세 분파는 레온 트로츠키가 이끄는 좌익반대파, 스탈린이 이끄는 “중간파,”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끈 “우파”였다. 좌익반대파는 볼셰비키의 혁명적 사회주의를 가장 충실하게 견지했다. 좌익반대파의 강령은 다음과 같은 정책을 주장했다. 소련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면 농촌·농업보다 도시·공업의 비중을 키워야 한다. 그러려면 부유한 농민들에게 불리한 계획과 세금을 도입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농민이 성장해 세력을 키우고 국가 관료를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만들 것이다. 한편, 공업화와 더불어 노동자 민주주의도 증진해야 한다. 이런 정책들로 노동계급의 영향력을 키우고 러시아를 사회주의 혁명의 등대로 유지시켜야 한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해도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을 마련하기에는 불충분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려면 경제가 더 발전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로 사회주의 혁명을 확산시키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이런 강령을 거부했다.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두 사회 세력이 신경제정책과 단절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는 “쿨라크”(부농), “네프맨”(신경제정책에서 득을 보며 성장한 사업가들)과 협력하는 데 익숙해진 당내 세력을 대표했다. “우파”는 사회주의 지향을 농민 경제의 필요에 적응시켰다. 이런 이해관계에 부응해 스탈린과 부하린은 마르크스주의와 정면 배치되는 “일국 사회주의” 사상을 정식화했다. 그리고 혁명이 선진 자본주의 나라에서 성공하지 못해 불가피하게 도입한 조처들을 오히려 미덕으로 내세우며, 자신들이 지도한다면 소련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스탈린 세력의 기반은 관료 자체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의 최고 관료인 서기장이었다. 관료 집단의 주된 목표는 사회의 질서와 응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규모와 비중은 1920년대에 걸쳐 커졌다. 1923년에 스탈린 세력은 당내 좌익반대파와 대결했다. 이듬해에 레닌이 사망하자 스탈린 세력은 개인 숭배를 부추기고 “레닌주의” 대 “트로츠키주의”라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 대립 구도를 만들어 냈다. 스탈린은 좌익반대파와의 대결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의 도움을 얻었다. 지노비예프는 당의 지도적 위치에 있었고 페트로그라드의 관료를 통제하고 있었다. 좌익반대파를 격퇴한 스탈린은 이제 지노비예프에게 칼끝을 돌려 중앙 관료의 지배력을 관철시키려 했다. 크리스 하먼은 《혁명은 어떻게 패배했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지노비예프가 몰락하자 권력은 스탈린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관료적 수단을 거침없이 휘두르며 당을 통제하고, 이론을 경시하고, 혁명의 전통에 적대감을 드러냈으며(이전에도 그가 그 전통에서 한 구실은 미미했다), 실제 혁명을 이끈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 모든 특징들은 당 기구가 갈수록 자의식적이 되고 있음을 완벽하게 입증했다. 스탈린은 새로운 반대파에 맞선 투쟁에서 이 모든 특징들을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스탈린 세력은 회의장에 지지자들을 잔뜩 심어 놓았고, 발언자들의 말을 고함 속에 묻히게 했다. 저명한 반대파 인사들은 외딴 지역의 한직을 맡기 일쑤였고, 옛 차르 체제의 장교들이 반대파 단체들을 비방하는 앞잡이 노릇을 했다. 마침내 1928년 스탈린은 차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혁명가들을 시베리아로 추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게 보면 이조차도 성에 차지 않았다. 스탈린은 로마노프 왕조도 하지 못한 일을 감행한다. 그것은 바로 1917년의 혁명 정당을 구성하고 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하는 것이었다.
41 이제 스탈린은 부하린이 이끄는 “우파”를 공격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공업화 전략으로 전환한 것은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게 한다는 좌익반대파의 목표를 채택한 것이 아니었다. 이 변화는 관료가 전체 소련 사회를 지배하게 됐음을 뜻했다. 1928년에 도입된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은 노동자들의 소비를 자본 축적의 필요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의 질적 변화를 상징했다. 42
1920년대 말이 되면 소련 관료는 나름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있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변모한다. 1928년, 소련 관료는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과 신경제정책에 내재된 약점, 농민들의 곡물 공급 거부 등의 압력에 대응해 공업화를 추진하게 된다.소련과 동구권은 “국가자본주의”였다
트로츠키와 그의 지지자들은 소련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가 됐다고 주장했다. 관료가 노동계급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았지만, 생산수단의 국유화라는 사회주의 사회의 토대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관료를 제거하려면 정치 혁명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43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소련이 동유럽을 점령했다. 동독,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에 세워진 소련의 위성국들은 “사회주의”와 “노동자 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와 달리 이곳에서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스탈린의 탱크로 사회주의를 위로부터 강제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인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사상은 뿌리째 흔들리게 된다.
트로츠키가 1940년에 암살당한 후에도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소련 사회에 대한 트로츠키의 혁명적인 사회주의적 비판을 정치의 근간으로 삼았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정세는 “정설”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커다란 문제를 제기했다.이런 문제에 부딪히자 몇몇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궤변을 내놓기도 했다. 스탈린주의 위성 국가들은 탄생할 때부터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라는 것이었다. 반면,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창립자 중 한 명인 토니 클리프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개발했다. 소련은 국가 관료가 지배계급이 되어 자본주의 기업과 상당히 유사하게 행동하는 국가자본주의 사회라고 클리프는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사회주의 호소’나 그들의 학생 조직 ‘마르크스주의 학생 연맹’ 같은 정설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소련이 ‘변질된 노동자 국가’라는 견해를 고수한다. 그러나 그러면 혁명적 사회주의의 본질을 둘러싼 근본적인 문제에서 흔들리게 된다.
클리프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론을 적용하려면 자본주의 체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두 축으로 분열돼 있다. 하나는 공장과 설비, 콜센터, 전산 장비, 인프라 등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다. 소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해 이윤을 차지한다. 자본가들이 그러는 것은 단지 자본가 개인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체제의 본성으로 인해 압력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주의하에서는 노동자의 일하는 능력(“노동력”)이 상품이 된다. 노동자들은 생계를 유지하려면 노동력을 팔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가치의 작은 일부만을 임금으로 받는다. 노동자가 만들어 낸 가치와 노동자가 받는 임금 사이의 간극 —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잉여 가치”다 — 이 바로 자본주의에서 이뤄지는 노동자 착취의 핵심이자 이윤의 바탕이다. 자본가들이 더 수익성 좋은 부문에 투자하면서 잉여 가치는 전체 사회의 이 부문 저 부문으로 흘러 다니게 된다. 자본가들의 목표는 여기서 자기가 차지하는 잉여 가치 몫을 키우는 것이다. 더 효율적인 기업일수록 더 많은 몫을 챙길 수 있다. 여기서 자본주의 사회의 두 번째 분열 축이 작동한다. 바로 경쟁하는 자본가들 사이의 분열이다. 경쟁은 개별 자본가들에게 강제력으로 작용한다. 경쟁의 압력 때문에 자본가들은 신기술과 더 효율적인 생산 방식에 투자해야 한다. 그래야 경쟁자를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마르크스의 표현처럼 “축적을 위한 축적, 생산을 위한 생산”이 이뤄진다.
첫 번째 분열 축, 즉 노동자와 생산수단 소유자 사이의 분열은 소련에서도 매우 뚜렷했다. 스탈린주의 관료 개개인들은 서방의 사적 자본가와 달리 형식적으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생산수단을 소유한 국가를 통제했다. 게다가 그들은 노동계급에 비해 특권적인 삶을 누렸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의 두 번째 분열 축, 즉 경쟁은 어떠한가? 사실, 스탈린주의 경제 내에서는 시장 경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경쟁을 통한 자본들의 상호 작용을 “가치법칙”이라고 일컬었다. 가치법칙은 자본주의 경제 내에서 생산의 조직과 노동 분업, 자원 할당을 결정한다. 소련만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소련에서는 가치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국가가 세운 5개년 계획들이 투자와 분업을 결정했다. 그러나 소련 경제를 자본주의 국가들의 국제적 경쟁 체제, 즉 제국주의라는 맥락 속에서 보면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다.
45 다른 국가와의 경쟁 때문에 국제적 수준에서 가치법칙은 소련과 동구권에서도 관철됐다. 크리스 하먼은 《좀비 자본주의》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소련은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에 매여 있었다. 1931년 스탈린은 “사업 경영자들의 임무”라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선진국보다 50~100년 정도 뒤처져 있다. 이 격차를 10년 안에 줄여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소련 내에서 생산의 조직은 상이한 사용가치(이러저러한 양의 노동과 물리적으로 이러저러한 특성을 갖는 상이한 원자재, 이러저러한 설비들)를 결합해 또 다른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식으로 이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배 관료에게 중요한 것은 이 사용가치들이 서구의 대기업들이 생산하는 상이한 사용가치들의 조합에 밀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소련에서 사용되는 노동의 양을 서구 기업들이 사용하는 노동과 비교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용어로 달리 말하면, 소련에서의 생산은 국제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가치법칙에 종속됐다.
1970년에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진실”이라는 뜻)가 인용한 당시 소련 지도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말은 관료가 경쟁적 축적의 압력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브레즈네프 동지는 두 세계 체제의 경제적 경쟁에 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 경쟁은 다양한 형태를 취합니다. 특정한 생산물을 생산하는 데서 우리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따라잡고 능가하는 과제를 많은 경우 성공적으로 수행했습니다 ⋯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비용과 노동을 들여서 생산하느냐입니다. ⋯ 우리 시대에 두 체제 사이의 무게 중심은 바로 이 영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제 좌파의 다수는 소련 경제가 자본주의보다 진보적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당원들뿐 아니라 많은 트로츠키주의자와 그 밖의 사회주의자들도 그랬다. 정설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지도자 에르네스트 만델은 1956년에 이렇게 주장했다.
소련에서는 한 계획에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고, 십 년이 지나고 또 십 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경제 성장 리듬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된 덕분에, 과거의 진보가 미래의 가능성을 짓누르는 일이 없었다. ⋯ 경제 성장 속도의 저하를 촉발하는 모든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 법칙이 제거됐다.
그러나 사실 동구권은 이 “발전 법칙”을 매우 뚜렷하게 경험했다. 소련 경제는 놀라운 경제 성장률을 달성했지만 서구 자본주의보다 역동성이 매우 떨어졌다. 근본적으로는 내적 성장이 국제적 자본 축적 압력을 극복하지 못했다. 국가자본주의 경제는 국민 경제에 의해 그어진 축적의 한계에 끊임없이 부딪혔다.
이런 문제는 냉전 때 벌어진 군비 경쟁으로 더 악화됐다. 미국보다 발전이 뒤처진 소련에서 군비 경쟁은 특히 경제에 부담을 줬고 다른 투자 결정을 어그러뜨렸다. 게다가 경제가 5개년 계획에 따라 조직되기는 했지만 이것이 “어느 정도 일정한 리듬”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계획이 진행되는 도중이나 다음 계획으로 넘어가는 사이에 관료가 과잉 축적 위기를 피하려고 갑작스럽게 투자를 다른 데로 돌리거나 사업을 중단시키면서 경제는 가다 서다를 거듭했다. 그 결과 경제는 기형적이 되고 부문 간 무질서와 불균형이 나타났다.
스탈린주의 국가들의 위기와 계급투쟁
계급 사회였던 소련과 동구권의 사회들은 서방과 마찬가지로 위기와 계급투쟁이 그 특징이었다. 1953년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1980~1981년 폴란드에서 노동자 반란이 일어났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에 러시아·우크라이나의 탄광과 벨라루스에서 일어난 파업은 소련의 붕괴를 촉발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저항에 나선 동구권 노동자들은 탄압을 받았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리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프라하의 봄’이 일어났을 때 소련은 그 나라들을 말 그대로 전면 침공했다. 이런 반란들의 근본 원인은 지배 관료가 자본 축적을 위해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공격한 데에 있었다. 1953년에 베를린 노동자들의 봉기가 일어나기 전 동독의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은 그런 공격의 동기를 어느 정도 시인하기도 했다. 예컨대, 새로운 작업 기준 — 실제로는 10퍼센트 임금 삭감을 뜻했다 — 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정당화했다. “노동 생산성을 끊임없이 개선해야만 축적을 달성할 수 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즈음 소련과 동구권은 경제 위기에 봉착했다. 이는 관료 내에서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분열을 낳았다. 보수파는 스탈린의 방법을 고수하려 했다. 그들은 개혁을 도입했다가 그들의 권력이 약화되고 국가자본주의 시스템의 안정성이 뒤흔들릴까 봐 두려워했다. 반면, 개혁파는 중공업이 아닌 새로운 분야로 투자를 돌리려 했다. 근본에서 이 분열은 자본 축적을 지속할 최선의 방법을 둘러싸고 지배계급 내 경쟁 분파들이 벌인 쟁투였다.
그러나 이런 지배층의 분열은 스탈린 체제에 맞선 가장 위대한 노동자 반란이 터져 나올 기회를 열어 줬다. 바로 1956년 헝가리 혁명이었다. 제2차세계대전 이후 헝가리에서는 마차시 라코시의 스탈린주의 정권이 노동자들을 쥐어짜서 중공업을 성장시켰다. 1953년에 헝가리의 산업 생산은 1949년보다 210퍼센트나 성장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은 20퍼센트 하락했다.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건설”의 비용을 떠안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자본 축적의 대가였다.
스탈린이 죽자 “개혁가” 니키타 흐루쇼프가 소련의 새 지도자가 됐다. 흐루쇼프는 라코시가 위기에 대처하기를 거부한다며 쫓아냈다. 그리고 기회주의적이게도 스탈린 “개인 숭배”를 비난했다. 이는 동유럽 지배자들 사이에서 극심한 이데올로기적 혼란을 낳았을 뿐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도 체제에 의문을 품게 됐다. 작업장에서 자신의 요구를 걸고 싸우던 헝가리 노동자들의 투쟁이 1956년 10월 23일 대중적 저항으로 분출했다.
당시 영국 공산당(CPGB)의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기자였던 피터 프라이어가 헝가리에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프라이어는 이 노동자들이 “반혁명 분자”라는 당의 공식 입장에 따라 헝가리 소식을 보도하러 그곳에 갔다. 그러나 그곳의 상황을 몸소 체험하면서 프라이어는 이것이 스탈린 체제에 맞선 노동자 혁명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토대로 《헝가리의 비극》이라는 빼어난 기록을 남겼다. 헝가리 노동자들은 국가에 맞서 자신만의 민주적 조직을 스스로 결성했다. 이 조직은 새로운 “혁명적 통치 기구”가 될 잠재력이 있었다. 프라이어는 죄르시(市)에 세워진 한 위원회를 이렇게 묘사한다.
이곳에 혁명이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이 남긴 책들이 아무리 귀중하다 한들 그 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명이 전 세계가 보는 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진정으로 살아 움직이는 혁명이었다. 당연히 온갖 결함과 모순과 문제가 있었지만 그 문제점들도 결국 삶 자체의 문제였다. 그들은 생겨난 지 48시간도 채 안 된 이 위원회의 의장과 부의장에게 나를 데려갔다. 가는 길에 벽에 걸린 레닌의 초상화가 눈에 띄었다. 레닌이 나에게 동의한다는 듯이 그 날카로운 눈을 찡긋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헝가리에서는 헝가리 정부와 노동자 평의회가 공존하는 “이원 권력” 상황이 형성됐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헝가리 노동자들은 부다페스트 소비에트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지만, 헝가리에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같은 구호를 제기할 혁명적 조직이 없었다. 결국 수많은 소련 탱크의 도움으로 헝가리 정부는 다시 통제력을 행사했다.
헝가리 혁명은 이렇게 분쇄됐지만 영국 공산당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 상당한 타격을 줬고 새로운 반스탈린주의적 좌파가 등장할 기회가 생겼다. 국제사회주의 정치 전통은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라는 핵심 구호를 따라 소련과 동구권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중국이나 쿠바처럼 사회주의를 자처하는 국가에서 일어나는 노동자 투쟁을 지지한다.
세계 혁명의 무덤을 판 스탈린
소련은 제국주의에 맞선 보루가 아니었다. 소련의 대외 정책을 규정한 것은 제국주의적 경쟁이었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대외 정책은 세계 곳곳의 노동자 투쟁과 해방 운동에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스탈린주의 정책은 거듭해서 혁명의 가능성을 좌절시켰다. 1925~1927년 중국, 1936~1938년 스페인, 1945년 그리스·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나라들, 1958~1959년 이라크, 1968년 프랑스에서 벌인 일이 그런 사례였다. 그 모든 잘못을 자세히 살펴보려면 끝이 없겠지만 스페인의 사례를 살펴보는 게 유익할 것이다.
1935년 이후 소련의 대외 정책은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자본주의 열강과 동맹을 맺으려는 열망을 가지고 수립됐다. 소련 정부를 따르는 공산당들은 사회민주주의 정당, 자유주의적인 자본가 정당들과 함께 “인민전선”을 결성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계급 간 연합 내에서 가장 오른쪽에 있는 세력을 겁먹게 할지도 모를 노동계급 행동을 일절 저지하라고 지시받았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 제임스 P 캐넌은 1954년에 이렇게 설명했다.
“일국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다른 모든 나라들의 자본주의와 “공존”한다는 반레닌주의적인 이론을 견지한 소련 관료는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보수·반혁명 세력이 됐다. 소련 관료에 의해 자본주의 국가의 공산당들은 혁명의 매개자에서 소련의 국경 수비대 내지 소련의 대외 정책에 복무하는 압력 단체로 전락했다.
스페인 내전 동안 스탈린의 인민전선 정책은 반파시즘 투쟁에 재앙적 결과를 몰고 왔다. 1936년 7월 17일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스페인 공화국의 인민전선 정부는 마비되다시피 했다. 이틀 동안 인민전선 정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고 심지어 프랑코와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모로코에서 본국으로 건너오려는 프랑코의 시도를 해군을 동원해 막지도 않았다. 스페인 군함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봉쇄했다가는 [그곳에 영토가 있는 — 번역자] 영국의 분노를 살 것이라며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지역에서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들고일어나 프랑코의 준동을 막아 냈다. 스페인 사회가 저항의 분위기에 휩싸였다. 많은 지역에서 공화국 정부의 힘이 와해되자 노동자들과 농민들은 일상을 조직하려고 자신들의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혁명적 과정이 가장 발전한 곳은 바르셀로나였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그곳을 방문한 영국의 사회주의자이자 작가인 조지 오웰은 이렇게 썼다. “노동계급이 권좌에 있는 도시에 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스페인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면 그 파장이 미국과 유럽의 지배계급에게도 미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소련은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을 수 없게 될 터였다. 스탈린은 무능한 온건파인 마누엘 아사냐를 계속 스페인 대통령 자리에 앉혀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스페인의 적들이 스페인을 공산주의 공화국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인민전선 — 공산당은 여기서 핵심적 구실을 했다 — 은 노동자와 농민의 저항을 자제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공산당 이론지의 편집자 헤수스 에르난데스 토마스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오로지 민주주의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열망으로만 움직인다.” 사용자들이 프랑코 지지를 선언하지만 않는다면 공산당은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에 반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주들이 프랑코 지지를 선언하지만 않는다면 공산당은 농민들의 토지 장악에 반대하겠다는 것이었다. 1937년 이후 스탈린이 공화국에 무기를 일부 제공하기 시작하면서 공산당은 인민전선 내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스탈린이 건넨 무기는 인민전선의 좌파적 반대자들을 공격하고 스페인 혁명을 진압하는 데에, 특히 1937년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난 반혁명적 쿠데타에 동원됐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파시즘을 강화시켰고 파시즘이 승리하는 데 도움이 됐다.
소련은 “반제국주의” 세력이 아니었다
오늘날 서방 제국주의에 비타협적인 사회주의자들 중 많은 수는 소련이 민족 해방 투쟁을 지원한 것을 고무적인 사례로 본다. 그러나 소련이 실제 벌인 일들을 보면 원칙 있는 식민지 해방 지지 세력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냉전은 미국과 소련의 제국주의적 충돌이었고, 두 초강대국과 그들이 이끄는 경쟁 블록은 세계 무대에서 서로 경쟁하면서 수많은 대리전을 벌였다. 이 시기 소련의 대외 정책은 이런 초강대국 간 경쟁에 의해 결정됐다. 예컨대 1947~1948년 시온주의 무장 세력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상대로 인종 청소를 벌이고 정착민 식민 국가인 이스라엘을 건국했을 때 스탈린은 이를 지지했다.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동맹국으로 얻기를 기대한 것이다. 소련의 신생 위성국 체코슬로바키아는 시온주의 무장 세력인 하가나에 굉장히 중요한 무기들을 공급했는데, 이 하가나는 머지않아 이스라엘 방위군의 핵심이 된다. 1948년 여름과 가을에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이스라엘 여단에 군사 훈련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가 이스라엘 국가를 구원했다. 정말로, 절대적으로 그렇다. 이 무기가 없었다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55 한때 식민 지배에 반대한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는 프랑스 공산당이 이런 수치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은 1930년대 인민전선 전략의 유산이기도 하다. 프랑스 공산당은 부르주아 정당과 협력하면서 “국익”과 애국주의의 언어로 자신의 정책을 표현했다.
1954년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맞서서 1962년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무장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적인 프랑스 공산당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을 결국 혼자 싸우게 내버려 뒀다. 1956년에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총리 기 몰레가 알제리의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 권한”을 가지게 됐을 때에도 프랑스 공산당은 이를 지지해 악명을 떨쳤다. 강경 스탈린주의자인 자크 뒤클로는 이를 정당화하면서 “프랑스와 알제리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유대를 존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중국은 대안이 아니다 일부 좌파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국가를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불철저한 반제국주의라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미국과 영국 등이 동남아시아에서 중국과의 긴장을 키우는 것에 반대한다는 취지에서 ‘냉전 반대’라는 단체가 새로 결성됐는데, 이들은 서방 제국주의의 전쟁 위협을 반대하는 것을 중심으로 운동을 결집시키기보다는 중국 국가를 비굴하게 찬양하는 쪽을 선호한다. ‘냉전 반대’ 행사에서 연사들은 영미권과 중국의 상호 “이해”와 “우호”를 증진해야 한다면서, 신장 자치구에서 벌어지는 위구르 무슬림 탄압을 축소한다. 한때 영국 공산당(CPGB)의 일꾼이었다가 지금은 중국 전문가가 된 마틴 자크는 좌파 뉴스 플랫폼 ‘노바라 미디어’에 출연해 “테러리즘” 문제를 운운하며 위구르 억압을 정당화했다. 서방이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에 동원된 이슬람 혐오적 수사를 고스란히 되풀이한 것이다.
물론 혁명가들은 서방 제국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사회주의자의 주된 과제는 자국 지배계급에 맞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국 같은 국가의 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
1949년 중국 혁명은 봉건 질서와 제국주의에 일격을 가했고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달리 중국 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라 민족 해방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라면 노동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를 운영하기 시작해야 한다. 중국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으로 행진해 들어올 때 노동자들은 거리에 늘어서서 그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그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어떠한 능동적 구실도 하지 않았다. 공산당 정권은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적이거나 “노동자 국가”라고 하기 어렵다. 노동자 평의회가 사회를 운영하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이 공장을 운영하거나 농민들이 토지를 통제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전혀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었다. 러시아 혁명은 중국의 노동자들과 일부 중간계급을 고무했다. 1920년대 초 마오쩌둥을 포함한 일단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중국 공산당을 창당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노동계급이 혁명적 변화에서 중심적 구실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노동계급은 그 수가 적었지만, 이를 훨씬 능가하는 사회적 힘을 지니고 있었다. 1917년의 러시아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변화를 주도할 잠재력이 있었다. 1925년 노동자 투쟁 물결이 중국을 휩쓸었을 때 노동자 혁명은 실현 가능한 전망으로 대두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배가 갈수록 강화되고 있던 소련 지도부는 중국 공산당 활동가들에게 재앙적인 전략을 하달했다. 군벌 장제스가 이끄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당은 중국에서 일어난 반란에서 자신들이 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종속돼야 한다고 지시했다. 장제스는 제국주의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지만, 장제스의 목표는 중국 자본가들을 건드리지 않고 중국을 현대 자본주의 국가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1927년 노동자 혁명의 가능성에 겁먹은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과 노동자 운동을 향해 총부리를 돌렸다. 수많은 활동가가 살해되거나 농촌으로 도망쳐야 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 공산당은 노동계급 투사들과 급진적 중간계급 지식인들의 당에서 농민 기반의 군사 조직으로 변모했다. 1930~1940년대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스탈린은 이러한 변화를 더 부추겼다. 한편, 마오쩌둥은 소련의 국가자본주의를 모델로 중국에서 근대 국가를 발전시키려 했다. 일단은 “주적”인 제국주의와 지주들을 패퇴시키고, 그런 다음에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을 쥐어짜는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 정책을 중국에서 재연하려 했다. 권력을 장악한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950~1960년대에 여러 차례 경제 성장에 시동을 걸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그 결과 막대한 인명이 희생됐다. 1957년에 시작된 “대약진” 기간에 농민들은 거대한 농촌인민공사로 조직돼, 불가능한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루 종일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 결과 1960년까지 기근으로 3000만 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해야 했다.
1970년대 말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농민 쥐어짜기를 그저 되풀이해서는 경제를 발전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높은 수준의 국가 계획과 정치적 통제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을 해외 투자에 개방하는 길을 택했다. 이 전략 덕분에 중국 지배자들은 높은 성장률을 달성하고 나름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관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에 봉착하기도 했다. 신자유주의 시기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불만에 불을 댕기고, 거대한 노동계급을 탄생시켰다. 중국 정부에 도전할 잠재력을 품은 이 사회 세력은 이미 최근 몇 년 동안 자신의 투쟁 능력을 선보인 바 있다. 이에 대응해 중국 지배자들은 중앙집권화와 한족 민족주의에 더 매달리게 됐다. 그에 따라 소수 민족 억압도 강화됐다. 위구르 무슬림에 대한 억압을 강화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 공산당이 혁명적 당이던 1920년대에 피억압 인민의 자결권을 지지한 것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노선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서방의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중국을 소련보다 더 나은 사회주의적 대안으로 그리는 것 또한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자본주의 지배자들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억압받는 소수자들이 자결권을 요구할 때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
이상의 논의들은 냉전 이래로 좌파 내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그저 학술적 목적에서 또는 맥락 없이 공연히 되짚어 본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할 사회주의적 대안의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모든 것이 자본 축적의 논리에 종속되는 자본주의 사회는 우리를 재앙으로 이끌고 있다. 기후 재앙, 전쟁과 핵 절멸의 위험, 코로나바이러스 위기, 세계경제 침체는 모두 이 체제의 다중적 위기에서 비롯하는 심각한 증세들이다. 스탈린주의를 둘러싼 물음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는 물음, 즉 사회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쟁취할 것이냐는 물음을 관통한다. 스탈린주의 정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무덤을 팠다. 소련 지배자들은 소련에서 억압적인 사회를 세우고 다른 나라에서 사회주의와 해방의 가능성을 사산시키는 데 거듭 일조했다.
우리에게는 스탈린주의 정치가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가 필요하다. 즉, 노동자 착취를 폐지하고 여성과 성소수자 차별, 인종차별을 뿌리째 뽑아 버릴 사회를 쟁취하고자 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사회주의는 노동계급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스스로 사회를 운영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회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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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Tengely-Evans, Tomáš International Socialism 173, (Posted on 10th January).
↩
- 이 글의 초고를 보고 논평해 준 조셉 추나라, 마틴 엠슨, 크리스티안 혹스버그, 찰리 킴버, 개러스 젠킨스, 실라 맥그리거, 토니 필립스에게 감사를 표한다. ↩
-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은 인상적인 시위 대오와 여름 학교 등을 통해 조직을 건설하는 데 집중하고 있는 듯하다. 옛 공산당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중요한 개혁주의적·보수적 세력으로 활동했는데, 청년공산주의자동맹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런 구실을 하고 있지는 않다. ↩
- https://communistpartyofgreatbritainhistory.wordpress.com/2021/10/18 ↩
- “탱키”는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의 저항을 소련이 탱크로 짓밟은 것을 지지한 공산당원들을 가리키는 멸칭이다. ↩
- https://issuu.com/communist_party/docs/september_2021_unity_ ↩
- McGregor, 2021. ↩
- 1954년 알제리인들이 무장 항쟁에 나섰을 때 프랑스 공산당은 “알제리인들의 정당한 해방 요구”를 프랑스가 들어줘야 한다는, 명목상으로는 반제국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 후 국민적 단결 요구에 굴복하는 “인민전선”적 입장으로 바뀌었다. — Adereth, 1986, p157. ↩
- Draper, 1966. ↩
- Liebknecht, 1915. ↩
- 이 수치들은 Cliff, 1974, pp118-119에 계산돼 있는 것이다. ↩
- Cliff, 1974, p121. ↩
- Cliff, 1974, p119. ↩
- Cliff, 1974, p121. ↩
- Trotsky, 1937. ↩
- Applebaum, 2003의 재인용. 이 수치들은 소련 내무인민위원회(NKVD)의 공식 문서에서 가져온 것이다. ↩
- Conquest, 1986. ↩
- Applebaum, 2003, p7 ↩
- Lenin, 1965a. ↩
- Cliff, 1974, pp122-123. ↩
- Cliff, 1974, pp125-130. ↩
- Cliff, 1974, p13. ↩
- Cliff, 1974, p13. ↩
- Binns, 1975. ↩
- Cliff, 1974 p20. ↩
- Cox, 2021. ↩
- McGregor, 2021. ↩
- 이 짧은 글에서는 국가자본주의에서 가족이 한 구실과,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는지를 자세히 다룰 수 없다. 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알려면 McGregor, 2021를 보시오. ↩
- McGregor, 2021. ↩
- Trotsky, 1930. ↩
- 일부 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이미 장악했고, 다른 노동자들은 1918년 1월에 발표된 “피착취 노동 대중의 권리 선언”으로 통제권을 얻었다. ↩
- Reed, 1919, p27. ↩
- Orr, 2015, p220. ↩
- https://twitter.com/challengeycl/status/1457295479159631874 ↩
- Trotsky, 1930. ↩
- Lenin, 1964. ↩
- Lenin, 1974, p402. ↩
- 이 과정에 대한 더 완전한 설명은 Harman, 1967에 있다. ↩
- Lenin, 1965b, p184. ↩
- Binns and Hallas, 1976. ↩
- Harman, 1967. ↩
- 1927~1928년에 일어난 일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을 보려면 Harman, 1988를 보시오. ↩
- Cliff, 1974, pp152-154. ↩
- ‘변질된 노동자 국가’와 트로츠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을 알려면 Hallas, 1988를 보시오. [원문의 참고 문헌에는 누락돼 있다. 아마 Hallas, Duncan, 1988, “Trotsky’s Heritage - On the fiftieth anniversary of the foundation of the Fourth International”, International Socialism 2:40(Autumn)을 가리키는 듯하다. — 번역자] ↩
- Marx, 1986, p558. ↩
- Stalin, 1954. ↩
- Harman, 2009, p175. ↩
- Pravda (24 April 1970), Harman 2009, p176에서 재인용. ↩
- Harman, 2009, p202. ↩
- Harman, 1988, p64. ↩
- Fryer, 1956. ↩
- Cannon, 1954. ↩
- Hore, 1990. ↩
- Hore, 1990. ↩
- Zbavitelová, 2020. ↩
- Duclos, 1956. ↩
- Gilbert, 2021. 노바라 미디어의 인터뷰는 www.youtube.com/watch?v=6meTW-qafXs에서 볼 수 있다. ↩
- 38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수치는 공식 통계에서 가져온 것이다. Chang and Halliday, 2007, pp533-5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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