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분열: 사회주의 운동과 제1차세계대전 *
1 이들 중에는 일주일도 채 전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이 후원하는 평화 촉구 집회에 함께 참가한 의원들도 있었다. 이 의원들이 처음에 반전 태도를 취한 것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채택하고 1912년 바젤 대회에서 재확인한 제2인터내셔널 정책을 따른 것이었다. 이 정책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을 “막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뿐 아니라, “전쟁이 낳은 경제적·정치적 위기를 이용해 대중행동을 고취하고 그럼으로써 자본가 계급 지배의 몰락을 앞당겨”야 했다. 2 이런 지침이 만장일치로 통과됐는데도, 8월 첫째 주에 자국 정부의 전쟁 노력을 지지한 것은 프랑스와 독일의 의원들만이 아니었다. 이틀 전 벨기에에서도 사회주의자 의원들이 자국 정부를 지지했고, 얼마 후 영국에서도 노동당 의원들이 자국 정부를 지지했다. 비록 영국 노동당의 경우 그전에 전쟁에 반대한 당대표 램지 맥도널드를 사임시켜야 했지만 말이다. 한편, 표결 기회 자체가 없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 호전적인 글들을 쏟아 냈다. 3
1914년 8월 4일 독일 제국의회와 프랑스 하원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 의원들이 자국의 전쟁 공채 발행에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이렇게 애국주의로 급격히 쏠리는 데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월 3일 독일 사민당 의원단의 비공개 회의에서는 92명 중 14명이 전쟁 공채 발행에 반대했다. 그러나 당의 규율에 따라 이들은 제국의회 의사당에서 이견을 드러낼 수 없었다. 아이러니이게도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민당의 전쟁 지지 성명을 낭독한 것은 그 14명 중 한 명인 휴고 하제였다. 불행하게도, 전쟁 반대 목소리를 이런 식으로 침묵시키는 일이 제2인터내셔널 내에서 숱하게 벌어졌다. 교전국 사회주의 세력 중에서 규모가 작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조직을 제외하면, 대중적 기반이 있는 정당들 중 전쟁에 반대한 정당은 러시아 볼셰비키당이 유일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명백한 중심이었던 독일 사민당 지도부는 전쟁 공채 발행을 지지하는 것이 권력의 성소에 가까워지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다고 봤다. 즉, 그들은 찬성표, 그것도 전원 찬성표를 통해 사민당이 집권 세력이 될 만한 ‘책임성 있는’ 정당으로 인정받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이런 기대가 실현됐는지와 관계없이 그 결정은 제2인터내셔널을 끝장냈고, 동시대인들은 즉각 그 결정이 “사회주의 운동사의 중대한 전환점”임을 인식할 수 있었다.
5 마르크스는 운동이 심화되고 확대될수록 노동계급 내에서 혁명적 의식이 어느 정도는 자생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6
그런데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한 것은 단지 한 세대 사회주의자들의 희망을 저버린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것은 카를 마르크스 때부터 전해져 내려온 사회주의자들의 조직 방식이 파산했음을 뜻했다. 1889년에 출범한 제2인터내셔널은 마르크스가 1864년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를 창립하면서 제시한 선례를 따르려 했다. 마르크스는 가능한 한 운동의 광범한 단결을 도모하는 규약을 작성해 당시 상이한 국적과 상이한 정치 전통에 속한 좌파들을 포괄하려 했다. 그 규약은 목적한 바를 대체로 달성했다.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운동 내 아나키스트들의 비판에 맞서 혁명가들은 체제에 맞선 투쟁과 체제 내 개혁을 위한 투쟁을 대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일련의 개혁주의적 요구들(노동 시간 단축과 아동 노동 제한 등)을 제시했다. 이런 요구들은 그 자체로도 좋은 것이었지만, 개혁을 위한 투쟁과 혁명을 위한 투쟁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7 이런 공백은 개혁주의가 아직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 잡지 못한 당시 상황에 비춰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제2인터내셔널이 이런 공백을 남겨 둔 채 마르크스의 정치를 실천에 조야하게 적용한 결과는 결국 재앙적이었다. 당시에는 영국 노동당식 개혁주의가 성장하고, 특히 노동조합 상층 관료를 통해 사회 시스템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단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치를 갈수록 개혁주의적이 돼 가는 운동 내 상층 관료의 실천에 서서히 종속시켰고, 자신들은 마르크스의 선례를 따르고 있다는 식으로 이를 정당화했다.
이러한 전망에 담긴 숙명론적 낙관은 마르크스의 정치에 존재하는 중요한 결함을 명확하게 보여 준다. 그것은 노동계급 개혁주의에 관한 일관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8 레닌은 새 인터내셔널을 세우려는 시도를 지지하면서 제2인터내셔널의 몰락을 정치적으로 날카롭게 분석했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가 “기회주의에 압도돼” 노동계급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제2인터내셔널은 죽었다 … 제3인터내셔널 만세.” 9
노동운동 내 상층 관료에 스스로를 얽어맨 마르크스주의 운동 내 경향이 1914년의 사건들로 인해 혹독한 시험대에 오르는 동안, 이러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고 가장 일관되게 노력한 사람은 레닌이었다. 전쟁 공채 발행 지지가 운동의 단결을 “산산조각 내자” 레닌은 끝장난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할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의 창설을 촉구하는 움직임에 합류했다.10 이것은 레닌의 프로젝트를 오해한 것이다. 물론, 앤더슨의 지적처럼 사회민주당들의 전쟁 공채 발행 지지를 비판한 사람들 사이에는 주의주의적인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리의 지적처럼 1914년 이전과 이후의 레닌 저작에는 연속성이 있다. 그러나 둘의 설명은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에 어떤 참신한 기여를 했는지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잘 알기 위해 레닌은 세 가지 방면에서 탐구를 수행했다.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노동계급 개혁주의의 물질적 기반을 분석하고,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분석을 재발굴하는 동시에, 이 모든 분석의 기초로서 헤겔의 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르크스 방법론의 뿌리를 연구했다. 한마디로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과 실천을 뿌리부터 가지까지 철저하게 비판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했다. 페리 앤더슨은 이런 혁신을 마치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을 주의주의적으로 고스란히 뒤집어 놓은 것처럼 설명한다. 반대로 라스 리는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을 러시아 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11 룩셈부르크,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숙명론과 결별하면서도 주의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12 그럴 수 있었던 이유 하나는 사회주의자의 실천을 마르크스가 시도한 방식대로 개념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즉, 레닌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일면적인 행위 개념을 극복하기 위해 더 강력한 실천 개념으로 두 접근법을 종합한 마르크스의 접근법을 되살리려 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과 급진적 수사로 정치적 수동성을 은폐하는 경향 모두에 대한 실천적인 비판의 차원으로 이론을 끌어올렸다. 근본적으로,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혁신에 포함된 제국주의 이론은 제국주의를 내적 모순에 휩싸인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로 제시함으로써 당시 정치적으로 가능한 선택(즉, 사회주의냐 전쟁이냐)을 규명하려는 것이었다. 13 나아가 레닌은 사회주의자들이 더 나은 사회를 실현할 기회를 잡으려면 개혁주의로부터 독립적인 조직을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글에서는 먼저 제2인터내셔널식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간략히 살펴보고, 레닌이 제시한 대안의 강점과 약점을 살펴보겠다.
레닌의 원숙한 사상은 룩셈부르크가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에 반대해 인류가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갈림길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대안을 제시하려 한 것과 궤를 같이하고, 그 대안을 대폭 발전시킨 것이었다.1914년: 노동계급의 배신?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고 역사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전쟁에 대해 취했던 태도를 다룬 책을 쓴 S F 키신은 제2인터내셔널이 1914년에 노동계급을 배신했다는 레닌의 비판에 정면 도전한다. 키신은 “프랑스 사회당이 전쟁을 지지하고 연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전적으로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하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키신은 러시아가 군사 행동에 나서자 독일이 프랑스에 중립을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중립의 증표로 툴과 베르됭의 요새를 넘기라고까지 요구했다는 점을 든다. 또, 키신은 프랑스 정부가 전쟁 직전까지 어떠한 호전적 행보도 보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키신이 독일 사민당의 전쟁 공채 발행 찬성에는 비판적이었을 것이라고 독자들은 짐작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키신은 독일 사민당 의원들의 투표에도 나름 타당한 근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뿐이라는 독일 정부의 주장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키신은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권위를 빌려서 이런 입장을 옹호한 것을 수긍하며 인용한다.
15 카우츠키는 《사회주의와 전쟁》(1937)에서 자신이 1914년에 한 구실을 정당화하면서 제1차세계대전 개전 무렵에 폈던 주장을 발전시킨다. 당시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취한 방법”은 “무조건 자국 정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게 아니라 “어떤 정책이 전쟁을 낳았고, 그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서 어떤 목적을 이루려 하는지를 자세히 파헤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의 올바른 태도는 어느 나라가 전쟁을 “도발”했고 어느 나라가 “피해국”인지를 묻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키신도 여기에 동의하며 “실제로 이런 접근법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전쟁에서 누구의 승리가 더 나은지를 판단했다”고 논평한다. 16
제2인터내셔널의 최고 이론가이자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린17 옵트는 1922년 헤이그 국제 평화 회의에 파견할 소련 대표들에게 레닌 자신이 했던 조언을 언급하며 레닌을 비판하기도 한다. 언뜻 보면 당시 레닌은 1914년에 했던 판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말을 했다. “노동자 조직들은, 심지어 혁명적 조직을 자처하는 조직들도 실제로 임박한 전쟁 앞에서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18
키신이 이런 식으로 자국의 전쟁 노력 지지에 대한 레닌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 운동 내에서 갖는 권위에 도전장을 내민다면, 제2인터내셔널의 분열에 관한 조르주 옵트의 학계 표준 역사는 1914년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가 노동자 운동을 배신했다는 레닌의 비판이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옵트는 1914년 전쟁이 현실이 되자 좌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레닌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전쟁이 현실이 되자 다수가 이를 숙명으로 여기고 체념한 것을 그들의 개혁주의 탓으로 돌리는 설명은 지나치게 단순하다고 옵트는 주장한다. 전쟁에 반대한 소수의 혁명가들도 전쟁을 막을 구체적 제안을 내놓지 못했다는 것이다.19 어떤 점에서 키신과 옵트는 이런 견해를 공유한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거기에 도달한다. 키신의 경우 이런 가정은 전쟁 공채 발행을 지지한 카우츠키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 것에서 비롯한다. 옵트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옵트는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의 무기력과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인정하지만, 혁명적 좌파 역시 실패하기는 마찬가지였다면서 제2인터내셔널의 무력함을 “오로지” 개혁주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20
더 최근에는 케빈 캘러핸이 레닌 비판에 가세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노동계급을 배신했다는 레닌의 주장은 1914년에 인터내셔널이 혁명적 선동을 했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는 잘못된 가정에 근거한 것이라고 그는 비판했다. 캘러핸은 제2인터내셔널이 혁명적 기구가 아닌데 혁명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한다.1914년 당시 혁명적 좌파에 대한 옵트의 묘사는 어느 정도 진실이다. 그러나 옵트는 제1차세계대전까지의 사건들로 분석을 한정해서 왜곡된 묘사를 한다. 실로 혁명적 좌파는 갑작스러운 전쟁에 한동안 당혹했고 전쟁을 막을 구체적인 방안을 거의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그들이 1914년 이전까지 혁명적 미사여구에 경의를 표하지만 실상은 개혁주의적인 조직에 스스로를 얽어맨 결과였다. 1914년의 사건들은 혁명적 좌파가 개혁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현실을 드러냈지만, 그 후 혁명적 좌파는 그 경험에 반응해 제2인터내셔널의 우파 지도부와 스스로를 차별화했다. 더 중요하게는 기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한계를 배우고 사회주의 정치 실천에 대한 대안적인 모델을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
21 두 운동 조류는 이론적으로 매우 거리가 멀었지만 독일의 정치 상황 때문에 서로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독일 국가가 워낙 강력했기에 혁명적 포부를 누그러뜨려야 했다. 한편, 억압이 심하고 노동자들이 정치 무대에서 배제된 탓에 라살 지지자들의 개혁주의는 전투적인 형태를 띠게 됐다. 22 이 신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제1인터내셔널이 붕괴한 후에도 유럽 노동자 운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수단이 됐다. 1889년 독일 사민당은 제2인터내셔널을 창설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했고 1914년까지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 정치적·이론적 헤게모니를 쥐었다. 23
독일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 단체와 라살을 지지하는 단체가 1875년 고타 대회에서 통합을 결정하면서 창당됐다.24 실제로 마르크스는 독일의 가장 가까운 동지들에게 보내는 서한 형태로 쓴 ‘고타 강령 비판’에서 이렇게 썼다. “통합 대회 이후 엥겔스와 나는 거기서 논의된 강령이 우리의 입장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밝히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할 것이네.” 25 흥미롭게도 얼마 후 쓴 서한에서 엥겔스는 왜 자신과 마르크스가 고타 강령 채택 이후에도 신당과 결별하는 것이 유용하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설명한다. 엥겔스는 부르주아 언론들이 그 강령을 자신과 마르크스의 견해가 담긴 것으로 풀이했다고 지적한다. 더 중요하게는 노동자들도 그렇게 이해했다고 썼다. “오직 이런 상황 때문에 마르크스와 나는 그런 강령과 거리를 두는 입장을 공표하지 않은 것이네.” 26
그러나 독일 사민당은 창당된 순간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마르크스가 죽은 후에는 엥겔스 혼자)는 1875년 고타 통합 대회에서 채택된 신당의 강령과 1891년 에르푸르트 당대회에서 채택된 개정 강령을 모두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을 비판하면서, 그 강령이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 문제를 회피하는 것에서 라살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고 지적했다. 마르크스는 독일 사민당이 이 문제를 회피함으로써 자유주의로 진화하는 길을 열어 놓았다고 비판했다.27 비스마르크가 권위주의를 급격히 강화한 시기는 엥겔스가 《반뒤링론》(1878)을 발표한 시기와 일치한다. 엥겔스는 이 책을 통해 당내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에 뛰어들고 당의 많은 핵심 활동가들을 마르크스주의로 당기는 데 성공했다. 28 이런 과정 끝에 1891년 에르푸르트 당대회에서는 당의 강령이 개정됐다.
이런 상황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강령에 결함이 있음에도 마르크스주의 경향이 당내에서 전반적인 우위를 통해 당의 헤게모니를 잡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제로 중기적으로는 사태가 정확히 그렇게 흘러갔다. 독일 사민당의 역사를 탁월하게 다룬 저서에서 칼 쇼스케가 지적하듯이,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는 독일 사민당이 “마르크스주의를 갈수록 흠뻑 받아들이게 된” 1878~1890년 동안 사회주의적 좌파에 “분노를 터뜨렸다.”29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 언론에서 기회주의가 갈수록 강력해지고 있다”고 경고하며, 강령 작성자들의 의무는 사회주의로의 전환이 오로지 “강제력”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독일 노동자들에게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30 그리고 독일 사민당이 이 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당은 “길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엥겔스는 에르푸르트 강령을 고타 강령보다 개선된 것으로 보고 환영했지만, 국가권력 문제를 과학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마르크스의 이전 비판을 되풀이했다. “이 초안에 담긴 정치적 요구에는 중대한 결함이 하나 있네. 반드시 말해야 하는 바가 정확히 빠져 있다는 것이네.”지금의 일시적인 이득을 쫓느라 더 중요하고 주된 문제를 잊고, 나중의 결과와 상관없이 당장의 성공에 골몰하고, 운동의 현재를 위해 이렇게 운동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것은 그 의도가 “진실한” 것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기회주의이며, “진실한” 기회주의야말로 어쩌면 가장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
32 “우리 당과 노동계급은 민주적 공화국의 형태로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구체적 형태이기도 하다.” 33
이렇게 엥겔스는 자신과 마르크스가 1875년에 했던 주장을 1891년에도 되풀이하면서, 사회주의가 파리 코뮌과 같은 혁명적 정권하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동지들에게 다시금 일깨워 주려 했다. 쇼스케는 현실에서 에르푸르트 강령이 서로 연관된 두 가지 메시지를 당원들에게 줬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혁명적 좌파에게 주는 메시지로 “참을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혁주의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은 우선적인 과제다. 개혁을 추구하라. 그러나 개혁을 얻으려면 싸워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리고 새로운 이상 사회를 향한 신념은 개혁을 위한 투쟁에서 무기가 될 수 있다. 그런 신념을 무시하지 마라.” 이런 타협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한편으로는 독일 국가가 노동계급을 한동안 “불가촉천민”으로 취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성장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이 나아지면서 혁명이 당면 정치 의제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쇼스케는 지적한다.35 갈수록 강력해지는 이 기반에서 오는 개혁주의의 영향력은 에르푸르트 당대회가 마르크스주의를 당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이게도 독일 사민당의 실천을 사실상 지배하던 개혁주의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한 것은 에르푸르트 강령 작성자의 한 명인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었다.
이런 상황 덕분에 독일 사민당 내 여러 분파들은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상당 기간 단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4년에 폭발한 긴장들의 근원은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1890년대 중반의 호황은 노동조합 운동이 크게 성장하는 배경이 됐고, 노동조합 운동의 성장은 당내 개혁주의의 사회적 기반을 강화시켰다.36 에르푸르트 강령의 또 다른 저자인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논박하며, 베른슈타인이 진짜 마르크스주의를 희화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37 카우츠키의 비판은 몇 가지 중요한 논박을 하지만, 마르크스가 “실제로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초점을 둔다. 그래서 베른슈타인의 사상이 핵심적으로 어디서 힘을 얻는지를 짚지 못한다. 그 힘은 어떤 이론적 장점이 아니라(그런 것은 별로 없었다) 당내에서 성장하고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개혁주의 경향을 대변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는 베른슈타인의 핵심 주장은 현대의 경제 추세에서 마르크스의 위기론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 마르크스의 혁명적 정치가 쓸모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카우츠키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카우츠키는 당대회에서 수정주의에 맞서 형식적 승리를 거둔 것에 만족했다. 그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개혁주의적 사상이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노동조합 운동 지도부 모두에서 갈수록 지배적이 됐는데도 말이다. 이런 세력 균형 변화는 수정주의가 1899년, 1901년, 1903년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패배한 직후부터 뚜렷해졌다. 수정주의는 특히 노동조합 관료를 통해 구현됐고 당대회에서 패배했음에도 꾸준히 강력해졌다.39 1875년 이후에는 독일 사민당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했다. 당 지도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노동조합 운동의 정치적 부문과 경제적 부문의 상호 자율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893년 쾰른 당대회에서 당의 우위를 사실상 인정했다. 이 시기는 노동조합원 수와 당에 대한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가장 적은 시기였다. 그 후 노동조합은 규모가 커지면서 당에 대한 영향력을 키웠다. 예를 들어, 1893년 제국의회에서 독일 사민당 의원 중 노동조합 간부 출신의 비율은 11.6퍼센트에 불과했지만, 1912년에는 32.7퍼센트로 늘어났다. 이 시기 동안 노동조합도 점점 관료화됐다. 1899~1914년 사이에 독일 “중앙노동조합”의 전업 상근 간부는 180명에서 2867명으로 늘어났다. 조합원 수도 증가했지만, 상근 간부들의 기구는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더 중요하게는 노동조합이 갈수록 관료화되면서 노동조합 지도부는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갈수록 보수적인 구실을 하는 경향을 보였다. 40
1860년대 이전 독일에는 사실상 노동조합이 없었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처음에 독일 마르크스주의자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했고,41 카우츠키는 좌파가 승리했다고 자축했지만, 이 결정은 사실 “노동조합 관료의 역사적 승리였고 그들의 시위에 밀린 당의 후퇴”였다. 42 이 시점부터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는 수동성을 매우 선명하게 드러냈다고 쇼스케는 지적한다. 그의 지적처럼 카우츠키는 당대회에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이 채택되는 동안 독일 노동자 운동의 진정한 지도력이 갈수록 개혁주의적인 노동조합·당 관료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뒀다. 43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당 사이의 긴장은 대중 파업을 둘러싼 논쟁으로 첨예하게 나타났다. 1905년 예나 당대회에서는 좌파가 승리를 거뒀고, 대중 파업을 활용하는 정책이 공식적으로 채택됐다. 그러나 이 정책은 얼마 전 노동조합들이 쾰른에서 연 회의에서 채택한 성명서와 반대되는 것이었다. 이 대회는 대중 파업은 논의조차 부칠 수 없다는 것에 합의했다. 두 결정 사이의 모순은 1906년 만하임 당대회에서 공식 해소됐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당과 노동조합 사이의 골을 메운다는 이 결정은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수정주의적인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헤게모니가 증대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즉, 쾰른 결의와 예나 결의가 그냥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선언한 것이었다.44 그리고 수정주의의 본질은 여러 면에서 노동조합 기층 조합원들과 동떨어진 조건에서 사는 노동조합 관료의 이해관계를 이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룩셈부르크는 지적했다. 45
수정주의 논쟁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는 훨씬 예리했다. 룩셈부르크는 수정주의가 단지 경제 성장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이론적 오류가 아니라, 근대 노동운동 기구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실제로 룩셈부르크는 자본주의의 특징인 정치와 경제의 분리가 노동조합 운동 내에서 의회주의적 사회주의와 소박한 노동조합주의의 분업으로 반영된다고 강조했다.46 마시모 살바도리도 룩셈부르크가 매우 예리하게 인식한 간극을 카우츠키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그것은 “사회주의라는 목표와 보수적이고 온건한 관료층에 의해 갈수록 철저히 관리되는 수단 사이의 간극이었다. 그리고 그 관료층은 이제 지배 체제의 틀 안에서 조직을 공고히 다지는 것만을 중시했다.” 47
쇼스케도 노동조합 관료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분석을 재확인시켜 준다. “1906~1909년에 사회주의 운동을 분열시킨 주요 쟁점들을 보면, 노동조합이 목소리를 낸 모든 쟁점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이 우세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룩셈부르크와 마찬가지로 쇼스케도 노동조합 관료의 보수적 구실과 구조로 이들의 행보를 설명한다. 혁명적 미사여구와 노동조합 관료와의 연계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가 갈수록 개혁주의적이 된 반면,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운동 내 보수층의 구실을 꿰뚫어 본 덕분에 개혁주의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최종 행보는 그랬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몇 년 동안은 카우츠키도 노동조합 지도부의 보수성을 더 문제 삼았다. 그러나 이런 급진화의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1910년 무렵 카우츠키는 노동조합과의 관계를 이전으로 되돌렸다.가권력을 파괴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49
독일 사민당 내 수정주의 분파의 압력에 카우츠키가 후퇴하는 경향을 보인 것의 합리적 핵심은 노동계급 운동 내에서 단결을 성취하고 유지하려 한 마르크스의 시도에 뿌리가 있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마르크스라면 동의하지 않았을 정도로 멀리 나아갔다. 그랬던 이유 하나는 고타 강령과 에르푸르트 강령에 담긴 정치, 즉 국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한다는 정치에 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비판을 카우츠키가 결코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당 관료가 점점 개혁주의에 유리해지는 조건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이런 이론적 약점은 중대한 문제가 됐다. 그러한 조건에서 관료층은 자신의 세력과 국가와의 연계를 키웠다. 카우츠키는 이 과정을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해결책의 일부로 봤다. 실제로 카우츠키가 공표하는 정치적 입장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1912년에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벌이는 정치 투쟁의 목표는 지금까지 그 투쟁이 추구해 온 바에서 달라지지 않았다. 즉, 의회에서 다수가 돼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의회를 국가의 지도적 위치로 격상시키는 것이다. 국 결과적으로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는 의회주의 정치의 급진적 은폐물이 됐다. 이 과정은 1910년 독일에서 거세지는 파업 물결이 보통 선거권을 요구하는 정치 투쟁과 맞물리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카우츠키는 대중운동을 억제하는 데 온 힘을 쏟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편에 섰고, 프로이센에서 보통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을 벌이자고 촉구하는 룩셈부르크의 글을 발표조차 하지 못하게 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 이때부터 룩셈부르크는 카우츠키와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그리고 당의 우경화에 타협하는 카우츠키의 태도는 카우츠키식 마르크스주의와 수정주의가 실천에서 수렴함을 보여 준다고 룩셈부르크는 지적했다.51 또, 그런 주장은 제국주의에 대한 카우츠키 자신의 이해를 뒤집는 것이기도 하다. 1914년 카우츠키는 어느 쪽이 침략국이냐를 가리는 방식으로 제국주의를 분석해서 자신의 실천을 정당화했지만, 1907년과 1909년에 그는 이런 접근법을 “낡은 것”이라며 “거부했다.” 52 쇼스케에 따르면, 당시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 카를 라데크는 카우츠키가 제1차세계대전을 몇 해 앞두고 애초에 자신이 낡아 빠졌다고 평가한 이론으로 되돌아간 간 이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했다.” 그것은 “제국주의의 성격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기존 분석으로는 ‘적을 잠식해 들어가는’ 페이비언식 전략을 뒷받침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53 살바도리도 이렇게 지적한다. “카우츠키의 분석에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이미 잘 입증된’ 방식으로 계속 전진할 수 있음을 보이려는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54
룩셈부르크의 지적은 거듭 적중했다.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를 의회 정치에 종속시킨 것은 대중 파업에 대한 반대뿐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전쟁을 평가할 때는 어느 국가가 전쟁을 “먼저 도발했고” 어느 국가가 그 “피해자”인지를 먼저 물었다는 카우츠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그 주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초기에 전쟁에 관해 쓴 글들을 곡해한 것에 기초한 것인 데다, 두 사람이 1870년 프로이센이 프랑스를 패배시키는 것을 보며 유럽에서 일어나는 전쟁에 대한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55 그리고 이런 주장은 “초제국주의” 이론으로 발전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더 효과적으로 착취하기 위해 “제국주의자들의 신성 동맹”을 맺어 “군비 경쟁을 중단”할 이해관계가 있었다. 56 전쟁이 닥쳐오는 시점에 카우츠키는 이런 이론으로 전쟁을 낳는 진정한 요인들을 흐리는 공상적인 대외 정책에 힘을 실어 주는 한편, 전쟁을 막을 잠재력이 있는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누그러뜨려 온 당내 세력을 지지했다.
제2인터내셔널 내의 혁명가들은 제1차세계대전 개전 몇 년 전부터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환상을 갖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카우츠키는 제국의회 의원들이 집중하는 군축 제안 선전을 자신의 지적 권위로 뒷받침해 주면서, 군축이 심지어 “지배계급” 내에서도 널리 지지받는다는 근거를 제시했다.57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인터내셔널은 전시에는 기능할 수 없는 기구이다. 인터내셔널은 본질적으로 평화 시기의 기구이다.” 이런 주장은 그전에 카우츠키가 늘어놓은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1909년 카우츠키는 “전쟁은 혁명을 낳는다”고 했지만, 혁명을 위한 활동을 조직함으로써 그 주장을 실천으로 뒷받침하지 않았기에 그 말은 무의미한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58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이것은 개인적 일탈이 아니었다. 카우츠키가 견지한 의회주의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노동조합 관료와의 연계를 통해 카우츠키의 정치는 자본주의 국가에 매이게 됐다. 실제로 1914년 8월 카우츠키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당의 단결을 유지하고자 하면서 빠르게 더 우경화했다. 당내 우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할 것임을 깨닫자 카우츠키는 사민당 의원들이 기권표를 던져야 한다는 주장을 철회했고, 그 뒤에는 사민당이 모든 제국주의를 규탄해야 한다는 입장도 거둬들였다. 결국 카우츠키는 그저 전쟁을 방어적 조처라고 옹호했다.59 R 크레이그 네이션이 옳게 지적했듯이 룩셈부르크는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관해 엄중한 경고를 했지만, 이는 “결코 포괄적인 정치적 도전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60 실제로 1914년 이전 수십 년 사이에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제기된 가장 중대한 정치적 도전은 룩셈부르크와 좌파로부터 오지 않았다. 그것은 베른슈타인과 운동 내 우파로부터 제기됐다.
노동조합 관료가 본성적으로 갖게 되는 보수성을 비판한 룩셈부르크는 이런 우경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전쟁이 닥치자 무장 해제 상태가 됐다. 혁명적 대중행동이 벌어지면 관료층을 “제쳐 버릴” 수 있다는 룩셈부르크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따르면 사회주의 정치는 선전주의적 형태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여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61 커다란 반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정설 이론의 숙명론적인 정치 실천 개념이 갖는 한계를 베른슈타인이 포착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숙명론은 카우츠키의 유명한 말, 즉 “사민당은 혁명적 당이지 혁명을 만드는 당이 아니다”는 말에 집약돼 있다. 62 그 바탕에 깔려 있는 믿음을 카우츠키는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주의적 생산은 도래할 것이고 도래해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승리가 필연적이 되면 사회주의적 생산의 승리도 필연적일 것이다.” 63 루치오 콜레티는 이런 관점이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의 전반적인 결함을 반영한다고 지적한다. “경제적 진화가 자동적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숙명론적’이고 ‘섭리를 따르는’ 믿음에 근거해 그들은 마치 자연 현상처럼 자동적이고, 지속적이고, 거역할 수 없고, 꽤 평온한 과정을 통해 서서히 권력을 획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64 베른슈타인은 이것이 마르크스의 정치를 그대로 따른 결과로 봤고, 이런 마르크스의 정치적 약점의 한 가지 원인으로 경제적 조건에서 정치적 결론을 도출하는 지나치게 단순한 방법론을 지목했다.
제2인터내셔널의 정설 이론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비판이 형편없는 이론적 수준에도 불구하고65 이런 헤겔식 변증법의 해로운 영향에 대항해야 한다면서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자들이 “공염불에 맞서 칸트”를 수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66 여기서 “공염불”은 실제로는 개혁주의적 실천을 하면서 말로만 늘어놓는 혁명적 미사여구를 뜻했다. 베른슈타인은 칸트의 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하려 했고, 이런 대안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 “언제든 오류를 인정하고 새로운 진리를 인정하는 높은 수준의 과학적 공평무사함”을 견지하고, 67 자신이 어떤 종류의 사회를 쟁취하고자 하는지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68 베른슈타인은 활동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카우츠키의 숙명론에 있는 심대한 약점을 선명하게 들춰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도덕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대안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고스란히 뒤집어 놓는 것에 그칠 때가 많았다. 69
그리고 이런 방법론은 “개념의 자기 발전”이라는 헤겔적 관념이 마르크스주의에 끼친 악영향을 보여 주며 그런 관념은 자의적인 추론을 낳기 쉽다고 베른슈타인은 주장했다.레닌의 마르크스주의 혁신
70 그 연구를 통해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갱신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14년 이전과 이후의 레닌 저작들의 차이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레닌이 카우츠키의 숙명론에 맞서 제시한, 그러나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대안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러시아 좌파가 직면한 실천적 과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한 20년 넘는 그의 노력에 그 기원이 있다. 71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 대한 레닌의 대응에서 가장 간과되는 측면은 아마 그가 헤겔로 돌아간 것일 것이다. 레닌은 카우츠키의 숙명론적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면서도 베른슈타인의 도덕주의, 더 일반적으로는 정치적 주의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헤겔을 연구했다. 이는 초창기 레닌이 “합법 마르크스주의자”인 표트르 스트루베를 비판할 때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자신의 ‘이상’을 어떤 즉각적인 이해관계와 연관 짓지 못하는 것이 전통적인 도덕론의 약점이라면,” 스투르베는 그 반대로 유물론을 객관주의적으로 왜곡하여 현존 질서의 “옹호자가 될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킨다고 레닌은 비판했다. 도덕적 의지주의와 경제적 객관주의 모두에 반대한 레닌은 유물론이 사회적 과정의 모순을 살펴보기 때문에 “소위 당파성을 띠며, 어떤 사건을 평가하든 특정 사회 집단의 관점을 직접적이고 숨김 없이 받아들일 것을 명한다”고 썼다.73 그러나 레닌이 카우츠키에게 찬사를 보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적 실천에 대한 두 사람의 개념에는 그들이 1914년 정치적으로 결별하기 오래전부터 중요한 긴장이 있었다. 예컨대, 앞서 인용한 카우츠키의 말, “사민당은 혁명적 당이지 혁명을 만드는 당이 아니다”와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의 결론 바로 앞 장에서 이론화하려 하는 실천 형태 사이의 명백한 간극을 보라. 그 대목에서 레닌은 국가에 도전하지 않는 일상 활동과 국가에 맞선 봉기라는 최종 목표를 연결하는 형태의 실천을 이론적으로 제시하려 한다.
이처럼 레닌의 유물론은 처음부터 실천가적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라스 리 등은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연속성을 일면적으로 강조한다.공통의 신문을 발행하고 배포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는 봉기 신호를 “그저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않아도 될 것이며, 봉기가 일어났을 때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할 정규적인 활동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3년 후 레닌은 멘셰비크인 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의 비판을 반박하며 이 논점을 다시 다룬다. 카우츠키의 혁명 개념을 바탕으로 논지를 펴는 마르티노프는 “모든 나라의 사회민주주의 운동이 언제나 인식했던 바, 즉 인민 혁명은 일어날 시점을 미리 정하거나, 인위적으로 준비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는 것”임을 레닌이 망각했다고 비판한다. 레닌은 이를 간단하게 논파한다. 그렇다. 혁명은 오직 아래로부터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봉기 자체는 조직돼야 한다. “우리는 봉기를 인민 혁명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마르티노프에게 응답할 수밖에 없다.”
76 그러나 리의 주장과 달리 그것은 레닌이 카우츠키주의를 “유달리 독창성 없이” 적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14년의 분열은 레닌과 카우츠키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 차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심화돼 왔지만, 처음부터 그들이 글에서 다루는 영역의 차이에 상당 부분 함축돼 있었고, 그런 차이를 통해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다. 카우츠키가 흔히 폭넓은 일반화를 하는 글을 썼다면, 레닌의 글은 훨씬 구체적인 초점이 있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강조점의 차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차이는 카우츠키가 혁명적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보수적이 되는 자신의 실천을 은폐할 여지를 만들어 냈다(훗날 트로츠키는 이를 카우츠키의 “유기적 기회주의”로 일컬었다 77 ). 반면 레닌의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에 훨씬 중점을 뒀고, 그래서 언제나 활동을 분석의 중심에 놓았다. 카우츠키가 혁명을 일상 활동에서 의미하는 바가 거의 없는 먼 훗날의 일로 보다가 결국에는 독일 사민당의 일상적인 의회주의적 실천으로 혁명을 재해석한 것과 달리, 레닌은 근저의 사회 모순을 바탕으로 하는 지속적인 과정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언뜻 보기에 안정적인 시기에도 그런 모순은 실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8
이 간단한 논지에서 리가 한 주장의 한계와 합리적 핵심이 모두 드러난다. 리의 주장처럼 1914년 이전과 이후의 레닌의 마르크스주의 사이에는 어떤 절대적인 단절이 존재하지 않는다.79 혁명가들의 논쟁의 장으로 기능하는 당과 개혁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을 모두 포괄하는 당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전진시키기 위해 사회 운동에 개입하는 최선의 방법을 두고 혁명가들이 논쟁을 벌이는 살아 있는 공간인 반면, 후자는 국가를 차지하느냐 분쇄하느냐를 둘러싼 근본적인 전략적 차이 때문에 마비 상태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레닌과 카우츠키의 차이는 전술적인 성격인 듯했다. 그러나 전쟁의 충격으로 레닌은 이 차이에 더 중대한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고, 그것이 1914년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인식했다.
이처럼 다가올 혁명에 대한 상이한 개념은 실천에서 곧바로 차이를 낳았다. 예컨대,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주의에서 근본적으로 멀어졌음에도 당적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용했다. 반면 레닌은 당을 계급투쟁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만들려면 당의 기본 가치를 거부하는 자들을 당에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당내 토론과 비판을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당이 잡담 장소가 되지 않으려면 논쟁이 합의된 한계 내에서 이뤄져야 했다.80 이 저작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에 맞설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레닌은 독점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가 전쟁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또, 레닌은 현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의 주장, 즉 현대 국가는 인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분쇄”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기구라는 주장을 재발굴했다. 카우츠키와 같은 자들이 제국주의에 투항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고타 강령과 에르푸르트 강령을 비판하면서 지적한 잘못된 국가관 때문이라고 레닌은 설명했다. 그 잘못된 국가관이란 좌파가 의회 투쟁으로 기존 국가를 차지해서 사회주의를 전진시키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를 포획하지 못했다. 오히려 국가가 사회주의자들을 사로잡았다. 81 한편, 레닌은 제국주의로부터 혜택을 입는 “노동 귀족층”의 존재를 주장하면서, 이것이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가 제국주의에 굴복하는 현상의 사회적 토대라고 설명했다.
전쟁과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 대응하는 레닌의 가장 중요한 정치 저작은 《사회주의와 전쟁》,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레닌 사후에야 “최신 단계”가 “최종 단계”로 제목이 살짝 수정됐다)로,82 물론 개혁주의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찰리 포스트는 노동 귀족 개념이 “노동계급의 개혁주의와 보수성을 설명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론적으로 엄격하지 않고 사실 관계와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83 그러나 이런 약점은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에 관한 룩셈부르크의 설명으로 극복할 수 있다. 특히, 노동력 판매의 중개자로서 노동조합 관료가 하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구실에 대한 설명이 도움이 된다. 84
이는 “20세기 초 자본주의의 형태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를 발전시키려는 가장 만만찮은 시도”였다.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제2인터내셔널 마르크스주의에 맞서 제시한 대안은 강력했다. 그리고 이 강력한 대안을 뒷받침한 것이 헤겔에 대한 연구였다. 레닌이 헤겔에 수긍하면서 쓴 다음과 같은 말은 카우츠키의 숙명론적 유물론이나 베른슈타인의 무기력한 도덕주의와는 대조적이다.
자신을 위해 객관적인 세계상을 만들어 낸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외적 현실을 변화시키고, 그 현실의 규정들이 지양되게 하고(=그 현실의 이러저러한 측면이나 성질을 변화시키고), 따라서 그 현실에서 피상성과 외부성, 공허함을 제거하고, 그 현실을 즉자적이자 대자적인 존재(=객관적 진실)로 만든다.
86 자유로운 행위란 필연성에 부합하는 행위라는 헤겔의 주장을 환원론적으로 이해한 제2인터내셔널 이론가들과 달리 레닌은 “인간의 의식이 객관적 세계를 단지 반영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다”고 봤다. 87 그래서 카우츠키의 숙명론과는 달리 레닌은 미래를 열린 것으로 봤기에 역사의 진로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도를 갖고 행동했다. 레닌의 실천 중시는 “역사가 예측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는 역사를 바꾸려면 역사에 개입해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88
헤겔에 관한 레닌의 필기를 논평하면서 스타시스 쿠벨라키스는 “레닌이 ‘철학적 유물론’에 관한 절을 ‘혁명적 실천 활동’ 개념에 대한 언급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특히 의미심장하다”고 지적했다. 레닌이 주관적인 실천 활동을 “객관적” 세계의 중심에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 따라 레닌은 사회과학의 법칙들을 의식적인 인간 활동과 별개의 것으로 “물신화”해서는 안 되고, 정치적 개입의 윤곽을 제시하기 위한 필연적으로 “협소하고, 불완전하고, 근사치에 가까운” 시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89 그러나 존 리즈가 지적하듯이, 레닌은 《철학 노트》에서 “실천이 주관과 객관의 구분, 본질과 외관의 간극을 극복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인식한다. 90 사회적 실천을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에 놓은 덕에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와 관념론의 친화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변증법적인 관념론이 형이상학적이고 미숙하고 메마르고 조야하고 경직된 유물론보다 지적 [변증법적] 유물론에 더 가깝다.” 91
이는 존 홀러웨이가 묘사한 레닌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홀러웨이는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주장을 “과학”으로 왜곡했다고 하면서, 레닌이 그런 왜곡을 논리적이고 비민주적인 귀결로 밀어붙여, 하늘에서 과학적 지식을 노동자들에게 내려 주는 “아는 자들”로 이뤄진 당의 필요성을 주장했다고 묘사한다.그러나 관념론적인 (도덕적인) 행위 개념은 사람들이 행동하는 물질적 맥락을 물화[인간 활동이 아닌 어떤 섭리의 결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기에 필연적으로 공허하다. 그런 개념으로 보면 개인은 세계를 바꾸는 것 빼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반면 레닌은 행위 주체를 모순적이고 따라서 역동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맥락과 결부시켜 파악하려 했기에, 그것의 진정한 변혁적인 성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계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한계 안에서 행동하는 역사적으로 특정한 인간 행위 주체들에 의해 변화할 수 있다는 사상을 레닌은 이전의 어느 누구보다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92 예컨대 레닌은 제국주의를 자동으로 사회주의로 탈바꿈되는 자본주의의 한 계기로(숙명론적인 관점) 이해하지도 않았고, 추상적인 도덕적 관점에서 규탄해야 할 그저 역겨운 정책으로(주의주의적 관점) 이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레닌은 제국주의를 어떤 대안을 가능케 하고, 따라서 그 대안을 추구하는 정치의 근거가 되는 자본주의의 특정한 역사적 형태로 설명한다. 여기서 레닌이 제시하는 대안은 역사적으로 특수하고 사회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바로 식민지 본국의 노동자 권력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과 동맹을 맺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숙명론을 고스란히 뒤집은 것에 불과했지만(그것은 “실종된 전체성 범주의 주관적 측면이다” 93 ), 레닌이 제시하는 정치 실천 모델은 숙명론과는 달리 진정으로 주체적이고, 주의주의와는 달리 진정한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제공한다. 레닌은 역사에서 “결정의 순간”이 있다고 봤다. 그러나 루카치가 지적했듯이, 레닌은 또한 이런 순간들이 의지에 의해 역사에 부과되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고 봤다. 94
죄르지 루카치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기여한 바를 논평하면서, 당시 [제2인터내셔널 정설 이론의] 실증주의적 대안과 신칸트주의적 대안에 맞서 “마르크스의 원래 개념”을 고수했던 것은 레닌뿐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의 실천적 성격은 폭넓은 전략적 분석에서 출발해 일반적인 정치적 결론을 거쳐 구체적인 조직적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갈 수 있게 했다. 레닌은 당의 형태가 기능에 달려 있다는 점을 당대의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개혁주의 정당은 지방 의회와 국회의 선거구 구조를 따라가는 경향이 있다. 아나키스트 조직은 다양한 형태의 직접행동을 만들어 내기 위해 훨씬 덜 집중적인 형태를 띤다. 개혁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들은 모두 국가권력의 분쇄를 추구하지 않는다. 개혁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차지하려 하고, 아나키스트들은 대체로 그것을 우회하려 한다. 그래서 그들의 조직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과 다른 조직 형태를 취한다.그러나 레닌주의에 관한 흔한 신화와 달리 레닌은 혁명가들이 어떤 조직을 이뤄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물론 레닌의 조직론에 본질적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본질은 조직 구조가 아니라 정치에 있었다.
96 레닌이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개념에 새롭게 추가한 것은 그것의 형태가 아니라 내용이었다. 앞서 살펴봤듯이 1914년 독일 사민당 내에서 전쟁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킨 것은 바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 조직 형태였다. 아나키스트들이 이런 사례를 근거로 민주집중제를 비판한다면, 그들은 개혁주의라는 구정물을 버리다가 소중한 아이, 즉 중요한 조직 원리를 버리는 오류를 범하는 셈이다. 1914년에 독일 사민당이 보인 문제점은 개혁주의였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가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개혁주의 논리에 발목이 잡힌 한 세대의 혁명가들이 전쟁이 터지자 침묵을 강요당한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반면, 레닌의 개입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는 혁명적 좌파가 개혁주의적 경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조직돼야 한다는 전제(이것은 개혁주의와 국가,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분석을 바탕으로 한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체제 내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투쟁을 체제에 맞선 공동의 투쟁으로 통합하려 하는 “레닌주의” 정당은 “노동자들이 참가하거나 그들의 이익에 영향을 주는 모든 투쟁에서 실천적 지도를 제공함으로써 … 노동자 대중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 97 이런 프로젝트에 가장 적합한 조직 형태가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인 것이다. 한편, 이런 조직의 정치는 물질적 모순을 숙명론적으로 관조하거나 주의주의적으로 현실을 거스르는 것일 수 없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으로 무장한 조직된 투사들이 실천적 경험을 토대로 현실에 개입하여 현실을 변화시키는 기예, 이것이 레닌이 말한 정치적 지도의 본질이다. 98
레닌주의는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라는 개념과 흔히 결부되지만, 그 개념은 레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레닌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민주적 중앙집중주의는 혁명적 당이 개혁주의 조직으로부터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강조점보다 부차적인 것이다.결론
99 반대로, 레닌이 헤겔로 돌아갈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은 리의 설명과는 달리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혁신하기 위해 단지 카우츠키주의의 초기 형태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100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실제로 참신하고 중요한 기여를 했고, 이 기여는 국가론과 제국주의론을 넘어서는 것이다. 헤겔에 대한 연구는 그의 저작들의 정치적 중심을 더 견고한 이론적 기반 위에 올려놓았다. 이러한 정치적 중심의 기원은 18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1914년 이후 레닌은 확고한 유물론적인 주체성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정치를 재구성했다.
레닌주의에 관한 스탈린주의적 왜곡은 레닌이 《철학 노트》에서 비판한 이원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헤겔을 거친 여정 덕분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밝힌 유물론과 관념론의 일면적 한계를 초월하는 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첫째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유물론의 주된 결함은 … 사물, 현실, 감각적 활동을 오로지 객관이나 관조라는 형식으로 파악할 뿐, 감각하는 인간의 활동, 즉 실천으로, 즉 주체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관념론은 유물론과의 대립 속에서 능동성의 측면을 추상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당연하게도 현실의 감각적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101 그리고 그가 다른 곳에서 강조했듯이, 오늘날 사회적 인류의 구체적 형태는 노동계급의 관점이다. 102 제2인터내셔널의 시기 동안 이런 주체성 개념은 마르크스의 사상에서 이탈하는(비록 대체로 이탈로 여겨지지는 않았지만) 더 광범한 과정에서 갈갈이 찢겨졌다.
글 후반부에서 마르크스는 이 논점을 더 발전시켜 세계를 인식하는 이런 잘못된 방식의 역사적 위상을 밝힌다. “관조적 유물론, 즉 감각적 활동을 실천적 활동으로 보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한 최선은 개별적인 개인과 시민사회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반면, “새로운 [유물론의 — 블랙리지] 관점은 인간 사회, 또는 사회적 인류의 관점이다” 하고 마르크스는 강조했다.103 1914년과 마찬가지로 1922년에도 레닌의 분석은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 1922년에 레닌이 “속수무책”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했지만 모든 분석이 실천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같은 글의 다른 곳에서도 확인된다. “어쩌면 가장 올바른 방법은” 전쟁 전 카우츠키와 다른 개혁주의 정치인들이 “전쟁이 나면 파업이나 혁명으로 보복하자”고 한 것을 “매우 예리하게 반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레닌은 썼다. 104 전쟁에 직면한 좌파가 무력했다는 레닌의 말은 현실에 대한 숙명론적 체념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급진적인 언사로 실천적 수동성을 은폐하는 정치인들의 사이비 좌파적 가식을 비판하려는 것으로 해석돼야 한다. 레닌은 일단 벌어진 전쟁에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속수무책일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1914년에든 1922년에든 레닌은 좌파가 활동하는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기반해 좌파가 사태에 미칠 영향을 극대화하려고 했다. 두 시기에 레닌이 했던 개입을 보면 레닌이 정치에 초점을 맞췄다고 해서 주의주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레닌은 “가장 긴급한 상황에서도 새로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그 상황에서 한발 물러나 그 상황을 이론적으로 재평가하면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구불구불한 경로를 밟아 나갔다.” 105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가 마르크스 이전의 유물론으로 전락했다면, 베른슈타인의 대안은 이를 고스란히 뒤집어서 마르크스 이전의 관념론으로 돌아가는 오류를 범했다. 레닌은 헤겔을 읽고 이런 대립을 극복하는 데서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1922년 헤이그 국제 평화 회의에 파견될 소련 대표에게 한 조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레닌은 주의주의적이지도, 숙명론적이지도 않으려 했던 것이다. 미카엘 뢰비가 지적했듯이 레닌은 언제나 “정치를 모든 것을 이끄는 위치에 뒀다.”106 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캘러핸의 주장은 좌파가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하는 것과 전쟁을 멈추는 것 사이에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네이션이 옳게 지적했듯이 “인터내셔널의 파산은 전쟁을 막지 못한 데서가 아니라 저항을 동원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났다.” 107 레닌은 1914년에 “배신”이라는 표현을 채택함으로써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다음 도전 기회가 오기 전에 영향력을 키운다는 견지에서 좌파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에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인터내셔널의 기존 지도부와 결별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할 이론적·정치적 명료화도 그런 일들의 하나였다. 1922년에도 레닌은 실현 불가능한 원대한 몽상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작은 일들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속수무책이었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이처럼 끈질기게 정치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레닌과 제2인터내셔널의 다른 인물들 사이의 차이점이었고, 이런 초점은 그가 제2인터내셔널의 폐허 위에서 건설하는 데서 핵심적 구실을 한 공산주의 운동의 참신함에 영향을 줬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은 1919년 제1차세계대전 종전 무렵의 혁명적 물결을 타고 출범했다. 안타깝게도 코민테른은 1923년 독일 혁명이 패한 직후 “레닌주의”라는 미명하에 [스탈린주의 관료에 의해] 사실상 무력화됐다. 그러나 코민테른은 1920년대 초의 짧은 시기에 더듬거리면서 잠깐이나마 레닌의 프로젝트를 실현하려 했었다. 그 프로젝트란 바로 유럽과 세계의 노동계급 운동을, 종파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개혁주의로부터 독립성을 유지하며 계급투쟁에서 주도적인 구실을 하는 개입주의적인 흐름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닌의 유산이었고, 이 유산은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곱씹어 볼 충분한 가치가 있다. 108
이렇게 보면, “인터내셔널이 실제로 전쟁을 막을 능력이 있었다”고 하고는 1914년 독일 사민당의 전쟁 공채 발행 찬성 투표를 배신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캘러핸 등의 주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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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ackledge, Paul 2014, The great schism: socialism and war in 1914, International Socialism 143(posted on 26th June)
↩
- 이 초고는 Blackledge, 2014에 기초한 것이다. 초고를 읽고 논평해 준 알렉스 캘리니코스와 커밀라 로일에게 감사를 표한다. ↩
- Riddell, 1986, p88. ↩
- Kirby, 1986, p30. 사회주의 언론들의 애국주의는 1914년에 전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지지를 확보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Rosmer, 2000, pp40-41). ↩
- Eley, 2002, p30; Nation, 2009, p22. ↩
- Marx, 1974a; Fernbach, 1974, p17. 피터 그린은 최근 [좌파 개혁주의 정당인] 레프트유니티 건설을 옹호하면서 이 강령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했다. 마치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경험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말이다! ↩
- Collins and Abramsky, 1965, pp32, 39. ↩
- Johnson, 1980, p73; Fernbach, 1974, pp59, 63; Molyneux, 1986, p31. ↩
- Liebman, 1964, p285; Day and Gaido, 2011. ↩
- Lenin, 1960-70, volume 21, pp40, 241. ↩
- Anderson, 1980, p101; Lih, 2011, pp158-165. ↩
- Geras, 1976, Chapter 1; Luxemburg, 1970, 269. 룩셈부르크는 엥겔스가 한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근대 사회 전반이 파멸하지 않으려면, 생산과 분배 양식의 혁명, 계급 구분을 일소할 혁명이 벌어져야 한다.”(Engels, 1947, p194). ↩
- Cliff, 1989, p139. ↩
- Harding, 1983, p6. ↩
- Kissin, 1988, p165. ↩
- Salvadori 1979. 이에 대한 나의 견해는 Blackledge, 2006a, pp56-59를 보라. 더 자세한 논의는 Blackledge, 2006b를 보라. ↩
- Kissin, 1988, p166. ↩
- Haupt, 1972, p235. ↩
- Lenin quoted in Haupt, 1972, p228. ↩
- Callahan, 2010, p300. ↩
- Haupt, 1972, p223. ↩
- 페르디난트 라살(1825~1864)은 국가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라살의 국가주의가 신당에 미치는 영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Draper, 1990, pp41-71를 보시오). ↩
- Harman, 1982, p16. ↩
- Abendroth, 1972, pp51-68. ↩
- Marx, 1974b, p355. ↩
- Marx, 1974b, p339. Engels,1989, p71도 보라. ↩
- Engels, 1991. ↩
- Schorske, 1983, p3. ↩
- Steger, 1996, p3. ↩
- Engels, 1990, p225. ↩
- Engels, 1990, p226. ↩
- Engels, 1990, p227. ↩
- Draper, 1986, p321. ↩
- Engels, 1990, p227. ↩
- Schorske, 1983, p6. ↩
- Schorske, 1983, 12ff. ↩
- Bernstein, 1993, pp79ff, 56ff. ↩
- Kautsky, 1983. ↩
- Schorske, 1983, pp16-24. ↩
- 라살 지지자들은 “임금 철칙의 법칙”을 받아들였다. 이 법칙에 따르면 임금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겨우 유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최소화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을 무익한 것으로 치부했다. 마르크스는 “고타 강령 비판”에서 이런 견해를 날카롭게 비판했다.(Marx, 1974b). ↩
- Steenson, 1981, chapter 3. ↩
- Schorske, 1983, p49. ↩
- Salvadori, 1979, p113. ↩
- Schorske, 1983, p115, Salvadori, 1979, p113. ↩
- Luxemburg, 1986, p80. ↩
- Luxemburg, 1986, pp81, 87-88. ↩
- Schorske, 1983, pp108, 127. ↩
- Salvadori, 1979, p144.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개혁주의를 어떻게 다뤘는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본지에 실린 글럭스틴의 글을 보라.[국역: 도니 글럭스틴,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개혁주의 문제”, 《마르크스21》 42호, https://marx21.or.kr/article/504] ↩
- Gaido, 2003, pp109-110; Gaido, 2008. ↩
- Salvadori, 1979, p162에서 인용한 카우츠키의 말. Schorske, 1983, pp182-183; Geary, 1987, pp75, 77; Geras, 1976, p159도 참고하라. ↩
- Nettl, 1969, p285. ↩
- Draper, 2005, pp15, 159. ↩
- Haupt, 1972, p25. Day and Gaido, 2011, p35도 보라. ↩
- Schorske, 1983, p246. ↩
- Day and Gaido, 2011, p63; Salvadori, 1979, p174. ↩
- Day and Gaido, 2011, p64. ↩
- Kautsky, 2011, pp773-774. ↩
- Draper, 2005, p11; Donald, 1993, pp189-190. ↩
- Liebman, 1964, pp283, 285에서 인용한 카우츠키의 말. ↩
- Luxemburg, 1986, p80. Harman, 1982, p20도 보라. ↩
- Nation, 2009, p19. ↩
- Kolakowski, 1978, volume 2, p111; Gay, 1962, pp159ff. ↩
- Kautsky, 1996, p34. ↩
- Kautsky, 1892. ↩
- Colletti, 1972, p105. Timpanaro, 1975, p120도 보라. 노동자 운동이 이 층을 제쳐 버릴 수 있다는 룩셈부르크의 숙명론적 관점은 노동계급 개혁주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마르크스의 한계에서 비롯한다고 존 몰리뉴는 지적한다.(Molyneux 1986, p116). ↩
- Bernstein, 1993, pp30-31. ↩
- Bernstein, 1993, p189. ↩
- Bernstein, 1993, p210. ↩
- Bernstein, 1996, pp91, 94-95. ↩
- 이 논쟁에 대한 개괄은 Blackledge, 2012, pp107-114을 보라. ↩
- Lenin, 1960-1970, volume 38, p180; Anderson, 1995; James, 1980; Dunayevskaya, 1988; Löwy, 1993, pp77-90. ↩
- Ilyenkov, 1982. ↩
- Lenin, 1960-1970, volume 1, pp400-401. ↩
- Lih, 2006, pp27; 615. 리는 레닌과 카우츠키의 핵심적 차이를 직관적으로 포착하지만 알지는 못한다. 리는 이렇게 주장한다. “레닌이 보기에 카우츠키의 행보는 ‘혁명적 말은 하지만, 혁명적 행동은 하지 않는다’고 정의할 만한 일반적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Lih, 2009, p5).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그러나 레닌은 “이론을 실천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하면서”(Cliff, 2002, p141) 마르크스주의에 심오한 이론적·정치적 기여를 했다. 레닌이 “유달리 독창성이 없었다”는 리의 설명은 이 점을 흐린다. ↩
- Lenin, 1960-1970, volume 5, pp515-516. 같은 전집의 volume 8, p150도 보시오. Harman, 1968/9는 이런 구분을 강조한다. ↩
- Lenin, 1960-1970, volume 8, p152. ↩
- James, 1980, p113. ↩
- Trotsky, 1974, p129. ↩
- Lukács, 1970, pp9, 11. ↩
- Lih, 2006, pp474-475. ↩
- Callinicos, 2009, p44. ↩
- Lenin, 1960-1970, volume 25, pp383-492. ↩
- Callinicos, 2009, p53; Harding, 1983, volume 2, pp140-141. ↩
- Post, 2010, p7. 포스트의 분석은 이 잡지에서 처음 발전시킨 주장을 바탕으로 한다.(Cliff, 2003; Corr and Brown, 1993). ↩
- Darlington, 2014. ↩
- Lenin, 1960-1970, volume 38, pp217-218 (강조는 원문의 것). ↩
- Kouvelakis, 2007, pp174, 186. ↩
- Anderson, 1995, p113에서 인용한 리처드 데이의 말. ↩
- Callinicos, 2007, p26. ↩
- Holloway, 2002, p128. ↩
- Rees, 1998, p191. ↩
- Lenin, 1960-1970, volume 38, p274. ↩
- Lukács, 1978, p162. ↩
- Lukács, 1971, p38. ↩
- Lukács, 2000, pp55-56. ↩
- Lukács, 1971, pp296-299. ↩
- Le Blanc, 1990, pp127-141. ↩
- Molyneux, 1986, p93. ↩
- Eagleton, 2007; Cliff, 1975, chapter 14. ↩
- 행위에 관한 유물론적 이해와 관념론적 이해의 일면성을 극복하는 데서 레닌이 했던 심오한 기여에 비춰 보면, 레닌 사후 러시아 혁명이 타락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레닌주의’ 이데올로기(Le Blanc, 1990, pp-1-13)의 가장 정교한 표현이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 왜곡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스탈린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관념론(스탈린의 선지자적 지도)과 유물론(생산력의 자동적 발전)의 일관성 없는 결합으로 전락시켰으니 말이다. Marcuse, 1958, pp121, 124; Harris, 1968, p156. ↩
- Lih, 2011, pp125-131. ↩
- Marx, 1975. ↩
- Arthur, 1986, p145. ↩
- Löwy, 1993, p71. ↩
- Haupt, 1972, p223에서 인용한 레닌의 글. ↩
- Callinicos, 2007, p25. ↩
- Callahan, 2010, p300. ↩
- Nation, 2009, p21. ↩
- Hallas, 1985. ↩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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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erson, Kevin, 1995, Lenin, Hegel and Western Marxism: A Critical Study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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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ledge, Paul, 2006a, Reflections on the Marxist Theory of History (Manchester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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