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종식을 위한 혁명적 전략 *
1 이런 견해는 팔레스타인 운동이나 그 연대 활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받아들여질 뿐 아니라, 최근 미국의 자유주의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가 발표한 유명한 보고서에서 이스라엘 정치 체제를 ‘아파르트헤이트’로 표현하면서 더한층 널리 퍼졌다. 2 이스라엘의 유명한 인권단체 베셀렘B’Tselem도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해, 팔레스타인을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 유대인 우월주의” 정권이 지배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3 휴먼라이츠워치와 베셀렘이 이렇게 주장하게 된 핵심 이유는 한 가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나의 국가, 바로 이스라엘 국가가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고, 그 국가가 출신 민족에 따라 팔레스타인인과 이스라엘인을 불평등하게 지배한다는 사실 말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국가의 시민이든, 점령지[가자 지구,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의 주민이든 매한가지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가는 오직 종교적·종족적 기준(“유대인”)으로 정의되는 집단에 속해야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하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런 위계 구조에서 벗어날 방법이 아예 없다. 4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을 규정하는 인종차별적 체제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다수 흑인을 억압했던 ‘아파르트헤이트’[인종 분리 체제]의 일종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점점 더 확산되고 있다.5 이는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글에서는 두 가지 역설을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첫째, 노골적인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로 정당화되는 정치 체제가 어떻게 제2차세계대전 이후 식민지 질서가 종식된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왜 유럽의 유대인 공동체가 반유대주의 박해와 학살을 겪었는데도 그런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는 약화되지 않은 것일까? 유대인 박해와 학살 경험은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만의 국가 건설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이 문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접근 방식과 달리, 이 글은 정치적 형태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내의 국민 경제와 그보다 더 넓은 중동 지역의 경제, 그리고 세계경제 수준에서의 자본주의의 발전이 시온주의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와 일상적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인종차별적 제도를 어떻게 지탱해 왔는지 살펴볼 것이다. 특히 이 지역 내 제국주의 경쟁의 동역학이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계속 운영할 수 있게 하는 주요 동력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단지 “유난히 잔혹한 형태의 인종지배 방식”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한 구체적 형태”라고 지적한 바 있다.6 이후 거대한 대중 동원으로 정점에 달했던 팔레스타인 운동들을 민족 해방과 국가 수립을 위한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투쟁으로 그리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모든 주요 팔레스타인 투쟁의 동력은 팔레스타인 빈민층과 노동계급 다수의 집단적 에너지였고, 이는 망명지든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이든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역설에 대한 답은 두 번째 역설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고도로 군사화된 [이스라엘] 국가의 압도적 압박에도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은 어떻게, 왜 지속될 수 있었을까? 2021년 5월 18일 총파업은 억압과 반복되는 군사적 공격을 받으면서도 팔레스타인 대중운동이 어떻게 스스로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일이 망명지와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내에서 세대를 이으며 재현돼 왔다. 이 글에서는 2021년 총파업의 뿌리를 살펴보는 한편, 전 세계에서 불의와 억압에 맞서 싸우는 많은 이들에게 팔레스타인 투쟁이 영감의 원천이자 저항의 상징이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팔레스타인 투쟁의 사회적 측면을 더 깊이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 투쟁의 사회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이 상호작용하는 것(과 가끔 융합되는 것)이 팔레스타인의 대중적 저항이 지속될 수 있는 근본 원인이다. 나크바그렇지만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은 인종 청소로 인해 파편화됐고, 또 이스라엘 지배계급은 팔레스타인 노동 착취에 기대지 않고도, 억압과 전쟁 기구를 유지하는 비용의 대부분을 조달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위 두 가지 역설을 해결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 사는 대다수를 위한 영속적인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방법은 중동 전역에서 사회혁명을 다시 활성화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혁명에서 사회적 투쟁의 성격을 확장하는 것은 중동 지역 전체(특히 이집트, 레바논, 요르단)에서 혁명 운동을 재건하는 것과 함께 발전해야 한다. 이는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의 과제를 포기하거나 미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성패가 사회적 투쟁을 심화시키는 데 달려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새로운 제국주의 질서를 위한 정착민 식민지 주둔지
7 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구축한 새로운 제국주의 질서에 이스라엘 국가가 어떻게 통합됐는가를 더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런 체제의 동역학으로 인해 막대한 양의 군수 장비와 자금이 이스라엘 국가와 경제에 유입되고 또 거쳐간다는 점이다. 비슷한 다른 정치적 프로젝트가 붕괴한 뒤에도 정착민 식민지 사회로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과 경쟁국 간의 제국주의 경쟁이 등락을 반복한 결과였다.
모든 자본주의 사회에는 각종 형태로 제도적 인종차별이 구조화돼 있지만, 이스라엘처럼 종족적·종교적 위계 원칙에 따라 공개적으로 차별적 제도를 운영하는 현대 국가는 거의 없다. 이를 식민지 시대의 유산으로 보는 것은 현실의 일부만 설명할 뿐,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만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왜 이렇게 오랫동안 살아남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가장 먼저 살펴볼 문제는 제국주의의 국제적 동역학과 시온주의 국가 건설 프로젝트의 관계다. 물론, 이 관계는 이스라엘 건국 전부터 형성됐다. 애초에 영국 지배계급의 지원이 없었다면, 시온주의 식민지는 팔레스타인에 건설될 수 없었다.1990년대 이후 소련 붕괴로 인한 대규모 이민자 유입이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재활성화하는 과정에서 어떤 구실을 했는지는 아래에서 자세히 분석할 것이다. 당시의 이민자 유입은 세계 열강 간의 갈등이 이스라엘 국가의 구체적 형태와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치경제학에 미친 영향을 보여 주는 사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영국과 미국이 인종차별적 이민 정책으로 유대인 난민이 나치의 인종 학살을 피해 자국으로 입국하는 것을 막았듯이, [1990년대에도] 주요 제국주의 열강은 옛 소련 내 유대인 공동체가 겪었던 차별과 박해를 자신의 중동 지역 패권을 영속화하는 무기로 이용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 수준의 그런 과정이 팔레스타인에서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계속해서 지탱하는 도구이자 이데올로기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건국자들이 극적인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그들은 미국 지배계급이 이스라엘 보호를 약속하는 지속적인 파트너십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미국의 보호에는 이스라엘의 초기 토지 점령과 인종 청소를 승인하는 것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적 정부 체제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것도 포함됐다. [이스라엘 유력 일간지] 〈하레츠〉는 1951년에 이미 이스라엘이 수행할 구실의 본질을 정확히 기술했다.
이스라엘은 경비견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미국과 영국의 바람을 명시적으로 거스르면서 아랍 국가에 공격적인 정책을 취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서방 열강이 눈감기를 선호할 일이 생기면, 서방이 정한 범위를 넘어 무례를 범한 이웃 국가들을 응징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기댈 수 있을 것이다.
5년 후, 이집트에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 민족주의 지도자 가말 압델 나세르를 “응징”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를 공격했을 때,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경비견” 구실을 검증받을 주요 시험대에 올랐다. 이후 1967년 6월 ‘6일 전쟁’에서 이집트와 시리아 군대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경비견 국가” 이스라엘은 예비 ‘용역 깡패 국가’에서 서방 제국주의 주요 열강의 온전한 하위 파트너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다.
9 이 보조금은 또한 1990년대 이후 이스라엘 경제 성장의 중심이 된 첨단 기술·연구 집약적 제조업과 서비스 분야 호황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미국의 대對 이스라엘 군사·경제 원조는 1970년대에 급증해 그 뒤로도 매우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이 시온주의 프로젝트의 정치경제학에서 핵심적이다. 이 막대한 보조금 덕분에 군사비 지출 “부담”은 외부 자금을 끌어들이는 수단이 됐고, 이 과정이 이스라엘 사회의 계급 구조를 근본적으로 형성했다.그림 1: 미국의 이스라엘 원조(단위: 백만 달러)*
* 인플레이션을 보정한 2018년 미화 가치 기준.
10 양해각서의 핵심 조항은 전 세계 미국 군사 원조의 수혜국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이 자국 통화로 원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으로, 사실상 미국 납세자의 돈으로 이스라엘 군수 산업에 필요한 비용을 제한 없이 대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군사 경제는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중동에서 유지해 온 더 광범위한 제국주의 체제의 필수 요소다. 중동의 다른 지역 강국(미국의 다른 동맹국 포함)에 비해 이스라엘이 가진 “질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은 이 제국주의 체제에 깊숙이 내재돼 있다. [미국 주도 제국주의 체제에서] 이스라엘이 하는 구실은 매우 중요하고, 이스라엘의 지배계급이 작고 취약한 상태의 팔레스타인 국가조차 용납하지 않아도 미국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게 하거나 이스라엘을 말릴 의지가 없다. 이는 1990년대 “평화 프로세스” 이후에도 미국의 대 이스라엘 군사 지원 수준이 전혀 줄지 않은 것을 봐도 명백하다. 오히려 1990년대 말경에 미국은 이스라엘과 3번 체결하는 10년짜리 양해각서MOU 중 첫 번째를 체결했다. 이 양해각서로 이후 집권하는 공화당과 민주당 행정부도 이스라엘에 천문학적 수준의 자금, 무기, 기술 이전을 지속했다.중동에서 흔한 “국가를 가진 군대”?
11 게다가 미국은 중동 전역에서 힘을 발휘하기 위해 “경비견” 이스라엘에만 전적으로 의존한 적이 없고 다양한 현지 하위 파트너를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미국과 미국의 현지 동맹 간의 위계적 파트너십 체계는 실제로 어떻게 작동할까? 1945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 토니 클리프가 썼듯이, 제국주의를 “기계적인 외부 구조”가 아니라 피지배 국가의 경제·사회의 “모든 구석구석까지 연결된” 일련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12 클리프가 이 문장을 썼을 때, 그는 옛 식민 열강(영국과 프랑스)이 중동의 피식민지 민족들과 맺는 관계를 설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본 요지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중동의 여러 지배계급 간의 관계는 여러 나라의 국가 기구들 속에 내재돼 있다. 이는 전문 인력의 보유 여부, 정책 매뉴얼과 지침의 상호 공유, 원조와 외교적 교류의 흐름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하기로는 그 관계가 이들 국가의 군사·보안 기구를 촘촘히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병사들이 휴대하는 장비의 종류와 품질, 주요 장교 계층의 훈련과 경력, 군사 기구와 다른 국가 기구들 간의 관계, 그리고 군부가 사회에서 하는 광범한 구실 등이 모두 일정 부분 그와 연관돼 있다.
미국의 군사력만으로는 대大중동 지역에서 미국 지배계급의 이익을 보장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이는 2001년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군사 개입의 재앙적 결과로 부정할 수 없이 명백하게 드러났다.13 과는 구별되지만, 동시에 그런 역할을 분명히 보완하는 측면이 있다. 엥겔스·레닌·리프크네히트가 자본주의하에서 군사 기구의 구실을 설명한 모델에서는, 군부가 더 광범한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자본주의 국가의 강압적 부분에서 핵심을 이룬다. 군부의 핵심 구실은 자본 축적의 필요조건을 보장하는 것이다. 여기서 “간접적”이라는 말을 부차적이나 종속적이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분명하게 설명했듯, 그 어떤 아래로부터의 사회 혁명이건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국가는 반드시 “분쇄”돼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국가는 직접 생산자가 계속 수탈당하게 하는 것을 명시적 목적으로 하는 강압 기구이기 때문이다. 14 군대가 국내에서 수행하는 보안 경찰 구실은, 국가와 관련된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위해 군대가 국외에서 수행하는 약탈자 구실과 대등하게 중요하고 동전의 앞뒤 면을 이룬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국가는 세계 자본주의 지배계급들로 구성된 “싸우는 형제들”의 성원들과 충돌하게 된다.
중동 전역에 펼쳐진 미군 기지 수, 미국의 사관학교를 통해 경력을 쌓은 고위 장교 수 등을 추적해 보면, 직접 식민 통치를 받던 시절과 거의 변한 게 없다고 결론짓고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설명이 될 것이다. 핵심적으로, 중동 지역의 식민지 해방 혁명 이후 이 지역 국가들의 제국주의 “내재화” 과정은 현지에 자본 축적의 중심지가 등장하고 현지 자본가 계급이 부상한 것과 나란히 진행됐다. 그 기간 대부분에 중동의 많은 지역에서 군사 기구는 자본을 직접 축적하는 주체였고, 군 장교들은 자본주의 기업에서 관리자, 소유자, 투자자가 하는 구실을 했다. 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프리드리히 엥겔스·레닌·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설명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군대가 자본 축적의 간접적 주체로서 수행했던 고전적인 역할15 중간계급이나 심지어 꽤나 가난한 배경을 가진 하급 장교들(시리아처럼 소수 종파 출신인 경우도 있다)이 종종 현대적 중간계급 내 가장 활동적이고 응집력 있는 부분을 이뤘다. 이들 중간계급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미약했던 토착 부르주아지를 대신해서 국가 권력을 쟁취하고, 식민 열강과 동맹을 맺고 있던 정권을 축출했다. 16
이스라엘 국가의 형성과 그 후의 발전 과정에서 군부가 수행한 역할은 인근의 중동 국가들과 공통점이 많다.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은 중동 전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도로 군사화된 사회·경제 유형에 부합한다. 중동 지역에서 경제가 장기간에 걸쳐 군사화한 것(달리 말해, 지배계급 내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이 서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키게 된 것)은 여러 상이한 요소가 상호 작용한 결과다. 그중 첫째 요소는 토착 부르주아지가 (주로 식민 지배에 의해 발전이 저해되고 뒤틀린 결과로) 일반적으로 취약했다는 점이다.17 이 경쟁의 한 측면으로 거대한 군사적 “발자국”이 중동 전역에 찍혔는데 각종 군사 기지가 들어서고, 군사 훈련이 벌어지고, 미국과 소련은 각자의 하위 파트너들에게 군사 교육·자문을 제공했다. 경쟁의 또 다른 측면으로, 세계적 제국주의 열강과 중동 지역의 신흥 지배계급의 군사 부문은 무기 등 각종 군사 기술을 구매·소비하는 것에 서로 강한 이해관계를 갖게 됐다. 중동으로의 무기 이전은 강대국의 군산복합체들이 자원과 자금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이는 것을 정당화해 줬다. 중동 국가 간 전쟁으로 무기가 점점 더 많이 소모됐고 지속적으로, 바로바로 보충돼야만 했다. 이는 1970년대 이후 중동 대부분 지역의 경제가 국가자본주의 모델에서 보다 신자유주의적인 모델로 전환했음에도, 군부의 사회적·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지 않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중동 경제의 군사화를 촉진한 둘째 요소는 세계적 열강들이 이 지역에서 벌인 격렬한 제국주의 경쟁이다. 이 경쟁의 원인은 현재까지도 유효한 중동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20세기 중반 세계 경제에서 석유와 가스가 갖는 위상 때문이었다.18 나크바 이후, 이제는 독립국가 이스라엘의 군부가 된 이들의 후신은 미국의 군사 원조를 받아내는 데 중추적 구실을 했다. 그 후 그들은 군수산업·서비스업에서 독자적인 자본 축적의 기반이 형성되도록 일조했고 그 산업들이 오늘날 이스라엘 경제의 전략적 핵심이다. 이런 이스라엘에 견주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동 여러 곳에서 국가 권력을 쟁취한 아랍 민족주의 하급 장교들은 좀 더 갈지자 행보를 보였다. 대부분이 냉전 시기 두 초강대국 사이를 오가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미국의 동맹이 됐다. 그렇지만 전체 과정은 비교적 비슷했다. 이집트 군부는 이스라엘 군부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 시대에 새로운 산업(예컨대, 자동차 제조와 전자 공학) 육성을 시도하고, 장교계급을 부유하게 하고 권력을 강화할 부동산 투기를 위해 토지를 압류하고, 이전까지 국가의 자산이었던 것을 헐값에 매입했다(이집트 국방부가 걸프 지역 투자자를 포함하는 컨소시엄의 일원으로 알렉산드리아 조선소를 인수한 것이 그런 사례다). 19
이스라엘은 중동 전역의 두 가지 유형(“국가를 소유한 군대”와 “경제를 소유한 군대”)에 모두 부합하고, 다만 건국 시기의 폭력적인 상황이 이런 경향을 더 심화시킨 경우이다. 시온주의 운동의 군사 기구는 팔레스타인 인구 다수를 상대로 인종 청소를 자행해 이스라엘 건국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 경제
전쟁의 도가니 속에서 벼려진 20 그 결과로 서비스 부문에서 정보 기술 분야의 비중이 높은 것을 이스라엘의 무역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표 1 참조).
이스라엘 정보 기술 부문의 부상 과정을 보면 제국주의 경쟁의 동역학이 제도적·경제적 발전에 작용해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적 국가 형태를 어떻게 지탱해 왔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정부 통계를 보면, 첨단 기술 부문은 1965년에 이미 37퍼센트를 차지했다. 1985년경 58퍼센트로 증가했고, 2006년에 70퍼센트로 다시 급증했다. 1990년대에 첨단 기술 수출은 급격히 증가했는데 1991년 30억 달러였던 수출 규모가 2000년에는 123억 달러로 4배 증가했고, 2006년에는 다시 2배 이상 증가해 290억 달러가 됐다. 추가로 약 59억 달러 규모의 첨단 기술 서비스도 수출됐다.표 1: 이스라엘 무역 통계, 1995~2019년
1995 | 2000 | 2005 | 2010 | 2015 | 2019 | |
상업 서비스 수출 중 컴퓨터·통신 서비스 비율 | 36.5 | 57.7 | 60.2 | 63.4 | 73.5 | 78.4 |
GDP에서 서비스 교역의 비율 | 16.2 | 21 | 22.2 | 18.8 | 20.5 | 22.2 |
GDP에서 재화와 서비스 수출의 비율 | 27.5 | 35.6 | 40.8 | 34.8 | 31.6 | 29.3 |
출처: 세계은행, WITS Data service
이스라엘 지배계급은 자국의 첨단 산업 성공의 진정한 기원을 가리기 위해 다양한 신화를 조장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 회계에서 보듯, 이스라엘 첨단 산업의 눈부신 발전은 “기업가 정신”이나 시장 원리로 인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대규모 국가 투자의 결과였다. 이스라엘 국가가 (같은 기간 남아프리카공화국과는 달리) 이런 성공에 필요한 자본과 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미국의 중동 지배 구조에서 이스라엘의 군사 역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1 2018년경 이스라엘에 옛 소련 출신 이민자는 120만 명이었고, 그중 대다수는 1990년 이후에 이주했다. 22 이스라엘의 옛 소련 출신 이민자 노동인구 중 과학자, 학자, 기타 관련 직업의 비율은 69.4퍼센트였던 반면,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력 중에서 같은 직업의 비율은 26.9퍼센트였다. 23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 옛 소련에서 대규모 이민자가 유입된 것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당시 이민자는 “[유대인] 귀환법”에 따른 이주 물결 중 현재까지 가장 규모가 크다. 이 법은 부모, 조부모, 배우자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해당 유대인 친척의 이민·생존 여부와 무관하게 이스라엘로 이주할 경우 즉시 이스라엘 국적을 획득할 수 있도록 했다.24 이는 이스라엘에 있는 팔레스타인계 시민의 경험과 크게 대조적인데, 그 팔레스타인인들은 대부분 빈곤하고 체계적 차별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보수가 더 괜찮은 일자리도 얻지 못한다. 25 미국은 다른 중동 국가의 군사력 대비 이스라엘의 질적으로 우월한 군사력을 역동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했고, 이는 특히 이스라엘의 첨단 기술 부문에 여러 되먹임 작용을 야기했다. 그 중 하나는 이스라엘 군부가 정보 기술 상품·서비스의 소비자이자 개발자 둘 다가 된 것이었다. 이는 이스라엘 군부가 맡은 두 가지 임무 때문이다. 그 임무는 이스라엘 점령하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지배하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유지하고, 자신의 제국주의 후원자인 미국의 군사적·외교적 이익을 대변하는 중동 지역의 집행자 지위를 지키는 것이다. 실제로 이스라엘군은 미국에서 무기·군사 기술을 구매하는 다른 나라와 달리, 미국 군산복합체의 연구 개발 부문에 긴밀하게 접근하고 협력할 수 있는 권리를 누려 왔다. 여기에는 중동 최초로 미군 군사 기술에 접근할 권리와 미국의 무기 시스템을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는 권리도 포함된다.
20년 만에 옛 소련 출신 이주민과 비정통파 유대인 이스라엘인 간의 경제적 격차는 급격하게 좁혀졌고, 이주민의 평균 임금은 유대인 노동인구의 평균에 거의 근접하게 됐다.26 미국 군사저널 《조인트포스쿼털리Joint Force Quarterly》는 최근 기사에서 이스라엘군과 학계가 기술적으로 숙련된 장교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장기 전략을 세워 군 복무의 일환으로 과학·기술·공학·수학 과목STEM에 대한 집중 교육을 제공하고 “민간” 기술 부문과 긴밀한 연계를 구축해 온 것을 높이 평가했다. 1979년 시작된 탈피오트Talpiot 프로그램은, 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9년간 군 복무와 고급 STEM 교육을 병행하는 “이스라엘 기술 산업 CEO의 산실로 인식되고 있다.” 27 이스라엘 국가사이버감독청에 따르면, 전 세계 사이버보안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민간 기업)의 3분의 1 이상이 이스라엘 기업이고, 2021년 상반기 동안 이스라엘 사이버보안 기업들이 받은 투자금이 전 세계 해당 분야 기업이 받은 전체 투자금의 41퍼센트에 달했다고 한다. 28
이스라엘 군부는 단순히 미국 무기를 소비하거나 개조해서 받아들이지만은 않는다. 이스라엘 군부의 상품·서비스가 역으로 미국으로 수출되기도 한다. 아이언돔 미사일 방어 체계와 장갑차용 트로피 능동 방어 체계가 그런 예다.29 이 “기술 단지”는 대학, 민간 부문, 정부의 합작 투자 프로젝트다. 이곳은 나카브 사막(히브리어로 ‘네게브’)의 중심에 있는데, 이스라엘은 이 지역에서 점점 더 많은 팔레스타인 마을과 주택을 강제로 철거하고 있다. 30
팔레스타인인 추방과 이스라엘 사이버보안 부문의 관계는 비에르셰바의 가브얌 기술 단지가 잘 보여 준다. 이곳에는 도이치 텔레콤, IBM, 오라클, 록히드 마틴, EMC, 페이팔 등 주요 다국적 기업과 이스라엘 IT 군사 기업이 입주해 있으며, 이들의 사옥은 벤구리온 대학 사이버보안 연구센터와 이스라엘군 “IT 캠퍼스”와 가까운 곳에 있다.이런 식으로 시온주의 정착민 식민지 프로젝트와 이스라엘의 군사화된 경제는 국가, 사회, 경제에서 다층적으로 서로를 강화하고 있고, 그 지리적 범위는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뿐 아니라 그 너머까지 포함한다. 새로운 이스라엘 국가의 영토 내에 남아 있는 아랍계 소수를 포함해 모든 팔레스타인인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본 축적의 중심지인 군수 산업·서비스 분야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됐다. 역사적으로 이들 분야는 이스라엘 군부와 유대인 시민의 병역 의무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었고, 팔레스타인인들은 “국가 안보”라는 이유로 이 분야에서 배제됐다. 또한, 이스라엘의 중동 내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하는 각종 군사 교리, 관리 기법, 군사 기술은 다른 누구보다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자주 시험됐다.
“단결 인티파다”를 향하여?
자본 축적 과정은 끝없는 전쟁과 연이은 식민지화를 추동했고, 그로 인해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 사회의 계급 구조는 산산조각 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는 자본 축적 과정이 망명지와 점령지 모두에서 저항이 부활할 사회적 기반을 다시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레바논과 요르단 난민 캠프에 뿌리를 둔 대규모 민족주의 운동부터 1987년 1차 인티파다, 2021년 총파업[“단결 인티파다”]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투쟁의 모든 주요 물결은 사회적 불평등과 민족 억압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분출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은 본질적으로 팔레스타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과 빈민층이 자신을 빈곤케 하고 억압하는 인종차별적 체제에 맞선 항쟁이었다. 그렇지만 역사적 증거를 봤을 때,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 국가의 통제를 분쇄하려면, 팔레스타인 저항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의 경계 너머로까지 확대돼야 한다. 팔레스타인 투쟁의 성공은 더 넓은 지역의 국가들에 맞선 노동자와 빈민의 혁명적 투쟁과 더 깊이 연계되는 것에 달려 있다.
31 그런데 이번에는 준비 기간이 겨우 이틀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상황은 매우 달랐다. 팔레스타인인 수십만 명이 작업을 멈추고 정치적 행진과 집회에 참가했다. 파업은 이스라엘 국경 내 야파, 하이파, 움알팜에서 서안 지구의 헤브론, 제닌, 라말라까지 확대됐다. 32
2021년 5월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벌어진 역사적 총파업 기간에 아래로부터의 집단 행동을 통해 팔레스타인인들은 다시 단결했다. 그런 단결의 재구축은 대규모 저항이 새로 분출될 압력이 커지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미래에 벌어질 저항의 규모를 예측하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지만, 더 큰 폭풍이 다가오고 있는 듯하다. 팔레스타인 활동가 리야 알 사나는 2021년 총파업을 공식적으로 소집한 것은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을 위한 고위 긴급대응 위원회’(팔레스타인계 이스라엘 시민의 전통적인 정치 지도자들의 기구)였지만 파업을 성사시킨 힘은 아래로부터 나왔다고 지적했다. “고위 긴급대응 위원회는 … 종종 파업을 호소하지만, 그 파업은 항상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 공동체만의 파업이었어요. 보통 그런 파업 당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거리의 정치도 없고, 동원도 없어요.”33 이 활동의 기반이 된 것은 팔레스타인 청년의 수년간 행동이었는데 그 청년들은 당국에 맞선 거리 시위와 운동으로 단련돼 있었다. 청년 활동가 네트워크는 오랜 전통의 대중위원회와 함께 움직였는데 여기에는 대체로 해당 지역의 활동가들이 정치적 조류를 막론하고 모인다. 아크람 살하브와 다후드 알 굴에 따르면, 이 활동은 “수만 명의 지속적인 항의 행동이 수반된 대규모 시민 항쟁이었다. 기층의 이러한 ‘시민’ 운동과 조직 기반이 최근 항쟁이 시작될 수 있었던 바탕이었다.” 34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시위대는 동일한 요구를 제기했다 ― 가자 지구 폭격과 봉쇄를 중단하라, 동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인종 청소를 중단하라, 시온주의 정착민 운동이 팔레스타인인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폭력과 혐오 선동을 중단하라. 이렇게 요구와 시위 전술이 통일된 것을 보면, 이스라엘 당국과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도전하는 기층의 여러 운동이 일시적으로 융합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점점 고조되는 (그리고 부분적으로 성공적인) 동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주민의 시위도 포함된다. 이들은 다마스커스 게이트 같은 공공장소를 이용할 권리와 알 아크사 모스크에서 참배할 권리를 위해 시위에 나섰다. 더 일반적으로 동예루살렘 주민들은 셰이크 자라와 같은 지역에서 퇴거 명령에 맞서 집을 지키고 전투적 정착민 민병대의 인종차별적 괴롭힘에 저항하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그런 행동이 예루살렘 팔레스타인 청년들에게 불어넣은 자신감은 정치적 영역에서뿐 아니라 거리의 음악과 문화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이런 자신감은 권력자들에게 “엿 먹어라” 하는 태도로 나타나는데 “카와khawa”라는 단어 사용이 그런 예다. 대략적으로 번역하자면 “니들이 아무리 그래도”라는 뜻이다.
예루살렘에서 “카와”는 삶의 방식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시위를 “카와” 이어갔고, 숱한 억압과 셰이크 자라로 가는 입구 봉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시온주의자들이 예루살렘의 “재통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망쳤고, 구 시가지에서 예정됐던 시온주의 행진을 “카와” 취소시켰다. 그들은 알 아크사 모스크 내부에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쏟아지는 총알과 최루가스를 “카와” 견뎌냈다.
36 리드에서는 계엄령하에서 무장 정착민이 이스라엘 경찰과 함께 거리를 순찰했다. 37 예루살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런 분노스런 행위에 저항하고자 기층 공동체 차원에서 동원과 방어를 위한 새로운 조직이 구성되기 시작했다. 알 사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계 시민 사이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다. 정치적 탄압이 점점 심해지고 경제적 주변화가 지속된 결과다. 최근 몇 년 동안 일상 생활에서 그런 압박을 특히 가중시킨 요인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2018년 민족국가법이 통과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유대인 시민 대비 팔레스타인계 시민의 불평등한 지위가 공식화됐다. 사실 이는 지난 수십년 간 지속된 억압의 현실에 법적 형식을 부여한 상징적인 변화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 사이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 팔레스타인인과 공동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힘을 얻게 됐다. 둘째, 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계 시민들은 지난 수년 간 [시온주의] 정착민 운동의 괴롭힘과 폭력에 점점 심하게 시달렸다. 서안 지구 팔레스타인인들은 오랫동안 농작물과 재산을 파괴하는 무장 정착민의 인종차별적 공격을 감내해 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유대인 우월주의 극우 운동의 규모와 자신감이 커지면서, 하이파·리드·야파 등 1948년 이스라엘 국경 내 도시에서도 팔레스타인인이 표적이 되고 있다. 2021년 5월, 정착민 단체들이 무장 폭도를 동원하여 팔레스타인 가정과 사업체를 공격한 사례가 텔레그램과 왓츠앱에 다수 보고됐다.우리는 스스로 조직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역 위원회들이 건설됐다 … 지역 위원회는 기층 단체들이 자율적인 방식으로, 기성 조직 구조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조직된다. 예컨대, 하이파에서는 지역방위위원회, 법률지원위원회, 의료지원위원회, 정신건강지원위원회가 조직됐다. 다양한 형태의 지역적·독립적·협력적 위원회들이 존재하며 이번 항쟁의 일부로 활동했고, 이런 일은 하이파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움알팜과 같이 주로 팔레스타인인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북부 도시는 지난 몇 년 동안 대규모 대중운동이 벌어진 장소였다. 이런 행동은 지금까지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폭력 범죄의 물결에 맞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었다. 2021년 2월과 3월에 10주 연속으로 수천 명이 움알팜의 거리로 나왔다. 팔레스타인 활동가들은 2000년 시위 진압 이후 이스라엘 경찰서가 그곳에 세워진 것이 범죄 증가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 경찰은 정치적 저항을 약화시키려고 범죄 조직의 활동을 용인하고 심지어 조장했다. 경찰 폭력과 폭력 범죄에 동시에 시달렸던 미국 흑인들이 그랬듯이 이들 팔레스타인인의 주요 요구도 경찰력 강화가 아니라 경찰 예산 중단과 경찰 철수였다.
40 바낫은 2021년 5월 예정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의회 선거에 출마할 계획이었으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대통령은 선거를 연기했다.
한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 이후 권력을 잡았던 주류 민족주의 운동 파타의 쇠퇴가 가속화하면서 서안 지구에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공간이 열렸다. 새로운 운동들은 다양한 쟁점에 대한 응답으로 등장했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시위, 집단 행동, 자기 조직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어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에 맞서고 팔레스타인 정치범을 보호하려 한다. 어떤 활동가들은 여성에 대한 성희롱과 폭력 문제를 제기했고, 2021년 9월에는 팔레스타인 여성 청년들이 주축이 된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런 변화 속에서 최근 팔레스타인 페미니스트 운동 탈랏(“밖으로 나오다”) 같은 새로운 조직이 건설됐다. 파타 지도부의 만연한 부패가 불안의 한 원인이 됐고, 전 파타 당원조차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런 목소리를 냈던 전 파타 당원 니자르 바낫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안군에 의해 살해되자, 2021년 6월 며칠 동안 대규모 시위가 분출했다.41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압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으로 입지를 강화해 왔는데, 이스라엘 보안군이 알 아크사 모스크 참배자를 억압하자 가자 지구 국경 너머로 로켓포를 발사했다.
파타의 연장자 위주의 과두제 지도부는 이제 여러 도전에 직면했다. 현재 이스라엘에 수감 중인 파타 활동가 마르완 바르구티는 대선 입후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고 알려졌다. 동시에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슬람주의 운동 하마스가 의회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둘 것으로 보인다.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는 정치적으로 활동적이고 규모가 크다. 팔레스타인 상황에서는 이들과 연계를 맺고 이를 국제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고, 국제 연대 운동의 지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국제 연대 운동은 보이콧·투자철회·제재BDS를 중심으로 조직돼 왔다. BDS를 호소한 팔레스타인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은 낡은 민족주의 조류에서 벗어나 있고, 운동을 주도하는 것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지지자들이 아니다. SNS는 일부 젊은 활동가에게 중요한 도구다. 모나와 모하메드 알 쿠르드는 셰이크 자라의 오랜 투쟁을 널리 알리기 위해 트위터를 이용했다. 이들의 메시지는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 활동가, 정책 입안자, 자유주의적 NGO, 국제 언론을 포함한 광범위한 국제적 청중에게 전달됐다.
42 게다가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구조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을 끊임없이 민족주의적 틀 안으로 몰아가는 압력으로 작용한다. 이 때문에 역사적 민족주의 조류는 새로 다시 등장할 기회를 언제든 얻을 수 있다.(대중 저항과 계속 연관돼 있는 한 말이다.)
일란 파페가 2021년 1월 이 저널[《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언급했듯이 이런 발전이 곧 파타 등 기성 정치 조류가 모두 몰락할 것임을 뜻하지는 않는다.“경제적 파급력을 지닌 정치 파업”
기성 정치 세력이 남아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투쟁의 새로운 국면이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시작될 조짐이 보인다. 새로운 세대의 활동가들이 등장하고, 기성 정치 조류는 분열하고 있다. 반항적인 청년과 시위 문화의 확산, 기성 정치 세력의 분열이라는 조합이 익숙하게 들릴 수 있다. 이런 패턴이 1970년대 말부터 팔레스타인(과 그 너머)에서 주기적으로 일어났던 주요 대중 항쟁에서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43 이 파업은 이스라엘 경제의 특정 부문에는 심각한 영향을 줬지만, 다른 부문에 준 영향은 그보다 덜했다.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에 따르면, 이스라엘 건설 부문이 특히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2011~2012년과 2019~2021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혁명의 물결에서 배워야 할 교훈이 있다. 거리 시위의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는 “시민 항쟁”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필요한 것은 팔레스타인 반란의 사회적 측면을 세심하게 살펴서, 이 반란이 이스라엘 국가의 억압 기구를 방해하고, 마비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분쇄할 수 있을 만한 사회적 세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이다. 리야 알 사나는 2021년 총파업을 “경제적 파급력을 지닌 정치 파업”이라 설명했다.건설 붐이 일고 있는 베이트 셰메시에서 모든 크레인이 멈췄다. 한 크레인 노동자는 파업중인 크레인 노동자가 대부분 아랍인이라 말하며, “우리 모두가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그렇게 싸운다면, 무언가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 덧붙였다.
45 [반면] 약사 같은 이스라엘 보건의료 부문 등에 속한 팔레스타인 노동자 집단은 파업에 동참할 만큼 자신감이 있지는 못했다고 한다. 46
평상시에 매일 6만 5천 명의 팔레스타인 노동자가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 위해 “그린 라인”을 지나 이스라엘로 넘어가는데, 총파업 당일에는 오직 150명만 현장에 출근했고, 이로 인해 4천만 달러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다. 이스라엘 기업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버스 노동자 1000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이는 전체 버스 노동자의 10퍼센트에 해당한다.47 물론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에서 민족 해방 투쟁의 일환으로 노동자와 빈민의 정치 파업과 대중 참여를 호소하는 전략은 훨씬 더 오래됐다. 그런 전략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의 초석이 됐는데, 남아공에서는 작업장과 지역 사회에서 조직하는 방식을 결합하여 “스테이어웨이Stay-away”에 동원하는 전술을 발전시켰다.[“스테이어웨이”는 남아공 백인 도시에 출근하는 흑인들의 주거지역인 타운십에서 집단적으로 출근 거부를 조직하는 것이다. — 편집부]
작가 앤드류 로스는 2021년 총파업이 1차 인티파다[1987년 발발], 2차 인티파다[2000년 발발]의 파업 전통을 이었다고 지적했다. 노동력 제공 거부는 상점과 사업장의 영업 거부, 세금 납부 거부, 이스라엘 상품 불매 운동 등 광범위한 전술적 선택지의 일부로 종종 진행된다.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을 비롯해 다른 대중 항쟁의 경험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에 단지 노동계급의 일원으로 참가하는 데 머물지 않고, 노동자 집단으로서 스스로 조직화해야 한다는 것뿐이 아니다(물론 그것도 중요한 교훈이지만). 무엇보다 역사에서 배울 교훈은 노동계급이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경계를 넘어, 미국과 동맹해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를 지탱해 온 “자국” 국가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성숙해짐에 따라 대중운동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변화를 가져올 만큼 유의미한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성공하는 사례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유의미한 전환은 정부 직책과 자원 배분을 둘러싸고 선거 경쟁에 나설 엘리트를 만들어내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노동자와 빈민이 공공장소, 작업장, 이웃 공동체에서 착취와 억압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하고, 토론하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흔했던 경우는 민주주의를 잠시 강제하는 것에 그치는 혁명적 분출이었고, 분출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준에서 멈추기도 했다.
48 가장 재앙적인 결과로 이어진 시리아, 리비아, 예멘 같은 곳은 조직 노동자가 정치 세력은커녕 사회적 세력으로서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반면, 이집트에서 노동운동은 집단 행동을 통해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집트 혁명의 초기 궤적을 주도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집트 노동운동은 정치적으로 주변화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결과 혁명은 좌초되고 말았다.
더 장기적인 민주주의로의 전환 과정 대부분에서, 또는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만 허용됐던 경우에서도 공통점은 조직 노동자와 작업장 투쟁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는 것이다. 세계적 수준에서 보자면, 1974~1975년 포르투갈 혁명, 1980~1988년 남한의 민주주의 투쟁, 1980년대 브라질의 군사정권 타도 운동,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핵심적 구실을 했다. 중동 역사에서 봐도, 2010~2012년의 항쟁들로 열린 민주주의 공간이 가장 오래 지속된 곳은 중동에서 노동자 운동의 영향력이 가장 크고 정치적인 튀니지였다. 이것이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미래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 복잡한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이렇다. 조직 노동자들이 팔레스타인 해방의 대의를 위해 대규모 사회적 투쟁을 벌이는 것이 필요하고, 그럴 때에만 이스라엘 지배계급의 군사화되고 권위주의적인 정치 체제의 지배력에 균열을 내기 시작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역사의 경험을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1987년 1차 인티파다가 일어나기에 앞서 거의 20년 동안 노동조합 조직이 성장하는 과정이 있었다. 그 과정은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의 구조가 변화하면서 여러 사회적 문제가 제기된 결과였고,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의 구조가 변한 것은 이스라엘이 1967년 이후 점령지를 팔레스타인 ‘이주’ 노동자의 기숙사로 사용하려는 경제 전략을 취한 결과였다.50 이들 노동조합은 협소한 의미의 작업장 문제에만 집중하지 않고 광범위한 영역에서 조합원을 지원하며 탄탄한 그물망처럼 조직을 건설했다. 노동조합의 활동에는 의료, 보건, 보험·저축 서비스, 사회·문화 활동, 자원봉사, 스포츠 활동, 재정 업무 운영을 위한 위원회 등이 포함됐다. 이런 조직들은 대부분 선출됐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노조 운동의 기층 활동가들이 지역 지도부에서 전국 지도부까지 대의원 선출을 통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민주적 메커니즘이 존재했다. 51
1987년경 서안 지구에는 130개의 노동조합이 존재했다. 대부분은 250명 미만으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곳이었지만, 라말라의 건설·일반기관노동조합과 예루살렘의 호텔·레스토랑·카페 노동조합처럼 조합비를 내는 조합원 수가 평균 1000여 명인 곳도 있었다.이스라엘 내 팔레스타인인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은 이스라엘 고용주와 직접 교섭·협상을 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는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노조를 조직하는 것을 금지하는 점령지의 법 구조 때문이다. 또한 팔레스타인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도 민족 단결을 극대화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자제하거나 중단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1970년대 후반에는 부활하는 노동자 운동의 주도권을 두고 공산당과 주요 민족주의 조류(특히 파타,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 간의 경쟁이 격화됐다. 1980년 초에는 이런 경쟁으로 인해 노동조합이 정파 노선에 따라 분열됐고, 일부에서는 동일한 노동자 집단에서 정파만 다른 복수 노조가 생겨나기도 했다.
53 이에 대응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검열하는 학교 커리큘럼에 근본적으로 도전하고 교육과 저항을 연결하는 “인민 교육”을 발전시켰다. 54 의료구호위원회, 의료·사회복지 기구, 지역 사회 갈등 해결 서비스 같은 기구도 인티파다를 지속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1988년 초가 되면, 점령지 내 거의 모든 마을, 난민 캠프, 지역 공동체에서 주로 정치 활동에 중점을 두는 대중 위원회들도 등장한다. 55
1987년 12월 첫 분노의 폭발 이후에도 인티파다가 [수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대중 위원회”(아랍어로 “리잔 샤비야”), 지하 노동조합, 지역사회 조직 등 시위에 대중적 성격을 부여하는 조직 구조가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조직 중 상당수는 인티파다 전부터 존재했거나, 항쟁 수년 전부터 각종 지역 투쟁을 통해 등장할 여건이 마련된 상태였다. 그런 지역 투쟁은 또한 1987~1988년 대규모 대결을 준비하는 예행 연습이었다. 이들 대중 조직의 활동 범위는 시위 조직·동원을 한참 넘어 교육·보건 같은 분야에서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대안 서비스를 구축하는 데까지 확장됐다. 이스라엘이 학교를 폐쇄한 동안 대안 교육을 제공하려 했던 팔레스타인 교사들이 좋은 예다. 교육자이자 활동가인 야밀라 후세인은 이스라엘 당국이 인티파다 기간에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위한 교육을 사실상 범죄화했다고 지적한다. 이스라엘 보안군은 “‘지하’ 수업에 참여하거나 심지어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학생과 교사들을 괴롭히고 체포했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탄생으로 이어진 1990년대 오슬로 협정 기간 동안 풀뿌리 노조 조직과 지역 기반 동원 네트워크가 모두 쇠퇴했다. 주류 민족주의 조직, 특히 파타의 활동가층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조직을 건설하는 데에 힘을 쏟았고 그것이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향한 발판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은 함정이었다. 이스라엘 정착촌은 더 확산됐고, 팔레스타인 토지·수자원·인구 밀집지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제 매트릭스”(제프 할퍼의 표현)는 더욱 강화됐다.57 2016년 파업에는 거의 3만 5천 명의 교사가 참가해 팔레스타인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교사 파업을 벌였다. 노조 지도부가 “조합원들의 대변자이기보다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중재자 구실”을 했음에도 말이다. 58
주요 민족주의 정파들은 노동자들이 팔레스타인 사업체에 맞서 권리 투쟁을 벌이거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도전하는 것을 전통적으로 자제시켰다. 민족 해방 투쟁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제 이 계급 투쟁의 “빙하기”가 끝날 조짐이 보인다. 2012년 택시 노동자 파업, 2016년과 2020년 교사 파업 등이 그 사례다. 그렇지만 앞서 여러 이유로 밝혔듯이 이스라엘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가 작동하는 방식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계급적 힘을 실현하기 어렵도록 구조적 장애물을 만들어 낸다. 팔레스타인 공공부문은 국제 지원과 이스라엘의 자금에 의존해 운영되고 있다. 또한 이스라엘의 도로 차단과 정착민의 토지·수자원 점령 때문에, 팔레스타인 농업과 산업의 상당 부분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훼손됐다. 이런 “탈개발” 과정은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의 전략적 힘을 약화시켰다.60 또한, 이 “노총”은 수십 년 동안 거대한 고용주이자 국가 기관이기도 했다. 또 히스타드루트는 자신이 대표하기를 거부한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에게서 의료 보험과 사회보장제도를 명목으로 수백만 달러를 강제로 거둬 갔다. 오슬로 협정에서 이 자금을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노조에 이체하기로 합의했지만 히스타드루트는 이것도 거부했다.
동일한 아파르트헤이트 구조가 이스라엘 유대인 노동자들에게는 경제적 투쟁의 정치적 위험성을 제거시켰다. 그들의 파업이나, 2011년에 생활 수준 하락에 항의해 노동계급과 중간계급이 벌인 “사회 정의” 시위 물결 같은 대규모 사회적 항의 운동조차 시온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팔레스타인인과의 연대를 보여 주지 못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유서 깊은 노동조합은 정착민 식민지 조직체의 일부였고, 그것도 이스라엘 국가 설립 전부터 그랬다. 영국 위임통치 시절, 이스라엘 노동자총연맹(“히스타드루트”)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경제에서 배제하는 인종차별적인 “유대인 노동” 정책을 선도했다. 히스타드루트는 준군사조직 하가나(“수비대”라는 뜻)를 창설했는데 하가나는 나크바 기간 동안 자행된 팔레스타인 인종 청소에서 중추적 구실을 담당한 시온주의 민병대 중 하나다.61 코치 라오브딤과 2300명의 조합원을 보유한 ‘노동자 자문 센터-마안’ 노조는 팔레스타인인도 조합원으로 받고 있지만 작가 수마야 아와드와 다프나 티어가 지적하듯이 두 노조 모두의 유대인 조합원은 시온주의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노동조합 운동과 정착민 식민주의가 얽혀 있다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 중반 이스라엘의 의료개혁으로 노조원 자격과 의료보험 가입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히스타드루트의 조합원 수는 급감했다. 그러나 히스타드루트가 더 진보적인 대안으로 대체되지는 못했다. 이제 세력이 작아진 히스타드루트의 조합원 수는 70만 명 수준이다. 둘째로 큰 노조연맹이 된 곳은 히스타드루트 레우밋(“민족 히스타드루트”)로 강경 우익 리쿠드당과 연계돼 있고 조합원 수는 10만 명이다. 그 뒤를 잇는 노조연맹은 좀 더 좌파적인 코치 라오브딤(“노동자에게 힘을”)으로, 2018년 기준 이들의 조합원 수는 1만 3천 명에 불과하다(단체 협약에서는 약 3만 5000명의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지만 말이다).이스라엘 노조는 유대인 조합원에 의해 오른쪽으로 끌려간다. 조합원을 늘리기 위해서는 [팔레스타인] 점령 문제를 제쳐 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화될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아파르트헤이트 경제에서 노동의 본질이다. [아파르트헤이트 경제하에서] ‘거의 완전하게 분리된다’는 것의 의미는,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이 서로 동료로 함께 일할 경우가 거의 없도록 사회가 설계됐다는 뜻이다. 이들은 서로 분리돼 있고, [그런 경제는] 인종차별을 고착화하고,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계급 의식을 압도하게끔 만든다.
팔레스타인과 중동 지역의 혁명
세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노동계급은 과반을 이루고 착취라는 운명을 공유하지만, 노동계급은 억압의 경험 때문에 분열돼 있다. 현재로서는 이 노동계급 중 이스라엘 유대인 부문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는 인종차별의 지배력이 확고부동해 보인다. 이 인종차별적 사상은 계속 자기 복제하며 견고하게 형성되고 있는데, 그 사상이 전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상을 낳는 물질적·사회적 과정이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정치경제학을 계속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 물질적·사회적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포함된다. 이스라엘 지배계급이 정착민 식민지 국가 건설 프로젝트를 위해 미국에서 받고 있는 막대한 보조금, 이스라엘 경제가 군산복합체에 의존하고 이스라엘 군산복합체는 다시 미국의 거대 군산복합체에 기생하는 것, 급증하는 유대인 정착지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
63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안에서 유대계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의 숫자가 거의 비슷하다는 점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에 정치적 도전을 제기한다. 팔레스타인인이 현재의 이스라엘 국가를 군사적으로 패퇴시키는 것은 설사 주변 국가와 연합하더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더욱이 전쟁 상황이 되면 이스라엘의 노동계급 유대인이 “자신들의” 국가와 “자신들의” 군대에 갖는 유대감만 강화할 것이다. 자신들이 패배하면 생존이 직접적으로 위협받는다고 두려워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세워 모두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하자는 대안을 제시하며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오직 유대인만의 국가만이 유대계 이스라엘인을 보호할 수 있다)을 반박하는 것이 중요하다.
휴먼라이츠워치는 팔레스타인과 유대인 인구가 각각 약 680만 명이라고 보고했다.팔레스타인에 진정한 민주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변화의 깊이와 규모를 고려하면, 팔레스타인에서의 투쟁과 더 넓은 중동 지역의 투쟁이 얼마나 긴밀한지 알 수 있다. 군사화한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무로 돌리는 것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주변의 권위주의 정권들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은 도전이다. 둘 모두 가능하다는 희망의 핵심 근거가 있는데, 팔레스타인에서의 혁명적 투쟁과 더 넓은 중동 지역에서의 혁명적 투쟁이 서로 강화해 온 역사가 수십 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더 넓은 중동 지역에서 항쟁의 파도들이 패배한 역사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이런 혁명적 투쟁 간의 상호작용을 우연에 내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다. 패배를 피하려면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린 혁명적 조직이 팔레스타인과 주변 국가에 모두 각각 존재해야 한다.
2011년 이후 대중 항쟁의 경험이 이런 점을 잘 보여 줬다. 튀니지가 대규모 파업과 시위로 독재자 벤 알리 정권을 무너뜨리며 앞장섰고, 이집트·시리아·바레인·리비아·예멘에서도 연이어 봉기가 일어났다. 사우디아라비아조차 혁명의 파도를 피할 수 없었는데, 바레인과 가깝고 시아파 인구가 많은 동부 지역이 대규모 시위로 뒤흔들렸다. 도시 빈민, 조직 노동계급, 중간계급에서 중요한 부문들이 참여한 대중 시위로 이 지역에서 혁명이 시작됐다. 이 사건들은 제국주의 체제의 약한 고리에 속했던 중동 독재 정권들에 균열을 낼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이었다. 여러 나라에서 독재 정권이 잇따라 흔들렸고, 튀니지·이집트·리비아·예멘의 독재자들은 쫓겨났다.
이런 사건들이 벌어지는 기간 내내 팔레스타인 투쟁에 대한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연대가 중동 전역을 아울렀고 이 혁명 과정의 몇몇 특정 시점에서는 그런 연대가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이는 아랍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 좌파의 쇠퇴(1970년대와 1980년대에 국가 권력에 가까워지면서 위기에 빠졌다)나 “평화 프로세스” 기간에 팔레스타인 민족 지도부가 배신했음에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가 이를 견뎌 내고 살아남았음을 증명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대는 [2011년] 혁명 전부터 “시위 문화”가 성장할 때마다(특히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빠짐없이 나타나는 특징에 속했다. 팔레스타인 쟁점은, 반反정부 정치 스펙트럼(아랍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자유주의, [세속주의] 좌파 등)에서 활동 중심이 상이한 이들 사이에서 가교가 될 잠재력이 있다. 이슬람주의자들과 다른 정치 세력 간의 공식적인 협력과 공동 활동은 비교적 드물지만, 팔레스타인에 대한 광범위한 연대만큼은 분열된 반정부 운동들을 종종 하나로 묶는 합의점이 됐다. 팔레스타인 쟁점은 중동 지역의 다른 쟁점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대규모 집단 행동을 촉발할 수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줬다.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혁명적 위기 상황에서도 계속 확대·강화됐다. 예컨대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은 2011년 5월 나크바의 날에 일어난 타흐리르 광장 시위가 몇 달 후에는 보안군과 대규로 충돌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2011년 9월 이스라엘 대사는 시위대가 대사관을 포위하자 카이로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2012년 11월 이스라엘군의 가자지구 폭격은, 이슬람주의 무슬림형제단이 의회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뒤라는 변화된 정치적 상황에서 벌어졌다. 이집트 활동가들은 봉쇄된 가자 지구로 연대 구호품을 반입하는 수송대를 조직했고, 이집트 총리 히샴 칸딜조차 이스라엘의 미사일이 쏟아지는 가자 지구에서 하마스 지도부와 함께하는 모습을 잠시라도 보여야 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반혁명이 자리를 잡으면서 혁명의 전진이 멈추고 후퇴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개혁주의적 이슬람주의 정치 세력은 혁명 이후 선거를 통해 국가 기구에 부분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됐지만 그들은 이집트 국가 내 군부의 역할이나 이집트 군부가 이스라엘·미국과 맺은 관계에 명시적으로 도전하길 거부했다. 이스라엘과의 “평화”라는 각본에서 벗어날 경우, 국제 원조와 투자를 얻기가 매우 어려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슬림형제단 지도부는 군부 지도부와의 협상으로 권력을 분점하길 희망했다. 2012년 무슬림형제단을 대표해서 당선한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은 이런 행보의 일환으로 육군 원수 압델 파타 엘시시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엘시시는 이후 쿠데타를 일으켰다.
둘째, 혁명적 운동이 거리의 대규모 시위와 작업장의 파업을 일으켰지만 개혁주의자들이 군부의 국가 통제에 도전하도록 내몰릴 만큼 충분한 압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개혁주의 이슬람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연대를 오래 공언했음에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 파기를 실행하기를 꺼렸다. 만일 2011년 또는 2012년 당시에, 이스라엘-이집트 간의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을 폐기하라는 대중 운동이 있었으면 거대한 정치 위기가 발생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 운동은 이집트 군대가 미국과 그 동맹국 이스라엘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는 것에 대중의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주의 운동은 기존 정치 체제를 교란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 들어가기를 열망했다.
한편, 2010년과 2011년 항쟁이 일어난 중동 다른 지역에서는 구 정권이 군사적으로 반격하면서 내전 속 교착 상태에 빠졌고, 종종 세계적·지역적 제국주의 세력이 그 분쟁에 끼어들었다. 오직 튀니지에서만 대중 운동은 진정한 정치 개혁 프로그램을 국가 기구에 강제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혁명의 과정이 탈선한 결정적인 원인은, 기존 정권에 대항하는 사회·정치 세력의 연합 속에 조직 노동자 운동이 없었던 것이다. 바레인에서는 2011년 3월 봉기에서 노동조합이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이웃 사우디아라비아가 외부에서 군사 개입을 하면서 운동이 패배했다.
65 1차 인티파다와 달리 2차 인티파다에서 팔레스타인 저항은 보다 군사적인 형태를 띠었고 무장단체가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하며 이스라엘 민간인 수백 명을 살해했다. 하마스는 이 전략을 적극 지지한 이들 중 하나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힘의 비대칭을 해소하려 했다. “평화 프로세스”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에 실패한 만큼 이 방법을 통해 협상에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길 기대했다. 66 그러나 2차 인티파다는 지난 10년간의 후퇴를 되돌리지 못했다.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통제력은 훼손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우파 정부는 인종차별적이고 억압적인 정책이 대중의 지지를 얻은 것에 고무받아 정착민의 팔레스타인 땅 점령을 확대했고, 거대한 장벽을 건설해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의 공동체를 “분리”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패배로 팔레스타인 운동 지도부 내 분열은 심화됐고,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각각 파타와 하마스가 지배하는 두 개의 경쟁하는 팔레스타인 정부가 등장했다.
혁명이 패배한 또 다른 요인은 팔레스타인의 대중운동이 소강 상태에 있던 것이다. 이런 국면은 2차 인티파다가 쇠퇴한 후에 찾아왔는데, 2차 인티파다는 2000년 9월 이스라엘 우파 정치인 아리엘 샤론이 경찰 1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알 아크사 모스크 지역을 방문하자 분출한 항쟁이었다. 당시 시위는 다시 한 번 잔혹한 탄압에 직면했고, 항쟁이 일어난 초기 수주 동안 거의 500명이 살해당했다.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혁명을 옹호하며
이스라엘 지배계급과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 간 균형은 장기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정치경제학에 뿌리를 둔 이스라엘의 지배와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위에서 설명한 대규모 사회적 과정에서 계속 자양분을 얻고 있다. 그렇다고 팔레스타인 운동이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거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가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불굴의 세력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억압·불의·착취에 맞선 빈민의 투쟁에 뿌리박은 한 되살아날 것이고, 또 이를 혁신할 대중적 기반이 있다는 뜻이다.
새로운 대중 투쟁이 다시 시작된다면, 팔레스타인과 중동의 활동가들은 이전 세대의 운명을 피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 글은 혁명적 전략을 발전시키기 위한 분석을 제시했다. 그 전략이란 팔레스타인 해방을, 더 광범한 중동 지역에서 노동계급의 힘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혁명적 운동을 건설하는 투쟁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적 지향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이스라엘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지역 수준에서 제국주의 동역학의 일부로 기능하는 동시에 그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스라엘 아파르트헤이트는 시대착오적으로 살아남은, 즉 식민지 시대와 함께 사라질 기회를 놓쳤을 뿐인 “미완의 과제”가 아니다. 오히려 세계 제국주의 열강에게 중동 지역이 여전히 각별히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둘째, 계속 부활하는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은 중동에서 혁명적 위기와 대중 항쟁이 되풀이되게 하는 사회적·정치적 과정의 구체적 사례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투쟁에서 지배적인 정치적 틀은 독립 국가 건설에 집중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팔레스타인 대중운동의 사회적 측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운동의 지도부는 대체로 중간계급이나 망명한 팔레스타인 부르주아 출신이지만, 운동 자체는 점령지와 피난처 모두에서 여전히 팔레스타인 빈민과 노동계급 다수의 투쟁에 깊게 연결돼 있다. 팔레스타인 저항은 여전히 중동 지역 대중운동의 모범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평범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의 투쟁에서 자신의 투쟁이 투영된 모습을 볼 수 있고, 자신을 억압하는 바로 그 정권이 미국과 그 동맹국에 직접 협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또한 이스라엘 국가를 보는 관점을 뒤집고자 했다. 이스라엘은 자신을 “중동의 예외적인 민주주의 국가”라고 거짓되게 내세우지만, 실은 중동에서 “국가를 가진 군대”의 또 다른 사례일 뿐이다. 비록 다른 주변국보다 더 성공적으로 최강의 제국주의 열강의 보조금을 받아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경찰력을 강화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은 고도로 군사화된 주변의 다른 권위주의 정권들과 동일한 부류이다. 냉정한 평가로는 이스라엘 국가는 요르단강에서 지중해까지의 팔레스타인 땅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권위주의적 기구이다. 이런 분석에서 나오는 결론 하나는, 그런 국가가 자발적으로 영토의 일부를 포기하고 바로 옆에 실질적인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의 등장을 허용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는 것이다. 세계 최대의 제국주의 강대국이 반세기 넘게 이스라엘 국가에 돈과 무기를 쏟아부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극복해야 할 또 다른 과제도 있다. 역사를 돌아봤을 때 이스라엘 경제의 전략적 핵심 부문에서 팔레스타인 노동자를 배제하는 시온주의 전략이 야기한 객관적 한계를 팔레스타인 투쟁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는 일반적으로 조직 노동자들이 지배계급과 혁명적으로 대결할 때 발휘하는 전략적 힘을 팔레스타인 운동은 발휘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레스타인인 수백만 명이 인근 지역에 파편화돼 흩어져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팔레스타인 투쟁이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 내부에 국한된 채 순전히 인원 수에 의존해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에 맞서는 것으로는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쟁점을 더 넓은 지역에서 혁명적 운동을 건설하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로 자리매김할 방법을 찾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전략을 무에서 만들 필요는 없다. 나크바 이후 팔레스타인 1세대 혁명가들이 벌인 투쟁, 1980년대 말의 봉기(1987년 1차 인티파다 포함), 2011년 이후 중동 지역의 혁명 물결 등 이전 투쟁의 경험에서 배울 수 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봤을 때,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를 중동 다른 국가들의 혁명적 운동의 중요한 일부로 만들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레바논과 요르단처럼 팔레스타인 난민 공동체가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는 국가에서 가능한 방법이다. 1960년대 팔레스타인 민족 운동의 부활이 보여 줬듯이 팔레스타인 투쟁은 그 나라의 계급투쟁과 상호작용하며 위기를 촉발시키고 국가에 맞서는 투쟁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는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운동에 대중을 동원함으로써 현지 계급 투쟁을 촉진하는 방법이다. 이는 팔레스타인 난민 인구가 많지 않은 국가에서 역사적으로 있어 왔다. 이런 방법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기층 동원의 정치적 측면과 경제적 측면 간의 “상호작용”이라 부른 동역학적 과정이 일어나거나 심화될 때 가능해진다. [2010~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 이전의 역사를 보면, 팔레스타인 연대 문제가 거리와 작업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팔레스타인 연대는 “거리 시위의 문화”를 하나로 묶을 수 있도록 일조했다. 작업장에서도 팔레스타인 연대는 2010~2011년 혁명 발발 전부터 노동자들을 “정치”로 조직하도록 해 준 몇 안 되는 쟁점이었다. 게다가, 미국-이스라엘-중동의 다른 군부 사이의 3각 동맹은 여러 국가에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저항과의 연대는 현지 군 당국에 맞서는 대중 동원을 건설할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팔레스타인과 더 넓은 지역에서 벌어진 다양한 형태의 투쟁에서 배울 점이 있다. 국가의 핵심에 있는 군부에 맞서고, 그에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무너뜨리기 위한 효과적 전략이 없으면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1970년대 초 팔레스타인의 첫 번째 혁명적 조직화 물결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민족주의 지도부는 “검은 9월” 당시에 요르단 왕정과 대결하지 않고 물러섰고, 레바논에서는 내전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1987년 1차 인티파다로 정점을 찍은 두 번째 물결 동안에는 같은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중동 정권들과 함께했고,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원하며 중동 정권들을 위협한 대중 운동과 팔레스타인 투쟁 연대가 서로 강화되는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했다. 2010년 이후 혁명이 벌어질 때에는 대중적인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들은 주류 개혁주의 정치 세력이 그어 놓은 한계에 도전했다. 개혁주의 세력들은 군부와 타협하고 국가 기구를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시했다.
반혁명과 전쟁의 불길이 이집트·시리아·리비아·예멘을 휩쓴 지금,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혁명의 귀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되물어야 한다. 혁명적 전망이 실현되도록 조직하고 준비하는 것 외에 다른 진정한 대안이 있냐고 말이다. 2019~2020년에 대중운동이 일어난 모든 나라는 2011~2012년 혁명 물결의 패배와 맞먹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예컨대, 내전을 겪은 레바논과 알제리, 제재·전쟁·점령을 겪은 이라크, 여러 전쟁과 인종 학살을 겪은 수단. 팔레스타인 인구 다수가 살고 있는 요르단은 지난 투쟁의 시기에 혁명도, 재앙적 패배도 경험하지 않았다. 물론 시리아의 사회적 재앙이 남긴 깊은 상처가 아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곳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더 큰 불행을 겪을 것이다. 이집트에서 반혁명의 상흔도 오래 가겠지만 시리아와 달리 이집트 사회는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군부의 지배력은 강고하지만 그래도 산발적인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어떤 종류의 반정부 운동이 살아남아 다시 부상할지, 그리고 그 안에서 좌파의 세력이 얼마나 강할지는 불확실하다. 확실한 것은 현재 군사 정권을 보며 독재 정권에 반대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팔레스타인이 각인됐다는 것이다. 이집트 활동가이자 블로거 알라 압드 엘파타는 2021년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진 총파업과 하마스의 텔아비브 로켓 공격 소식이 자신이 수감된 토라 교도소에 은밀하게 전해졌을 때의 반응을 이야기했다. 팔레스타인 저항에 환호하는 노래와 구호가 좌파, 이슬람주의자, 민족주의 활동가들의 감방 사이로 울려 퍼졌다고 한다.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대중 시위의 성장과 쇠퇴라는 쳇바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은 반드시 노동계급의 사회적 힘 속에 뿌리내려야 하고, 개혁주의적 타협의 압력과 민족주의의 유혹을 뿌리칠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런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은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과 중동 지역 전체에서 기존 국가를 분쇄할 수 있는 대중 운동 건설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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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nne Alexander, ‘Ending apartheid in Palestine: the case for a revolutionary strategy’, International Socialism, 173 (Winter 2022).
↩
- 이 원고에 조언을 준 조셉 추나라, 리처드 도널리, 롭 퍼거슨, 톰 힉키, 실라 맥그리거, 존 로즈에게 감사드린다. 이 글에서 “역사적 팔레스타인”이란 요르단강과 지중해 사이의 영토를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는 이스라엘 국가, 서안 지구, 가자 지구로 나뉘어 있다. ↩
- Human Rights Watch, 2021. ↩
- B’Tselem, 2021. ↩
- 현재 이스라엘과 같은 식으로 시민권을 제한하는 국가는 거의 없다. 헌법에 정치적 권리(대통령 피선거권)을 특정 종교 신자(또는 남성)에게만 보장한다는 구절이 포함된 국가는 이보다 좀 더 많다. 사회주의자라면 당연히 이런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조처에 모두 반대해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처럼 헌법으로 비유대인에게는 국가 공동체에 온전하게 속할 자격을 부여하길 거부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도 사실이다. 현재 대다수 국가는 새로운 구성원이 혈연, 민족, 종교에 따른 제한 없이 국가 공동체에 합류할 수 있는 방법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제공한다. ↩
- Callinicos, 1985, p31. 팔레스타인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형태가 지역적·세계적 제국주의 동역학에 깊숙이 연관된 과정으로 지탱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주의 타도 전에는 결코 종식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아공처럼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더라도] 자본주의 국가는 유지하는 개혁주의적 타협은 언제나 가능하다. 이 점에 대해서는 Callinicos, 1990과 1992를 참조하라. ↩
- 나크바는 아랍어로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시기 자행된 인종 청소를 지칭하는 용어다. 당시 시온주의 민병대가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파괴하면서 85만 명이 난민이 됐다. ↩
- Rodinson, 2014. ↩
- Rose, 1986. ↩
- Orr and Machover, 2002. ↩
- Alexander, 2018. ↩
- Callinicos, 2014; Alexander, 2015. ↩
- Cliff, 2001. ↩
- Engels, 1884; Lenin, 1917; Liebknecht, 1973. ↩
- Lenin, 1917. ↩
- Trotsky, 1930. ↩
- Cliff, 1990. ↩
- Angus, 2016. ↩
- Pappé, 2006. ↩
- Alexander and Bassiouny, 2014. ↩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13. ↩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2013. ↩
- Jewish Virtual Library, 2018. ↩
- Sabella, 1993. ↩
- Lieberman, 2018; Swirski, Attias-Konor and Lieberman, 2020, p18. [정통파 유대인 이스라엘인들은 빈곤층에 속한다. - 옮긴이] ↩
- Sultany, 2012. ↩
- Dougherty, 2020. ↩
- Dougherty, 2020. ↩
- Solomon, 2021. ↩
- Hirschauge, 2015. ↩
- Masarwa and Abu Sneineh, 2020. ↩
- Notes From Below, 2021. ↩
- Kingsley and Nazzal, 2021. ↩
- Salhab and al-Ghoul, 2021. ↩
- Salhab and al-Ghoul, 2021. ↩
- Hassan, 2021. ↩
- Maiberg, 2021. ↩
- Ziv, 2021; Notes From Below, 2021. ↩
- Notes From Below,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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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u Amer,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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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tes From Below, 2021. ↩
- Yaron, 2021. ↩
- Yaron, 2021. ↩
- Kingsley and Nazzal, 2021. ↩
- Ross, 2021. ↩
- 튀니지의 민주주의 실험이 중동 다른 지역에 비해 오래 지속되고 있지만, 그걸 이유로 튀니지일반노총UGTT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할 수는 없다. UGTT 지도부에게도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이 지닌 혁명적 잠재력을 약화시켜 권위주의적 대통령 체제가 일부 부활하게 된 것에 책임이 있다. ↩
- Hiltermann, 1993, p64. ↩
- Hiltermann, 1993, p69. ↩
- Hiltermann, 1993, p70. ↩
- Hiltermann, 1993, p69. ↩
- Hussein, 2005, p17. ↩
- Hussein, 2005, p19. ↩
- Chenoweth and Stephan, 2012, p124. ↩
- Halper, 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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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u Moghli and Qato, 2018. ↩
- Roy, 1987. ↩
- Pappé, 2006. ↩
- https://workers.org.il/?lang=en ↩
- Awad and Thier, 2021. ↩
- Human Rights Watch, 2021. ↩
- Al Jazeera, 2012. ↩
- 2000년 9월 29일에서 2001년 1월 1일까지 이스라엘 보안군은 팔레스타인인 487명을 살해했고, 그중 124명이 아동이었다. 같은 기간 이스라엘 보안군은 44명, 민간인 112명이 팔레스타인인에게 살해당했다. https://statistics.btselem.org 참고. ↩
- Matta and Rojas, 2016. ↩
- Abd el-Fattah,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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