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이 패배한 전쟁과 헤즈볼라 *
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 방위군이 전면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다.
― 올리버 로이, 〈파이낸셜 타임스〉
이번 군사 작전에서 새롭고 특히 놀라운 것은 그 결과다. 아랍인들은 이미 이 전쟁을 6차 중동전쟁(아랍-이스라엘 전쟁)이라 명명했다. 그리고 아랍인과 이스라엘인의 일부에게, 이번 전쟁은 전략적·심리적·정치적 중요성 측면에서 어쩌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전쟁’ 이후 가장 중요할 수도 있다. … 소규모 비정규군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를 한 달 넘게 막아냈고, 상당한 손실을 입혔다.
― 데이비드 허스트, 〈가디언〉 베테랑 중동 특파원
이스라엘 군 당국은 리타니강 남쪽에서 이스라엘군이 ‘청소’와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다고 하지만, 레바논인들이 보기에 ‘소탕’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헤즈볼라인 것 같다. 어제 밤까지도 이스라엘군은 추락한 헬기의 사망한 자국 병사들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 헬기는 지난 토요일 밤에 격추돼 레바논 측 계곡에 추락했다.
― 로버트 피스크, 〈인디펜던트〉, 전쟁의 마지막 날에
헤즈볼라는 이스라엘에 큰 군사적 타격을 줄 수 없었다. 베트남 저항군이 압도적인 힘의 불균형 때문에 미국에 큰 군사적 타격을 가할 수 없었듯이, 그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또한 헤즈볼라에 어떤 타격도 줄 수 없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지난 33일간의 전쟁에서 헤즈볼라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질적인 정치적 승리를 거뒀고, 이스라엘은 사실상 패배했다.
― 질베르 아슈카르, 프랑스 거주 레바논계 마르크스주의자
헤즈볼라는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파괴되지도 않았고, 무장 해제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진지를 잃고 후퇴하지도 않았다. 헤즈볼라 전사들은 전투에서 자신을 증명했으며, 심지어 이스라엘 병사들에게서도 찬사를 받았다. … 이스라엘 내에서는 이제 실망과 낙담의 분위기가 만연하다.
― 유리 아브네리, 이스라엘 저술가
지난 여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와 레바논을 상대로 33일 동안 벌인 전쟁이 끝난 후, 모든 이들이 같은 결론을 내렸다. 헤즈볼라를 분쇄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던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굴욕으로 끝난 것이다.
1 그들의 목표는 간단했다. 이란에 대한 공세의 일환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레바논에서 이란의 영향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게 하고, 이를 통해 이라크 내 시아파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결과에 놀란 것은 이스라엘 군부만이 아니다. 대실패로 점철된 이라크전으로 망가진 미국의 세계 패권을 회복하려는 [당시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그의 하위 파트너 [당시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에게도 이는 재앙이었다. 미국 행정부는 7월 12일 공습으로 시작된 이스라엘군의 공격을 최소한 묵인했고 미국 저널리스트 시모어 허쉬가 주장한 것처럼 그 공격을 계획하는 데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찰스 크라우트해머는 〈워싱턴 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헤즈볼라가 패배했더라면 정신적으로나 전략적으로나 이란에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이란은 레바논에서 기반을 잃었을 것이다. 이란은 중동을 불안정하게 해 자신을 중동의 핵심으로 도약케 할 주요 수단을 잃었을 것이다. 지역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이란의 시도가 지나친 욕심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미국 정부는 쉽게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니 슈크랄라(이집트 카이로의 유력 주간지 〈알아흐람〉의 수석편집자)는 이스라엘과 미국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헤즈볼라의 목은 ‘잘 익어서 딸 때’가 된 것처럼 보였다. 1년 전, 상당수 레바논 국민이 시리아가 자국에 행사하는 정치적·군사적 지배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 미국은 드물게도 ‘늙은 유럽’의 최고 대표 프랑스의 적극적 지지를 얻었다. … 아랍 정권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헤즈볼라가 사라지길 원했다. ‘시아파 초승달 지대’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고 침울하게 중얼거리며 말이다. …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 전략의 성공을 어찌나 확신했던지 목적 달성까지 1주면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결과는 매우 달랐다.
“1주가 2주가 되고, 2주가 3주가 됐지만, 레바논은 무너지지 않았다. … 레바논을 공격한 지 17일이 지난 후, 이스라엘은 일주일 전에 점령했다고 주장했던 레바논 남부 도시 빈트 주베일에서 정예 골라니 여단을 철수시켰다.”
이스라엘과 미국이 군사적·정치적으로 큰 진전을 이룰 기회라 믿었던 이 전쟁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모든 이들이 말을 바꿨다. 처음에 헤즈볼라를 분쇄하겠다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헤즈볼라의 로켓이 북부 이스라엘 도시에 닿지 않게 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불과 1주일 전만 해도 휴전 요청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말 그대로 세계 여론을 비웃던 미국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레바논을 방문해 양측이 치르고 있는 ‘큰 희생’에 대해 말했다. 이 전쟁을 기꺼이 못 본 척하거나 이스라엘의 공격이 ‘과하다’고 중얼거리는 데에 그쳤던 유럽은 이제 … 이스라엘의 잔인성과 민간인 학살을 실제로 규탄할 태세다. … 그리고 ‘아랍 우방들’도 또다시 난처한 처지에 있다. 자국 민중의 분노에 직면한 그들은 이제 서로 앞다퉈 가며 격렬하고 화려한 수사를 궁리해 내 이스라엘을 비난했다.”
이는 이전 아랍-이스라엘 전쟁과 비교해 매우 다른 양상이었다. 이전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매우 신속하게 승리했고, 아랍 군대는 매우 빠르게 화평을 청했다. 1967년 전쟁은 이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당시 이스라엘군은 아랍 3개국의 군대를 6일 만에 격파하고, 서안지구, 가자지구, 골란고원(39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이 점령 중), 시나이 반도(1977년 평화 조약 이후 이집트에 반환)를 장악했다.
6 이 승리는 중동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아랍 민족주의자 한 세대 전체에게 1967년의 패배는,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하고 팔레스타인을 해방시키려던 그들의 계획이 파탄났음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제 아랍 군대가 승리한 것이다.헤즈볼라 승리의 배경 과거 이스라엘이 쉽게 승리할 수 있었던 데는 (195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로 인한) 군사 장비의 우월성 외에도 두 가지 주요 이유가 있었다.
- 당시 이스라엘 군대의 병사들은 아랍 군대의 병사들보다 훨씬 더 결의에 찬 전사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았고, 그 땅을 지키려면 싸워야 할 수밖에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 측면에서 이스라엘군은 (아랍인에 비해 특권적 위치에 있었음에도) 일종의 시민군 또는 인민군의 특성을 일부 가졌다. 반면, 당시 토니 클리프가 지적했듯, 1967년 전쟁에서 여러 아랍 국가의 군대는 진지하게 싸울 생각이 없는 두 집단으로 구성돼 있었다. 8 장교단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위해 희생하기보다는 자국에서 자신의 사회적·특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농민 징집병들에게도 팔레스타인인들이 땅을 빼앗기지 않도록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라고 기대할 수 없었는데 그들 자신들도 땅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 주로 교육받은 정착자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군대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농민 징집병으로 구성된 아랍 군대보다 현대의 정교한 무기를 훨씬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번 여름 전쟁에서는 양측 모두 여러 요소가 달라졌다.
- 헤즈볼라는 기성 정부가 결성한 조직이 아니며, 조직의 간부들도 사회적 지위 향상에 주되게 관심을 두는 특권층이 아니었다. 헤즈볼라는 오히려 레바논 사회에서 다른 집단에게 당한 억압과 1982년 이후 이스라엘군의 군사 점령 경험에 반발한 사람들이 아래로부터 형성한 조직이었다. 가진 게 얼마 없는 이들이 그나마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의식적으로 벌이는 투쟁 속에서 헤즈볼라가 만들어진 것이다.
- 동시에, 수십 년 동안 교육 수준이 느리지만 향상되면서 오늘날 아랍 대학들은 정교한 무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력을 갖춘 인재를 매년 수천 명씩 배출하고 있다. 헤즈볼라의 한 구성원은 이렇게 적었다. ‘교육받고 교양 있는 구성원들이 늘어나면서 현대적인 컴퓨터·통신·다양한 공학 기술의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9
11 ) 새로운 정착자들은 새 사회 건설을 위해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이미 건설된 사회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왔다. 그들은 징집돼 서안지구 점령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는 요새화된 초소와 중무장 탱크 안에서 보호받으며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는 일이었지, 실제 전투가 아니었다.
이런 특성을 갖춘 아랍 군대가 마침내 등장한 반면, 이스라엘 군대는 예전 승리 요인을 일부 잃었다. 남의 땅 위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결의에 찬 초기 정착자 사회는, 40년 동안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던 2~3세대가 다수인 사회로 바뀌었다. (대다수가 정말 유대인인지 미심쩍은 100만 명의 러시아인들처럼전 이스라엘 교육부 장관 요시 사리드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스라엘 보안군(이하 IDF)은 이번 레바논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았다. … IDF는 군대처럼 기능하고 준비해 온 대신 흡사 외인부대나 경찰처럼 배치되고 행동해 왔다. … 젊은 병사와 장교들은 인티파다가 발발했을 때 그것이 전쟁이란 얘기를 들었다. … 그러나 점령지 내 전투와 전쟁은 전혀 다르다. … 수배 중인 테러리스트를 체포하기 위해 집을 둘러싸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특정 요인의 암살은 전쟁이 아니다. 공장을 습격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다. 심지어 라말라의 야세르 아라파트의 본부를 포위한 것도 책에 기록될 만한 군사작전이 아니다. IDF가 점령을 시작한 이래로 점령지들에서 벌어졌던 거의 모든 일은 사실 가장 호사스러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위 변화로 인한 결과는 이렇다. 이스라엘군은 민간인을 목표로 한 공중 폭격으로 공포를 자아내 헤즈볼라를 제압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탱크를 앞세워 레바논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랬더니 그들은 헤즈볼라 대전차포에 손쉬운 먹잇감이 됐다. 전쟁 초기 어떻게든 유엔의 휴전 촉구 결의안 채택을 막으려고 미국·영국과 협력했던 이스라엘은 한 달 뒤에는 유엔 결의안 1701호를 추진하기로 한 미국과 프랑스의 합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결의안에는 다국적군을 투입해 이스라엘군이 실패했던 작업, 즉 이스라엘 국경과 리타니강 사이 지역에서 헤즈볼라의 활동을 저지하도록 한다는 약속이 담겼다.
헤즈볼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13 과 중동 정권들의 정치에 “종속”되는 “덫”에 걸리지 말아야 한다고 헤즈볼라 내부적으로 강조한 것 14 이 그것이다.
헤즈볼라의 한 구성원은 헤즈볼라가 이전에 이스라엘에 맞섰던 아랍 저항단체와 비교해 군사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로 두 가지를 꼽는다. “헤즈볼라 전사들의 대의에 대한 신념”그러나 이전 아랍 군대들이 이스라엘의 침략에 저항하는 데 실패한 것은 단지 정부가 운영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정부들과 군대들이 해당 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1948년 전쟁에서 실패했던 군대는 낡은 ‘봉건적’ 지주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권이자 서구 식민 열강이 세운 정권의 군대였다. 이들 중 가장 효율적인 군대였던 요르단군은 영국 장교들의 명령을 받았다(《인터내셔널 소셜리즘》 같은 호 뒷부분에 실린 앤 알렉산더의 글 참조). 여러 지배계급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각 군의 전략적 또는 군사적 조율이 이뤄지지 않았다. 또한 1948년 전쟁은 이스라엘에 맞선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아랍 정권들 간의 쟁탈전이기도 했다.
1967년 전쟁 즈음에는, 혁명 운동과 군사 쿠데타를 거치며 말로는 아랍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정권들이 이전 정권들을 대신했고, “대서양에서 걸프까지” 아랍 민중 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단일 아랍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운운했다. 대규모 사유지가 해체되고 많은 산업이 국유화되는 등 상당한 개혁이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개혁을 주관한 군 장교들의 계급적 이익, 즉 중간계급 중 국가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켜 신분 상승을 꿈꾸는 부문의 이익을 위한 개혁이었다. 이는 장교단 대다수의 행동에도 반영돼, 그들은 1948년의 장교들보다 딱히 더 헌신적이지도 용감하지도 유능하지도 못했다. 또한 그들이 아무리 자주 “단일 아랍 국가”를 운운해도 그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과 그에 연결된 자국의 발전을 우선시했고, 이스라엘에 맞선 단결되고 조직적인 투쟁은 우선 순위에 있지 않았다. 이는 전략·전술적 무능으로 나타났고, 아랍 장교들은 게릴라 투쟁으로 이스라엘 군대를 끌어들이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물질적 손실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1967년 패배 직후, 토니 클리프는 아랍 민족주의 정권 중 가장 중요한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재앙적인 접근법을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미국에 맞서 사용한 저항 방식과 대조했다.
반제국주의 해방운동의 힘은 동원된 노동자·농민 대중에게서 나온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주체적 활동에서 나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 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를 정확하게 노리는 것에서 나온다. 따라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LF이 대중 게릴라 조직과 군대로 미군과 그 추종 세력을 괴롭히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아랍 반제국주의 운동의 잠재적인 힘 또한 노동자·농민 대중에 있다. 공격 대상은 유전, 송유관, 정유소가 돼야 한다. 농민들은 혁명적인 토지 개혁을 수행하여 게릴라전의 기반을 만들어야 한다. 나세르가 선택한 이스라엘과의 군사적 대결 방식은 NLF의 정책·전술과 완전히 정반대였다.
자본주의와 연결된 계급 정권인 아랍 민족주의 정권은 이스라엘과 그 제국주의 후원자들을 물리치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에서 (초기에 일부 성과가 있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에 세 번째로 패배한 아랍 민족주의 정권들은 그로부터 결론을 도출하고는 하나둘씩 제국주의 열강과 거래를 했다. 이 중 이집트 나세르의 후계자들은 심지어 이스라엘과도 협정을 맺었다.[옮긴이 주: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 협정을 통해 이집트는 아랍 정권 최초로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했다.]
헤즈볼라의 경우는 달랐다. 이는 헤즈볼라가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투쟁에서 기원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16 또한 시아파 중간계급조차 프랑스 제국주의가 물려준 국가 구조 속에서 억압받았는데 그 국가 구조에서 정치 권력은 마론파 기독교인, 수니파 무슬림, 드루즈파 지도부가 나눠 갖는다. 프랑스에서 독립할 당시 고위 공무원의 40퍼센트가 마론파, 27퍼센트가 수니파, 3.2퍼센트만이 시아파였다. 17 이러한 제도상의 차별은 (그 노골적인 비율은 일부 조정됐지만) 1989년 타이프 협정으로 내전이 끝날 때까지 근본적으로 그대로 유지됐다.
레바논 시아파는 역사적으로 레바논 국민 중 가장 억압받은 집단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농민이나 노동자는 아니었다. 소수 부유한 가문과 함께, 상점주·상인·전문직 중간계급으로 이뤄진 층도 항상 존재했다. 그러나 다른 종교 집단보다 훨씬 더 많은 비율의 시아파가 하층계급에 속해 있었고, 특히 “저개발 산업과 농업 부문 노동계급에 불비례적으로 많았다.” 하나의 운동으로서 헤즈볼라가 성장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첫째는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시아파 성직자들이 이끄는 정권이 집권한 것이었다. 레바논의 시아파 성직자 중 일부는 이란 집권층과 긴밀한 학연과 혈연을 맺고 있었고, 이슬람 “공동체”를 만들어 부유층과 빈민층을 통합하고 차별과 빈곤을 극복하고 “서구의 영향”으로 인한 탐욕과 원자화를 없앤다는 이란 성직자들의 이데올로기에 고무됐다. 이들은 특히 레바논 남부, 동부 베카, “베이루트 주변 빈민가”를 중심으로 종교적 설교를 “빈곤 퇴치를 주요 사명으로 하는 사회정치 운동”과 결합해 변화를 이루고자 했다.둘째는 1978년과 1982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분쇄하기 위해 레바논을 침공한 것이었다. 시아파가 주를 이루는 레바논 현지 주민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 금세 분명해졌다. 급진적인 시아파 성직자들은 이란에서 파견한 혁명수비대와 함께 베카 계곡에서 이스라엘 점령에 저항할 수 있는 게릴라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훈련은 단순한 군사 훈련이 아니었다. 이 훈련에는 강렬한 투쟁 결의를 세우기 위한 매우 높은 수준의 종교적 내용이 포함됐다.
한 기록을 보면 훈련 과정은 이렇다.
헤즈볼라 전사들은 작은 지하드, 즉 순교가 필요한 무장 투쟁에 능숙해지려면 더 큰 지하드, 즉 영적인 종교적 변화를 겪어야 한다. 자기 자신과 세속적 욕망을 극복하고 순교를 미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헤즈볼라 전사들은 적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낼 수 있게 됐다.
20 매우 신실한 시아파의 종교적 결의가 있어야만 그런 마음가짐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러나 자살 공격은 결코 흔한 투쟁 방식이 아니었다.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투쟁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졌다. 훨씬 더 강력한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따른 “힘의 불균형”은 오직 “순교를 통해서만 상쇄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순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우선시됐다. … 자동차 폭탄으로 실행된 작전은 단 12건뿐이었다.” 대부분의 순교는 “죽음이 예상”되는 “이례적인” 작전에서 발생했다.22 결국 난맥상에 빠진 이스라엘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헤즈볼라의 인기는 엄청나게 높아졌다. 소식통에 따르면 3년 전 헤즈볼라는 ‘2만 명의 전투원과 5000명의 보안 요원’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23
1982년부터 2000년까지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남부 점령에 맞선 헤즈볼라 전략의 핵심은 적이 예상치 못하게 공격을 가하고, 영웅적인 양 보이지만 실제로는 적의 꾀임에 빠지는 재앙적인 전투는 피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작전을 펼쳐 1985~1989년 100건, 1990~1995년 1030건, 1996~2000년 4928건의 작전을 완수했다.24 33일간의 전쟁 기간 동안, 헤즈볼라는 레바논 공산당의 저항군을 비롯해 독립적인 여러 저항 단체들과도 협력했다.
헤즈볼라의 인기가 워낙 높아서 시아파가 아닌 이들도 그 저항 활동에 참여하길 원했고, 헤즈볼라는 이들을 위한 특별 게릴라 부대도 편성했다. 물론 전반적 통제권은 “독실한 자들”이 쥐고 있었지만 말이다.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 정치학 교수] A.N. 함제에 따르면, 헤즈볼라 유관 단체 ‘이슬람 조류’에는 헤즈볼라와 협력하는 수니파 단체들과, 이슬람주의자와 비이슬람주의자가 포함된 ‘레바논 저항 여단’이 포함된다.25 예컨대, 헤즈볼라 의료 부문은 연간 50만 명을 치료한다고 한다. 또한, 지지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복지 대상을 시아파로 제한하지 않고, 일부 수니파, 기독교, 드루즈파에게까지 확장했다.
헤즈볼라는 시작부터 단순한 군사 조직은 아니었지만, 오늘날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다. 진료소, 병원, 학교, 공동체, 교육 장학금 등으로 구성된 헤즈볼라의 복지 네트워크는 엄청나게 확장됐다. 일부의 설명으로는, 베이루트 남부 교외, 베카 계곡, 레바논 남부에서는 레바논 국가의 복지 네트워크보다 더 규모가 크다고 한다.26 또한 레바논의 노동조합총연맹, 여러 다른 노동조합, 농민조합, 대학교수협회, 기술직조합, 대학생협회 등에도 헤즈볼라를 대변하는 구성원들이 있다. 27
헤즈볼라는 또한 “직원이 수백 명 있는 일반 기업과 같은 분위기”의 온전한 TV 채널 〈알마나르〉를 운영하고 있다.이러한 대중적 활동 네트워크와 조직들을 보면, 헤즈볼라가 쌓아온 대중적 지지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또한 이런 네트워크 등을 기반으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탱크의 포신 아래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헤즈볼라는 지방정부, 국회의원, 작년부터는 장관 2명까지 배출하며 레바논 공공기관의 정중앙에도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종류의 타협이 수반된다. 첫째 타협은 헤즈볼라의 종교 기반과 관련이 있다. 시아파는 레바논 사회에서 오늘날 가장 큰 단일 소수 집단이긴 하지만 여전히 소수 집단이고, 시아파 정치세력에 헤즈볼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영향력을 키우고 또 다른 종파적 내전을 피하기 위해, 헤즈볼라 지도부는 (호메이니[옮긴이 주: 1979년 이란 혁명 과정에서 권력을 장악한 이슬람주의 지도자]의 영향력 아래 처음 조직을 건설할 때 내세웠던) 시아파 이슬람 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
29 지방 선거에서 헤즈볼라는 경제와 사회 문제에 중점을 두고, “종파적이지 않은 후보들을 내세웠고 그 후보들이 지방 자치 단체 업무에 정직하고 성실히 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30
헤즈볼라의 역사학자 카셈은 종교를 강제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꾸란 구절을 인용하며, “이슬람 국가 건설은 한 집단이나 분파가 만들어 다른 집단에 강요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헤즈볼라는 “강압적 방식이 아닌 국민의 직접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이슬람 체제를 구현”할 것을 추구하고, “레바논에서의 정치적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슬람적 사고방식을 따르지 않는 혼합 사회에서도 이슬람적 이상이 조화로울 수 있음이 증명됐다고 믿는다.”31 그러나 헤즈볼라 지도부가 미국이라는 ‘큰 사탄’과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사탄’에 맞서기 위해 비非시아파, 심지어 비非종교 세력에까지 손을 내민다는 사실은 헤즈볼라가 출발한 협소한 종교적 관점과 모순되는 요소이며, 이는 과거 헤즈볼라 지도부 내 분열의 원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32 국제적으로 제국주의에 맞선 비非시아파와 비非무슬림의 저항이 커질수록, 이러한 모순은 더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헤즈볼라가 종교적 자유주의 조직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니다. 헤즈볼라는 과거에 반대 세력을 무력으로 공격한 적이 있다. 1980년대 초 공산당 저항군 일부와 시아파 내 라이벌인 아말을 공격했었다(비록 그 직후 많은 공산당 활동가들이 헤즈볼라에 가입했고, 오늘날 헤즈볼라는 공산당, 아말 모두와 협력하고 있지만 말이다). 또한, 헤즈볼라 지도부는 여전히 종교적 이상에 헌신하고 있고, 그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그들의 관념(예: 여성 베일 강제)을 수용케 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지역에서는 그들 나름의 이슬람 율법(가문 간 복수를 하는 오래된 전통을 중단시키고자 이슬람 판사의 갈등 중재 구실을 매우 강조함)을 통해 통치하려 한다.33 가장 최근에 헤즈볼라가 연합한 대상은 1980년대 내전 말기에 총리직을 지낸 마론파 장군 미셸 아운이었다.
이 모순은 또한 성격이 다른 또 다른 타협들과 얽혀 있다 ― 레바논 국가와의 타협, 제국주의에 협력하는 이들을 포함하는 다른 정당과의 타협, 다른 아랍 국가와의 타협. 레바논에서 각 종교단체의 정치 지도자들은 추종자들의 충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국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 다른 단체 지도자들과 협상을 벌이고, 레바논 정치 체제는 이런 협상을 통해 유지되고 있다. 이런 체제에서 서로 다른 정당들은 무력 충돌을 불사할 만큼 극심한 갈등을 빚을 수 있다. 해당 정치적·경제적 체제의 본질적 문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채 말이다. 결성 초기에 헤즈볼라는 레바논의 이런 체제를 비난했지만 이제 그 체제에 동참하길 선택했다. 이는 헤즈볼라가 선거에서 반제국주의 좌파뿐만 아니라 친제국주의 우파와도 손을 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즈볼라는 선거에서 나바티예와 티레에서는 공산당과 합동 후보를 냈지만, 베이루트에서는 사드 하리리와 연합했다. 하리리는 사우디와 연관된 억만장자로, 암살당한 전 총리 라피크 하리리의 아들이다. 헤즈볼라는 이데올로기와 정치가 다른 적들과의 이런 거래가 ‘종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정당화했다.34 헤즈볼라를 실제로 보호한 것은 [이들과의 거래가 아니라] 광범위한 사회적 지지 기반과 전투 능력이었다. 만약 헤즈볼라가 언제라도 약해졌다면, 대부분의 ‘동맹’은 미국, 프랑스, 사우디 같은 자신들의 우방을 대신해 기꺼이 헤즈볼라의 등 뒤에 칼을 꽂았을 것이다. 이들과의 거래가 실제로 한 구실은 헤즈볼라의 행동을 제약한 것이었다.
헤즈볼라는 이런 거래가 이스라엘과의 교전 중에 조직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한다. 아운은 15년간의 망명을 끝내고 대통령이 되려는 야망을 이루기 위해 헤즈볼라를 실제로 어느 정도 지원하기도 했다.[옮긴이 주: 2016년 10월 31일 대통령직에 올랐고 2022년 10월 30일 퇴임했다.] 예컨대, 레바논산의 기독교 마을을 조직해 난민 수천 명을 수용하게 했다. 반면 레바논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친서방 하리리 정파 연합은 자신들이 레바논 남부의 통제를 되찾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이 헤즈볼라를 패퇴시키길 원했다.35 지난해 연립내각에 입각하면서, 이제 그런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결정으로 헤즈볼라는 자신들의 기반인 빈곤층의 삶을 개선할 능력이나, 타 종파 정치인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능력이 약화되는 것을 피하기가 어렵게 됐다. 헤즈볼라는 어쩌면 자체 자선 네트워크를 통해 일부 복지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복지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국가가 당연히 제공해야 하고 또 제공할 수 있는 여러 공공서비스를 대체할 수는 없다.
과거 헤즈볼라는 라피크 하리리가 레바논을 자신의 기업처럼 취급하고 내각을 “기업 이사진”으로 보고 있다면서 그의 예산안에 반대했었다. 이런 정치적 거래로 헤즈볼라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맞서 원하는 대로 투쟁하기도 어려워졌다. 33일간의 전쟁 막바지에 헤즈볼라는 최종 휴전 합의에 서명하라는 거대한 압력을 받았고, 결국 압력에 굴복해 서명했다. 이 합의로 이스라엘군은 여전히 레바논에 남았고, 이스라엘의 봉쇄는 유지됐으며, 프랑스군이 레바논에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앞서 프랑스 정부는 헤즈볼라의 무장 해제를 미국과 합의했는데 말이다.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는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레바논인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표출한 거대한 굳건함의 이성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에 직면했다.” 레바논 친미 정권은 이스라엘의 신속한 승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면서 “무너질 위기”에 봉착했었다. “정권의 생존은 헤즈볼라에 달려 있었다. 집권당은 ‘범국민적 합의’ 말고는 다른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승리 이후 [사드 하리리 정파 연합이 출범시킨] “시니오라 정부는 미국의 돈을 받으면서도 재건 노력을 막으려 애썼다. … 이를 보여 주는 가장 최근의 예는 이 정부가 전쟁으로 실업자가 된 이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이 지원금은 헤즈볼라 몫으로 입각한 노동부 장관이 제안한 것이었다.”38 그러나 시리아 정권이 반제국주의적 원칙은커녕 반시온주의적 원칙에 따라서도 행동하지 않는 게 명백하다. 시리아는 미국의 [1990~1991년] 첫 번째 이라크 공격 당시 기꺼이 미국을 도왔다. 그 전에도 1976년 레바논 내전 초기에 좌파와 팔레스타인인들의 연합이 승리하기 직전에, 시리아는 군사적으로 개입해 이들의 승리를 막았다. 이후 1980년대 중반 내내 레바논 남부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군사 근거지 재건을 막았다. 카셈도 인정했듯, “시리아는 1987년 내전을 끝내려 베이루트에 진입하면서 27명의 [헤즈볼라 ― 하먼] 당원을 학살했다.” 39 이스라엘이 1967년 이후 점령 중인 골란고원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시리아가 내일 당장이라도 이스라엘(과 미국)과 기꺼이 거래할 태세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헤즈볼라는 레바논 내부에서만 타협한 것이 아니었다. 헤즈볼라는 시리아와의 동맹에 오랫동안 의존해 왔다. 헤즈볼라의 공식 입장을 대변하는 나임 카셈은 이렇게 주장했다. “헤즈볼라와 시리아가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구도 이스라엘의 야망에서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헤즈볼라는 이슬람 혁명 이후 “시리아-이란과 전략적 관계가 존재”하고 “시리아와의 관계”가 “지역의 주요 의무를 마주하기 위한 초석”이라 믿는다고 카셈은 주장한다.40 하고 “능동적인 사회 세력들은 무력 충돌을 제외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부지런히 노력하고 긍정적 변화에 기여해야 한다.” 41 그러나 “팔레스타인 해방의 전제 조건은 아랍 정권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슬로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모두 잘못된 길에 빠진 것이고 해방의 과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라고 주장한다. 42
헤즈볼라의 잠재적 협력 대상은 시리아만이 아니다. 카셈은 아무리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타협한 아랍 국가라도 전복할 필요는 없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아랍 국가들은 “자국 민중과 화합하기 위해 여러 변화를 채택해야”이 접근법에 따라,
“헤즈볼라는 카타르가 레바논 남부에 개입하는 것을 환영했다. 카타르는 미국, 이스라엘과 긴밀한 관계임에도 남부 재건 사업 참여에 청신호를 받았다. 여기에는 정치적 대가가 따를 것이다. 이집트·요르단·사우디아라비아 정권에 대한 당내 비판은 거의 없었다. 헤즈볼라와 가까운 이들은 이 정권들을 많이 비판하고 있지만 말이다.”
과거의 교훈
44 당시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의 활동가들이 신구新舊 민족주의 아랍 정권의 실패 이후, PLO를 주목했다. 이브라힘 알리라는 이름을 사용한 팔레스타인인 학생은 1969년 초 이 저널[《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어떤 아랍 군대도 헤즈볼라가 33일간의 전쟁에서 거둔 것과 같은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아랍 국가들은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투쟁할 것 같은 게릴라 세력이 등장한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7년 패배 직후에도 PLO라는 형태로 그런 운동이 부상했다.‘6월 전쟁’으로 이들 정권의 부패와 무능이 어느 정도 드러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들 국가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재평가하게 됐다. … 이는 아랍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게릴라 조직을 대중이 전폭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파타는 이런 정서를 자신에게 집중시키고 1968년 3월, 1967년의 패배 이후 불과 9개월 만에 이스라엘 군대에 맞서 상당한 승리를 거두면서 팔레스타인 운동을 이끌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파타 본부가 위치한 요르단 [국경] 도시 카라메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게릴라군은 요르단 군대가 참전하게 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아냈다. 이스라엘 측 병사 28명이 죽고, 80명이 부상당했고, 탱크 4대가 파괴됐다.
그러나 카라메 전투의 승리는 일회적 성공에 불과했음이 입증됐다. 카라메에서 거둔 승리는 무장한 팔레스타인인들이 이미 진을 치고 있던 지역으로 이스라엘군이 진격했고, 요르단 정규군이 개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요르단강 너머 팔레스타인 본토에서 이스라엘 군대를 상대할 방법을 카라메 전투에서 찾을 수는 없었다. 이브라힘 알리는 다음과 같이 옳게 지적했다.
게릴라 공격과 함께 … 이스라엘 점령지 내에 게릴라 기지 건설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 측의 경계 태세와 대규모 보복 정책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서안지구 공무원의 대부분은 요르단과 이스라엘로부터 이중으로 급여를 받는다. 이스라엘 항공기가 아랍 마을들에 네이팜탄을 투하하는 동안에도 요르단강 동·서안 지구 간 상업 운행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대규모 보복과 양보라는 강온 양면 정책을 쓰고 있다. 시온주의에서 벗어나 두 민족이 공존하는 민주적인 팔레스타인을 이루기 위한 무장 투쟁을 모든 게릴라 조직이 호소하지만, 누구도 [이스라엘 점령지 내 게릴라 기지를 건설할 ― 옮긴이] 계획을 제시하지 않았다.
48 그러면서 PLO는 걸프 지역의 가장 반동적인 왕정을 포함한 다양한 아랍 국가들에 자금을 요청했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정책을 조정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조직이 세력 균형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런저런 아랍 국가에서 혁명적 변화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여러 국가에서 이 방법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고, 특히 요르단에서 더욱 그랬다. 요르단 왕정은 점점 불안정해졌고, 요르단 군대는 비옥한 땅의 절반을 이스라엘에 빼앗겼으며(1967년까지 서안지구는 요르단 왕국의 일부였다), 요르단이 여전히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인구의 절반 이상이 팔레스타인인이었다. 파타가 주도하는 PLO가 요르단 내에서 사실상 국가 내 국가로 활동하도록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요르단 왕정은 매우 취약했다. 그러나 영국이 수립했고 1947~1948년에 팔레스타인 분할을 위해 이스라엘과 비밀 협상까지 했던 이 요르단 왕정을 혁명적으로 전복하기 위해 대중을 조직하는 대신, 파타 지도부는 요르단에 대해 ‘불간섭’ 정책을 취했다. 반동적인 아랍 국가들에 맞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직면했을 때, 파타 내의 좌파 성향 인사들조차 ‘폭풍이 나무를 흔들 때는 나무에서 직접 열매를 딸 필요가 없다’는 아랍 속담을 사용했다. 여기서 ‘폭풍’은 시온주의의 패배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49 후세인은 아라파트와 그의 군대에게, 이스라엘에 맞서 게릴라전을 조직하기에 가장 적합한 국가인 요르단에서 떠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PLO는 1970년의 ‘검은 9월’에 요르단 왕정이 PLO를 요르단에서 몰아내기로 결정하면서 타협의 대가를 치렀다. 심지어 요르단 왕정의 공격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파타 지도부는 혁명적 전략으로 요르단 왕정에 대한 군인들의 충성심을 부수는 대신, 일시적 휴전에 동의했다. 그 휴전으로 요르단 왕정은 다음 공격을 감행하기 전 군대의 규율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재앙의 한가운데서 파타 지도자 아라파트는 요르단 국왕 후세인과 “아랍 형제”로서 포옹하는 사진을 찍었다.파타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그 계급 기반을 이해해야 한다. 많은 팔레스타인 농민·노동자·난민 대중이 파타를 자신들과 동일시했지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파타를 운영하는 이들은 중간계급 출신이었다. 이들의 태도는 다른 아랍 민족주의 정부를 지배하는 이들과 매우 유사했다. 아라파트를 비롯한 게릴라 지도부는 대개 석유가 풍부한 걸프만 국가에서 경력을 쌓은 팔레스타인인 전문직 종사자들(토목 기술자 등)이었다. 파타 조직은 이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지휘권을 쥐고 위계적으로 조직됐다. 이들은 일반 전사들보다 급여도 몇 배나 높았다. 이런 계급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중·상층 계급에게 정치적으로 어필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이는 이스라엘의 점령에 반대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이나 망명지에서 자신들이 누리는 계급적 특권의 기반에는 도전하지 않는 것을 뜻했다.
‘검은 9월’ 이후 PLO가 레바논 남부에 거점을 마련했을 때도 비슷한 논리가 작동했다. 1975년에 혁명적 행동의 가능성이 보였다. 당시 레바논 좌파와 연합한 팔레스타인인 세력들이 사회적·경제적 박탈에 맞선 투쟁에 기초한 운동 속에서 단결했고 정권을 거의 전복할 뻔했다. 이 운동을 진압하려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의 개입이 필요했다. 그 후 PLO는 레바논 남부에서 지역 주민에 대한 탄압과 괴롭힘, 도적질 등을 자행했다는 혐의를 받는 등 마치 외국 점령군 같은 행태를 보였다. 팔레스타인 중간계급이 운영하는 하향식 군사 조직은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의 이익을 짓밟지 않는 방식으로 통치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내 1987~1990년 1차 인티파다로 이스라엘이 진지하게 협상에 임하게 됐을 때, 파타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라는 격리된 육지섬에 대한 조그만 권력의 파편에 만족할 태세가 돼 있었다. 파타는 그런 국가 기구를 이용해, 아랍 세계 전체에 대한 혁명적 도전만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미시적 규모로나마 얻기를 기대했다. 이런 시도는 이스라엘에 정착촌을 확장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PLO가 허락받은 작은 구역에서 준국가 기관을 설립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 기관은 부패, 무능, 억압으로 악명이 높아 마치 아랍 정권의 모든 결점을 집약적으로 모방한 결과인 것만 같았다.
헤즈볼라의 계급 기반
헤즈볼라는 자국 국가와의 협상에 의존하고 다른 국가들에 대한 혁명적 접근법을 거부하면서, PLO의 기나긴 전철을 밟을 위험에 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여름 헤즈볼라의 승리는 이스라엘 국가의 팔레스타인인 지배나 중동 전역에 대한 제국주의적 책략에 맞설 능동적 전략의 모범으로 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그 특유의 운영 방식 때문에 협상과 타협을 피하기 어렵다. 헤즈볼라가 대중적 기반을 다지는 데서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는 복지 단체 네트워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다. 이 자금은 주로 두 가지 출처에서 조달된다. 첫째 출처는 이란 국가인데, 그 안에는 이란이 주요한 지역 강대국으로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미국과 모종의 거래를 할 의향이 있는 영향력 있는 정치 세력들이 있다. 둘째 출처는 레바논과 해외의 시아파 중간계급과 재계 이익단체들이다. 함제에 따르면, 헤즈볼라는 “국내는 물론 미국, 캐나다, 라틴 아메리카, 유럽, 호주 등의 개인, 단체, 상점, 회사, 은행에서 나온 기부금”과, “수십 개의 슈퍼마켓, 주유소, 백화점, 레스토랑, 건설 회사, 여행사”를 통해 “레바논 자유 시장 경제를 활용하는” 사업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
51 을 받아들이고 이웃 아랍 정권의 전복을 거부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를 보면 아일랜드의 IRA/신페인이 게릴라 전쟁을 아일랜드 북부에서 벌이는 동안에도 미국의 부유한 지지자들의 자금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사회적 급진주의를 점점 누그러뜨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본주의 내 활동에 이처럼 매우 의존적인 조직이 국내에서는 “보수적”인 경제 강령52 헤즈볼라의 정치를 실질적으로 실행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들로 주되게 채워진 상황에서, 지방선거에서 헤즈볼라가 제시한 행동강령의 사회적·경제적 요구가 신노동당[옮긴이 주: 1990년대 토니 블레어 하에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며 우경화한 영국 노동당]과 비교해도 딱히 급진적이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체제 내 논리에 순응하며 활동한다면, 또 다른 영향력이 헤즈볼라에 가해질 위험이 있다. PLO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체제와의 그런 타협 때문에, 조직 상층부에 있는 급진적인 반제국주의·반시온주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자 출세를 바라는 중간계급 전문가 계층에 의존하고 있다. “2004년 헤즈볼라가 지지하는 후보자 명단은 주로 기술자, 의사, 변호사, 사업가 등 전문직 종사자들로 구성됐다.”개발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 시민들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장려한다.
교육과 의료 서비스 제공, 사회경제적 문제 해결에서 지방자치단체의 기능과 권한을 강화한다.
개발 프로젝트에 자격을 갖춘 사람을 참여시킨다.
지방자치단체의 수입과 기부금으로 개발 프로젝트의 자금을 조달한다.
공공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 횡령을 방지한다. 지방자치단체의 물리적·행정적 구조를 혁신하고 컴퓨터 시설을 제공한다.
헤즈볼라가 의존하는 레바논 내 세력들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의 레바논 공격과 점령을 저지하는 한도 내에서만 헤즈볼라의 게릴라 활동을 지원할 것이다. 이들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에 대한 어떠한 공세적인 행동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군대를 레바논 내 함정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국경 도발조차 막는 브레이크 구실을 할 것이다. 그런 제약의 연장선에서 이들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국가에 맞서는 팔레스타인인들에 직접적 지원을 전혀 하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다.
좌파의 반응
이번 레바논 전쟁은 무슬림 나라들에서만이 아니라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거대한 항의의 물결을 야기했다. 일부 나라에서 이라크 전쟁 발발 첫해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시위가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침략에 맞서겠다는 의지가 전례 없이 표출됐다. 이는 1967년과 1973년 전쟁 때나, 심지어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략으로 레바논인과 팔레스타인인이 대거 사망했을 때 대부분의 좌파 여론이 보인 반응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러나 많은 좌파의 특정 주장과 슬로건에는 여전히 약점이 있다. 이런 약점들은 ‘휴전’과 ‘이스라엘 국가의 방어권’과 관련된 문제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디언〉의 몇 안 되는 원칙을 지키는 좌파 칼럼니스트 조지 몽비오의 접근법을 살펴보자. 그는 이스라엘의 침략에 반대하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헤즈볼라의 공격에 앞서] 이미 몇 주 동안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잔혹하게 공격했음에도, 그는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항해 행동에 나선 헤즈볼라도 비판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후 몽비오는 “[이스라엘이 ― 옮긴이]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점령지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국경을 방어하는 동시에 레바논이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하도록 외교적 압력을 유지해야 한다(누구나 알 수 있듯 점령이 끝나면 훨씬 더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촉구했다.“맞다, 레바논 정부는 헤즈볼라를 이스라엘 국경에서 철수시키고, 무장해제시켰어야 한다. 맞다, [헤즈볼라의 ― 옮긴이] 7월 12일 습격과 로켓 공격은 지난 6년 동안 국경 주변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정당하지 않고 어리석고 도발적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좌파의 많은 부문에 널리 퍼져 있었다. 예컨대, 영국 전쟁저지연합의 일부 지지자들은 레바논인들이 친헤즈볼라 팻말과 깃발을 드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마치 오직 순수한 평화주의적 접근만이 허용되는 양 말이다. 극좌파 중에서도 이 전쟁에서 침략자 이스라엘과 헤즈볼라가 주도하는 레바논의 저항세력 사이에서 ‘양쪽 어느 편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었다. 예컨대, 사회당/CWI는 자신의 신문 〈소셜리스트〉에 이렇게 썼다.
끔찍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은 레바논, 이스라엘, 가자의 평범한 사람들이다. 어느 쪽도 승리할 수 없다. 헤즈볼라는 결코 이스라엘 국가의 힘을 이길 수 없으며, 팔레스타인인들을 점령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 그리고 최근의 분쟁은 이스라엘, 레바논, 팔레스타인 지역의 노동자들 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이스라엘 사회주의자”의 말을 인용했다. “현재의 갈등은 서로 더 많은 위신과 정치적 명망을 챙기려고 벌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손해를 보는 사람들은 양쪽의 노동계급이 될 것이다. … 이러한 민족 갈등의 근저에는 서로 다른 제국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는 지역 내 여러 지배계급 간의 권력 투쟁이 있다.”
이 단체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소책자를 배포했다.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이란의 반동적 정권과 같은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려는 헤즈볼라의 목표는 성공할 수 없다. 헤즈볼라는 레바논과 중동의 다민족·다종교 인구를 더욱 분열시키기만 할 것이다.
이들의 구호는 “저항세력과의 연대”가 아니라 “사회주의 팔레스타인과 사회주의 이스라엘을 일원으로 하는 중동 사회주의 연맹”이라는 추상적 요구였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사실상 활동 중단 상태인 스코틀랜드사회당의 지도부는 이 전쟁에 반대한다면서, 헤즈볼라가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테러 조직 중 하나”라고 비난했고, “국경을 넘어 불법적이고 무자비한 습격”을 벌였다고 비판했다.
이 모든 주장의 문제점은 휴전이 발효된 후 드러났다. 미국, 이스라엘, 영국의 선전 기구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전을 쏟아냈는데, 유엔 결의안 1701호에 따라 신속히 유엔군을 구성하여 향후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하도록 레바논 군대와 협력하고 레바논 국경을 봉쇄하라고 했다. 즉각적인 헤즈볼라 무장 해제 이외의 다른 ‘방어’ 수단을 이스라엘에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외국군의 레바논 점령을 요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서 매일 자행되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공격을 막기 위해 외국 군대로 이스라엘을 점령하자는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양측의 군사 행동에 모두 반대하고 단순히 휴전을 요구했던 좌파들은 모두 이런 주장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혼란은 국제적으로 전체 좌파 진영에 중요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바로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와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서 싸우는 이슬람주의 조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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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자유주의 좌파 칼럼니스트들과 친미·친이스라엘 우파들은 한 가지 주장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바로 ‘이스라엘 국가는 존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유대인 혐오론자이며 중동에서 새로운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길 원하는 것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국가의 ‘존재할 권리’는 ‘그 국민이 계속 살아갈 권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20세기 전반에도 많은 국가가 멸망하거나 해체됐다. 예컨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그렇게 사라졌다. 자유주의 좌파 중 누구도 이런 국가의 멸망을 한탄하거나 인종 학살이라 부르며 비난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지난 17년 동안,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가 사라졌을 때도 ‘국가의 존재할 권리’를 외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특정 국가의 존속을 지지하냐 반대하냐의 문제는 어떤 추상적인 ‘존재할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국가의 성격과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한 대안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다.
57 이었다. 당시 막 이주했던 유대인 인구를 포함해도 2만 5000명으로 추정되고, 반면 아랍인 인구는 40만~60만 명이었다. 58 유대인 인구가 그 지역 인구의 55퍼센트까지 증가한 것은 그 후로 이어진 대규모 이주의 결과다. 이는 1960년대 후반에 이스라엘 성인 인구의 24퍼센트만이 역사적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이들의 부모까지 팔레스타인 출신인 경우는 4퍼센트에 불과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59
이스라엘 국가의 경우 가장 중요하게 이해해야 할 특성은 이스라엘이 정착자 식민지 국가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은 유럽 제국들이 성장하면서 유럽인 정착자들이 세운 여러 정착자 식민지 국가 중 하나다. 약 120년 전 역사적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 서안지구, 가자지구)에 살았던 유대인 인구는 겨우 몇 천 명 정도였고, 아랍인 인구는 수십만 명이었다. 1893년 오스만 제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유대인 인구는 고작 9817명이런 인구 집단이 성장하고 결국 1948~1949년에 이 지역 4분의 3을 차지하는 국가를 세울 방법은 기존 주민들을 쫓아내는 것뿐이었다. 이스라엘 장성 출신 정치인 다얀은 1956년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정착자 세대이고, 우리에게 강철 투구와 대포가 없으면, 나무 한 그루도 심을 수 없고 집 한 채도 지을 수 없다. 우리 주변의 아랍인 수만 명이 불태우는 증오에 흔들리지 말자.
이런 측면에서 이스라엘은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북미, 호주, 프랑스령 알제리, 백인 지배 로디지아,[옮긴이 주: 흑인들의 오랜 투쟁 끝에 1980년 흑인 정권이 탄생해 나라 이름을 짐바브웨로 바꿨다]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현지 주민을 희생시키며 세운 다른 정착지 국가들과 비슷했다. 정착지 개척의 선두에 선 이들이 (특히 홀로코스트의 여파로) 유럽 내 억압을 피해 온 사람들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착지가 원주민의 희생을 통해 건설됐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북미 정착자도 종교적 박해나 가난을 피해 도망친 이들이었고, 많은 호주 정착자는 영국 국가의 유배형을 받아 온 것이었고, 많은 알제리 정착자가 1848년 혁명이나 파리 코뮌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그곳에 온 이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정착지가 유럽 내 극심한 억압을 겪었던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단 도착한 후에는 이미 살고 있는 원주민을 억압하지 않고서는 그들은 생존할 수 없었다. 식민 정착지의 논리에서 피억압자였던 이들은 억압자가 된다.
식민지 모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북미와 호주 모델에는 원주민의 완전한 말살이나 그에 준하는 조처가 수반된다. 그를 통해 결국 원주민들은 정착자와 그 후손에 어떤 위협도 되지 않고, 정착지 국가의 성격에도 거의 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된다. 프랑스령 알제리·백인 지배 로디지아·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 모델에서 원주민들은 백인 소유 농장과 기업을 위한 값싼 노동력으로 이용됐고, 사실상 전체 백인 인구가 국가 억압을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여겼다. 그래서 1963년 알제리가 독립했을 때 프랑스계 알제리인 100만 명이 프랑스로 이주했을 정도였다.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 모델에는 정착자들이 온전히 유대인만의 정착지와 경제를 건설하기 위해 원주민을 정착지 지역 밖으로 몰아내는 과정이 수반된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토니 클리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대인들은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대인 학살(포그롬), 동유럽에서 자행된 박해,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같은 일련의 인류적 비극을 피해 팔레스타인으로 왔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아랍인들이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이주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시온주의 정착자와 아랍인 사이에서 갈등이 심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아랍인 지주에게서 땅을 사들인 다음, 아랍인 농민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세운 사업체에서 아랍인을 배제했다.
아랍인 농민은 매우 낮은 가격에 노동력과 농산물을 제공했다. 그런 조건에서 유럽 노동자가 어떻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 유일한 방법은 유대인 고용주가 아랍인 노동자를 아무도 고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건국 직전 텔아비브 인구는 30만 명에 불과했는데, 그중에 아랍인 노동자나 아랍인 거주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시온주의자들은 아랍 농민(펠라)들이 농산물을 유대인 시장에서 팔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리고 펠라가 굶주림을 못 이겨 감히 이 조처를 어기면 시온주의자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시온주의 노조연맹 히스타드루트의 모든 조합원은 두 가지 특별 회비를 의무적으로 납부했다. 첫째는 ‘유대인 노동자를 위한 것’으로, 아랍인 노동자 고용을 저지하는 활동을 조직하는 데 쓰이는 기금이었다. 다른 하나는 ‘유대인의 생산물 보호를 위한 것’으로, 아랍인의 생산물 배척 운동 조직 기금으로 쓰였다. 그 어떤 시온주의 정당도,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적 시온주의 청년 유대인 운동’(‘마팜’의 전신) 같은 ‘극좌’ 정당조차, 시온주의자들의 아랍인 노동자·농민 배척 운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아랍인 배척 운동은 시온주의의 본질에 내재한 것이었다. 아랍인 배척 운동이 없었더라면 유럽 출신 [유대인] 노동자와 농민은 그 누구도 경제적으로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아랍 민중의 분노를 야기했다. 정착자들이 그 분노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이런저런 제국주의 국가들과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초까지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에 협력했다. 예컨대, 영국이 1936~1939년 팔레스타인 반란을 분쇄할 때, 시온주의자들은 무장하고 이를 지원했다. 이후 영국 통치하에 받은 군사 훈련을 바탕으로 미국의 외교적 지원과 동유럽의 무기를 이용해, 시온주의자들은 1948년 영국이 떠났을 때 (두 차례의 휴전으로 나뉜) 세 차례의 군사 공격을 벌여 역사적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온주의자들은 테러 행위를 벌여 점령지에서 팔레스타인인 대다수를 쫓아냈다. 그 후 시기 동안 영국 제국주의의 위세는 미국 제국주의의 그늘에 가려 무색해졌고, 이스라엘은 미국에 붙었다.
1951년 9월 30일 이스라엘 자유주의 신문 〈하아레츠〉는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스라엘에 주어진 역할은 경비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 서방 열강이 이런저런 이유로 눈감기를 선호할 일이 생기면, 정도를 넘어선 결례를 서방에 범한 이웃 국가들을 강력하게 응징하는 일을 이스라엘에게 맡길 수 있다.
63 이 원조의 대부분은 이스라엘이 다른 중동 국가를 위협하고 필요하면 공격할 수 있도록 최신 군사 기술을 제공하는 데 사용된다. 그래서 예컨대 2003년에 이스라엘은 7억 2000만 달러의 경제 원조와 20억 4000만 달러의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다. 64
이스라엘은 경비견 역할을 맡은 대가로 상대적으로 작은 국가 규모임에도 미국 해외 원조 전체의 3분의 1을 받는다. 이는 다른 어떤 국가가 받는 원조보다 훨씬 더 큰 금액이다. 한 추산에 따르면 1949년부터 1997년까지 이스라엘이 받은 미국의 원조 총액은 840억 달러가 넘는다. 이는 이스라엘 국민 1인당 1만 4000달러가 넘는 금액이다.헤임 하네그비, 모셰 마코버, 아키바 오어의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보면, 이스라엘은 이런 원조 덕분에 저렴한 비용으로 경제 성장도 이룰 수 있었다.
1949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의 상품·서비스 수입은 수출보다 60억 달러 더 많았다. … [1948~1968년 ― 옮긴이] 21년 동안에는 매년 이스라엘 인구 1인당 2650달러가 넘는 금액이었다. … 1949~1965년 이스라엘의 순저축은 평균 0이었지만, 투자액은 국민총생산의 20퍼센트에 달했다. 이스라엘 사회는 단순히 일반적인 정착자 사회가 아니라 … 독특한 특권을 누리는 사회이기도 하다. 비할 데 없는 양과 질의 물질적 자원이 외부에서 이스라엘로 유입되고 있다. …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독특한 사례다. 이스라엘은 제국주의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하지 않으면서 제국주의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자금 지원 수혜자 중에 유대인 노동계급도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유대인 노동자는 자신의 몫을 현금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저렴한 새 주택, 외부 보조금 없이는 시작되거나 유지될 수 없는 산업 고용, 사회의 생산량보다 높은 일반적인 생활 수준으로 얻는다.
67 2003년 초 이스라엘 경제가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었을 때,” 이스라엘 대표단은 미국으로 가서 “120억 달러에 달하는 긴급 원조 패키지”를 요청했다. 68
미국의 원조가 경제 위기의 충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그 충격을 약화시키는 데 사용된 것은 분명하다. 《미국 유대인 연감 1990》에 나오듯 “1984~1985년 이스라엘의 경제 위기 당시 미국은 긴급 원조로 ... 이스라엘을 도왔다.”69 이런 노선에 따라 2003년 이스라엘이 요청한 원조의 일부는 당시 미국이 준비하던 이라크 침공에 필요한 “국방력 강화” 70 를 위한 것이었다.
원조는 당연히 공짜가 아니었다. 위 연감을 보면, 이스라엘이 원조의 대가로 제공한 것은 “미-이스라엘 간 전략적 협력”이었고, 이 협력은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인식” 때문에 지속된 것이었다.이스라엘 국가는 이런 거래 없이는 건설될 수 없었으며, 그 거래를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미국과 거래해서 받는 보조금이 없다면, 세계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할 유인책을 제공할 수 없을 것이고, 유럽이나 북미의 생활 수준에 익숙한 기존 이스라엘인들 중 상당수는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유럽이나 북미로 이주할 것이다.
경제 위기로 국내에 불화가 생기고 유대인만의 배타적 국가라는 존재 이유가 약화될 가능성을 보면서, 시온주의 정치인들은 수동적으로 앉아 보조금이 지급되기만을 기다리지 않는다. 시온주의자들에게는 미국이 중동 지역에서 공격적 태도를 취하도록 고무해, 기존 [아랍] 정권들을 불안정하게 하고, 그 결과로 미국이 경비견[이스라엘]에 거는 기대를 키우는 것에 이해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온주의 정치인들과 미국의 네오콘이 자연스럽게 친밀해진 것이고, 이스라엘 노동당의 좀 더 평화주의 성향 부문조차 결국에는 항상 이러한 정책에 동조하는 것이다. 중동 지역에 무질서가 심해질수록, 이를 제압하는 데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더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되고, 이스라엘은 더 많은 보조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며, 시온주의의 목표인 이스라엘 확장이 달성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또한 중동 지역의 불안정성은 이스라엘이 전 세계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이 지속적으로 위협받고 있으며 따라서 지속적 원조가 필요하다고 포장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는 이스라엘 노동계급의 태도에도 불가피한 영향을 미친다. 이스라엘 인구 대다수는 다른 선진 산업 국가와 마찬가지로 고용주에게서 착취당하며 일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의 경우, 미국 제국주의로부터 이스라엘 국가를 통해 그들에게 전달되는 보조금은 이런 착취의 영향을 일부 완충하는 구실을 한다. 그들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그 국가가 제국주의에 부역하는 것에 동조한다. 제국주의에 그렇게 부역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중동의 다른 노동자들처럼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생활 수준에서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노동자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억압하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에는 물질적 뿌리가 있다. 심지어 사정이 매우 좋지 않은 이스라엘인조차 국가와 거리를 두기보다는 국가와의 일체감을 키우는 것에서 해답을 찾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1950년대와 1960년대 중동 다른 지역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유럽 출신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임에도 더 우익적인 시온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이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가장 가난한 백인 노동자를 포함한) 백인 노동자들과 닮았다. 헤임 하네그비, 모셰 마코버, 아키바 오어는 1970년대에 이렇게 적었다. “지난 50년간의 사례를 살펴보더라도,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물질적 문제나 노동조합 문제로 시위에 나서면서 이스라엘 정권 자체에 도전한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72 이스라엘의 복지 혜택은 공격받고 있지만, 보조금으로 인해 여전히 서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948년 쫓겨난 팔레스타인인들과 그 후손들이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제3세계 수준의 복지는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노동자들이 이런 보조금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이스라엘 정부가 제국주의와 벌인 거래 덕분이다. 따라서 미국에 의존해 경제 위기에 대응한다는 손쉬운 선택지가 있는 이스라엘 국가는 임금·노동 조건·복지 혜택에 대한 공격에 맞선 노동자의 투쟁을 항상 일정 한도 내로 억제할 수 있다.
그들이 이 말을 쓴 뒤 갖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그 결론은 그대로였다. 복지국가가 조금씩 무너졌고, 리쿠드당이 주도하는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한 결과 실업률은 11퍼센트까지 상승했고, 실업 수당은 삭감됐다. 그러나 제국주의로부터 받은 보조금의 누적 효과로 인해 이스라엘 노동자들은 여전히 팔레스타인이나 주변 아랍 나라들보다 훨씬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고 있다. 2004년 초 이스라엘의 최저임금은 3335뉴셰켈(월 약 700달러)이었던 반면, 이웃 이집트의 최저임금은 월 28.40달러였다. 여러 상세한 분석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복지 혜택은 유럽에서 제공되는 복지 혜택의 중간 정도 수준이다.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이스라엘에는 대기업들이 있고, 이들의 이해관계는 북미 또는 유럽의 다국적 자본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들의 목표는 중동의 다른 시장으로 침투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유지하는 데 어느 정도 이해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압력만으로는 이스라엘 국가가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이나 다른 중동 국가들에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래에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다국적 자본이 이스라엘에 투자하는 이유는 중동 지역에서 이스라엘이 패권을 유지할 것(과 다국적 자본이 수익성 있는 군사 계약을 따낼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국적 자본은, 이스라엘 자본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국가가 무장한 평화로 이웃 국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는 데에 이해관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필요시 국가를 중심으로 대중을 동원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국가가 충분히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할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제국주의의 도구를 기꺼이 자임하고 이웃 국가에 호전적인 국가를 옹호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하는 것은 이스라엘 내 유대인들을 “바다 속으로 처넣고 싶다”는 뜻이 아니다.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반대했던 것이 350년간 고유한 민족 정체성 요소(언어, 문학, 종교 기관 등)를 가지고 남아공에 살았던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을 박멸시키겠다는 뜻이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국가에 반대한다는 것은 정착자 후손의 원주민 차별에 기반을 둔 국가를 해체하자는 의미였다. 이스라엘 국가에 반대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주민 강제 축출과, 지속적인 ‘점령지’ 확장에 기반한 국가, 사람들이 점령과 정착지 확장에 반대하거나 선조 대에 쫓겨난 땅으로 돌아가려고 싸우면 대규모 유혈 군사 탄압을 가하는 국가를 해체하자는 뜻이다.
정착자 식민지 국가를 해체하는 방법에는 이론적으로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방법은 이스라엘 국민이 1948년 쫓겨났던 팔레스타인인들의 귀환권을 인정하고, 서안지구의 점령과 정착지 확장을 종식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은 이스라엘 국가를 해체하고 역사적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하나의 세속적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서 모든 주민에게 동등한 시민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 두 가지 길은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시온주의자들이 항상 주장하듯, 팔레스타인인의 ‘귀환권’을 인정하는 것은 유대인 출신 주민에 대한 특권을 없애 정착자 국가의 존재 근거 전체를 무너트리고, 단일한 세속 국가로 나아가는 문을 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수 이스라엘 활동가들과 지식인들은 억압, 정착지 확산, 전쟁이 반복되는 양상을 바꿀 진정한 대안은 오직 세속 국가의 길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떤 힘으로 그런 대안을 이룰 수 있을까? 위 주장의 핵심은 이런 변화를 가져올 열쇠가 이스라엘 내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온주의 국가가 제국주의로부터 계속 보조금을 받아 가장 가난한 유대인 주민들에게도 가자지구, 서안지구, 요르단, 레바논 난민캠프의 팔레스타인인들에 비해 특권을 제공할 수 있다면, 대다수 이스라엘 주민은 시온주의 국가에 의존할 것이다. 이스라엘 내 계급 투쟁은 이스라엘 국가를 약화시킬 수 있지만, 그 투쟁만으로는 국가를 분쇄하고, 공격적 정책을 막고, 제국주의에 복무하겠다는 의지를 꺾는 데 충분하지 않다. 지속적인 점령과 반복되는 전쟁 속에서 이스라엘 젊은이 중 일부가 군 복무에 저항하고 나선다면, 그런 저항으로 이스라엘 국가를 약화시킬 수는 있다. 그런 투쟁의 과정에서 적어도 일부는 시온주의자들의 꿈이 낳은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저항이 상당한 규모로 발전하려면, 이스라엘 국가가 지금처럼 재정 측면(미국의 보조금 덕분에)에서든 이스라엘인의 생명 측면에서든 사실상 부담 없이 전쟁을 수행하는 능력을 먼저 상실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매우 심각한 패배를 겪는 게 필요하다. 그런 패배만이 이스라엘 내부에 충격을 줘서 많은 이들에게 안전을 보장할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것이다. 민족적으로 순수한 국가 건설이라는 시온주의의 비전과 완전히 결별해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또한 그런 패배는 미국 지배계급에게 이스라엘에 보조금을 계속 줄 가치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할 것이다.
73 이 결론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를 보지 못하고, 이스라엘 국경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인정하면서 이번 레바논 전쟁 같은 전쟁들에서 ‘어느 쪽 편도 아니다’라는 태도를 취하는 이들은 아무리 선량한 동기에서 그럴지라도 제국주의와 시온주의에 맞선 투쟁을 약화시킨다.
30년 전 하네그비, 마코버, 오어가 주장했듯, 노동자 투쟁을 포함해 이스라엘 사회 내부 투쟁에 참여하는 것은 “시온주의에 대항한다는 일반 전략에 종속돼야 한다.”이스라엘 국민 대다수가 시온주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일은 단기간에 벌어질 일은 아니다. 레바논에서의 패배는 부분적 패배일 뿐이며, 이스라엘 지도자들뿐 아니라 대다수 이스라엘 국민은 이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보지 못하고 아래와 같이 주장하는 것은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최근 전쟁의 배경이 된, 한 세기 가까이 이어진 분쟁이 포괄적으로 해결될 가능성이 이번의 모든 일들로 활짝 열렸다. 이제 구태舊態는 씻겨 내려갔고, 어쩌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중요한 국제적 후원자들) 중에서 F W 데클레르크[옮긴이 주: 아파르트헤이트 남아공의 마지막 백인 대통령. 오랜 기간 아파르트헤이트의 지지자였으나, 여러 압력에 밀려 아프리카민족회의ANC와 아파르트헤이트 체제 해체에 합의했다.] 같은 이가 나타나는 순간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75 라는 전제 조건이 채워져야만, 시온주의를 만만찮게 타격할 만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도전이 거세질 수 있다. 그런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아랍 세계에서의 혁명적 돌파구’승리의 영향
헤즈볼라는 이번 여름에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둬 이스라엘의 체면을 구겼고, 중동 전역에서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는 모든 세력을 고무했다. 그러나 헤즈볼라는 이런 변화를 달성하기 위한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없다. 그 주된 이유는 헤즈볼라의 종교적 이념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나 제국주의와의 대결에서 일정 선을 넘어설 수 없는 계급 세력에 헤즈볼라가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어느 나라에서든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는 단순히 그 나라에 국한된 투쟁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에 대한 승리는 단순히 팔레스타인에 국한된 투쟁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나라에서 돌파구를 열어 중동 전역에서 혁명적 과정을 촉발하는 것이다. 1967년의 패배가 이 지역 활동가들을 우울한 비관론에 빠트렸다면, 이번 헤즈볼라의 승리는 낙관적 전망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그 과정에 기여할 것이다.
헤즈볼라의 승리는 단기적으로는 아마 여러 형태의 이슬람주의에 대한 인기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대중적 이슬람주의의 형태가 중요하게 변화할 수도 있다. 과거의 패배는 협소한 형태의 이슬람주의를 조장했고 그 탓에 한편으로는 종교적 순수성이 강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하드’ 같은 개인주의적 직접 행동을 숭상하는 엘리트주의적 형태가 강조됐다. 이집트와 알제리 국가와의 대결에서 그랬듯, 이런 방식이 비참하게 실패하자 많은 활동가들이 온건한 형태의 종교적 개혁주의로 돌아섰다. 종교적 순수주의를 강조하게 되면서 종교적 해석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대립하는 경향도 생겼다. 이슬람이 아닌 종교와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 내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가 대립했다. 이런 분열을 제국주의와 그 대리인들은 파키스탄이나 이라크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고들었다. 또한, 기회주의적 출세주의자들도 이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헤즈볼라의 승리는 이런 추세를 뒤집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헤즈볼라 자신이 종교적 경계를 뛰어넘는 동맹이 성립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로 여겨질 것이다. 아랍 정권들은 이미 헤즈볼라의 승리가 자국 수니파 다수에게 어필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승리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승리는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 준다. 승리를 통해 사람들은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세계 다른 곳에서 벌어지는 반제국주의 행동(예컨대 유럽과 미국의 반전 시위나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대사를 이스라엘에서 철수시킨 일)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상에 귀를 기울이게 해 (같은 무슬림이지만 기성 아랍 정권들 안에도 적이 있는 것처럼) 무슬림이 아닌 동맹도 있음을 자각하게 할 수 있다.
이런 주장의 일환으로, 헤즈볼라의 방식이 알카에다의 방식과 정반대라는 것은 천 번이고 강조할 가치가 있다. 그런 차이가 중요한 것은 단지 헤즈볼라가 서방이나 제3세계에서 폭탄을 설치해 민간인을 죽이기를 거부한다고 직접 밝혔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보다는 헤즈볼라의 군사적 성공이 대중적 활동으로 이룬 것이기 때문이다. 헤즈볼라의 한계는 레바논이 아닌 아랍 세계 다른 곳에서도 제국주의와 현지 자본가계급 동맹에 의해 고통받는 이들(즉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등의 노동자·농민)이 그런 대중적 활동을 하는 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헤즈볼라의 승리로 이런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한 이들이 더 쉽게 청중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특정 이슬람주의적 신념을 가진 이들도 그런 청중의 일부가 될 것이다.
미국의 다음 행보는?
전반적으로 미국 제국주의의 상황, 특히 부시 행정부의 상황은 심각하다. 헤즈볼라를 파괴하고 시리아와 이란을 약화시키려던 공격이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왔다. 33일간의 이번 전쟁의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권위 있는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미국의] 이라크에서의 대실패로 이란이 가장 큰 이득을 봤다고 경고했다.
중동에서 벌인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란이 가장 큰 수혜자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은 연합군의 지원을 받아 이란의 지역 라이벌 정부 두 곳(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과 2003년 4월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했지만, 두 정권 중 어느 것도 응집력 있고 안정적인 정치 구조로 대체하는 데 실패했다. 이란은 이라크를 자신의 뒷마당처럼 생각하고, 현재 이라크에서 미국을 제치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가가 됐다. 이로써 이란은 이라크의 미래에 핵심적 구실을 하게 됐다. 이란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또 다른 이웃 국가 아프가니스탄과도 긴밀한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두드러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헤즈볼라는 자신의 명성을 크게 높였고, 사실상 헤즈볼라의 패배를 바랐던 아랍 정권들은 구두로나마 태도를 바꾸고 이스라엘과 싸울 수 있는 헤즈볼라의 능력을 칭찬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제 미국은 어떻게 대응할까?
가장 가능성이 낮은 대응은 미국이 패배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 같은 이들의 조언을 따라 이란의 힘을 인정하고 이란과 협상하는 것이다.
이란은 이 지역에서 강력한 위치에 있으며, 현재 발생한 여러 화재를 진화하려면 이란의 협력과 긍정적인 영향력이 필요하다. … 이란의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많은 위기를 해결하려면, 부분적으로 이란과 서방 양측은 신중하고 인내심 있는 외교를 통해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 이란은 흔히 대大중동 지역에서 폭력을 배후 조종하고 선동하는 국가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란 정권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며 현상 유지를 추구하기 때문에 중동 지역 전반을 혼란에 빠트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사실상 이는 부시가, 1972년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에서 미국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중국을 방문했던 전례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즉 이전까지 만악의 근원으로 그렸던 지역 강국과 거래를 해야 한다고 말이다.
아직까지 그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부시 행정부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새로운 세기’ 내내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하는 데 많은 판돈을 걸었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과 협상하면 이런 야망이 위태로워지는 데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미국의 영향력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란같이 비교적 약한 중급 규모의 지역 강국이 미국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한다면, 그에 고무된 다른 국가들도 같은 방식으로 미국에 도전할 것이다. 부시 진영과 주류 비평가들 간의 유일한 차이점은 후자는 이란에게 압력을 가해 핵 프로그램 포기라는 상징적인 항복을 받아내려면 미국이 ‘늙은 유럽’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점이다.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저명한 언론인 토마스 (“맥도날드와 맥도널 더글러스”) 프리드먼[옮긴이 주: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 주먹 없이는 절대 작동하지 않는다. 맥도날드는 맥도널 더글러스 없이는 번창할 수 없다. 실리콘밸리의 기술이 번창할 수 있도록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보이지 않는 주먹의 이름은 미 육군·공군·해군·해병대다”라고 쓰기도 했던 미국 우익 저널리스트]은 이번 레바논 전쟁이 한창일 때 이렇게 썼다.
이제 부시 행정부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다. 나를 비롯해 이라크 정상화의 중요성을 믿는 모든 이들이 인정해야 하는 사실 말이다. 이라크 정상화는 가망이 없고, 우리는 여기에 소중한 생명을 계속 투입할 수는 없다. … 차선책은 이라크를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최악의 선택지는 ― 이란이 아주 좋아할 것이다 ― 우리가 이라크에 남아 계속 피를 흘리고, 이란의 핵을 공격했을 때 이란이 쉽게 반격할 수 있는 사정거리 내에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이란, 시리아와 협상해야 하지만 강자의 입장에서 협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광범한 연합이 필요하다. 우리가 실패한 일방주의 전략을 이라크에서 오래 유지할수록 그런 연합을 구축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그러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늙은 유럽 및 러시아와의 전면적인 타협은 어렵다.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단순히 미국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이라크의 석유를 장악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이 전쟁은 무엇보다 네오콘이 생각하기에 우유부단했던 1990년대 미국의 세계 전략을 끝내고,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원자재인 석유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해, 다른 강대국들에 대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의 어느 행정부든 결국 유럽, 러시아, 중국과 완전히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더라도, 그 정부는 우선 미국의 힘을 재천명하려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중동에서 미국이 새로운 군사 공세를 시작할 것은 그저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가능성이 상당하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미국 행정부 입장에서는 이란을 더 쉽게 모욕하기 위한 우회 작전이었다. 그 우회로는 막다른 골목이었음이 드러났다. 부시 행정부의 본능은 이제 본래의 길로 돌아와 어떤 방식으로든 이란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그 길이 매우 울퉁불퉁하고 부시 행정부의 노력을 좌초시킬 큰 구멍도 많다는 것이다. 그 구멍의 이름은 시아파의 이라크 남부 장악, [헤즈볼라와 같은] 레바논 내 이란 동맹들의 자신감과 힘이 커진 것, 그리고 58년 만에 이스라엘 군대를 물리친 유일한 세력인 그 동맹들에 대한 이슬람 세계 전체의 거대한 지지 여론이다.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는 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경고했다.
미국이 이란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라크에서 미국에 치명적 패배를 안기며, 중동 전역에서 미국과 전투를 벌일 가능성이 매우 실질적이다. 현재도 다국적군은 시아파 인구가 많은 이라크 남부와 중부 유프라테스 지역의 정치적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아랍 수니파 반군들은 걸음마 단계의 이라크 보안군과 그들을 후원하는 미국에 재앙적 손실을 입히며 치명적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란이 개입한다면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돼 연합군은 이라크에서 철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이란은 이라크를 좌우할 세력으로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자리잡을 뿐만 아니라, 걸프 지역에서 경쟁자 없는 패권국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미국 제국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미국 제국주의는 이 위기에 직면해 두 가지 불쾌한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나는 이라크와 레바논의 대실패를 뒤로 하고 후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시 행정부가 압도적인 세계 패권을 향한 “끝없는 전쟁”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국내에서 네오콘의 영향력과 해외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상실되는 결과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선택지는 이란 공격, 또는 적어도 이스라엘의 레바논 추가 공습이라는 거대한 도박에 나서는 것이다. 감수해야 할 위험이 엄청남에도, 후자가 미국이 선택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택지다.
상처 입은 짐승은 위험하다. 심지어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도 전에 레바논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거나 이란이 공격받으면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될 수도 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압박을 받고 있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군대가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하려 시도할 가능성도 매우 실질적이다.
33일간의 전쟁은 부시의 “끝없는 전쟁”의 예측 불가능한 특성을 아주 잘 보여 주었다. 천천히 타들어가던 도화선이 갑자기 폭발적으로 점화될 수 있다는 특성, 그 결과 많은 국가를 위기에 빠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드는 것 말이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같은 일은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에 의존하는 중동 정부들을 불안정하게 하고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반자본주의 운동을 진전시킬 수 있는 대규모 저항도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 것이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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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초고를 읽고 논평하고 사실관계 오류를 지적해 준 질베르 아슈카르, 앤 알렉산더, 시문 아사프, 린지 저먼, 가산 마카렘, 존 로즈, 새비 사갈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Chris Harman, ‘Hizbollah and the war Israel lost’, International Socialism, 112 (Autumn 2006).
↩
- S. Hersh, Watching Lebanon, New Yorker, 21 August 2006. ↩
- Washington Post, 4 August 2006. ↩
- H. Shukrallah, It Didn’t Work, August 2006, www.indymedia.ie/article/77854. ↩
- 위에서. ↩
- 위에서. ↩
- 헤즈볼라의 첫 승리는 물론 1990년에 이스라엘을 레바논에서 쫓아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승리는, 전 세계 언론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군의 맹공격을 물리친 이번 승리만큼 사람들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이 극적이지 않았다. ↩
- 이스라엘이 1948~1949년에 승리할 수 있도록 미국과 소련(체코제 무기)이 지원했다. 그러나 미국이 상시적으로 대규모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후반부터였다. ↩
- 당시 토니 클리프가 쓴 분석 글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웹사이트 www.isj.org.uk/index.php.4?id=229 에서 확인할 수 있다[국역: ‘중동에서의 반제국주의 투쟁’, 《마르크스21》 23호(2018년 1~2월호)]. 이 밖에도 클리프는 여러 모임에서 (인쇄된 텍스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그와 관련된 주장을 펼쳤다. ↩
- N. Qassem, Hizbullah: The Story from Within (London 2005), p.68. ↩
- M. Williams, Counterpunch, 14 August 2006. ↩
- 이스라엘 국가는 먼 친척 중에 ‘유대인’이 있다는 식의 모호한 주장만으로도 옛 소련 출신 이민자들을 쉽게 받아들였다. 그 목적은 이스라엘과 점령지[서안지구·가자지구·동예루살렘] 내 팔레스타인인 인구보다 이스라엘의 ‘유대인’ 인구를 더 빨리 늘리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예시는 마크 로이터와 루시 애쉬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정책은 필리핀 등지에서 온 25만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아랍 노동자들을 대체하는 정책과 연결된 정책이다. ↩
- 출처는 이스라엘 신문 〈하아레츠〉, www.haaretz.com/hasen/spages/743767.html ↩
- N. Qassem, 앞에서, p.69. ↩
- 앞에서, pp.72-73. ↩
- 토니 클리프가 1967년 이스라엘-아랍 전쟁에 관해 쓴 논문, 상동. ↩
- A.N. Hamzeh, In the Path of the Hizbullah (Syracuse University Press, 2004), p.13. ↩
- A.N. Hamzeh, 앞에서, p.11. ↩
- 앞에서, p.13. ‘박탈당한 자들의 운동’을 처음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무사 알 사드르(1978년 리비아 여행 중 실종)였지만, 레바논 내전이 발발하면서 그 초기 성과가 무색해졌다. ↩
- 앞에서, p.87. ↩
- N. Qassem, 앞에서, p.74. ↩
- 앞에서, pp.74-75. ↩
- A.N. Hamzeh, 앞에서, p.89. ↩
- 앞에서, p.75. ↩
- 앞에서, p.77. ↩
- 앞에서, pp.50-55, 다양한 종류의 지출에 대한 수치를 제공하지만, 그 수치를 살펴보면 저자(또는 조판사)가 숫자 0을 몇 개 잘못된 곳에 넣은 것이 아닌가 싶다. ↩
- 앞에서, p.59. ↩
- 앞에서, p.67. ↩
- 이 문제에 대한 헤즈볼라의 방향 전환에 대한 긴 논의를 살펴보려면 다음의 글을 참고하라. Saad-Ghorayeb, Hizbu’llah, Politics and Religion (London 2002), pp.34-59. ↩
- N. Qassem, 앞에서, p.31. ↩
- A.N. Hamzeh, 앞에서, p.123. ↩
- A.N. Hamzeh(앞의 책, pp.105-108)의 설명을 따른 것이다. ↩
- 함제와 카셈 모두 이 분열에 대해서 다뤘지만, 서로 관점이 달랐다. ↩
- A.N. Hamzeh, 앞에서, p.126. ↩
- 2006년 9월 6일 〈소셜리스트 워커〉 레바논 베이루트 특파원 시문 아사프가 전한 내용이다. ↩
- A.N. Hamzeh, 앞에서, p.121. ↩
- G. Achcar in Lebanon: The 33-Day War and UNSC Resolution 1701, znetwork.org/znetarticle/lebanon-the-33-day-war-and-unsc-resolution-1701-by-gilbert-achcar. 이 기사는 결의안의 교묘한 문구들을 잘 설명하고 있다. ↩
- 2006년 9월 6일 시문 아사프가 베이루트에서 전한 내용. ↩
- N. Qassem, 앞에서, p.243. ↩
- 앞에서, p.240. ↩
- 앞에서, p.243. ↩
- 앞에서, p.244. ↩
- 앞에서, p.245. ↩
- 2006년 9월 6일 시문 아사프가 베이루트에서 전한 내용. ↩
- PLO와 파타가 결성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지만, 그들이 팔레스타인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1967년 전쟁 이후였다. ↩
- I. Ali, Palestine: Guerrilla Organisations, International Socialism 36 (first series) (April-May 1969). ↩
- 카라메 전투에 대한 간략한 설명은 예컨대 다음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en.wikipedia.org/wiki/Karameh ↩
- Ali, 앞에서. ↩
- 1969년 8월 당시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의 논의에 대한 내 기억에 기반해 쓴 것이다. ↩
- 이 또한 1970년 검은 9월 내전 초기 암만에서 PLO의 회의에 참석했을 당시 기억을 돌이켜 쓴 것이다. ↩
- N. Qassem, 앞에서, p.64. ↩
- 나와 대화하면서 질베르 아슈카르가 사용한 표현 ↩
- A.N. Hamzeh, 앞에서, p.135. ↩
- A.N. Hamzeh, 앞에서, p.123. ↩
- G. Monbiot, Guardian, 8 August 2006. ↩
- Centre pages, Scottish Socialist Voice, 21 July 2006 ↩
- 시온주의의 역사와 이스라엘 국가의 성격을 더 자세하게 알고 싶다면, 존 로즈의 훌륭한 책 Israel: The Hijack State (Bookmarks, London)[국역: 《강탈국가 이스라엘》, 책갈피, 2018]을 참고하라. 다음에서 디지털 형태로도 읽을 수 있다. www.marxists.de/middleast/rose/4-origin.htm ↩
- 1986년 1월 16일 <뉴욕리뷰오브북스>에 실린 해당 인구 조사의 타당성에 대한 로날드 샌더와 여호수아 포래스의 논의 참고. ↩
- Y. Porath, New York Review of Books, 앞에서. ↩
- 1968년 통계는 H. Hanegbi, M. Machover, A. Orr, The Class Nature of Israeli Society, New Left Review 65, January-February 1971, p.4 참고 ↩
- 앞의 책 p.5에서 인용. ↩
- Tony Cliff, 1967년 전쟁에 관한 앞의 글. ↩
- Ha’aretz, 30 September 1951, H. Hanegbi, M. Machover, A. Orr, 앞의 책, p.11에서 재인용. ↩
- 통계 출처는 Washington Report on Middle East Affairs, www.washington-report.org/html/us_aid_to_israel.htm ↩
- Economist Tallies Swelling Cost of Israel to US, Christian Science Monitor, 9 December 2002, www.csmonitor.com/2002/1209/p.16s01-wmgn.html ↩
- H. Hanegbi, M. Machover, A. Orr, 앞에서, p.9. ↩
- 앞에서, p.10. ↩
- American Jewish Yearbook, 1990, p.270. ↩
- BBC News, Sunday 5 January 2003, 02:23 GMT, news.bbc.co.uk/2/hi/business/2627561.stm ↩
- American Jewish Yearbook, 1990, p.270. ↩
- BBC News, Sunday 5 January 2003, 02:23 GMT, news.bbc.co.uk/2/hi/business/2627561.stm ↩
- H. Hanegbi, M. Machover, A. Orr, 앞에서, p.6. ↩
- 예를 들어, R. Cohen and Y. Shaul, Social Protection in Israel and Sixteen European Countries (Jerusalem 1998)를 보라. www.issa.int/pdf/jeru98/theme3/3-6d.pdf 그들의 결론에 따르면, 최근 확장 이전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비교해, ‘이스라엘은 출산 수당과 산재 수당에 있어서는 중간 정도에 속하지만 실업률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이며, 실업 중 복지 혜택은 전반적으로 프랑스와 독일보다는 적지만 영국과 비교해서는 거의 동일한 수준이다. ↩
- H. Hanegbi, M. Machover, A. Orr, 앞에서, p.11. ↩
- 조지 갤러웨이가 “헤즈볼라의 승리가 중동을 완전히 바꿔 놨다”는 제목으로 〈가디언〉에 기고한 글. Guardian, 31 August 2006. ↩
- H. Hanegbi, M. Machover, A. Orr, 앞에서, p.11. ↩
- R. Lowe and C. Spencer, Iran, Its Neighbours and the Regional Crises (Chatham House, August 2006), p.6. www.chathamhouse.org.uk/pdf/research/mep/Iran0806.pdf ↩
- 앞에서. ↩
- 앞에서. ↩
- New York Times, 4 August 2006. ↩
- 이에 대한 나의 분석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Analysing Imperialism, in International Socialism 99 (Summer 2003)[국역: 《크리스 하먼의 새로운 제국주의론》, 책갈피, 2009]. ↩
- R. Lowe and C. Spencer, 앞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