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성, 전략, 정치 *
때로는 실제로 참가한 사람들의 수보다는 그 상징성 때문에 중요한 사건이 있다.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의 세계무역기구(WTO) 회담장 밖에서 벌어진 시위가 바로 그랬다. 시애틀 시위가 그 뒤에 벌어진 시위들보다 특별히 크다고 할 수는 없었다. 시위가 정점에 달했을 때 참가자의 수는 아마 3만 명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애틀 시위는 비할 바 없이 중요한 신호탄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사람들은 사회주의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했다. 이제 인류의 미래는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시애틀에서 벌어진 그 시위는 자본주의에 대한 새로운 도전장이었다. 자본주의의 중대한 국제 회담을 방해하러 온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전 세계의 친자본주의 미디어들은 일제히 보도했다. “기업의 세계화” 전체를 싸잡아 규탄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TV로 방영됐다. 세계 곳곳의 공장·광산·사무실·학교에서 이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 중 소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속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잘한다!’ 10년 넘게 묵은 절망·환멸·체념이 마침내 공론의 장으로 터져나왔다. 시애틀 시위를 계기로 새로운 국제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이 운동이 엄연한 현실임을, 그것도 제법 비중 있는 현실임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이 운동을 백인 중간계급 청년들의 일탈쯤으로 치부했던 좌우파의 많은 사람들은 시위가 워싱턴·멜버른·퀘벡·프라하·니스·예테보리 등지로 번져나가고 특히 제노바에서 절정에 달한 이후로는 말을 바꾸거나 입을 다물어야 했다. 9·11 테러가 운동을 파멸시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들도 틀렸음이 입증됐다. 9·11 테러 4개월 후,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열린 2차 세계사회포럼에는 1차 때의 갑절이나 되는 사람들이 참가했다. 이 운동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미국이 벌인 새로운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과 융합했고, 영국·스페인·이탈리아·독일 등지에서는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초의 운동이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시위들이 일어났다. 올해[2004년] 1월 뭄바이에서 열린 4차 세계사회포럼에는 10만 명이 참가해 운동의 여전한 활력을 과시했다. 4월 말에는 바르샤바와 더블린에서 유럽연합 확장 반대 시위가 벌어졌으며, 몇 주 후에는 이스탄불·더블린·파리·로마에서 반부시 시위대가 유럽을 방문한 부시 대통령을 맞이했다. 특히 로마에서는 2백만 명이 모였다. 워싱턴 DC에서도 최소 50만 명 규모의 시위가 열렸다. 이 시위들도 운동의 변함없는 활력을 과시했다. 거대한 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비관론자들은 운동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그들이 틀렸음이 번번이 입증됐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운동이든 어느 정도 성장하면 처음에는 애써 회피하려 했던 논쟁에 부딪히게 마련이다. 나는 이에 대해 2000년 여름 다음과 같이 본지[〈인터내셔널 소셜리즘〉 저널]에 글을 쓴 바 있다. 곧,
성공한 저항운동은 모두 다음과 같은 두 국면을 거친다. 첫 번째 국면은 바로 운동이 터져나오는 국면이다. 운동의 적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운동의 대의에 함께하는 사람들은 기쁨에 젖어든다. 거대한 저항운동이 벌어진 지 오랜만일수록 그 기쁨은 더 크다. 급상승하는 운동의 동력 자체가 운동을 파죽지세로 나아가게 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운동의 지지자들은 서로 단결하고, 해묵은 의견 차이나 전술 논쟁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운동의 적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첫 충격이 가시면 그들은 방어 태세를 강화하고 또 한 번 기습 공격에 당하지 않도록 전열을 가다듬은 뒤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으려 한다. 이 시점이 되면 전술 논쟁이 운동 내에서 다시 떠오르게 된다. 공공의 적에 맞서기 위해 해묵은 논쟁을 잊겠노라 다짐한 사람들도 이를 피할 수 없다.
2 9·11 테러 이후 운동에서 발을 빼거나, 반전 운동이 반신자유주의 운동의 초점을 흐린다고 생각한 지도자들도 있었다. 3 사람들은 신자유주의나 ‘세계화’가 경제와 환경에 미치는 끔찍한 영향을 세세히 열거하는 것을 넘어 이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여기에 맞서 싸우기 위해 어떤 전략과 전술을 취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쟁해야 했다. 그럴 때만 운동은 전진할 수 있었다. 상이한 관점들 간의 양극화가 필연적으로 일어났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분열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 4
국제 반자본주의 운동의 경우, 2001년 여름경의 제노바 시위와 9·11 사태가 전환점이 됐다. 이 시점 이후로는 운동의 성장을 위해 더는 의견 차이를 회피할 수 없었다. 일부 운동 지도자들은 제노바 시위에서 경찰이 휘두른 무자비한 폭력에 겁을 먹었다.이 운동의 전략과 전술을 둘러싼 주장은 대체로 네 가지 경향으로 나뉘어 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많은 활동가들은 운동이 정치적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각각의 경향은 국가 권력에 대한 나름의 태도, 즉 나름의 정치적 시각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치는 운동 내에서 자발적으로 발전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네 경향들에 대해 설명한 뒤, 이들이 중요한 순간에 어떻게 상호 작용했는지, 그리고 운동을 더 성장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정치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쓸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는 정치적 경향들
개혁주의
시애틀 시위 이후 벌어진 운동은 단일쟁점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끌어모았으며, 그들에게 공통의 적이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었다. 이는 이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요인 때문에 사람들은 체제를 전복하기보다는 어떻게든 개혁하면 된다는 생각을 먼저 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단일쟁점 운동은 현존하는 체제의 극악한 한 측면을 바꾸는 것, 즉 체제를 개혁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어떤 거대한 투쟁에서나 이러한 개혁주의적 태도는 운동 바깥에서 주입된 것이 아니다. 억압과 착취에 맞선 저항을 시작한 집단은 모두 처음에는 이런 태도를 취한다. 그 집단의 구성원들도 기존 체제에서 살아왔고 그 밖의 더 나은 체제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의 방식을 당연히 여기기에 이들은 자신들이 싸워봤자 기존의 방식에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 있을 뿐이라고 전제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일단, 개혁을 위한 투쟁이 벌어지면 더 철저한 변화의 필요성과 그러한 변화를 이룩할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한다. 지난 5년간 단일쟁점 운동들은 한데 모여 이른바 “운동들의 운동”이라는 것을 이뤘는데, 이는 그와 같은 자각을 일깨울 만한 위력을 갖고 있었다. 체제의 특정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려는 경향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졌다. 처음에는 단지 암묵적으로만 반자본주의적이었던 운동이 점차 명시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이러한 급진화가 한꺼번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는 단지 사회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이런저런 사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혁주의는 또한 다양한 제도적 기구, 특히 의회 기구를 통해 구체화된다. 그러한 기구와 끈이 닿아 있는 명망가들은 운동을 처음 발족시키는 데서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들은 변화를 위한 압력을 형성하기 위해 운동 주위로 사람들을 결집시킴으로써 행동의 초점을 제공한다. 그와 동시에, 운동이 단순한 개혁 이상을 추구할 정도로 성장할 여지를 만들어 낸다. 그렇기에 운동이 떠오르려 할 때 이러한 명망가들이 함께하는 것을 꺼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런 이들을 적극 반겨야 한다. 운동이 성장하려면 흔히 이런 인물들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운동이 사회적 파급력을 갖기 시작하면 개혁주의적 지도자의 역할은 모순에 처하게 된다. 여전히 이 지도자들은 기존에 수동적이었던 사람들을 새로 운동에 끌어들일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신의 개혁주의 정치 때문에 운동을 기존 사회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 내로 제한하려 한다(때때로 이를 통해 개인적인 입지를 강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운동의 충만한 전투성·자신감·자발성을 억누르려 한다. 운동이 뜨기 전만 해도 분명 왼쪽에 있는 듯했던 인물들이 운동이 도약하면 어느새 오른쪽에 있는 듯이 보인다. 이 시점이 되면 운동은 이러한 지도자의 권위와 영향력에 도전해야만 성장할 수 있다.
5 카상의 노력으로 ATTAC의 회원은 수만 명이 됐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카상은 운동의 발전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반자본주의 운동이 반전 운동에 융합되는 것을 반대했다. 또한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협조하던 시점에서 카상 운동은 토빈세 도입을 위해 장관들에게 로비하는 데 역량을 쏟았다. 6 카상은 또, 2002년 피렌체 유럽사회포럼을 장식한 전투적 분위기에 극렬히 반대했고, 7 미국 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유럽군 창설을 지지하는 것을 좌파들이 고려해야 한다고도 했다. 8 그리고 2003년 여름 프랑스와 스위스의 국경에서 열린 G8 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을 때는 운동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비판했다. 9
프랑스의 활동가인 베르나르 카상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카상은 영향력이 큰 잡지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자이자 금융투기 반대 단체인 ATTAC의 창립자이자 세계사회포럼의 초동 주체였고, 시애틀 이후의 운동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프랑스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하자 카상은 ATTAC을 설립해 이에 맞섰다. ATTAC은 카상이 말한 “행동 지향적 대중 교육 강령”을 중심으로 건설됐다. 카상은 국회의원이나 여타 오피니언 리더들의 참여를 특히 중시했다.영국·스페인·이탈리아 등지에서 벌어진 반전 운동에서도 일부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모순된 구실을 했다. 2003년 2월 15일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극좌파·무슬림단체·평화단체들의 주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개혁주의 정당의 유명 인사들(예컨대 이탈리아의 민주좌파당, 스페인 사회당, 그리스 사회당 인사들과 영국의 로빈 쿡 같은 사람들)도 거기에 한몫했다. 이들이 있었기에 거리에는 수십만 명을 넘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결국 시작되자 개혁주의 인사들은 분명하게 점령을 반대하기보다는 기껏해야 미국이 아닌 UN 주도의 점령을 대안으로 내세웠다.
브라질 노동자당의 지도자들도 이와 비슷했다. 그들은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세 차례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아주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들이 참여한 덕분에 세계사회포럼은 라틴아메리카 전역과 세계 도처의 활동가들에게 구심점이 됐다. 그러나 바로 그 지도자들이 이제는 정부에 들어가 IMF와 협정을 맺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사회포럼으로 동력을 얻은 운동은 이러한 정책에 도전할 가능성이 크다.
자율주의
운동이 당초 출발점으로 삼았던 가정들을 “자발적으로” 뛰어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한 가지 징후는 이른바 “자율주의”의 부상이다.
10 그러나 어쨌든 이 용어가 일컫는 다양한 사상과 실천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 모호한 용어는 매우 다양한 사상과 실천을 포괄한다. 단일쟁점을 둘러싼 대중 운동 건설, NGO 활동, 신념에 찬 비폭력 직접행동, 지역사회 조직화에 대한 강조, “각자 자기 식대로 하기” 류의 대안 생활문화, 협동조합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경찰과 사유재산에 반대하는 블랙 블록의 소수 무력 행동도 자율주의에 포함시킨다.하나는 공식 정치의 타협과 책략, 그리고 거기에 기대를 거는 개혁주의를 일절 거부하는 것이다. 자율주의 경향은 모두 기층의 활동을 강조하며, 관료적 구조에 맞선 사람들의 도전에 주목한다. 자율주의는 투쟁 참가자들이 보여 주는 놀라운 자발성과 창의성을 찬미하며, 사람들이 이를 통해 기존의 위계질서에 도전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에 환호한다.
또한 자율주의는 체제 전체에 맞선 전략적 목표를 추구하는 혁명조직을 거부한다. 자율주의자들은 의회의 출세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혁명적 좌파를 강경하게 비판한다. 자율주의자들은 혁명가들을 대개 “전위주의자”나 “권위주의자”나 “음모꾼”으로, 심지어는 “전체주의자”로 매도한다. 자율주의의 입장에서 운동은 모든 종류의 정치와 분리돼야 한다. 그 정치의 목표가 체제 개선이든 체제 변혁이든 말이다. 일부 자율주의자들은 그래도 선거 기간에는 당이 일정한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인정하기도 한다(이는 “연성 자율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정당은 운동 바깥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당과 운동은 서로 만나지 않고 ‘평행’해야 한다. 당이 운동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자율주의의가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기층의 행동을 강조하며, 체제와 영합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율주의는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자율주의는 체제의 끔찍함을 고발하며, 이에 맞서 싸우려면 개별 집단들이 체제의 이런저런 측면들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 집단들이 각자 자기 식대로 싸우는 것이 모이면 저절로 체제에 맞선 투쟁이 된다는 것이다.
11 이 책은 실제로 읽히는 것보다 언급될 때가 더 많다(이 책에 나오는 말들은 실로 구름 잡는 듯하기가 짝이 없다). 《제국》이 제시하는 전략은 무전략이다. 《제국》은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다양한 자발적 활동들에 “다중”이라는 세례명을 붙여 이를 새롭게 찬양하며, 그 근거로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을 끌어온다. 이 책에서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대상이 무엇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정보 노동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는 대학원 졸업자들로 이뤄진 일부 ‘자율적’ 운동의 협소한 기반을 찬양하는 것과 흡사하다.
자율주의자들은 좀처럼 그들의 관점을 이론으로 내놓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이론은 대개 전략을 세우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고, 자율주의는 그 속성상 전략을 거부한다. 전략은 특정 행동에 우선순위를 부여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율주의의 입장을 이론화하려는 두 번의 영향력 있는 시도가 있었다. 하나는 마이클 하트와 토니 네그리의 《제국》이다.자율주의를 이론으로 제시하기 위한 두 번째 시도는 존 홀러웨이의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이다. 이 책은 《제국》보다는 읽기가 쉽다. 홀러웨이는 자신만의 독특한 용어를 쓰긴 하지만 몇몇 장에서는 노동계급 개념을 일부 적용해 착취와 소외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인 견해를 힘주어 개진한다. 스탈린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조직 방식을 비판하는 이 책은 그러한 조직 방식이 자칭 혁명 운동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라틴아메리카나 인도 등지에서 큰 반향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부에서 도출되는 전략적 결론은 하트·네그리와 마찬가지로 전략의 거부다. 체제의 끔찍한 면모에 맞서는 여러 집단들의 분노에 찬 대응은 어떻게든 하나로 모여 체제의 사슬(조직된 국가 폭력이라는 고리를 포함함)을 녹여버릴 것이라고 홀러웨이는 주장한다. 자발성이 유력하면 국가는 저절로 붕괴하므로 권력을 잡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홀러웨이의 주장은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사회를 바꾸길 원한다면 지배계급은 총 한 번 쏘지 않고 권력을 다수에게 건네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낡은 개혁주의 사상의 재탕일 뿐이다. 홀러웨이의 주장을 지지하는 많은 라틴아메리카인들은 진정으로 ‘자발적인’ 노동자·농민·선주민 운동을 군대가 어떻게 했었는지 한 번 상기해 봐야 한다. 가령 1964년 브라질과 1973년 칠레에서 말이다.
그러나 홀러웨이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국가가 저절로 무너지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운동이 (국가나 미래 따위를 걱정할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이룰 수 있는 것들에 주목한다. 홀러웨이가 드는 주된 예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운동이다. 홀러웨이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EZLN이 국가를 건드리지 않고도 자율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불행히도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사파티스타는 국가에 맞선 무장 저항운동으로 시작됐다. 사파티스타가 유명해진 것은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의 일부 지역에서 무장 봉기를 일으키면서부터였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곧장 전 세계에 메아리쳤으며, 장차 시애틀에서 표면으로 분출해 나올 운동의 첫 초점이 됐다. 하지만 봉기 그 자체는 실패했으며, 사파티스타는 사실상 라칸돈 우림지대의 선주민 자위조직으로 전락했다. 이때부터 때때로 사파티스타는 선주민의 권리와 지방자치 정부의 구조 개선을 위해 멕시코 정부와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사파티스타가 3년 전에 멕시코시티로 행진했을 때처럼 멕시코 노동자와 농민의 광범한 지지를 받을 때는 협상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협상은 선주민들을 여전히 가난의 굴레에 매어두는 기존 체제를 단순히 개혁하기 위한 협상이었다. 멕시코의 좌파 일간지 〈라 호르나다〉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사파티스타] 공동체 생활의 토대가 외부의 충격으로 금이 가고 있다. 이 충격은 신자유주의와 경기후퇴, 대규모 이민의 시대에 특히 강했다. … 반군이 장악한 지역조차 … 커피·수공업제품·노동력·목재·천연자원 시장에서 고립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옥수수로는 3개월밖에 연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식·의약품·옷 같은 다른 물건들은 시장에서 돈을 내고 구입할 수밖에 없다.
13 선주민들이 얻어낸 작은 개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선주민 공동체를 훼손하는 이 혐오스런 세계 체제에 맞선 대응으로서 충분하다고 본다면, 이는 가장 소심한 개혁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발적’ 운동을 마치 그 자체가 목적인 양 예찬하는 홀러웨이는 1백 년 전 사회민주주의 이론가 베른슈타인의 다음과 같은 말을 연상시킨다. “운동이 전부다. 최종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다.”
멕시코 군대는 숲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순찰하면서 사실상 선주민 공동체를 감금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선주민 공동체의 일상 생활이 일정 정도 “병영화”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사파티스타 부지휘관인 마르코스도 “EZLN의 군사적 구조가 어떤 면에서 민주주의와 자치의 전통을 훼손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이는 결코 홀러웨이의 개인적 일탈이 아니다. 자율주의는 그것이 단순히 도덕적 언행에 만족하지 않고 어떻게든 세계의 끔찍한 모습을 실제로 바꾸고자 하는 사상인 이상 쉽사리 개혁주의에 빠지고 만다. 비록 그것이 급진적 개혁주의일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애당초 자율주의에 끌리는 것은 자율주의가 권위주의에 맞서 기층의 투쟁을 강조한다는 점 때문이지만, 그와 같은 강조점에 계속 충실하고자 한다면 결국 자율주의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급진적 개혁주의
14 조지 몽비오나 수전 조지, 나오미 클라인과 같은 저술가나 언론인들도 국제 운동의 건설에서 비슷한 구실을 했다. 이들은 전쟁과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을 개진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존 체제에 압력을 가해 변화를 이뤄낸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이들은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질문이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면서 사실상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최선은 개혁뿐이라고 암시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개혁주의적 실천은 단순히 기존 정치 구조 내에서의 책략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혁주의는 이 구조에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일부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더는 운동을 밀고 나아가려 하지 않을 때조차 다른 일부는 계속 운동을 밀고 나간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토니 벤, 노동당 국회의원 제러미 코빈, 유럽의회 녹색당 의원 캐럴라인 루카스, 그리고 공산당 인사들처럼 의회 제도에 기대는 사람들도 반전 운동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옛 공산당에 잔류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은 전략·전술의 필요성을 ‘순수한’ 자발성의 옹호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인식한다. 비록 그들의 전략·전술은 교묘한 조종과 관료주의와 의회주의의 요소들을 다분히 담고 있지만, 대개 전략·전술 개념은 있다.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은 운동이 효과를 내려면 어떤 행동을 다른 것보다 더 중요시하고 우선순위에 둬야 함을 이해한다. 그리고 언제, 어떻게, 어떤 세력을 동원해 싸워야 하는지 모르면 적들이 운동을 분쇄할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은 ‘뭐든 좋다’ 식의 자율주의적 태도로는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한다. 그래서 역설이게도, 더 급진적인 듯한 자율주의자들보다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이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더 잘 아는 경우가 때로 있다.
15 나오미 클라인은 아르헨티나 피케테로스 운동의 창의성을 예찬하지만, 그 운동이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16 프랑스 공산당의 한 전국위원은 공산당원들이 입각해 있는 복수 좌파 정부를 비판했다가도 그 다음 순간에는 하트와 네그리의 주장을 칭찬했다. 17 이 사례들이 보여 주는 바는, 제도권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하면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은 기층의 창의성을 단순히 찬양하는 것으로 후퇴하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급진적 개혁주의자들은 자율주의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전략·전술 문제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기를 회피하며, 정치가 운동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말로 흔히 그러한 회피를 합리화한다.
그러나 급진적 개혁주의는 결국 자율주의적 주장들을 수용하게 될 수 있다. 마치 자율주의가 급진적 개혁주의로 돌변하는 것처럼 말이다. 토니 벤은 신노동당 지도부에 맞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중요한 것은 지도부가 아니라 기층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마치 기층의 운동이 지도부에서 벌어지는 일과 무관하게 건설되는 것처럼 말이다. UN을 개조함으로써 세계를 개혁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책을 쓴 조지 몽비오는 운동 내에서 사상적 명료함을 요구하는 것은 ‘전체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혁명적 좌파
이 경향은 아주 분명하게 우리의 적은 자본주의이며,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도달한 가장 최근 단계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현 단계의 자본주의에서도 국가는 자국에 기반을 둔 자본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무장력을 동원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비롯했다고 보며, 국가가 체제의 ‘과도한 면’들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노동자와 그 밖의 피착취 계급들이 현존 국가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한데 뭉쳐야 하며, 생산수단을 장악해야 한다고 본다.
18 물속에서 앞으로 헤엄쳐 나아가기는커녕 그저 가라앉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솔직히 말해, 이 새로운 운동이 존재한 지난 5년 동안 혁명적 경향은 주변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이러한 약점은 체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겪은 패배와 사기저하에서 비롯한다. 운동이 패배를 겪으면 활동가들은 해고와 탄압 등 부당한 취급을 받게 되고 그들의 노력은 파편화된다. 그런 여건에서는 오직 소수만이 사회의 근본적 변혁이라는 비전을 포기하지 않는다. 살아남은 활동가들은 자신이 노동계급의 주류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은 방금 전에 패배와 원자화를 겪은 노동계급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자신의 사상을 방어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들의 조직은 현상 유지조차 버겁다. 사람들이 옆길로 새거나 지치고, 허무감에 빠지거나 사회주의가 아닌 사상으로 눈을 돌리며, 신입 회원이라고는 가끔 한두 명씩 들어오기 때문이다.혁명적 경향의 약점에는 다른 원인도 있다. 오랜 패배의 경험은 혁명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 사이에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의 종파주의를 부추겼다. 이들은 세상에서 오직 자신들만이 옳다는 신념 없이는 생존할 수 없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혁명을 이야기하다가 단일쟁점 운동이나 정체성 정치로 후퇴한 이들도 투쟁의 대상이 됐다. 그러니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새로운 운동이 부상했을 때 일부 혁명가들이 매우 방어적인 태도를 취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많은 혁명가들이 이 운동에서 한 발짝 물러서 있거나 심지어 운동을 폄하하는 종파주의에 쉽사리 빠졌다. 그래서 새로운 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은 개혁주의나 자율주의의 방식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조차 혁명적 방식은 그냥 대단치 않은 걸로 치부해 버리기 쉬웠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주의의 유산도 혁명적 경향의 주변화에 한몫했다. 많은 운동 참가자들은 혁명가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운동을 ‘이용’할 것이라는 우려를 한다. 1989~91년에 무너진 체제를 일종의 사회주의(“퇴보한” 또는 “왜곡된” “노동자국가”라 할지라도)로 본 혁명조직의 과거 전력이 이러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이 때문에 줄곧 혁명적 주장을 했던 극좌파 단체들이 되레 스스로, 극좌파 단체가 운동에 개입하는 것이 운동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되뇌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의 지도부와 프랑스 LCR 내 다수파의 입장이 이를 잘 보여 준다.
그 결과 이들은 대중 투쟁에서는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정치적 성격의 논쟁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됐다. 이 같은 논쟁에서 혁명가들이 한 축을 형성하지 않으면, 기존 체제의 틀 안에 머무르는 전략을 주장하는 사람(개혁주의자)들이나 전략이 없는 사람(자율주의자)들이 논쟁에서 부전승을 거두게 마련이다.
오늘날의 운동 사례를 통해 본 개혁주의, 자율주의, 혁명적 경향
프랑스
서유럽과 미국의 운동은 지난 5년 동안 엄청나게 성장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부시 시위는 그 규모가 시애틀 시위의 최소 10배다. 하지만 운동의 이 같은 성장이 매끄럽게 이뤄진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운동의 전진에 제동이 걸릴 때도 있었고, 그 때마다 운동이 끝났다고 결론짓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에 반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극복해 운동을 다시 전진시킬지 고민한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이런 고비 때마다 운동 내의 네 가지 경향 사이에 첨예한 논쟁이 벌어졌다.
프랑스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유럽에서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나라다. 1990년대 초반에는 ‘사회운동’이라 일컫는 다양한 단일쟁점 운동이 시작됐고(이주자 합법화를 요구하는 상파피예[sans papiers] 운동이나 실업자 운동이 그 예다), 1995년 말에는 공공부문 대파업과 시위 물결이 일어 당시 집권하고 있던 우파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맞선 연대를 형성했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피에르 부르디외는 리옹역의 철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투쟁이 “세계화에 맞선” 최초의 거대한 투쟁이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사회당이 주도하고 녹색당과 공산당이 참여한 “복수 좌파” 정부마저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는 가운데, 시애틀 시위를 6개월 앞두고 ATTAC 창립 회의가 생드니 대학교에서 열렸다. 또, 시애틀 시위 이후 유럽에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시위도 프랑스를 무대로 일어났다(2000년 여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미요에서 열린 축제).
그러나 그로부터 1년 뒤, 제노바 시위와 9·11 사태 이후로 프랑스 운동은 거리에서 자취를 감추는 듯했다. 프랑스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직접 개입했지만, 그것에 반대해 벌어진 실질적인 운동은 없었다. 이라크 전쟁 반대 운동도 다른 유럽 나라들에 비해 훨씬 미약했다. 프랑스가 이라크전 참전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이는 왜 프랑스 반전 운동이 똑같은 불참국인 독일이나 아일랜드(심지어 이곳의 인구는 프랑스의 8분의 1이다)보다도 규모가 작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핵심 요인은 정치다. 사람들은 ATTAC이 주도력을 발휘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ATTAC은 지도부의 정치 때문에 그런 운동을 주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체제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남아 있다. 2002년 4월에는 유권자의 10퍼센트인 3백만 명이 대선에서 혁명적 좌파를 지지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파시스트인 르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는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2003년 초여름에 운동은 되살아났다. 에비앙(스위스 국경 근처)에서 열린 G8 정상회담에 반대해 10만 명의 프랑스인들이 행진한 것이다. 이는 1995년 공공부문 대파업 물결이 그랬던 것처럼 분위기를 바꿔놓았다. 몇 주 후 라자크 축제에서는 프랑스 역사상 유례 없이 큰 반자본주의 시위가 벌어졌다. 이 시위는 수만 명이 참가한 파리 유럽사회포럼의 기반이 됐다. 그러나 1년도 채 안 돼 운동이 쇠락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활동가들이 생겨났다. 정부가 파업 물결을 물리쳤고 원내 다수당으로서 개악을 밀어붙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운동은 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듯했다. 2003년 여름 운동의 ‘자율주의적’ 도취감이 사라지고 (미워도 다시 한 번) 복수좌파의 개혁주의에 일말의 기대를 거는 쪽으로 분위기가 옮아갔다. 전투적인 농민단체의 지도자로서 맥도날드 매장 유리창을 깬 일로 복수좌파 정부의 분노를 산 바 있는 조제 보베는 세상을 바꾸는 길이 의회를 통하지 않는다고 라자크에서 선언했다. 그러나 몇 달 뒤 보베는 사회당과 녹색당 후보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 그의 사례는 결코 개인적 돌출 행동이 아니었다. 사회당과 복수 좌파에 대한 환멸이 워낙 커서 2002년 대선에서는 투표를 하지 않았던(사회당 대선 후보인 조스팽은 17퍼센트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복수좌파만이 우파에 맞설 유일한 대안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운동이 우파 정부를 패배시킬 정도로 강력하지 않은 듯하자, 자율주의에 이끌렸던 사람과 혁명가에게 표를 주었던 사람들조차도 개혁주의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주의가 개혁을 선사할 능력이 없음이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20 게다가 각 사회운동은 다른 운동과 완전히 따로 조직됐고, 전통적인 노동계급 조직인 노동조합과도 별개로 움직였다. 사회운동은 G8 반대 시위나 대규모 사회포럼 같은 큰 행사가 있을 때 “운동들의 운동”으로서 한데 모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동으로, 신자유주의 정부에 맞선 큰 싸움의 전략·전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일상적 조직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시애틀 시위에서처럼] “환경운동가들과 노조 운동가들의 자발적 단결” 21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운동을 이루는 각 부분들의 바로 그 ‘자발성’이 이를 가로막았다. 곧,
‘자발적’ 사회운동들이 그 자체로는 정부를 패배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 쓰디쓴 진실이다. 그 ‘자발적’ 사회운동들은 소수자 운동들이었고,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기 위해 애쓰는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들이었지만, 자신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집단에 유기적으로 뿌리박고 있지 못했다. “프랑스 사회운동은 대중의 생활 속에 스며든 정도가 미약하다.”자신의 요구와 주장을 제시하고, 공개 논쟁에 개입하고, 서로 다른 부문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의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음을 분명히 밝힐 수 있는 대중 조직이 없었기에 사회운동은 적들의 분열 지배 전략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함께 모여 다른 방향을 추구하고자 분투하는 활동가들이 없었기에 운동은 장애물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운동에는 ‘자발성’을 뛰어넘는 주장을 했다가 ‘전위주의자’로 매도당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활동가들이 필요했다. 그런 활동가들이 없어서 운동은 승리할 수 없었고, 운동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내키지 않지만 개혁주의 정치에 다시 기대를 거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에서도 운동이 이와 비슷한 난조에 빠지면서 개혁주의로 기우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경우 그 시점은 2003년 초여름이었다. 그 전만 해도 거대한 시위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었다. 2001년 7월 말에는 제노바 시위에 대한 경찰 탄압을 규탄하는 거리 시위가 모든 도시를 휩쓸었고, 2002년 봄에는 노동자들이 노동권을 요구하는 3백만 명 규모의 시위와 하루 총파업을 벌였고, 2002년 11월에는 1백만 명의 인파가 피렌체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에서 자본과 전쟁에 반대하는 행진을 벌였으며, 2003년 2월 15일에는 3백만 명이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런 운동의 중심에는 대조적인 두 부류의 활동가들이 있었다. 한 부류는 도시의 ‘사회포럼’ 네트워크로서, “반세계화”로 불린 운동을 이뤘다. 다른 한 부류는 재건공산당으로서, 이들은 10만 명에 이르는 당원과 적잖은 원내 의석을 보유했으며 노동운동의 일부 전투적 부문에서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저항이 이토록 큰 규모였음에도 결국 미국은 이라크에서 군사적 승리를 거두었고 베를루스코니 정부는 노동권에 대한 공격을 추진했다. 노동권을 신장시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는 이탈리아의 주요 노총 한 곳과 재건공산당이 주도한 국민투표였는데, 이는 주류 정치권(베를루스코니에 반대하는 중도좌파도 포함함)의 적대에 부딪혀 결국 실패했다. 활동가들 사이에서 위기감이 확산됐다. 이는 그해 6월 재건공산당의 전국회의에서 잘 드러났다. 연사마다 모두들 “위기”라는 말로 상황을 묘사했다. 그들은 그동안 당이 모든 선동의 중심에 있었지만 최근 선거에서는 득표율이 줄었고 당원 수도 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중도좌파인 민주좌파당은 여당 시절 신자유주의를 추진한 바 있고 운동에는 기껏해야 미온적으로 참여하는데도 선거에서는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26 재건공산당 자체가 민주좌파당 창당에 반대해 구 공산당에서 분당해 나온 당이고, 1998년에는 신자유주의를 추진하는 중도좌파 정부를 계속해서 지지한 당내 소수파와 갈라섰다는 점에 비춰볼 때 이는 놀라운 변화다. 27
“위기”에 대한 해답으로 당 지도부 다수는 더 “혁신적”이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고 중도좌파와 선거연합 가능성을 논의중이라고 밝혔다. 주류 언론은 장래의 중도좌파 정부에서 재건공산당이 어떤 부처를 차지하게 될지 추측하기 시작했다.이러한 위기의 근본 원인은 새로운 운동의 한계(그 운동에 대한 대중적 지지에도 불구하고)에 있었다. 방향 전환에 반대한 3명의 지도적 당 활동가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운동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분명 한계가 있다는 점을 말해야 합니다. … 운동은 현실에 대한 도덕적 비판에 기초해 여러 행사를 통해 상징적으로 항의를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나 운동은 일상의 운동으로 나아가지 않았고, 명확한 목표를 위해 투쟁할 수 있도록 뿌리내리기 위한 메커니즘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분명한 목표가 없고, 승리를 위한 계획도 없습니다. 제노바 시위가 그랬고, 피렌체와 포르투 알레그레에서도 그랬습니다. “사회포럼 사람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국민투표의 일부를 이뤘지만, 연쇄반응을 일으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지역사회와 직장 등 사람들을 “물들일” 수 있는 공간에서 탄탄한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습니다. …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운동은 1970년대처럼 사회적으로 강력하고 공장에 뿌리를 둔 운동이 아닙니다.
29 그 덕분에 베를루스코니의 탄압은 운동을 파괴하지 못했고, 재건공산당은 많은 청년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재건공산당은 운동에 뛰어들면서 운동 내에 널리 퍼진 자율주의 사상을 많이 흡수했다. 30
제노바 시위 때 재건공산당은 매우 중요한 방향 전환을 했었다. 여타 유럽 나라의 공산당과는 달리 재건공산당은 재앙적인 스탈린주의적 종파주의를 취하지 않았다. 카를로 줄리아니의 사망 이후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집회·시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오도록 하는 데서 재건공산당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했다.31 그러나 자율주의의 영향을 받은 운동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베르티노티는 개혁주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비록 베르티노티 자신이 개혁주의로 완전히 선회하지는 않았다 해도 전국회의에서 연설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개혁주의의 방향으로 지도부보다 더 나아가고 싶어했다. 재건공산당 지도부는 그래도 여전히 민주좌파당과는 크게 구별되는 투쟁성을 견지하고 있었다.
재건공산당이 당과 운동에 대해 논의할 때 한 번도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운동에서든 운동을 전진시킬 방법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며, 혁명가들은 여기에 대해 가장 선명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논쟁에서 승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재건공산당은 ‘각자 자기 식대로 하기’ 식의 상징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자율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태도를 취했다. 이러한 태도를 보인 대표적 인물인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다른 자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개혁과 혁명에 대한 논쟁이 쓸모없다는 경구를 반복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개혁을 이루지 못했고 혁명가들은 혁명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이탈리아의 사례에서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 다른 유럽 나라들에서는 극좌파가 선거 공간에서도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오랫동안 재건공산당이 언급돼 왔다. 그리고 앞서 내가 묘사한 활동 덕분에 재건공산당은 중도좌파의 신자유주의에 환멸을 느낀 노동계급 유권자 소수파(전체 인구의 5퍼센트 정도)의 주목을 받았다. 이는 재건공산당이 제노바 시위와 피렌체 시위와 반전 운동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하지만 원내 의석은 2003년 초여름에 운동 전체에 퍼진 좌절감과 무기력감을 막을 수 있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원내 의석을 카드 삼아 향후 집권할지 모르는 중도좌파 정부(신자유주의 정부일 테지만)의 정확한 내각 구성을 놓고 협상을 벌이자는 부질없는 발상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운동은 2004년 봄에 다시 부활했다. 부시의 유럽 방문에 반대해 2백만 명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상당 규모의 산업 노동쟁의도 있었다. 그러나 2003년에 운동을 엄습한 패배주의는 정치가 운동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제기되는 것임을 보여준다.
미국
미국의 사례에서 이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운동은 9·11 테러 직후의 슬럼프를 벗어나 2003년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반전 시위(베트남 전쟁 초기의 어떤 반전 시위보다 규모가 훨씬 컸다)로 컴백했다. 그러나 운동의 성장 자체가 참가자들로 하여금 운동의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하는 중요한 정치적 물음을 피해갈 수 없게 만들었다. 대규모 집회와 비폭력 직접행동으로 전쟁을 막지 못하자 운동 참여 세력 중 다수는 부시에 대한 유일한 대안처럼 비쳤던 민주당으로 눈을 돌렸다. 수많은 반전 활동가들이 2003년 가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당시 가장 유명한 반전 후보였던 하워드 딘의 경선 운동에 헌신했다. 그러다가 존 케리가 경선에서 승리하자 이번에는 존 케리 지지로 돌아섰다. 케리가 애초에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고 이라크 점령군 유지 찬성 입장이었는데도 말이다. 미국에서 가장 비중 있는 반자본주의 웹사이트인 〈지넷〉(Znet)에서는 감히 미국 양당체제에 도전한 랠프 네이더를 비난하는 글이 쇄도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네이더의 지지율이 5퍼센트에 달했는데도 말이다. 급진적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이라크 전쟁과 기업들의 정치 지배에 대한 반감을 조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던 마이클 무어마저 처음에는, 세르비아 전쟁 당시 나토군 사령관이었던 웨슬리 클라크를 민주당 대선 후보로 밀었다가, 나중에는 존 케리 지지를 선언했다. 노엄 촘스키도 접전이 예상되는 주에서는 민주당 후보 지지를 호소했다. 거기에다 2000년에 네이더를 지지했던 녹색당이 이번에는 네이더에 대항하는 자체 후보를 출마시켜 논란을 가중시켰다. 시애틀 시위를 계기로 운동에서 퇴출됐다던 정치가 뒷문으로 슬그머니 다시 들어온 것이다. 이 모든 논쟁이 운동을 죽이지는 않았다. 워싱턴 DC의 거대한 시위를 보더라도, 전국에 우후죽순처럼 솟아난 반전 네트워크를 보더라도, 그리고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이 공전의 히트를 친 것만 봐도 운동이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대 대자본가 정당 중 어느 쪽이 여당이 돼 점령을 지속하든 간에 논쟁은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이다. 운동의 규모와 다양성과 자발성을 찬양하는 것만으로는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하냐는 물음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에콰도르
시애틀 이후 투쟁이 가장 높은 수준까지 고양된 곳은 유럽이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였다. 신자유주의와 경제위기의 여파에 맞선 자발적 반란으로 3년 동안 세 개의 정부가 무너졌다. 그 시발점은 2000년 1월 에콰도르였다.
32 하버드 출신 경제학자이자 에콰도르 대통령 마우아드는 실업률이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현지 화폐인 수크레화를 달러화로 대체한다는 계획이 대표적이었다. 그 전 한 해 동안 선주민들은 이미 세 차례나 전투적인 시위에 참가했었다. 그러나 2000년 1월에는 선주민 단체인 CONAIE가 단지 시위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의사당과 법무부 청사와 대통령궁을 점거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예기치 않게 군부 일각의 지지를 얻었다. 결국 마우아드 대통령은 국외로 도망갔고, 그 자리를 3인 혁명위원회가 대신했다. 혁명위원회에는 CONAIE 대표 한 명과 시위대에 동조적인 루시오 구티에레스 대령이 포함됐다.
“마치 [제정 러시아] 동궁 습격과 흡사한 장면이었다. 얼마나 장관인가! 수백 명의 병사들이 수천 명의 선주민들과 나란히 행진하는 모습이란!” 에콰도르 반란에 대한 알레히스 폰세의 묘사다.승리의 도취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육군 참모총장이 구티에레스를 해임하고 부통령 노보아를 대통령 자리에 앉힌 뒤 군부를 단속하고 나선 것이다. 구티에레스를 비롯해 반란을 지지했던 다른 군인들도 수감됐다. 노보아는 현지 화폐의 달러화를 포함한 전임자의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계속 밀고 나갔다.
33 구티에레스가 2001년 1차 세계사회포럼에서 한 말이다. 이 같은 언사 덕분에 구티에레스는 라틴아메리카 좌파 대다수에게 영웅 취급을 받았고, 2002년 말에는 대선에 출마해 CONAIE와 좌파의 지지를 업고 당선했다. CONAIE 인사들이 외교부·농림부·교육부·관광부 장관 자리를 차지했고 마르크스주의로 시작했던 정당인 민중민주운동(PDM) 인사가 환경부 장관이 됐다. 선주민 운동의 지도자로서 외교부 장관이 된 파카리는 “오랫동안 무시당해 온 사람들이 드디어 인정받았다”며 기쁨에 젖었다. 34 반란으로 사회를 바꾸지 못했던 운동 세력들이 이제는 기존 체제의 틀 내에서 선거를 통해 뭔가를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게 됐다.
그 후 2년은 선주민들의 도로 봉쇄, 길고 치열한 파업, 물가인상에 항의하는 유혈낭자한 투쟁 등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감옥에서 풀려난 구티에레스는 노보아의 신자유주의를 맹렬히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다. “우리는 전략적 공기업들이 팔려나가는 것에 반대하고, 금융 주권 침탈에 반대하고, 에콰도르의 플랜 콜롬비아 참여에 반대하며, 우리의 주권을 모욕하는 만타의 미군 기지에 반대합니다.”35 에콰도르의 마르크스주의 사회학자 프란시스코 이달고는 “현 시대 선주민 운동의 첫 패배”를 얘기했다. 36
그 결과는 재앙적이었다. 새 정부는 IMF의 조건에 합의했고 플랜 콜롬비아 지지를 결정했다. CONAIE 출신 장관들이 사임하고 그 자리에 우파 정당 인사들이 들어섰다. 선주민 운동 지도자인 움베르토 촐랑고는 구티에레스가 “선주민 운동을 배신했다”고 선언했다.이 패배는 특정 집단의 자발적 활동을 예찬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 정치의 약점을 드러내 보였다. 비록 이 경우 자율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궁극적인 해방을 얻기 위한 투쟁에서 거쳐 가야 할 필수적 단계이긴 했지만 말이다.
1960년대 미국의 흑인 해방 운동과 마찬가지로 안데스산맥 지대 나라들의 선주민 운동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항의 못지않게 자신의 뿌리(스페인에 의한 정복 이전의 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에 대한 자긍심을 내세우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 때문에 선주민 운동 내에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메스티소(“혼혈”) 하층 계급(이들이 인구의 나머지 절반 중 대부분을 차지했다)과의 어떠한 공통된 이해관계도 보지 못하는 경향이 강하게 형성될 수 있었다.
폰세는 2000년 1월 반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주민 운동과 여러모로 공통분모가 많은 계층 및 단체들에 대한 … 종파주의와 배타적 태도가 있었다. … 뿐만 아니라 여타 사회·정치적 부문들을 배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 반란에 대한 사회적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은 없었다. … 통일노동전선(FUT) 같은 대도시 노동조합이나 민중전선의 교사·학생들은 명시적으로 운동에 통합되지 않았고 오히려 주변화됐다.그 결과, “1999년의 세 차례 반란 시도에서 선주민들이 맨발로 키토 시에 도착했을 때 키토 주민들이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2000년 1월에는 환영 인파가 없었다.” 달리 말해, 일부 선주민 운동 지도자들의 분리주의 내지 “자율주의”로 말미암아 운동은 최대의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운동을 분쇄하려는 지배계급의 공세에 운동을 무방비 상태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사태의 흐름 자체가 운동에게 동맹세력이 필요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런데 민중 계급 내에서 동맹세력을 찾을 수 없다면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1월 21일 밤[대통령궁을 점거한 날 — 옮긴이]에도, 그리고 2년 후의 연립정부 구성 때도 구티에레스에게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프란시스코 이달고가 표현했듯이, “주요 선주민 단체들은 … 정치적 방향성 상실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폰세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에콰도르의 2000년 1월 반란 직전에만 해도 폰세는 사파티스타 게릴라들이 “1980년대와 1990년대” 이전의 “라틴아메리카 좌파들”이 고수했던 혁명 개념을 “전복”시키고 “정치 권력” 문제를 중요시하지 않은 것을 찬양했다.
천대받는 집단이 5백여 년의 굴종을 깨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자발성’은 선주민 운동에 단연 필수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어떤 “자율적 공간”에서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적 입장들이 필연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그러한 정치적 입장들은 천대받는 사람들 자신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과 무관할 수 없다. 천대에 맞선 투쟁은 단지 자긍심 회복이나 자발성의 찬양에 국한될 수 없다. 투쟁이 일정선 이상으로 전진해 나아가려면 더 넓은 사회의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는 사활적인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 ‘자발성’을 존중하기 위해 정당들은 운동에 영향을 미치려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혁명에서 개혁으로의 후퇴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입 다물고 운동의 패배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아르헨티나의 교훈 아르헨티나의 2001년 12월 19~20일 반란은 에콰도르의 2000년 1월 반란과는 달리 조직상의 중심이 없는 자발적 반란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의 실업 대중, 시내의 화이트칼라 노동자, 광범한 중간계급 대중 등 다양한 사회집단의 누적된 분노가 거리로 분출했고 결국 대통령인 데 라 루아(De La Rua)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망쳤다. 그가 떠난 자리에 외관상으로나마 안정적인 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무려 한 달이 걸렸다.
42 최근까지 자신들이 지지했던 주류 정당들에 완전히 실망한 사람들을 위한 토론의 장도 마련했다. 주민위원회의 영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 중 40퍼센트가 주민위원회를 미래 아르헨티나 사회의 바람직한 운영 모델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란 이후 아르헨티나에서는 민중 자치 기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산업 벨트와 여러 지방 도시에서는 실업자 단체 ‘피케테로스’가 결성돼 정부에 식량과 실업수당과 일자리를 요구하는 거리 시위를 이끌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동네마다 50~1백 명의 주민들이 한데 모이는 ‘주민위원회’들이 곳곳에서 생겨났고, 매주 부에노스아이레스 전체의 주민위원회들이 모이는 ‘주민위원회들의 위원회’를 열어 행동을 조율했다. 이들 기구는 각종 시위를 조직하는 구심이었으며 경제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의 생존을 돕기 위한 일상 활동들도 일부 수행했다. 피케테로스 조직들은 황무지에 작물을 재배하고,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빵을 굽고, 정부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수당이나마 서로 간에 분배하는 등의 일을 조직했다. 주민위원회들은 빈털터리가 된 사람들이 서로 돈을 주거나 받지 않으면서 업무와 서비스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물물교환 클럽들을 조직했다. 운동의 활력과 자체 조직의 수준이 워낙 높다 보니 아르헨티나 안팎의 많은 좌파들이 정치단체는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향력 있는 좌파 지식인들은 홀러웨이와 네그리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트로츠키주의자 출신으로서 양대 주류 정당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한때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의 지위를 누렸던 사모라는 자기 나름의 자율주의 사상을 개발하기도 했다. 자율주의 사상은 비중 있는 피케테로스 조직인 아니발 베론 조정위원회(Coordinadora Aníbal Verón)에서도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 내가 《제국》의 공저자인 마이클 하트와 논쟁했을 때 하트의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한 사례도 아르헨티나 사례였다.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아르헨티나는 정치적 안정을 회복했고, 주민위원회는 더는 존재하지 않으며, 피케테로스 조직들은 언론의 지속적인 비방에 시달리는 것과 함께 페론주의와 연계된 일부 깡패 집단과 국가로부터 점점 강도 높은 탄압을 받고 있다.
2001~02년의 운동들은 국가 기능을 마비시켰고 아르헨티나 자본가 계급을 수세에 몰아넣었다. 그 운동들은 대안적인 사회 운영 방식을 힐끗 보여줬다. 그러나 그 운동들은 자신이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명료하지 못했고,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자치에 기초한 새로운 경제 질서를 확립할 수 있을 정도로 조직돼 있지도 않았다. 이들의 결정적 약점은 취업 노동자들을 투쟁에 합류시킬 전략이 없었다는 점이다. 고용된 노동자들은 실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업자들이 벌인 것과 같은 전투적 행동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양대 노총의 페론주의적 관료들은 반란 1개월 뒤에 마침내 수립된 아돌포 두알데의 임시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노동계급의 절반에 해당했던 실업자들은 나머지 절반을 원군으로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서라도 정부가 지급하는 형편없는 실업수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두알데는 이 수당의 일부를 피케테로스 운동을 달래는 데 사용했고, 다른 일부는 자신의 정치적 네트워크를 재건하는 데 사용했다. 정치적 안정의 재확립은 2003년 중반에 또 다른 페론주의자 키르치네르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완결됐다. 18개월 동안 위기에 대한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사회운동 세력들의 일부는 키르치네르를 우파(특히 메넴 전 대통령)에 맞설 유일하게 믿음직한 대안으로 보았다. 키르치네르의 취임식에는 양대 노총보다 더 좌파적이라고 알려진 제3노총 CTA, 바리오스 데 피에(Barrios de Pie)나 MIJD[라울 카스텔스(Raúl Castells)가 이끄는] 같은 일부 피케테로스 조직, 에베 데 보나피니가 이끄는 5월어머니회의 일부 인사, 기타 인권단체들이 참석해 키르치네르 지지를 표했다. 그들 눈에는 “키르치네르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좌파적인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차베스와 경쟁하고 룰라보다 더욱 ‘반항적’인 이미지의 인물”인 듯했다.
데 라 루아를 물러나게 만든 운동의 ‘자발성’은 그 자체만으로는 데 라 루아가 아닌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결국 낡은 질서의 이런저런 버전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외에 별 수가 없다고 결론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운동에서 정치를 배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과연 어떤 종류의 정치가 득세하느냐는 것이었다. 에콰도르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헨티나에서도 운동을 단결시키고 확대시킬 전략을 갖춘 혁명가들이 주변에 가장 활력있고 투쟁적인 활동가들을 결집시키지 못한다면 결국 개혁주의가 득세하고 옛날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상황으로 회귀할 것이 뻔했다. 단지 운동을 찬양하는 데 그치거나 정당이 운동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사람들은 부르주아 사회의 상식에 거의 도전하지 않는 사상들이 결국 득세하게 해준 셈이었다.
볼리비아
볼리비아에서 2003년 10월 반란 이후 전개된 사태 흐름은 에콰도르와 아르헨티나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수도인 라파스의 정부 청사가 수만 명의 시위대에 포위당하자 일명 “고니”인 로사다 대통령은 국외로 도피했다. 시위대 가운데는 농민, 코카 재배농,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광원, 그리고 위성도시 엘알토의 빈민들이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로사다의 측근인 메사가 권력을 승계한 다음 시위대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섬유 노조의 한 대의원(알렉스 갈베스)은 이틀 뒤 볼리비아 노총 COB의 확대회의에서 이렇게 발언했다.
메사는 부르주아지의 대리인입니다. 더 큰 문제는 예전과 똑같은 신자유주의 정당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통령을 쫓아냈지만 그의 추종자들이 여전히 권좌에 남아 있습니다. 고니는 쫓겨났어도 그의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모델은 아직 건재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9개월 뒤, 메사는 권좌에 남아 있었을 뿐 아니라 애초에 반란을 촉발시킨 쟁점인 볼리비아 천연가스의 다국적기업 매각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쳐 승리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46 재배농의 운동이었는데, 에보 모랄레스와 그의 MAS[사회주의운동]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47 마지막으로, 농민 연합의 펠리페 키스페가 이끄는 선주민 권리 찾기 운동이었다.
2003년 10월의 반란은 당초에 세 가지 운동에서 출발한 투쟁의 파고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첫째, 노조 운동가인 오스카르 올리베라가 주도하는 코차밤바 지역 노동자·농민의 거대한 물 사유화(와 그에 따른 엄청난 수도 요금 인상) 반대 운동이었다. 둘째, 코카48 반세계화 운동의 스타인 에보 모랄레스는 선거주의 경향이 있었다. 모랄레스는 2002년 대선에서 로사다와 똑같이 21퍼센트를 득표했는데 결국 의회가 로사다를 당선자로 지명했다. 그런가 하면 오스카르 올리베라는 결연한 노동계급 투사였지만 혁명은 배격했다. 49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들 셋 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빈발했던 파업, 도로봉쇄, 시위 및 공권력과의 물리적 충돌에서 핵심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2003년에 와서 그들의 한계가 드러났다. 라파스의 가난한 위성도시인 엘알토 시 전체가 대중의 통제 하에 놓이고 무장한 광원들이 투쟁에 합류했음에도 누구 하나 메사의 권력 승계를 막지 못한 것이다. ‘자발적’ 대중 운동을 건설하는 데는 그럭저럭 유용해 보였던 조직구조와 사상들이 국가 권력 문제에 직면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키스페의 주된 관심사는 아이마라 민족의 독립국가나 자치정부 수립이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유럽” 사상이자 “백인” 사상이라며 배격했다.그래서 볼리비아의 대중 운동은 탄생 이후 가장 큰 승리를 이뤄내고도 몇 달 동안 깊은 혼란에 빠졌다. 에보 모랄레스와 MAS는 새로 집권한 정부에 지지를 보냈고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지라고 호소했다. 그러는 동안 다른 지도자들은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라파스와 엘알토의 노조 운동가들은 권력 장악 방안을 논했지만 이를 실행에 옮길 세력이 주위에 없었다.
50 운동의 ‘자발성’ 예찬이 지닌 한계를 이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과연 그 “혁명정당”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건설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앞서 말한 COB 확대회의에 참석한 많은 활동가들은 “70명이 비극적으로 희생된 거대한 사회적 분출에 함께하고 나서도 노동자, 농민, 피억압 민족, 그리고 하층 중간계급들은 지배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지 못했다. 그들이 기댈 만한 혁명정당이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결론 내렸다.선례 1 — 1919년 독일
투쟁이 분출할 때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흔히 자신들이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시도하고 있다고 여긴다. 실제로도 그들은 새로운 투쟁 방식들을 종종 개발한다. 그러나 매번의 새로운 투쟁에는 과거의 투쟁과 비슷한 패턴도 예외 없이 반복된다. 투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기존 사회의 전제들을 여전히 공유한다는 점이 특히 더 그렇다. 그들의 의식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한 급진적 사상과 기존 사회의 지배적 사상들이 뒤섞인 혼합물이다. 즉, 그들은 한편으로는 혁명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주의적인, 모순된 의식을 갖고 있다.
이 점을 보여주는 고전적 사례는 1918~20년 유럽의 혁명적 분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을 지지했던 대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러시아 혁명과 합스부르크 제국 붕괴의 여파로 유럽 노동계급이 대거 급진화하고 있는 당시 상황에 경악했다. 독일 사민당 지도자 노스케는 “나는 혁명을 흑사병만큼이나 증오한다”고 말했다. 놀랍지 않게도,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스케 같은 지도자들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나 당시 혁명적 좌파는 극소수였고(합스부르크 제국 붕괴 당시에는 독일에 겨우 3천 명이 있었다), 잘 조직돼 있지도 않았다. 더욱이, 대다수 노동자들은 혁명에 호의적이면서도 그들 스스로 혁명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자신이 아직 없었다. 그러한 자신은 오직 투쟁 경험을 더 쌓음으로써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대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에는 혁명적 사상과 개혁주의적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례인 독일에서 이 같은 혼란을 반영하는 새로운 정당이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등장했다. 그 정당은 바로 독립사회민주당 USPD였다. USPD 지도부는 옛 사민당의 전쟁 지지 정책을 비판했다가 당에서 쫓겨난 지도적 인물들로 구성됐다. 그러나 USPD는 분명한 혁명적 정당이 아니었다. USPD에는 클라라 체트킨 같은 좌파 인사들도 있었지만 칼 카우츠키 같은 옛 사민당 주류 인사들과 심지어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같은 사민당의 “수정주의적” 우파 출신자들도 있었다. 당의 공식 입장은 개혁과 혁명 사이에 놓인 가운데 길을 추구하는 것이었다(당시에는 이런 입장을 가리켜 “중간파” 또는 “중간주의”라고 했다). 가령 노동자 평의회를 기존 의회와 나란히 헌법상의 입법기관으로 만들자고 주장하는 식으로 말이다. 당 지도부는 지지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의도였든 그들 자신의 뒤죽박죽된 생각 때문이었든 간에(후자에 해당하는 경우가 적어도 몇 번은 있었다) 자신들의 글과 연설과 강령에서 한편으로 러시아 혁명을 두둔하고 다른 한편으로 의회주의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점점 지지 기반을 넓혔다. 1919년 초에 30만 명인 USPD 당원 수는 1920년 말쯤 80만 명으로 불어났고, 같은 기간에 득표 수는 2백30만 표에서 4백90만 표로 증가해, 옛 사민당의 5백50만 표를 바짝 추격했다. 이에 비해 일관된 혁명가들인 신생 공산당은 당원 수가 고작 5만 명이었다. 가장 잘 알려진 두 혁명 열사들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립크네히트가 만든 당인데도 그랬다. USPD 지도부의 미숙한 정책들은 투쟁의 주요 고비마다 재앙을 불렀다. 1918년 11월 혁명이 발발한 직후 USPD가 잠시나마 구 사민당과의 연립정부에 참여한 덕분에 구 사민당은 혁명을 종식시키기 위한 공작을 진행하면서도 노동계급의 몇몇 주요 부분들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 전개된 그 후 18개월 동안 USPD 지도자들은 당원들의 압력으로 좌선회해 전투적 행동을 승인했다가 갑자기 또 후퇴해 기층 활동가들을 국가의 보복에 무방비 상태로 내버려두는 행태를 반복했다. 혁명가인 오이겐 레비네(Eugen Leviné)는 바바리아 소비에트 공화국 건설에 참여한 죄로 처형당하기 직전에 USPD의 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사민당은 일을 시작해 놓고는 뒤로 빠져 우리를 배신한다. 독립사민당은 [사민당이 던진] 미끼에 속아 넘어갔다가, 우리에게 가세했다가, 우리를 실망시킨다. 우리 공산당원들은 궁지에 몰린다. 결국 우리 공산당원들은 총살당한다.”
그러나 USPD는 매우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사상을 검증하는 장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점차 많은 노동자들이 기존의 사상이 부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래서 USPD의 규모와 영향력이 절정에 달했던 바로 그 때 당 내에서는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결국 1920년 말에는 과반수가 공산당과 합당해 더 일관되고 규모도 더 큰 혁명정당으로 거듭나자는 쪽에 투표했다.
훗날 레온 트로츠키는 1919년 초 USPD 지도자들의 혼란된 “중간주의” 사상이 사실은 수많은 독일 노동자들의 혼란된 의식에 조응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의회주의(또는 노동조합을 통한 협상)의 틀을 벗어난 정치 행동을 상상할 수 없는 지도자들에게는 그러한 혼란이 “선천적” 질병이었던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단지 개혁주의 의식에서 혁명적 의식으로 이행하는 과도적 단계였을 뿐이다.
이 같은 의식 발전은 자발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다. 치열한 투쟁의 경험이 그러한 의식 발전의 토양을 제공했다. 이로 인해 운동 내에서 자발적인 양극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이 같은 양극화는 상이한 정파 간의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었다. 레닌·트로츠키·룩셈부르크는(1919년 1월 중순에 살해당하기 직전 몇 주 동안) 모두 이런 논쟁에 개입하면서 온전히 혁명적인 입장에 서길 거부한 세력들을 비판하는 한편 혁명가들이 피켓라인과 바리케이드에서 지지자들과 함께 싸워야 함을 분명히 했다.
선례 2 — 1960년대 미국
또 하나 유익한 사례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학생 운동이다. 당시의 주요 학생단체 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합 SDS는 당초 “구식” 정치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안고 출발했다. 이들의 태도는 1969년 시카고에서 열린 마지막 SDS 총회에 대한 회고록에 다음과 같이 잘 요약돼 있다.
겨우 몇 년 전에만 해도 SDS 회원의 압도 다수는 중앙집권제와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는 사실상 행동뿐이었다. 그들에게 마르크스주의는 배격해야 할 “구좌파” 사상이었고, 노동계급은 존재하지 않거나, 자신들과 상관 없거나, 체제에 매수된 집단이었다. 지역사회 활동과 참여민주주의라는 키워드가 SDS의 성격을 단적으로 말해주었다.
1967년 말 10만 명이 참가한 국방부 앞 시위 이후로 몇 개월 간 SDS는 급진화했지만 여전히 “이데올로기”를 배격했다. 이 무렵에는 “이피”나 “마더퍼커즈” 등의 조직들로 표현되는 다양한 종류의 아나키즘 사상(오늘날 “자율주의”라 부를 만한)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에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장 밖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광포하게 진압하고, 뒤이은 일련의 국가 탄압 속에 흑표범당 당원들이 사살당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신좌파 활동가들은 “각자 자기 식대로 하기”로는 더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곧,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과 흑인 해방 투쟁은 미국 자본주의 국가의 성격을 낱낱이 드러냈고, 이 국가를 타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세상을 구원하려는 초이상적인 소년십자군과 여러모로 비슷한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 갈수록 더 결연하고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만큼 판돈이 커진 것이다. 이 때문에 급진 운동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상을 더 진지하게 대해야만 했다. … 모든 것이 급변하던 이 시기에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려 한 SDS 회원들의 첫 시도는 신좌파의 반(反)이데올로기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SDS는 미국 사회의 여러 운동들이 직면한 매번의 새로운 국면과 위기를 마치 이 세상의 변함없는 섭리인 것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분석했다. … 얼마 가지 않아 이데올로기로서의 “반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이데올로기 모색”으로 대체됐다. 세간에서는 SDS가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독특하게 미국적이면서 뭔가 완전히 새로운 정치 담론을 개발해 곧 선보일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것 같은 이 토종 담론이 결국 나타나지 않자 신좌파 운동은 해외로부터 수입할 만한 담론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진보적 노동자’라는 이름의 조직 PL이 SDS에 새로 들어왔다. 교조적 마오주의-스탈린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이 조직은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던 이데올로기를 제시해주는 듯했다.
“원조 SDS 회원들이 PL에 대해 보인 첫 반응은 매우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PL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일관된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했다. PL은 신좌파가 처한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에 맞서 강경하고 일관된 대응책을 제시하는 듯했다. 기존 SDS 지도부(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회원들)가 PL의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 자신이 점점 더 강경한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오늘날 “자율주의”라 불렀을 만한 정치적 입장을 견지했던 SDS 회원들이 1969년 총회에서는 너도나도 이런저런 버전의 스탈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끌어안았다. 미국 제국주의의 가면이 벗겨지자 사람들은 그에 맞서 싸우길 원했고, 싸우기 위해서는 사상과 조직이 필요했다. 비극인 것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너무나 소수였던 탓에(그리고 그들 나름의 실수들을 저질렀던 탓에) 근본적으로 잘못된 사상과 조직이 득세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회와 과제
잘못된 정당 모델
정당의 필요성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올바른 정당 모델이 필요하다. 운동의 활력과 창의성을 옥죄는 정당이 아니라 운동 내에서 발전하고 운동을 단결시키는 정당이 필요하다. 그러나 널리 통용되는 몇몇 정당 모델들은 정확히 그 반대로 작용한다. 최상의 투사들을 끌어 모으기는커녕 그들에게 거부감을 주며, 그런 식으로 자율주의와 개혁주의를 강화시킨다.
53 아르헨티나에서는 1990년대의 사기저하에서 살아남은 양대 조직 간의 종파주의가 워낙 지독했던 나머지 2002년에는 서로 피케테로스/주민위원회 운동에 자기 조직의 구호를 강요하려고 암투를 벌였다. 한 번은 두 조직의 회원들이 대중 집회 장소에서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이 이들을 뜯어말려야 했을 정도다. 볼리비아에서는 지난 4년간의 격동을 거치면서 1950년대와 1980년대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력들이 투쟁에 합류했는데, 오래된 트로츠키주의 조직 POR은 이들과 관계 맺는 데서 상당히 무능함을 드러냈다. 54
예컨대 라틴아메리카의 일부 혁명조직들이 그러한 효과를 냈다. 에콰도르에는 마르크스주의 조직들이 운동을 대리하려 한 오랜 역사가 있다. 대중 운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활동한 소규모 게릴라 조직들이 그랬고, 독재자들을 지지한 친소련 공산당이 그랬다.이 같은 오류들은 실제의 투쟁들과 유리된 어떤 추상적 정당 모델에서 비롯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정당은 사회주의 의식의 표현체이며, 정당의 역할은 단지 노동자들이 정당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55 심지어 사회민주당의 좌파에서도 이러한 관점이 우세했던 탓에 사민당은 1920년 이탈리아의 공장 점거 같은 준(準)혁명적 분출에 직면해서도 수동적 태도로 일관했다. 노동계급 전체가 혁명에 찬성표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므로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논리였다. 56
이 같은 모델의 고전적 사례는 제1차세계대전 이전의 사회민주당이다. 당시 사회민주주의의 가장 저명한 이론가인 칼 카우츠키는 당이 과반수의 노동자들을 사민당에 투표하도록 설득한다면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당의 역할은 당면한 투쟁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과반수의 노동자들이 당에 투표하게 될 때까지 노동자들에게 당의 견해를 참을성 있게 설득하는 것이 된다.이러한 견해의 거울 이미지가 있는데, 혁명정당을 순수한 이데올로기를 사수하는 소수 전위로 보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혁명정당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이 혁명정당에 대거 몰려올 때까지 노동계급 내의 비혁명적 부분에 오염되지 않고 자신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그러다가 때가 오면 혁명정당이 그 순수성 덕분에 노동자들을 대신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타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공산당의 초대 지도자였던 아마데오 보르디가가 이러한 견해를 가장 명확히 피력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 정당 모델이 실천에서 뜻하는 바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큰 행사가 있거나 당 중앙에서 공식 지침을 공표할 때를 제외하면 당의 활동과 일상에 대중이 참여하는 일은 당의 단결과 중앙집권제에 대한 위협으로 여겨졌다. 당은 혁명적 대중의 자발적 운동과 중앙의 지도 의지가 변증법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로 이해되지 않았다. 오히려 공중에 붕 떠 있는, 자립적이며 자가발전적인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혁명의 파고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혹은 당 중앙이 공세에 나서기로 결심하고 대중 앞에 친히 강림해 행동을 촉구할 때야 비로소 대중이 우르르 합류하게 될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58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서 정당을 배제하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당 모델 때문이다. 그들은 당이 위계적인 방식으로 운동을 당의 지령에 종속시키려 할까 봐 걱정한다.
보르디가 사후에도 이와 비슷한 정당 모델들이 종종 등장했다. 당이 소련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을 퍼뜨린 스탈린주의가 이에 한몫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전체가 패배와 사기저하에 빠진 시기에 진정으로 혁명적인 조직들이 겪어야 했던 고립도 한몫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혁명에 무관심한 시기에 혁명적 전통의 보존을 강조하는 것은 옳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혁명정당이 계급의 ‘진정한’ 의식을 대표하며 혁명이 가능하려면 당이 어떻게든 자신의 사상을 노동계급 조직들에 강제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빠지기도 쉬웠다.59 과 이탈리아 공산주의 운동의 초대 지도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1924년에 보르디가와 결별한)의 저작에서 발견할 수 있는 정당 모델이다. 이들의 정당 모델은 당과 계급이 같지 않다는 데서 출발한다. “당과 계급은 개념상 날카롭게 구분해야 한다.” 60 당은 “노동계급의 가장 선진적이고, 정치적으로 가장 의식 있고, 혁명적인 부분” 61 으로서 계급 내에서 활동하면서 개혁주의에 맞서 논쟁하고 사람들을 혁명적 관점으로 설득시키려 한다. 혁명정당은 어떤 운동에서든 투쟁을 전진시키려는 사람들과 옛날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 사이의 분열이 나타난다는 점을 안다. 자율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이 그토록 비난해 마지않는 “전위”와 “후진적 부위”의 구분이 뜻하는 바는 사실 이것이다. 정당을 건설한다는 것은 외부로부터 가져온 뭔가를 운동에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투쟁 속에서 가장 헌신적인 인자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이 서로 간에 행동을 조율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설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당 건설의 목적이다. “외부로부터 들여오는” 뭔가가 있다면 그것은 한편으로 운동 참가자들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투쟁이나 다른 나라의 투쟁에 대한 지식일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남아있는 구체제의 이데올로기(국수주의, 여성 차별, 인종 차별, 권세가들에 대한 경의 등)에 대한 도전 의지일 것이다. 정당이 이와 같은 일들을 하는 데 반대하는 사람들은 결과적으로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는 매우 다른 모델의 혁명정당도 있다. 그러한 정당은 자발적으로 분출되는 투쟁을 모두 반기고 거기에 동참한다. 그러나 어떤 투쟁에서든 또한 운동의 진로를 놓고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도 이해한다. 일부 세력은 손쉬워 보이는 타협의 길을 추구할 것이고 다른 일부 세력은 운동을 최대한 앞으로 밀고 나가면서 다른 운동들과 연대를 구축하길 원할 것이다. 혁명정당은 후자의 집단을 결속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레닌의 저작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전통에는 바로 대중 투쟁의 필요성에 일관된 태도를 지닌 투쟁적 소수가 훨씬 광범한 운동·투쟁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 하는 질문을 다룬 고전들이 있다. 레닌의 《좌익 공산주의》,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초창기 5년》, 그람시의 〈리옹 테제〉가 대표적이다. 이 저작들은 하나같이 투쟁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종파적” 태도와 그에 종종 패키지처럼 딸려오는 “최후통첩주의”, 즉 혁명가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외부로부터 운동에 강요하려 드는 태도의 크나큰 위험성을 경고했다. 이러한 태도는 혁명가들이 운동 참가자로서 운동이 직면한 진정한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미리 짜여진 공식들을 적용하려 들고 대중에게 와닿지 않는 추상적 선언이나 하려 할 때 나타난다. 종파주의는 종종 실천에서는 그 정반대처럼 보이는 “추수주의”, 즉 운동의 꽁무니를 쫓는 태도로 나타난다. 혁명가들이 주위에 있는 최상의 투사들에게 운동이 승리하기 위한 장기적 필요조건을 “끈기 있게” 설명하지 못할 때 이러한 태도에 빠지기 쉽다. 종파주의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추수주의자들도 투쟁 속에서 혁명조직을 건설하지 못하고, 새로운 인자들이 혁명 정치에 이끌릴 수 있음을 보지도 못한다.
운동의 다음 단계
지난 5년 동안 발전한 운동은 모두 중요한 전환점들을 거쳤다. 각 전환점마다 운동의 정치적 향방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됐고, 그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경우 운동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아직 절망적 패배를 겪고 있는 곳은 없다.
라틴아메리카의 반란은 노동자·농민·도시빈민·선주민 들을 더는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본주의를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정부들도 역사의 시계바늘을 반란 전으로 되돌릴 만큼 강력하지는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을 각성하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압력과, 토착 자본가들과 IMF 같은 제국주의 세력이 가하는 위로부터의 압력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만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균형은 결코 무한정 계속될 수 없을 것이며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은 어떤 시점에서 직접적인 공격을 재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격이 재개되는 상황은 대중 투쟁이 재개되게 만들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기도 하다. 아르헨티나·볼리비아·에콰도르 등지의 운동과 그 세계적 여파가 이대로 묻혀질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이번 여름에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 새로 충돌이 벌어졌다. 카리브해에서 티에라 델 푸에고 제도까지 남미 전역이(칠레는 예외일 수도 있지만)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져 있다.
반전 운동은 이라크 침공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 운동은 부시·블레어 동맹에 막대한 문제들을 안겨줬고, 갈수록 격해지는 이라크인들의 저항은 그 문제들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를 생산하는 지역의 전략적 요충지를 통제하기 위해 이라크를 침략했다. 미국은 그 통제력을 이용해 나머지 자본주의를 “새로운 미국의 세기” 동안 지배하길 원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중동의 나머지 지역들까지 불안정에 빠뜨리고 있는 식민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다. 미국에게는 그 어떤 철군도 굴욕일 것이다. UN의 도움으로 몇몇 제국주의 국가들이 함께 그곳을 점령한다고 해도 말이다. 이라크에 계속 주둔하고자 하는 미국의 시도는 더욱 끔찍한 야만과 더욱 무모한 군사적 모험으로 이어질 공산이 크며, 이 모든 것은 반전 운동을 다시 불붙게 할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이 여전히 세계 정세의 핵심임은 최근 스페인의 반전 운동이 갑작스럽게 부활해 선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데서도 드러난다.
유럽 정부들은 신자유주의적 개악들을 추진하는 데 일정 정도 성공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노동자 권리를 축소했고, 시라크와 라파랭 정부는 공공부문 연금을 삭감했고, 슈뢰더 정부는 실업급여 삭감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영국에서 노동운동을 절망적 패배로 몰아넣은 대처 정부의 성과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 시기 영국에서 가장 전투적인 3대 노동자 부문(광원·인쇄공·항운노동자)이 차례로 파괴됐다. 또한 유럽 자본가들은 경쟁 상대인 미국이나 동아시아에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착취율(과 경쟁력)을 높이지도 못하고 있다. 미국과 동아시아 모두 연평균 노동시간이 프랑스와 독일보다 4백~5백 시간 더 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프랑스·독일·이탈리아 정부는 노동자들의 조건에 대한 다음번 공격을 이미 계획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심지어 가장 우파적인 개혁주의 노조 지도부도 행동을 조직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릴 수 있다. 2002년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효과적인 24시간 총파업을 벌였던 것처럼 말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행동을 상징적 수준으로 제한하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얻은 자신감에 힘입어 한 발 더 나아가려 하게 되는 상황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아직 24시간 총파업 같은 것들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조건을, 특히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공격하기 위한 신노동당의 이데올로기 공세 때문에 지난 5년 사이에는 공공부문 노조 지도자들 중심으로 “껄끄러운 무리”(the awkward squad)로 언론에서 불리우는 집단(실천으로 옮기지는 않더라도 말로는 계급투쟁의 언어를 사용하는 노조 지도자들)이 등장했다.
63 은 1년 전 극좌파의 사기저하를 일소했다. 잠깐의 후퇴를 큰 패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현실에서 틀렸음이 드러났다. ATTAC 독일 지부는 노동조합과 함께 매주 독일 정부의 실업급여 삭감(특히 옛 동독 지역에서)에 항의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사례는 앞으로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힐끗 보여준다. 올해[2004년] 봄 대중적인 반전 운동과 산업 노동쟁의의 부활(특히 멜피에 세워진 새로운 피아트 공장을 마비시킨 점거투쟁이 보여준)64 그러나 기층으로 내려갈수록 노조 간부들이 집권 개혁주의 정당에 대한 오랜 지지를 철회하는 수준까지 불만이 번지고 있다. 독일에서는 많은 노조 중간급 상근간부들이 슈뢰더의 사민당에 반대하는 새로운 정당 건설을 지지하고 있다. 그들은 2006년 총선에 도전하려는 새로운 정당(‘노동과 사회정의를 위한 선거대안’[현 좌파당의 전신-옮긴이])의 활동가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65 영국에서는 블레어에 대한 불만 때문에 두 노조(철도 노조 RMT와 소방수 노조 FBU)가 노동당과 갈라섰고, 몇몇 중요한 지부들은 리스펙트나 스코틀랜드 사회당을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반전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으로 탄생한 새로운 좌파가 주류 개혁주의 정당에 일체감을 느꼈던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실질적 기회가 열린 것이다.
노조 지도자들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개혁주의 정부가 집권한 나라들에서 또 다른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러한 압력은 기존 개혁주의 정당들 내에서 분열을 일으켜 광범한 노동자층에 대한 개혁주의 정당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전국 지도부 수준의 노조 상층 상근간부들은 대부분 집권당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잡음을 내기도 했다가 다시 정부 앞에 납작 엎드리는 식의 동요를 반복하고 있다.그와 동시에, 간헐적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산업 노동쟁의의 부활은 좌파들이 더 광범한 조직 노동자 대중을 주위로 끌어당길 수 있는 가능성을 낳고 있다. 특히 과거의 패배에 상처받지 않았고, 종종 노조 지도자들을 거스르는 방식으로라도 싸울 의지가 있는 젊은 노동자들 말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이미 반전 운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기존 노동조합에 현장조합원 조직을 건설한다는,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웠을 일이 이제는 가능해질 것도 같다. 노동조합은 비록 지난 20년 동안 조합원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서유럽 주요 나라들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큰 자발적 조직들이다.
운동을 확대하는 정치
이러한 시도들은 시애틀 시위 이후 세대의 활동가들에게 커다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그동안 반자본주의·반전 운동이 보인 강점은 그 특유의 활력에 있었다. 반면 약점은 운동이 주로 큰 집회나 포럼 같은 대규모 행사를 통해서 표출돼 왔다는 점이다. 그 운동들은 일터와 지역사회에서 삶이 극단적으로 망가지는 것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과 지속적이고 유기적인 연관을 맺고 있지 않다. 앞서 말한 시도들은 이 같은 간극을 메우는 길, 즉 상이한 부문에서 투쟁하는 활동가들을 결집시키고 더 광범한 노동자 대중을 그 사람들 주위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융합은 단지 운동의 ‘자발성’에 대한 주장를 발전시킨다고 자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이를 위해 운동을 조직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활동가들의 중핵 조직이 필요하다. 운동 내에서 일관되게 혁명적인 사람들이 모인, 정당 형태의 조직을 통해 이런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말한 시도들이 성공할 때마다 곧 더 많은 논쟁이 벌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개별 노조 또는 산업에 뿌리내린 현장조합원 네트워크에는 좌파적 언사를 쓰는 기존 노조 지도자들이나 그런 노조 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잘 알려진 활동가들에게 상당 정도 기대를 갖는 사람들이 포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존 노조 기구(즉, 기업주나 정부와의 타협을 이끌어내는 능력에 자신들의 경력이 달린 고위 상근간부층의 위계 구조)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압력이 항상 존재할 것이다. 이와 강조점을 달리하려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좌파 노조 지도자들이 기업주와 자기 주위의 다른 노조 지도자들이 가하는 압력에 굴복했을 때 이에 흔들리지 않고 작업장(또는 사무실)에서 투쟁을 주도할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소수의 혁명가들이 더 광범한 네트워크 내에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 수 있도록 조직돼 있다면 좌파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 등에 따르는 위험을 좀 더 쉽게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주류 개혁주의 정당에서 떨어져나온 선거 블록은 현 정부의 정책에는 반대하지만 의회 사회주의라는 관점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 활동가들을 반드시 포괄하게 마련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정책이 바뀌거나 최소한 지도자만 바뀌더라도 나중에 다시 주류 개혁주의 정당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알다시피 1920년 이후 독일 독립사회민주당의 일부 저명인사들이 그랬다. 1932년 영국 노동당에서 떨어져나온 독립노동당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66 (전 당수였던 짐 앤더튼이 분당을 주도했다)은 노동당과 보수 정당인 국민당에 맞서기 위해 녹색당, 마오리당, 그 외 다양한 단체들과 힘을 합쳤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연합당의 창립자는 “영어권 어느 나라에서도 정치적 스펙트럼 왼쪽에 이토록 강력한 세력이 부상한 적이 없었다”며 의기양양해 했다. 연합당은 노동당에 대한 거대한 환멸 때문에 1993년 총선에서 18.7퍼센트를 득표했고 1996년에는 10.3퍼센트를 득표했다. 그 덕분에 연합당은 무시 못 할 세력으로 떠오르기에 충분한 의석을 확보했다. 그러나 국민당이 극우 정당인 뉴질랜드제일당(New Zealand First Party)과 연정을 세우기로 하자 문제가 생겼다. 우파를 쫓아내기 위해 노동당 비판을 자제하라는 어마어마한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연합당은 결국 1999년 앤더튼을 부총리로 내세워 노동당과의 연정에 참여했다. 연합당의 지지에 힘입어 이미지를 쇄신한 노동당은 부시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지원했고, 앤더튼은 이를 군말 없이 따라감으로써 자신이 설립한 연합당의 붕괴를 자초했다. 67
더 최근의 예는 뉴질랜드 연합당(Alliance Party)의 사례다. 연합당은 1991년 노동당 정부의 쓰디쓴 배신의 경험으로 탄생했다. 노동당 정부는 실업률을 치솟게 했고, 복지비 삭감을 추진했고,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상 모두 사유화했다. 노동당에서 분당해 나온 세력이런 결말은 결코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뉴질랜드의 사례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주류 개혁주의 정당 출신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의회적 동맹 방식으로 돌아가려는 압력이 고개를 든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의회주의로 돌아가려는 사람들과 함께 활동하면서도 의회적 책략이 아니라 전체 사회의 계급 세력 균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세력이 존재하느냐 여부다.
1920년 독일에서는 의회 바깥의 투쟁 수위가 워낙 높았고 USPD 당원들과 함께 투쟁한 혁명조직이 존재했던 덕분에 주류 개혁주의 정당으로 회귀하려는 지도자들보다는 그들과 결별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1930년대 독립노동당의 경우에는 지도자들이 노동당으로 돌아가기 훨씬 전에 가장 활동적인 당원 대부분이 공산당으로 당적을 바꿨다. 뉴질랜드의 재앙은 여전히 개혁주의를 받아들이는 한 인물의 주도로 새 정당이 탄생한 것이 아니라 그 정당 내에 조직된 혁명적 경향이 약했던 것이다. 앤더튼이 노동당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좌파적 초점을 제공하는 한 그와 공동전선 속에서 협력하면서도, 연합당의 어떠한 우경화 시도에도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는 그런 혁명적 경향 말이다.
68 유럽 각국의 최근 총선 결과를 보면 많은 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 정당의 지지율이 엄청나게 추락한 반면, 몇몇 나라에서는 부활하기도 한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사회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스나르의 우파 정부에 대한 혐오감으로 이번에는 사회당을 지지했다. 프랑스에서는 2002년에 유권자의 10퍼센트가 두 혁명정당에 투표했다. 그러나 2004년 그 수치는 3퍼센트 아래로 떨어졌다. 영국에서도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스코틀랜드 사회당은 그 전 해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에서 얻은 표의 거의 절반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69 그런 경험들은 “노동계급의 염원이 표현되는 수단으로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더 나아가 공산당은 끝장났다”는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준다. 70 확실히 기존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집권당이었을 때는 그들에 대한 거대한 환멸이 존재했다.(영국에서는 노동당 정부 재임 시기 가운데 1929~31년, 1964~70년, 1974~79년이 그랬다). 71 그러나 그 정당들이 야당으로서 좌파적 목소리를 냈을 때 사람들은 다시 지지로 돌아갔다.
개혁주의 정당이 집권당이던 시절에 그 당과 결별했던 사람들이, 그 정당이 야당이 된 뒤로 언사가 바뀌는 것을 보고는 다시 그 당에 환상을 품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마술적 비법은 없다.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이 중도좌파 “올리브나무“ 연립정부와 모종의 거래를 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지난해[2003년] 재건공산당 전국회의에서 한 연사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대중에 대한 민주좌파당의 헤게모니는 건재하다.”특정 개혁주의 정당과의 결별이 곧 개혁주의와의 결별을 뜻하지는 않는다. 개혁주의는 피억압자들이 자신을 착취하는 사회에서 자라면서 그 사회의 많은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데 그 근원이 있다. 사람들이 개혁주의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더는 그 통념들을 당연시하지 않게 되는 것과 혁명적 사상을 접하는 것이 결합됨으로써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에 눈뜰 때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들은 옛 개혁주의 정당에서 떨어져나와 대안을 건설하려는 노력에 헌신함으로써 개혁주의 사상에 최소한 반쯤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과 경험을 함께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관점을 숨기지 않고 출판물, 토론 모임, 일대일 논쟁 등 모든 기회를 활용해서 그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72 프랑스 LCR의 사정은 조금 낫다. 2002년에 3백만 명이 혁명적 좌파에 투표한 뒤로 규모가 아마도 갑절은 늘어난 듯하다. 그럼에도 3천 명이라는 “투사” 회원 수는 여러 여론조사에서 혁명적 좌파에 “매우” 공감한다고 대답한 사람들에 비해 매우 적다. 73 극좌파들의 실수는 그들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최소한 일부만이라도 선거가 아닌 다른 투쟁에 참여하게 만들고 신문의 정기 구독자로 끌어들일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데 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그리고 사회주의자유당 P-SoL이 새롭게 등장한 브라질에서도) 새로운 선거 대안을 건설하는 일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과제가 가장 시급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사람들을 다른 형태의 투쟁에도 참여하도록 고무해야 한다. 이것이 항상 쉽지는 않을 것이다. 개혁주의 정치에 깊이 물든 적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정치 활동이든 선거 일정의 리듬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전제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극좌파의 어떤 노력도 사상누각이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점에서 최근 유럽 극좌파들의 실적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위에서 본 것처럼 이탈리아 재건공산당은 실제로 1년 전에 규모가 축소되고 있었다. 마이크 곤살레스는 SSP에 대해서 “현재 당원수가 1년 전과 거의 같고, 절반 정도만이 당비를 납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쇠퇴는 활동의 주된 초점이 선거에 맞춰질 경우 필연적으로 나타나는데, SSP 당원 대다수도 갈수록 선거 위주의 활동으로 기울고 있는 듯하다.운동 건설을 위한 정당 건설
74 우리가 그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각 국면에서 재빠르고 정치적으로 행동한 덕분이었다. 우리는 9·11이 벌어지고 사흘도 채 지나지 않아 당대회를 열었다. 당대회를 통해 우리는 미국이 벌이는 아프가니스탄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더 큰 회의를 당 밖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새로운 운동의 첫 조직 회의에서 우리는 너무 편협하게 요구를 내놓으면 광범한 사람들의 참가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주장을 관철시켜야 했다. 이어서 우리 운동이 대중 행동이어야 하는지 아니면 소수의 직접행동이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끝나도 운동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벌어졌다. 이슬람 혐오에 어떤 식으로든 타협하려고 하는 사람들과도 줄기차게 논쟁해야 했다. 더 최근에는 리스펙트 건설을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에서 우리는 아직도 노동당을 “되찾으려”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함과 동시에, 최대한 많은 활동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제한된 강령을 채택해야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파주의자들의 주장도 반박해야 했다.
정치 조직과 정치적 개입의 필수불가결함은 커다란 운동들이 기로에 놓일 때마다 입증됐다. 이 점은 지난 3년 간 영국에서 벌어진 많은 투쟁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SWP의 개입은 9·11 이후 반전운동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SWP에 적대적인] 베르나르 카상조차 “당원 수가 얼마 안 되는”데도 “거대한 반전 집회를 조직해낸 SWP의 놀라운 활약상”을 인정했다.75 이 같은 논쟁이 벌어질 때 “외부 정당의 운동 간섭”이나 “배후조종” 운운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자신들이 운동을 다른 방향으로 “배후조종”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논쟁도 외부로부터 운동에 강요되지 않았다. 제노바에서 카를로 줄리아니가 살해당한 후 투쟁을 포기할 것인가(민주좌파당 소속의 제노바 시장이 이렇게 주장했다) 아니면 다음 날 더 많은 사람을 모아 거리로 나올 것인가(재건공산당의 파우스토 베르티노티와 제노바사회포럼의 아뇰레토가 이렇게 주장했다)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 그랬듯이 말이다.이러한 논쟁들이 ‘자발적으로’ 제기되긴 하지만, 논쟁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자발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올바른 해답을 도출하려면 당면한 사건들을 더 넓은 이론적 틀에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9·11 이후 반전 운동의 각 국면에서 벌어진 논쟁들에 대해 SWP가 내놓은 해답은 과거에 제국주의, 정치적 이슬람, 공동전선 등의 주제를 놓고 벌어진 토론들을 통해 다듬어진 것이었다. 거대한 반전운동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 부분적으로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작은 모임에서 오랜 시간 치열하게 논쟁한 덕분이었던 것이다.
그람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의식성의 요소, 즉 ‘이데올로기적’ 요소가 필요하다. 달리 말해 투쟁의 조건, 노동자들이 놓인 사회적 관계, 그 관계의 체계 속에서 작용하는 근본적 경향들,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모순의 결과로 겪는 체제의 발전 과정 등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인류 발전 과정에서 수행하게 될 복잡한 역할을 완벽히 이해하는 것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혁명정당의 — 옮긴이] 당원들에게는 이것을 요구해야 한다. 당은 이런 고도의 의식성을 표현할 수 있고 또 표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은 대중의 선봉이 아니라 후미에 놓이게 될 것이다. 대중을 이끌기는커녕 대중에 끌려다니기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은 마르크스주의를 내면화해야 한다.
개혁과 혁명을 둘러싼 논쟁은 단지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서 또는 먼 훗날에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그 논쟁은 또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투쟁의 모든 국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즉, 아래로부터 대중 동원을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제도권 내에서의 책략을 강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가장 투쟁적인 사람들일지라도 개혁주의 의식을 일부 갖고 있으면 투쟁의 중요한 순간에 후자의 방식(제도권에서의 책략)으로 경도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규탄의 대상으로 치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들과 논쟁해서 설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느 때건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이 단 하나의 전선에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끔찍한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만 있는 것도 아니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살인에, 임금 삭감에, 정리해고에, 선주민의 토착 언어 사용 금지 조치에, 민족적·종교적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도 있다. 각각의 쟁점들을 둘러싼 투쟁은 떠오르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한다. 그러나 그 투쟁들은 모두 하나의 세계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의 일부다. 각각의 투쟁마다 그런 관점으로 설득될 수 있고 나아가 세계 체제에 맞선 투쟁에 헌신할 수 있는 귀중한 소수가 존재한다. 달리 말하면, 혁명조직 건설에 참여할 수 있는 인적 자원들이 모든 투쟁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조직을 건설하는 것은 혁명가들 자신이 그 일의 사활적 중요성을 인식할 때만 가능하다. 당은 투쟁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비록 당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양극화 자체는 모든 운동에서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나타나지만 말이다. 당원들은 투쟁에 참여할 뿐 아니라 자신들의 경험을 공유하고, 전체 투쟁의 일부인 각 투쟁을 어떻게 상호 연결시킬 것인지를 분석하기 위해 별도의 모임을 갖고, 별도로 조직해야 한다. 당원들은 그런 분석을 다양한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각종 모임과 토론회, 노동조합 집회나 운동 집회에 대한 조직적 개입, 무엇보다 당 기관지를 운동 속에서 체계적으로 판매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하나의 전선에서 가장 활력 있고 의식적인 사람들을 우리의 견해로 설득시켜 다른 전선에도 참여하게 할 수 있다.
당의 이론이 올바르게 발전하려면 그런 상호작용은 아주 중요하다. 과거의 분석은 현재 투쟁의 경험에 비춰 끊임없이 검증돼야 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운동에는 언제나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내놓는 창의적인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혁명정당이 그러한 창의성에 부응하고, 대중의 새롭고 창의적인 해결책들을 반영하도록 기존의 이론을 확대·발전시키려면 운동 내의 가장 역동적인 참가자들을 지속적으로 흡수해야만 한다. 다시 그람시의 말을 인용하면,
근대 이론[즉, 마르크스주의]은 대중의 ‘자발적’ 정서와 반대일 수 없다. 그 둘 사이에는 양적인 정도 차이는 있을지라도 질적인 차이는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로 전환되고 거꾸로도 전환되는, 말하자면 상호 ‘환원’이 가능하다.
77 대중 운동과 당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없이 그 일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당이 어떤 구조로 운영돼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당이 더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는 데 장애물이 아닌 도움이 되고자 한다면 말이다.
당은 대중의 자발적 정서를 “등한시”해서는 안 되고, “그러한 정서를 정치화함으로써 더 고차원으로 승화시켜야 한다.”어떤 혁명조직이든 그 안에서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방어적이든 공세적이든 빠르게 성장하는 운동에 개입하기기 위해서는 당 중앙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략을 전술로 변형하고 이를 신문·리플릿·포스터를 통해 전파함으로써 다양한 전선에서 벌어지는 투쟁들을 결합시키고, 당 내의 한 부분이 만들어낸 좋은 선례를 다른 부문으로 확산시키는 등의 일을 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일은 당원들이 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도출하는 데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하는 사람들로 이뤄진 모종의 상임 정치기구, 즉 당 지도부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이런 일들을 하려면 당원들이 당 중앙에서 내린 결정을 실행에 옮기는 규율을 스스로에게 부과할 필요가 있다. 행동 통일을 해야만 중앙에서 내린 결정이 옳았는지 여부를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당원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개입에서 무엇이 옳았고 무엇이 틀렸는지를 판단할 수 없다. 일정 정도의 중앙집권과 규율 없이는 효과적인 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중앙 지도부도 기층 활동가들로부터의 끊임없는 피드백이 없이는 올바른 결정에 도달할 수 없다. 활동가들은 자신들이 수행할 결정들의 근거를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야 하며, 그 결정이 당원들의 집단적 경험과 부합하지 않으면 지도부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과정은 당내 자유로운 논쟁을 통해서 중앙과 여러 투쟁 전선에서 활동하는 당원들이 끊임없이 서로 배울 때만 가능하다. 따라서 당은 중앙집권적일 뿐 아니라 민주적어야 한다. 이견을 표현하는 것은 당원의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다. 올바른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이견 제시와 토론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78 혁명정당의 당원들은 사소한 갈등이나 불필요한 논쟁에 휩쓸리지 않도록 스스로 규율을 부과해야 하며, 이를 위해 때로는 불필요한 논쟁으로 당의 활동을 마비시키는 당원에게 집단적 제재를 가해야 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원리는 말보다 실천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떤 형태로든 조직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논쟁이 애초의 취지와 무관하게 발전해 나가면서 사람들 간의 개인적 갈등으로 채색되고 사람들로 해금 사소한 일로 서로 멱살 잡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혁명조직이라고 해서 예외라는 보장은 없다. 혁명정당의 당원들도 자본주의 하에서 성장했고,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할 때조차도 체제의 압력을 받는다. 그러나 혁명조직이 효과적인 조직이기 위해서는 단순한 토론 서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혁명조직의 회원이 아닌 활동가들은 흔히 혁명조직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되는 불평을 제기한다. 하나는 혁명조직들이 비민주적이며 조직원들과 운동에 자의적인 결정을 강요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혁명조직이 내부 분파 논쟁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것이다. 둘 다 일부 초종파적인 조직들의 행태에 대한 소문을 근거로 어설프게 희화화된 혁명조직 이미지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 두 가지 불평 중 어느 하나라도 일리가 있다면, 혁명조직은 자신의 과업, 즉 각각의 전선으로부터 최상의 투사들을 결집시켜 이들이 상호 협력 하에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는 것에 실패한 셈이 된다. 그러한 실패는 단지 혁명조직 자신에게만 손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운동에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전체 운동에도 손해를 끼친다.
결론
시애틀 시위가 있었을 때 혁명적 좌파는 국제적으로 매우 소수였다. 따라서 거대한 시위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 중 혁명적 좌파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운동이 새로운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그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러한 논쟁에서는 개혁주의자·자율주의자와 함께 논쟁의 한 축을 형성했던 조직된 혁명적 좌파의 존재가 중요했다. 운동에 처음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여전히 개혁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투쟁을 경험하면서 개혁주의 사상과 단절했다. 운동이 더 전진하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면 바로 이런 사람들이 조직돼야 한다. 아울러, 낡은 관념과 부분적으로만 단절한 사람들에게는 거기서 좀 더 나아가도록 독려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은 이미 혁명가가 된 사람들이 논쟁을 회피한다면 결코 이뤄질 수 없다. 달리 말해, 자기 색깔을 분명히 드러내는 혁명가 조직은 필수이지 선택이 아니다. 혁명정당의 당원들은 광범한 투쟁에 참여하고 지역사회와 직장 내의 당 조직을 통해 활동해야 한다. 그들은 정기적인 신문 판매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고 모임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과의 토론을 단지 당면한 전술에 대한 것으로 한정해서는 안 된다. 개혁이 아닌 혁명, 즉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꾸는 문제도 함께 제기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는 지난 5년간의 운동이 보여준 잠재력, 즉 체제를 전복하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해 낼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주
-
출처: Chris Harman, “Spontaneity, strategy and politics”, International Socialism 104(Autumn 2004), pp3-48.
↩
- C Harman, ‘Anti-capitalism: Theory and Practice’, International Socialism 88(Autumn 2000), p49. ↩
- 예를 들어 수전 조지는 Socialist Review 2001년 9월호에 이렇게 썼다. “이제는 내 양심상 우리 회원들에게 시위에 나가라고 차마 말 못하겠다. 한편에서는 사람들을 포위하고 실탄을 발사하는 경찰들이 판을 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경찰과 파시스트들에게 철저히 침투당한 채 대책 없이 날뛰며 자기 회원들을 단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어 보이는 블랙 블록이 판을 치는 시위 현장에 나가 다치거나 죽을 위험을 무릅쓰라고 말 못 하겠다.” 다행히 수전 조지는 이후에도 줄곧 시위에 참가했다. ↩
- 9·11에 대한 운동의 대응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S Ashman, ‘The Anti-capitalist Movement and the War’, International Socialism 98(Spring 2003), pp7-22 참조. ↩
- S Hook, Hegel and Marx, p18에서 재인용. 엥겔스는 베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요지의 말을 이렇게 썼다. “나머지 문제에 관해서는 헤겔 영감이 이미 말해 주었다네. 정당은 분열을 겪고서도 버틸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써 자신이 승자임을 입증한다네. 프롤레타리아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상이한 발전 단계를 거치는데, 각 단계마다 민중의 일부분은 뒤쳐지며 더는 전진하려 하지 않는다네. 이 점만 보더라도 어째서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라는 것이 어디서나 서로 사생결단을 벌이는 다양한 정당 집단들을 통해 실현되곤 하는지가 설명된다네.”(1873년 6월 20일). ↩
- 카상의 인식과 실천 방식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의 저서 Tout a Commencé à Porto Alegre(Paris, 2003)를 보라.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운동의 시작점을 시애틀(즉, 행동)이 아닌 포르투알레그레(즉, 토론회)에서 찾고 있다. ↩
- 상기의 New Left Review를 보시오. ↩
- B Cassen, 같은 책, p128 참조. 카상은 특히 유럽사회포럼 참가자들이 유럽 TUC 지도자 한 명에게 적대적 반응을 보인 뒤로 유럽 TUC 지도자들이 기분 상할 것을 걱정했다. 사회포럼 참가자들의 적대적 반응은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의 그 지도자가 강연 도중에 “사회적 시장” 경제가 필요하다는 말을 해서 청중의 졸음을 확 달아나게 했던 것이다. ↩
- B Cassen, ‘Trois questions pour ATTAC’, May 2003, www.france.attac.org ↩
- 그는 ATTAC 스위스 지부의 주최로 제네바에서 열린 공개 포럼 자리에서도 이 같은 비난을 퍼부었다. 카상보다 먼저 발언한 영국 Globalise Resistance의 크리스 나인햄 등 많은 패널 연사들이 각 세우는 논쟁을 애써 피했지만 카상은 의도적으로 판을 갈라놓았다. ↩
- 제노바 시위 직전까지 Indymedia 웹사이트에는 비폭력 자율주의자들인 “투티 비앙키”와 블랙 블록 지지자들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논쟁들이 게시됐다. ↩
- J Holloway, Change the World Without Taking Power(London, 2002). 국역: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갈무리, 2002). ↩
- G Almeyra, ‘EZLN; un viraje importante’, Viento Sur 70(October 2003), p55. ↩
- La Jornada, Mexico City, 28 July 2003, quoted in G Almeyra, as above, p54. ↩
- 영국 공산당(Communist Party of Britain)을 말한다. 자신들을 대영공산당(Communist Party of Great Britain)이라 칭하는 종파주의 그룹과 혼동하지 말 것. ↩
- 2004년 1월에 열린 뭄바이 세계사회포럼 기간 중 Globalise Resistance가 조직한 포럼에서 몽비오가 한 발언이다. ↩
- 〈가디언〉에 실린 여러 편의 기사들을 참조하라. ↩
- A Bertho, ‘Un Social Très Politique’, in Critique Communiste 169-170(Summer/Autumn 2003), p184. ↩
-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는 아마도 스페인과 아르헨티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에서는 그나마 어느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양대 혁명조직들인 공산주의운동(Movemiento Comunista)과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iga Comunista Revolucionaria)이 1990년대 초에 해산했고, 아르헨티나에서는 2000년에 존재하던 조직된 혁명가 수가 1985년의 20퍼센트에 불과했다. ↩
- 상기의 Critique Communiste에 실린 ‘Mouvement Social et Politique’ 주제의 다양한 칼럼들을 참조하라. ↩
- I Johsua, ‘Les Nouveaux Movements Sociaux’, Critique Communiste, as above, p168. ↩
- Sophie Béroud가 상기의 Critique Communiste, p142에 기고한 유용한 글, ‘De Decembre Anti-Juppé au Printemps Anti-Fillon’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
- 같은 글, p143. ↩
- 옛 이탈리아 공산당(PCI)은 지도부가 민주좌파당으로 재창당하기 위해 당을 해산했을 당시 당원 수가 2백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때 당 지도부의 노골적인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반발해 떨어져나온 재건공산당은 그 중 10만 명을 데리고 나왔다. 이 10만 명은 대체로 당에 충성하기는 하지만 수동적인 당원들로서, 가령 프랑스 LCR이나 영국 SWP 당원들에 비교하면 신념이 훨씬 덜하다. 그럼에도 이들은 제노바 시위 탄압에 항의하는 운동과 피렌체 유럽사회포럼을 건설하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
- 1천만 명이 노동권 신장 안에 찬성표를 던졌지만 투표율이 워낙 저조해 무효로 끝났다. ↩
- 이 회의에서 오고간 흥미진진한 토론의 녹취록은 www.liberazione.it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의가 열린 배경에 대해 알고 싶다면 ‘Rifondazione: un Debate Sobre los Movimientos Sociales’, Viento Sur, 70(October 2003), p31에 실린 G Buster의 소개 글을 참조하라. ↩
- 재건공산당 의원 한 사람이 당의 전국회의에서 언론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언급했다. ↩
- 이탈리아 극좌파가 개혁주의와 화해하는 방향으로 이끌린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1970년대 중반에도 극좌파의 주요 인사들이 당시 공산당과의 연합을 제안하는 등 비슷한 현상이 일어났다. Sebastiano Timpanaro가 Praxis 20, Palermo(October 1977)에서 이 같은 접근법을 강력히 비판했다. 같은 글이 International Socialists, International Discussion Bulletin, no 6(February 1978)에 영어로 번역돼 있다. ↩
- G Malaburba, F D’Angeli and F Turigliatto, ‘Rifondazione: Un Debate Sobre los Movimientos Sociales’, in Viento Sur 70, as above, p34. ↩
- 재건공산당 지도자 파우스토 베르티노티는 주요 공영방송 채널인 RAI 1에 나와 이렇게 호소했다. “내일 제노바에서는 대규모의 평화적 시위가 반드시 열려야 합니다. 이 운동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인 대중 민주주의가 기필코 승리해야 합니다.”(T Behan, ‘Nothing Can Ever Be the Same Again’, International Socialism 92(Autumn 2001), p10에서 재인용). ↩
- Tom Behan이 지적했듯이 제노바 시위 전의 재건공산당에게는 명확한 이론이 없었다. ‘The Return of Italian Communism’, International Socialism 84(Autumn 1999)를 참조하라. ↩
- 재건공산당 전국회의로부터 2주 뒤인 7월에 SWP가 주최한 2003년도 MARXISM 대회에서 베르티노티가 던진 농담이다. ↩
- 에콰도르인권상설회의(vocero de la Asamblea Permanente de Derechos Humanos del Ecuador) 대변인 Alexis Ponce의 (스페인어)인터뷰 기사에서 재인용(원문은 Heinz Dieterich, ‘Solo los pobres tienen patria’, www.rebelion.org). 에콰도르 반란에 관해 이 글에 나온 자세한 사항들은 이 인터뷰 기사를 참조했다. ↩
- K Lucas, ‘Ecuador: El otro yo de Lucio Gutiérrez’, IPS report from Quito, 16 January 2004에서 재인용. ↩
- 같은 글. ↩
- 같은 글. ↩
- F H Flor, ‘Los Movimientos Indígenas y la Lucha por la Hegemonía; el Caso de Ecuador’, Herramienta 25, Buenos Aires, April 2004, p82. ↩
- A Ponce, 앞의 글. ↩
- 같은 글. ↩
- F H Flor, 앞의 글. ↩
- ‘Lecciones de Zapatismo’, in C Rodriguez Guerra, Los Grupos Insurgents en el Ecuador(Quito, 1999), pp115-120. ↩
- 이 모든 사건의 좀 더 상세한 전말과 원인에 대해서는 International Socialism 94(Spring 2002)에 실린 나의 글 ‘Argentina: Rebellion at the Sharp End of the World Crisis’를 참조하시오. ↩
- 이와 같은 묘사는 내가 2002년 4월과 2003년 1월에 아르헨티나에 직접 가서 본 주민위원회와 피케테로스 회의 모습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
- 이 논쟁의 녹취록은 www.resist.org.uk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M Yunes, ‘Un Análisis Marxista del Gobierno de Kirchner’, Socialismo o Barbarie-revista(September 2003). ↩
- 이 흥미진진한 토론의 스페인어 녹취록 전문은 www.econoticiasbolivia.com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코카인의 원료인 작물. 안데스 지역 선주민들은 코카 잎을 가공되지 않은 상태로 씹거나 차를 끌여 마시기도 한다. ↩
-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에 존재하는 동명의 정당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하시오. ↩
- Socialismo o Barbarie-revista 16(April 2004)에 실린 로베르토 사엔스(R Saenz)의 글 “Critica de romanticismo ‘Anticapitalista’” p15, p28에서 재인용. 사엔스의 글은 볼리비아 반란의 성격과 오늘날 볼리비아 좌파들이 직면한 문제를 훌륭하게 설명하고 있다. ↩
- 올리베라는 2001년에 런던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이러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
- www.econoticiasbolivia.com에서 Miguel Pinto Parabá가 이 회의에 관해 쓴 2003년 10월 19일자 보고서를 찾아볼 수 있다. ↩
- R Leviné Meyer (London, 1977), p133. 독일 내전 기간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내가 쓴 책 The Lost Revolution, Germany 1918 to 1923(London, 1982), pp96-157을 보라(국역: 《패배한 혁명》(풀무질, 2007)). ↩
- Jack Weinberg와 Jack Gerson의 이 회고록은 1969년 Independent Socialist에 처음 수록됐다가 Michael Friedman (ed), The New Left in the Sixties(Berkeley, 1972)으로 재출판 됐다. 이 장의 모든 인용문은 이 책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
- C Rodriguez Guerra, 앞의 책. ↩
- 선주민 권리 운동의 부상과 산업 구조 변화 때문에 더 다양한 세력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산업 구조 변화로 노동계급 구성이 바뀌면서 광원들은 더는 예전처럼 최고로 중요한 집단이 아니게 됐다. ↩
- 카우츠키의 관점에 관해서는 T Cliff, D Hallas, C Harman and L Trotsky, Party and Class(London, 1996), pp48-50에 수록된 나의 글 ‘Party and Class’를 보라. ↩
- P Spriano, The Occupation of the Factories(London, 1975)가 이 문제를 다룬 고전이다. ↩
- Antonio Gramsci, “Letter to Togliatti, Terracini and others”, 9 February 1924, in A Gramsci, Political Writing 1919-26(London, 1978), p198. ↩
-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내가 상기의 Party and Class에서 주장했듯이 레닌의 전체적인 접근법은 이와 전혀 달랐다. J Molyneux, Marxism and the Party(London, 1978), pp36-96도 참조할 것(국역: 《마르크스주의와 당》(북막스, 2003)). ↩
- 비록 스탈린주의 전통에서 가장 강조하는 텍스트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이 모델이 완전한 형태로 제시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
- The secon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The Role of the Communist Party in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Theses, Resolutions and Manifesto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London, 1980), p69. ↩
- 같은 책, p68. 그람시는 당을 “노동계급의 기관”이라고 말한 보르디가와는 달리 당이 “노동계급의 일부”라고 주장했다. A Gramsci,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21-26(London, 1978), p360의 A Gramsci and P Togliatti, ‘Lyons Theses’ 참조. ↩
- M Smith 의 팸플릿 The Awkward Squad(London: SWP, 2003) 참조. ↩
- www.eiro.eurofound.eu.int에서 이 파업을 훌륭하게 보도했다. ↩
- 영국에서는 2004년 초여름에 GMB 노조 지도자 Kevin Curran 같은 사람들이 노동당과 갈라서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가 늦여름에 가서는 주요 노조 지도자들과 정부가 “합의”에 도달한 일도 있었다. 2004년 8월 21일자 Socialist Worker 사설을 참조하라. ↩
- A Callinicos, ‘Spirit of 1989 in Germany’, Socialist Worker 14 August 2004. ↩
- 그 이름이 혼란스럽게도 신노동당(New Labour)이었다! ↩
- 연합당에 대한 글은 www.wsws.org 에서 찾아볼 수 있다. ↩
- C Bellotti, in www.liberazione.it ↩
- 같은 글. ↩
- M Smith, ‘The Broad Party, the Revolutionary Party and the United Front: A Reply to John Rees’, International Socialism 100(Autumn 2003), p69. ↩
- 이에 관해 내가 Socialist Review 2003년 11월호에 쓴 글, ‘Faith of their Fathers’를 참조하시오. ↩
- 마이크 곤살레스는 이렇게 썼다. “내가 보기에 [SSP의] 정치적 접근법상 스코틀랜드 의회와 영국 의회 의원단이 당 활동의 핵심으로 간주되고 있는 듯하다. 당의 활동 리듬과 방향은 점점 그 쪽으로 가고 있다”(SSP Socialist Workers Platform을 위해 작성한 2004년 7월 문서 중에서). ↩
- Critique Communiste가 인터뷰한 설문조사 전문가는 2002년에 혁명가들에게 투표한 유권자의 압도 다수는 정부에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라는 압력을 넣기 위한 수단으로 혁명가들에게 투표했지만 소수는, 그러니까 전체 유권자의 약 4퍼센트(약 40만 명)는 실제로 혁명적 좌파에게 매우 공감해서 투표했다고 한다(Critique Communiste 173(Summer 2004), p198). ↩
- B Cassen, 앞의 책, pp119-120. ↩
- 자세한 내용은 T Behan, 앞의 책, p10 참조. ↩
- A Gramsci, “Introduction to the First Course at the Party School”, Selections from Political Writings 1921-26(London, 1978), p288. ↩
- A Gramsci, “Spontaneity and Conscious Leadership”,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London, 1971), p198. ↩
- J Molyneux도 앞의 책, p166에서 이와 같은 논지를 개진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