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 ③
한국 진보진영의 경제 대안 논의
복지국가 논의를 중심으로
〈시리즈 기획 한국 경제〉는 한국 경제의 쟁점들을 네 번에 걸쳐 다루는 기획이다. 이번 호에는 ‘한국 진보진영의 경제 대안 논의’ 를 싣는다.
2 국제 금융자본의 영향력 확대를 반대하며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한 이찬근·장하준·정승일 등의 대안연대회의뿐 아니라 좋은정책포럼의 ‘제3의 길’ 또는 ‘혁신 주도 동반성장 체제’, 3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창조적 노동중심 경제’, 4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의 ‘신진보주의’ 또는 ‘개방적 민족경제’, 5 신정완 교수의 ‘사회적 시장경제 모델’, 6 ‘사회투자국가’, 7 새로운코리아구상을위한연구원(코리아연구원)의 발표들 8 그리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까지 9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의 경제 대안 논의는 매우 다양하다.
아무튼 이미 소액주주 운동 등 재벌 개혁 운동을 주도하던 김상조 교수 중심의 경제개혁연대,이런 다양한 견해들 사이에는 몇몇 차이점도 있다. 예를 들어 재벌 개혁을 둘러싼 논의, 보편적 복지와 영국 신노동당 정부의 ‘제3의 길’을 둘러싼 논의들이 그것이다. 특정 단체 또는 연구소만의 고유한 견해도 있는데, 좋은정책포럼은 ‘분권’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지방 균형발전 정책을 강조하고,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는 남북 경제협력과 동북아시아 수준의 경제협력을 강조한다.
10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그러나 광범한 합의점들이 더 많은 듯하다. 예컨대, 한국의 열악한 복지 현실을 개선하려고 복지의 질과 양을 획기적으로 높여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추구한다는 점, 그러면서도 경제의 혁신을 강조하며 복지 강화를 대가로 노동자들이 해고나 전환 배치 같은 유연성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연안정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 단지 실업급여를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쉽게 일자리를 얻도록 노동자 교육과 취업 알선을 강화하는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조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특히 이런 견해는 최근 주요 진보진영 인사들이 대거 결집한이 글에서는 우선 한국 진보진영의 개혁주의적 경제 대안 중 주요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주주 자본주의와 재벌 개혁, 보편적 복지국가를 둘러싼 논의를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리고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되 필요하면 다른 견해들도 함께 검토하며 한국 진보진영의 개혁주의적 경제 대안 논의를 살펴보고자 한다.(이 글에서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은 주로 위에서 언급한 진보진영의 연구 단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했다.)
주주 자본주의와 재벌 개혁
널리 알려져 있듯이 장하준·정승일을 중심으로 한 대안연대회의는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인즉, 한국 경제는 그동안 정부의 적극적 산업정책과 합리적·전략적 자원 배분, 은행과 기업 간의 ‘관계 금융’을 통한 안정적 투자자금 조달 등등 덕분에 고도성장을 했고 산업구조 고도화가 구축됐는데, 금융 자유화 등으로 주주 자본주의가 확립되면서 이 구조가 무너지는 바람에 성장이 둔화하고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재벌을 해체하려 하면 결국 그 기업들은 소유권 지키기에 전념하거나 외국자본에 넘어갈 공산이 큰데, 그러면 투자가 더욱 감소해 경제가 더욱 악화될 수 있으므로 재벌의 지배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투자 확대와 일자리 확충과 사회공헌 기여금 등을 받는 ‘대타협’이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11 주주 자본주의론이나 금융화론의 최대 약점은 재벌을 비롯한 거대 산업자본들조차 왜 금융자본의 ‘지배’를 받아들이게 되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굴복했다기보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설명하듯이, 이윤율 저하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자본이 금융 부문에 몰리면서 금융 부문이 비대해졌다고 보는 편이 설득력 있다.
그러나 외국자본 중심의 주주·금융자본이 한국의 재벌과 산업자본을 압박하고 단기주의를 강요해 경제성장이 정체하고 있다는 대안연대회의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12 주장이 현실에 더욱 들어맞는 것 같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한국 자본주의는 여전히 ‘총수 자본주의’의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대기업들이 배당이나 주가 관리 등에 더 신경을 쓰며 주주들을 배려하는 것은 사실인 듯하지만, “주주들과 기업 경영자들의 힘겨루기 싸움의 최종 승리자는 경영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재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경영자 자본주의를 완전히 탈각하지 못했다”는13 지적은 일리가 있다.
그런 점에서 “‘대타협론’의 심각한 문제점은 이 논의가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이런 논의를 제기함으로써 그 비현실성은 더욱 강화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현 상황에서 … 대타협론은 결과적으로 재벌로 하여금 실제로 타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최종 심급에서의 위기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14 성장률 저하나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도 동의할 수 없다. 투자에서 중소기업들의 비중은 IMF 경제 위기 전후로 별 차이가 없고, 중소기업들도 대기업들과 마찬가지로 부채비율을 낮춰 왔으며, 은행 대출에서 중소기업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도 꾸준히 상승해 왔다. 이런 점들을 보면 중소기업들의 투자 삭감은 한국 경제의 근본적 위기를 반영하는 것이지, 금융자본이나 재벌 같은 일부 자본들의 행태 때문이 아니다. 15
그러나 재벌 개혁론자들의 주장, 즉 재벌 체제의 비효율성과 중소기업 압박 때문에16 그러나 둘 사이의 차이는 여전히 있다. 재벌 개혁론자들은 총수 가문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자 이 법의 제정을 추진하려 하고 그에 따라 재벌 개혁 운동이 더 강화돼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반대로 타협론자들은 재벌과 타협의 결과물로 이를 고려하고 있는 듯하다. 17
최근 재벌과의 타협론과 재벌 개혁론은 ‘기업집단법’을 제정해 재벌의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하는 쪽으로 수렴하고 있는 듯하다.재벌의 양보를 얻기 위해서라도 재벌에 맞서 싸워야 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 강하게 뿌리박힌 재벌 체제를 개혁하고 재벌에게서 실질적 양보를 얻어내려면 체제 전체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노동계급 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사회변혁가들은 이런 운동이 벌어지도록 고무해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이런 운동이 벌어진다면 체제 전체를 근본에서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현 한국 경제의 문제는 단지 재벌 체제의 문제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투자 전략과 보편적 복지
한국의 진보진영은 대체로 보편적 복지 도입을 지향한다. 다른 나라들보다 턱없이 부족한 복지 현실을 고려할 때 출산·보육·교육·의료·실업·주택·연금 등에서 복지를 대폭 확대하고 모든 국민에게 차별 없이 복지를 제공하겠다는 주장은 적극 지지할 만하다.
18 사실 한국 진보진영에게 사회투자국가론이 인기가 많은 것은 아닌데, 영국의 신노동당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이 정책을 자신들의 정책으로 삼은 적이 있는 데다 전 보건복지부장관인 유시민이 사회투자국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19
그런데 예를 들어 사회투자국가론이나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주장을 살펴보면, 둘 사이에는 어감이나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우선, 주요 차이점은 보편적 복지를 즉각 도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회투자국가론은 “수혜 대상 결정 시 중장기적으로는 보편주의를 지향하되, 한정된 재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는 선별주의를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단계를 두고 있다. 반대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복지 정책을 두고 “보편적 복지는 여전히 부실하였으며, 이로 인한 민생의 불안은 항상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잔여주의 선별적 복지로는 서민과 중산층의 패배와 추락에 대한 불안을 거의 해소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최소한의 패자부활 기회마저도 부여하지 않는 구조였다”고 맹비판한다.현실에서 선별적 복지는 흔히 복지 지급에 까다로운 조건을 달아 복지를 축소하는 구실을 했고, 유럽이나 미국 정부는 흔히 복지를 공격할 때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 쉬운 보편적 복지보다 선별적 복지들을 우선 공격했다.
22 보수적인 지배자들과 타협해 가능한 수준에서 복지를 도입할 수밖에 없다고 제안한다.
차이는 복지 제도를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에서도 드러난다. 사회투자국가론은 “신자유주의와 성장 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되, 그 안에서 사회복지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투자 개념의 복지 패러다임은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최대공약수”라면서23 만약 말대로만 실행한다면 이 차이는 정책 집행에서는 꽤 큰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반대로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먼저 복지 혜택부터 대폭 확장하고 세금 증액은 그에 비례하여 나중에 하는” 식으로 복지를 먼저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그런데 문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나 사회투자국가론 모두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이나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 같은 ‘사회투자 전략’을 도입하려 한다는 점이다. 물론 같은 제도를 설명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덴마크와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설명하는 것을 보자.
24 이와 달리, 사회투자국가론은 “[덴마크 실업 대책에서] 특징적인 것은 적극적 대책(구직, 직업훈련 등)에 대한 참여를 실업자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실업 극복에 대한 당사자의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적극적 대책에 대한 참여를 의무화하는 적극화 이념을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다. … 실업자가 노동사무소가 제공하는 일자리나 직업훈련 기회를 거부할 경우 실업수당의 지급을 중단하는 제재를 가하게 된 것이다” 하고 말한다. 25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스웨덴에서 실직한 노동자는 일할 의사가 있는 한, 최대 2년 동안 월평균 소득의 80퍼센트를 받으며, 무상으로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비슷한 제도를 설명하는 데 “일할 의사가 있는 한”이라는 조건을 가볍게 붙이고는 국가가 관대하게 복지와 교육을 제공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와 달리 사회투자국가론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으로 실업 문제에서 개인 책임이 강화됐고, 정해진 교육을 이행하지 않으면 수당이 끊긴다는 점을 강조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덴마크와 스웨덴의 현실은 사회투자국가론의 설명에 더 가깝다. 그러나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제안, 즉 국민의 권리로서 복지를 요구해야 한다는 관점이 현실을 왜곡하는 환상의 베일 구실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조스팽 사회당 정부(1997~2002년)와 영국의 블레어 노동당 정부(1997~2007년)의 차이와 비슷하다. “조스팽의 이른바 ‘다원적 좌파’ 정부의 실제 모습은 그 수사와는 달리 영국과 독일의 좌파 정부와 아주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가끔식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그것을 관리하고자 하는 오랜 전통을 따르는 사회민주주의 정부, 그리고 시장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자랑으로 내세우는 정부, 이 양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이를 제어하려면 국가의 구실이 필요하고, 관대한 복지를 국민이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복지 요구를 쟁취하기 위한 운동에 동참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복지국가소사이어티도 자본주의 경제성장이라는 관점을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연안정성이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받아들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신들이 내세운 목표를 성취하는 것에서도 머뭇거릴 공산은 있다.
아래에서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역동적 복지국가라는 대안을 중심으로 한국을 복지국가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주장을 살펴보겠다.
지식기반경제론과 복지
지식기반경제론은 한국의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이 내놓고 있는 다양한 경제 대안의 중요한 이론적 바탕이 되고 있다.
27 지식기반경제는 흔히 IT산업과 관련된 디지털 경제나 탈산업화 사회의 서비스 산업으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지식기반경제의 주요 부문으로 부품·소재 산업을 꼭 언급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제조업 부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기반경제란 새로운 지식의 영역을 개척하는 것과 함께 모든 경제활동에서 여러 형태의 지식과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공유·확산·활용함으로써 부가가치의 창출과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 가는 경제로 정의할 수 있다.”28 이것은 고전적 복지국가가 1970~80년대 위기를 겪은 것과는 달리 새로운 복지국가는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첫째, 지식기반경제가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의 복지국가론에서 중요한 이유는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하면 생산성이 계속 발전할 수 있으므로 복지를 유지·확대할 수 있는 자원을 계속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의 생존엔 지속적 경제성장과 투자 활성화가 필요조건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복지국가가 파산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기업 투자의 저조로 경기가 위축되면 실업자가 크게 늘어날 것 아닙니까. 이 경우, 복지국가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복지 지출 급증으로 큰 난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한국의 맥락에서 보면 개발독재 시기에 고성장을 이끌었던 (재벌 중심의) “요소 투입형 경제”로는 더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할 수 없는 한계에 봉착했으며, 이를 타개하려면 경제구조를 지식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29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끝없는 혁신이 중요하므로 노동시장이 유연해야 한다. 따라서 진보진영도 노동시장 유연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앞서 살펴봤듯이, 지속적인 성장이 없다면 복지국가를 계속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지식기반경제는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받아들이는 근거가 된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자들과의 차이점은 실업급여나 연금 등을 확대하는 보편적 복지를 제공함으로써 안정성을 확보한다는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른바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이다. 보편적 복지로 제공하는 안정성이 단지 시혜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이 없다면 “소득 양극화가 성장동력 약화와 지식·기술·숙련도 등 인적자본 양극화를 낳고 이는 다시 전반적 저성장과 소득 양극화, 그리고 사회적 자본의 약화를 낳는 악순환이 시작되고 고착화되는 ‘양극화의 덫’에 빠지게”(강조는 인용자) 되기 때문이다. 또, 보편적 복지는 유연성 확대로 말미암은 사회적 갈등 비용을 감소시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한다. “실업자가 되더라도 일단 생계가 보장되니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저항의 강도는 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실업자가 되면 생계가 막막해지니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저항은 매우 격렬할 수밖에 없습니다.”셋째,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숙련과 지식을 갖춘 노동력을 공급하는 게 성장의 핵심이라고 보기 때문에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의 복지론은 교육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조한다.
여기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실업자 등에게 실업급여 등을 지급해 소득을 지원해 주는 데서 그치는 소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달리, 실업자나 저숙련 직종 노동자들을 위해 다양한 직업훈련과 교육 기회를 주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연결해 줌으로써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으로 정의된다. 물론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조하면서도 충분한 실업급여 등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양극화의 주된 해법으로 제시되는데 사람들을 양질의 일자리로 옮기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배제를 줄여 노동시장에 재진입하게 만들고 취업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고용을 통한 구매력 증가를 가져온다.” 즉,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생산성을 높여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만든다는 것이다. 한편, 교육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강조는 “복지는 낭비”라는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한 반격이며 따라서 한국 사회가 복지의 확대를 좀더 쉽게 수용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적극적 복지가 대단히 생산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기존의 ‘복지는 소비적’이라는 신자유주의 지배 담론의 부정적 함의를 털어버리고, 보편주의 복지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높여 주는 소위 ‘사회투자 전략’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다.”
33 또는 자본 투입만큼 지식이 중요해진다는 것을 뜻하므로 지금까지 한국 경제 발전의 주요 형태였던 재벌·대기업 중심의 성장에서 벗어나 혁신적 중소기업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지식기반경제에서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특징으로 하므로 규모의 경제보다는 창의성, 다양성, 유연성이 더 중요시되고, 혁신적 중소기업이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다.” 34
넷째, 지식기반경제론은 한국의 진보진영이 중소기업 육성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근거가 된다.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한다는 것은 자본 투입보다 이것은 다른 한편 양극화를 해소하는 방법이 되는데, 전체 고용의 88퍼센트 이상을 담당하는 중소기업이 저생산성으로 고통받고 있고 이 때문에 중소기업 노동자들도 저임금과 일자리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의 생산성(대기업의 35퍼센트)을 선진국 수준(대기업의 70퍼센트)으로 끌어올린다면 임금은 50퍼센트 이상 인상되고 양질의 일자리가 대량으로 창출된다는 것이다.지속적인 성장?
지식기반경제로 전환함으로써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는(그래서 복지국가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전제는 1990년대 유행했던 ‘신경제’론의 재판再版처럼 보인다.
36 그러나 IT산업의 급속한 확대에 기반을 둔 신경제론은 2000년대 초 주식시장 거품 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신경제론이 유행할 때도 “지식은 추가적 비용 없이 다른 이들에 의해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지식경제가 더 많이 생산할수록 생산 단위당 비용은 더 낮아진다는 것이다. 즉, 수익 체감 대신 수익 체증이 도래했다는 것이다. 이는 미래에 보다 빠른 성장률을 약속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졌다.37 “컴퓨터와 고속 통신을 비롯한 기술 진보의 경제성장에 대한 기여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은 1990년대 중반까지 그리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38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 미국 경제의 생산성이 실제로 향상됐지만 전후 장기 호황 시대는 고사하고 1970년대 수준으로도 회복하지 못했다. 39 부품·소재 산업이 발전한 독일·일본은 1990년대 이래 경제 정체로 고통받았다. 게다가 1990년대 후반 미국 경제의 급속한 성장은 ‘정보혁명’에서 비롯한 생산성 증가 덕분이라기보다 주식시장에 대한 ‘비이성적 투기’ 때문이었을 공산이 크다. 40
컴퓨터와 인터넷 보급이 실제로 생산성을 높였는지조차 이견이 분분하다.2000년대 들어 혁신이 가속화하면서 생산성 증가가 뚜렷해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런 주장은 2008년에 시작된 경제 위기로 다시 한 번 타격을 입을 듯하다. 이번 경제 위기가 부동산 거품에 의존한 소비 확대에서 시작됐다는 점이 널리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41 1920년대에도 전기·라디오·내연기관(즉, 자동차) 등에 기반을 둔 ‘혁명적인 신기술’ 덕분에 불황이 사라졌다는 환상이 널리 퍼졌지만, 42 1929년 주식시장 폭락과 1930년대 대불황으로 그런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경제가 장기간 성장하던 때의 끝 무렵이면 늘상 경기순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됐고 새로운 규칙이 생겨났다는 주장이 득세한다.요즘의 ‘정보혁명’이라는 것이 19세기 전신의 발명과 대양횡단 케이블의 설치, 1920년대의 전화·전기·내연기관 발명에 필적할 만큼 혁신을 일으키고 사회 전반의 관계를 바꿀지는 의심이 든다.
43 따라서 자본가들이 기계와 설비를 구입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양(즉, 투자량)에 자본주의 경제성장이 달려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보혁명’이 설사 생산성을 높이고 사회관계를 바꿀 수 있다 해도,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기본 방식을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대부분의 기술은 기계나 여타 설비에 체화돼 있고 따라서 투자 없이 일어날 수 있는 기술 발전은 지극히 제한돼” 있다.44 지식노동이 늘어 효율성이 높아지면 사용가치는 늘어날 수 있지만, 가치는 증대하지 않을 수 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기술의 발전(기술적 구성의 고도화)이 장기적으로는 이윤율을 떨어뜨려 위기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기술이나 지식의 발전이 지속적으로 생산성을 높일 것이라는 주장은 생경하다. 그런 주장은 가치와 사용가치를 혼동하고 있다.이런 모든 비판과 경제 위기라는 현실이 보여 주는 바는 고기술·고숙련이 자본주의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점이며, 따라서 역동적 복지국가는 경제 위기의 충격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유연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의 복지국가론은 일자리 양극화를 어떻게 극복하겠다는 것인지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45 그러나 고학력자들이 대체로 양질의 일자리를 차지하기는 하지만 한국의 현실을 보면 그게 다는 아니다.
이들은 복지 중에서 무상교육과 질 좋은 공교육, 모든 아동에게 수당 지급 등을 특히 강조하고, 평생 교육을 포함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내세운다. 이런 주장을 보고 있자면 양질의 노동력 공급이 생산성 향상을 낳아 양질의 일자리가 자연스레 늘어난다고 가정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한국 대학 교육의 질이 좋은 편은 아니라 하더라도 대학 진학률이 85퍼센트나 돼 세계 최고 수준이고, 많은 대학생들이 기업이 요구하는 ‘스펙’을 맞추느라 외국어 능력과 인턴 경험 등을 위해 졸업까지 미루는데도 청년 실업률이 굉장히 높은 한국 현실은 기업의 노동력 수요가 없다면 양질의 노동력 공급도 소용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게다가 산학협동이 강화된 1990년대 이후 오히려 이공계 기피 현상이 일어났다는 점도 ‘지식기반경제 시대에 고숙련·고기술 노동자들이 우대받을 것’이라는 주장을 의심하게 만든다.
46 중소기업 일자리의 질을 높이고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늘리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의 상당수는 “중소기업을 혁신적으로 키워 10퍼센트와 90퍼센트 일자리 사이의 임금격차 등 일자리 간의 질적 차이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복지 확대를 통해 의료·양로·보육 등의 사회서비스 부문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47 “지식기반경제에서 정보기술은 비숙련노동에 대한 수요를 감소시키고 고숙련노동에 대한 수요를 증대시키는 숙련편향적 기술진보”를 낳는다고 주장하는 48 것을 보면, 이들의 계획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혁신에 실패한 중소기업에서 줄어든 일자리를 만회할 만큼 혁신에 성공한 중소기업 부문에서 대규모로 양질의 일자리 확충이 일어나야만 일자리 부족이나 양극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적 일자리 창출이 양질의 일자리 부족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길이겠지만, 선진국에 비해 낮은 고용률과 2~3배 높은 자영업 부문을 고려하면 사회적 일자리를 북유럽 수준으로 높여도 양질의 일자리는 여전히 부족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이 “많은 중소기업들이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합니다. 저임금을 경쟁우위로 삼는 중소기업들은 과감하게 중국, 동남아 혹은 북한으로의 이전을 국가가 유도해야 합니다” 하고 말하거나 그러나 혁신에 성공한 중소기업들이 양질의 일자리를 충분히 늘릴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어려운데,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생산성이 높아진 대기업들이 고용은 줄이면서 비정규직 고용을 늘리려 한 것을 보면 혁신적인 중소기업들도 이와 비슷하게 대응할 공산이 크다. 지식기반경제에 잘 대응하고 있다는 스웨덴이나 핀란드도 일자리 양극화 문제는 있다. 2000년 기준으로 ‘원래소득’의 지니계수를 보면 스웨덴 0.447, 핀란드 0.430으로 미국(0.469)과 비슷하고 한국(0.374)보다 높았다.양질의 일자리가 충분히 늘어나지 않아 일자리가 부족하거나 일자리 사이의 양극화가 지속된다면 유연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은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없고 실업자들에게 저임금 일자리를 강요하는 구실을 할 공산이 크다. 특히 실업률이 높아지는 경제 위기 시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는 단지 괜한 걱정이 아니다. 노동시장의 유연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덴마크와 스웨덴의 현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1970년대 말~1980년대 초 전 세계적 경제 위기의 타격으로 덴마크의 공식 실업률은 10.3퍼센트(1983년), 조기퇴직수당 수급자를 포함한 실질 실업률은 20퍼센트(1984년)에 이르렀다. 경제 위기 속에 집권한 보수당 정부는 실업수당과 조기은퇴수당을 삭감했다. 1990년대 초 경제 위기로 실업이 다시 급증하자, 1993년 다시 집권한 사민당은 개인소득세를 낮추고 유류와 담배 등의 간접세를 높여 평범한 사람들의 부담을 늘리는 한편,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구직, 직업훈련 등)에 참여할 것을 의무화했다. 실업자가 소개받은 일자리나 직업훈련을 거부하면 실업수당 지급을 중단한 것이다.
최근 경제 위기가 다시 시작되자 유연안정성은 다시 후퇴하기 시작했다. 유연성은 강화되고 안정성은 약해진 것이다. 1970년대에 거의 무제한에 가까웠던 덴마크의 실업수당 수급 기간은 꾸준히 단축돼 현재 4년으로 줄었는데, 이를 다시 2년으로 줄이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2006년에는 실업수당 상한선이 매달 2천 유로로 정해졌다.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자격 조건은 까다로워지고 의무 사항은 늘어났다. 주당 최소 4명의 고용주와 인터뷰해야 하고, 직업훈련을 받아야 하며, 취업설계사와 면담을 해야 하고, 거주지와 직종을 바꾸는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 정책[유연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통해 이루려던 초기의 취지는 사람들이 업무 중단이나 실업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노동능력을 재향상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더라도, 실질적으로 이 정책은 실업자들이 까다롭게 굴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빨리 재취업하도록 하려는 술수인 것으로 판명됐다.” 스웨덴도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1990년대 초반 경제 위기를 맞아 집권한 우파 정부는 개인소득세와 법인세의 세율을 대폭 낮춘 반면에 간접세인 부가가치세를 25퍼센트 수준으로 대폭 올렸다. 질병수당의 급여 수준을 임금의 80퍼센트에서 70퍼센트로 인하하고, 실업보험도 보장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하고 급여 수준을 임금의 90퍼센트에서 80퍼센트로 낮췄다. 다시 집권한 사민당 정부는 이런 후퇴를 수용했을 뿐 아니라 2004년에는 상속세·증여세·부유세까지 폐지했다.
53 너무 안이하다.
이 나라들의 복지 체계가 여전히 다른 나라들보다 관대하다고 해서 “복지국가의 조정은 있었을지라도 효율성을 높이려는 차원에서의 개혁일 뿐이지 복지국가의 후퇴나 폐기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하고 평가하는 것은덴마크·스웨덴 등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1970년대 실업수당을 거의 무제한으로 후하게 지급할 수 있었던 것은 호황 덕분이었다. 경제 호황으로 실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후한 복지를 약속하고 또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닥쳐 실업률이 급증하자 수당을 삭감하고 수당 지급에 다양한 조건을 달아 까다롭게 만들고, 또 간접세 확대로 노동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2000년대 들어 경기가 잠시 회복되면서 실업률이 매우 낮아지면서 유연안정성 모델이 효과를 내는 듯했지만, 다시 경기가 하강하고 실업률이 높아지기 시작하자 복지는 후퇴하고 있다. 이는 개혁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대안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생산성 향상과 경제성장이라는 자본주의 논리에 굴복하게 됐기 때문이다.
54 물론 이런 주장이 대기업의 무책임성에 비판적인 함의를 담고 있기도 하지만, 실천적 결론은 대기업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모든 나라에서 중소기업의 고용이 대기업의 고용보다 많으나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선진국과 비교하여 그 정도가 특히 심한 편”이라고 하지만 55 우리 나라 산업 전체에서 대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고, 대기업이 꽤 많은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일자리 책임에서 대기업을 너무 손쉽게 면제해 주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대기업의 경제성장 기여를 중시하는 관점과 관련 있다.
유연안정성과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강조하는 한국의 개혁주의적 진보진영도 기업의 생산성 향상이나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대기업은 고용 없는 성장을 이어가고 있으므로, 일자리와 관련하여 수출 중심의 대기업에서 해법을 찾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그리고 한국의 개혁주의적 진보진영이 중소기업 일자리 질 향상의 전제로 중소기업의 생산성 향상을 내세운다는 점도 이들이 자본주의의 이윤 논리에 굴복할 위험이 크다는 점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런 관점을 유지한다면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후퇴했듯이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시기에 복지 확대 문제에서 일관되게 투쟁하지 못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우리가 보기에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사회안전망을 근거로 노동자들에게 해고와 같은 유연성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복지 확대를 위한 동력조차 떨어뜨릴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사실, 유연안정성은 현금을 내놓고 어음을 받으라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경제 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그 어음은 부도날 공산이 매우 커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진보진영이 유연성을 강조하게 되면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자신감을 오히려 약화시켜 복지 확대·유지와 같은 정치적 쟁점에서도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이 점에서 지난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 노회찬 대표가 ‘민들레 연대’를 주창하면서 “일자리의 유지, 일자리 질의 향상, 일자리 확대”를 최우선 요구로 내세우며, “임금이나 노동조건, 일자리 문제는 제쳐 놓고 실업수당이나 연금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는 다수 시민의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옳았다. 비록 이를 일관되게 실천하느냐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지만 말이다.
맺으며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대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필자가 주장하고자 한 바는 이렇다. 우선, 자본주의 사회에서 복지국가를 위협하는 경제 위기와 정체는 극복되지 않았다. 위기는 금융자본이나 재벌 같은 특정 자본의 잘못된 행태 때문이 아니며 자본이 중심이 돼 투자하고 고용하는 자본주의 생산방식 자체의 한계다. 마찬가지로, 지식기반경제의 발전으로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주장도 현실적 근거가 희박하다.
따라서 진보진영이 유연안정성이나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 등을 동원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혁신과 자본주의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기업과 체제에 맞서 싸우는 투쟁 의지조차 꺾어 진보진영이 추구하는 복지국가 건설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57 이것은 한국의 노동운동이 매우 미약하다는 전제에서 비롯한 태도인 듯하다. 58 노동자들이 먼저 건강보험료를 1인당 1만 1천 원씩 더 내는 운동으로 의료 복지를 확충하자는 운동(‘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상당수 인물들이 참가하고 있는 것도 계급투쟁의 관점이 없이 타협과 제도 도입으로 복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한다고 해서 지배자들이 돈을 더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다 설사 이런 방식으로 복지가 확충되더라도 그 성과가 미미하다면 노동자들은 오히려 실망하고 사기가 꺾일 공산이 크다. 59
게다가 한국 진보진영의 엘리트주의적 관점은 나름으로 논리적인 대안 체계를 세우는 데 몰두할 뿐 그것을 현실화하는 방법과 동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60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최근 복지국가를 매개로 진보 연합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한 축으로 ‘친노무현 정치 세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타협은 자신들이 비판해 온 노무현 정부의 전철을 밟는 것으로 끝날 수 있다.
한편,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명백하게 보편주의 제도적 복지국가를 지지하고 있”다며, “‘보편주의 복지국가’는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한 합리적 성향의 범 사회주의 지향 세력이 진보적 자유주의 세력과 함께하는 정치적 모양새를 갖출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은 바로 “친노무현 정치 세력”을 가리킨다.61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자본주의에서 개혁을 따내려는 운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최근과 같이 경제 위기가 심각한 시기에는 복지 확충과 같은 개혁을 잘 따내기 위해서라도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전망을 가지고 투쟁에 나설 필요가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혁을 위한 투쟁을 위해서라도 혁명적 전망과 방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비판은 “정통 좌파의 시각에서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주장한 복지국가 노선은 개량주의에 불과”하다고주
- 신정완 2009를 참고하시오. ↩
- 경제개혁연대의 견해는 아니지만, 재벌 개혁을 강조하는 견해를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으로는 곽정수·김상조·유종일·홍종학 2007이 있다. ↩
- 김형기 2006. ↩
- 김문주·김병권·박세길·손석춘·정명수·정희용 2006;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2008. ↩
-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 2007. ↩
- 신정완 2006. ↩
- 양재진 2008. ↩
- 신동명 200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
- 예를 들어, 오랫동안 활동이 정지됐던 대안연대회의는 지난 8월 26일 공식 해체했다. 그런데 대안연대회의의 주요 인사인 장하준과 정승일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에서 활동하고 있다. ↩
- 정성진 2006; 김창근 2006; 강동훈 2010을 참고하시오. ↩
- 송원근 2006, p43. ↩
- 정건화 2006, p420. ↩
- “재벌 위주의 성장이란 것은 재벌 기업들이 중소기업들을 희생시켜 가면서 특혜를 누리고, 이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식의 성장은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곽정수·김상조·유종일·홍종학 2007, p76. ↩
- 강동훈 2010. ↩
- 신정완 2009, p115.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2부 8장 ‘복지국가 혁명에 기여하는 새로운 재벌 개혁’을 참고하시오. ↩
- 나머지 견해들은 이 둘 사이의 어디쯤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
- 유시민 2007. ↩
- 양재진 2008, p121. 사회투자국가론자들이 유시민과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닌데, 이들은 어쨌든 보편적 복지를 목표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39. ↩
- 양재진 2008, p410.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4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45. ↩
- 양재진 2008, p75. ↩
- 캘리니코스 2008, pp25-26. ↩
- 양재진 2008, pp106-107.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34. ↩
- “시장 개방을 반대하고 노동시장 유연화를 반대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회복지 제도의 확립이 살 길이라고 봅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5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331.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p58-59. ↩
-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의 대안인 ‘노동 주도형 경제’도 지식기반경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들은 자본이 풍부해진 요즘에는 지식노동이 자본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생산체계가 이미 만들어졌다는 주장인 셈이다. 김문주·김병권·박세길·손석춘·정명수·정희용 2006을 참고하시오. 새사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검토는 강동훈 2009를 참고하시오.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p59-60. ↩
- 김상조·유종일·홍종학·곽정수 2007. ↩
- 탭 2001, p36. ↩
- 이에 대해서는 캘리니코스 2008, 1장을 참고하시오. “한 저명한 생산성 전문가는 컴퓨터가 에어컨이 그랬던 것만큼 경제성장에 중요성을 갖는지는 분명치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탭 2001, p37. ↩
- 앨컬리 2004, p16. ↩
- 던 2009, p36. ↩
- “1998년 10월과 2000년 3월 사이에 일어났던 폭발적인 상승으로 인해 나스닥 종합지수는 1년 반 만에 그 이전의 3년여 동안 오른 수치보다 2배 가까이 올랐다.” 앨컬리 2004, p20. ↩
- 1929년 대공황 직전에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로 평가받던 어빙 피셔가 “주가가 항구적 고원에 도달했다”고 선언했다가 조롱거리가 된 일은 유명한데, 이번 경제 위기 때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전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이 비슷한 처지가 됐다. ↩
- 앨컬리 2004, pp29-30. ↩
- 장하준 2006. 장하준 교수는 지식기반경제론을 부정하는데, 대안연대회의 출신 인사들은 대체로 비슷한 견해인 듯하다. “대안연대 논객들의 경우엔 투자율 제고 등 투입 요소 증가라는 양적 측면도 강조해 왔다.” 신정완 2009, p118 각주 15번. 추가로 《복지국가혁명》의 금융 개혁과 재벌 개혁 부분은 정승일 박사가 주장한 부분인 듯한데, “아무리 좋은 제품을 R&D를 통해 개발해도, 그것을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하여 대규모 설비투자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그 제품이 상업적으로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즉, 설비투자 증가 없이 R&D 혹은 기술혁신만을 통해 기업과 경제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라며 ‘요소 투입’을 강조하고 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240. ↩
- 강남훈 2001. ↩
- 부모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에 의해 뚜렷이 결정되는 교육 격차를 줄이려는 좀더 급진적인 ‘결과의 평등’을 추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영국 신노동당 정부의] 교육 체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불평등의 기본 구조를 변형시키는 것과 연결되지 않을 경우, 그러한 노력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캘리니코스 2006, p148.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4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41. ↩
- 김형기 2006, p53.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329에 실린 <표2>를 참고하시오. 물론 ‘원래소득’에서 세금을 빼고 복지혜택을 더한 ‘재분배소득’의 지니계수는 스웨덴 0.252와 핀란드 0.247로 미국, 한국 등에 견줘 매우 낮았다. ↩
- 양재진 2008. ↩
- 세레니 2009.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에 실린 정세은의 논문을 참고하시오.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325.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42.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302. ↩
- 이런 염려가 괜한 것은 아니다. 진보신당은 6·2지방선거 <2차 공약 발표 : 의료, 일자리, 주택·주거분야>에서 ‘병원비 90%까지 국민건강보험 적용안’을 내놓으며 “국민들이 1만 1천 원만 내면 민간의료보험을 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오히려 국민들의 월 보험료를 대폭 줄이면서도 의료비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드는 전략”이라고 선전했다. 이것을 보면 일자리 정책에서도 노동자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후퇴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 한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강조점 변화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롭다. 2007년에 나온 《복지국가혁명》에서 노동정책 부문의 강조점은 분명 유연안정성 모델에 있었다. 그런데 2010년에 나온 《역동적 복지국가의 논리와 전략》을 보면 총론에서는 여전히 유연안정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각론 부문에서는 유연성 얘기가 거의 없다. 이것이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자체의 강조점 변화인지 각론을 맡은 사람의 견해가 반영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
- 이들은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복지 문제를 보지 않으므로 “신자유주의 ‘작은 정부’의 교리에 얽매인 현 정권과 경제 관료들이 정부 재정의 대대적 확충과 사회서비스 분야에 대한 획기적 재정 투자를 통해 이 일을 추진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 문제”라며 그 책임을 관료 탓으로 쉽게 돌리곤 한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44. ↩
- “서구처럼 복지국가가 노동자조합이나 노동자정당이 선도하기 힘들고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07, p45. ↩
- ‘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에 대한 더 자세한 비판은 <레프트21>(www.left21.com)의 관련 기사를 참조하시오.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24. ↩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2010, p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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