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53호를 내며
김영익의 ‘미국은 서반구로 후퇴하는가?’는 미·중 경쟁 심화 속에서 기존의 제국주의 질서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 그리고 트럼프 2기 정부의 새 국가안보전략(NSS)이 미국의 기존 전략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를 분석한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정부가 중국을 주로 경제적 경쟁자로만 보면서 중국과의 대결에서 후퇴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 글은 제국주의적 경쟁의 맥락 속에서 서반구를 중시하겠다는 트럼프 정부의 전략이 갖는 함의를 짚으면서 서반구·아시아에서 커지는 군사적 긴장, 그 속에서 미국과 거래하는 이재명 정부의 선택이 낳을 위험성을 경고한다.
조셉 추나라의 ‘간부화: 유기적 지식인들의 당을 건설하기’는 혁명적 당에서 ‘간부화’가 왜 핵심 과제인지를 역사와 현실을 통해 설명한다. 혁명적 당에서 간부는 혁명적 사상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계급 전쟁에서 지도력과 방향을 제공할 수 있는 당 활동가 중핵으로, 그람시가 말한 “유기적 지식인”이다. 자본주의 위기와 극우 부상 속에서 혁명적 당이 사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유기적 지식인들을 길러내는 것은 사활적으로 중요한 일이다. 저자는 볼셰비키의 경험, 레닌·트로츠키·그람시 등의 통찰을 살펴보며 오늘날 어떻게 간부화를 이룰지를 논의한다.
주디 콕스의 ‘트럼프 시대의 계급투쟁과 정체성 정치’는 트럼프 재선에 대한 좌파들의 분석과 대안을 비판적으로 살펴본다. 일부 좌파는 그동안 좌파가 지나치게 ‘깨어woke’ 있어서 노동계급 상당수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다고 평가하고, 앞으로는 차별에 맞서는 것 대신 일자리, 주거, 보건 의료 같은 경제적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주디 콕스는 이런 ‘경제주의’적 대안이 극우의 부상을 막지도 못하고 노동계급을 단결시키지도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경제적 투쟁과 차별에 맞선 투쟁을 연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AI)과 군비 경쟁’에서 앤 알렉산더는 현재 AI 개발 경쟁이 주되게 생산요소를 더 많이 투입하는 양상을 띠면서 국가 간 경쟁과 자본가 간 경쟁이 융합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데이터 센터, 고성능 반도체, 훈련 데이터, 모델 알고리듬 등 AI 개발에 필요한 각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미래의 전쟁”을 준비하는 위험천만한 추세를 경고한다. 또한 AI 기술이 인간과 독립된 모종의 지능이라는 일각의 환상을 비판하며, AI와 그 개발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세계가 전쟁 위기로 치닫는 것을 막는 데서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진희의 ‘계급관계와 분리된 재생산 분석과 유토피아주의’는 실비아 페데리치의 《임금의 가부장제 ― 젠더, 재생산 그리고 커먼즈》에 대한 비판적 서평이다. 필자는 가정을 착취의 공간으로 보는 페데리치의 주장과 그 실천(‘가사노동 임금 지급 운동’)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마르크스에 대한 여러 왜곡을 반박하며 재생산 중심의 자본주의 분석에 담긴 약점을 짚는다. 생산이 아니라 재생산을 자본 축적의 중심으로 보는 페데리치의 이론은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의 변화와 모순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전략도 제시하지 못한다고 필자는 평가한다.
2026년 1월 20일
《마르크스21》 편집팀
[독자에게 알림]
아쉽게도, 《마르크스21》을 잠정 휴간한다. 그동안 번역 기사들 위주로 《마르크스21》을 발간해 왔지만, 한국의 독자들이 부딪히는 쟁점들을 탐구하고 분석한 글들을 내는 데 어려움을 겪어 온 것이 사실이다. 편집진이나 투고하는 필자들의 역량을 키워 조만간 복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