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
1장 정치, 경제, 역사 *
1. 마르크스와 사회주의자들
마르크스의 핵심 관심사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이 사실은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얘기가 아닐 테지만, 그래도 마르크스가 스스로 말했듯이 자기 생애의 가장 중요한 날들을 자본주의의 경제적 작동을 연구해 집필하는 일에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마르크스는 경제 저작을 쓰는 동안에 대체로 아무 정치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정치 활동에 적극 참여할 때는 경제학 연구가 방해를 받는다며 불평했다.
마르크스의 경제 연구에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 위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의 경제 연구는 19세기 후반부 노동자 운동과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정치적으로 선진적인 노동자들 사이에서 득세하던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경제학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는 1848년에 유럽을 휩쓴 혁명적 격변기에 노동계급이 다른 사회 집단보다 비교적 작았기 때문에 권력을 잡지 못했다고 봤다. 노동계급은 아직 작았기 때문에, 독자적인 정치적 관점을 명료하게 발전시킬 수 없었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1848년 이후 노동자 운동에서 지도자로 등장한 사람들의 사상은 혼란스러웠다. 방치하면, 노동계급의 규모가 커졌을 때 그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터였다.
1 이런 활동의 결과물 하나가 《자본론》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런 사상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하고는 체계적으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특히 프루동과 그 지지자들에 주목했는데,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또는 보통은 그저 사회주의자)라고 부른 그들의 견해가 영향력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에는 프루동주의(또는 부르주아 사회주의) 말고도 더 있었다. 마르크스는 그것들을 크게 두 종류로 나눠 봤다.
봉건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출현하면서 밀려난 옛 지배계급인 귀족층을 대변했다. 마르크스는 봉건적 사회주의자들의 자본주의 반대는 다음과 같았다고 묘사한다.
사람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 (귀족들은) 겉으로는 자신들의 이익을 내려놓는 척하며 오직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하는 양 부르주아지를 비난하는 고발장을 써야 했다. 이처럼 귀족들은 새로운 주인을 풍자하는 노래를 부르고, 그 주인의 귀에다 재앙이 다가온다는 불길한 예언을 속삭임으로써 복수를 했다. 2
다른 한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기를 소망하며, 필연적으로 실패할 운명인 자그마한 실험들을 하고 본보기의 힘을 보여서 새 사회의 복음이 퍼져 나갈 길을 닦으려 무진 애쓴다. … 그들은 여전히 ‘홈 콜로니’[로버트 오언이 구상한 공산주의의 표본 사회 ― 옮긴이] 등 새 예루살렘[이상향 ― 옮긴이]의 축소판을 세우기를 꿈꾸고, 이 모든 공중누각을 세우려면 자본가들의 온정과 지갑에 호소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여긴다. 3
마르크스는 이 두 세력을 노동계급의 정치적 발전을 방해할 만만찮은 걸림돌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봉건적 사회주의는 지나간 역사적 시기를 낭만적으로 그렸다. 봉건적 사회주의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옛 지배계급 성원들에게나 호소력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들이 노동운동 내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보잘것없다고 혹평했다.
봉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착취 양식이 부르주아지의 착취 양식과는 달랐다고 지적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전혀 다른 상황과 조건 아래서 착취했다는 사실은 잊는다. … 그러나 사람들은 귀족들의 뒤를 따라나서자마자 그들의 엉덩이에 새겨진 낡은 봉건 문장紋章을 보고는 불손하게 박장대소하며 떠나가기 일쑤였다. 4
공상적 사회주의도 더는 위험하지 않았다. 공상적 사회주의는 봉건주의자들처럼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시계를 되돌리려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지 못하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마르크스가 위 글을 쓸 당시에, 공상적 사회주의는 고작 사람들이 더 좋은 세계에 살면서 서로 우호적으로 대하면 좋겠다는 신념으로 퇴보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지지자들은 완벽한 세계의 청사진을 그리는 데 모든 시간을 썼고, 모델이 될 공동체를 세워 그 청사진을 실현하려 애썼다. 그들은 그런 공동체가 본보기가 돼서 다른 사람들도 동참할 마음이 생기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완벽한 세계에 대한 계획이 더 정교해질수록 그 계획자들이 실제 세계와 현실성 있게 관계 맺기는 더 어려워졌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노동자)와 부르주아(자본가) 사이의 계급투쟁이 성장하는 것을 한 마을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업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정신을 어지럽게 하는 일로, 심지어는 그 과업을 방해하는 일로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대 계급투쟁이 발전하는 그 만큼, … 그 대결과 동떨어져 있는 이 환상 속의 입장은 … 실천적 가치와 이론적 정당성을 모두 잃는다. 이처럼, 이 사상 체계의 창시자들은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을지라도, 그 제자들은 모든 일에서 보잘것없는 반동적 종파를 이루게 됐다. … 따라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측이 벌이는 모든 정치 행동을 격렬하게 반대한다. 그들이 보기에 그런 행동은 새로운 복음을 덮어놓고 불신한 결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5
이와 달리,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그저 현실 사회에 반대해 봉건제의 부활이나 노동자 협동조합 설립에 기반한 이상적 대안 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사상과 실천은 비록 뒤죽박죽돼 있을지라도 현실 세계와 접점이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 지지자들은 계급투쟁에서 능동적 구실을 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은 프루동주의 사상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엄청난 역경 속에서도 연구하고 정치 활동을 한 프루동을 개인적으로 크게 존경했다. 프루동이나 그의 지지자들이나 일부러 프롤레타리아트를 그릇된 길로 이끌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변혁할 실현 가능한 전략을 세우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제안들이 잘못됐고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예를 들어, 프루동주의자들은 화폐에 많은 사회악의 책임이 있다며 화폐 폐지 계획을 내놨는데, 마르크스는 이를 길게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작동에 대한 분석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구체적 쟁점에 대한 비판 이면에는 더 근본적인 이견이 있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현존 체제를 부분적으로 개선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봤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였다. 마르크스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르크스는 자기 생애 후반부의 대부분을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데 바쳤다. 이런 과학적 분석이 부르주아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자유와 평등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조건을 규명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프루동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정치적 오류는 분석 방법의 약점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보지 않았다. 프루동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인간 사회 발전의 특정 국면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회들과는 다른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을 명료하게 구별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석에서 두 가지 중대한 오류를 범했다. 첫째, 자본주의와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체제, 즉 판매를 위한 생산(또는 상품 생산, 마르크스의 말로는 단순상품생산) 체제를 혼동한 것이다. 단순상품생산은 모든 사람이 각자 독립적으로 자기 책임 하에 일하며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조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런 사회는 역사에 존재한 적이 없다. 판매를 위해 상품을 생산하는 독립적 수공업자의 발전은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데서 한몫했다. 그러나 구매와 판매 행위가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생겨난 것은 단순상품생산이 아니라 자본주의였다. 마르크스가 집필하던 때에, 자영 수공업자(또는 장인)는 자본이 성장하며 빠르게 밀려났다.
프루동주의자들은 상품 생산이 초기 장인 국면에서 완전히 성숙한 자본주의 국면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겪은 변화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판매를 위한 생산의 시기는 통틀어도 인간 역사의 단지 한 국면일 뿐이라는 점도 이해하지 못했다. 즉, 그전에 다른 경제 체제가 존재했고, 이후에 상품 생산에 기반하지 않는 다른 체제가 출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하여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특정 사회에 고유한 제도와 활동을 영속적인 것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그들은 상품 생산에 기반한 사회의 특징인 구매와 판매 활동을 마치 중력의 힘처럼 필연적이고 불변적인 활동으로 봤다.
프루동주의자들의 정치는 비역사적 분석의 논리적 결론이었다. 자본주의와는 달리 사람들의 관계가 불평등하거나 강압적일 필요가 없는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를 혼동했기 때문에, 프루동주의자들은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개선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여겼다. 상품 생산에 나타나는 고유한 특징과 모든 사회 체제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특징을 혼동했기 때문에, 그들의 강령은 판매를 위한 생산에 기반한 사회를 개혁하는 것으로 제한됐다. 즉, 프루동주의자들은 다른 경제 체제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프루동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반드시 착취적일 필요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를 사실상 옹호했다. 생산 조직 방식으로서 자본주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근본에서 보면 부르주아의 관점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옹호자들은 대부분 부도덕한 개인들의 과도함 탓에 불화와 고통이 생긴다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과도함을 줄여 전반적인 효율성을 향상시키자는 계획을 받아들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핵심을 잘 설명한다.
부르주아지는 당연하게도 자신이 최고의 지위에 있는 세계를 최상의 세계라고 생각하며,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이 안락한 구상을 상당히 완벽한 여러 사상 체계들로 발전시킨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에게 그런 체계를 실행에 옮기고 그럼으로써 뉴 예루살렘 사회로 곧장 나아가라고 요구하지만, 사실은 현존 사회의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 부르주아지에 대한 증오를 모두 던져 버리라고 요구한다. 6
7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한두 가지 중요한 개혁으로 자본주의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변혁할 수 있다는 고전적인 프루동주의 관점을 옹호하는 노동자는 오늘날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보다는 덜 확고하지만 비슷하게 말할 것이다. 즉, 자본주의 틀 안에서도 노동계급이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성과를 이룰 수 있고, 그리하여 점진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에 내재돼 있는 정치적 접근법이 없어졌다면, 부르주아 사회주의도 봉건주의와 공상주의처럼 순전히 역사적인 관심 거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이런 일반적 접근법을 개혁주의라고 한다. 가장 영향력이 큰 현대적 개혁주의 형태는 사회민주주의다.
2. 역사 유물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정치적 약점은 자본주의를 역사적으로 보지 못했다는 데서 비롯했다. 반면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은 자본주의 사회를 인류 역사의 한 국면으로 자리매김한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이론과 경제학은 상호 의존적이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어느 것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보통 역사유물론이라고 알려져 있다. 역사유물론은 한 사회를 역사의 맥락 속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역사적이다. 즉, 이전 단계를 거쳐 다음 단계로 계속될 사회 발전 과정의 한 국면으로 사회를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유물론은 유물론적인데, 인간 생존의 물질적 전제 조건, 즉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호작용을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간의 활동과 괜찮은 자연 환경 둘 다 이런 상호작용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의 수고 비용에 강조점을 둔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정신적·육체적 에너지의 사용이 자연을 변화시켜 쓸모있는 물건을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진정한 비용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 과정을 생산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삶과 거의 구별되지 않고 생산이 단순 수렵과 채집으로 이뤄지던 초기 역사부터 현재까지 생산의 발전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마르크스는 자연을 변화시키는 인간의 능력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라고 봤다. 부르주아 사회과학이 인간의 특징으로 가장 강조하는 언어와 개념적 사고는 생산 활동의 결과물이고, 사회적 편제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인류의 진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지표는 생산의 발전이다. 마르크스는 한 사회가 자연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전시킨 정도를 생산력 발전 수준이라고 불렀다.
생산력의 발전은 복잡하고 지속적인 과정이었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에서 정말로 중요한 변화는 두 번 있었다. 첫째, 흔히 신석기 혁명으로 알려진 농업의 발전이었다. 즉, 수천 년 동안 수렵과 채집을 하며 근근이 먹고 살던 인간 무리들이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장기간에 걸쳐 자연 과정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 씨앗을 심고, 작물을 수확하고, 동물을 기르기 시작했다.
두 번째 중요한 발전은 흔히 산업혁명이라고 알려졌는데, 기계를 체계적으로 사용하는 생산이 발전했다.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생산 조직 방식도 바뀌어 왔다. 즉, 자연을 변화시키는 데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 관계도 변화해 왔다. 예를 들어 자체 소비를 위해 자기 땅에 작물을 기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자본주의 하에서 존재하는 관계와 매우 다르다. 자본주의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임금을 주는 자본가를 위해 일하고, 다른 자본가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생산한 상품과 자기 임금을 교환한다. 마르크스는 사람들의 상호 관계들을 사회적 관계들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적 방법 — 역사의 발전을 인간과 인간 생존에 필수적인 자연 사이의 상호작용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보는 방법 — 을 사용해 역사유물론이라는 현실적인 이론을 발전시켰다. 여기에는 두 가지 핵심 명제가 있다.
첫째,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이 다른 모든 사회적 제도와 절차들의 대략적 성격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태적인 원리다. 이 원리는 역사 변화의 과정이 아니라 특정 사회의 내부 관계들에 적용된다. 이 원리에 따르면, 특정 사회의 특징을 이루는 법적·정치적 체계나 세계관을 올바로 분석하려면 경제 체제 연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경제 체제가 사회의 다른 양상들을 규정하는 주된 요인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토대와 상부구조라는 은유를 사용해 이 원리를 설명한 바 있다. 즉, 한 사회의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이루는 비경제적 제도와 절차들의 성격을 대체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건물의 초석과 그 위에 세워진 구조물의 관계를 떠올려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은유일 뿐임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만약 이 은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상부구조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모두 경제적 토대, 즉 지배적인 생산양식에서 벌어진 변화로 연역하거나 환원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될 것이(고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렇게 추론했)다. 이런 종류의 환원론은 상부구조에 해당하는 요소들의 중요성을 축소하고, 상부구조가 경제적 토대에 반작용할 수 있다는 점을 부정한다.
마르크스는 경제 과정의 변화와 이른바 법적·정치적 체계의 변화가 단순히 일 대 일로 상응하는 관계라고 주장한 적이 없다. 사실 그는 자기 이론을 이처럼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을 격하게 반대했다. 자신의 학술적 명성을 지키려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해석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게 될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역사유물론의 다른 핵심 명제는 정태적이지 않고 역동적인 원리로, 변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이 원리에 따르면, 중대한 사회 변화는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더한층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시점에 이르러 일어난다. 시간이 흐르면, 생산을 조직하던 특정 방식은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효과적이지 않게 되고, 그러면 발전을 더한층 고무할 다른 경제 체제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마르크스가 사회혁명이라고 부른 중대한 사회 변화의 시기가 찾아온다.
이 개념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혁명이라는 말과 다르다. 즉, 폭력적인 권력 장악이라기보다는 심대한 사회 변화를 의미한다. 사회혁명이 권력 장악을 수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변화할 때 그런 권력 장악이 수반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혁명을 폭력적 권력 장악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이미 군사독재 하에 있는 나라에서 새로운 군 파벌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는 사회혁명이 아니다. 반면 서유럽 사회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바뀐 역사적 과정, 즉 봉건 귀족들의 지배가 부르주아지의 지배로 대체된 과정 ― 많은 나라들에서 수세기에 걸쳐 일어났고, 상당한 폭력이 있었지만 보통의 군사 쿠데타보다는 흔히 덜했던 과정 ― 은 사회혁명이었다. 그것은 기존의 사회관계들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변화시켰다.
둘째 명제는 중대한 사회 변화가 생산양식에서 벌어지는 변화를 포함한다는 역사유물론의 첫째이자 정태적인 명제에서 도출되는 것이 분명한데, 그런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추가한다. 둘째 명제는 모든 생산양식이 두 가지 국면, 즉 생산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촉진하는 구실을 하는 초기 국면과 생산관계가 인간의 자연 변화 능력이 더한층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후기 국면을 거친다는 것을 함축한다.
농노를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작은 땅을 나눠 주는 토지 개혁을 상상해 보라. 이것은 십중팔구 생산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기 노동시간의 절반을 봉건 영주에게 바쳤던 것과 달리 이제는 모든 시간을 자신이 소유한 땅에서 자신을 위해 쓸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더 효율적인 영농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더 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관개 사업처럼 대규모 사업을 통해 농업 생산을 증대시킬 수 있는 중요한 개발이 이뤄지면, 그때는 잘게 쪼개진 땅을 중심으로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은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쟁애물이 될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 수준은 인류 발전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자 지표이기 때문에, 어떤 생산양식이든 초기에는 역사적으로 진보적이고, 후기에는 퇴보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역사 변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지나치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역사 변화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관찰만 하는 구경거리가 아니다. 변화는 인간의 활동으로 일어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지만, 자신이 선택한 조건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서 만든다. 그런 조건을 설명할 수 있고, 그 조건에 따라 사람들이 의식적이고 효과적인 방식으로 역사 과정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유물론의 가치다.
마르크스는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때는 인간 역사를 세 단계로 넓게 구분했다. 첫 단계에서 생산은 주로 농업 생산이었고, 농촌 생활이 지배적이었다. 인류는 아직 자연과의 ‘탯줄’을 끊지 않았다. 이 단계는 원시적 농경 사회, 봉건제, 노예제를 아울렀다. 사회관계들은 대체로 개인적으로 종속된 관계였는데, 노예와 농노들은 평생 특정 주인에게 속박돼 있었다. 농노는 “땅 자체에 속한 재산, 즉 땅의 부속물로” 보이고 노예는 “살아 있는 노동 기계에 불과한 노동자”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이 단계는 생산력이 처음으로 크게 발전한 신석기 혁명과 함께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이 단계를 종종 자연 경제의 시대라고 부른다.
둘째 단계에서 생산은 판매를 위한 상품 생산이다. 처음에는 장인 생산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이후에 자본주의가 발전했다. 사람들은 더는 자신의 필요를 직접 충족하기 위해, 말하자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해 소비하는 방식으로 생산하지 않고, 판매를 위해 특화된 단일 품목을 생산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를 대부분 다른 사람들에게서 구입해 충족한다. 이와 같은 전문화된 거래의 발전을 보통 노동 분업의 증가라고 부른다. 이 단계는 상품 생산의 시대다.
첫째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바뀌면서 자연 경제의 특징이었던 개인적으로 종속된 사회관계들이 파괴됐다. 예를 들어, 농노나 노예들은 평생 한 주인의 소유물이었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고용주를 바꿀 수 있다. 상품 생산 체제에서 사람들의 생존은 상품을 사고 파는 능력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 둘째 단계에서는 시장에 비인격적으로 종속되기가 개인적인 종속을 대체한다. 비록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고용주를 바꿀 자유가 있지만, 자신을 고용할 자본가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
첫째 단계에서 둘째 단계로 바뀌면서 자연과의 탯줄도 끊어졌다. 비농업 부문이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지배적이었던 농촌 생활도 바뀌어 도시가 급성장했다. 유럽에서 둘째 단계는 생산력의 두 번째 거대한 발전이었던 산업혁명과 함께 굳게 자리를 잡았다.
마르크스가 예상한 마지막 단계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다. 이행기가 지나고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확립되면, 시장의 독재는 사라지고 생산자들이 생산 등 삶의 모든 측면을 직접적이고 집단적으로 통제하게 될 것이다. 경찰과 군대 같은 강압적 국가기구들은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결국 사람들은 “각자 능력에 따라 기여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원리에 근거해 자연을 변화시켜 욕구를 충족시킬 것이다.
3. 마르크스 경제학과 개혁주의: 개요
마르크스 연구의 근저에 있는 정치적 목적과 역사 이론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분석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치적 우선순위에 따라 프루동주의를 낱낱이 비판하고, 사회주의를 성취할 현실적 전략을 세우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이런 목적은 자본주의를 역사적 과정의 한 국면으로 분석해야만 이룰 수 있다. 이 책의 구성도 비슷한 고려에 따라 이뤄졌다.
1부[상품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 부르주아 사회주의 비판]는 역사유물론의 첫째 명제를 중심으로 구성했다.[1부는 세 개의 장 — 단순상품생산, 착취와 잉여가치, 상품과 함께 살아가기 — 으로 이뤄져 있다. — 옮긴이] 여기서는 상품 생산의 원리적 특징을 살피고 그 특징들이 사회의 비경제적 측면들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검토한다.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 시대 개혁주의의 가장 두드러진 유형이었던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그 뒤로도 계속 노동운동에 영향을 미친 사상의 잔재들을 비판하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1부의 첫째 목적은 상품 생산의 고유한 특징과 모든 생산양식에 공통된 특징을 구별하는 것, 즉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필수적 측면과 인류 역사의 두 번째 거대한 단계 특유의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혁주의자들은 상품 생산이 지니는 역사적으로 고유한 특징을 삶의 자연적이고 영원한 실상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목적은 단순상품생산의 고유한 특징,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징, 둘 모두의 공통된 특징을 구별하는 것이다. 프루동주의자들이 논리적으로나 가능한 이 두 가지 상품 생산 유형을 혼동했기 때문에, 이 구별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셋째 과제는 자본주의에 존재하는 사회관계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만약 사람들이 생산에서 맺는 관계가 본질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하면 프루동주의자들의 견해가 완전히 타당할 것이다. 현실의 불평등을 제거하는 개혁으로 체제 운용을 개선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의 사회관계들이 본질적으로 불평등하고 강압적이라면 개혁을 통해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없을 테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은 반대되는 제안을 해 그들 자신과 노동계급 모두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것이 된다.
더 실질적으로 보면, 1부에서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다뤘다. 이를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자본주의를 더 잘 굴러가게 할 방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경제학자들과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을 연구하지만), 구체적인 개혁 제안들을 엄밀하게 평가하기 위해서다. 즉, 실행했을 때 노동자들에게 이로울 계획과 노동자들의 이익에 어긋날 계획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1부는 상품 교환이 사회의 나머지 부분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즉 (앞의 은유로 예기하자면)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고찰하며 마무리된다. 정치적으로 중요한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첫째, 여러 제도와 행위들이 가진 역사적으로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개혁주의자들보다 더 급진적으로 일상 생활의 여러 양상들에 접근하는 것이 타당한 이유를 얻게 된다. 둘째, 생산양식이 사람들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보여 줌으로써, 사회 곳곳에 스며든 여러 잘못된 관념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 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마르크스는 그의 일부 경제 저작을 정치경제 비판이라고 불렀는데, 특히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혼란스럽게 이해하는 것을 폭로했다.
2부[자본주의와 생산력: 사회민주주의 비판]는 역사유물론의 둘째 명제를 중심으로 구성했다.[2부는 세 개의 장 — 초기 자본주의, 썩은 자본주의, 전쟁 이후 자본주의 — 으로 이뤄져 있다. — 옮긴이] 2부에서는 자본주의가 진보적이던 시기에서 진보적이지 않은 시기로 변화한 것을 연구한다. 2부의 정치적 주안점은 오늘날 개혁주의의 유력한 형태인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이다.
2부는 자본주의가 초기에 수행한 진보적 구실을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뒤에 자본주의의 진보적인 구실이 정치 전략에 미친 영향을 논의한다. 자본주의의 초기를 다루는 두 개의 절(節)[자본주의의 진보적 구실, 개혁과 초기 노동자 운동 — 옮긴이]은 개혁주의의 기원과 함께 개혁주의가 프루동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형태로 변모한 것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은 20세기에 자본주의와 개혁주의가 발전한 것을 다룬다. 20세기 초 수십 년간 노동자 운동이 사회민주주의(개혁주의) 진영과 혁명적 진영으로 분열한 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보성의 한계를 둘러싼 이견 때문이다. 서로 다른 분석들이 어떤 정치 전략을 함의하는지를 다룬다.
마지막 장[전쟁 이후 자본주의 — 옮긴이]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사태 전개를 분석했다. 이 장에서는 사회민주주의의 형태 변화와 영향력 증대를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화와 관련짓는다. 끝으로 현재(1970년대)의 위기가 미래의 자본주의와 개혁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다룬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와 자본주의의 내재적 한계를 분석하는 것은 노동자 운동 속에서 개혁주의가 아닌 혁명적 대안을 건설하기 위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바로 그런 분석(특히 생산자인 노동계급의 발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마르크스는 세계에 대한 도덕적 비판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혁명가로서 마르크스의 관심사는 세계를 변화시킬 방법을 규명하는 것이었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성장을 보며 당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그는 계급투쟁의 성장을 반겼다. 그는 자본주의가 노동계급을 성장시켜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다는 점을 인식했다.
생산 양식 | 생산자 계급 | 착취 계급 | 착취 계급이 소유한 생산 요소 | 생산의 목적 | 생산자가 생산을 조직하는가? |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이 존재하는가? |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한 것을 모두 가지는가? |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내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까? | 더 발전한 생산양식을 낳게 하는 경제적 요인 | 어떤 생산양식이 뒤따르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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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 노예 | 노예 소유주 | 생산자 | 사용 가치, 이따금 교환 가치 | 아니다 | 그렇다 (상품 소유주들의 입장에서) | 아니다 | 아니다 (노예는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 교환의 일반화 | 상품 생산 |
봉건제 | 농노 | 지주 | 토지 | 사용 가치 | 농노가 자기 땅에서 따로 일할 때는 그렇다 그러나 영주의 땅에서 일할 때는 아니다 | 그렇다 (상품 소유주들의 입장에서) | 아니다 | 아니다 (농노는 영주의 땅에서 노동 생산물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교환의 발전 | 상품 생산 |
단순 상품 생산 | 장인 | 없다 | 없다 | 교환 가치 | 그렇다(개별적으로) | 그렇다 | 그렇다 (개인적으로) | 그렇다 | 노동력도 상품처럼 되는 수준까지 교환의 확대 | 자본주의 |
자본 주의 | 노동자proletarians | 자본가 | 기계 | 교환 가치 | 아니다 | 그렇다 | 아니다 | 그렇다 (이윤은 자본 출자에 따른 보상인 듯 보인다) | 생산의 사회화, 위기 | 사회주의 |
사회 주의 | 노동자 workers | 없다 | 없다 | 사용 가치 | 그렇다 (집단적으로) | 교환이 존재하지 않는다 | 그렇다 (집단적으로) | 아니다 (일부는 개인보다는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 |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결핍의 폐지 | 공산주의 |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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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rrison, John 1978,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s: A Critique of Reformism, Pluto Press 중 1장 ‘Politics, Economics and History’
↩
- 마르크스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부른 적이 거의 없었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자신의 사상을 구별하며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했다. 마찬가지로 현재 우리가 사회주의로 지칭하는 사회 체제를 공산주의의 첫 번째(또는 낮은) 단계라고 불렀다. 엥겔스는 때때로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했다. ↩
- Marx and Engles 1967, 106쪽. ↩
- 같은 책, 116~117쪽. ↩
- 같은 책, 106~107쪽. ↩
- 같은 책, p117. ↩
- 같은 책, 113∼114쪽. ↩
- 1960년대 말에 공상적 사회주의가 재유행하는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이상적 공동체를 키우려고 웨일스로 향했던 것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실험은 단명했다. ↩
- 이 이론의 이름은 그것의 논쟁적 의미를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분석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은 헤겔을 겨냥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 이론에서 많은 것을 받아들였지만 헤겔이 인간과 자연의 현실적 상호작용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본에서 헤겔을 거부했다. 역사적이라는 것은 리카도를 겨냥한 것인데, 리카도의 경제 저작도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리카도는 (리카도 사상의 일부를 속류화한 형태로 받아들인 프루동주의자들처럼) 자본주의를 역사 발전의 제한적 국면으로 보지 못하는 중요한 약점이 있었다. ↩
참고 문헌
Marx K. and Engles F.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Penguin 19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