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
4장 상품과 함께 살아가기 *
역사유물론은 경제활동이 조직되는 방식이 사회적 제도와 활동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서 핵심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긴다. 상품 생산은 이러한 일반적 규칙에서 예외가 아니다.
유통의 사회관계들은 원리적으로는 모든 상품 생산 형태에서 동일하다. 비록 실제로는 자본주의 하에서만 완전히 발전했지만 말이다. 유통의 사회관계들은 시장에서는 자유롭고 평등하다. 재화와 서비스의 분배를 조직하는 이러한 방식은 사회의 거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끼쳤고, 그 특징들은 인간 역사의 거대한 두 번째 단계[산업 생산 시기 ― 역자]에 고유한 특징이 됐다.
이 장의 1절에서는 교환관계가 경제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 방식을 추적한다. 2절에서는 교환관계가 사회의 다른 측면들에 미친 영향을 다룬다. 앞에서 언급한 유명한 비유를 다시 들자면, 역사 발전의 현 단계의 토대와 상부구조를 살펴보는 것이다. 마지막 3절에서는 자본주의 하 유통의 자유와 평등이 어떻게 착취를 은폐하는지를 고찰한다.
1. 상품 물신성
상품 생산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의 경제 관계에는 물건의 교환이 수반된다. 사람들은 시장에서 뭔가를 사거나 팔기 위해 만난다. 그들은 돈을 상품으로 교환하거나 상품을 돈으로 교환한다. 상품과 돈이 사람들 사이에 끼어든다. 모든 것에는 가격이 있고 돈은 모든 경제 관계들에 관여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성이라고 부른 것의 기초이다.
상품 물신성은 파악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그 이유 하나는 오늘날 물신성이라는 단어가 원래 의미대로 쓰이는 때가 무척 드물다는 것이다. 물신의 사전적 정의는 ‘원시인들이 마법적인 힘이 깃들었다고 여겨 숭배한 무생물’이다. 물신은 대개 이른바 원시인들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물신성은 거의 성(性)하고만 관련돼 있다.
그러나 상품 물신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우리는 상품 물신성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산다. 우리는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 상품 물신성은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지배하는 방식과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한다.
상품 물신성에는 두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는 첫째 측면을 신비화라고 불렀다. 신비화는 상품 생산이 그것의 작동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끼친 영향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참여하는 경제활동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상품 물신성의 다른 측면은 지배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사회관계 사이에 끼어 있거나, 사회관계를 중개하는 무생물의 지배를 받는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의 사회적 행위가 사물의 행위라는 형태를 취하며, 생산자가 사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생산자를 지배한다.” 즉, 돈과 상품이 사람들을 지배한다. 사전에 나오는 원시인과 꼭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스스로 만든 사물과 과정의 지배를 받는다.
지배와 신비화는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만약 당신이 스스로 참여하고 있는 어떤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과정이 그에 대한 당신의 반응을 좌지우지하기 쉬울 것이다.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는 그 무엇을 통제할 수 없다. 그 무엇이 당신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지배와 신비화는 같은 뜻은 아니고 우선은 각각 따로 검토해야 한다.
사람들이 돈과 상품에 지배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건들에 반응하는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상황이라는 맥락 속에서 행동한다. 사람들이 반응하는 사건은 무생물의 가격 변동이다. 사람들은 상품(장인과 자본가라면 생산물, 노동자라면 노동력)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그것을 최대한 비싸게 판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을 지출해 필요한 재화들을 최대한 싸게 산다. 사람들은 시장을 돌며 가장 싼 빵을 사거나 더 싸다면 감자를 산다.
사람들은 소득과, 소득으로 얻는 재화를 극대화하기 위해 행동한다. 가격이 변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살지 무엇을 만들지 누구에게 고용돼 일할지를 바꾼다. 시장에 반응해 행동하는 것은 개인들이 자신의 경제적 안녕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다. 누구도 시장을 통제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모두, 어느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매일의 가격표의 지배를 받는다.
상품 생산은 개인들의 합리성에 의지하고 그것을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이는 체제가 작동하는 데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그렇게 고도로 발전한 합리성이 없으면, 가치법칙이 작동하지 못해 노동이 적절한 비율로 각 산업들에 배분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완전히 합리적으로 행동하더라도 누구도 원치 않는 결과가 생길 수도 있다. 자가용과 대중교통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보자. 오늘날 자가용은 비용적으로든 환경적으로든 명백히 비효율적이다. 요컨대, 비합리적이다. 각각 한 명씩 타고 있는 자가용 수백 대가 일으킨 교통체증 때문에 버스는 언제나 늑장 운행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자가용 운전자들이 버스를 타기로 한다면 버스 서비스를 개선할 압력이 생길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고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방법일지 모른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자가용 사용이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버스 정류장에 있는 개개인들에게는 차를 사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 한 개인이 차를 사지 않겠다는 미덕을 발휘한다고 해서 대중교통이 더 효율적으로 되지는 않을 테고, 그러면 사람들은 각자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누구도 시장을 통제하지 못한다. 시장이 모든 사람을 지배한다.
상품 생산은 비인격적인 지배를 수반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산한 무생물과 그것들이 사고 팔리는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비인격적인 지배는 인간 역사의 거대한 첫 번째 단계[농업 생산 시기 ― 역자]에는 없던 일이다. 자연 경제에서 지배는 개인적인 것이었다. 사람들은 시장의 힘이 아니라 특정 개인에게 (일생 동안 노예는 주인에게, 농노는 영주에게) 지배당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특정 자본가의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고 강요받지 않는다. 물론 노동자들의 노동 과정은 고용주의 지배를 받지만 말이다. 노동자는 직장을 바꿔서 다른 자본가에게 고용될 수 있다. 노동자는 자본의 압제를 피할 수는 없지만 어떤 특정 자본가에게 지배당하는 것은 피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상품에게 지배당하기도 하고 상품 때문에 신비화를 겪게 되기도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역설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지배가 실제 현실이라면 사람들이 그것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시장의 변동에 반응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화는 어디에 있는가?
신비화는 상품 생산의 두 가지 특징에서 도출된다. 첫째, 체제가 자연발생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다. 농노들이 어느 날 둘러앉아서 봉건제를 폐지하고 장인 생산을 도입하자고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의식적 결정은 없었다. 둘째, 상품 생산이 의식적으로 지도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상품 생산은 개인들이 각자 이해에 따라 결정한 행동에 기초해 작동한다. 경제를 계획하는 부서가 아니라 가치법칙이 최종 결정권자다.
상품 생산 체제의 특징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그 체제는 마치 태양계처럼 항상 존재해 왔고 영원히 유지될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는 끊임없이 발전하며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적 과정들을 삶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실인 것처럼 잘못 보는 것을 적절하게 묘사한 적이 있다. 그는 그렇게 삶의 영원하고 불변하는 사실이 있다고 믿는 것을 제2의 본성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신비화의 한 측면이다.
또 다른 측면은 상품 생산의 사회관계에서 비롯한 과정들이 그 관계를 중개하는 물건의 물리적 속성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에 특유한 물신성, 즉 사회적 생산 과정에서 어떤 사물에 부여된 사회적·경제적 특징을 그 사물의 물질적 본질에서 유래한 자연적 특징으로 탈바꿈시키는 물신성”에 대해 썼다. 그는 여러 사례를 들었다. 하나는 이자 낳는 자본이다. 자본주의의 작동을 신비화된 관점으로 보면, “배 나무에서 배가 열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돈이 제 속성처럼 가치와 이자를 창출한다.”
물론 자본주의를 포함해 일부 사회들에서는 돈을 빌려 주면 이자가 생긴다. 은행가들이 버는 이윤은 상상으로 만든 허구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자를 버는 능력은 돈의 물질적 속성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이 아무리 자연스러워 보이더라도 말이다. 돈 빌려 주기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생산이 조직되는 방식 때문에 돈이 이자를 낳는 것이다.
상품 물신성이 조장하는 돈에 대한 이런 태도는 일상 언어에서 나타난다. 흔히 돈이 구운 콩이나 폭탄 등을 산다고 하지 사람이 돈을 가지고 이것들을 산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돈을 놀리지 말고 이자를 벌라는 조언을 듣는다. 1파운드짜리 지폐가 말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없는데도 사람들은 돈이 말한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후기 저작에서 상품 물신성(즉, 상품과 돈과 그것들이 교환되는 시장의 비인격적인 지배와 그 속에서 경제활동이 신비화된 방식으로 보이는 것)의 효과를 종종 소외라는 말로 요약했다.
상품 물신성의 두 측면 모두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의 현상인 것을 자연적이고 영원하며 바꿀 수 없는 사물의 물리적 속성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그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것들을 바꾸겠다는 것은 태양계를 바꾸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고 쓸모없으며 놀라운 것처럼 여긴다.
마르크스는 생산을 조직하는 특정한 방식의 결과물이자 역사적 과정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을 호도하는 사상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상품 생산이 영원하다는 잘못된 믿음은 개혁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기초이다. 이는 사람들이 개혁주의적 관점을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이다.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품 생산이 신비화라는 장막 뒤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자체로 사람들이 지배에서 자유로워지지는 않는다. 자신의 삶이 시장의 비인격적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도 지배가 중단되지는 않는다. 노예가 자신이 다른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스스로 노예 상태를 그만둘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격적인 지배든 비인격적인 지배든 지배를 끝내기 위한 유일한 길은 그러한 지배를 창출하는 사회관계를 파괴하고 지배가 필요하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2. 상품 생산과 상부구조
상품 교환의 자연발생적인 기원과 무계획적인 특성 탓에 사람들은 사회적 현상을 사물의 물리적 속성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이것은 상품 생산이 낳은 이데올로기(관념의 체계)의 중요한 한 측면이다.
사회적 현상을 자연적인 일인 양 만드는 이러한 경향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성적 습관이나 이른바 지능지수 등 사람들 사이에서 관찰되는 차이를 모두 생물학의 잣대로만 설명하려는 시도의 이면에도 그런 경향이 놓여 있다.
상품 물신성과 관련한 지배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도 영향을 미친다. 상품 생산 체제가 작동하려면 사람들은 개인들로서 행동해야 한다. 사람들은 최대한 싸게 사고, 최대한 비싸게 팔고, 소득이 더 높은 곳으로 이직하며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가치법칙이 작동한다.
이것이 내는 효과 하나는 개체주의가 삶의 다른 영역들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노동 분업으로 인한 전문화가 경제활동의 한 특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여러 속성 중에서 특정한 몇몇 측면을 집중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고 여긴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양의 책을 읽는다. 어떤 사람들은 운동을 해서 신체를 발전시킨다. 어떤 사람들은 남는 시간을 모조리 다트 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며 쓴다. 각자 관심사와 취향이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사람들이 각자 역량을 발전시켜 노동 분업의 한 틈새에 자리잡도록 장려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고립되고 독립적인 단위로 살아간다. 각자 집에 조리 시설과 세탁 시설을 갖춘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교통 수단을 소유한다. 개인 사생활은 자유의 중요한 측면으로 여겨진다. 어떤 집단에 공식으로 소개되기 전에 먼저 말하는 것은 무례하다고 여겨진다.
몇몇 특정 개인들의 중요성은 흔히 과도하게 강조된다. 예를 들어, 역사책은 흔히 개인들의 능력을 더 크게 강조한다. 그 개인들을 형성하고 그 개인들이 활동하는 사회의 조건보다 말이다. 마르크스는 같은 사건을 다룬 자신의 책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과 빅토르 위고의 《작은 나폴레옹》을 비교하며 이 점을 지적했다.
그에게 그 사건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다. 그는 그 사건에서 한 개인의 폭력적 행위만을 본다. 그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개인적 주도력에 주목하며 그[루이 보나파르트 ― 역자] 개인을 볼품없지 않고 위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 반대로 나는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때문에 별 볼 일 없고 기괴한 인물이 영웅 구실을 맡을 수 있게 되는 환경과 조건이 창출됐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삶의 거의 모든 측면에 반영되는 시장 지배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의 관계가 상호 경쟁적이라는 것이다. 시장에서 누군가를 만날 때 당신이 무언가를 팔려고 한다면, 당신은 최대한 비싸게 가격을 책정하고 상대는 최대한 적게 지불하기를 원한다. 반대로 당신이 무언가를 사려고 한다면 역할은 바뀐다. 시장에서는 항상 왁자지껄한 흥정 소리가 난다.
상품 생산에서는 노동의 분업으로 인해 생산자들이 서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자기가 만든 상품만으로 살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호 의존은 치열한 경쟁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이 경쟁 자체가 상부구조에 반영된다. 교육에는 시험과 등급 매기기가 수반된다. 스포츠는 엄청나게 경쟁적이고, 참가의 목적은 흔히 잘 노는 것보다 승리하는 것이다. 그림 그리기나 꽃꽂이 같은 창조적 활동에도 상이 수여된다. 다른 사람을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주된 길이다. 이는 흔히 무한 경쟁이라고 일컬어진다.
개인적이고 경쟁적인 관계의 성격이 창출한 행동 방식은 아마도 부르주아 개인주의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될 것이다. 부르주아 개인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제도와 활동에 퍼져 있는 공통의 풍조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구성 요소는 서로 경쟁하는 고립된 개인들이다.
상품 생산 하에서 사람들은 개인이라는 기초 위에서 자신의 필요와 염원을 갖는다. 사람들이 만족감을 느끼려면 성공하거나 유명해지거나 권력이 있어야 한다. 성공의 상징은 상품을 획득하는 것이다. 광고는 당신이 이러저러한 것을 소유하면 더 활력적이게 되거나 성적으로 더 매력적이게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한 사람으로서 성취감을 느끼려면 소비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들은 물건 소유나 패션 면에서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경쟁한다.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은 사회의 비경제적 영역의 구조가 교환 영역의 구조와 어떻게 비슷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법을 보자.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 체계는 재산권과 계약권이라는 두 가지 기본 원리에 기반해 있다. 법 체계의 기초가 되는 기본 전제는 개인의 사적 소유권이다. 법의 세계는 무언가를 소유한 개인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인식 틀은 마치 사람인 양 다뤄지는 기업과 같은 법적 인격체로까지 확장된다. 기업은 법적으로 자산을 소유하는데, 사람이 옷이나 라디오를 소유하는 것과 거의 같은 방식이다. 기업은 자산을 보유하거나 판매 계약을 채결할 권리가 있는데, 사람이 자기 소유물에 대해 행사하는 권리와 거의 같다.
사람이든 기업이든 법적 인격체가 소유권을 행사하는 ‘무언가’ 중에는 전혀 무생물이 아닌 것도 있다. 저작권법이나 특허법에 근거해 누군가의 소유물이 되는 사상일 수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양육권 소송은 본질적으로는, 갈라서는 부부 중 누가 아이를 ‘소유’할 것인지를 다루는 소송이다.
따라서 법의 세계는 상품의 세계이다. 법은 시장의 원리를 정당화하고 그것이 제 기능을 하게 돕는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국왕의 대관식이 행해지는 영국의 대성당 ― 역자]에서 울워스 빌딩[뉴욕에서 오래되고 유명한 고층 빌딩 — 역자]까지 모든 것이 누군가의 소유물이고, 자유롭게 체결된 매매 계약에 따라서만 소유자가 바뀔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여겨지거나 적어도 이상적인 것이 되기 위해 애쓴다고 일컬어지는 정치 제도도 시장의 활동을 반영한다. 의회 민주주의는 상품 교환을 반영한다. 보통선거권에 기초한 선거에서 정부를 선택하거나 바꾸는 차원에서는 개인적 자유와 평등의 체제가 존재한다. 사람들은 개별적이고 고립돼서 투표한다. 유권자의 투표를 합해 정부의 구성이 결정되는데 이는 무엇을 생산하고 판매할지에 대한 개인들 결정의 총합이 사회적 노동의 배분을 결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상품 교환의 자유와 평등처럼 보통선거권의 자유와 평등도 실제로 존재한다. 상품 교환이든 선거든 집단적 결정과 행동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결정과 행동을 수반한다. 즉, 집단적인 대중 토론과 의사 결정이 아니라 비밀 투표로 정부를 뽑는다.
상품 교환에서처럼 자유, 평등, 통제는 선택하거나 교환하는 과정에서만 적용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노동 과정을 통제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실제 활동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정부가 일단 선출되면 모든 권력은 그들의 손 안에 있다. 국가 권력이 행사될 때 민주적 참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회와 법 같은 자본주의의 공공 기관만 상품 교환의 패턴에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삶에서 사적이고 개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영역도 시장 원리에 따라 조직된다.
성적 관계가 말 그대로 상품의 형태를 취하는 때가 있다. 성매매는 성적 행위를 거래하는 것이다. 포르노는 큰 사업이다. 그러나 성적 활동에서 주변적인 것들에만 상품 교환이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성적 관계는 대부분 엥겔스가 말한 개인적인 성과 사랑 형태를 취한다. 그것은 두 사람 간의 계약상의 자유로운 합의를 기초로 한다. 흔히 결혼식을 통해 법적 계약이 맺어진다. 계약이 체결된 뒤에 부부는 보통 개별적이고 고립된 단위인 핵가족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산다. 시장에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성적 상대를 고를 자유가 있다. 성 행위는 상품 교환과 마찬가지로 대개 두 사람 사이에서 이뤄진다.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정상적이라고 여겨지며 존중받는 형태의 성적 관계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들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는 근저에 깔린 경제적 관계에 조응한다. 현대의 정치 제도, 법 체계, 대중의 희망과 공포는 자본주의 생산관계 같은 역사 발전의 특정 단계가 낳은 산물이다. 이 절에서는 특정 제도나 활동의 장단점을 논하기보다는 이 점을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함의는 일상의 거의 모든 측면들이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생산뿐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모든 방식에 대한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통제와 관련 있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결혼을 “가정의 행복으로 알려진 갑갑한 고통의 상태”라고 적절히 묘사했는데, 성적 관계가 꼭 부르주아적 결혼의 형태를 취할 필요는 없다.
3. 착취는 어떻게 은폐되는가
이 장의 1절과 2절에서 논의한 상품 물신성 등 상부구조의 여러 측면들은 상품 교환의 사회관계가 낳은 효과들이다. 이는 원리적으로는 모든 상품 생산 형태에서 공통적이다. 그럼에도 상품 물신성 등 상부구조의 여러 측면들은 상품 생산과 함께 발전했기 때문에, 장인 생산 사회에서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온전한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사회관계와 단순상품생산 모델의 사회관계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에서는 착취가 벌어지는 반면 단순상품생산에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는 장인 생산에서와는 달리 사회관계가 신비화된다. 역사적으로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사물들 사이의 영원한 관계인 것처럼 여기는 물신성 외에도,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사람들 간의 관계가 꼭 불평등하고 강압적이지는 않다는 믿음이 흔하게 존재한다.
이런 신비화는 어디에서 비롯할까? 자본주의에서는 착취가 어떻게 감춰질까?
착취를 숨기는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임금 형태이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고 그것으로 상품을 구입해 생계 수단을 얻는다. 임금 형태는 부분적으로는 상품 물신성의 신비화를 노동력으로까지 확장하는 식으로 신비화를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에서 노동력은 다른 모든 상품처럼 사고팔리기 때문에 상품 생산에 대한 일반적인 혼란에서 예외가 아니다. 임금을 지불하는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돈이 이자를 낳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임금 형태가 착취를 숨기는 더 은밀한 방법이 있다. 임금은 보통 노동이 행해진 뒤에, 즉 (주급이라면) 주초가 아니라 주말에 지급된다. 보통 상품은 주인이 바뀔 때 값이 지불되는 반면 노동자들은 노동력이 노동 과정에서 사용된 이후에 임금을 받는다. 이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 있다. 이 방식이 지니는 실질적인 경제적 효과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한 주 동안 무이자 신용을 제공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사후에 지불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구입한 것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한다.
노동이 행해진 이후에 그 값이 지불되기 때문에, 임금과 교환되는 것은 노동할 능력이 아니라 이미 수행된 노동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가는 노동력이 아니라 노동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으로 생산한 가치가 임금에 반영되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은데도 말이다.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 즉 노동할 능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을 반영할 뿐이다.
임금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생기는 이유 하나는 상품으로 팔리는 서비스가 그것의 가치 즉, 투입된 노동을 반영한 가격으로 팔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단순상품생산 하에서는 창문을 닦는 사람이 한 시간 창문을 닦아 버는 돈과 재단사가 한 시간 바지를 만들어 버는 돈이 비슷한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창문을 청소하는 자본주의 기업의 이윤율은 옷을 만드는 자본주의 기업의 이윤율과 같은 경향이 있다. 가치법칙의 작동으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2장과 3장을 참고하라).
자본가들에게 자본주의 생산은 이윤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자본가에게는 생산을 하는 다른 이유가 없다. 이윤을 벌지 못한다면 노동자를 고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윤을 확실히 벌기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강제해야 한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본가에게 고용돼 스스로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면, 생산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가 임금에 담긴다는 환상은 강력하다. 개혁주의의 핵심 골자 중 하나는 자본주의에서 ‘공정한 임금’이 가능하다는 사상이다.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봉건제 하에서는 착취가 눈에 빤히 보인다. 영주들은 명백히 농노들이 영주의 땅에서 일하는 시간만큼 이득을 취한다. 농노들이 하는 두 가지 일, 즉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며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하는 일과 영주의 땅에서 일하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일은 대체로 시간·공간적으로 분리돼 있다. 두 종류의 노동은 서로 다른 날짜에, 다른 장소에서 행해진다.
노예제 하에서는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이 이렇게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노예의 노동이 모두 잉여노동이라는 착각이 생긴다. 결국 노예 소유주가 노예와 생산물을 모두 소유한다. 노예 소유주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가 계속 일하려면 살아 있어야 한다. 노예 소유주는 노예에게 생계 수단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노예가 한 노동 중 일부는 노예가 소비할 의식주를 위한 필요노동이다.
자본주의에서 잉여노동과 필요노동은 시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일하는 시간 내내 같은 공장에서 있는다. 일을 시작한 지 한나절쯤 됐을 때 누군가 호루라기를 불어 지금부터 하는 노동은 모두 잉여노동이라고 알리지 않는다. 노예와 달리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는다. 그래서 노예제와는 정반대의 착각이 생기는데, 노동자들은 자신이 생산한 가치의 전부와 비슷한 임금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임금 형태는 어떻게 잉여노동과 필요노동 사이의 구분이 감추어져 있는지 설명해 준다. 즉, 착취의 양적 측면이 어떻게 숨겨져 있는지 설명해 준다. [그러나 — 역자] 착취의 실제 과정(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잉여노동을 수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 어떻게 보이지 않게 되는지는 설명해 주지 않는다. 또, 착취가 벌어질 수 있게 해 주는 노동과정에서의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관계가 어떻게 감춰져 있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임금 형태는 사물을 신비화된 방식으로 나타낸다. 임금 형태는 사물들이 그 실재와 달리 보이게 한다. 마치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를 망원경을 통해, 그것도 왜곡된 형상으로 보여 주는 것과 같다.
자본주의에서 노동 과정 내의 사회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왜곡된 방식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번에는 마치 망원경에 특수 필터를 껴서 어떤 형상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과 같다. 인지조차 되지 않기 때문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쉽다. 흑백 텔레비전을 볼 때는 흑백의 명암이 색깔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잊기 십상이듯이 말이다. 어떻게 자본주의적 노동 과정은 감쪽같이 가려지게 됐을까?
그 과정이 교묘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 답은 상당히 간단하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만든 세계를 보는 방법)는 오직 교환의 수준과만 연관돼 있다. 즉,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인 생산이 수행되는 방식을 아예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법 체계든 도덕 관념들이든 대체로 노동 과정의 강압적 사회관계를 무시한다.
예를 들어, 법은 소비재를 소유한 것과 노동 수단을 소유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교환의 차원에서 그 둘은 완전히 동등하다. 그 둘을 사고팔 때의 사회관계들은 자유롭고 평등하다. 즉, 그 둘의 가격은 가치를 반영하는 경향이 있다. 법은 이를 성문화하고, 예를 들어 절도를 해서 교환의 원리를 위반한 사람에 대한 제재를 제도화한다. 법은 두 상품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 즉, 소비재는 개인들이 소비하는 것이고 생산수단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르주아적 원리들을 모두 위반하는 노동 과정 속에서 사용되는데,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3주 안에 상품을 만들어 납품하기로 한 자본가나 장인이든, 특정 기간 특정 자본가를 위해 일하기로 한 개별 노동자든 법적 지위는 같다. 법은 자발적인 합의에 따른 자유와 평등을 시행할 뿐이다. 근로 계약을 맺은 노동자들의 처지는 사실 자유롭지도 자본가와 평등하지도 않은데, 자유와 평등 같은 원리를 보호한다는 법은 이 사실을 무시한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교환의 원리에 기반해 상부구조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효과를 낸다. 즉, 자본주의가 다른 계급 사회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상부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덕분에 착취당하는 계급이 실질적인 성취를 이룰 수 있다. 보통선거권과 표현의 자유 등의 보장은 노동계급에게 실질적인 진보이다. 상부구조가 이렇게 유연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착취적 생산양식과 달리 자본주의에서는 유통 영역에 실질적인 자유와 평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부구조의 이러한 유연성은 여러 경향의 하나일 뿐이다. 이와 충돌하는 다른 경향들도 존재한다. 투쟁이 없었다면 부르주아지가 보통선거권 등을 보장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런 권리들을 지키려면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시기에 존재한 그런 반대 경향의 특성과 강점은 2부에서 다룬다. 그러나 자본주의 하의 상부구조가 항상 자유로운 것은 아니더라도 그것은 때때로 허용되고 어쩌면 자유로운 상부구조가 형성되는 경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독특한 계급 사회이다. 자본주의가 허용하는 성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상품 교환의 자유와 평등과 그것이 상부구조에 끼치는 영향은 맥락 속에서 봐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그런 자유와 평등은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생산 체제의 일부분이다. 시장에서의 자유와 평등은 노동 과정에서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자본가 계급에 맞선 투쟁에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시장의 자유와 평등을 일부 박탈하는 것이 종종 불가피하다.
노동계급이 승리한 여러 경험을 보면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개인들의 교환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있었다. 노동조합을 꾸리는 것은 임금 인상을 위해 노동 시장에서 독점적인 지위를 확립하려는 시도이다. 클로즈드숍[노동조합원만 고용하는 작업장 — 역자]의 권리는 개별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자유롭게 계약을 체결할 권리를 막는다. 피케팅[파업 노동자들이 대체인력의 일터 출입을 통제하는 것 — 역자]은 개인의 자유에 제약을 가하는 무기이다.
어떤 ‘자유’를 지지할지는 그로부터 누가 이득을 얻는지에 달려 있다. ‘자유’는 보편적인 덕목이 아니다. 자유를 그렇게 여기면 물신성(역사적으로 특정한 사회 제도를 자연스럽고 영원한 이상으로 여기는 것)의 덫에 빠져 드는 것이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보자. 언제나 맥락이 중요하다. 그런 권리를 맥락에서 분리해 논하는 것은 칼이 샌드위치를 만드는 친구의 손에 있는지 살인마의 손에 있는지를 구분하지 않고 그저 유용한 도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파시스트 정당이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은 노동계급에게는 중대한 후퇴이다.
이것으로 상품 생산 사회의 중요한 특징들을 검토한 1부가 끝난다. 1부에서는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관계를 추적하며 어떻게 상품과 돈이 그 관계를 매개하는지를 살펴봤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의 구조적 특징들을 밝히며 그 특징들이 여러 사회적 제도와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다뤘다.
1부에 담긴 분석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목적이 있다. 바로 부르주아 사회주의(마르크스가 살던 시절에 유력했던 형태의 개혁주의)의 기초를 설명하고 비판하는 것이었다. 장인 생산과 자본주의 사이에 겹치는 부분, 그리고 자본주의의 외관에 현혹돼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를 혼동하는 것이 프루동주의의 근원임을 밝혔다. 프루동주의에 대한 비판은 왜 자본주의에서 불평등과 강압이 필수적인지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부에서는 자본주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검토한다. 역사유물론의 둘째 명제이자 역동적인 원리, 즉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이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진보이지만 특정 시점 이후에는 생산력이 더욱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구성된다.
이 분석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목적이 있다. 개혁주의가 계속 존재하면서 변화해 온 것을 설명하고, 이와 더불어 사회민주주의(개혁주의 사상 중에서 20세기 내내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조류)를 비판하는 것이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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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rrison, John 1978,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s: A Critique of Reformism, Pluto Press 중 4장 ‘Living with Commod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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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Marx, Karl 1973, Surveys from exile, London: Pengu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