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
3장 착취와 잉여가치 *
이 장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해 살펴본다. 자본주의는 단순상품생산과 어떻게 다를까? 자본주의는 근본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관계에 기반하고 있는가 아니면 필연적으로 불평등하고 강압적일 수밖에 없는가?
마지막 질문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상품 생산에 기반한 체제의 작동을 그대로 둔 채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없애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체제가 불평등과 강압 없이도 작동할 수 있을 때에만, 오로지 그때에만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자본주의는 과연 그런 체제일까?
1. 자본주의의 사회관계
자본주의에서의 유통
유통 면에서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차이점은 자본주의 시장에는 단순상품생산 시장에는 없는 상품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노동자들의 노동 능력이다. 단순상품생산에서 장인들은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스스로 일해서 생산물을 판매한다. 그들은 노동할 능력을 매물로 내놓지 않는다. 임금노동에 기반한 자본주의에는 상품이 아니라 노동할 능력을 판매하는 노동자가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할 능력을 노동력이라고 부른다.
노동력은 노동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비유를 들어 그 차이를 설명했다. 인간의 몸에 음식을 소화시키는 능력이 평생 있을지라도 소화라는 과정은 음식이 섭취될 때에만 일어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력은 일을 할 능력이고 노동은 실제 일을 하는 과정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정의 중 하나는 유통 수준에서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의 차이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말인즉, 자본주의는 노동력도 상품으로 삼는 일반화된 상품 생산[체제]이다.
새로운 상품인 노동력의 가치와 가격은 무엇으로 결정될까?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다.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자의 생계 수단, 즉 노동 과정에서 소모된 뇌·신경·근육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자가 소비해야 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생계 수단은 생산에서 실제 인간이 지불하는 비용들인 정신적·육체적 소진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다.
생계 수단을 너무 협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생계 수단에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생리적 필요보다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우선, 생계 수단에는 미래 세대 노동자들을 기르기 위해 필요한 재화들이 포함된다. 미래 세대 양육은 일차적으로 그 부모의 책임이고, 따라서 자본주의가 한 세대 넘게 존속하려면 부모의 생계 수단이 자녀들을 부양하기에 충분해야 한다.
또, 생계 수단에는 노동자와 그 가족의 육체적 생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 이상이 포함된다. 노동자들이 그저 생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즉, 그들은 매일 아침 일터로 출근해야 한다. 만약 헨리 포드[포드 자동차 회사의 창립자 ─ 번역자]가 약간의 조사를 한 뒤 노동자들을 불러 모아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노동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 보자. “내가 계산한 것을 봐라. 당신들은 단지 이 정도의 칼로리만 섭취하고, 이만큼의 옷과 땔감, 이 정도 수준의 집이 있으면 된다. 일주일에 20파운드면 그 모든 것을 살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당신들에게 그만큼만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생계 수단에는 생리적으로는 필수적이지 않더라도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요소가 된 재화들이 포함된다. 마르크스는 이것들을 노동력의 가치에서 관습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라고 불렀다. 이 요소는 때와 장소와 문화에 따라 다양하다. 요즘에는 맥주와 담배가 빵과 감자만큼이나 중요한 생계 수단의 일부이다.
생계 수단의 구성 요소들이 확정됐다면,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간, 즉 그것들의 가치에 따라 정해진다. 이 가치는 일차적으로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 즉 인간이 얼마나 쉽게 그리고 어떤 규모로 자연을 변형시킬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모든 상품의 가격이 그렇듯이, 노동력의 가격은 화폐로 표현된 교환가치다. 노동력의 가격은 그것을 구매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의 양이다. 빵 한 덩이 가격은 제빵사가 그 돈을 받고 빵을 팔겠다고 마음먹을 만큼의 액수가 돼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격은 자본가가 사람들을 자기 공장에서 일하도록 설득할 때 임금으로 지불해야 하는 액수다.
노동력의 가치는 생계 수단의 가치라는 점을 보면서, 노동력의 교환가치가 생계 수단의 교환가치와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임금이 생계 수단들의 가격과 같고, 그래서 노동자들은 딱 생계 수단을 살 만큼만 벌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그런 면이 있다.
그러나 가격이 가치와 같아지는 경향이 있다 할지라도 항상 같지는 않다. 가치법칙이 작동하려면 가격은 가치와 달라질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노동 전체에서 얼만큼을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 데 쓸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달라져 그 상품의 공급과 수요가 어긋나게 되면 그 상품의 가격은 가치에서 벗어난다. 만약 어떤 상품에 대한 사회적 욕구가 증가하고 다른 상품에 대해서는 감소한다면, 그 상품의 가격은 가치 이상으로 오른다. 사람들이 너도나도 그 상품을 생산하면서 공급이 증가할 것이다. 이제 가격은 다시 떨어져, 제 가치에 맞춰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가격은 제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본가들이 당장에 구할 수 있는 수보다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하고자 한다면, 임금을 노동력의 가치 이상으로 올릴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자본가들이 고용하려는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면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떨어질 것이다.
1 시간이 지나면서 이 점은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중요해진다(6장을 보라).
그러나 노동력은 다른 상품들과 차이가 있다. 장인이나 자본가 같은 상품 생산자들이 직접 노동력을 생산할 수는 없다. 임금이 오르는 것을 본 재단사가 노동자가 되기로 마음먹을 수는 있지만, 의류를 만들던 사람이 노동자를 생산하겠다고 마음먹을 수는 없다. 노동자를 옷 만들듯이 생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유통 관계들은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자유롭고 평등하다. 모든 사람은 시장 앞에 평등하다. 노동자들은 시장에서 생계 수단을 사고, 자본가들은 노동력·기계·원료를 산다. 특정 사람에게 사라거나 특정 가격에 사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비경제적 강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시장에서 판매자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노동할 능력을 팔고 자본가들은 생산물을 판다. 역시 비경제적 강압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도 특정 가격에 팔라거나 특정 사람에게 팔라고 강요받는 사람은 없다. 속임수는 없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꽃이 만개한다. 나뭇잎을 갉아먹는 해충 같은 상인 자본가나 고리대금업자는 단순상품생산에서보다 자본주의에서 더 부차적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근본적인 불평등하거나 강압적인 사회관계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프루동주의가 실행 가능한 관점으로 보인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자본주의에서의 생산
유통의 영역을 벗어나면 상품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이 일어난 이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만약 누군가가 신발 한 켤레나 콩 통조림 한 캔이나 빵 한 덩이를 샀다면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다. 신발을 잘라서 조각 낸다거나, 통조림을 에펠타워 모형으로 쌓는다거나, 빵을 벽지로 사용한다 해도 누구도 이에 반대할 법적 권리가 없다. 그들이 신발, 콩 통조림, 빵의 소유자이다. 그들은 돈을 지불했고, 상품은 그들 것이고, 그들은 원하는 방식으로 소비할 수 있다.
같은 원리를 자본가들의 노동력 구매에 적용해 보자. 자본가가 노동력을 샀다면 그는 기계나 원료를 소유한 것처럼 노동력을 소유한 것이다. 그는 대체로 가치에 따라 결정된 시장 가격을 지불하고 노동력을 구입했다. 노동력은 자본가의 것이고, 자본가는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어떻게 사용할까? 대답은 명백하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작업에 투입할 것이다. 자본가가 일할 능력을 구입한 것은 그 능력을 작동시키려고, 즉 자기 공장에서 상품을 생산하는 작업에 노동자를 집어넣기 위해서다.
자본주의와 단순상품생산이 유통 수준에서는 본질적으로 유사할지라도 생산 수준에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순수한 단순상품생산 모형에서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과 관련된 사회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는 존재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단지 시장에서 서로 경제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교환이 이뤄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사회관계는 자유롭거나 평등하지 않다. 그렇기는커녕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관계다. 이제 자본가는 시장에서와 달리 노동자의 동등한 상대가 아니라 상관이 된다. 자본가는 지휘·통제하는 위치에 선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샀기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일할지 얼마나 열심히 일할지를 지시할 수 있다. 자본가가 통제한다.
마르크스는 자유롭고 평등한 유통과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생산의 극명한 차이를 재치 있게 지적한다.
노동력이 사고팔리는 유통 영역 또는 상품 교환 영역은 사실 천부인권의 낙원 자체다. 이 왕국을 지배하는 힘은 오로지 자유와 평등이다. … 자유! 왜냐하면 어떤 상품, 예컨대 노동력의 구매자와 판매자는 오직 자기들의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 앞에 평등한 자유로운 인격체로서 계약을 체결한다. 계약은 그들의 공동 의지가 공통된 법적 표현을 얻은 최종 결과물이다. 평등!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상품 소유자로서 서로 관계를 맺으며 등가물을 등가물과 교환하기 때문이다. … 단순 유통 영역 또는 상품 교환 영역을 벗어나면 … 우리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 이전의 화폐 소유자는 자본가가 돼서 앞장서서 성큼성큼 걸어가고, 노동력 보유자는 그의 노동자가 돼서 뒤를 따른다. 앞사람은 젠체하며 거만한 웃음을 짓고 사업에 골몰하고 있고, 뒷사람은 자기 가죽마저 시장에서 팔아 버려 이제는 무두질되기만을 기다리는 양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고 있다.
바로 여기에 자본주의의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본질이 있다. 그것은 ‘관계자 외 출입 금지’가 붙은 공장 문 안에서 일어난다. 그것은 생산 현장, 즉 노동 과정 자체 안에 존재한다.
2. 자본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이윤의 원천
단순상품생산에서 장인들은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을 대체로 가치에 따라 결정된 가격에 구입한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일해서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한다. 그들이 생산물을 팔아 받는 가격 역시 대체로 그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에서 생산물로 이전된 가치와 생산물 전체 가치의 차이가 그들이 일을 해서 추가한 부분이다. 이 추가된 가치에서 그들의 소득이 생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노동 대상, 노동 수단, 노동력을 산다. 이것들의 가격도 대체로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가는 노동력이 노동 수단과 대상을 가지고 일해서 상품을 생산하게 하고, 그 상품을 판매한다. 자본가가 생산물을 팔아 받는 가격도 대체로 그 가치에 따라 정해진다.
자본가는 이 과정에서 어떻게 이익을 볼까? 자본가도 장인처럼 모든 것을 가치에 따라 사고판다. 그러나 자본가는 장인과 달리 스스로 일하지 않는다. 일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판매한 사람들이 했다. 자본가는 개인적으로 가치를 추가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이 과정을 거치며 시작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게 될까? 왜 그들은 기계와 원료를 사고 노동자를 고용하는 데 쓴 돈보다 더 비싸게 생산물을 판매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본가들은 이윤을 벌까?
바로 자본가가 구매한 상품 중 하나에 특별한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상품은 노동력이다. 다른 상품에는 없고 노동력에만 있는 속성은 바로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다. 가치는 노동 강도와 기술 등을 감안해 단순화시킨 인간의 노동 시간이다. 노동력은 일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 능력이 가동될 때 노동력은 가치를 생산한다. 노동력이 만든 가치는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 속에 담긴다. 생산물의 총 가치는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에서 이전된 가치에 이것들을 사용해서 생산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추가된 가치를 합한 것이다.
장인처럼 자본가는 대체로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을 제 가치대로 구매한다. 이러한 가치는 생산물 가격의 일부분을 이룬다. 그러나 장인과 달리 자본가는 노동력도 산다. 자본가가 생산을 하려고 쓴 돈보다 생산물을 팔아 버는 돈이 많을지 아닐지는 오로지 그가 고용한 노동자가 창출한 가치가 노동력의 가치보다 많을지 아닐지에 달려 있다. 노동자들에게는 자기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이윤을 벌 수 있다. 물론 이것이 필연적이지는 않다.
결국, 해야 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아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도록 강요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윤을 벌지 못하고 망할 것이다. 자본가는 자신의 권한과 통제력을 행사해서 노동자들에게 추가적인 가치를 생산하도록 강요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노동 과정에 존재하는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사회관계 덕분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라고 강요하는 과정을 가리켜 착취라고 부른다.
마르크스는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을 불변자본이라고, 노동력(즉, 노동자 자체)을 가변자본이라고 부른다. 노동자를 기계와 마찬가지로 자본이라고 부르는 것은, 노동자가 일할 능력을 판매하는 즉시 기계처럼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이 불변자본인 이유는 그것들이 생산물에 넘겨주는 가치가 고정돼 있기 때문이다. 기계와 원료는 제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할 뿐이다. 반면 노동자들이 가변자본인 이유는 그들이 생산물에 넘겨주는 가치가 고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이전할 뿐더러 새 가치를 창출한다. 노동자들이 가치를 얼마나 만들어 낼지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노동자가 수행한 노동과 창출한 가치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생계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만들어 낸 가치는 [자본가가 - 번역자] 구매한 노동력의 가치와 같다. 나머지 노동은 잉여노동이다. 이것이 잉여가치를 만들어 낸다.
이러한 구별은 노동자가 한 가지 상품만을 생산하고 그들의 보수도 그 상품으로 지급된다면 명백할 것이다. 오직 감자만 생산하는 경제를 상상해 보자. 노동자는 감자를 심고 기르고 수확하고, ‘임금’으로 감자를 받는다. 씨감자로 감자 10킬로그램을 사용하고 노동자에게 40시간 동안 일하도록 시킨 자본가가 감자 50킬로그램을 수확한다고 하자. 40시간의 노동으로 40킬로그램의 감자가 추가로 생산된 셈이다. 자본가가 10킬로그램의 감자를 가지고 시작했는데 50킬로그램을 얻었기 때문이다. 1킬로그램 당 가치는 1시간이다. 그중 10시간은 씨감자에서 이전된 것이고 40시간은 노동자가 추가한 것이다. 40시간 노동에 대한 임금이 감자 20킬로그램이라면, 20시간은 생계 수단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필요노동임이 확실하다. 나머지 20시간은 잉여노동으로, 이것이 잉여가치가 된다. 20시간으로 자본가는 감자 20킬로그램이라는 이윤을 얻는다. 감자 가격이 킬로그램 당 1000원이라고 가정해 보자. 자본가는 씨감자로 1만 원, 임금으로 2만 원을 지불한다. 그는 수확한 감자를 5만 원에 팔고 이윤으로 2만 원을 남긴다. 노동자는 자신이 추가로 생산한 감자 중에서 절반을 구입할 수 있다. 이때도 수행된 노동의 절반은 잉여노동으로, 잉여가치를 창출해 자본가에게 이윤을 벌어다 준다는 점은 명백하다.
실제 세계에서는 생산되고 소비되는 상품이 무척 다양하고, 노동자 한 명이 생산한 잉여가치가 얼만큼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더욱 어렵다. 모든 노동자들이 투입한 시간, 즉 사회적 총 노동으로 살펴봐야 한다.
총 산출량은 어떠한 가치를 담고 있다. 그 가치의 일부는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에서 이전된 가치고, 그래서 사회의 생산 잠재력이 유지되려면 총 산출량 중 일부는 반드시 기계와 원료들을 교체하는 데 사용돼야 한다. 나머지는 순 산출량이다. 여기에는 노동자들이 추가한 가치가 담겨 있다. 이 중 일부는 노동자들의 생계 수단으로 간다. 그만큼 생산하기 위해 들어간 시간이 필요노동이다. 그것의 가치는 노동력의 가치이다. 나머지는 잉여 생산물이다. 이것을 생산하기 위해 들어간 시간은 잉여 노동이다. 그것의 가치는 노동자들을 일 시켜서 생산한 잉여가치다.
이와 같은 구별이 아래 식으로 요약돼 있다. 전체(t)는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일 시켜서 일정 기간 생산한 총 산출량의 가치다. 이것의 일부는 불변자본(c)에서 이전된 가치다. 이것은 t를 생산하는 데 사용된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의 가치를 표현한다. 순 산출량(v+s)은 c에 더해진 가치다. 생산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수행한 노동이자 추가한 가치다. 그 일부인 v는 노동력의 가치, 즉 가변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다. 나머지가 잉여가치(s)다. 괄호 안 숫자들은 가상의 감자 경제 사례에서 가져온 것이다.
t = c + v + s
(50) (10) (20) (20)
여기서 착취는 자본가 계급이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생계 수단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보다 더 일하라고 강제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노동자들이 강제로 수행한 잉여노동이 잉여가치를 생산한다. 잉여가치는 상품에 담긴다. 자본가들은 그 상품을 팔아서 이윤을 얻는다. 자본가들이 얻는 이윤의 양은 잉여 노동시간 동안에 생산돼 잉여가치를 담고 있는 모든 상품들 가격의 합이다.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잉여노동이 이윤의 근원이다.
착취율은 잉여노동과 필요노동 사이의 비율로, 잉여가치를 노동력의 가치로 나눈 것이다(s/v). 착취율은 잉여가치율이라고도 한다. 감자 경제 사례에서 착취율은 20/20, 즉 100퍼센트다.
이윤율은 자본가가 번 이윤(최종 생산물을 판매한 수입에서 생산에 쓰인 돈을 뺀 것)과 생산을 하기 위해 쓴 돈 사이의 비율이다. 감자 경제에서 이것은 s/c+v = 20/30로, 67퍼센트에 조금 못 미친다.
그러나 이윤율이 언제나 이윤과 비용의 비율인 것은 아니다. 감자 수확을 위해 트랙터를 사용한다고 가정해 보자. 트랙터는 가격이 10만 원이고 10년간 쓸 수 있다. 한 해 동안 감자를 생산하는 데 쓰는 비용은 이제 4만 원이다(임금 2만 원, 씨감자 1만 원, 트랙터의 가치가 1만 원). 그러나 첫 해에 자본가가 들인 돈은 13만 원인데 트랙터 10만 원, 임금 2만 원, 씨감자 1만 원이다. 그 해의 이윤율은 20/30이 아니라 20/130으로 15퍼센트를 조금 넘는다. 따라서 이윤율은 이윤을 총자본(k)으로 나눈 것, s/k+v이다. 만약 어떤 생산수단이 여러 해 동안 생산 과정에 사용되면 k는 c보다 크다.
이윤율과 잉여가치율은 둘 다 잉여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의 관계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둘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하나는 잉여와 비용을 측정하는 단위다. 이윤율은 화폐 단위로 측정되고, 잉여가치율은 가치 단위로 측정된다. 무엇을 비용이라고 보는지도 다르다. 잉여가치율은 생계 수단의 가치만을 비용으로 계산하는 반면 이윤율은 자본가들이 생산 요소에 묶어 둔 모든 돈을 비용으로 계산한다.
잉여와 생산비의 관계를 표현하는 이 두 가지 다른 방식은 서로 다른 계급의 관점을 반영한다. 이윤율은 자본가가 돈을 자본으로 사용해 얻는 수익의 비율을 나타낸다. 자본가는 얼마의 돈을 가지고 생산 요소를 구입하며 시작한다. 그는 생산 요소들을 작동시켜서 상품을 생산한 다음 판매한다.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은 돈으로 이뤄진다. 이윤율은 그의 돈이 늘어나는 비율을 측정한 것이다.
반면 잉여가치율은 노동자들에게 노동력의 가치 이상을 생산하도록 강요되는 정도를 측정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일정량의 노동을 수행하도록 강제된다. 그러고는 생계 수단을 살 만큼을 임금으로 받는다. 이는 생산된 상품 총량의 일부분일 뿐이다. 노동자들은 생산한 가치의 단지 일부분만을 받는다. 잉여가치율은 노동자들이 수행한 노동 중에서 얼만큼이 노동자들의 관점에서 필수적인 부분인지, 즉 얼만큼이 노동자가 소비할 재화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부분인지를 측정한다. 잉여가치율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정도를 양으로 표현한 것이다.
아래 그림은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교환 과정을 요약해서 보여 준다. 단순상품생산에서 장인들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c)을 가지고 시장에 간다. 그들은 상품을 팔아 돈(m)을 벌고, 이 돈을 다른 상품(c)을 구입하는 데 소비한다. 이 과정의 시작과 끝은 상품으로 이뤄진다. 양쪽에 놓인 상품들의 총 가격은 같지만 그 상품들의 질적 속성은 다르다. 교환의 목적은 다른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랜 친구인 재단사를 보자. 그는 판매할 바지를 가지고 시장에 온다. 그는 바지를 팔아 번 돈으로 바지를 만들기 위한 옷감과 바늘과 실, 자신이 소비할 음식과 담배 같은 것을 산다. 돈은 한 종류의 상품을 다른 종류의 상품으로 교환하는 수단일 뿐이다. 돈은 주머니에 구멍을 낼 만큼 오래 있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에게 교환 과정은 장인과 비슷해 보일지라도 다르다. 노동자들은 자신이 만든 생산물을 가지고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 다른데, 생산물은 뭐든지 노동자들을 고용한 자본가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따라서 자기 혼자 알아서 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한 가지 상품을 소유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임금을 벌어서 생계 수단을 구입한다. 노동력의 교환가치와 생계 수단의 교환가치는 같다. 이 사례에서도 돈은 특정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 교환 과정에서도 중요한 것은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다른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자본가들에게 교환 과정은 완전히 다르다. 그 과정은 돈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난다. 질적 변화는 없이 양적 변화만 존재한다. 자본가는 시작할 때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이 과정을 끝낸다(m이 아니라 m'). 이 과정의 목적은 다른 사용가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수중에 있는 교환가치의 양을 늘리는 것이다. 자본가에게 수단과 목적은 뒤집어져 있다.
장인이나 노동자와 달리 자본가는 시작할 때보다 더 많은 교환가치를 가지고 이 과정을 끝낸다. 비밀은 그의 교환이 생산 과정(… p …)으로 나뉜다는 사실에 있다. 자본가는 초기에 가진 화폐 자본으로 노동 수단(m)과 노동 대상(o)과 노동력(lp)을 산다. 이후 자본가는 노동력이 일하도록 하는데, 노동 과정을 지휘·통제할 수 있는 지위를 행사해서 노동자에게 잉여노동을 수행하라고 강요한다. 노동자가 만든 상품에는 자본가가 구입할 때보다 더 많은 가치가 담기고 따라서 더 큰 액수에 팔린다. 이것은 그림의 (4)번 항목에 요약돼 있다.
이러한 이윤은 모든 것이 가치대로 사고팔리는 교환 과정이 아니라 착취가 벌어지는 생산 과정에서 생긴다. 마르크스는 이윤의 원천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더욱이 나는 등가물들이 서로 교환되는 상품 교환에서도 자본가는 (그가 노동자에게 사실은 노동력의 가치를 지불하자마자) 세상의 모든 권리 즉, 이 생산양식과 조응하는 권리를 가지고 잉여가치를 획득해 가는 것을 상세하게 보여 줬다.
착취는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 교환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착취는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상황이 낳은, 논리적이며 그 조건에서는 정당한 결과물이다. 착취는 교환 법칙의 형식과 내용 모두에 꼭 들어맞는 것이고, 따라서 법률에 호소하거나 법률을 조금 고친다고 해서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의 작동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자본주의에서도 중앙의 지도나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은 생산물의 종류와 질을 각자 결정해서 생산한다. 노동자도 임금으로 어떤 상품을 살지 각자 결정한다. 따라서 단순상품생산에서와 같은 문제가 생긴다. 즉, 콘플레이크와 헤어 스프레이 등등의 상품들이 적절한 균형을 이뤄 생산되려면 어떻게 노동이 배분돼야 할까 하는 문제 말이다.
그 메커니즘은 또다시 가치법칙이다.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본질적으로 단순상품생산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자본가는 이윤을 위해 사업을 한다. 자본가는 생산비에 견준 생산물의 교환가치가 얼마인지에 관심이 있지, 생산물의 사용가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더 많은 이윤을 벌 수 있다면 다른 상품을 생산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꿀 것이다.
만약 한 종류의 상품 공급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면 가격이 오를 것이다. 그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은 평상시보다 더 많은 이윤을 벌 것이다. 이 상품의 이윤이 평균보다 높은 것을 본 다른 자본가들도 이 상품의 생산으로 옮길 것이다. 이에 따라 공급은 증가하고 가격은 떨어질 것이다. 반대로, 만약 한 상품이 사회적 욕구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공급되면 그것을 생산해서 벌어들이는 이윤은 평균 이하일 것이다. 자본가들은 이 상품의 생산을 중단할 것이고, 공급이 감소하고 가격은 오를 것이다.
사회적 노동의 배분은 이런 방식으로 변한다. 자본가들이 자동차를 더 적게 생산하기로 결정하면 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일부 노동자는 해고된다. 자본가들이 신발을 더 많이 만들기로 결정하면 신발 생산 분야에서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다. 어떤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아 어쩔 수 없이 자동차 공장에서 나와 신발 공장으로 가야 할 것이다.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자본가든 노동자든) 개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따라 무엇을 생산할지를 바꾼다. 이 때문에 사회 전체의 욕구의 상대적 비율에 따라 재화가 생산되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 경향은 결코 그 자체로 완벽하게 작동하지는 않는다. 단순상품생산에서처럼 기호와 생산 기술이 변화하고, 그 메커니즘 자체의 결함도 있다. 그럼에도 이 경향을 통해 만성적이고 영속적인 부족이 생기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단순상품생산에서 가치법칙(상이한 재화 생산에 노동을 배분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며 상대 가격이 가치와 직접적으로 비례하는 경향이 생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이런 경향은 모든 산업 분야에서 이윤율(수익에서 비용을 뺀 값을 생산에 투입된 돈으로 나눈 비율)이 균등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래야 자본가들이 생산 품목을 바꿀 유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어떤 상품을 생산할 때는 다른 상품을 생산할 때보다 비싼 생산수단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래서 설비·기계에 투입된 돈과 노동력에 투입된 돈의 비율은 산업마다 다르다. 따라서 노동력에 들어간 비용 대비 설비·기계에 들어간 비용이 평균보다 큰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보다 비교적 높은 경향이 있는데, 그래야 지출된 자본에 대해 평균 이윤율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노동력에 들어간 비용 대비 생산수단에 들어간 비용이 작은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보다 비교적 낮은 경향이 있다.
간단한 사례를 들어 이 점을 쉽게 설명해 보겠다. 서로 다른 산업에 종사하는 자본가 두 명을 생각해 보자. 둘 다 임금이 한 주에 50파운드인 노동자 10명을 고용하고 주당 100파운드어치의 재료를 사용한다. 한 자본가는 100주 동안 쓸 수 있는 1만 파운드짜리 기계를 쓰고, 다른 자본가는 10주만 사용할 수 있는 1000파운드짜리 기계를 쓴다. 노동력, 재료, 기계의 가격은 각각의 가치에 직접적으로 비례하는데, 30분의 노동을 1파운드에 구매한다. 착취율은 100퍼센트다. 두 회사에서 주당 총 산출량의 가치는 각각 600시간이다(50시간은 기계에서, 50시간은 재료에서 이전됐고 500시간은 추가됐다). 각각의 사례에서 생산된 잉여가치는 250시간이다. 생산물의 가격이 가치에 직접적으로 비례한다면 두 자본가는 각자 주당 500파운드의 이윤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윤율은 상당히 다르다. 이윤율이 같아지려면, 생산할 때 더 비싼 기계가 필요한 생산물의 가격이 다른 것보다 비싸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의 작동을 통해 확립되는 경향이 있는 상품들 사이의 교환 비율을 생산가격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모든 산업에서 이윤율이 같아지게 하는 상대 가격이다.
어떤 상품은 가치 이하로 팔리고 어떤 상품은 가치 이상으로 팔리기 때문에, 각각의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은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생산한 잉여가치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생산가격과 가치의 차이는 착취자들 간 약탈품의 배분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상품이 가치가 아니라 생산가격에 따라 교환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지금까지 설명한 자본주의의 중요한 요소들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품의 가격이 가치에 비례하는 경향이 있다는 가정을 통해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었고, 단순상품생산과도 비교할 수 있었다. 누구든 단 몇 분만 숙고한다면, 생산가격과 가치의 차이는 유통의 사회관계와 생산의 사회관계의 기본적 특성, 그리고 이윤의 근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함의가 중요하게 바뀌는 것은 전혀 없다.
체제의 재생산
한 차례 상품 생산이 완료된 이후 생산을 재개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생산을 반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들은 모두 어떻게 구할 수 있는가? 그 요소들이 자본주의적 사회관계 속에서 이용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는 두 측면이 있다. 하나는 사용가치의 재생산이다. 체제가 작동하려면 소비재, 노동 수단, 노동 대상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뤄야 한다. 이는 가치법칙의 작동으로 이뤄진다. 만약 지난번에 균형이 딱 맞았다면, 모든 부문에서 이윤율이 같을 것이고, 자본가들이 생산 품목을 바꿀 유인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만약 뭔가가 부족하다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 자본가의 이윤율은 평균보다 높을 것이다. 다른 자본가들이 그 산업에 끌릴 것이고, 그에 따라 그 상품의 공급이 증가할 것이다.
재생산 과정의 다른 측면은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강철, 삶은 콩, 전동기계 등이 적절한 비율로 계속 생산된다고 해서, 생산을 조직하는 특수한 방식으로서 자본주의가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려면 특정한 사회관계가 재생산돼야 한다. 각각의 생산 주기 이후에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다시 팔 생각이 있고 팔 수 있어야 하며,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살 생각이 있고 살 수 있어야 한다.
개별 노동자와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조건이 어떻게 충족되는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노동자는 지난 주기에 보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다시 팔 수 있다. 즉, 그는 임금을 받았다. 임금을 받은 덕분에 노동자는 생계 수단을 사서 노동할 때 소모한 뇌·신경·근육을 회복(하고 식구들을 부양)할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일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급여를 받았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상품(c)을 가지고서 지난번에 생산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노동력을 돈(m)으로 바꾸고, 그 돈으로 생계 수단(c)을 구입했다. 그는 생계 수단을 소비해서, 생산 과정에서 마모된 노동력을 회복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능력을 다시 팔 의사가 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방식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다. 그는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돼 있다. 자본가들이 여전히 공장을 소유하고, 따라서 노동자에게는 다시 자본가들을 위해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
자본가는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고, 노동자들이 가지고 일할 노동 수단과 노동 대상을 살 수 있다. 그의 수중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번 생산을 어느 정도의 돈(m)을 가지고 시작해, 그 돈으로 기계·재료·노동력(상품 c = 노동 수단 m + 노동 대상 o / 노동력 lp)을 샀다. 그는 이것들을 작동시켜 상품(c)을 생산하고, 그것을 판매했다. 그는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돈을 가지고서 그 과정을 끝냈다. 돈과 함께 말이다. 그는 이 돈을 다시 생산 요소를 사는 데 사용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생산 과정은 계속될 수 있다.
자본가는 노동자를 재고용할 의사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 이윤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자에게 노동력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만들라고 강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상품을 생산비보다 비싸게 팔 수 있고, 그럼으로써 화폐 자본을 증식할 수 있다. 이것이 생산을 지속하도록 유인을 제공한다.
그러나 개별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점에서만 보면 재생산의 중요한 측면들을 여럿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들은 재생산 과정을 체제 전체의 관점에서 봐야만 드러난다.
자본가가 쓸 수 있는 돈은 생산을 거듭할수록 커진다. 그는 잉여가치를 이윤으로 가져간다. 이것이 그가 생산하는 이유다. 그에게 생산은 거대한 비행기 모형을 만드는 것 같은 취미가 아니다. 그는 돈을 벌려고 생산을 한다.
그는 번 돈을 어떻게 사용할까? 개별 자본가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처럼 보인다. 그는 이 돈을, 자본을 추가해서 더 많은 이윤을 얻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노후를 대비해 저축할 수도 있다. 자기 여흥을 위해 스포츠카나 요트 등을 사는 데 쓸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그가 절약적이냐 쾌락적이냐 하는 개인 성향의 문제처럼 보일 것이다.
체제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다. 만약 자본가들이 모두 자신의 이윤을 저축하려 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한 번의 생산 주기가 끝났다고 해 보자. 자본가들은 상품을 팔려고 할 것이다. 생계 수단을 생산한 자본가들은 별다른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임금을 생계 수단에 쓸 테니, 생계 수단을 생산한 자본가들의 이윤율은 평상시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이용하지 않는 기계나 사치품을 생산한 자본가들은 상품을 판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잠재적 소비자인 다른 자본가들이 이윤을 소비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2장에서 예로 들었던, 특정 재화의 과잉생산 상황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그때는 바지의 수요가 평소보다 감소하더라도 신발 같은 다른 상품의 수요가 평소보다 증가하며 균형이 잡혔다. 여기서 문제는 특정 상품의 수요와 공급 간 비율 문제였다. 가치법칙이 작동해 이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체 상품들의 수요와 공급 간 불균형 문제다. 자본가들은 생산된 전체 상품들 중에서 특정한 사치품이나 특정한 노동 수단을 제외하고는 이윤을 소비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언가를 사기보다는 돈을 저축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치법칙이 평소대로 작동한다고 해도 이 어려움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자본가들이 모두 생산 품목을 생계 수단으로 바꾼다고 해 보자(이 부문에서는 그래도 이윤을 남길 것으로 보이니). 그러면 이 부문에서 과잉생산이 일어날 것이다. 노동자들의 소득(과 따라서 수요)은 그대로이지만 공급은 증가하는 것이다. 팔리지 않고 남는 상품이 생길 것이고, 만약 모든 상품이 팔릴 정도로 가격이 떨어진다면 이윤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자본가들의 총 수익은 총 임금 비용을 넘을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임금이 소비의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 전체가 이윤을 얻을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어려움이 어떻게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6장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체제의 재생산을 위해서는 자본가들이 자신의 이윤을 소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얻으려면, 노동자들이 잉여 생산물을 생산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 하고 잉여생산물을을 판매할 수도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잉여가치는 생산되기도 해야 하고 실현되기도 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써서 생계 수단을 산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지출은 생계 수단에 담긴 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만큼을 실현시킨다. 잉여가치는 자본가들에 의해 실현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은 이윤을 소비해야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만약 자본가들이 서로의 상품을 사며 이윤을 소비하지 않는다면, 잉여 생산물이 판매될 수 없고, 잉여가치가 실현될 수 없으므로, 이윤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체제로서는 다행이라고 할까, 자본가들은 자기 이윤을 대부분 소비해 생산 요소를 더 획득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자본주의는 경쟁적이다. 경쟁자들이 이윤을 자본 추가에 쓰는데 어떤 자본가가 자신의 노후를 위해 저축하기로 결정한다면 그는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그의 경쟁자들은 더 최신의 기계를 입수해 더 값싸게 상품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가 고용한 노동자들이 생산한 상품에는 경쟁자들이 판매하는 상품보다 더 많은 노동시간, 즉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이 담길 것이다. 그래서 이 자본가가 고용한 노동자들은 실제로는 이전과 똑 같은 노동시간을 상품에 투입하겠지만, 이렇게 해서 생산하는 가치는 점점 적어질 것이다. 이 자본가의 회사에서는 잉여가치가 점점 더 적게 생산될 것이다. 그의 이윤은 더 줄어들 것이고 그는 파산으로 내몰릴 것이다. 자본가는 살아남으려면 자린고비처럼 굴며 자기 자본을 확장하는 데 이윤을 써야만 한다.
이처럼 자본주의적 재생산은 대체로 규모가 점점 확대되는 식으로 일어난다. 그러려면 과거에 생산된 잉여가치, 즉 이윤이 자본 추가에 사용돼야 한다. 재생산은 자본의 축적을 통해 이뤄진다. 계속되는 생산과 교환의 주기는 지속적으로 확장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위의 도식은 다음과 같이 봐야 한다.
여기서 m'는 m보다 크고, c'는 c보다 크고, m''는 m'보다 크다.
자본가들은 생존하려면 무언가를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자본은 모두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에 생산된 [모든] 잉여가치와 같아진다. 간단한 예를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장인으로서 20년간 일을 하며 저축한 1000파운드를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 보자. 이윤율은 15퍼센트이고, 이 새로운 자본가는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이 상품을 생산하는 1주일 동안 50파운드를 가지고 먹고 산다. 첫 주가 지나면 그는 1150파운드를 갖게 된다(처음의 자본 1000파운드 + 이윤 150파운드). 그는 다음 주 생활비로 50파운드를 남겨 두고 1100파운드를 자본으로 사용한다. 20주가 지나는 동안 그가 생활비로 소비한 돈은 처음에 가지고 있던 1000파운드와 같아진다. 그러나 그는 파산하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보다 사정이 상당히 나아졌다. 그의 자본은 1만 1000파운드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 1만 1000파운드는 모두 20주 동안 그가 차지한 잉여가치다. 그는 이윤을 얻지 못했다면, 즉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면, 가난뱅이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는 부자다. 그의 자본은 모두 20주 동안 그에게 고용돼 일한 사람들이 수행한 잉여노동으로 구성돼 있다.
이것이 체제의 논리다. 자본은 착취 계급이 차지한 과거의 노동이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과거 노동을 상대로 해서 자신의 노동력을 거래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과거 노동을 차지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미래 노동도 지배할 수 있다. 자본가들은 기계와 화폐 자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 과정을 지휘·통제할 수 있다. 그 기계와 화폐 자본은 과거의 이윤으로 획득된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들이 과거에 수행한 노동이 자본이라는 적대적이고 소외된 권력으로 노동자와 마주선다.
자본이 성장함에 따라 체제도 팽창한다. 잉여가치는 더 많은 가변자본과 교환된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그럼으로써 자본가들이 지휘·통하는 노동 과정 아래 놓인다.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확산된다.
이렇게 밀접하게 연관된 두 과정, 즉 잉여가치를 자본의 추가에 사용하는 과정과 자본주의적 사회관계가 확산하는 과정이 축적의 핵심이다. 그리고 축적은 체제가 스스로 재생산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성장함으로써 존속한다.
3. 프루동주의와 자본주의
아래 표는 존재할 수 있는 네 가지 상품생산 사회에서의 사회관계들을 요약해 보여 준다. 첫째는 순수한 단순상품생산 모델이다. 여기서는 불평등하거나 강압적인 사회관계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는 상인 자본이 교환 영역을 지배하는 형태로 변형된 단순상품생산이다. 이는 장인 생산이라는 역사적 현실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모델이다.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사회관계는 유통 과정에서 존재한다. 원리적으로는, 이러한 유형의 사회에 프루동주의적 개혁을 적용하면 첫째 유형의 사회로 되돌릴 수 있다. 다시 말해, 개혁을 시행해 불평등과 강압을 없애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경제 체제 | 생산에서의 사회관계 | 유통에서의 사회관계 |
단순상품생산 | 자유와 평등 | 자유와 평등 |
상인 자본이 존재하는 단순상품생산 | 자유와 평등 | 불평등과 강압 |
상인 자본이 존재하는 자본주의 | 불평등과 강압 | 불평등과 강압 |
자본주의 | 불평등과 강압 | 자유와 평등 |
셋째 형태는 상인 자본이 교환 영역을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다. 프루동주의적 개혁을 성공적으로 시행하면 이 체제는 넷째 형태, 즉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로 바뀔 수 있다. 순수한 형태의 자본주의에서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관계는 유통 영역에서는 존재하지 않고, 생산 영역에서는 존재한다. 이 유형에서는 착취가 일어난다. 자본주의를 부르주아 사회주의 식으로 개혁하더라도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그러한 개혁을 시행하면 무역 독점이 가치법칙의 작동을 방해하는 일은 줄겠지만,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대가로 받는 가치가 그대로라면 노동계급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개혁은 그저 잉여 생산물이 각 자본가들에게 배분되는 비율을 바꿀 뿐이다. 즉, 상인 자본가들이 사업에서 퇴출되는 만큼 산업 자본가들이 더 큰 이윤을 벌 수 있을 뿐이다. 재료는 더 싸게 사고, 생산물은 더 비싸게 팔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프루동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의 정치적 관점, 즉 장인 생산과 관련해서만 타당한 관점은 자본주의와 관련해서는 근본부터 잘못된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불평등하고 강압적임을 입증했는데, 이 점은 프루동주의를 비판하는 핵심 내용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현실에도 정치적으로 관련성이 있다. 오늘날 가장 영향력 있는 개혁주의는 2부에서 다룰 다소 다른 오류에 근거해 있기는 하지만, 부르주아 사회주의 사상의 잔재가 노동운동 내에 상당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본의 특정 유형이 문제라고 여긴다. 그 표적은 계속 바뀐다. 때로는 금융 기관과 투기꾼들이, 때로는 독점 대자본이 지목된다. 물론 자본의 특정 부문이 특히 부도덕하게 행동하며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상인 자본의 사례처럼) 노동력의 가치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런 행태는 단지 각 자본 부문들 사이의 잉여가치 분배에만 영향을 미칠 것이다. 자본가들 가운데 특정 집단을 근본 문제로 지목하는 것은, 몇몇 중요한 개혁(예를 들어 은행 국유화나 효과적인 반독점법 시행)으로 자본주의를 평등한 사회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프루동주의적 환상으로 빠지는 길이다.
둘째, 자본주의가 불평등하고 위계적인 근본 이유를 사회적 특권의 유무에 따라 누구는 자본가가 되고 누구는 노동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핵심 이유를 여기서 찾는 견해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프루동주의가 담겨 있다. 그러한 견해들은 올바른 개혁을 시행하면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고, 능력주의가 완전히 꽃핀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다른 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재생산 과정의 논리란 자본이 과거에 생산된 잉여가치로 구성된다는 것이므로, 자본가가 사업 착수에 필요한 돈을 처음에 어떻게 구했는지 하는 점은 자본주의를 하나의 체제로 평가하는 것과 무관한 일이다. 둘을 구별하지 못하면 하나의 생산양식(또는 그 속에서 새로운 구성 단위)이 출현하는 조건들과 자기 재생의 조건들을 혼동하게 된다.
예컨대, 어떤 검소한 장인들이 돈을 많이 저금해서 자본가가 되는 식으로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발전한 것이라면,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조건들이 완전히 평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장인들이 모두 평등한 기회를 가졌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적은 시간 일하며 날마다 돈을 탕진하기로 선택했고, 어떤 사람은 오랜 시간 일하며 소비하지 않고 돈을 모아 자본가가 되기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속 창업되는 신생 자본이 처음에는 비착취적인 방식으로 출발할지도 모른다. 어떤 조건에서는, 개인들이 열심히 일하고 소비는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자본가가 되는 것이 여전히 가능하다. 돈을 모아서 작은 점포나 맥줏집 등을 사서 장인이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이 커지고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기 시작한다.
물론 실제로는 초기 자금을 보통 이런 식으로 모으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화폐 자본은 상업 자본가들의 독점적 활동이나 직접적인 약탈과 사기를 통해 축적됐다. 오늘날에도 생산 현장에서 자신만의 노력으로 스스로 일하는 사람이 창업한 자본주의 기업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 설령 자본주의 기업들이 모두 개인들이 열심히 일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체제가 정당화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단 자본주의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착취는 생래적이고 필연적이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 자금을 어떻게 얻었든지 간에 모든 자본은 어느 시점 이후에는 이전에 차지한 잉여가치로 이뤄진다.
개별 자본가(나 사실은 체제 전체)가 생겨나는 방식은 그 개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하고만 관련이 있다.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와는 무관하다. 이를 분명히 보여 주는 극단적 사례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사회주의가 수립되기 바로 하루 전에 자본가가 됐다고 가정해 보자. 그는 다른 자본가들과 달리 자신은 공장을 잃은 것에 대해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다른 자본가들의 자본은 과거에 생산된 잉여로 구성돼 있는 반면, 자신의 자본은 자신이 평생 모은 돈으로 구성돼 있다. 그는 누군가를 착취할 기회가 없었다. 이것이 그가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그는 당연히 자본가로 남게 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다. 그러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을 착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협동조합은 오늘날에 존재하는 프루동주의의 마지막 사례다. 많은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착취를 없앨 해법으로 여긴다. 그러한 관점은 본질적으로는 단순상품생산의 이상을 현재의 생산력 발전 수준에 맞게 조정해 적용하려는 시도다. 생산수단의 개인적 소유를 배제하고 노동자에 의한 집단적 소유를 추구하는 것이다(5장을 보라).
노동자 협동조합이라는 발상은 자본주의 체제가 가능한 한 최대치의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축적하도록 강요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노동자 협동조합이 자본주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자본주의적 기업들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만큼 효과적으로 자기 조합원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한 경제가 모두 노동자 협동조합으로 구성되더라도, 가치법칙이 지배하는 한 마찬가지 압력이 계속 생겨날 것이다.
결론을 내려 보자. 노동 과정에 존재하는 불평등과 강압을 뿌리 뽑아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개혁은 없다. 자본주의 체제가 경쟁하는 자본 단위들로 구성돼 있는 한, 노동자들이 잉여가치를 생산하도록 강제하는 공장 내 지휘·통제가 필요할 것이다. 잉여가치가 없으면 이윤도 없고, 이윤이 없으면 생산도 없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개별 자본가들의 정신적 기질, 사회적 출신 배경, 심지어 실존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이 체제는 각 자본 단위를 통제하는 사람들(재계의 거물, 주주, 임명된 경영인, 노동자로 이뤄진 협동조합)이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지 못하게 막으며, 이를 따르지 않으면 파산법원으로 몰아갈 것이다. 이 점에서 시가를 피우는 백만장자는 단역이다.
MARX21
주
-
출처: Harrison, John 1978,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s: A Critique of Reformism, Pluto Press 중 3장 ‘Exploitation and Surplus Value’
↩
- 노동력 재생산이 이뤄지는 사회관계들을 분석하려는 시도는 Harrison 1973을 보라. ↩
- Marx, Karl 1976a, p280. ↩
- 노동자와 자본가 개인의 성별은 이 맥락에서 상관이 없다. 불행히도 영어에서는 성별이 명시돼야 한다. 사례에 등장하는 특정 개인이 남성인지 여성인지가 중요하다며 남성 대명사와 여성 대명사를 번갈아 쓰면 혼란을 낳을 수 있고, 항상 ‘그/그녀’ 그리고 ‘그의/그녀의’라고 쓰는 것이 문장을 읽기 사납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남성 대명사만 쓸 것이다. ↩
- Marx, Karl 1976b, p205. ↩
참고 문헌
Harrison, John 1973, ‘The political economy of housework’, Bulletin of the Conference of Socialist Economists, Winter.
Marx, Karl 1976a, Capital Ⅰ, London, Penguin.
Marx, Karl 1976b, Value Studies, London: New Park Public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