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
2부 자본주의와 생산력: 사회민주주의 비판
6장 쇠퇴한 자본주의 *
이번 장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자본주의의 진보적 구실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을 주로 다룬다. 1절은 축적과 (경제)공황의 관계를 검토한다. 이 관계를 아는 것은 2절을 알고 평가할 기반이 된다. 2절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자본주의가 도달한 발전 단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다룬다. 3절은 그 논쟁 참여자들이 도출한 몇몇 정치적 결론을 다룬다. 이 논쟁을 검토하는 것은 당시 처음 등장한 현대 개혁주의의 핵심 특징들을 아는 데 필수적이다.
공황과 과잉 축적
축적의 두 가지면은 체제의 재생산을 다룬 3장과 생산력의 발전을 다룬 5장에서 논의했다. 6장에서는 셋째 측면을 다루는데, 그것은 자본주의가 자체 확대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이다.
마르크스는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교란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이것을 공황이라 불렀고 다음과 같이 썼다.
공황은 …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면서 매번 점점 더 위협적으로 부르주아 사회 전체의 존립을 의심케 한다. … 사회의 수중에 있는 생산력이 부르주아적 소유를 위한 조건이 더한층 발전하는 데 이바지하는 경향은 더는 없다. 오히려 생산력은 그 조건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 강력해지고 그 조건은 생산력에 족쇄가 되며, 생산력은 이 족쇄를 극복하자마자 부르주아 사회 전체를 혼란에 빠뜨린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사회관계는 어느 시점이 지난 후에는 자연을 변형시키는 인간의 능력이 더한층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데, 그런 상황의 중요한 양상이 공황이다.
공황의 특징은 실업과 유휴설비가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생산요소, 즉 재료, 노동수단, 이것들을 가지고 일할 사람들은 다 있지만, 자본가들은 기계와 노동자들을 모으지 않는다. 그렇게 해 봐야 수익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을 조직하는 방식이 생산력의 발전은 고사하고 생산력의 활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황은 사회 혁명의 전조이다.
마르크스는 공황의 중요성을 말했지만, 공황의 원인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지는 않았다. 그러고 싶었지만, 공황은 경제 현상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체제의 발전 경향과 주요 특징을 모두 분석해야 공황을 논의할 수 있다고 마르크스는 생각했다. 결국 그는 이 작업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나 후세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여기저기서 한 언급들과 더 중요하게는 그의 일반적인 이론적 틀에 근거해 여러 이론을 발전시켜 왔다. 이 절에서는 그 가운데 중요한 것을 논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재생산은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경제체제에서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개인들이 스스로 식량을 생산하는 완전한 자급자족 사회도 예상치 못한 흉작과 가뭄 등을 겪을 수 있다.
더 복잡한 사회라면 더 큰 어려움이 생긴다. 노동 분업이 필요한 체제라면 각 재화의 생산에 노동을 배분하는 데서 문제가 생긴다. 언제나 완벽한 균형을 이루게 할 방법은 없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에서도 경제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할 때 실수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의 일은 불확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상품생산사회에서는 생산이 조율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가 증폭된다. 노동 분업은 계획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 분업은 가치법칙에 의해 조절된다. 이것은 가장 좋을 때에도 불완전한 메커니즘이다.
사회적 선호가 예기치 않게 변해서 너무 많은 자동차가 생산됐다고 가정해 보자. 자동차 산업의 자본가들은 재고를 떠안든지 가격을 인하하든지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이윤이 줄어든다. 물론 이런 자동차 과잉생산은 사회적 선호가 상대적으로 더 커진 다른 재화의 과소 생산과 동시에 일어난다. 따라서 이 산업의 자본가들은 예상 밖의 높은 수요와 평균 이상의 이윤을 누린다.
가치법칙이 작동해서 노동이 현재 사회적 선호에 딱 맞게 산업들 사이에서 재배분된다면,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자본가가 자동차 생산에서 다른 공급 부족 산업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결코 확실하지는 않다.
자동차 산업의 자본가들은 사회적 선호의 변화가 일시적일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들은 다른 산업에 투자하지 않고 그저 생산을 감축하며 수요가 회복되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면 경제 전체가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자동차 생산자들은 철강·고무·기계 등에 대한 주문을 줄일 것이다. 자동차 산업에 쓰이는 재료와 기계 등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이다. 자본가들의 이윤은 줄어들 것이다. 해고된 자동차 노동자들은 더는 임금을 받지 않기 때문에 소비재 수요가 떨어질 것이다. 따라서 생계 수단을 생산하는 자본가들도 비슷한 문제에 처할 것이다. 여기서도 이윤이 줄어들 것이다.
이 과정은 일단 시작되면 자체적으로 계속 진행되면서 탄력이 붙는다. 자동차 산업에 [재료와 부품 등을] 공급하는 자본가들이 기계와 재료 구입을 줄이고 노동자를 해고한다. 생계 수단을 생산하는 산업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이내 경제 전체가 영향을 받는다. 판매와 생산의 추락은 연못에 이는 물결처럼 퍼지고 커진다.
그 결과는 불황이다. 실업이 는다. 노는 기계가 생긴다. 생산력이 멈춰 선다.
지금까지 묘사한 사례는 서로 다른 재화들의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적이 되면서 생기는 공황의 모습이다. 문제의 발단은 특정 산업에서 생산과 수요가 서로 틀어지게 된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벌어진 교란을 보통 불비례 공황이라고 부른다.
이 사례의 몇몇 측면은 공황을 아는 것과 일반적으로 관련 있다. 첫째, 실현의 어려움이라는 것이 경제를 불황으로 추락하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것이다.
생산이 줄어드는 악순환은 특정 부문 자본가들이 이윤을 소비하지 않으면서 시작된다. 이에 따라 이 부문에 재화를 공급하는 다른 부문들도 생산품을 판매할 시장이 줄어들면서 실현의 문제를 겪는다. 이렇게 한 부문에서 시작해 다른 부문으로 확산되며 차례차례 자본가들을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잉여가치의 생산이 아니라 잉여가치의 실현과 관련된 문제이다. 불황으로 떨어지는 악순환을 일으키는 직접적인 메커니즘은 항상 실현의 문제가 확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비례 공황 사례가 잘 보여 주는, 두 번째 일반적인 요지로 이어진다. 즉, 실현의 문제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설명돼야 한다는 점이다. 앞의 사례에서 실현의 어려움은, 특정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해지고 그 때문에 이윤이 감소한 부문의 자본가들이 투자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셋째는 자본가들이 소비하지 않으면서 실현의 어려움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원론적으로 말해, 실현의 어려움은 자본가들이 이윤을 전부나 일부 소비하지 않을 때도, 노동자들이 임금을 전부나 일부 소비하지 않을 때도 생길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후자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 노동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소득을 쓴다. 어떤 노동자들은 저축을 하겠지만, 다른 노동자들은 대출까지 해서 버는 것보다 더 쓴다. 노동계급 전체로 보면 저축과 대출은 대체로 비슷하다. 노동자들이 소비를 급격히 줄여서 불황이 촉발될 가능성은 극도로 낮다.
자본가들은 사정이 다르다. 대체로 자본가들은 이윤을 개인적 소비에 쓰지 않는다. 그들은 그 돈을 더 많은 이윤을 벌기 위해 투자한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수익성이 좋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소득을 소비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불비례가 공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원인도 찾았다. 그들은 불비례만으로 공황을 설명하기는 불충분하다고 주장했는데, 그 사이에 필연성이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이 조율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다른 재화의 수요와 공급이 불균형해지는 건 필연적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공황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가치법칙이 2~3장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작동해서 비교적 차질 없이 불균형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앞의 자동차 산업 사례를 다시 보자. 자동차 산업에서 사용되지 않는 이윤을 수요가 늘어난 다른 산업의 자본가들이 빌려서 투자를 확대할 수 있다. ‘우연적인’ 불균형에서 비롯할 가능성뿐 아니라 공황으로 향하는 체계적인 경향을 설명할 수 있다면 혁명적 주장이 강화될 것이다.
그런 설명을 위한 시도들 중에는 생계 수단에 대한 노동자들의 수요가 줄어드는 것을 강조하는 설명이 있다. 이런 입장을 보통 과소소비론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면, 실현의 어려움이 대체로는 해당 부문 자본가들의 상품에 대한 소비가 줄면서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전체 산출에서 소비재의 비중이 줄면 그만큼 자본재 비중이 커져야 하고, 따라서 어떤 면에서는 더 불안정한 체계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이 생산된 모든 상품을 실현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것을 공황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다. 만약 임금이 그 정도로 지급된다면 이윤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생산도 없을 것이다. 과소소비론을 필연성 있는 이론으로 철저하게 구성하려는 시도는 모두 둘 중 하나의 잘못을 저질렀다. 하나는 자본가들의 지출로 잉여가치를 모두 실현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들의 지출 증가 속도가 생계 수단의 생산 증가 속도보다 더 느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런 가정으로는 과소소비론을 유지할 수가 없다.
이와 다른 입장은 축적 과정에 주목한다.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이 이윤율과 축적률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식하는 이 입장은 축적률이 체제가 지탱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넘어 이윤 생산의 조건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공황의 원인을 찾는다.
[자본주의가] 과잉 축적으로 향하는 근본적 경향이 있고 그 결과 공황이 발생한다는 설명은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될 것이다. 그런 설명은 체제의 작동 과정에는 불협화음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것이다. 만약 축적이 어느 시점을 지나면 체제의 재생산에 문제를 야기하는 경향이 있다면, 자본주의 사회관계(자본주의 체제의 진보적 구실에서 핵심적인 것) 자체가 그 내재적 논리에 따라 더 한층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바뀐다는 얘기가 된다.
이를 보여 주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시도는 이윤율 저하 경향(노동자 1인당 불변자본의 가치가 상승한 결과로 생기는 경향)에 근거한다.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기존의 생산 기술을 계속해서 더 진보한 것으로 바꿔야만 하는데, 여기에는 노동자 1인당 기계의 비율이 증가하는 것이 포함된다. 그에 따라, 예를 들어 장인이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서 대형 기계 시스템으로 교체돼 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산 노동이 만든 가치(v+s)에 비해 불변자본(c)의 가치가 상승한다.
이런 상황에서 s+v보다 c가 더 빨리 상승하는 것을 상쇄할 만큼 착취율(s/v)이 상승하지 않는다면 이윤율(s/c+v)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s가 아무리 상승하더라도 c의 상대적으로 빠른 상승이 내는 효과를 상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v가 s에 비해 적기 때문에 v를 줄여 s를 증대시킬 가능성은 점점 사라진다. 극단적인 상황, 즉 v+s에서 v가 거의 0이 될 때에도 s가 v+s 보다 더 빨리 증가할 수는 없다. c가 더 빨리 증가하는 상황에서 이윤율은 결국 떨어지고야 만다.
이윤율 저하 경향 이론은 실제 이윤율의 불균등한 하락으로 때로는 급격한 하락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윤율의] 하락이 불균등한 이유는 착취율의 변화 같은 다른 요소들이 근본 경향을 상쇄하거나 강화하기 때문이다. 이윤율이 급격하게 하락하면 실현의 문제가 생기는데, 그런 환경에서는 자본가들이 투자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진보, 붕괴, 쇠퇴?
현대 개혁주의의 근원에는 19세기 마지막 몇 년부터 20세기의 첫 20년까지 국제 노동자 운동 안에서 벌어진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을 거치며 국제 노동자 운동은 처음에는 이론적으로, 이후에는 조직적으로 대립하는 두 진영으로 분열됐다.
그 논쟁은 1890년대 말에 베른슈타인이 일련의 글을 발표하고 책으로 묶어 내면서 시작했다. 핵심적인 이견은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적용되는 역사유물론의 동역학 원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와 그 원리가 정확한가였다. 다시 말해, 그 논쟁은 역사 변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무엇이고 그것을 사회주의 건설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논쟁의 시기와 방식은 그에 앞선 경제적·정치적 사태 전개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논쟁이 일어난 맥락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주요한 경제적 요인들을 먼저 다루고, 정치적 요인들은 다음 절에서 검토할 것이다.
19세기에 자본주의의 발전은 거듭되는 공황과 불황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통계 자료가 부족해서, 이 공황 발생 시점에 대해서는 경제사 연구자들의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타당해 보이는 추정치에 따르면, 공황은 1825년, 1847년, 1857년에 발생했고, 결정적으로 1873년에 ‘대불황’이 닥쳤다. 사실 공황의 정확한 시점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19세기 전반기에는 공황이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 일어났고, 후반기부터는 덜 빈번했지만 강도는 심해졌다는 데에는 의견이 대체로 일치한다.
1873년에 시작한 대불황의 지속 기간을 두고는 논란이 약간 있다. 그래도 이 불황이 19세기에 일어난 마지막 공황이었다는 점에는 대체로 동의하는 듯하다. 논쟁에 참가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19세기 말 수십 년 동안 이뤄진 경제 발전의 또 다른 특징은 자본 단위의 규모와 힘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자본의] 집적과 집중이라는 통상적 과정의 진척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새로운 현상도 나타났다. 일부 산업들에서 대기업들이 연합해 자신들끼리 시장을 분할하고, 생산 규모를 조절하고, 가격을 담합했다. 이런 대기업들은 독점 기업이라고 불렸고 그 기업들이 형성한 연합은 카르텔이라고 불렸다. 논쟁 참가자들은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에도 모두 동의했다.
베른슈타인은 제2인터내셔널(당시 주요한 국제 노동계급 조직) 지도자들을 비판했다. 그들은 공황이 점점 더 심해지다가 결국 자본주의가 더는 작동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를 테고 이런 ‘최종적 위기’가 사회주의의 도래를 알릴 것이라고 여겼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관점을 붕괴 이론이라고 불렀다.
베른슈타인은 붕괴론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는 마르크스가 결코 체제의 최종적 붕괴를 예상하지 않았다고 봤다. 공황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고 봤지만 이는 틀렸다고 베른슈타인은 주장했다. 1873년 대불황 이후의 경험을 보면 [자본]축적이 불안정해지기는커녕 더 안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상대적 안정의 주된 요인이 카르텔의 발전이라고 주장했다. 카르텔들이 가격, 산출량 규모, 시장 점유율 등을 정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계획의 효과를 낼 수 있게 됐고, 그 덕에 생산과 축적이 상당히 교란되는 일을 피할 수 있고 또 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급속하게 발전시키고 있고 예측 가능한 미래에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라는 게 베른슈타인의 주장이었다.
베른슈타인이 동시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관계가 생산력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고 그리 될 것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실천적 목표에 비춰 보더라도 그런 붕괴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은 틀렸다고 주장했다. 그런 붕괴 가능성은 아득히 먼 미래에야 나타날 것이므로, 그런 추측이 정치 전략에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베른슈타인은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결국 역사유물론의 핵심 사상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응답 방식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본주의 생산이 어떤 지점에 이르면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이에 따라 붕괴 논쟁이라고 불린 긴 논쟁이 시작됐다.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거의 대부분 그런 붕괴가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이를 여기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베른슈타인에 대한 또 다른 응답은 자본주의가 이미 생산력이 더 한층 발전하는 데 장애물이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당시 세계 자본주의가 도달한 발전 단계, 특히 카르텔 등장의 의미에 주목하는 분석이 필요했다. 이런 이해 방식이 마르크스주의에 더 생산적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부하린, 힐퍼딩, 카우츠키가 중요한 기여를 했다. 그 기여를 충분히 논의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필요할 것이다. 이 절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는 레닌의 《제국주의론 ─ 자본주의의 최신 단계》에 초점을 맞출 것인데, 그 목적은 당시 자본주의가 도달한 발전 단계를 속속들이 설명하려는 것도 레닌이 그런 설명을 내놨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지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당시로서) 최근 단계를 분석하는 데서 마르크스의 이론을 활용하고 발전시키려 애쓴 방식의 자취를 살펴보려는 것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앞서 말한 베른슈타인의 글들이 발표된 지 20년가량 지난 후에 쓰여졌다. 그래서 그 2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을 포함한 경제적·정치적 사태 전개 과정에 대한 지식들을 다 이용할 수 있었다는 이점이 있었다.
레닌의 소책자 제목을 보는 오늘날 독자들은 잘못된 인상을 받기가 쉽다. 오늘날 제국주의라는 용어는 보통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에 있는 선진 경제들과 ‘저개발국’이나 ‘개발도상국’이라고 완곡하게 묘사되는 주변부 경제 사이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관계를 기술하는 데 사용된다. 그러나 레닌이 자신의 소책자 첫 문장에서 분명히 밝혔듯이, 그 책을 쓸 당시에 레닌은 제국주의라는 말을 그 시대 전체의 특징들에 적용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레닌은 그 말을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레닌은 그 저작의 집필 목적을 “20세기 초 국제 관계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복합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의 두 가지 근본 경향, 즉 자본의 집적·집중 경향과 과잉 축적 경향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는 당시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던 일들을 두 경향이 스스로 드러내 보이며 상호작용한 결과로 봤다.
레닌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의 전환기에 자본의 집적과 집중은 소수 대기업이 여러 산업들을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와 나란히, 한 줌의 강력한 은행들이 돈과 신용을 통제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단 한 산업의 생산 대부분이 소수 대기업들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자, 그 기업들이 생산량과 가격 등을 합의해 정하는 일은 상당히 쉬워졌다. 카르텔이 형성된 것이다.
거대 은행들이 이 과정을 도왔다. 점점 더 많은 예금과 대출이 은행 시스템을 거치게 되면서, 은행들은 고객들의 강점과 약점을 평가하고, 누가 큰 수익을 버는지 누가 적자 상태로 위태로운지를 점검했다. 은행들이 특정 고객을 선호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한 기업이 다른 기업을 퇴출시키면 은행 입장에서는 [회수하지 못한] 빚만 남게 됐다. 그래서 은행들은 사생결단적 경쟁을 제한하고 카르텔을 형성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다.
은행들이 돈줄을 통제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능동적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은행은 카르텔에 참여하려는 기업들에게는 관대한 조건으로 금융을 제공하고 그러지 않으려는 기업들에게는 금융을 제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강력한 수단이었다.
산업이 점점 더 은행에 의존해 자금을 조달하게 되고 은행이 점점 더 많은 돈을 산업에 투자하게 되자 이 둘의 관계는 더 밀접해졌다. 힐퍼딩은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의 융합을 가리키는 용어를 만들었고 레닌도 이를 채택했다. 그는 이를 금융 자본이라고 불렀다.
집적, 집중, 카르텔의 형성, 금융 자본의 성장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은 자본의 과잉 축적 때문에 더 촉진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1873년 대불황과 그 여파로 기업 파산이 빈번해졌다. 많은 자본들이 파산하거나 경쟁자들에게 인수됐다. 투자 기회가 부족해지자 유휴 화폐 자본이 은행으로 몰리며 은행들이 거대해졌다.
과잉 축적과 자본의 집중은 대규모 자본 수출로 이어졌다. 카르텔들은 핵심 원자재 공급원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해 해외로 진출했다. 자신의 생산 체계에 다른 자본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서 자신의 통제권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중심부에서 투자 기회의 부족은 화폐 자본의 수출로 이어졌다. 특히 은행들은 돈을 해외에, 흔히 외국 정부에 빌려 줬다.
이렇게 체제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향하는 자본 수출이 강화되자, 20세기 초에는 거의 전 세계가 식민 본국 자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됐다. 거대 카르텔들이 시장과 원료 공급원들을 나눠 가졌다. 대출 시장과 금융 보증 시장도 그와 비슷하게 주요 은행들이 나눠 가졌다.
이런 경제적 분할과 나란히 정치적 분할도 일어났다. 식민지화는 한 줌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전 세계를 대부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 국가의 정부들도 카르텔들처럼 서로 동맹을 맺고 깨고 다시 맺으며 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책략을 부렸다.
이런 분할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적으로 생겨났기 때문에, [19세기에서 20세기로] 세기의 전환기에는 주요 강대국들의 상대적인 경제력 크기에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가장 먼저 발전한 영국은 자기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세계를 통제했다. 세계가 분할돼 갈수록, 후발 주자들이 자신의 경제적 힘에 걸맞게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원료 공급처, 시장, 식민지를 획득하며 영향력을 획득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독일의 식민지는 지나치게 작았다. 영국이 차지한 식민지에 견주면, 면적은 겨우 10분의 1, 인구수는 겨우 20분의 1이었다. 결국 세계 분할이 일단락됐다.
이 시점 이후에도 세계적 힘의 균형은 변화했고, 재분할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주요 시장 중에 무주공산으로 남은 곳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카르텔이 시장을 추가로 획득하고자 한다면 경쟁자의 것을 빼앗아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국가가 식민 제국을 확장하고자 한다면 경쟁국의 식민지를 줄여야 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이뤄진 애초의 영토 분할이 그들 사이의 상대적인 힘(이 힘은 끊임없이 변화한다)에 비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분할의 압력은 피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레닌은 거대 카르텔 내부의 합의와 카르텔들 사이의 협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어떤 카르텔이든, 또는 한 카르텔 내의 특정 기업이든 성장해서 힘이 더 커지면 자신의 시장 점유율을 늘리겠다고 할 것이다. 다른 카르텔이나 기업은 자기 몫이 줄어드는 재분할에 저항할 것이다. 긴장이 매우 커지면, 그들 사이의 협정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경쟁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상당히 강조한 생산 조절도 카르텔이 존재하기 전보다 더 심한 난장판과 불안정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자본주의 정부들이 [자국 상품] 가격을 인하하고, 원자재 공급을 제한하고, 국제 무역을 규제하며 전면적인 경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공황은 더 심해질 것이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자신이 거느린 제국의 크기가 자신의 경제력보다 작다고 여기는 나라들은 식민지 소유에 대한 국제적 합의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경제 전쟁은 군사적 충돌을 수반할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식민지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관세뿐 아니라 탱크도 동원할 것이다. 레닌은 1914~1918년의 전쟁을 새로운 형태의 자본가들 간 충돌을 보여 준 첫 사례로 여겼다.
이처럼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레닌의 분석은 베른슈타인의 것과 180도 달랐다. 앞으로는 정체, 공황,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이 더한층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됐고 말 그대로 빈사 상태에 놓여 죽음을 앞두고 있다. 사회주의를 위한 객관적 조건들이 무르익었다.
레닌의 분석은 여전히 논쟁의 원천이다. 레닌의 분석은 분명히 약점이 있다. 이론적으로 보면, 레닌의 분석은 많은 부분 힐퍼딩이나 부하린의 연구에 기반했는데 그들의 분석보다 엉성하다. 과잉 축적에 대한 레닌의 이론은 좋게 말해도 모호하다. 레닌은 독일 상황에 주목했는데, 은행 자본과 산업 자본의 융합 수준을 크게 과장했다.
그러나 레닌의 분석은 강점도 있다. 마르크스 이후 가장 종합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 단계를 전반적으로 설명했다. 레닌의 분석은 곳곳에 약점이 있긴 하지만, 베른슈타인과는 달리 현실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 발전의 근본 경향들에 대한 분석에 기반한다. 세계를 재분할하기 위한 자본가들 간 쟁투에 대한 레닌의 분석은 마르크스주의 운동 내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레닌의 분석은 20세기 전반부에 나타날 사태 전개를 훌륭하게 예측한다. 이 시기는 몰락과 쇠퇴의 시기였다. 제1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잠시 호황이 있었지만, 이내 자본주의가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심각한 불황이 뒤따랐다. 1920~1921년 산업 생산이 13퍼센트 감소했다. 8년의 불안정한 시기를 보낸 뒤에는 이 수치도 별것 아니게 돼 버렸다. 1930년대 대불황이 시작된 것이다. 1929~1932년에 산업 산출량이 35퍼센트 줄었고 실업자가 주요 자본주의 나라 네 곳에서만 30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치솟았다. 주요 자본주의 나라들이 모두 뛰어든 재무장과 6년간의 전면전을 거치고 나서야 완전 고용을 이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경제적 진보는 없었다. 생산력은 정체했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베른슈타인의 정치적 입장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가 비판한 초기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입장과 닮았다. 예를 들어 베른슈타인은 협동조합 상점들이 진보적 구실을 할 것이라고 봤는데, 실험적 대안 마을을 세우려 한 공상적 계획이 떠오른다. 사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견해가 프루동과 마르크스 둘 다를 계승하는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다. 구체적인 공통 지점 이면에는 더 일반적이고 광범한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맺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를 사물들이 맺는 영원하고 자연적인 관계로 혼동한다는 것이다. 즉, 상품 물신성으로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이전의 많은 사회주의자들처럼 베른슈타인은 역사 발전의 특정한 단계에 고유한 제도들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이상으로 여겼다. 그는 사적 소유를 그렇게 봤다. 그래서 그는 무상몰수 정책을 “합법의 탈을 쓴 강도짓”, “완전히 잘못된 일”이라며 몸서리를 쳤다.
이런 전반적인 혼동을 보여 주는 특별히 중요한 사례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분석이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맥락 속에서 보지 않고, 즉 특정 생산양식에 기반해 존재하고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성장하며 그 발전 단계의 한계 안에 있는 특수한 통치 형태로 보지 않고, 궁극적 이상이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만병통치약으로 여겼다.
베른슈타인의 주장인즉, 봉건 제도들은 “경직”돼 있었으므로 폭력으로 전복했어야 하는 반면 “현대 사회”의 제도들은 “유연”하므로 파괴하지 말고 더 발전시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보통선거권은 사회주의 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의 한 부분일 뿐이지만, “자석이 흩어져 있는 철조각을 끌어당기듯이 그 과정의 다른 부분들을 제때 끌어당기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말한, 베른슈타인과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첫 번째 일반적 유사성은 두 번째 유사성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즉, 사회주의는 기존 시스템을 점진적으로 개혁해 나가며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이다. 프루동과 베른슈타인 둘 다 받아들이는 이 믿음은 개혁주의의 결정적 특징이다.
베른슈타인의 사상은 프루동 사상과 이렇게 비슷한 점이 있었지만 몇몇 중요한 면에서 차이점도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프루동과는 달리 자본주의를 단순상품생산과 혼동하지는 않았다.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개혁들은 장인이 아니라 노동자와 관련 있는 것들이었다.
둘째,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분명한 단절이 있다고 보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프루동도 마찬가지였다. 프루동은 자본주의가 불평등하고 강압적인 관계를 필연적으로 수반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려면 자본주의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는 사회주의를 자유와 평등을 보편적으로 누리는 사회로 정의했고, 궁극적 목표와 그것을 이룰 수단인 여러 부분적 개혁들을 구분했다.
반면 베른슈타인은 그런 궁극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견해에 격렬히 반대했다. 다음의 말이 그의 입장을 가장 잘 표현해 준다. “나는 궁극의 존재도, 사회주의라는 궁극의 목표도 결코 믿을 수 없다. … 두루뭉술하게 사회주의라는 궁극 목표라고 부르는 것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다. 운동이 전부다.” 이처럼, 프루동과 마르크스에게 개혁은 [최종] 목적을 이룰 수단인 반면 베른슈타인에게 개혁은 모든 것이었다. 목적이란 없었고, 사회주의란 개혁 자체이자 개혁을 위해 싸우는 운동일 뿐이었다.
베른슈타인의 정치는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분석에서 도출되는 논리적 결과였다. 그는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무한히 발전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공황이라는] 교란은 점점 줄어들 것이라고 봤다. 그 덕분에 민주적 개혁이 계속 확대될 수 있고, 자본주의 초기에 발전하는 경향이 있던 자유주의적 상부구조가 한없이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베른슈타인은 이 과정이 사회주의라고 봤다.
베른슈타인이 독일사회민주당SPD의 당원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당시 다른 어떤 노동자 정당보다 큰 지지를 받았다. 독일사회민주당은 1877년에 50만 표를 득표했는데, 1878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제정돼 불법화됐다. 이런 시련에도 독일사회민주당에 대한 지지는 늘어났고, 1890년 사회주의자탄압법이 폐지된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는 전체 투표의 4분의 1이 넘는 175만 표를 얻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국제 노동운동의 모범 정당으로 여겨졌다.
베른슈타인은 이런 성공을 자랑스러워했고 이 성공이 지속되기를 원했다. 그는 독일사회민주당이 참여하는 일상적 개혁 투쟁이 성공의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가 보기에, 이 과정의 한계를 말하는 것과 궁극적으로 체제를 전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공을 방해할 뿐이었다. 독일사회민주당은 그런 “낡아 빠진 어법”을 버리고 “현실 그대로 즉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인 개혁 정당으로 보이게끔 결정해야 한다.”
베른슈타인에 대응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의 정치 전략을 비판하고 그것이 왜 그때 그곳에서 생겨났는지 설명하려 했다. 동시에 대안적 관점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이 시기에 벌어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치 전략 논쟁은 [앞에서 다룬] 경제 분석 논쟁과 마찬가지로 그 어느 때의 것보다 유익했다. 그 논쟁을 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고 충분히 설명하는 것도 이 책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이 절의 나머지에서는 당시에 제기된 견해 중 가장 영향력이 큰 세 가지에 집중한다. 이를 통해 그 논쟁이 포괄하는 쟁점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베른슈타인과 그 지지자들의 견해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견해 사이에 차이가 얼마나 큰지 드러내고자 한다.
룩셈부르크는 이제 선전뿐 아니라 실천에서도 개혁을 위한 투쟁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는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는 자신을 전복할 힘이 있는 노동계급을 창출했다. 혁명이 의제에 올랐다.
게다가 낡은 견해는 한계에 도달했다. 자본주의 초기에 자본 축적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은 자연 경제의 흔적이라는 외부적인 것이었다. 자본은 사회의 모든 영역들을 시장의 지배에 종속시키면서 그 장애물들을 깨부쉈다.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 교환이라는 원리가 새로운 복음이 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됐다.
그러나 이제 자본이 직면한 주된 장애물은 체제 내적인 것이다. 그것은 체제가 스스로 만들어 낸 것, 즉 이전 축적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더는 상품 교환의 지배를 확립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 규칙에 따라 게임을 진행한 결과였다.
자본 축적은 카르텔, 식민지, 공황을 초래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을 심화시켰다. 경쟁자들과 견줘 자신의 비교우위를 유지하거나 향상시키려는 각국 자본가 계급은 식민지를 억누르고 지키며 경쟁자들의 식민지를 빼앗을 수 있는 군사 기구를 갖춘 중앙집중적인 국가를 점점 더 원했다.
주된 적대 계급도 바뀌었다. 봉건 귀족은 오래 전에 패배했다. 이제 자본은 스스로 만들어 낸 프롤레타리아트와 싸워야 했다. 적은 내부에 있었고 개혁을 자양분 삼아 더 강력해졌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지는 귀족에 맞선 투쟁 과정에서 도입했던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많은 부분 폐지할 필요가 있었다고 룩셈부르크는 주장했다. 자본가들 간 경쟁과 계급투쟁이 심화되며, 자본가 계급이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에 기반한 법률적·정치적 시스템을 제공할 여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노동 과정의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관계가 삶의 다른 영역에도 미치게 해야 했다. 그리하여 과잉 축적과 독점은 처음부터 반동과 폭력을 불러왔다. 이런 근본 경향은 이제 부르주아에 의한 전체주의적 지배 방식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더 많은 개혁을 얻어 내고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은 여전히 옳지만, 그런 투쟁 자체로는 또는 그런 투쟁만으로는 미래가 없다. 이전에 성취한 많은 것들이 자본의 필요와 양립할 수 없게 됐고, 체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는 수단을 통해서만 과거의 성과물들을 지킬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분석은 본질적으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 즉 비교적 발전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도들과 강력한 노동계급이 존재하는 곳에 적용된다. 그러면 체제의 주변부인 후진국들은 어떨까? 그 국가들은 그저 한 단계 뒤에 있는 것일까? 사회주의가 무르익으려면 먼저 자본주의가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시기를 거쳐야만 하는 것일까?
트로츠키는 그런 발전은 필요하지도 가능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어떤 생산양식이 진보적 단계인가 진보적이지 않은 단계인가 하는 개념은 세계적 규모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체제의 주변부에서 발견되는 후진성은 서유럽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이전에 존재한 후진성과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주변부의 후진성은 자본주의 발전이 결핍된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의 특정한 패턴이 낳은 결과였다.
자본주의는 각국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불균등 결합 발전이라는 패턴에 따라 발전했다. 선진국들은 후진국들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통합시켰는데, 그 주된 방식은 후진국들을 원료와 농업 생산물의 공급처로서 삼은 것이었다. 따라서 주변부의 발전은 식민 본국 자본들의 발전과 떼려야 뗄 수 없게 얽히게 됐지만, 그 발전 경로가 주로 선진국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이 때문에 후진국에서는 식민 본국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에서 나타난 특징인 민주적 개혁을 수행할 수 있는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등장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주변부는 점진적 과정을 경험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아무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체제의 중심부에서 발전한 최신식 현대 산업의 사례들이 몇몇 부문으로 수입되면서 규모는 작더라도 매우 선진적인 노동계급이 생겨났다.
주변부의 부르주아지의 취약성은 그들이 선진국 부르주아지와는 달리 그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노동계급이 자기 규모보다 큰 구실을 맡을 수 있게 했다. 주변부에서는, 다른 [선진국]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과제의 많은 일이 사회주의 이행의 과제와 결합돼서 노동계급이 이끄는 하나의 혁명 과정으로 통합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주장이었다. 그는 이런 대담한 전망을 연속혁명이라 불렀다.
레닌은 왜 베른슈타인 사상이 출현했고 노동운동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왜 그때 독일에서 출현했는지는 1890년대 후반 독일의 경제적·정치적 맥락이 많은 부분 설명해 준다. 그에 앞선 몇 년 동안 독일 경제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는 점, 카르텔이 성장했다는 점, 독일사회민주당이 성공을 거뒀다는 점의 중요성은 앞에서 얘기했다.
그러나 레닌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제1차세계대전 와중에 《제국주의론》을 썼다. 상대적 안정성은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자본주의 국가들 간 전쟁으로 바뀌었다. 궁핍, 징병, 노동조합 권리 억압이 당시의 질서였고, 진보적 개혁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베른슈타인의 사상은 여전히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역사유물론에 따르면, 정치철학과 정당은 법 체계와 가족의 형태만큼이나 특정 사회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생산양식이라는 토대 위에서 발전하고, 계급들의 이익이나 각 계급 내 분파들의 이익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적 사회주의는 장인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레닌은 베른슈타인의 사상이 프롤레타리아트 중 비교적 특권을 누리는 부문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고, 주로 그들에게서 지지를 이끌어 낸다고 주장했다.
레닌에 따르면, 카르텔 및 자본주의 국가들의 자본 수출과 세계 시장 분할에 따라 중심부 자본은 본국 노동자들에게서 잉여가치를 뽑아 내는 것 말고도 식민지에서도 잉여가치를 뽑아 낼 수 있게 됐다. 그의 표현을 사용하면, 식민 본국의 자본은 초과 이윤을 취득했다. 초과 이윤의 일부가 본국 노동자 중 일부에게 고임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됐고, 그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체제를 묵인하게 됐다(레닌은 이를 뇌물이라고 불렀다).
그런 노동자 계층(레닌은 엥겔스의 말을 따라 노동 귀족이라고 불렀다)은 현상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었다. 노동 귀족은 세계적 착취 체제에서 이익을 봤다. 이 집단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킬 개혁은 찬성하겠지만, 자본주의 체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정책은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레닌의 이런 분석은 상당한 논쟁점이다. 역사 연구에서 발견된 증거들은 레닌에게 불리하다. 그래도 베른슈타인 정치의 두 가지 점, 즉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분석 문제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물신숭배 문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면들을 설명하는 데서는 장점이 분명히 있다. 그중 하나는 베른슈타인이 기본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개혁 몇몇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나 실업자가 되면 자동으로 국가의 [복지] 혜택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무료 법률 지원 요구도 반대했다. 그의 정치가 노동자 중에서 비교적 특혜를 누리고 처지가 안정된 부문의 이해관계만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이런 태도가 설명된다.
베른슈타인의 정치에서 특별히 반동적인 면은 노동자 정당들이 자국 자본주의 국가의 이익을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가 투표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자기 나라의 공동 재산에 대한 지분을 갖게 되는 셈이라고 주장하며 자기 입장을 옹호했다. 그래서 그는 상비군 폐지를 반대했고, 심지어는 특정 조건에서는 식민지 확보도 지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런 태도도 그가 노동자 중 특혜를 누리는 부문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설명할 수 있다. 나머지 전체 노동계급과 달리 이 특권층의 처지는 자본이 계속해서 외국에서 초과 이윤을 취득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따라서 그 집단에게는 “자국” 부르주아지의 국제적 비교우위가 중요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사회민주당은 바로 이런 베른슈타인의 입장대로 행동했다.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 사이의 경쟁이 군사적 충돌로 폭발하자, 독일 의회에서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쟁 자금 마련 방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레닌과 정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행동은 전체 노동계급의 이익이 특정 부문의 이익에 우선한다는 근본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민주당은 전쟁 자금 마련 방안에 찬성 투표를 함으로써, 다른 나라 자본가와 노동자에 맞서 독일 자본가와 동맹한 것이었다. 사실상 독일 노동자들이 프랑스나 영국의 노동자들보다는 독일 자본가들과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레닌과 그의 지지자들은 이 쟁점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과 결별했다. 충분한 세력이 모이자 그들은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하고 전 세계 노동자 운동의 혁명적 세력들을 조율하고 지도하고자 했다. 이런 정책적·조직적 차이는 용어의 변화를 요구했다. 그전까지는 노동운동 전체의 이념은 자타 공인 사회민주주의였다. 이제 제3인터내셔널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공산주의자라고 불렀고 사회민주주의는 개혁주의를 가리키게 됐다.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은 이후 전개될 계급투쟁을 내다보는 관점도 포함하고 있었다. 생산력을 발전시킬 능력을 잃은 자본주의는 더 심한 정체와 공황과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이윤을 감소시키고 노동 귀족의 존재 조건을 잠식하고, 자본가들이 점점 더 강압적인 지배 방식을 채택하도록 내몰 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의지하던 토대가 허물어질 것이다. 노동계급은 사회민주주의에 보내던 지지를 거두고 제3인터내셔널로 설득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고 세계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런 예상이 옳았음은 이후 20여 년 동안 벌어진 실제 사건들을 통해 대체로 확인됐다. 그 시기는 진정으로 침체, 갈등, 쇠퇴의 시기였다. 부르주아지는 점점 더 야만적인 통치 방식들을 사용해야 했다. 많은 나라에서 파시즘이 자유주의적 형태의 정부를 대체했다. 노동계급의 많은 부문들이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입장을 받아들이게 됐다. 베른슈타인을 전폭 지지했고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오토 바우어는 분열의 시기인 1936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시즘의 경험은 개혁주의적 사회주의의 환상, 즉 노동계급이 혁명적 도약 없이도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형식들에 사회주의적 내용물을 채울 수 있고 자본주의를 사회주의적 질서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환상을 파괴한다.
위의 예측 중에서 입증되지 않은 한 가지는 자본주의가 혁명적으로 전복된다는 것이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이 일어나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국가권력을 둘러싼 중대한 투쟁이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사회주의 체제가 건설되지는 않았다. 이 책에서는 다 다룰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제3인터내셔널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는 데로 이끌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살아남았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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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rrison, John 1978,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s: A Critique of Reformism, Pluto Press 중 6장 ‘Rotten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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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Marx, K. and Engels F. 1967, The communist Manifesto, London, Penguin.
Sweezy, P. 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 London: Monthly Review Press 19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