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
2부 자본주의와 생산력: 사회민주주의 비판
5장 초기 자본주의 *
이번 장은 자본주의의 초기 국면을 다룬다. 1절은 자본주의의 등장이 어떤 점에서 역사적으로 진보적이었는지를 살펴본다. 2절은 이런 분석의 몇 가지 정치적 함의를 이끌어낸다.
1. 자본주의의 진보적 구실
사람들은 대부분 초기 자본주의라고 하면 아동 노동, 어둡고 고통스러운 공장, 산업혁명이 낳은 여러 공포 등을 떠올릴 것이다. 이런 것들에서 무슨 진보가 있었다는 걸까?
역사의 진보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통제력을 발전시킨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 사람들이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자연을 변형할 수 있는 정도이다. 둘째, 사람들이 인간의 역량을 더 한층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서로 관계 맺을 수 있는 정도이다. 역사유물론의 범주에 따르면, 앞엣것은 생산력의 발전과 관련 있고, 뒤엣것은 특정 사회 내 사회관계와 관련 있다.
환경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 증대에서 이 두 측면은 모두 매우 중요하지만, 마르크스는 생산력의 발전 수준을 더 근본적인 것으로 봤다. 마르크스의 역사 이론은, 생산력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해당 사회에서 생산이 조직되는 사회관계에 부딪혀 그 발전이 저해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이 낳는 긴장은 사회혁명, 즉 역사의 위대한 도약이 일어날 조건들을 창출한다.
어떤 발전 단계에 있는 사회가 진보하는지 아니면 퇴보하는지를 평가하려면 그 사회를 역사적 맥락 속에 놓고 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람들이 자연과 자기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100점 만점짜리 이상 세계의 청사진을 그려 놓고 그 기준으로 어느 사회에 점수를 매기는 것은 분명 터무니없다. 한 사회를 역사적 맥락에 놓고 평가하면 이전 사회보다 전진한 점이 있을 테고, 이후 사회가 그 전진을 더 진척시킬 가능성을 창출한 점도 있을 것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두 측면 모두에서, 즉 이전 사회와 견줘서도 진보적이고 이후 사회를 위해서도 진보적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떠올리는 중세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 곤경에 빠져 남성의 도움을 기다리는 여성 같은 것들 말이다. 최근에 기사도 정신은 한풀 꺾이고 방탕한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그런 관점의 변화는 역사적 정확성을 위해 새로 탐색해서 발견한 것이라기보다는 검열의 완화 덕이 더 크긴 하지만 말이다. [당시] 현실은 에롤 플린[〈로빈 후드〉 등을 연기한 호주 출신 배우 ─ 번역자]이나 파솔리니[이탈리아 영화 감독 ─ 번역자]가 묘사한 것보다는 덜 흥미진진했다.
봉건제는 인류 역사의 거대한 첫 번째 단계, 즉 자연 경제의 시대 중에서는 가장 발전한 시기였다. 신석기 혁명 이후로는 생산력 면에서 진정 중요한 발전이 없었다. 즉, 사람들은 대부분 먹을거리를 기르고, 땔감을 모으고, 자신과 자녀들이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라도 온힘을 다해야 했다. 따라서 생산은 여전히 농업 중심이었다.
중심적인 사회관계는 농노와 영주의 관계였다. 농노는 영주에게서 땅뙈기를 얻어 작물을 기르고 가축을 먹이고 공유지에서 땔감을 모으는 대가로 1년 중 대부분을 영주의 땅에서 일했다. 영주는 농경 사회의 핵심 생산 요소인 토지를 지배했기 때문에, 농노에게 잉여노동을 하도록 강제하고 그 노동의 생산물을 소유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착취하는 계급이었다.
땅과 보호를 받는 대가로 노동을 제공한다는 원리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봉건 사회의 모든 층위에서 작동했다. 영주는 농노가 일하는 땅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도 노동을 제공한 대가로 더 높은 영주에게서 땅을 하사받은 것이다. 더 높은 영주는 자기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누군가에게서 땅을 하사받았다. 이렇게 더 높은 계층으로 이어진다.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군주와 교황이 있었다.
그러나 영주와 농노의 관계, 영주와 그 위 단계 지배자의 관계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달랐다. 농노는 자기 땅에서 노동하는 것을 보장받기 위해 영주를 위해 일했다. 반면 영주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영주를 직접 찾아가 그를 위해 노동하지는 않았다. 자기 휘하의 농노들에게 고된 노동을 시켜서 잉여 노동을 차지하고, 그중 일부를 군인이나 하인의 형태로 바꿔 더 높은 영주에게 바쳤다. 영주와 농노의 관계는 잉여노동을 추출하는 것과 관련 있는 반면, 영주들 사이의 관계는 착취 계급 구성원들 사이에서 잉여를 분배하는 것과 관련 있었다.
봉건 사회에서 권력과 부는 토지 소유를 근거로 했다. 토지를 지배하면 노동도 지시했다. 일을 하는 사람인 농노는 그저 땅에 딸린 부속물이었다. 토지 주인이 바뀌면 거기서 일하는 농노의 주인도 바뀌었다.
자본주의는 두 가지 면에서 봉건제보다는 큰 진보를 뜻했다. 첫째,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땅에 묶어 놓던 탯줄을 끊었다. 자본주의는 전체 인구 중 비교적 적은 수가 모든 사람을 먹이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생산력을 발전시켰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농사일에서 벗어나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온갖 종류의 물건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예 소유주와 봉건 지주에게 귀속돼 있던 것을 시장에 대한 비인격적 종속으로 대체해, 인격적 종속 관계를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 자본주의적 개인주의가 여러 한계가 있기는 해도,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 의회민주주의, 법 앞의 평등, 개인의 경제적 합리성 등 앞[4장]에서 설명한 발전들 덕분에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통제할 능력이 크게 전진했다.
자본주의의 어깨 너머로 뒤돌아보면 이런 발전들이 봉건제에 견줘 진보인 것은 분명하므로, 더 얘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진보적 구실에서 다른 측면은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어떤 점에서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 놓인 필수적인 다리인 걸까?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다룬 부분[3장]에서 말했듯,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에게서 잉여가치를 뽑아내 그것을 기존 자본에 추가하는 ‘축적’을 할 수밖에 없다. 가치 법칙이 가하는 압박 때문에 자본가들은 임금을 낮게 유지하고 생산의 규모를 키우고 더 효율적인 기술을 도입해 비용을 최대한 줄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못한 자본가는 파산할 것이다. 자본가들도 상품을 사고파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장의 비인격적 지배를 받는다. 생산 기술을 확장하고 향상시켜야 한다는 압력을 끊임없이 받는다. 살아남으려면 생산력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애써야 한다.
모든 경제 체제가 이런 종류의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 상품 생산 이전에는 대체로 이런 압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봉건 영주는 생산력을 발전시킬 이유가 거의 없었다. 잉여가 생긴다 해도 자기 지위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병사를 모집하고 성 주위의 해자를 더 깊이 파는 데에나 쓰려 했을 것이다.
사회주의에서는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할 경제적 압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일할지, 지금 얼마나 소비할지, 투자를 위해서는 얼마나 지출할지는 집단적이고 민주적으로 결정할 것이다. 사회주의에서 이런 결정은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결정일 것이다. 즉, 필수적인 일들이 시장의 힘의 작동을 통해 각 개인에게 내리꽂히는 자본주의와 다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력이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미래에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정 기간 동안은 일부 재화와 서비스를 포기하기로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즉, 생산력을 발전시키겠다는 결정을 하더라도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인적 손실을 충분히 고려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초기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진보적 구실을 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중요하다. 경쟁은 개별 자본가들이 각자 고용한 노동자들의 생산 능력을 최대한 빠르고 효과적으로 발전시키도록 압박한다. 경쟁은 자본가가 인적 손실을 고려하지 않고 행동하도록 압력을 가한다. 그 결과는 아주 추악하고 끔찍하지만, 인류의 미래를 위해 창출한 잠재적 성취는 막대하다.
자본주의는 한동안 생산력을 가능한 한 최대치로 발전시켰고, 이를 통해 자연에 대한 인류의 통제력은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섰다. 생산력이 이만큼 발전하기 전에 벌어진,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 수준이 매우 낮은데 생산과 투자를 민주적이고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더한층의 발전을 옥죌 뿐이다. 생활수준이 매우 낮은 사람들이 미래를 위한 생산 잠재력을 발전시키기 위해 일은 열심히 하고 소비는 거의 하지 않겠다고 결정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다. 자본주의는 다른 선택지를 죄다 없애 버림으로써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고 적게 소비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킨 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역사가 사회주의에 물려준 가능성과 제약을 가능한 선에서 미리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개인이 자신의 유년기를 없는 셈 칠 수 없듯이 사회도 과거를 무시할 수 없다. 사회가 이전의 역사를 어느 정도까지는 넘어설 수 있고 개인도 자신의 어린 시절을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사회나 개인이 주어진 역사적 조건에서 최대한 발전하려면 역사가 남긴 유산을 이해하는 것이 사활적이다.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벽돌을 제공한 역사적 과정을 무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선한 의도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공상주의로 후퇴하는 것이다.
둘째, 어떻게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지 알려면 자본주의가 생산력을 발전시킨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에서 이룩된 발전 덕분에 사회주의가 가능해진다고 원론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본주의는 실제로 전복돼야 하고 사회주의가 건설돼야 한다. 자본주의의 발전 자체가 어떻게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사회주의를 건설할 토대를 놓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그렇지 않은 채로 사회주의자가 되겠다는 것은 명왕성에서 살고 싶다는 것만큼이나 터무니없는 일이다.
非자본주의 사회들은 파괴되거나 자본의 필요에 종속됐다.
사회주의의 실현 가능성 및 제약과 관련해, 자본주의에서 이룩된 생산력 발전이 남긴 유산 하나는 국제 분업이다. 자본주의는 영국에서 처음 발전한 이후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전 세계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앞길에 있는 것을 모두 파괴하거나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거나 일그러뜨리며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비그 원동력은 경쟁이었다. 가치 법칙의 무자비한 압력은 살아남으려면 가능한 한 많은 잉여가치를 차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라고 개별 자본가들을 몰아붙였고, 여기에는 지리적 한계가 없었다. 자본은 값싼 재료와 시장을 향한 끝없는 욕망을 드러내며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새로운 시장은 아직 경쟁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상품을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다.) 더 효율적인 자본가들이 덜 효율적인 자본가를 밀어내는 것처럼 자본주의는 덜 효율적인 생산양식을 모두 밀어냈다.
·철도·항구 등의 건설을 조직해 착취를 도왔다. 자국 자본을 위해 특정 지역을 지배하게 된 국민국가는 흔히 공식적인 정치적 통치권을 행사하며 자신의 지위를 굳혔다. 이것이 식민화 과정이었다.
자본이 발전한 중심부 밖으로 진출할 때는 국가가 뒤따랐다. 국가는 원주민을 진압하고 다른 나라의 경쟁자에 맞서 자국 자본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제공했다. 국가는 자본을 위해 보디가드처럼 활동했을 뿐 아니라 시설도 제공했다. 국가는 도로생산력 발전이 국제 분업을 낳았다는 사실이 주는 중요한 시사점 하나는 사회주의가 국제 분업에 근거해 건설돼야 한다는 것이다. [생산의 — 번역자] 특화는 사용가치의 양과 종류 면에서 어마어마하게 유익하며, 그 덕에 인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됐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결과, 오늘날에는 한 도시의 노동자들이 십여 개 나라에서 들여온 재료들을 가지고 상품을 만들어 전 세계에 판매한다. 오늘날 일국적 자급자족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는 시도는 모두 초기 자본주의 시기에 장인 생산으로 돌아가려고 시도했던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그런 시도는 대안 마을을 세우려 한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계획과 꼭 닮아 있다. 자본주의가 한 세기 넘게 더 발전해 철저히 세계화된 세계에서, 하나의 국민국가는 1840년대의 한 마을과 비슷하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에 주목하는 시도는 한 마을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이상향 ─ 번역자]을 건설하려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시도와 마찬가지로 반동적인 입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계급투쟁은 국제적이다. 예컨대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맞서 싸운 대상은 자국 자본가들(거의 존재하지도 않았다)의 국가권력이 아니라 특히 프랑스와 미국 자본가들의 국가권력이었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에 매진하는 사람들은, 국제적 계급투쟁을 기껏해야 필요한 과업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로 보거나 더 나쁘기로는 그 과업의 수행을 가로막는 일로 본다.(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내 계급투쟁을 그렇게 봤다.)
사회주의의 성격 및 실현 방법과 관련해, 생산력 발전이 뜻하는 두 번째 측면은 자본주의하의 생산력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산자들 자체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에는 여러 측면이 있다. 그중 하나는 노동자들의 필요와 능력의 발전이다.
필요가 형성된 것이 자본주의의 진보적 특징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최근 많은 급진파들은 ‘인위적으로’ 필요를 만들어 내는 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나쁜 특징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사람들은 이윤에 목이 마른 자본이 사고팔 상품의 종류를 비합리적일 정도로 늘리고 광고를 홍수처럼 쏟아내 사람들이 상품을 구매하도록 유혹한다고 본다.
그러나 필요와 열망이 생겨난 것은 초기 자본주의가 보인 상당히 진보적인 특징이었다. 봉건 농노들은 기본적인 의식주의 충족을 넘어서는 바람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을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거의 들을 수도 없었다.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리고 당시의 기준에 따르면 이처럼 극히 제한된 시야조차 합리적인 자기 이익의 관점으로 이해한 결과가 아니다. 신이 그렇게 계획했으니 만사가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일부 집단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려는 – 예컨대 피임 같은 – 것에 반대하는 비이성적 주장을 집요하게 고수하는 것을 보면, 봉건 농노의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갑자기 20세기 후반으로 데려다 놓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마르크스는 언젠가 매우 힘주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자본주의의 위대한 장점 중 하나는 ‘시골 생활의 어리석음’을 없앴다는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은 클린턴 이스트우드의 영화[서부극 ─ 번역자]를 좋아하는 것이나 마요르카[스페인의 휴양지 ─ 번역자]에서 휴일을 보내는 것과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일이다.
사람들이 세계적 규모에서 집단적·민주적·합리적으로 사회적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것은 가능하긴 하다.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필요, 열망, 능력을 발전시키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이 뜻하는 두 번째 측면은 사회주의 사회의 작동보다는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것과 관련 있다. 이것은 바로 자본이 자본가들을 몰아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가진 계급을 발전시키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자본 축적은 체제를 확장시키고 자본과 노동자가 더 늘도록 재생산하는 것이다. 따라서 축적이 진척될수록 프롤레타리아는 늘어나는 경향이 있고, 그래서 더 강해진다.
잉여가치의 축적은 개별 자본 단위의 크기를 키우는 경향도 있다. 기업은 이윤을 투자할수록 성장한다. 마르크스는 이 과정을 자본의 집적이라고 불렀다. 이 경향은 다른 요인 때문에 더 강화된다. 경쟁적인 쟁투에서 뒤처지는 기업은 손실을 입고 파산한다. 파산한 기업은 흔히 더 성공적인 경쟁자들에게 인수된다. 이렇게 더 효율적인 자본은 덜 효율적인 자본을 합병해 성장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이를 자본의 집중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자본은 프롤레타리아의 전반적 규모를 키울 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를 점점 커지는 생산 단위들에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계급은 강력한 사회세력으로 뭉치게 된다.
노동자들의 발전에서 살펴볼 마지막 측면은 자본주의가 무산계급,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계급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해관계가 있는 계급을 형성하는 방식이다. 모든 피착취 계급은 그 정의상 현존하는 생산 체제를 폐지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다. 착취로 고통받기 때문에 착취를 끝내는 것이 이득인 것이다. 그러나 피착취 계급이라고 해서 모두 사적 소유를 폐지하는 데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상인 자본이 지배하는 장인 생산 체제에서 개별 생산자들은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그들은 상인 자본을 몰아내는 데는 이해관계가 있지만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에는 이해관계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 수단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자본이 만들어 낸 피착취 계급의 독특한 성격을 이해하려면 축적이 자연 변형 과정에 일으킨 변화를 살펴봐야 한다.
지금까지 생산력 발전에 대한 논의는 경쟁 때문에 자본가들이 생산 기술을 지속적으로 혁신하게 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 한정했다. 그러면서 자유롭고 평등한 상품 교환에 기반한 사회적 유통 관계 때문에 자본이 생산 기술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화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적으로 독특한 구실을 하는 계급으로 발전하는 데서도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공장 내부에서 일어난 관계의 발전을 세 단계로 구별했다. 첫째 단계에서 공장은 장인의 작업장을 확장한 것과 다름없었다. 장인들은 한 건물에 모였지만 이전처럼 각자의 일을 했다.
물론 변화가 얼마간 있었다. 예컨대 생산수단을 절약할 수 있었다. 가끔씩만 사용하는 도구가 있다고 하자. 30명을 고용한 한 공장에는 3∼4개만 있으면 되겠지만, 독립적인 장인의 작업장에는 각각 하나씩 필요할 것이다. 작업 공정을 조직하고 업무를 지시하는 것도 별도의 독립적인 업무로 분리됐다. [장인의 작업장에서는] 선배 장인이 견습생을 지휘하는 위치에 있었고 작업 과정을 조직하는 데 견습생보다 더 많은 구실을 했지만, 이런 일에 드는 시간은 비교적 매우 적었고, 별도 업무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 건물에서 일하게 되자 상황이 바뀌었다. 마르크스가 한 비유를 빌리면, 한두 명의 연주자는 외부인의 지휘 없이도 함께 연주할 수 있지만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필요하다. 문제는 누가 그 일을 할 것인지다. 공장에서는 자본가들이 그 일을 했는데, 그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부 과정은 집단적으로 수행하게 됐다. 예컨대 공장 소유주가 무거운 물체를 옮기고 싶어 한다고 치자. 그는 모든 사람에게 하던 일을 멈추고 거들라고 지시할 것이다. 그런 일에는 개별 장인이 작업장에서 모을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할 때도 있다. 마르크스는 그런 특징에서 이름을 따, 이 단계의 자본주의 노동과정을 협업이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노동자들 간의 관계, 개별 노동자와 작업 도구 간의 관계는 장인 생산 때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노동과정의 본질적인 특징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됐다. 장인은 기술이 있었으므로, 생산수단만 손에 넣으면 다시 독립적인 장인이 될 수 있었다. 자본은 아직 자신만의 독특한 노동과정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둘째 단계는 16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였는데, 마르크스는 이 시기를 매뉴팩처라고 부른다. 협업과 매뉴팩처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하나의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분업이 생겼다는 것이다. 일의 단계들이 나뉘어져 서로 다른 노동자들에게 할당됐다. 말하자면 시계 기술자 40명이 나란히 앉아서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조립하는 사람 3명, 스프링을 붙이는 사람 4명, 톱니바퀴를 고정시키는 사람 2명 등으로 나뉘는 것이다. 공장에서는 여전히 시계가 만들어지지만 혼자서 완제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발전으로, 특정 시간에 특정 수의 노동자들이 생산할 수 있는 생산량이 늘었다. 즉, 노동자들은 전체 생산과정 중에서 특정 업무에 숙련돼 전문화했다. 경험이 쌓일수록 노동자들의 작업 속도는 이전처럼 [한 노동자가] 여러 기술들을 사용할 때보다 빨라졌다. 특정 업무에 특화된 노동자들은 특정 업무에 맞는 더 좋은 도구도 발전시켰다. 노동자들은 더는 이 업무에서 저 업무로 옮겨 다닐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이 도구를 쓰다가 다른 도구를 집어드는 데 쓰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이처럼 매뉴팩처의 발전으로 효율성 면에서 비교적 뚜렷한 이점이 생겼지만, 그뿐이 아니다. 노동과정에 더 미묘하지만 중요한 다른 변화도 생겼다. 노동과정에 어느 정도 규칙적인 노동강도가 도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이 나란히 앉아 각자 셔츠를 완성한다면 일하는 속도도 어느 정도는 각자 알아서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는 옷깃을 누구는 오른팔을 누구는 왼팔을 바느질하는 식이라면 모두가 속도를 비슷하게 맞춰야 한다. 그래야 전체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자본가들이 하는 작업 공정 조직의 구실도 더 중요해졌다. 자본가들은 옛 공정을 어떻게 나누고 각 업무들을 노동자들에게 어떻게 배분할지 결정해야 했다. 앞면, 뒷면, 옷깃, 소매를 이어붙이는 일을 한 명이 하는 게 나을까 다섯 명이 함께하는 게 나을까? 미싱사와 보조원의 비율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자본가들은 이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면서 악보도 써야 했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벗어나 [독립된] 장인이 될 가능성은 점차 사라졌다. 이제는 단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완성품을 생산하는 전체 공정에 필요한 기술도 잃어버렸다.
마르크스는 자본 발전의 셋째 단계를 대공업 단계라고 불렀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이 중대한 변화를 인도했다. 이 단계의 주된 특징은 기계 시스템을 중심으로 생산이 조직된다는 것이다. 기계는 제어된 속도로 서로 조화를 이뤄 작동하도록 설계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작업을 기계의 리듬과 속도에 맞춰야 한다. 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기계의 시중을 드는 존재에 불과하게” 된다.
대공업의 사례로 가장 쉽게 떠오르는 것은 비교적 최근에 도입된 것이다. 컨베이어벨트 시스템을 보자. 예컨대 노동자들은 컨베이어벨트 옆에 서 있고 기계는 30초에 하나씩 병을 내려놓는다고 치자. 노동자들은 병에 뚜껑이 있는지 확인하고, 넘어진 병을 똑바로 세우고, 간간히 기계에 뚜껑을 다시 채워야 한다. 장인 생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런 기본적인 노동 패턴은 컨베이어밸트와 조립 라인의 발명이 아니라 산업혁명으로 생겨난 것이다. 예컨대 19세기에 동력 직조기를 다루는 것도 본질적으로 비슷한 작업이었다.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자본은 자신의 필요에 맞게 노동과정을 조직할 최상의 방법을 습득했다. 과거의 장인 기술에 의존하지 않게 되자 값싼 미숙련 노동자가 여러 업무에 쓰일 수 있었다. 노동자가 아닌 자본이 지배하는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 오케스트라 비유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자본은 이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악보를 쓸 뿐 아니라, 음악가를 기계 조작자로, 즉 교향곡을 연주하는 기계의 버튼을 누를 뿐인 존재로 바꾸는 데에도 성공했다.
자연을 변형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이런 변화는 미래의 사회 발전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첫째, 그런 변화 때문에 장인 생산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따라서 순수한 단순상품생산 체제를 만들겠다는 프루동주의자들의 계획도 완전히 공상적인 것이 됐다. 폭이 1미터도 안 되는 자동차 조립 라인에서 왼쪽 문을 부착하는 능력만 가진 사람이 자신의 사업을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둘째, 개별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 이뤄지는 생산은 점점 더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활동이 됐다. 모든 상품 생산은 간접적으로 사회적이다. 상품 생산은 분업을 근간으로 하는데, 누구도 자급자족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노동에 의존해 자신에게 필요한 여러 사용가치를 얻는다. 모든 장인이 서로 독립적으로 일하는 단순상품생산조차 이런 의미에서는 사회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사회적 생산을 발전시킨다. 축적이 진척될수록, 경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 많이 고용해서 그들이 기계를 작동하게 한다.(그리고 그런 기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복잡해진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기계 체계를 결합시킬 가장 좋은 방법을 결정해야 한다. 시장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지 않는 자본가는 경쟁에서 밀려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장이 자본가들을 대신해 그런 일을 해 주지는 않는다. 공장에서 자본을 사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 무엇일지를 결정하는 것은 가치법칙이 아니라 의식적인 지배다. 현명한 자본가들은 자기 기업 내부에서 계획을 전담하는 작은 부서를 만든다.
개별 자본주의 기업 내에서는 계획이 발전하는데, 이는 경제 전체의 무계획성과 뚜렷이 대비된다. 그런 계획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 시장을 통한 조절이라는 것은 더는 자연스럽거나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된다. 계획은 일상적인 현실의 한 부분이 된다. 계획의 확대를 상상하는 것이 더 쉬워진다. 사회주의 하에서 이뤄질 경제 생활에 대한 의식적인 지도와 조절은 [이렇게] 자본주의 기업의 자궁 안에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비록 지금은 위계적이고 강압적인 형태의 계획이지만 말이다.
자본의 축적, 집적, 집중은 기성 질서를 전복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계급을 만들었다. 노동자들의 필요와 열망, 이를 충족할 수 있는 잠재력의 발전은 사회주의 사회를 운영할 능력이 있는 계급을 창출했다. 대공업의 발전은 오직 사회주의에서만 미래가 보장되는 계급을 만들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발전시켰고, 이제는 절대로 장인 생산으로 돌아갈 수 없다. 생산은 현대 기술을 이용해 대규모로 이뤄져야 하고 의식적으로 조직돼야 한다.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통제만이 착취를 자행하지 않고 이를 이룰 수 있는 길이다.
따라서 초기 자본주의는 많은 측면에서 진보적이었다. 그 덕에 사람들은 그전보다 주위 상황을 통제할 능력이 커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가 매우 중요한 몇몇 역사적 과제를 수행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자본주의를 우회할 길은 없다. 자본주의의 발전을 거슬러 다른 형태의 사회를 건설하려 애썼던 사람들은 잘못된 길로 미끄러졌다.
2. 개혁과 초기 노동자 운동
자본주의 초기부터 공장에 신규 채용된 사람들이 임금 노동에 맞섰다. 저항의 정도는 지역마다 달랐고 투쟁 형태도 다양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도 있었다. 투쟁을 옛 질서로 돌아가려는 시도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몰락한 장인들은 좋았던 옛날의 독립적 지위를 갈망했고, 땅을 잃은 소작농들은 환상을 가지고 자유주의적 봉건제를 갈망했다. 둘 모두 역사적 과정을 반대로 뒤집고, 필름을 되감으려 애썼다.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다양한 입장은 이런 반응들을 반영했다. 그들은 광범하게 일어난 저항과 이상화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잘 다듬어 상당히 체계적인 사회철학으로 만들었고, 그것에 근거해 정치 운동을 건설하려고 애썼다. 이런 관점에 대한 마르크스의 비판은 1장에서 설명했다.
초기 공장 노동자들이 보인 반응은 불가피했다. 공장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고유한 이해관계를 가진 새로운 계급의 일원이라고 여길 수 있을 만큼 자본주의가 충분하게 발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작고 약했다. 그들은 독립적인 존재로 설 만한 힘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프롤레타리아가 자신들을 출신 집단과 계급으로 연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했고, 상황은 바뀌었다. 축적이 진척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로 편입됐다. 매뉴팩처가 발전하고 뒤이어 가장 중요하게는 대공업이 발전하면서 옛 기술은 더는 쓸모없게 됐다. 사람들은 스스로를 모종의 장인으로 여기기보다는 주로 공장 노동자라고 여기게 됐다. 그러자 노동조합이 발전했다. 이렇게 해서 프롤레타리아는 자신만의 분명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진 강력한 계급으로 형성되고 스스로를 위해 싸울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들은 처음에 부르주아지의 목적을 위해 부르주아지에 의해 교육되고 동원됐다. 자본가 계급은 자신의 경제적 힘이 커지자 그에 걸맞는 정치권력을 갖고 싶어 했다. 그들은 봉건 사회의 대표자들에게서 국가 통제력을 빼앗으려고 투쟁했다. 처음에 부르주아지는 군주와 동맹해 옛 질서의 다른 중심 세력들인 귀족과 교회에 맞섰다. 이후 자본가 계급은 옛 동맹 세력에 맞서는 투쟁에서 자신의 창조물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에게 의지하고 지지를 구했다.
옛 질서에 맞선 투쟁에서 지지를 얻고자 하는 부르주아지의 필요와 축적 과정의 내재적인 논리 때문에, 부르주아지는 결국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회적·정치적 세력을 만들어 내게 된다.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는 자신의 기반을 내부로부터 약화시킨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위한 진정한 가능성을 이 과정의 전개에서 찾는다. 대안 마을을 만들려는 운동이나 프루동주의적 개혁을 통해 압력을 넣으려는 운동이 아니라 말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초기 국면 시절 자본주의는 매우 중요하고 진보적인 세력이었다. 부르주아지는 혁명적 계급이었고 옛 질서를 파괴하며 사회주의에 필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사회주의 건설이 당면 의제가 아니었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할 만큼 충분히 발전해 있지 않았다.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상당 기간 “역사의 운동 전체는 부르주아의 손에 집중돼 있었다”.
이 기간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활동해야 했을까? 어떤 강령과 정책을 내놓았어야 할까? 어떤 집단과 조직을 지지하거나 반대해야 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일반적 지침을 제시했다. 주목할 만한 노동자 운동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봉건제의 대표자들에 맞선 싸움에서 부르주아 단체와 정당을 지지했어야 했다. 그러면 옛 질서의 파괴가 앞당겨지고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발전이 촉진될 것이었다.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에게서]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들의 형성을 돕고, 그런 정당들이 존재한다면 그것들을 강화하기 위해 활동했어야 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일차적 임무는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정치적 활동 경험을 쌓으며 역사 과정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도록 교육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에 대한 교육에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사회주의 경향들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무가 개별 전투의 승리보다 우선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동자 정당들이 초기 단계에 있을 때는 부르주아지를 대변하는 정당과 동맹을 맺으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은 말일 경우가 종종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동맹 맺기에는 세 가지 주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이 값진 정치 경험을 할 수 있다. 둘째, 자본주의의 발전과 그에 따른 역사 과정 전체의 발전을 가속할 수 있다. 셋째, 노동자들이 낡은 제도들을 파괴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새로운 제도들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러면 프롤레타리아는 새 제도들이 프롤레타리아에 최대한 이로운 형태로 발전하도록 압력을 넣을 수 있다. 예컨대 절대군주정에 맞서 의회 정부를 세우려 투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선거권을 최대한 넓게 보장하라고 요구하며 싸울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발전의 초기 단계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자를 대변하는 다른 정당들과 별도로 공산주의자들만의 정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정당들을 단결시키기 위해 분투했어야 한다. 그런 단결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다른 세력들과의 차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냈어야 한다. 첫째, 정당 내 특정 세력의 이익이 아니라 계급 전체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다. 계급이 국민국가 부분에서가 아니라 국제적 규모에서 발전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정책과 활동으로 거둘 단기적 이득보다 장기적 효과를 우선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와 관련해 둘째, 다른 노동자들에게 역사 과정의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야 노동자들이 사회주의로 가는 우회로를 찾겠다는 환상을 떨칠 수 있다.
이런 냉철한 전망, 즉 자본주의의 특정하고 필수적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의 전제 조건이라는 평가에 근거한 전망은, 개혁을 위한 투쟁이라는 정책이 지속된다는 뜻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를 도와 생산력의 발전에 남아 있는 봉건적 족쇄를 개혁해 없애고, 그런 개혁이 최대한 급진적이 되도록 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전망과 강령은 개혁주의자들의 그것과 무엇이 다른 걸까?
앞서 얘기했듯 마르크스의 생각은 중요한 측면에서 프루동주의와 달랐다. 프루동주의자들은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의 결정적 차이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유롭고 평등한 교환을 방해하는 것들을 제거하는 개혁을 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로 바꾸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그런 환상이 없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장인 생산이 쇠퇴하면서 노동자 운동은 프루동주의의 영향을 덜 받게 됐고, 그들이 발 딛고 있는 세계와 관련 있는 개혁에 더 신경 쓰게 될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운동은 평등한 독립 생산자들의 사회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게 아니라 자본주의하에서 자신의 몫을 늘릴 수 있는 개혁을 위해 싸우게 됐다. 이에 따라 마르크스 지지자들의 일상적 정책들은 오로지 개혁의 성취에만 관심이 있는 세력들과 점점 더 비슷해졌다.
그럼에도 두 경향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는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개혁은 전적으로 목적 그 자체였지만, 마르크스에게 개혁은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한 수단의 일부였다. 개혁을 위한 투쟁은 전체 전략, 즉 자본주의를 역사 과정의 한 단계로 이해하는 관점에 근거해 마련한 전략의 한 구성 요소였다.
마르크스의 분석은 체제가 발전함에 따라 개혁을 넘어 전진할 가능성과 필요가 커질 것임을 보여 줬다. 자본주의가 세계 체제로서 역사적 유용성을 잃고 진보의 확대를 막는 장애물이 되면서, 자본주의 내 개혁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는 투쟁으로 발전할 것이었다.
이는 일식처럼 미리 정해져 있어서 아무 노력 없이도 성취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과정의 속도는 참가자들의 행위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기 위한 투쟁을 통해 자신의 힘을 키우고 체제의 힘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성공적인 결말은 궁극으로는 생산력의 더한층 발전을 가로막기 시작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달려 있다.
이런 전망에 대한 동의 여부가 마르크스주의자와 개혁주의자 사이의 근본적 차이다. 현대 개혁주의의 기원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국제 노동운동의 유력 인사들이 마르크스의 입장을 거부한 데에 있다. 이는 조직적 분열로까지 나아갔는데, 다음 장의 주제다.
MARX21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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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arrison, John 1978, Marxist Economics for Socialists: A Critique of Reformism, Pluto Press 중 5장 ‘Early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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