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45호를 내며
이번 호에 모두 여섯 편의 글을 실었다.
제국주의, 전쟁,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는 소련 붕괴 이후 서방과 러시아의 제국주의 경쟁이 재등장한 과정을 살펴본다. 여기서 “유라시아의 충돌 지대”는 발칸 반도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옛 소련의 변경 지역을 뜻한다. 저자는 냉전 이후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되찾으려는 러시아와 나토를 통해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서방의 경쟁 과정을 살펴보며, 그 경쟁이 어떻게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어졌는지 설명한다. 특히 저자는 마르크스주의적 제국주의론이 말하는 경제적 경쟁과 지정학적 경쟁의 융합이 이 지역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탁월하게 보여 준다. 이러한 분석은 침공을 먼저 자행한 러시아만이 아니라 이 전쟁을 낳은 강대국 간 경쟁 체제 자체에 맞서는 것이 중요하고, 서방 제국주의의 영향권에 있는 우리에게는 서방에 반대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 준다.
롭 퍼거슨의 ‘중국과 21세기의 제국주의’는 중국의 성장 과정과 미·중 갈등의 성격을 다룬다. 좌파 내에는 중국이 사회주의라거나 적어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와는 뭔가 다른 질서를 대표한다고 보는 관점이 흔하다. 그러나 애드리언 버드는 중국이 미국 주도의 세계 시장 질서에 편입돼 그 일부로서 성장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비록 중국이 미국의 대등한 상대는 아니지만 또 다른 자본주의 강대국으로서 미국과 경쟁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요컨대 미·중 갈등은 제국주의적 갈등이라는 것이다. 한편, 좌파 일각에서는 두 강대국이 경제적 상호 의존 때문에 극단적 대결로 치닫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저자는 양국의 상호 의존과 협력도 근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경쟁에 근거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애드리언 버드의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지난해 주디 콕스가 런던대학교에서 했던 강연을 녹취·번역한 글이다. 제국주의 시대는 끝났다거나 체제가 변해서 제국주의는 더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흔하다. 그러나 그런 주장들은 모두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로부터 반박당했다.
‘주디 콕스는 레닌과 부하린의 분석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제국주의론을 소개한다. 레닌과 부하린은 제국주의를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나 지배계급의 정책으로 환원하지 않고,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에서 비롯한 현상으로 이해했다.
이런 분석의 핵심을 이어받아, 주디 콕스는 제국주의의 시대를 고전적 제국주의, 냉전 당시 초강대국 제국주의, 냉전 이후의 제국주의로 구분하며 오늘날 제국주의의 특징을 다뤘다.
제국주의론은 국가 간 갈등과 전쟁을 세계적 수준의 경제적·정치적 경쟁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게 해 준다. 또한 혁명적 실천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이론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주의 재평가하기’는 던컨 핼러스가 1977년에 쓴 글이다. 이 글은 1929년에 망명한 후 생애 마지막까지 트로츠키가 발전시킨 혁명적 이론과 실천을 다룬다.
‘던컨 핼러스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 초기의 진정한 혁명적 전통을 지키려고 투쟁했음을 강조한다. 같은 시기에 스탈린의 소련과 코민테른이 공산주의 정치의 기초를 완전히 왜곡하고 제거하는 상황에서 이 일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하지만 극도로 불리한 당대의 상황 때문에 트로츠키의 노력에는 선전주의 등 여러 약점이 생겼다. 게다가 이후 트로츠키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여러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에 의해 그 전통 자체의 성격이 변질되기도 했다. 트로츠키 정치의 혁명적 정수를 제대로 지키려면 이런 약점들도 잘 알아야 한다.
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 개혁주의 비판’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존 헤리슨(2007년 작고)이 1975년에 옥스퍼드대학교 근처의 한 퍼브(술집)에서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해리슨은 마르크스가 당시 노동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던 프루동주의와의 논쟁을 중시했고 이 점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인 7장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자본주의를 번역해 싣는다. 이 장에서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 장기 호황 상황에서 성장했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1970년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 등장했던 좌파 개혁주의자들의 이론적 배경이 된 경제적 주장을 소개하고 이를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혁명적 인내심과 타협이 필요한 이유’는 레닌이 쓴 《좌익 공산주의 – 유치증》을 서평한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의 주요 사상가들이 쓴 가장 중요한 책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의 열한 번째 편이다. 임준형은 이 책이 혁명적 사회주의의 전략·전술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점에 대해 살펴보며 오늘날의 의의를 되새긴다.
임준형의 ‘정기 발행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제서야 발행하게 된 것에 대해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지금까지 《마르크스21》의 발행을 기다려 준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다음 호부터는 정기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2023년 6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