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44호를 내며
이번 호에 모두 여덟 편의 글을 실었다.
우크라이나: 제국주의, 전쟁, 좌파’는 롭 퍼거슨이 2014년에 쓴 글로, 제국주의 강대국들의 경쟁에 휘말린 우크라이나의 위기를 면밀하게 분석한다. 당시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 쪽으로 급격히 기우는 것을 우려한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는 친러 분리주의자들과 정부군이 충돌하고 있었다. 우크라이나는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중요한 지정학적 위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전쟁 도발은 우크라이나뿐만 아니라 발트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 일대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퍼거슨은 이런 위기의 뿌리를 분석하며, 이것이 서방과 러시아 모두 우크라이나에서 각자의 대리인을 지원하며 관여해 온 결과임을 보여 준다. 두 세력은 모두 우크라이나인들의 분열을 부추겨 왔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간 충돌에 반대해, 롭 퍼거슨은 “주적은 국내에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미국과 러시아 등 경쟁하는 제국주의와 자국 지배자들 모두에 반대하고, 만국의 노동자를 단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퍼거슨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지배 엘리트들에 의해 조장되는 분열을 넘어 단결의 잠재력을 보여 준 경험도 소개한다.
이 글의 핵심 주장과 분석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대분열 — 사회주의 운동과 제1차세계대전’은 제1차세계대전 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로 드러난 사회주의 운동의 약점과 이를 극복하려 하면서 레닌이 일궈 낸 마르크스주의의 혁신이 무엇인지를 살펴본다. 특히, 노동계급의 의식이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마르크스가 다소 숙명론적으로 보면서 생긴 약점이, 이후 개혁주의가 부상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어떤 재앙적 실천을 낳았는지 살펴본다. 개혁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한 로자 룩셈부르크도 이에 대한 해법을 완전히 제시하지 못했다. 블랙레지는 레닌이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의 방법론적 뿌리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를 철저히 논파하고, 숙명론적이지 않으면서도 주의주의적이지 않은 대안을 제시했는지를 보여 준다.
폴 블랙레지의 ‘이를 통해 블랙레지는 레닌주의가 제2인터내셔널의 마르크스주의를 일관되게 계승한 것일 뿐 딱히 참신할 게 없다거나, 레닌의 비판과 달리 세계 대전에 직면해 좌파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는 주장을 논박한다. 전쟁과 기후 위기, 팬데믹 등 온갖 거대한 위기가 첨예해지고 있는 지금 혁명적 좌파의 구실에 관해 레닌주의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글이다.
중국, 위구르, 좌파’는 중국의 위구르 억압 문제를 다룬다. 흔히 서구 주류 언론과 정치인들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근거로 ‘위구르인 100만 명 수감’설을 주장한다. 사이먼 길버트는 이런 주장을 수용하지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위구르인 억압은 처음부터 중국공산당의 국가 건설 계획에 내재된 문제임을 지적한다.
‘1949년 민족해방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중국공산당은 안보적·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위구르인들이 사는 신장을 지배해 왔다. 중국이 신장을 중국의 일부로 통합하고 개발하는 과정에서 위구르인들은 소외되고 억압당했다.
소련 붕괴, 테러와의 전쟁, 신장 현지의 민족 간 충돌 등이 맞물려 1990년대 중반 이후 위구르인들에 대한 억압이 강화돼 왔다. 시진핑 정부는 모국어를 배울 권리와 종교적 자유를 공격하는 등 동화 정책을 펼치고 있다. 탄압은 매우 광범해서, 중국의 통치를 인정하는 온건한 위구르인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닐 정도다.
길버트는 미국이 중국과의 경쟁에서 위구르 문제를 이용한다고 해서 중국에 억압당하는 위구르인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중국 노동자들은 자국 지배계급의 분열 지배에 맞서 위구르인들의 자결권을 지지해야 하고, 서구의 좌파는 팔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위구르인들의 투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코로나바이러스, 정신적 고통’은 코로나19가 정신 건강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며, 정신 보건 비상 사태에 대한 주류적 접근법(생물의학 모델)이 갖는 문제점과 그것의 대안으로 제시돼 온 트라우마 기반 접근법의 의의와 한계를 살펴본다. 그러면서 퍼거슨은 정신 의학이 어떻게 지배계급의 편견과 그들의 전쟁 노력 등 사회의 지배 질서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왔는지, 그리고 반전 운동이나 평등권 운동 등 저항의 압력에 반응해 왔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집단적 트라우마가 촉발하는 집단적 투쟁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치유적 효과에 관해 살펴본다.
이언 퍼거슨의 ‘과잉인구론을 넘어서기: 인구와 환경에 관한 사회주의적 주장’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과잉인구’ 주장을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한다.
마틴 엠슨과 이언 라펠이 공저한 ‘냉전 시기에 과잉인구론은 "저개발" 국가들이 인구 정책 실패로 고통을 자초했다고 보면서, 자본주의·제국주의·식민주의·신자유주의의 역사를 편리하게 무시하는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했다. 또, 오늘날에는 위험하게도 인종차별적 극우에 의해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1960년대 초부터 환경 운동 안에서도 생태적 파괴와 생물다양성 손실을 우려하며 인구 통제를 옹호하는 주장이 등장해 지금도 진보적 환경 정치에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엠슨과 라펠은 일부 환경주의자들의 인구 증가 우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현대적으로 재탕한 것에 불과하다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멜서스 비판을 소개한다. 다시 말해, 인구 수를 문제 삼는 것은 자본주의의 체계적 실패를 은폐하고 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결국 분노를 자본주의에서 엉뚱한 데로 돌리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엠슨과 라펠은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구가 무한정 늘어도 아무런 부정적인 결과가 없을 것이라는 게 아니라, 혁명적인 변혁을 통해 인간의 필요에 기초해 조직되는 사회를 성취한다면 그에 따라 인구 증감의 동학도 달라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 개혁주의 비판’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존 해리슨(2007년 작고)이 1975년에 옥스퍼드대학교 근처의 한 퍼브(술집)에서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해리슨은 마르크스가 당시 노동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던 프루동주의와의 논쟁을 중시했고 이 점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에는 이 책의 6장 ‘쇠퇴한 자본주의’를 번역해 싣는다. 이 장에서는 자본주의가 공황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며 19세기 말~20세기 초 개혁주의를 주창한 베른슈타인과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논쟁을 다룬다.
‘다만, 해리슨이 이윤율 저하의 원인을 임금 상승으로 인한 이윤 압박으로 설명하는 1절의 뒷부분은 번역하지 않았다. 위기의 원인을 임금에서 찾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왜 자본주의는 경제 위기에 빠지는가? — 크리스 하먼이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경제위기론》(책갈피, 9월 말 출간 예정)에 실린 부록을 참고하시오.
마르크스의 혁명적 국가론을 되살린 고전’은 레닌이 쓴 《국가와 혁명》을 서평한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의 주요 사상가들이 쓴 가장 중요한 책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의 열째 편이다. 이재혁은 레닌이 ‘국가가 계급 대립의 산물이자 계급 지배의 도구’라고 본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을 되살렸다는 것을 살펴보면서, 오늘날 많은 좌파들이 자본주의 국가를 활용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보는 점을 비판한다.
이재혁의 ‘미국 총기 폭력의 정치학’은 미국 사회에서 총기와 총기 사건이 만연하게 된 원인을 살펴본다. 이 글에서 주디 콕스는 이른바 “무기를 소지할 권리”로 언급되는 미국 수정헌법 2조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땅을 침략하고, 흑인 노예제를 수호하려 한 미국 자본주의의 역사에 기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 미국에서 총기 판매는 특히 2000년대 조지 부시 집권 이후에 최근까지 급증했는데, 이 시기에 9·11 공격과 이라크 전쟁 개전으로 이슬람 혐오가 확산됐고, 오바마와 트럼프 시기에는 인종차별과 증오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근본에서는 미국의 엄청난 불평등이 사람들의 고통과 절망을 키워 총기를 소유하려는 욕망을 더욱 키운다는 것이다.
끝으로, 콕스는 총기 단속에만 초점을 두는 미국 민주당이나, 총기 폭력의 핵심 중 하나인 경찰이 총기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 운동 같은 거대한 대중적 운동으로 보편적 무상 의료, 국방 예산 대폭 삭감, 경찰 예산 삭감 같은 광범한 사회 정의 요구가 실현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2022년 9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