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40호를 내며
이번 호에 모두 열한 편의 글을 실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열: 세계적 재앙과 오늘날 극우’는 오늘날 극우의 부상을 국제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위기·혁명·반혁명의 상호작용이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이 현상을 분석한다. 캘리니코스는 양차 세계 대전 사이에 등장했던 고전적 파시즘과 현대 극우(그리고 전간기 상황과 오늘날 상황)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힌 뒤, (미국 극우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에 대한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대자본이 아직까지 극우의 권위주의적 해결책을 선뜻 지지하지 않고 있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자본주의가 다중적 위기를 겪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얼마든지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 개혁주의자들은 극우를 억압할 수 있는 국가의 능력을 강화하고 자유주의적 중도와 동맹을 맺는 전략을 주장하지만, 1930년대 프랑스의 경험은 이 전략으로 파시즘을 물리칠 수 없음을 보여 줬다고 캘리니코스는 강조한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급진·혁명적 좌파는 아래로부터의 반파시즘 운동을 구축해야 하고, 이를 위해 인민전선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주장한 공동전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의‘소련 붕괴와 좌파 —한국 국제사회주의경향의 기원과 형성’은 소련·동유럽 체제 붕괴의 정치적 의미, 당시 국내외 좌파들의 반응과 이후 행보, 국제사회주의경향의 대응, 국가자본주의 이론의 실천적·정치적 함의 등을 흥미진진하게 다룬,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적 기록이다. 최일붕은 소련이 붕괴한 지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분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될 뿐 아니라(경제적 함의), 사회주의는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임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말한다(정치적 함의).
최일붕 노동자연대 운영위원과 한 인터뷰‘국가자본주의론의 역사와 의미’는 국제사회주의경향과 다른 경향(평의회 공산주의, 존슨-포레스트 경향, 샤를 베틀렝, 월터 다움)의 국가자본주의 이론을 비교 검토한다. 이정구는 다른 경향의 국가자본주의론이 지닌 약점을 평가한 뒤, 토니 클리프가 발전시킨 국가자본주의론은 트로츠키가 연속혁명론에서 세계경제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은 방법에 따라 소련을 세계적 국가 체계와 관련지어 설명함으로써 소련의 노동계급이 자본 축적의 동학에 종속돼 있음을 보여 주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정구의‘레닌에서 스탈린으로: 연속인가 불연속인가?’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그리고 역사유물론적 방법을 사용해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오래된 거짓말과 혼란스러운 생각과 대결한다. 마르크스주의 좌파 중에도 이런 연속성 주장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지 못하면서 결국 레닌주의를 기각하고마는 이들이 있는데, 레닌의 국가론과 당 이론은 (좌파) 개혁주의 정부가 개혁을 제공하는 데 거듭 실패하고 있는 오늘날 여전히 중요한 행동지침이 될 수 있다고 김인식은 주장한다.
김인식의‘마오쩌둥주의 제대로 보기’는 1920년대 초부터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중국공산당의 노선과 실천을 고찰한다. 김영익은 혁명적 노동자 정당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1921년 7월 창당)이 노동자 혁명이 패배한 뒤 지식인이 이끄는 농민 게릴라의 정당으로 바뀌고,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마침내 국가 관료가 주도하는 자본주의 지배계급 정당으로 성격이 바뀌는 과정을 살펴보는 한편, 공산당이 위로부터 구축해 온 중국 사회의 성격을 규명한다. 또, 중국 국경 밖 마오주의 조직과 운동의 정치적 약점도 알아본다.
김영익의‘최근 팔레스타인 저항과 중동의 역학 관계’는 최근 이스라엘이 벌인 팔레스타인 공격의 배경에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추진해 온 “유대화” 정책이 있었다고 지적하고, 미국이 시종일관 이스라엘을 편들고 중동 국가 지배자들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분석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자치정부와 하마스의 노선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살펴본다.
박이랑의‘유대인 문제’는 유대계 마르크스주의자 아브람 레온(1918~1944)이 쓴 《유대인 문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을 요령 있게 소개한다. 레온은 나치가 점령한 벨기에에서 트로츠키주의 지하 조직을 이끌면서 이 책을 썼다. 레온은 유대 문화의 존속이 종교, 인종적 특성, 그 밖의 다른 ‘관념적 편견’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유대인이 처음에는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그 뒤 봉건제에서도 계속 수행했던 특정한 경제적 구실과 관련 있다고 주장했다.
앤 로저스의‘사회주의자를 위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개혁주의 비판’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존 해리슨(2007년 작고)이 1975년에 옥스퍼드대학교 근처의 한 퍼브(술집)에서 경제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해리슨은 마르크스가 당시 노동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던 프루동주의와의 논쟁을 중시했고 이 점이 마르크스의 경제학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이번 호에는 이 책의 2장 단순상품생산을 번역해 싣는다. 저자는 프루동주의자들이 단순상품생산과 자본주의를 혼동하는 바람에 많은 오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
‘마르크스주의와 장애’는 장애disability와 손상impairment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명료히 하는 한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장애가 탄생하게 됐는지, 장애 차별과 자본주의 안에서 다른 소수 집단이 겪는 차별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 미국과 영국 장애 운동의 성장 배경과 한계는 무엇인지, 사회주의를 통해 장애 없는 세계를 쟁취할 수 있는지 등을 다룬다. 번역 글을 읽고 유익한 코멘트를 해 준 김미연 선생(특수교사)에게 감사하다.
로디 슬로라크의‘“손상”의 사회적 근원’은 로디 슬로라크의 위 논문을 (학습장애와 관련해) 보완하는 글이다. 험버는 학습장애의 역사적 뿌리가 19세기 말 화학·전기·내연기관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 분업이 가속화한 데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학습장애가 있다고 낙인 찍힌 사람들이 주류에서 배제되는 것은 그들이 노동시장과 맺는 관계, 즉 평균 착취율 아래로밖에 일하지 못한다는 것과 관련 있다고 말한다.
리 험버의‘자본주의적 소외의 비밀을 풀다’는 마르크스가 쓴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를 서평한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의 주요 사상가들이 쓴 가장 중요한 책들을 소개하는 시리즈의 여섯 번째 편이다. 스탈린주의 전통은 이 책을 오랫동안 찬밥 취급을 했고, 이 책을 새롭게 조명한 서구 신좌파는 정작 마르크스 소외론의 출발점인 유물론적 분석을 내다 버렸는데, 김승주는 이 책의 중요한 가치는 마르크스가 처음으로 ‘소외된 노동’ 개념과 역사유물론의 개요를 제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김승주의2021년 7월 14일
김인식(편집팀을 대표해)